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 하는 식당-297화 (297/330)

# 297

Restaurant 296. 설탕이 매직

신선정의 브레이크 타임.

한남선은 개인 휴게실의 고급 소파에 앉아 쉬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휴게실의 문을 두들겼다.

똑똑.

“들어와.”

한남선은 누구냐 묻지도 않고 들어오라 했다.

그의 개인 휴게실 문을 두들길 수 있는 사람은 장남 한민국과 개인비서 구민호뿐이었다.

문이 열리고 들어선 이는 구민호였다.

그의 손엔 김치 몇 조각이 담긴 쟁반과 젓가락이 들려 있었다.

“구해왔습니다.”

“놔둬.”

구민호가 들고 온 것을 고급스런 목제 테이블 위에 놓아두었다.

한남선이 빛깔 좋은 김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젓가락을 쥐었다.

“이게 지한 김치라고?”

“네. 그중에서도 가장 많은 판매고를 자랑하는 배추김치입니다.”

“곽소향 사장도 한물갔군. 십 년 넘게 지키고 있던 왕좌를 개시한 지 3년도 안된 김치 회사에 넘겨주다니. 쯧쯧.”

곽소향은 소담 김치의 대표였다.

소담 김치는 불과 몇 달 전까지 한국에서 가장 높은 판매고를 자랑하는 회사였다.

그런데 지금은 지한 김치에 밀려 판매실적 2위의 불명예를 안고 가는 중이었다.

“마케팅발인지 진짜 실력인지 한번 보자고.”

한남선이 김치 한 조각을 입에 넣고 눈을 감았다.

그가 천천히 그 맛을 음미했다.

구민호는 과연 자존심 강한 저 한남선이 지한 김치를 어찌 평가할지 궁금했다.

꿀꺽!

“음…….”

김치를 삼킨 한남선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한동안 침묵했다.

그러다 구민호에게 명했다.

“민국이 불러와.”

“알겠습니다.”

구민호가 바로 휴게실을 나섰다.

잠시 후, 노크 소리와 함께 한민국이 휴게실로 들어왔다.

“찾으셨습니까.”

한남선은 눈짓으로 테이블 위의 김치를 가리키며 말했다.

“먹어봐.”

영문을 모른 채 불려온 한민국이었으나 고분고분 시키는 대로 따랐다.

접시 위에 정갈하게 놓인 김치 한 조각을 천천히 맛본 한민국의 표정이 오묘했다.

“어때?”

“맛있습니다.”

“그게 다야?”

“상당히 잘 만든 김치라는 생각이 듭니다.”

“신선정의 김치와 비교하면 어떤 것 같으냐.”

“제가 맛본 김치가 훌륭하긴 하지만 맛과 완성도 면에서 신선정의 김치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얼마나?”

“……네?”

“얼마나 미치지 못하느냔 말이야.”

한민국이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자 한남선이 그를 재촉했다.

“갑자기 벙어리라도 됐어? 어서 얘기해 봐.”

“그렇게 큰 차이가 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신선정의 김치를 위협할 수준은 아닙니다.”

“큰 차이가 아닌데 위협이 되지는 않는다라.”

“아시다시피 맛이라는 건 한 단계 더 발전하기 위해서 무던한 노력과 경험이 필요합니다. 그 두 가지의 조건이 충족되었을 때 어떠한 경지를 넘어서게 되고 비로소 더 나은 맛의 음식을 구현해내는 것이 가능해집니다. 하지만 요리사 개인의 편차에 따라 노력과 경험이 갖추어져도 나아가지 못하고 주저앉는 경우가 있습니다. 맛의 경지가 높아질수록 점점 이런 경우가 많아집니다.”

“그래서 그 김치를 만든 사람도 주저앉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거냐?”

“꼭 그렇다는 건 아닙니다. 요점은 지금 맛본 김치가 신선정의 김치보다 많이 떨어지는 수준이 아니지만 여기에서 더 발전한다는 건…… 인간이 신선의 영역에 발을 들일 정도의 깨달음을 필요로 할 만큼 어렵다는 겁니다.”

