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4
Restaurant 283. 퀘스트의 방향
지한 푸드의 식당들을 찾는 외국인들이 점점 늘어만 갔다.
세계적인 탑배우 데이비드 캐머런의 홍보와 강지한의 인튜브 라이브 방송 덕을 톡톡히 본 것.
이제 지한 푸드의 모든 요식업 식당들은 춘천의 명물이 되었다.
춘천에 들른다면 반드시 지한 푸드의 모든 식당들을 방문해야 한다는 말이 돌 정도였다.
심지어는 어떤 순서로 식당들을 방문하면 좋은지, 코스까지 짜서 자신의 SNS나 커뮤니티 사이트에 업로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경주에 유적지 관람 코스가 있다면 춘천에는 지한 푸드의 식도락 코스가 생겨났다.
이러한 사실을 이제 막 한국행 비행기에 오른 에이사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우선 춘천에 도착하자마자 지한 분식부터 들를 예정이었다.
지한 푸드의 시초가 되어준 지한 분식은 여러모로 의미가 있는 장소였다.
그래서 지한 푸드의 다른 전문식당보다 음식의 맛이 살짝 떨어지는 데도 사람들이 바글바글했다.
물론 맛의 차이는 가격의 차이로도 이어졌다.
지한 분식은 그만큼 전문식당들에 비해 현저히 저렴한 가격으로 음식을 팔았다.
때문에 관광객들 외에 춘천에 사는 청소년들과 주머니 가벼운 사회초년생들, 노년의 어르신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다.
사실 맛이 떨어진다는 것도 다른 지한 푸드 계열의 식당에 비할 때 그렇다는 것이다.
일반 분식집과 비교해 보면 말도 안 되는 퀄리티를 자랑했다.
“빨리 한국에 도착했으면 좋겠네요.”
비행기에 탄 에이사가 창밖의 구름을 바라보며 말했다.
앤드류 감독이 피식 웃었다.
“이제 비행기 떴으니 도착하려면 한참이야. 스테이크에 와인 한잔 하고 잠이나 푹 자둬.”
두 사람은 퍼스트클래스를 이용하고 있었다.
게다가 이용하는 항공사는 미국이 아닌 한국 항공사 한에어였다.
본래 앤드류는 자국의 항공사를 이용하려 했다.
그런데 에이사가 무조건 한에어를 타고 가야 한다고 우겼다.
강지한으로 인해 한국의 식문화에 푹 빠져든 에이사는 한에어의 기내식이 그렇게 판타스틱하다고 소문이 난 것도 알고 있었다.
특히 퍼스트클래스는 어지간한 레스토랑에 뒤처지지 않는 음식을 서비스한다는 정보까지 입수했다.
이러한 얘기를 앤드류에게 들려주자 그는 망설임 없이 퍼스트클래스를 택했다.
에이사도 이번 영화의 주연을 맡으면서 어마어마한 돈을 받은 터라 퍼스트클래스를 끊는 데 무리가 없었다.
에이사는 그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접해보는 퍼스트클래스의 쾌적함을 만끽하며 즐거워했다.
“정말 넓고 좋네요.”
“그렇지. 이래서 다들 돈이 좋다고 하는 거야.”
“맞아요. 돈이 많아서 나쁠 건 없는 것 같아요.”
“하지만 그 돈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괴로워질 수도 있는 법이지.”
“그러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죠?”
“돈이라는 수단을 즐기기만 하면 돼. 집착하지 말고.”
“어려운 얘기네요.”
“몇 해 더 나이를 먹으면 내 말뜻을 이해하게 될 거야. 그나저나 기내식이 정말 기대되는군.”
“저도요. 그거 알아요? 한에어의 기내식을 기획한 셰프가 누구인지 항공사 측에서는 일급비밀에 부치고 있대요.”
“다른 항공사에 셰프를 빼앗기기 싫은 모양이야.”
“그렇겠죠. 한국에서 한에어의 기내식은 독보적이라고 할 정도로 좋은 평가를 받고 있으니까요.”
“그러려면 항공사 측만 아니라 셰프 또한 협조를 해줘야 할 텐데.”
