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2
Side dish 1. Hidden Stage
어느 날, 어머니의 유품 속에서 작은 일기장을 발견한 강지한은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이게…… 다 뭐야?”
* * *
가정의 달 5월.
선선한 바람과 따스한 햇살, 그리고 바깥 향기가 싱그러운 나날들은 발걸음을 자꾸만 집 밖으로 이끌었다.
가정의 달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어딜 가나 가족 단위로 외출을 나온 이들이 많이 보였다.
춘천 명동의 작은 패밀리 레스토랑.
평소에는 피크 타임에도 크게 번잡하지 않은 이곳은 오늘따라 사람들로 북적였다.
유동인구가 많은 명동에서는 어느 정도 기본만 하는 식당이라면 5월의 주말엔 늘 있는 일이었다.
그 레스토랑의 구석 자리, 2인용 테이블엔 용성우와 이리나가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방금 나온 스테이크와 로제파스타, 치킨필라프가 먹음직스러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용성우가 스테이크를 능숙하게 썰어서 이리나의 접시에 놓아주었다.
“먹어봐, 리나야.”
“응? 아…… 응.”
대답을 하고서 스테이크 한 점을 입에 넣는 이리나.
한데 그녀의 표정이 영 어두웠다.
“무슨 고민 있어?”
용성우가 걱정스레 물었다.
천진난만열정청년 용성우에게는 세상을 살아가며 가장 중요한 것이 세 가지 있었다.
하나는 가족, 하나는 일, 마지막 하나는 사랑이었다.
때문에 그는 가족을 소홀히 하지 않고 자신의 일을 열정적으로 해나가는 한편, 이리나에게도 늘 신경을 써주었다.
주말마다 열일 뒤로하고 이리나와의 데이트를 즐기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은 자신의 연인에게 최선을 다 하고 싶었다.
그런 용성우인 만큼 이리나의 울적한 모습이 영 마음에 걸리는 건 당연한 일.
“오빠.”
“응. 말해봐, 리나야.”
“나…… 이대로 괜찮은 걸까?”
이리나의 물음에 용성우는 주변을 슥 살펴봤다.
홀의 테이블을 가득 채운 손님들 대부분이 가족 단위로 온 이들이었다.
그제야 용성우는 이리나가 무얼 말하려 하는 건지 알 수 있었다.
“역시 계속 생각나지?”
“…….”
“많이 그리우면 먼저 연락해 봐.”
이리나가 테이블에 올려둔 자신의 스마트폰을 슬쩍 바라봤다.
“하아.”
그녀의 입에서 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이리나는 5년 전, 부모님의 품에서 나와 춘천으로 내려와 홀로서기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한데 부모님과 좋게 이별을 한 것이 아니었다.
어떤 사건으로 인해 크게 싸우고서 평생 보지 않고 살 각오로 내려왔다.
이후로 5년 간 한 번 연락을 하지 않았다.
부모님에게서도 연락이 없는 건 마찬가지.
그나마 하나 있는 남동생에게는 가끔 연락이 오는데 그것뿐.
이리나는 부모님에 대한 것을 묻지 않았고, 남동생도 굳이 말하지 않았다.
둘 사이에 그것은 암묵적인 룰이 되어 버렸다.
아무튼 작년까지만 해도 이리나는 딸의 생사 여부도 궁금해하지 않는 부모님이 원망스러웠다. 그런데 갈수록 마음 한편이 공허해지며 가족의 따스함이 그리워져만 갔다.
그것이 오늘따라 유독 견디기 힘들었다.
“5년 만에 연락해서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네가 지금 느끼는 감정 그대로를 전하면 되지 않을까.”
“그게…… 나 지금 부모님한테 연락하려고 하는 거, 단순히 그립기 때문만은 아니라서 그래.”
“그럼?”
“오빠 나 어떻게 생각해?”
“응? 그게 무슨 말이야?”
“나 얼마나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냐고.”
“세상 둘도 없을 만큼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어.”
“이 세상에 오빠가 만날 수 있는 여자가 나 하나로 끝나도 후회 없어?”
“응. ……어? 너 지금 그 말 혹시.”
“응. 나 오빠랑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어. 진지하게.”
갑자기 튀어나온 결혼이라는 단어에 용성우가 돌처럼 굳었다. 이리나를 보는 용성우의 가슴이 쿵쾅거리며 뛰었다.
“오빠도 나랑 같은 마음이야?”
“당연하지!”
용성우가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그러고는 스스로 놀라 얼른 자리에 앉았다.