“노력과 경험, 거기에 요리사 개인이 타고난 역량도 뒷받침되어야 하면서 깨달음까지 필요하다?”

“그렇습니다.”

“즉 네 말은 크게 경계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구나.”

“네.”

“이 김치가 어디에서 가져온 것인지 아느냐?”

“모릅니다.”

“이건 지한 김치다. 강지한이 만들어 팔고 있는 김치지.”

한남선의 장남의 얼굴을 살폈다.

아들은 별로 놀라지 않고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한남선이 너털웃음을 흘렸다.

그는 한민국의 이런 담대함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언제 어디서나 묵직하게 자기 자리를 지키며 말보단 행동으로 모든 것을 보여준다.

그게 장남 한민국이었다.

“일전에 네가 강지한은 크게 경계할 필요가 없다 했었지.”

“그랬습니다.”

“김치를 먹어본 지금도 그리 생각하느냐?”

“변함없습니다.”

“……그래, 알겠다. 나가봐.”

“쉬세요.”

한민국은 인사를 건네고 휴게실을 나갔다.

한남선이 남은 김치를 보며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다가 피식 웃었다.

“민국아, 네가 아무리 숨기려 해도 내 눈에는 다 보인다.”

한남선은 아들의 마음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승부욕과 투지를 읽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담담하게 있다 나갔지만 이글거리는 눈동자만큼은 감추지 못한 한민국이었다.

그는 지금 강지한에게 호승심을 느끼고 있었다.

해서, 제 아비가 무슨 짓이라도 할까 봐 일부러 그를 과소평가하듯 말을 한 것이다.

“민국이 너는 날 너무 잘 아는 게 문제야.”

한민국은 강지한을 신선정 후계자 경합 무대에서 이기고 싶었다.

하지만 한남선은 더 쉬운 길이 있으면 마다않고 가는 사람이었다.

그가 구민호를 다시 불러들였다.

“민호야, 당장 강지한한테 사람 붙여.”

“감시만 합니까?”

“일단은. 강지한의 동선부터 모조리 파악해 놔. 그리고 가장 적당한 장소에서 적당한 때에 처리하도록 해.”

“알겠습니다.”

대답을 하는 구민호의 입안이 썼다.

그도 사람이다 보니 타인에게 위해를 가하는 일을 작당하는 것이 마냥 편하지는 않았다.

‘그러게 조용히 몸이나 사리며 지낼 것이지.’

구민호가 강지한의 처지를 안타까워했다.

휴게실을 나온 그는 어딘가로 전화를 걸어 짧은 지령을 전달한 뒤, 잠시 생각에 잠겼다.

‘강지한의 사이즈가 생각했던 것보다 컸던 모양이군.’

그렇지 않고서야 한남선이 저토록 경계할 리 없었다.

적신호가 켜져 버린 건 지한 김치 때문이었다.

그 전까지는 강지한의 어떤 음식을 먹어도 흔들림이 없던 그였다.

한데 김치만큼은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기 힘들었던 모양.

‘오늘은 퇴근해서 술이라도 한잔해야겠군.’

나이가 들어서 마음이 약해진 건지 예전처럼 모질지 못한 구민호였다.

이제 이 짓도 슬슬 그만둘 때가 된 것 같았다.

* * *

“강 대표님! 오래간만입니다!”

인경 홈쇼핑의 형민욱 피디는 강지한을 만나자마자 반갑게 악수부터 청했다.

그의 옆에 서 있던 탁영진 쇼호스트도 싱글벙글 웃으며 강지한을 반겼다.

“강 대표님, 얼굴 까먹겠어요. 가끔 놀러도 오시고 그러세요.”

탁영진은 지한 김치를 판매해 완판시켰던 호스트였다.

물론 완판이 된 데에는 탁영진 효과보단 설탕이 효과가 더 컸다.

