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8
Restaurant 317. 뒤틀린 미소
월요일 아침부터 강지한의 세상은 떠들썩했다.
밤사이 신선숙수와 관련된 기사를 접한 이들의 축하 메시지가 쉼 없이 이어진 것.
지한 정식의 직원들 또한 한마음으로 강지한을 축하해 주었다.
물론 신선숙수가 되어버렸으니 앞으로 지한 푸드는 어찌 되는 것이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섞여 있었다.
거기에 대해 강지한은 우선 말을 아끼고 주방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아 일을 해나갔다.
* * *
이상한 일이었다.
강지한에게 과거의 잘못을 고백하고 난 뒤, 얼굴 볼 면목이 없어서 강지한의 식당엔 얼씬도 안했던 하경춘이었다.
그런데 오늘따라 강지한의 음식이 미치도록 먹고 싶었다.
‘내가 이러면 안 되는데.’
머릿속으로는 계속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지한 정식 건물 앞에 서 있었다.
‘여길 들어가면 안 된다고. 정신 차려, 하경춘!’
스스로를 다그치면서도 하경춘의 본능은 그녀를 식당 안으로 인도하고 말았다.
하경춘이 들어서자 홀에 있던 여직원이 대번에 알아보고서 허리 숙여 인사를 올렸다.
“안녕하세요, 하경춘님. 저희 지한 정식을 찾아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에 하경춘이 놀라 눈을 깜빡였다.
“난 댁을 본 적이 없는데, 댁은 나를 아시우? 혹시 나처럼 신기라도 있으셔?”
하경춘은 지한 정식을 이번에 처음으로 찾은 것이다.
한데 생판 초면인 직원이 본인을 알아보니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리둥절한 하경춘을 보며 여직원이 차근차근 설명을 해주었다.
“강지한 대표님께서 하경춘님께서는 우리 식당을 언제나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얼굴 또한 익히게 된 것이다.
“아니…… 그건 내가 저기, 괜찮다고 했었는데.”
“강지한 대표님의 간곡한 요청이 있었기에 저희로서는 말을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혹시 많이 불편하신가요?”
“미안하고 부담스러워서 그러지요.”
“너른 마음으로 편안하게 받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참.”
평소의 하경춘이었다면 이 대목에서 이미 발을 빼고 돌아갔을 터였다.
그런데 오늘은 어찌 된 일인지 이놈의 몸둥이가 마음대로 따라주지를 않았다.
“방으로 모시겠습니다.”
하경춘은 못 이기는 척하며 직원을 따라 고급스러운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의자에 앉아서 고요한 가운데 은은한 가야금 선율의 음악이 흐르는 방을 두리번거리며 살폈다.
“내가 이런 곳은 머리털 나고 평생 처음이라 괜히 긴장이 되네요.”
“편히 생각하셔도 됩니다. 불편한 것이 있다면 언제든 제게 말씀 주세요.”
“저기…… 우선적으로다가 나는 여기서 뭘 어떻게 주문하는 건지도 잘 모르겠는데…….”
말을 하는 내내 하경춘은 후회가 됐다.
어차피 이럴 거면 굳이 지한 정식으로 오지 말고 지한 분식이나 지한 식당, 지한 만두, 지한 객잔 등등 편안한 곳에 가서 식사를 하면 되었을 것을.
어쩌자고 끝끝내 이런 고급스러운 곳에 걸음을 해서 이 불편을 겪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하경춘이 우물쭈물하자 여직원이 능숙하게 대처했다.
“메뉴는 따로 선택하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강지한 대표님께서 하경춘님께는 늘 최상의 코스로 대접하라 이르셨거든요.”
“그, 그래요?”
“네. 그럼 천천히 식사 대령해 드리겠습니다.”
여직원이 인사를 하고 방을 나섰다.
그러자마자 하경춘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 나왔다.
“휘유. 내가 미쳤지. 어쩌자고 여기를 와, 오기를.”
* * *
하경춘은 인간이라는 동물이 얼마나 간악한지 몸소 체험하고 있었다.
지한 정식에 걸음을 해, 방으로 인도받을 때까지 그녀의 마음은 너무나 불편했다.
그런데 처음에 서빙된 주전부리를 맛보는 순간 불편함은 잊혀졌다.
대신 혀를 가득 채우는 풍부한 맛에만 모든 신경이 집중됐다.
‘세상에나.’
그녀는 이렇게 맛있는 주전부리가 있는지 오늘 처음 알았다.
담아 나온 모양도 너무 예뻐서 눈이 호강하는 기분이었다.
한데 그건 시작에 불과했다.
