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1
Restaurant 270. 원효대사 해골물
인경고등학교에는 이른바 일진이라는 게 존재치 않았다.
그 원인은 11년 전, 인경고등학교에 입학한 한 여학생에게 있었다.
여학생은 학교에 입학한 첫날부터 2학년 일진 무리와 시비가 붙었다.
물론 시비를 건 이들은 여학생이었다.
미모가 상당했던 여학생은 여러 사람의 눈에 띌 수밖에 없었고 그것이 아니꼬웠던 2학년 생이 괜히 다가와 툭툭 건드린 것.
한데 이 여학생, 말보다 주먹이 앞서는 타입이었다.
그 자리에서 선배 세 명의 쌍코피를 터뜨렸다.
감히 선후배 체계에서 일어나선 안 되는 하극상이 벌어졌다.
결국 2학년 여자 일진들 중 가장 잘 친다는 선배가 여학생을 찾아왔지만 그녀마저도 주먹 두 방에 쓰러지고 말았다.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자 쪽팔려서 여자 상대로 안 싸운다던 남자 선배들이 팔을 걷어붙였다.
하지만 남자라고 해서 상황이 달라질 건 없었다.
여학생은 자신에게 위해를 가하려 드는 남학생들을 눈 하나 깜빡 않고 모조리 혼내주었다.
그제야 일진들은 이 여학생이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걸 인지했다.
해서 2학년 남자 일진들은 하굣길에 여학생을 그들의 아지트로 데리고 가 다구리를 놓으려 했다.
제아무리 주먹이 세다 한들 머릿수 앞에서는 장사가 없는 법.
그런데, 세상에 절대적인 건 없으며 예외는 늘 존재한다는 것을 남자 일진들은 직접 경험하고 말았다.
여학생은 일 대 다수의 싸움에서도 이겼다.
이 일은 인경고등학교 내에 일파만파 소문이 퍼져 나갔고 2학년 일진들은 쪽팔려서 고개도 들고 다니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
그에 드디어 3학년 일진 중에서도 짱이라 일컬어지는 사람이 나섰다.
그는 실추되어 버린 일진들의 명예를 되찾기 위해 여학생과 일대일 대결을 신청했다.
여학생은 이를 흔쾌히 받아들였고 많은 구경꾼들이 참석한 자리에서 두 사람의 대결이 시작됐다.
결과는?
5분이 채 지나기도 전에 여학생의 승리로 끝이 나고 말았다.
여학생은 코피가 터졌고, 쓰러진 3학년 짱은 두 눈덩이가 시퍼렇게 멍든 데다가 앞니가 빠지고 팔 하나가 부러졌으며 온몸 구석구석 발자국이 남았다.
한마디로 비 오는 날 먼지 나게 짓밟힌 것이다.
여학생은 건들지 않았으면 모르되 한 번 건드려 버리면 적당히를 모르는 성격이었다.
결국 여학생이 인경고등학교의 실질적인 통합 짱이 되었다.
그 전까지 통합 짱이었던 일진 3학년은 더 이상 여학생을 건드리지 않았다.
여학생이 말하길 자신에게 개처럼 두들겨 맞은 건 비밀로 해줄 테니 더 이상 건드리지 말라고 했기 때문.
이런 사실을 아는 건 두 사람이 대결을 펼치던 날, 구경을 온 일진들뿐이었다.
하지만 어디 사람 입이라는 게 단속이 잘되던가?
여학생이 3학년 통합 짱을 먼지 나게 두드려 팼다는 소문은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1학년 여학생 하나에게 완전히 망신을 당한 일진들은 인경고등학교에서 공포의 대상이었다가 우스운 존재로 하락했다.
그에 쪽팔리는 것이 죽기보다 싫었던 일진들은 하나하나 활동을 그만두고 무리에서 발을 뺐다.
그렇게 일진은 자연스레 해체되었고 여학생이 학교에서 생활하는 동안 더 이상 일진이라는 그룹은 형성되지 않았다.
여학생이 학교를 졸업한 이후로도 일진 문화는 존재치 않게 되었다.
한데 여기서 중요한 것 하나.
전설처럼 전해져 내려오는 그 여학생의 이름이 무언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
소문만 무성할 뿐, 여학생의 실체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언급하지를 않았다.
이유는 자신의 이름이 그런 소문 속에서 오가는 걸 극도로 싫어했던 여학생의 포고가 있었기 때문이다.
‘소문 퍼뜨리다가 실수로라도 내 이름 튀어나오면 근원지 찾아서 혀를 뽑아버릴 거야.’
단신으로 일진을 짓밟아 버린 여인이었다.
그 누구도 함부로 그녀의 말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결과적으로 여인의 이름은 감추어진 채 9년째 그녀에 대한 소문만이 인경고등학교에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다.
이러한 얘기를 전부 늘어놓은 유정미가 눈을 빛내며 예소린에게 물었다.
“언니. 정말 몰라요? 딱 언니가 입학했을 때 벌어진 일인데. 혹시 같은 반이었다거나 그런 거 아니었어요?”