이향숙이 설탕이 팬카페에 홈쇼핑에서 방송 중인 지한 김치를 구매하시면 S급 설탕이 사진을 보내주겠다는 공약이 제대로 먹혔던 것.

하지만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는 홈쇼핑 측에서는 만년 꼴찌 쇼호스트였던 탁영진을 다시 보기 시작했고 그의 인생이 활짝 펴게 되었다.

한마디로 어찌 보면 설탕이가 탁영진의 은인인 것이다.

그 은인이 강지한의 옆에 서 있었다.

“얘가 설탕이죠? 안녕~ 설탕아. 너 진짜 예쁘게 생겼다. 화면에서 보던 것보다 실물이 훨씬 낫네.”

설탕이의 실물에 깜짝 놀란 탁영진이 감탄했다.

형민욱 피디 또한 설탕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가 평생을 살아오며 봐왔던 강아지 중 단연 최고의 미견(美犬)이었다.

얼마나 예쁘게 생겼는지 후광이 비추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방송 활동에 잔뼈가 굵은 형민욱이다.

방송가에 미인이 좀 많은가?

이제는 어지간한 미인을 봐도 심박수는 일말의 동요 없이 평안함을 유지하곤 했다.

그런데.

두근. 두근. 두근!

설탕이를 보고 있노라니 심장이 미친 듯 나대기 시작했다.

탁영진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은 설탕이가 풍기는 아름다운 아우라에 휩쓸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강 대표님.”

형민욱이 은근한 음성으로 강지한을 불렀다.

“네?”

“촉이 왔습니다. 설탕이가 연기만 잘해주면 오늘 강아지 사료 무조건 완판입니다.”

“그랬으면 좋겠네요.”

“장담합니다.”

그때 이중견이 인경 홈쇼핑 촬영세트장에 도착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다 와서 차가 밀리는 바람에…….”

이중견이 허리를 굽신거리며 관계자들에게 사과의 말을 건넸다.

“자~ 그럼 준비합시다.”

중역들이 모였으니 형민욱은 본격적으로 리허설에 돌입했다.

이미 세트장은 전부 꾸며져 있는 상황.

어떻게 방송을 진행할 것인지에 대해서도 이틀 전 미리 대본을 주고 전화상으로 설명을 마친 후였다.

설탕이만 뜻대로 움직여 준다면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사실 형민욱은 강아지가 생방송에 나온다는 발상에 처음에는 무조건 안 된다며 고개를 저었었다.

생방송의 특성상 강아지가 연기를 잘못해 주면 무조건 망한다.

예를 들어 강아지들이 환장하는 사료라고 내놓았는데 막상 연기를 해야 하는 강아지가 긴장해서 먹지 못하면 끝나 버린 게임이다.

거기까지만 하면 다행인데 실수로 대소변이라도 봐버리면 자신은 양복 입고 시말서를 써야 했다.

그랬던 그의 마음이 변한 건 김다윗 감독의 전화 한 통 때문이었다.

김다윗은 설탕이와 두 번이나 씨에프를 찍은 경험이 있었다.

그는 형민욱과도 친분이 깊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던 이중견이 김다윗을 찾아가 형민욱에게 전화 한 통 넣어달라 부탁했다.

김다윗은 자신이 직접 겪어본 설탕이의 영특함에 대해 입에 침이 마르도록 얘기해 주었다.

절대로 네가 생각하는 사고는 나지 않을 것이며, 오히려 홈쇼핑 계의 전설이 하나 쓰여질 테니 기회를 놓치지 말라 부추겼다.

그에 형민욱은 용단을 내렸다.

사상 최초 홈쇼핑 방송의 주인공으로 강아지를 기용해 버린 것.

그리고 지금, 리허설을 보고 있는 형민욱은 어마어마한 감동에 가슴이 복받쳐 올랐다.

설탕이의 연기는 그야말로 완벽했다.