“여태 셰프의 정체가 드러나지 않은 걸 보면 입이 무거운 편인가 보죠.”
“아니면 다른 것으로 입을 막았거나.”
“이를테면?”
“돈.”
앤드류가 엄지와 검지를 비비며 익살스런 표정을 지었다.
에이사는 이를 보며 키득거렸다.
비행기가 안정된 고도에 들어서고 얼마 지나지 않아 드디어 기내식이 서비스되었다.
에이사는 한식 코스를 주문했고, 앤드류는 양식 코스를 주문했다.
양식 코스에는 에피타이저로 트러플 오일을 곁들인 채끝살 버섯 말이와 캐비어, 그리고 테린 한 조각이 서비스되었다.
테린은 고기를 다져 익혀 네모난 모양으로 차갑게 굳힌 뒤 잘라 먹는 프랑스식 편육이었다.
이미 비싸다는 레스토랑을 제법 다니며 입이 고급스러워진 앤드류는 음식의 재료 자체에는 큰 감흥이 없었다.
솜씨가 좋은 요리사들은 값싼 재료로도 최고의 맛을 끌어낼 수 있었다.
앤드류는 채끝살 버섯말이부터 맛보았다.
“음.”
음식을 먹는 앤드류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입에 그린듯한 미소가 자리했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그는 늘 저도 모르게 미소부터 짓곤 했다.
“대단한데.”
앤드류가 진심으로 감탄했다.
여태 그가 이용했던 그 어떤 항공사에서도 이 정도로 맛있는 에피타이저는 먹어본 적이 없었다.
크게 특별하지 않은 요리에서 이런 맛을 끌어냈다는 것이 더 좋았다.
과하지 않으면서 뻔하지도 않은 완벽한 밸런스의 맛이 그에게 만족감을 주었다.
앤드류의 옆에서는 에이사가 전채 요리로 나온 도미완자꼬치와 호박타락죽, 그리고 편육을 깔끔하게 먹어치웠다.
에이사는 상당히 놀란 얼굴이 되어 앤드류에게 물었다.
“퍼스트클래스의 기내식은 다 이런가요?”
그는 퍼스트클래스를 처음 이용하는지라 다른 항공사와의 비교가 불가했다.
앤드류는 고개를 저었다.
“이 항공사가 유난히 특별하지,”
“감독님이 이용했던 다른 항공사들과 비교했을 때 어때요?”
“몇 단계 위야. 기내식의 수준이 아니야.”
그는 기내식이 어떤 식으로 공정되어 서비스되는지 알고 있었다.
케이터링 업체에서 만든 것을 데워서 내오는 음식이 기내식이다.
한데 그것만으로 이런 맛을 낸다는 게 상식적으로 말이 되지 않았다.
이어 두 사람의 앞에는 각자의 코스 요리들이 차례차례 서비스되었다.
모든 음식을 맛본 두 사람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는 자신이 먹었던 음식 하나하나를 되새겨 볼 뿐이었다.
한참 후에서야 상념에서 깨어난 앤드류가 입을 열었다.
“에이사. 내가 다음 작품으로 뭘 생각하는지 알고 있지?”
“설탕이 온다 리메이크.”
“맞아. 그래서 말인데 주연 중 악역 캐릭터의 설정이 제법 젊은 사람이더군. 에이사가 맡아주면 괜찮을 것 같은데. 다양한 연기의 스펙트럼을 대중들에게 보여주는 좋은 기회도 될 것 같고. 첨언하자면 설탕이 온다의 악역은 상당히 매력적이지. 영화를 볼 때는 그 악랄함에 부들부들 떨게 되지만 보고 나서는 강아지 다음으로 악역이 가장 먼저 떠오를 만큼.”
그 말대로였다.
실제로 설탕이 온다가 흥행 대박을 친 이후 악역을 맡았던 이정준은 탑스타 반열에 올라서게 됐다.
그 전까지는 나름 인지도만 있을 뿐, 탑스타와는 거리가 먼 배우였다.
그런데 매력적인 캐릭터를 제대로 소화해 내면서 대중들의 엄청난 사랑을 받게 되었고 이제는 영화와 드라마 판에서 주연 캐릭터 제안이 홍수처럼 밀려드는 상황이었다.
