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7
Restaurant 306. 지한 정식의 푸짐 저녁상
여름이 다가오는 6월의 끝자락.
구봉산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춘천 사람이라면 구봉산 위에 얼마나 분위기 좋은 식당과 카페가 많은지 모를 수가 없었다.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 혹은 가족끼리 외식을 하기 위해 찾는 장소로도 아주 좋았다.
구봉산에 자리한 요식업체들은 하나같이 규모가 컸다.
아무 카페나 식당에 들어가서 식사를 해도 창밖으로 탁 트인 구봉산의 전경과 넓게 퍼진 춘천 시내가 한눈에 들여다보였다.
전망이 좋으면 분위기가 아름다워진다.
이는 곧 평소엔 큰 의미 없었던 음식에도 의미를 부여하게 만든다.
그리고 의미가 담긴 음식은 다른 날보다 더 맛있게 느껴지게 마련이다.
그런데 의미 같은 걸 굳이 첨가하지 않아도 놀랄 정도로 맛있는 음식을 파는 식당이 구봉산에 있었다.
두 달 전 오픈한 식당인데 입소문이 무섭게 퍼져 이제는 미리 예약을 해놓지 않는 이상 식사를 하기 어려운 곳이 되었다.
평일은 하루나 이틀 전 예약을 하면 어떻게 자리를 구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주말은 적어도 일주일 전에 전화를 해야 겨우 테이블 예약이 가능했다.
식당의 규모가 작은 것도 아니었다.
말했다시피 구봉산에 모여 있는 식당과 카페들의 규모는 상당한 편이다.
이 식당은 70평의 땅덩이를 차지하는 2층짜리 건물을 통째로 사용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매일 같이 테이블은 만석이었다.
예약 없이 찾아왔다가 모든 예약이 다 찼다는 종업원의 말에 혀를 내두르며 돌아가는 손님들도 상당했다.
순식간에 구봉산 핫플레이스로 떠오른 이 식당은 바로 ‘지한 정식’이었다.
* * *
지한 정식의 넓은 주방엔 무려 서른 명의 요리사들이 각자의 파트를 담당하며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홀에서는 주문이 계속해서 밀려들었고, 강지한은 그것을 전달받아 서른의 요리사들을 지휘했다.
“저녁상 둘! 푸짐 저녁상 둘!”
강지한의 목소리가 컸다.
서른 명이 동시에 여러 가지 요리를 조리하고 설거지까지 이루어지다 보니 작게 말해서는 전달이 되지 않기 때문.
“알겠습니다!”
제대로 전달을 받은 요리사들이 일제히 입을 맞춰 대답했다.
지한 정식은 강지한이 운영하는 식당들 중 유일하게 오픈 키친이 아니었다.
애초에 이 건물의 구조가 주방과 홀, 그리고 식사하는 공간이 완전히 독립되어 있었다.
프라이빗한 식사 환경을 위해 모든 공간은 룸으로 만들어진 상황.
해서 그것을 오픈형으로 다시 수리하기에 무리가 있었다.
늘 오픈 키친을 고수해 왔던 강지한이었지만 이런 경험도 필요하겠다 싶었다.
그래서 다른 곳을 더 보지 않고 이 건물을 매입해 지한 정식을 차린 것이다.
지한 정식은 여태 운영해 온 다른 식당보다 가격이 상당히 셌다.
점심상은 1인 5만 원, 푸짐 점심상은 1인 6만 2천 원.
저녁상은 7만 5천 원. 푸짐 저녁상은 9만 원을 호가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이렇게 몰리는 이유는 사용한 재료와 맛의 퀄리티, 양을 생각하면 전혀 손해 보는 것이 아니라는 평가 덕분이었다.
인터넷과 SNS를 통해 온라인상으로 퍼지고 있는 후기 글들이 하나같이 호평 일색이었다.
물론 오프라인에서도 한 번 지한 정식을 이용해 본 이들이 지인들을 데리고 오거나 추천을 해서 걸음하게끔 만드는 경우도 많았다.