형민욱이 지시하는 건 물론이고 지시하지 않은 것까지 알아서 척척 해나갔다.

형민욱은 지금 자신이 강아지랑 소통하는 건지, 노련한 베테랑 연기자랑 대화하는 건지 헷갈릴 정도였다.

리허설이 무사히 끝난 후, 본방송이 시작됐다.

“설탕아, 부탁한다.”

이중견이 기도하듯 두 손을 모으고서 낮게 읊조렸다.

카메라에 불이 켜지자 탁영진이 능숙하게 시작 멘트를 날렸다.

“네~ 안녕하세요, 시청자 여러분. 완판의 재간둥이 탁영진입니다. 오늘 제가 가져온 상품, 아마 상상도 못 하셨을 겁니다. 바로 도그 푸드의 신제품! 강아지 사료 되겠는데요…….”

탁영진이 열심히 입을 털고 있을 때 설탕이는 그의 옆에 서서 카메라와 지그시 아이컨택을 하는 중이었다.

그런 둘의 모습이 전파를 타고 각 가정의 브라운관으로 송출되고 있었다.

그에 텔레비전을 시청하던 사람들이 난리가 났다.

이는 시청자게시판에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글들로 알 수 있었다.

no. 10267 꺄악! 홈쇼핑 방송에 설탕이가 나오다니!

no. 10268 지금 우리 갓설탕이 나오는 거 실화입니까?

no. 10269 어머, 강아지 너무 귀여워요. 쟤 누구예요?

no. 10270 생방송에 강아지가 나와서 처음엔 어이없었는데 지금은 쇼호스트가 눈에 안 들어와요. 강아지만 보고 있네요. 넘 귀여워요.

스텝 중 한 명이 형민욱에게 스마트폰을 들이대며 이 상황을 전해주었다.

액정을 잠시 훑어본 형민욱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이게 꿈이냐 생시냐.’

그가 게시판을 새로 고침 했다.

그러자 새로운 글 세 개가 더 나타났다.

시청자들이 이토록 열광적인 반응을 보인 적은 인경 홈쇼핑 창업 이후 딱 한 번밖에 없었다.

바로 아이돌이 나왔을 때였다.

설탕이의 인기가 지금 그 아이돌과 맞먹었다.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시청자들이 채널을 고정시키 게 만드는 마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러다 본격적으로 설탕이의 먹방이 시작되자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

“피디님… 지금…….”

옆에 있던 스텝이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말을 더듬거렸다.

그에 한창 설탕이에게 집중하고 있던 형민욱이 날카롭게 물었다.

“아, 뭐? 가장 중요한 타이밍인데 왜 그래?”

“시, 시청률이.”

“시청률? 왜?”

“사…… 삼 퍼센트가 넘었습니다.”

“……!”

형민욱은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그가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소리 없이 환호했다.

한데 희소식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 막…… 제품 완판됐어요.”

방송 시작 12분 만에 준비해 두었던 사료들이 전부 완판되고 말았다.

말도 안 되는 설탕이 매직에 형민욱이 파이팅 자세를 취하고서 펄쩍펄쩍 뛰었다.

순간 머릿속에 김다윗 감독의 충고가 떠올랐다.

‘홈쇼핑 계의 전설이 하나 쓰여질 테니 기회를 놓치지 마, 이 친구야.’

그는 내일이라도 당장 김다윗에게 크게 한 턱 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형민욱은 벅차오르는 심정을 도저히 이기지 못하고서 옆에서 설탕이를 지켜보던 강지한의 손을 덥썩 잡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조아리며 말했다.

“강 대표님, 대표님이 정말 제 은인입니다.”

그런 형민욱에게 강지한이 미소 지으며 화답했다.

“그 말 그대로 설탕이에게 전해줄게요.”

설탕이가 카메라를 지긋이 바라보니 시청률이 오르고.

설탕이가 사료를 먹자 12분 만에 제품이 완판되었으니.

이것이 바로 설탕이 매직이라 하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