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3
Restaurant 282. Sugar
지한 푸드의 모든 식당들은 전부 춘천에 있다.
딱 한군데, 지한 레스토랑만 빼고.
지한 레스토랑은 도근한의 건물에서 시작하는 바람에 서울에 위치해 있었다.
강지한이 마지막으로 서울에 나갔다 왔던 것이 한 달 전.
한동안 지한 객잔과 개인 라이브 방송 및 설탕이 새끼들 육아를 담당하느라 바빠 타지에 자주 나갈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지한 레스토랑에는 살짝 소홀했던 것이 사실이다.
강지한은 도근한의 전화를 받았다.
“어, 근한아.”
-바쁘냐.
“아니야, 통화 괜찮아.”
말을 하며 손목시계를 확인해 보니 오후 세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지한 레스토랑은 브레이크 타임이었다.
쉬는 시간이라고 하지만, 식사를 하고 저녁 재료 준비를 하다 보면 제대로 쉴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
“너야말로 바쁠 텐데 무슨 일이야.”
도근한과는 드문드문 사소한 이야기나 식당 관련 얘기들을 하며 연락을 주고 받아왔다.
한데 보통 하루 업무가 끝난 늦은 밤에나 연락이 왔었다.
브레이크 타임에 전화가 온 건 처음이었다.
-너 서울 언제쯤 올 수 있냐.
“내일이라도 갈 수는 있는데. 무슨 일 있어?”
-일이라고 하면 일이고……. 아니라고 하면 아닐 수도 있고.
스마트폰 너머에서 들려오는 잡음이 갑자기 사라졌다.
도근한이 개인 사무실에 들어온 것 같았다.
그제야 그는 시원하게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딴 게 아니고 민아 때문에 그래.
“윤민아?”
-응.
윤민아는 지한 레스토랑의 홀에서 일하고 있는 여인으로 인기 배우 윤선아의 동생이었다.
“민아가 왜?”
-일을 그만두게 해야 할 것 같아서.
그 말을 듣는 순간 강지한의 머릿속에 퀘스트 내용이 번쩍였다.
[퀘스트-보름 내에 정직원 한 명을 해고하세요.]
강지한이 아는 윤민아는 누구보다 일을 열심히 하는 성실한 여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그녀를 내보내려 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갑자기?”
-갑자기가 아니라 이런 마음 먹은 지는 좀 됐어.
“설마 민아가 뭐 실수라도 했어?”
-안하지, 그런 거. 너무 잘하지. 민아 같은 직원 어디 가서 구하기 힘들지.
“근데 뭐가 문제야.”
-너 민아 꿈이 뭔지 알지?
“응.”
강지한은 윤민아에게 그녀의 꿈에 대해서 들은 기억이 있었다.
그녀는 언젠가 언니처럼 유명한 배우가 되고 싶어 했다.
지금은 대학로 극단에서 연극배우로 활약하는 중이었다.
아직 이렇다 할 작품에 서지는 못 했지만 점점 연기의 스펙트럼을 넓혀가며 착실히 성장해 나가고 있었다.
물론 극단생활을 하다 보면 늘 금전적으로 궁핍하기에 지금 지한 레스토랑에서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잘나가는 친언니의 지원을 받으면 이런 일은 하지 않아도 될 텐데, 윤민아는 최대한 스스로 일어서고 싶어 했다.
-민아가 지금 극단생활 하면서 일하는 게 훗날 유명 배우 되려고 그러는 거잖아.
“그렇지.”
-근데 그러려면 극단에서만 뛰어서는 힘들고 브라운관이나 스크린에 얼굴을 비추어야 좋지 않을까 싶었거든, 나는.
갈수록 영상매체로 인한 대중과의 소통이 광활해지고 있는 현실이다.
강지한 역시 인튜브 라이브로 사람들과 매일 소통하고 있었다.
그 덕분에 지한 푸드의 총매출도 무섭게 상승하는 중이었다.
때문에 도근한의 의견에 충분히 동의했다.
“아무래도 그렇겠지.”
-다행스럽게도 민아가 요새 조금 유명해졌거든. 일전에 재스민 레스토랑 사건도 그렇고, 그 바람에 윤선아가 들고일어나서는 자기 친동생이라 밝힌 것도 있어서 나름 많이 알아보는 것 같더라고.
“그래? 잘됐네.”
-잘됐지. 일하다 보면 종종 엔터테인먼트 관계자라는 사람들이 명함도 주니까.
거기까지 듣고 나니 강지한은 도근한의 말이 이해가 됐다.
“그래서 민아 잘되려면 그만 놓아주어야 한다?”
-응. 근데 얘가 말을 안 들어. 이제 일 그만두고 너희 언니한테 물어봐서 명함 준 기획사 중 괜찮은 곳이랑 계약을 해보라고 일주일째 설득 중인데 똥고집을 부리네.
“그만두기 싫대?”
