00001 노예와 군주 =========================================================================
왕은 노예가 되는 꿈을 꾸었다.
수십 년을 노예로 살고, 자신의 삶이 당연한 것처럼 여겼다. 꿈을 꾸는 동안 왕은 오로지 노예였고, 자신이 본래 왕이었다는 사실조차 잊었다.
수십 년의 꿈, 하지만 현실에서는 얼마 되지 않는 시간.
꿈에서 깨어난 왕은 보았다.
호화로운 황금의 침실, 무릎을 꿇은 충직한 신하들, 자신의 쾌유를 위해 기도하는 대사제들을.
“폐하, 꿈은 폐하를 현혹시키는 거짓된 저주일 뿐입니다. 부디 이겨내소서.”
왕은 문득 생각했다.
지금 노예가 왕이 되는 꿈을 꾸는 중인가, 아니면 왕이 노예가 되는 꿈을 꾸었던 것인가.
어느 쪽이 꿈이고, 현실인가?
“한서진 씨, 병원에서는 뭐래?”
작업복을 입고 자기 라인에 서자, 옆 라인의 동료가 지나가듯이 물었다.
“결과가 나와 봐야 알 수 있대요.”
“너무 큰 걱정은 하지 마. 다 잘 될 거야. 원래 암이라는 게 초기 오진도 많고 그래. 한서진 씨처럼 젊은 나이에 암은 무슨 암.”
40대의 동료는 걱정 말라는 식으로 말했지만, 한서진은 선뜻 동감할 수가 없었다.
안색이 썩 좋지 않던 의사의 눈빛이 떠올랐다.
「음……. 일단 조직 검사 최종 결과가 나오면 다시 이야기합시다.」
불길한 느낌에 여러 번 캐물었지만, 의사는 최종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는 말로 얼버무렸다.
한서진은 조립라인에서 바쁘게 일하다 말고 가슴팍을 내려다보았다. 의사의 표정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평소보다 더 가슴이 아픈 듯한 느낌이 들었다.
‘정말로 암이면 어쩌지?’
상상만 해도 모든 것이 암담했다.
그의 집은 가난했고, 어렸을 때 부모님은 이혼했다. 그와 여동생, 두 남매는 어머니가 지원받는 기초수급지원금에 의지해 성장했다.
고교를 졸업하자마자 그는 반도체 공장 생산라인에 취직을 했다. 4년 간 열심히 3교대로 일하며 제법 큰돈을 모았다. 남들에게는 별 거 아니겠지만, 그로서는 상상도 못 해볼 만큼 큰돈이었다.
그러나 작년, 어머니는 그가 모은 예금을 전부 인출해서 잠적해 버렸다. 식당에서 만난 남자와 도망을 친 것이다.
‘바보, 그러게 왜 엄마한테 월급을 다 맡겼어. 내가 돈 관리는 직접 하랬잖아.’
눈물로 타박하던 여동생을 생각하면 차라리 미안했다. 돈보다는 어머니가 자식들을 버렸다는 것에 가슴이 저렸다.
어머니는 지금도 전혀 연락이 되지 않는다. 번호마저 없애버리고 완전히 연락을 끊었다. 어디에 사는지, 살아있기는 한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한서진은 공정라인을 노려보듯이 주시했다.
컨베이어벨트를 타고 움직이는 수많은 제품들. 정해진 자리에서 각자가 담당한 공정 작업에 열중인 직원들. 그 중에는 자신도 포함돼 있었다.
근무 시간.
어머니에 대한 원망도, 질병에 대한 고민도, 지금은 잠시 접어둬야 할 때였다.
“그만 일어나. 점심시간 다 끝났어.”
옆에서 툭 치는 손길에 한서진은 눈을 떴다.
“한서진 씨, 요새 틈만 나면 자더라. 그러고 보니 살도 많이 빠졌고. 몸이 어디 안 좋은 거 아니야? 병원에 가보지 그래?”
동료의 걱정에 한서진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자신이 병원에 이미 다녀왔다는 것도, 암 검사를 받았다는 것도 모른다.
“그러게요. 몸이 요즘 너무 피곤합니다. 잠시만 정신 놓았다 하면 잠이 쏟아지고요.”
“그게 다 만성피로야. 비타민 같은 거 좀 챙겨 먹어. 젊을 때일수록 더 몸 챙겨야 하는 거 몰라?”
“감사합니다.”
“이만 들어가자.”
한서진은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내리 쬐이는 햇살에 어쩐지 머리가 울렁거렸다. 꿀맛 같은 낮잠을 잤는데도 개운하기는커녕 두통이 엄습했다.
‘이놈의 두통…….’
한서진은 눈을 찡그렸다.
이 두통은 설마 암과 관련이 없겠지. 뇌종양 검사를 한 건 아니었으니.
점심 교대를 마치고, 한서진은 다시 공정라인에 투입됐다. 정해진 자리에 서서 정해진 업무를 반복적으로 수행했다.