“글쎄. 전혀 모르겠는걸?”
대답을 하는 예소린의 목이 바짝바짝 탔다.
‘내 얘기니까 그만해, 이것아’라는 말이 튀어나오려는 걸 억지로 삼켰다.
“아~ 진짜 궁금하다. 소린 언니면 알 것 같았는데.”
“우리 짠합시다, 짠!”
예소린이 난데없이 건배 제의를 했다.
다행스럽게도 유정미와 강지한은 그녀의 페이스에 말려들었고 더 이상 고등학교 시절의 얘기는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안심하고 있던 차, 이번엔 강지한이 예소린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근데 소린 씨, 나 전부터 소린 씨 보면 떠오르던 사람이 있었어.”
“응? 누구?”
“전미라.”
그 이름이 나오자 예소린은 뜨끔했다.
하지만 최대한 티를 내지 않고 태연한 척 연기했다.
“어머, 정말? 내가 닮긴 닮았나 보다. 그런 얘기 많이 듣거든.”
“전미라? 그게 누군데요?”
유정미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전미라는 올해 쉰 중반이 된 여배우로 젊은 시절엔 큰 인기를 끌지 못하다가 서른 중반이 되어서야 포텐이 터진 케이스였다.
나이를 거꾸로 먹는다는 수식어가 붙을 만큼 한 해 한 해 갈수록 더 젊고 예뻐졌다.
쉰 중반임에도 얼굴에 잡티나 주름이 거의 없었다.
나이를 밝히지 않으면 어디 가서 스물 후반까지도 봐줄 정도였다.
한데 이 전미라의 젊은 시절 외모가 예소린과 상당히 흡사했다.
강지한은 유정미에게 전미라가 누군지 알려준 뒤. 그녀의 젊은 시절 사진을 인터넷에서 찾아 보여주었다.
그에 유정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와, 진짜 똑같아요, 언니. 신기하다. 사진만 보면 자매라고 해도 믿겠네요.”
“그 정도까지는 아닌 것 같은데, 호호. 두 사람이 자꾸 그러니까 민망하잖아. 다른 얘기합시다!”
“히히, 쪼아용!”
겨우 화제를 전환시킨 예소린은 그제야 비로소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오늘 날을 잘못 잡았나 봐.’
맥주가 계속해서 들어가는 예소린이었다.
* * *
한민국과 공치산은 서울의 일식집에서 술을 나누는 중이었다.
홀 안의 모든 곳이 룸으로 만들어진 일식당은 한민국이 프라이빗한 만남을 가질 때 주로 애용하는 곳이었다.
“이렇게 시간 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한 대가님.”
공치산이 한민국의 잔에 술을 따랐다.
한민국이 술병을 건네받아 공치산의 잔에도 술을 채워주었다.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하하. 한데 애초에 형 말고 저한테 먼저 연락을 하시지 그러셨어요.”
“아……. 저,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습니다. 한데 워낙 공사다망하시다는 소문을 들어서요.”
한정국은 명함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여기저기 발만 담가놓은 집단이 많았다.
신선정의 이사 직함부터 한민국이 작년에 런칭한 프렌차이즈 업체의 명예이사직, 그 외에 주변 지인들의 사업에 이름을 빌려주는 대가로 얻게 된 여러 가지 직함들이 한가득이었다.
“에이, 그거 다 허울뿐인 것들입니다. 저 생각하시는 것처럼 정신없이 바쁘지는 않아요.”
“그러시군요. 우리로서는 참 다행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럼 우리 본론부터 얘기 나누고 편하게 술자리 즐겨볼까요?”
“좋지요.”
“공 부장님께서 원하시는 건 신푸드를 잡는 거라 이거죠?”
“그렇습니다.”
레토르트 식품 업계에서 최고의 성적을 내고 있는 회사가 신푸드였다.
그러니 신푸드를 잡으면 업계 1등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전처럼 꼼수를 부려서는 안되는 일.
강지한과 신푸드의 뒤에 세진 그룹 백진목 회장이 떡하니 버티고 있는 이상 정공법으로 붙어서 이기는 것만이 수였다.
“이제 슬슬 신푸드 측에서도 하반기 신제품을 내놓을 때가 되었어요. 해서, 그에 맞춰 우리도 신제품을 내놓을 생각입니다.”
“그걸 제가 진두지휘하면 되겠군요.”
“그렇습니다.”
“걱정 마세요. 강지한 그 친구 별거 아닙니다.”
“그런가요?”
공치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제가 지한 레스토랑에 가서 식사를 한 번 해본 적이 있어요. 형이랑 같이 갔었죠. 우리 형제의 평가는 한마디로 ‘제법 하지만 특별한 건 없다’였습니다. 그러니까 별것 아니라는 겁니다. 강 대표는.”
말을 하는 한정국의 머릿속에 얼마 전 한민국이 쏘아붙인 얘기가 떠올랐다.
“너 그거 아냐? 네 혀는 타인의 음식 맛볼 땐 참 정확한데 본인이 만든 음식 먹을 때는 너무 관대하다는 거. 너 자존심 구겨질까 봐 여태 말 안 했는데, 네가 먼저 입 열었으니 얘기해 주마. 강지한이나 너나 거기서 거기다.”