설탕이 온다 촬영 현장에서 설탕이를 은근히 질투했던 찌질한 이정준은 이제 없었다.
아무튼 에이사는 앤드류를 철썩같이 믿고 있었다.
그가 매력적인 캐릭터라고 말을 하면 그게 맞는 것이다.
중요한 포인트는 앤드류가 먼저 다음 작품의 주연을 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그에게 제안했다는 것이다.
얼떨떨해하는 에이사에게 앤드류가 재차 물었다.
“내 다음 작품에서도 주연으로서 함께해 보겠나?”
“제가 그런 자격이 됩니까?”
“방금 생겼지.”
“어째서요?”
“내게 한에어를 추천해줬으니까. 난 돈도 명예도 충분히 얻었으니 크게 필요치 않아. 그러니 로비를 하려면 이런 식으로 해야지.”
농을 던진 앤드류가 씩 웃었다.
에이사의 가슴이 터질 듯이 뛰었다.
그가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할게요.”
“굿.”
그것으로 끝이었다.
앤드류는 이후로 차기작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그저 시시콜콜한 농담 따먹기나 늘어놓을 뿐이었다.
하지만 앤드류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는 에이사는 자신이 차기작 주연으로 틀림없이 확정되었음을 자신했다.
‘한에어의 기내식을 기획한 셰프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고맙다고 해야겠네요.’
강지한의 기내식이 앤드류를 또 한 번 유명 영화감독 작품의 주연으로 올려주었다.
* * *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강지한은 퀘스트창을 열었다.
[퀘스트-보름 내에 정직원 한 명을 해고하세요.]
[남은 시간: 5일]
[클리어 보상: 영어 마스터 패치권]
이제 제한 시간은 5일이 남았다.
오늘 밤이 지나가면 4일.
그 안에 윤민아가 배우의 길에 집중하고 싶다는 뜻을 전해온다면 해고시킬 것이고, 계속해서 레스토랑에 남으려 한다면 그 또한 상관없었다.
어떤 선택을 내리든 강지한은 흔쾌히 받아줄 생각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와중이었다.
지이이잉-
기막힌 타이밍에 윤민아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응, 민아야.”
-대표님, 저 마음 정했어요.
“그래. 어떻게 하기로 했어?”
-그 전에 제 이야기 조금만 해도 될까요?
“얼마든지.”
윤민아는 자신의 결정에 대한 얘기를 뒤로 밀었다.
어찌해서 이러한 결정을 내린 것인지를 먼저 말하고 싶었던 모양.
-제가 자존심이 조금 세요. 아시죠?
“잘 알지.”
-네. 그래서 언니의 후광이 조금이라도 비추어지는 것 같으면 그 길은 아예 쳐다도 보려 하지 않았고요. 이번에도 그러려고 했어요. 그런데 며칠 전, 언니가 제 자취방에 찾아왔어요.
강지한은 슬슬 윤민아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감이 잡혔다.
그는 그녀의 이야기를 끊지 않고 묵묵히 들어주었다.
-언니가 말하길 저더러 ‘다른 사람들 기만하지 말라’고 하더라고요. 그 말을 듣자마자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 들었어요. 생각해 보면 그래요. 연극을 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기획사나 엔터테인먼트에서 명함 한 장 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저는 그토록 많은 명함을 받아놓고서도 온전히 내 힘으로 나아가겠다고 무시해 왔어요. 내가 무시했던 그 수많은 명함들이 누군가에겐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일 수도 있는 건데 말이에요.
이야기를 들으며 강지한은 역시 윤선아 답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생긴 것만큼 하는 행동이나 내뱉는 말도 참 시원시원한 여인이었다.
-언니가 저더러 멍청하고 고집스럽다고 했어요. 네 신념을 지키려면 그딴 덜떨어진 방법 같은 건 집어치우고 빨리 잘되기나 하래요. 그래서 돈 많이 벌어 기획사를 직접 차린 다음에 지금의 너처럼 재능이 있지만 빛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직접 동아줄을 건네주라더라고요.
관점에 따라 달라지는 얘기였다.
그러나 강지한은 윤선아의 말이 더욱 합리적으로 와닿았다.