-엔터테인먼트에서 접근한 건 언니의 후광 효과가 커서 자기 것이 아니란다. 짜식이. 황금 같은 기회가 온 줄도 모르고 배부른 소리 하고 있어서 따끔하게 혼내기도 해봤는데, 먹히지를 않아.
“흠.”
-뭐, 방법 좀 없을까 싶어서 전화했다. 아니면 네가 와서 직접 설득 좀 해보든지. 네 말이라면 들을지도 모르잖아.
“알았어. 일단 내일 브레이크 타임에 갈게.”
-오케이.
도근한과의 전화가 끝났다.
강지한은 비로소 퀘스트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냈다.
‘윤민아였어.’
그녀의 꿈을 위해서 지금 일을 그만두게 하고 엔터테인먼트와 계약을 맺는 방향으로 끌어가는 것이 맞는 것 같았다.
‘가만. 한데 이게 정말 맞는 일일까?’
문득 그런 의문이 드는 강지한이었다.
레벨 업 시스템은 단 한 번도 그에게 맞지 않는 길을 제시한 적이 없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맞을 것이다.
그런 맹목적인 믿음이 기저에 깔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강지한은 불안했다.
자신의 앞날이 걸린 일이라면 차라리 괜찮았다.
그런데 이번엔 타인의 앞날이 걸린 일이었다.
레벨 업 시스템에서 제안한 방향이 맞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만, 틀렸을 경우 비틀어진 윤민아의 인생을 강지한은 책임질 수 없었다.
‘하지만 해고시키지 않으면 실패 패널티가 적용된다.’
패널티의 내용은 장인의 지식이 모두 삭제되는 것.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장인의 지식은 이미 몇 번이고 되새겨 공부해 왔다. 실전에 옮기고 또 다른 식으로 응용하면서 전부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이제 레벨 업 시스템이 박아 놓은 지식이 사라진다 해도 자기 것으로 만든 지식들은 그대로 남을 테니 과연 그게 진정 강지한을 어찌할 수 있는 패널티인가 싶었다.
‘아니, 장인의 지식이 삭제된다 해도 내게는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해.’
강지한은 확신했다.
물론 장인의 지식을 가지고 있을 경우 득이 되는 부분이 크긴 했다.
레벨 업을 할 때마다 새로 얻게 되는 고인의 요리 지식은 강지한을 더욱 빠르게 성장할 수 있게 만들었다.
‘사라지면 내가 직접 발품을 팔아 전국 팔도, 해외까지 다니면서 성장해 나가면 되는 일이야.’
레벨 업 시스템에만 의존하고 있으면 안 된다.
어느 날 갑자기 레벨 업 시스템이 사라져 버릴 경우에도 최대한 타격을 입지 않을 수 있도록 본인이 성장해야 한다는 것이 강지한의 생각이었다.
순간 강지한의 눈앞에 메시지가 나타났다.
[레벨 업 시스템의 의존도가 하락합니다.]
‘뭐?’
[‘퀘스트-보름 내에 정직원 한 명을 해고하세요’의 실패 시 패널티가 의미 없어집니다. 패널티가 소멸되었습니다.]
이윽고 갱신된 퀘스트 내용이 다시 나타났다.
[퀘스트-보름 내에 정직원 한 명을 해고하세요.]
[남은 시간: 15일]
[클리어 보상: 영어 마스터 패치권]
정말로 패널티에 관련된 부분이 깔끔하게 소멸되었다.
‘이런 거구나.’
지한 식당 분점 주차장에 세워둔 차에 올라탄 강지한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점점 그는 레벨 업 시스템보다, 직접적인 경험 속에서 얻는 결실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럴수록 시스템 의존도가 떨어지고 강지한은 스스로 성장해 나갔다.
이제 패널티도 소멸된 판이니 강지한은 윤민아의 미래를 위해서 그녀를 자르는 것이 맞는지 냉정하게 판단했다.
하지만 결국 이것은 본인이 내릴 결정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가 갈 길은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 맞겠지.’
아무리 상대방을 위한 일이라고 해도 억지로 강요해서는 안 되는 법.
그 사람의 인생을 끝까지 책임져 줄 것이 아니라면 그건 정말 무례하고 무책임한 짓이었다.
‘영어 마스터 패치권이 상당히 아깝긴 하지만…….’
강지한이 입맛을 쩝 다셨다.
* * *
다음 날, 오후 3시가 조금 넘은 시각.
강지한은 약속대로 지한 레스토랑에 방문했다.
그리고 윤민아를 레스토랑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어디서 밥이나 한 끼 하자는 그의 제안에 윤민아가 자신 있게 앞장서서 안내했다.
두 사람이 찾은 곳은 그 일대에서 제법 유명한 국밥집이었다.
“여기는 선지국밥이랑 내장탕이 최고예요.”
윤민아의 추천에 강지한은 선지국밥을 주문했다.
윤민아의 픽은 내장탕이었다.