어떤 경로를 타고 오든 일단 지한 정식에서 식사를 하고 나면 그들 또한 돈이 아깝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미슐랭 스타를 받은 타 한정식집의 어마어마한 가격과 비교하며 충분히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맛인데 오히려 저렴하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그게 자연스러운 반응이었다.
지한 정식은 강지한이 지금껏 쌓아왔던 요리 실력의 집약체를 선보이고 있는 곳이었으니.
이 한정식당의 대한 소문은 전국으로 빠르게 퍼져 나가 타 지역에 있는 사람들도 춘천에 오면 꼭 들르는 필수 코스가 되었다.
이제는 지한 정식 때문에 춘천에 들르는 이들이 생겨날 정도였다.
외국인의 모습도 심심찮게 보였다.
대부분이 지한 푸드에서 관리하는 강지한의 인튜브 채널 팬들이었다.
강지한은 그 바쁜 와중에도 인튜브 방송만큼은 빼먹지 않고 해왔다.
구독자수는 꾸준히 쌓여 이제 120만을 돌파했다.
먹방 비제이 중에서는 가장 빠른 속도였다.
아무튼 그 여파로 지금도 룸에는 식사를 즐기는 외국인들이 제법 있었다.
강지한의 음식을 그렇게 먹어보길 염원했던 장루이 바로 또한 그런 외국인 중 하나였다.
그는 미모의 한국 여인과 함께 푸짐 저녁상을 주문했다.
그녀의 이름은 홍지니.
홍지니는 현지에서 활동하는 미슐랭가이드 인스펙터로서 함께 지한 정식의 수준을 파악하기 위해, 그리고 통역을 해줄 겸 동행했다.
푸짐 저녁상은 총 9코스가 나온다.
우선 코스에 포함되지 않는 환영 음료로 시원한 오미자차가 서비스되었다.
장루이가 오미자차를 살짝 머금고 음미했다.
시원한 차에서는 참으로 다채로운 맛이 느껴졌다.
오미자라는 이름 자체가 단맛, 신맛, 쓴맛, 짠맛, 매운맛의 다섯 가지 맛이 느껴진다 하여 붙여진 것이다.
“꽤나 인상적인 웰컴드링크네요.”
“한국에서는 흔한 차예요. 그럼에도 이곳만의 특별함을 잘 담아냈어요.”
장루이와 홍지니가 한마디씩 주고받았을 때, 노크를 하고 방에 들어온 여직원이 주전부리를 놓아주었다.
다시마부각, 대추과자, 육포, 어란이 작은 팔레트 같은 접시 위에 한 입 거리씩 띄엄띄엄 놓여 있었는데, 각각의 주전부리 밑에는 파스텔 톤의 초록, 빨강, 파랑, 노랑 소스가 물감처럼 길게 칠해져 있었다.
“플레이팅이 아름답네요.”
장루이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본능적으로 사진부터 찍게 만드는데요?”
홍지니도 기분이 좋았다.
주전부리의 맛은 플레이팅 이상으로 좋았다.
다음에 나온 것은 환영 음식으로 구절판이었다.
그리고 옥수수죽, 멧돼지맥적, 게살냉채, 전복구이, 잡채, 숙성 광어회, 민어만두, 꿩강정의 9가지 전식이 서비스되었다.
전식들을 천천히 맛보는 장루이와 홍지니의 낯빛이 점점 상기되어 가고 있었다.
그들은 모든 음식의 맛과 풍미를 충분히 느꼈고, 음식에 대한 의견과 감상을 길게 나누었다.
이윽고 명품 음식으로 성게알을 곁들인 한우 살치살과 명란비빔국수가 나왔다.
조금 전 먹었던 9가지 전식도 대단했는데 명품 음식은 그보다 한 차원 고급스럽고 풍부한 맛을 자랑했다.
갈수록 업그레이드되는 음식의 수준에 두 사람의 기대치가 계속 높아만 가고 있을 때, 입가심 음식으로 들깨탕과 백김치, 오리엔탈 소스를 곁들인 민들레 샐러드가 나왔다.