“나, 나도 리나랑 결혼하고 싶어.”
“근데 왜 여태 말을 안 하고?”
“다 갖춘 다음에 몸만 오라고 프러포즈할 참이었지.”
“그게 언젠데?”
“이달 말쯤에 얘기하려고 했어.”
“……어머나. 조금 늦게 얘기할걸. 나 감동 받아도 돼?”
“그럼!”
“하아, 근데 오빠. 난 우리 부모님한테 허락 받고 양가의 축복 속에서 결혼식 올리고 싶어.”
“그렇게 하면 되지. 오늘이라도 부모님께 연락드려. 그리고 같이 뵈러 가자.”
“조금 어려운 게…… 아마 우리 부모님이 오빠 쉽게 받아들이려 하지 않을 거야?”
“왜?”
“내가 전에 말했었지? 우리집 형편이 많이 안 좋았다고.”
“응.”
“그게 부모님이 요식업 사업 하다가 크게 말아먹어서 그렇게 된 거거든.”
“그랬…… 어?”
“그것 때문에 나 어렸을 때부터 늘 하시던 말씀이 있었어. 남편감으로 요식업 계통이나 사업하는 사람은 절대 안 된다고. 회사에서 따박따박 월급 받는 회사원이나 안정적인 공무원 아니면 눈에 흙이 들어가도 허락 안 할 거라 하셨거든.”
용성우의 숨이 턱 하고 막혔다.
결혼을 위해 넘어야 하는 허들의 높이가 갑자기 확 높아졌다.
하지만 열정청년 용성우는 물러서는 법을 몰랐다.
그가 이리나의 손을 꼭 잡고 말했다.
“그래도 만나보자. 직접 만나서 얼굴 보고 말씀 드리기 전에는 모르는 거잖아.”
“난…… 알 것 같은데.”
이리나의 얼굴이 괴롭게 일그러졌다.
용성우가 이리나의 뺨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물었다.
“리나야. 말해봐. 가족이랑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
이리나의 입에서 6년 전, 가족들과 있었던 일련의 사건들이 아프게 흘러나왔다.
그걸 전부 듣고 난 용성우의 눈이 어지럽게 흔들렸다.
두 번 다시 열지 않으려 했던 판도라의 상자를 이리나는 오늘 인생의 동반자로 생각했던 남자에게 말했다.
입을 꼭 닫아버린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용성우는 차마 그런 연인을 위로하지 못했다.
아니, 너무나 거대한 아픔의 무게 앞에 감히 위로할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 * *
강지한의 모든 관심은 요즘 예소린에게 향해 있었다.
그녀는 임신 5개월에 접어들었다.
애견카페 뽀삐의 하루는 직원과 알바들이 잘 끌어나가는 중이었다.
강아지들을 카페까지 태워다주고 데려오는 일은 예경천이 맡았다.
예소린은 가끔씩 매장에 나가 돌아가는 상황을 살피는 게 전부였다.
그 외의 시간은 오로지 태교에 집중했다.
그것은 강지한의 뜻이기도 했다.
밤 10시.
강지한은 지한 정식의 뒷정리를 직원들에게 맡겨 놓고 식당을 나섰다.
원래 마지막까지 식당을 지키는 사람은 강지한이었다.
하지만 예소린의 임신 사실을 알게 된 두 달 전부터는 그 일을 직원들에게 부탁하고 있었다.
물론 일을 더하게 되는 만큼의 보수는 확실히 지급하기로 했다.
가차에 오른 강지한이 시동을 걸고 떠나가려는 찰나였다.
“강 대표오오오오오!”
누군가 갑자기 나타나 강지한의 차 앞을 막아섰다.
헤드라이트에 비친 이는 다름 아닌 하경춘이었다.
“하 도사님?”
놀란 강지한이 창문을 내리고 고개를 쭉 뺐다.
그러자 하경춘이 후다닥 다가와 말했다.
“강 대표. 나 좀 도와줘.”
“하 도사님, 이 시간에 여긴 어쩐 일이세요? 아니…… 걸어오셨어요?”
“정신 나갔어? 이 거리를 걸어오게? 택시 타고 왔지.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나 좀 도와 달라니까.”
숨까지 헐떡이며 말하는 하경춘의 얼굴은 대단히 다급해 보였다.
“왜요? 또 어떤 귀신이 먹고 싶은 음식 찾아달래요?”
“비슷한데…… 이번엔 좀 뭔가 달라요. 그런 간단한 사이즈가 아니라고.”
“일단 제가 집까지 모셔다 드릴 테니 타세요. 가면서 말씀하시죠.”
