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9
Restaurant 298. 저승으로
늦은 밤.
예소린은 강지한의 집에서 그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전 같았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예경천이 두 눈을 시퍼렇게 부릅뜨고 있는데 오밤중 외출이라니.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다.
강지한과 그녀는 결혼을 약속했고 예식장도 예약을 마친 상황.
예경천의 바람대로 2020년 3월에 식을 올리게 됐다.
두 달 후면 두 사람은 부부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예소린은 당당하게 미래의 배우자를 만나겠다며 밤중에도 집을 나설 수 있었다.
물론 예경천이 쿨하게 딸을 보내준 건 아니다.
이런 말, 저런 말로 나가지 않으면 안 되겠느냐 붙잡았지만 예소린은 단호하게 집을 나왔다.
그녀가 이렇게 행동하는 건 단순히 강지한을 보고 싶어서만은 아니었다.
이제 결혼을 하게 되면 자신은 출가외인이 된다.
지금처럼 아빠와 함께 아침을 맞을 수가 없다.
갑작스러운 딸의 부재를 예경천이 잘 견뎌낼 수 있을 리 만무하니 미리 떨어져 지내는 연습을 하려 함이었다.
예소린이 예경천의 저녁을 챙겨주고 강지한의 집에 도착하니 유정미가 열심히 인터넷 방송 중이었다.
그녀는 오전부터 와서 강아지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몇 시간 동안 시청자들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강아지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는 것은 유정미에게 일이 아닌 놀이와 힐링으로 다가왔다.
그러니 몇 시간이 넘도록 방송을 하면서도 지치지 않을 수 있었던 것.
예소린이 도착하자, 유정미는 방송을 종료한 뒤 집으로 돌아갔다.
예소린은 강지한이 오기를 기다리며 구석구석 집안 청소를 하고, 강아지들과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11시가 조금 넘어서 강지한에게 이제 출발한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지한 일식이 있는 강림대 후문에서 사농동 집까지는 15분 정도가 걸린다.
예소린이 대충 시간을 맞춰서 강지한을 마중하러 나왔다.
그런데 가로등 하나 없이 어두운 골목길이 소란스러웠다.
불길한 예감이 든 그녀가 얼른 다가가 보니 강지한이 웬 괴한 셋에게 해코지를 당하고 있는 게 아닌가.
그는 바닥에 넘어져 있었고, 괴한 한 명이 칼을 든 채 다가서다가 무언가에 놀라 멈칫하며 물러섰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강지한에게 다가가려는 찰나,
“지금 뭐하시는 거죠?”
그녀가 크게 목소리를 냈고, 사내의 행동이 멈췄다.
“소린 씨! 오지 마요!”
예소린을 확인한 강지한이 소리쳤다.
지금 이게 어찌 돌아가는 상황인지도 잘 모르겠지만, 위험하다는 것 하나만큼은 확실했다.
혹여라도 예소린이 말려들어 크게 다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예소린은 그런 강지한의 말을 들은 체도 않고 가까이 다가오며 물었다.
“지한 씨, 괜찮아? 어디 다친 거 아니지?”
“나 괜찮아. 괜찮으니까 오지 말라고!”
강지한의 뒤에 서 있던 사내, ‘장현송’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계집년이 왜 튀어나와?’
이런 상황은 계산에 없었다.
강지한을 마주 보고 있던 다른 조선족 두 명이 장현송의 눈치를 살폈다.
일을 진행해야 할지, 그냥 덮어야 할지를 묻는 것이다.
받아먹은 돈이 있는 이상 일은 해야 했다.
그리고 지금이 아니면 다시 강지한을 노리기 힘들어질지도 모른다.
자신이 위험에 노출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으니 조심성이 많아질 게 분명할 테니까.
장현송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한 놈은 여자 입 막고, 한 놈은 손모가지 빨리 끊어라.”
명령을 받은 두 사내가 흩어져서 각각 강지한과 예소린에게 다가갔다.
“아가씨, 예쁜 얼굴에 생채기 나기 싫으면 얌전히 있는 게 좋을 거요.”
“안 돼!”
강지한이 벌떡 일어나 예소린에게 가려 했다.
한데 그때였다.
퍽!
콰당!
“……!”
뭐가 어떻게 된 건지도 보이지 않았다.
예소린에게 다가가던 괴한의 고개가 옆으로 꺾이더니 힘없이 쓰러졌다.
예소린은 주먹을 말아 쥐고 있었다.
괴한은 그녀에게 턱을 얻어맞고 충격으로 뇌가 흔들려 그냥 뻗어 버린 것이다.