달뜬 마음과 여러 가지 맛으로 지친 입을 쉬어가는 코스였다.
입가심 음식인 만큼 요리들의 간은 세지 않았으며 맛도 단순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전의 음식들보다 수준이 떨어진다거나 맛이 없다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투박함과 절제 속에서 느껴지는 한국 고유의 미가 가득 담겨 있었다.
식사를 시작한 지 1시간 30분 정도가 지나가는 시점에 비로소 본식이 나왔다.
첫 번째 본식은 금태찜과 은대구구이 중에서 선택할 수 있었다.
장루이는 금태찜을, 홍지니는 은대구구이를 선택해서 두 사람은 모든 요리를 맛볼 수 있었다.
금태찜은 껍질을 바삭하게 익히고 살은 스팀으로 쪄서 참깨소스를 곁들여 먹는 요리였다.
은대구구이는 은대구 살을 스테이크처럼 구워 특제 간장소스와 함께 즐기는 요리다.
금태쯤도 은대구구이도 전부 흠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만족스러운 맛을 선사해 주었다.
두 번째 본식은 한우 떡갈비, 갈비찜, 채끝 등심 석쇠구이 중에서 선택 가능했다.
장루이는 고심 끝에 한우 떡갈비를 선택했고, 홍지니는 갈비찜을 먹기로 했다.
채끝 등심 석쇠구이는 아무래도 스테이크와 결이 비슷하니 더 한식다운 음식을 장루이에게 선사해 주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본식이 나왔을 때, 두 사람은 스스로의 선택이 기가 막혔다고 생각했다.
정말 맛있었다.
그 어떤 미사여구와 휘황찬란한 묘사와 격정적인 제스처로도 이 맛을 다 표현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맛의 정점에 가깝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지금 우리가 먹는 코스의 가격이 1인당 얼마인 겁니까?”
장루이가 물었다.
홍지니가 빠르게 환율을 계산했다.
“9만 원이니까, 80달러 정도 되겠네요. 근데 아까 가격 보시지 않았나요?”
“그럼 제가 잘못 본 게 아니군요. 믿기지가 않네요. 이런 음식들을 서비스해 놓고 겨우 80달러를 받다니. 식당을 운영하려는 게 아니라 자원봉사를 하는데 목적이 있는 거 아닐까요?”
장루이의 농담에 홍지니가 쿡쿡 웃었다.
한데 그녀도 가격이 대단히 저렴하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다.
서울에 가게 되면 이 정도의 구성으로 충분히 인당 25만 원 이상은 받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두 사람이 대화를 주고받으면서도 열심히 떡갈비와 갈비찜을 먹었다.
두 개의 접시가 깨끗이 비워지자 반상이 서빙되었다.
반상은 전복돌솥밥과 육회비빔밥 중에서 고를 수 있었다.
장루이는 육회비빔밥을 선택했었고, 홍지니가 나머지 하나를 먹기로 했었다.
육회비빔밥의 비주얼은 녹그릇 안에 하얀 쌀밥과 얇게 썰린 싱싱한 한우 고기가 담겨 있는 게 다였다.
그것만 놓고 보면 상당히 부실하게 느껴지는 구성이었다.
일반적으로 육회비빔밥을 주문하면 육회 말고도 갖가지 재료가 풍성하게 들어가기 때문.
한데 지한 정식의 육회비빔밥은 이게 완성형이었다.
여기에 함께 나온 특제 고추장 양념을 적당량 덜고 매일 갓 짜내는 참기름을 곁들여 비비면 된다.
전복돌솥밥은 같이 제공되는 성게알이 듬뿍 들어간 특제 간장 양념을 부어서 비벼 먹는 식이었다.
전복돌솥밥 역시 육회비빔밥처럼 상당히 심플한 비주얼을 자랑했다.
어찌 되었든 두 사람은 열심히 밥을 비벼 각자 한 입씩 맛보았다.