이후로 이어지는 코스 요리들은 하나하나가 작품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엄청났다.
‘미슐랭 미슐랭 하더니 그게 괜한 게 아니었네.’
혀에 금칠을 한다는 게 이런 느낌이구나 싶었다.
정신없이 음식을 먹다 보니 어느새 마지막 후식까지 싹 비워 버린 이후였다.
코스 하나를 온전히 즐기고서 시간을 확인한 하경춘은 깜짝 놀랐다.
‘두 시간이나 지났다고?’
그녀가 느끼기엔 30분이나 지났을까 싶었다.
그야말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서 미식에 푹 빠져 있었던 것.
식사를 마친 하경춘이 밖으로 나오자 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직원이 물었다.
“식사는 입에 맞으셨어요?”
“말도 말아요. 호강을 했어요.”
“정말 다행이네요. 불편하신 건 없으셨고요?”
“황송할 지경으로 잘해주셔서 딱히 없네요.”
“감사합니다.”
“저, 강지한 대표님 좀 뵙고 싶은데.”
하경춘이 조심스레 말했다.
찾아오지 않았으면 모르되, 일단 찾아온 이상 얼굴은 보고 가는 게 예의일 것 같았다.
“아, 네. 그럼 방에서 기다리시겠어요?”
“아니요. 홀에 있을 테니까 바쁘지 않으시면 뵈었으면 한다고 말 좀 전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여직원은 하경춘과 홀까지 동행한 뒤, 주방으로 향했다.
하경춘이 홀에 놓인 의자에 앉아 강지한을 기다렸다.
5분 정도 지났을까.
맑은 미소를 머금은 강지한이 주방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하 도사님!”
자신을 부르는 음성에 하경춘의 엉덩이가 의자에서 저절로 떼어졌다.
“이게 얼마 만이에요?”
반가워하는 강지한의 얼굴을 하경춘은 똑바로 볼 수가 없었다.
그녀가 괜히 바닥만 쳐다보며 말했다.
“내가 염치없이 이렇게 찾아와서 미안해요, 강 대표.”
“염치없다니요. 언제든 찾아와도 된다고 했잖아요.”
“그래도…… 사람이 양심이 있으면 이러면 안 되는 건데, 이상하게 오늘따라 강 대표의 음식이 땡기는 거야. 그것도 다른 곳은 가기 싫고 꼭 여기 지한 정식에 와서 먹고 싶더라고. 한 번 와본 적도 없으면서 뭘 안다고…….”
“잘하셨어요, 하 도사님.”
“……사람 좋은 강 대표. 정말 잘 먹었어요. 내가 너무 크게 대접받는 기분이었어. 오늘 먹은 건 계산하고 갈게. 그냥 가면 마음이 영 무거울 것 같아.”
“에이, 제가 제 입으로 말한 게 있는데 그러면 안 되죠.”
“아니야. 나 마음 불편해.”
“이러시면 저도 불편해요. 그냥 가세요.”
둘이 옥신각신 실랑이를 하고 있을 때였다.
식당의 정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홀 안으로 들어섰다.
그에 강지한과 하경춘의 시선이 동시에 움직였다.
두 사람의 시야에 들어온 이는 다름 아닌 한돈선이었다.
“대가님, 오셨어요?”
“내가 너무 늦은 건 아닌가 모르겠구나.”
“점심시간 끝나려면 아직 여유 있어요.”
한돈선은 오늘 아침, 강지한에게 식당을 찾아가겠다 연락해 왔다.
이제 경합도 끝났으니 편안한 마음으로 강지한의 음식을 즐겨보고 싶었다.
아울러 앞으로 강지한의 행보에 대해서 대화를 나눌 필요도 있었다.
한돈선은 강지한과 몇 마디 대화를 나누다가 하경춘을 보고서는 사과의 말을 건넸다.
“아, 손님분과 대화 중에 제가 끼어든 것 같군요.”
한돈선의 얼굴을 바라보던 하경춘의 고개가 옆으로 기울어졌다.
“저기…… 우리 어디서 본 적 있지 않아요?”
“그랬던가요?”
한돈선은 이런 상황을 제법 많이 겪는 입장이기에 딱히 놀라지는 않았다.
그는 TV 출연이 나름 잦은 편이다.
해서, TV를 통해 그의 얼굴을 몇 번 접한 이들이 가끔 이렇게 어디서 만난 적 있지 않느냐 착각을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강지한도 그런 경우라 생각하고 하경춘에게 말했다.
“아마 텔레비전에서 보셨을 거예요.”