갑자기 벌어진 낯선 상황에 강지한의 사고가 정지했다.
그것은 장현송과 또 다른 조선족 사내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멍 때리고 있는 사이 예소린의 발이 빠르게 움직였다.
강지한을 노리던 사내는 순식간에 지척으로 다가온 예소린에게 칼을 휘두르려 했다.
하지만 그녀는 칼을 눈앞에 두고서도 침착하게 대처했다.
쉭!
사내가 칼을 쭉 뻗을 때 몸을 옆으로 틀어 피한 예소린이 놈의 손목을 잡고 위로 꺾었다.
합기도에서 기본적으로 배우는 호신술 중 하나인 손목수였다.
제대로 걸리면 체급 차이가 많이 나는 사람도 가볍게 제압할 수가 있다.
“윽!”
사내가 손목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칼을 떨어뜨렸다.
그러자 예소린이 팔목을 더 꺾으며 아래로 내리눌렀다.
“엇!”
팔목 따라 팔이 내려가고, 팔을 따라 몸이 내려갔다.
허리가 반으로 접힌 사내의 팔을 옆으로 틀어 돌리니 놈의 몸도 휙 돌아 하늘을 본 자세로 드러눕고 말았다.
예소린이 그놈의 인중에 주먹을 내리꽂고서는 발로 모가지를 짓밟았다.
퍽! 콰직!
“끄어…….”
자비 없는 공격에 연달아 얻어맞은 사내가 대자로 뻗었다.
순식간에 예소린의 손에 두 명이 정리됐다.
이제 남은 건 우두머리 장현송 하나.
예소린은 벙 쪄 있던 강지한을 지나쳐서 장현송에게 걸어갔다.
장현송이 그런 예소린을 잔뜩 경계하며 자세를 잡았다.
그의 손에는 어느새 회칼 하나가 들려 있었다.
“아저씨, 그거 내려놔요.”
“니가 내려놓으라고 하면 내가 그래야 하니?”
“말로 할 때 순순히 용서 빌고 경찰서 가는 게 좋을걸요?”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왔구나.”
“그래요. 어차피 말로는 안 될 것 같았어.”
예소린의 몸이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빠르게 앞으로 튀어나갔다.
동시에 장현송의 칼이 작은 호를 그렸다.
다가오는 예소린을 견제하며 목까지 노린 공격이었다.
한데 다가오던 예소린이 갑자기 멈춰 섰다.
그 바람에 날카로운 칼날이 괜한 허공만 갈라놓는 찰나!
쐐액- 뻑!
“큭!”
몸을 한 바퀴 돌린 예소린이 뒤돌려 차기로 장현송의 칼 쥔 손을 때렸다.
체중을 실은 일격에 엄청난 데미지를 입은 장현송이 칼을 떨어뜨렸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가선 예소린이 주먹을 뻗었다.
하지만 장현송은 다른 두 녀석과 다르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쉭!
주먹을 날렵하게 피하고서 안으로 파고들어 예소린의 멱을 틀어쥐었다.
‘잡았다!’
장현송이 예소린을 그대로 들어 메치려 했다.
체급 차이가 어마어마하니 결코 쉽게 빠져나가지는 못할 터.
그러나 예소린은 콧방귀를 뀌고는 자신의 멱을 잡은 녀석의 손을 두 손으로 쥔 채 옆으로 꺾었다.
우드득!
“억!”
장현송의 팔목이 이상한 각도로 꺾였다.
뼈가 완전히 부러져 버린 것.
사람 손을 못 쓰게 만들어 놓고서도 예소린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오히려 지금이 기회라는 듯 장현송의 목울대를 때리고 광대뼈를 후려 찼다.
빠아악!
“끄어…….”
장현송이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서 비틀거렸다.
그에 예소린이 허공으로 살짝 도약해 오른발을 쭉 뻗어 들어 올려 뒤꿈치로 놈의 정수리를 내려쳤다.
뻑!
태권도의 기술, 내려찍기였다.
“끄르륵.”
장현송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졸도했다.
찰나지간 장정 셋을 때려눕힌 예소린이 얼른 강지한에게 다가갔다.
당연히 자신의 안위를 살피러 온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강지한은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지한 씨, 괜찮아?”
“응. 덕분에. 근데…… 내가 방금 뭘 본 거야?”
“음……. 나의 흑역사의 일부. 잊어줘. 그냥 꿈을 꿨다고 생각해 줄래?”
너무 현실성이 없어서 정말로 꿈이 아닌가 싶었다.