생각만 해도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기분이 들었다.
한정국이 잔에 채워진 술을 홀짝 들이켰다.
그 모습을 본 공치산이 웃음기 어린 음성을 흘렸다.
“강 대표를 별거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우리나라에 몇이나 있을까요? 정말 믿음이 확 갑니다. 하하하.”
“그럼 구체적인 사업 얘기를 좀 들어볼까요?”
“그러시죠.”
이후로 두 사람은 술잔을 주고받으며 오래 이야기를 나누었다.
* * *
“으음.”
이른 아침.
한정국은 지끈거리는 두통에 눈을 떴다.
“아우 머리야.”
흐릿한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익숙한 듯 낯선 천장이었다.
한정국 본인의 집이 아니었다.
그의 연인 우유나의 집이었다.
“내가 어제 여기로 왔어?”
술이 과했다.
2차까지 간 건 기억이 나는데 3차부터 필름이 끊어졌다.
술김에 우유나가 보고 싶어 여기로 온 모양.
“킁킁.”
한정국의 코로 맛있는 음식 냄새가 솔솔 흘러 들어왔다.
그가 머리를 움켜쥐고 방을 나서자 거실 식탁에 완성된 요리들을 늘어놓던 우유나가 미소로 반겨주었다.
“오빠 일어났어?”
“어, 유나야. 나 어제 어떻게 된 거야?”
“기억 안 나지? 그럴 것 같았어. 새벽에 술이 떡이 돼서 와 가지고는 얼마나 뽀뽀를 해대던지. 술 냄새 나서 죽는 줄 알았잖아.”
“그랬어? 내가?”
“응. 그러다 기절하듯 쓰러지더니 잠들더라. 왜 또 거실에서 쓰러지는 거야. 방까지 옮기느라 허리 나갈 뻔했다고.”
우유나가 투덜거렸다.
“미안미안. 그래도 오빠가 그 상황에서 우리 유나 보고 싶다고 찾아온 게 참 기특하지 않니?”
“그건 그래. 헤헤.”
말 한마디에 기분이 풀린 우유나가 금세 웃었다.
한정국이 찬물을 컵에 담아 마시고는 식탁 앞에 앉았다.
상 위엔 갖가지 음식과 반찬들이 한가득 차려져 있었다.
한정국은 그것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흰 쌀밥과 순두부찌개, 제육볶음, 여섯 가지 나물 반찬, 계란프라이, 김, 그리고 열무김치까지.
“이게 다 뭐야?”
한정국의 물음에 우유나가 수저를 가지고 와 식탁에 놓으며 말했다.
“오빠 자는 동안 내가 솜씨 좀 발휘했지.”
“이걸 다 유나가 했다고?”
“그럼. 어서 먹어봐.”
“응.”
과한 술로 속이 쓰렸던 한정국은 얼큰한 순두부찌개부터 한술 떴다.
“크으.”
매콤하면서도 감칠맛이 확 터지는 뜨거운 국물이 식도를 타고 위장으로 전해지자 전날 먹은 술이 싹 풀리는 기분이었다.
“유나야, 너 순두부찌개가 수준급이다?”
“그래? 잘 만든 것 같아?”
“응.”
“밖에서 파는 인스턴트 음식이랑 비교하면 어때?”
“그런 거랑 비교가 되겠어? 인스턴트 음식은 먹어보면 특유의 맛과 향이 확 하고 들어온다고. 절대 이런 맛이 날 수가 없지.”
“그렇지?”
“이래서 유나가 예뻐.”
“응? 왜?”
“오빠 한정국이야. 신선정의 한정국. 괜히 어설프게 내 식사 챙겨주겠다고 인스턴트 음식 사와서 자기가 만든 것처럼 꾸미면 다 티가 나요. 근데 이건 진짜 손수 만든 거잖아. 난 이런 게 좋아.”
“그치? 호호호. 어서 다른 것도 먹어봐.”
“응 그래.”
한정국은 식탁에 있는 음식들을 하나하나 전부 먹었다.
“열무김치도 죽인다. 이것까지 직접 담갔을 리는 없고. 어디서 구해왔어?”
“우리 엄마 솜씨지.”
“이번엔 진짜야?”
“응. 진짜야.”
“알았어, 믿을게.”
한정국이 순두부찌개를 다시 한 번 떠먹었다.
“크으. 속 풀린다. 우리 유나랑 결혼하면 엄청 행복하겠는데.”
“내가 우리 엄마 손맛을 좀 닮았나 봐. 많이 먹어 오빠.”
“응.”
열심히 식사를 하는 한정국을 보며 우유나는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녀의 부엌 쓰레기통 안에는 신푸드의 즉석식품 포장지가 가득했다.
오늘 상에 올라온 음식 중 우유나가 만든 것이라고는 밥과 계란프라이밖에 없었다.
김과 열무김치를 제외한 나머지 음식, 찌개, 반찬들은 전부 신푸드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