그리고 믿을 수 없는 감칠맛과 진한 풍미의 향연에 돌처럼 굳고 말았다.
왜 두 반상의 밥이 이토록 심플하게 나왔는지 알 것 같았다.
이 상태로 가장 완벽했기 때문이다.
다른 잡다한 재료의 맛이 섞여들 틈이 없었다.
갓 도정한 강화섬 쌀로 지은 밥은 그 자체로도 풍부한 맛을 내포하고 있었다.
거기에 투플러스 한우육회와 특제 고추장소스, 짜낸 지 얼마 안 된 참기름이 들어가 섞이니 맛이 없다면 그게 이상하지 않겠는가.
전복돌솥밥도 이와 같은 원리였다.
한데 놀라운 건 밥뿐만이 아니었다.
함께 나온 나물 반찬과 오징어 젓갈도 심하게 맛이 있었다.
무엇보다 김치가 눈이 돌아갈 만큼 끝내줬다.
“이렇게 환상적인 김치는 처음 먹어 보네요.”
장루이는 감탄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눈길을 잘 주지 않고 있던 무국을 한술 떠먹고는 저도 모르게 눈을 스르르 감았다.
“하아. 이건…… 너무 완벽한데.”
장루이의 반응을 본 홍지니도 된장국을 음미했다.
“아……. 정말 대단하네요, 강지한 셰프.”
이건 반칙이었다.
어쩜 이렇게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음식이 단 하나도 없단 말인가.
그들은 릴레이 시합이라도 하는 것처럼 번갈아 가며 탄성을 뱉었고, 그러는 사이 반상도 깨끗이 비워졌다.
이제 남은 건 후식뿐.
룸을 담당하고 있던 여직원이 첫 번째 디저트가 담긴 접시 두 개를 내어가자 장루이와 홍지니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박수를 터뜨렸다.
“이건 예술 작품이군요? 그렇죠?”
장루이가 여직원에게 물었다.
그녀는 공손한 미소를 지으며 친절히 디저트에 대해 설명했다.
“디저트의 이름은 ‘눈 덮인 숲입’니다. 유기농 밀가루로 만든 다크 초콜릿 쿠키와 아몬드 가루를 섞어 숲속의 흙과 돌을 표현했고, 빵으로 바위와 나무 둥치를 연출했습니다. 옆에 쓰러진 나무 기둥은 수제 생초콜릿이며, 눈사람은 레몬 셔벗입니다. 파우더 가루를 전체적으로 뿌려서 눈에 덮인 숲의 모습을 완성시켰습니다. 천천히 즐기시기 바랍니다.”
직원이 나간 후 홍지니는 장루이에게 들은 것을 그대로 설명해 주었다.
그에 장루이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정말 놀랍군요. 강지한 셰프는 요리뿐만 아니라 예술적인 감각 또한 뛰어난 사람인 것 같아요.”
강지한에 대한 극찬을 아끼지 않은 장루이가 만족스럽게 디저트를 즐겼다.
워낙 플레이팅 연출을 잘해놔서 본인이 거인이 되어 숲을 조금씩 떠먹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첫 번째 후식을 다 먹고 나니 두 번째 후식으로 다과와 메밀차가 제공되었다.
푸짐 저녁상 코스요리를 먹으며 하늘 끝까지 들떠 있던 기분을 메밀차가 다스려 주었다.
그렇게 모든 식사를 만족스럽게 끝낸 장루이는 홍지니와 함께 계산을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그런 그들을 룸의 서빙을 담당했던 직원들과 홀의 직원들이 다가와 정중히 인사하며 배웅해 주었다.
두 사람은 주차장에 있는 홍지니의 차를 타고 지한 정식을 떠났다.
차 안에서 홍지니는 장루이에게 넌지시 물었다.
“어떤 것 같아요? 다음 회의에서 지한 정식이 빛날 수 있을까요?”
미슐랭 스타를 받을 수 있을 것 같냐는 뜻이었다.
그에 장루이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한 번 더 가봐야 알겠는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