얼굴도 모르는 괴한들이 느닷없이 칼을 들고 덮치질 않나, 그놈들을 예소린이 가녀린 몸으로 때려잡지를 않나.
멍한 강지한을 보며 예소린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울 거야. 천천히 하자, 지한 씨. 일단은 이 인간들부터 경찰에 넘겨야 할 것 같은데.”
“그래야지. 후우. 근데 소린 씨야말로 괜찮은 거야?”
“응, 아무렇지도 않아.”
강지한의 시선이 주변에 널브러진 세 남자를 훑었다.
정말이지 경악스럽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흉기까지 들고 있던 사내들을 예소린은 너무나 간단히 제압했다.
마치 어른이 아이들을 상대로 싸우는 것만 같았다.
강지한은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경찰에 신고를 하려 했다.
하지만 이내 생각을 바꿨다.
장현송은 대놓고 강지한의 손목을 망가뜨리겠다고 했다.
‘무엇 때문에?’
손목을 노렸다.
그것은 강지한이 요리사라는 것을 알고 접근했다는 뜻이다.
현시점에서 자신이 손을 쓸 수 없게 됐을 때 가장 이득을 보는 이가 누군지 고민했다.
대답은 바로 나왔다.
‘한씨 가문.’
앞으로 강지한에게 남은 큰 무대는 차기 신선숙수 경합밖에 없었다.
그러니 당장으로서는 한씨 가문의 사람들이 가장 의심됐다.
한데 심증만 있을 뿐, 물증이 없다.
이 사람들을 경찰서에 넘긴다고 해서 사실을 불 것 같지는 않았다.
‘역시 경찰한테는 못 넘기겠다.’
강지한은 일단 기절한 세 사람의 손을 뒤로 돌려 노끈으로 세게 묶었다.
이 과정에서 깨어날 기미가 보이면 예소린이 다시 기절시켰다.
단단히 포박한 세 사람을 예소린과 집 마당으로 옮긴 뒤, 강지한은 어딘가로 전화 한 통을 넣었다.
“어르신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급한 일이 있어 연락드렸어요. 네네.”
누군가와 전화 연결이 되자 강지한은 지금의 사정을 모두 털어놓았다.
“지금 오시겠다고요? 너무 무리하시는 건……. 네, 알겠습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난 강지한이 옆에 서 있는 예소린에게 물었다.
“소린 씨, 언제부터 그렇게 싸움을 잘했어?”
“응? 어렸을 때부터. 그냥 타고났나 봐. 무술을 배운 것도 한몫했지만.”
“난 전혀 몰랐네.”
“그게 좋은 거지. 여태 내가 무력행사할 만큼 나쁜 일이 없었다는 거니까. 오늘로써 깨졌지만. 나 무서워?”
걱정이 한가득 담긴 연인의 얼굴을 보며 강지한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럼?”
“든든해.”
“뭐야. 놀리기나 하고”
“진짜야. 본인 몸은 확실히 지킬 수 있겠구나 생각하니까 든든해. 요즘 세상이 좀 흉흉해야지.”
“그런 의미였다면 받아들일게. 호호.”
그때 기절해 있던 장현송이 눈을 떴다.
그는 자신이 묶여 있다는 걸 인지하자마자 매서운 눈으로 강지한과 예소린을 쏘아봤다.
“지금 실수하는 거야. 이거 풀어라.”
“과연 어느 쪽이 실수를 하는 걸까?”
강지한이 장현송의 시선을 담담하게 넘겨받으며 지지 않고 말했다.
“이 상황 우리 형님이 알면 너희들 다 토막 내서 개밥으로 던져줄 거야.”
“그 말, 잠시 후에도 똑같이 할 수 있는지 두고 볼게.”
두 사람이 떠드는 소리에 장현송의 똘마니 둘도 정신을 차렸다.
그들 또한 사나운 눈을 하고서 짐승처럼 으르렁댔다.
상스러운 욕도 서슴지 않고 내뱉었다.
결국 예소린이 짜증난다며 박스테이프를 찢어 와서 놈들의 입에 붙였다.
그렇게 불편한 시간이 흘러가던 어느 순간,
탕탕.
누군가 닫힌 대문을 두들기며 말했다.
“강 선생님, 저 왔습니다.”
연륜이 많이 묻어나는 음성에 강지한이 바로 대문을 열어주었다.
열린 문 너머에는 두 명의 보디가드를 대동한 사신 진상명이 서 있었다.
그가 마당에 주저앉은 조선족 세 명을 확인하고는 온화하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오늘은 저놈들을 데려가면 될까요?”
저승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