음식은 5분이 채 지나지 않아 식탁 위에 서빙되었다.
달궈진 뚝배기 안에서 김을 모락모락 피어 올리는 붉은 선지국과 뽀얀 내장탕이 식욕을 자극했다.
강지한이 선지국을 맛봤다.
선지 특유의 향이 담긴 진하고 얼큰한 국물이 일품이었다.
선지 또한 탱탱하고 비린내가 없는 것이 아주 좋았다.
우거지는 입에 들어가자마자 녹듯이 풀어 헤쳐졌다.
윤민아의 내장탕은 고기의 풍미가 강했고 맛도 진했다.
탕 안에는 소 내장이 푸짐하게 들어 있어서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졌다.
강지한은 선지국에 바로 밥을 말았다.
그리고 밥그릇에 조금씩 덜어가며 식혀 먹었다.
윤민아도 열심히 내장탕을 먹었다.
반찬으로 나온 깍두기와 배추김치도 대단히 맛이 있었다.
국밥들과 아주 찰떡궁합이었다.
“여기 김치 진짜 맛있죠? 사실 이 집은 국밥도 국밥이지만 김치가 더 유명하다니까요.”
그 말을 듣고 있는 강지한의 입에 미소가 걸렸다.
파악의 눈으로 확인해보니 상 위에 놓인 김치가 지한 김치였기 때문.
이 집은 지한 김치에서 김치를 받아 파는 곳이었다.
식사를 하는 동안 두 사람 사이에는 일상적이 대화들이 오갔다.
그러나 윤민아는 고작 이런 얘기나 하려고 강지한이 자신을 따로 불러낸 것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식사가 끝난 뒤, 강지한은 물로 입을 헹궈내고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근한이한테 들어서 어떤 상황인지 알고 있어.”
“그 말 하실 줄 알았어요.”
윤민아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저 해고하실 건가요?”
“응. 해고할 거야. 근데 네가 끝끝내 여기서 일하고자 한다면 그러지 않을 생각이야.”
“……네?”
“잘 생각해 봐. 너한테 정말 도움이 되는 길이 무언지. 그 말 해주려고 온 거야.”
“대표님…….”
“다 먹었지?”
“아, 네.”
“그럼 가자.”
“네? 네.”
강지한이 자리에서 일어나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갔다.
생각했던 것보다 간단히 끝나버린 상황에 윤민아는 그저 얼떨떨했다.
식당을 나서는 그녀의 귀에 강지한의 한마디가 맴돌았다.
“잘 생각해 봐. 너한테 정말 도움이 되는 길이 무언지.”
‘나한테 정말 도움이 되는 길…….’
윤민아의 머릿속에 생각이 많아졌다.
* * *
굿 필링의 촬영이 끝난 지도 두 달이 지나가고 있었다.
영화는 일단 가편집본이 나왔다.
이제 여기에 CG를 입히고 오디오 조정을 한 뒤, 배경음악만 삽입하면 끝이다.
영화감독 앤드류 바그너는 비로소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그래서 잠시 짬이 나는 이때 일주일 정도 여행을 다녀오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그의 목적지는 한국이었다.
혼자 가는 건 아니었다.
강지한을 꼭 만나고 싶다며 입에 침이 마르도록 얘기했던 에이사 버터필드도 함께였다.
그는 앤드류가 한국 여행을 제안하자마자 생각할 것도 없이 이를 승낙했다.
국제공항에서 체크인을 하고 검색대를 통과해 면세점을 둘러보면서도 에이사는 줄곧 강지한에 대한 얘기뿐이었다.
그의 눈엔 면세점의 수많은 물건들이 눈에도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런 에이사가 앤드류는 귀여우면서도 재미있었다.
그래서 이렇게 물었다.
“자네는 강 셰프가 없었다면 어쩔 뻔했나?”
“인생의 재미 중 반 이상을 손해 보고 살았겠죠.”
“애초에 모르고 살았다면 손해 볼 것도 없지.”
“그것도 그렇네요.”
“한국의 그 도시 이름이…… 춘천이라고 그랬었나?”
“맞아요. 발음이 좋은데요?”
“쉬운 발음은 아니군.”
“아무튼 감독님이 먼저 한국 여행을 제안하실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저만큼 강 셰프가 보고 싶었나 봐요?”
“뭐……. 여러 가지 의미로 보고 싶긴 하지.”
“대답이 조금 애매한데. 강 셰프 만나러 가는 거 맞아요? 그의 음식을 즐기러 가는 여행이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틀렸나요?”
앤드류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맞아. 그것도 맞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어서 가는 거야.”
“그보다 더 중요한 일……. 아, 그거죠?”
에이사가 비로소 알겠다는 얼굴이 되었다.
“맞아. 그 녀석을 만나러 가는 거야.”
“그 녀석 이름은 기억하고 있어요?”
에이사의 장난스런 질문에 앤드류는 머뭇거림 없이 대답했다.
“슈가(Suga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