“강 대표, 우리 집에 텔레비전 없어요. 난 스마트폰으로도 티브이 프로그램은 거의 안 봐요. 분명히 어디서 만난 적이…….”
말을 하던 하경춘의 입이 쩍 벌어졌다.
이어 한돈선을 보던 눈이 좌우로 파르르 흔들렸다.
“다, 당신…….”
하경춘이 벌벌 떨리는 손으로 한돈선을 가리켰다. 그러고는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뻥긋거리더니 헉! 하고 헛숨을 들이켰다.
“하 도사님, 괜찮으세요?”
느닷없는 불안증상을 보이는 하경춘이 강지한은 걱정되어 물었다.
“가, 강 대표. 나 그만 갈게. 오늘 잘 먹었어. 나중에 연락할게요.”
하경춘은 하려던 말을 끝내 내놓지 못하고서 도망치듯 식당을 나섰다.
“왜 저러시나?”
한돈선이 의아해했다.
“글쎄요. 나중에 따로 연락 드려 봐야겠네요.”
* * *
지한 정식의 코스 요리를 맛보고 난 한돈선은 흡족한 미소를 머금었다.
강지한이 배틀 셰프에서 활약을 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자신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었다.
정말 눈부신 발전이 아닐 수 없었다.
“지한아, 이제 몇 년이면 내가 너한테 따라잡히겠구나.”
“아니에요. 아직 한참 멀었습니다.”
“멀기는. 윤진이에게 물려받은 네 요리 재능은 참으로 무서운 것이란다. 그렇지 않고서야 신선정 주방에서 평생을 살아온 한민국을 어찌 이겼겠니.”
생각해 보면 놀라운 일이긴 했다.
요리를 제대로 배우기 시작한 지 이제 햇수로 4년밖에 되지 않은 강지한이 한민국을 눌러 버렸으니.
누가 봐도 그는 사기 캐릭터라고 할 만했다.
“그래. 앞으로는 어쩔 생각이냐.”
신선숙수의 자리를 어찌할 것이냐는 물음이었다.
강지한은 망설임 없이 생각해 두었던 바를 꺼내 놓았다.
“예상하고 계셨을지 모르겠지만 저는 신선정을 책임질 마음이 없습니다.”
그 말에 한돈선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래.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대답이었다. 네게 중요한 것은 신선정이 아니라 부모님의 한을 풀어주는 것이었을 테니.”
“죄송합니다.”
“아니, 그렇게 말할 필요 없다. 나 역시도 윤진이의 억울함을 그냥 두고 볼 수는 없는 입장이었단다. 다만 네가 신선숙수의 자리를 마다해 버리면 앞으로 신선정의 앞날이 어찌 될지 그것이 조금 우려될 뿐이란다.”
“대가님, 저는 이 자리를 포기하려는 게 아닙니다. 저보다 더 어울리는 사람에게 양도하려는 겁니다.”
“신선숙수의 자리라는 건 그리 쉽게 양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란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양도자가 대가님이 된다면 얘기가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방금 뭐라 했느냐?”
“저는 대가님께 신선숙수의 자리를 양도하고 싶습니다.”
“지한아.”
“대가님, 신선숙수는 신선정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며 끌고 나가야 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전 신선정을 단 한순간도 제 것이라 여긴 적이 없습니다. 제 것은 바로 여기 있습니다. 이 건물의 주방이 제가 있어야 할 장소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신선정을 억지로 끌어간다면, 결국 신선정의 역사는 제 대에서 끝날지도 모를 일입니다.”
“…….”
강지한의 말도 틀린 건 없었다.
한돈선은 잠시 입을 닫고 심각하게 고민했다.
뜨거운 차 한 잔을 마실 시간 정도가 지나고 나서야 그는 닫았던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내가 네게 너무 내 욕심만 강요한 것 같구나. 무거운 짐을 억지로 지우려 해서 미안했다, 지한아.”
“제 뜻을…… 들어주시겠습니까?”
한돈선의 고개가 천천히 아래위로 움직였다.
“그래. 알겠다. 내가 어리석었다. 이제 나이가 먹고 정신이 늙으니 의지가 약해졌는지 나도 모르게 신선정의 문제를 네게 넘기려 했구나.”
한돈선이 강지한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이제 내가 지고 가도록 하마. 그동안 고생 많았다. 고맙다, 지한아.”
“제 고집을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대가님.”
강지한이 살짝 고개 숙여 예를 표했다.
찰나의 순간 한돈선의 입가에 뒤틀린 미소가 자리했지만, 이내 사라졌다.
강지한은 그 미소를 미처 못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