동료 중에는 단순 업무 반복이라며 지루함과 회의감을 느끼는 이도 있었다. 하지만 한서진은 이 일이 좋았다. 가난으로 얼룩진 어린 시절에 비하면, 스스로의 힘으로 일해서 먹고 살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었으니까.
‘검사 결과가 내일이구나.’
별 일 아닐 거야.
한서진은 그렇게 스스로를 달래며, 공장이라는 거대한 톱니바퀴의 부품 역할에 충실했다.
3교대 업무를 마치고, 퇴근 시간이 되었다. 일부 친한 동료들은 술 한 잔 걸친다며 떠났다.
한서진은 그 무리에 섞이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씻기 위해 욕실에 들어섰다.
거울을 보자 몇 달 전에 비해 부쩍 마른 얼굴이 보였다. 그는 표정을 찡그리며 씻고 나왔다.
간단한 저녁을 차렸지만, 입맛이 없었다. 억지로 몇 숟갈을 뜨고 그는 자리에 누웠다.
‘괜찮을 거야. 괜찮을 거야…….’
속으로 되뇌며, 그는 잠을 청했다.
눈을 뜨자, 휘황찬란한 샹들리에가 보였다.
부스스 몸을 일으킨 왕은 눈을 깜빡거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얇은 비단 슬립을 걸치고, 은쟁반에 포도주를 담아 나르던 미인들이 보였다. 여자들은 눈이 마주치기도 전에 급히 왕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여기는 대체…….”
머리가 깨질 듯한 두통이 밀려왔다. 꿈과 현실이 뒤엉켜 혼란스러웠다. 무수한 단어들이 머릿속을 복잡하게 떠돌아다녔다.
대한민국. 레노지안. 한서진. 아서. 노예. 고결한 왕. 꿈. 저주. 그리고 반역자.
한서진은 누구이며, 여기는 어디인가. 나는 누구고, 그곳은 어디…….
“폐하, 깨어나셨군요.”
신하의 목소리에 찬물을 끼얹은 듯 퍼뜩 정신이 들었다.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기억들이 순식간에 제자리를 찾았다.
순간 왕은 깨달았다.
무엇이 꿈이고, 무엇이 현실인지를.
왕은 무릎을 꿇은 대마법사, 충직한 노신하를 차분히 응시하다가 입을 열었다.
“이것으로 세 번째인가……. 이번에는 짐이 얼마나 잠들어 있었소?”
헐벗은 거나 다름없는 구릿빛 피부의 시녀가 옆에서 공손히 대답했다.
“4시간이옵니다, 폐하.”
“아쉽지만 이번에도 실패했소.”
왕은 덤덤히 말을 이었다.
“꿈에서 짐은 아무것도 깨닫지 못했소. 내가 누구인지, 내 이름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모든 게 꿈이라는 것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소.”
“저주의 힘이 매우 강합니다. 꿈을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것은 어렵습니다. 지금으로서는 버티는 것만이 최선입니다.”
꿈에서의 한 달은 현실에서의 한 시간. 꿈에서 그는 왕이 아닌 한서진이라는 가상의 인물. 왕이 거느린 노예보다 초라한 삶을 영위하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존재.
왕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저주라…… 벌써 일 년인가.”
질책으로 받아들였는지 노신하는 급히 허리를 숙였다.
“송구합니다, 폐하. 미천한 소신들의 힘이 미력하여…… 소신들이 가진 모든 것을 걸고, 저주를 폐할 방법을 반드시 찾아낼 것입니다!”
“질책하는 게 아니오.”
왕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갓 잠에서 깨어났을 때 머릿속을 잠식했던 혼란은 이미 씻은 듯이 사라졌다. 왕은 꿈의 모든 것을 선명하게 기억했지만, 더 이상 현실과 혼동하지 않았다.
“카르쉬라이 가문은 어떻게 지내고 있소? 아직도 영지 안에만 갇혀 지내고 있소?”
“폐하.”
노신하는 굳은 얼굴을 들고, 무겁게 말을 올렸다.
“한때는 왕실의 처가였을지 모르나, 지금은 엄연한 반역자의 가문입니다. 일가를 멸하지 않고 영지에 가둬 두는 것만으로도 이미 법도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
“더 이상 마음을 약하게 가지시면 안 됩니다. 카르쉬라이를 멸족으로써 벌하라는 백성들의 탄원이 하늘을 찌르고 있습니다. 부디 결단을 내려주소서.”
왕은 쓴웃음을 지었다.
카르쉬라이 백작가. 왕비를 배출한 명망가로, 한때 많은 백성들의 사랑을 받았던 귀족.
그들은 하루아침 만에 반역의 가문으로 낙인찍혀, 벌써 일 년째 영지에만 갇혀 지내고 있었다.
노신하는 쇳물이 끓듯이 격렬한 음성으로 간언했다.
“감히 폐하께 고대의 저주를 건 반역자들에게, 어찌 자비를 베푸시는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