이 세상은 공평하게 나아가기엔 출발선 자체가 다른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그게 맞는 것 같아요. 난 그저 내 신념이 대단하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쌩쇼를 하고 있던 게 아니었나.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을 기만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이제 제가 가고 싶은 길을 가려고요. 그런데 더 좋은 길이 있으니 제 발로 나가겠다고 말씀드리는 게 영 개운치가 않아요.
“무슨 말인지 알겠다.”
윤민아의 얘기를 전부 듣고 난 강지한이 비로소 입을 열었다.
“네 마음이 조금 덜 무거워질 수 있도록 내가 직접 해고시켜 달라 이거지?”
-네, 죄송해요.
“뭐가 죄송해. 애초에 너랑 서울에서 밥 먹을 때 나갈 마음 생기면 내가 해고시키겠다고 못 박았는데. 어려울 것도 없지. 나는 지한 레스토랑의 홀직원 윤민아를 아주 기쁜 마음으로 해고시킬 거야. 새 직원 구해질 때까지만 일하고 그만둬.”
-사실, 저 대신 일할 사람도 알아봐 놨어요.
“벌써?”
-네, 최대한 민폐 끼치지 않으려고 홀 알바 경력이 제법 되는 친구한테 부탁했어요.
“잘했어. 그리고 민아야, 이제 조금은 자기중심적으로 살아.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건 타인이 아니라 네 자신이야. 나도 요즘 그걸 절실하게 느끼고 있어. 아마 네가 선아 씨의 후광을 두려워하는 건, 주변에서 들려올 말들이 무서워서 그런 것일 수도 있어. 언니 덕분에 떴다. 언니 덕분에 쉬운 길이 열렸다. 그런 말은 비수처럼 가슴에 꽂힐 테니, 그걸 피하려고 더 고집을 부렸을지도 모를 일이지. 앞으로는 신경 쓰지 말고 너만 생각하면서 살아. 어깨에 힘 좀 빼도 돼. 알았지?”
스마트폰 너머에서 아무런 대답이 들려오지 않고 정적만이 가득했다.
‘울고 있구나.’
그걸 눈치챈 강지한이 마무리 인사를 건넸다.
“그럼 그렇게 알고 여태까지 고생해 줘서 고마웠다, 민아야. 앞으로도 어디에 있든 잘해낼 거라고 믿을게.”
-……감사했습니다, 대표님. 대표님이 저한테 해주신 것들 평생 잊지 않을게요. 꼭 은혜 갚을게요.
윤민아의 꽉 눌린 음성이 푹 젖어 있었다.
“그래. 근한이한테는 내가 상황 전달할 테니까 5분 정도 있다가 전화 한 통 넣어줘. 마지막 인사는 해야지.”
-내일 직접 가서 인사드릴게요.
“알았어. 좋은 밤 되렴.”
-또 연락 드릴게요, 대표님. 감사했어요, 정말. 애정해요.
윤민아와의 전화가 끝난 뒤 강지한은 퀘스트 창을 띄웠다.
“설마 이렇게 퀘스트가 해결될 줄은……. 어?”
그런데 퀘스트창은 변한 것이 없었다.
여전히 정직원 한 명을 해고하라는 내용이 고지되어 있는 상황.
‘뭐지? 아……. 혹시 이건 일방적 해고라기보다는 자의적으로 나가는 그림에 가까워서 인정되지 않는 건가?’
그럴 수도 있었다.
한데 가만히 고심하던 강지한의 뇌리에 불현듯 스치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잠깐만. 이게 나와 지한 푸드에 도움이 되는 일인 건가?’
레벨 업 시스템은 여태 강지한에게 도움이 될 퀘스트만을 제시해 왔다.
그런데 이번 퀘스트가 이렇게 클리어된다면 그것은 강지한이 아니라 윤민아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었다.
오히려 지한 레스토랑의 입장에서는 손해였다.
강지한은 애초부터 자신이 방향을 잘못 잡았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그럼 대체…… 누굴 해고시켜야 한다는 거야?’
그때였다.
강지한의 앞에 메시지 한 줄이 나타났다.
이를 본 강지한의 입이 놀란 듯 살짝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