“후우우. 알았어.”
* * *
하경춘의 집 앞에 강지한의 차가 주차되어 있었다.
차 안에서 강지한은 하경춘이 해준 말을 곱씹어 보았다.
“그러니까…… 정체를 밝힐 수 없는 강한 영혼이 하 도사님을 찾아와서 부탁했다고요?”
“네.”
“그 부탁이라는 게 살아 있는 사람의 정을 느끼게 해달라는 것이고요.”
“맞아요.”
“마지막으로 그 영혼이 저를 찾아가면 실마리가 보일 거라고 했다 이거죠?”
“그렇다니까. 내가…… 여태 만나본 영혼들 중에서 지금 달라붙은 이 영혼의 영력이 가장 어마어마해. 어찌나 살 떨리는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오한이 들고 식욕이 뚝뚝 떨어지는 게…… 이러다 내가 죽겠지 싶어. 강 대표. 제발 이놈의 영혼 소원 좀 들어주고 나 살려줘요. 응?”
“저도 그러고 싶은데 바라는 것이 너무 애매모호하네요. 살아있는 사람의 정을 느끼게 해달라니…….”
강지한은 그게 무얼 뜻하는 건지 고민했다.
이미 하경춘은 살아 있는 사람의 정을 느끼게 해주기 위해서 제사상도 차려보고 사자(死者)의 넋을 위로해 주는 위령제도 지냈다고 했다.
그래도 영혼은 요지부동이었다.
차라리 자신의 몸에 빙의해서 원하는 것을 이루라 말해도 듣지 않았다고 한다.
‘그럼 원하는 게 뭘까.’
고민하는 강지한의 귀로 비명처럼 쏘아지는 하경춘의 음성이 들려왔다.
“가, 강 대표!”
“네?”
“망자(亡者)가 지금 말했어요. 강 대표의…… 어머니 유품을 잘 뒤져 보래요.”
하경춘은 말을 하면서도 미안해서 강지한의 눈치를 살살 살폈다.
“제 어머니의…… 유품을요?”
“아니, 내가 그러라는 게 아니라 망자가…… 그렇게 하라고 하네. 으흐흠!”
강지한의 고개가 살짝 모로 꺾였다.
‘어머니의 유품?’
* * *
집으로 돌아온 강지한은 예소린이 잠든 것을 확인하고 굳게 닫힌 장롱의 맨 오른쪽 문을 열었다.
그 안에는 부모님의 유품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살아생전 가장 즐겨 입던 옷부터 설윤진이 10년을 가지고 다닌 핸드백, 조리도구들, 강민태가 설윤진에게 처음으로 선물 받았던 넥타이, 두 사람이 좋아하던 책, 어린 시절의 추억이 담긴 사진첩, 영정사진, 그리고 설윤진의 일기장까지.
‘여기에 실마리가 있다고?’
강지한은 유품을 하나하나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런 강지한의 목울대가 뜨거워졌다. 이럴까봐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딱 한 번 유품을 만져보고 나서 되도록 꺼내지 않으려 했다.
감성적이 되려는 자신을 추스르며 강지한이 다시 유품들을 살펴나갔다.
그러다 설윤진의 일기장을 집어 들었다.
일기장은 작고 앙증맞은 자물쇠가 달려 있는 제품으로 단단히 잠겨 있었다.
당시 열쇠가 어디 있는지 몰라 일기장을 열어보지는 못했었다.
억지로 열려고 마음 먹으면 충분히 가능했겠지만 그렇게까지 하기는 싫었다.
‘혹시…….’
강지한은 일기장을 따로 빼 놓고 다시 유품을 뒤적였다.
그리고 설윤진의 핸드백에서 작은 열쇠 하나를 발견했다. 사이즈가 일기장의 자물쇠에 딱 이었다.
열쇠를 자물쇠에 넣고 돌리자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잠겨 있던 것이 열렸다.
“이거였구나.”
16년 동안 봉인되어 있던 설윤진의 일기장을 강지한이 펼쳤다.
한데 그때였다.
갑자기 일기장에서 빛 무리가 뿜어져 나오더니 허공에서 뭉쳐져 하나의 문장을 만들었다.
[레벨 업 시스템의 Hidden Stage를 발견했습니다.]
[Hidden Stage가 활성화됩니다.]
“이게…… 다 뭐야?”
강지한이 놀란 눈으로 허공에 나타난 글자를 읽어나갔다.
[Hidden Stage. 설윤진의 일기장]
그것은 한동안 보지 못했던 시스템 메시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