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8
Restaurant 257. 낯선 남자에게서 장모의 손맛이
4월 말.
발리로 향하는 한에어의 비행기 안.
한정국과 우유나는 이코노미 클래스에 앉아 있었다.
“오빠, 그냥 비즈니스로 타고 가자니까. 이코노미는 장시간 비행 너무 피곤하단 말이야.”
한국에서 발리까지는 7시간 정도가 걸린다.
우유나는 제법 부유한 집에서 살았던 만큼 해외여행 경험도 많았고 비즈니스석도 어렵지 않게 이용해왔다.
단맛을 평생 모르고 살았으면 몰랐지, 한 번 맛본 사람은 그 맛을 잊지 못한다.
우유나가 지금 그런 경우였다.
“기내식도 이코노미랑 비즈니스랑 많이 다른데.”
투덜대는 우유나의 음성이 한정국에게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는 어서 기내식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민국항공이 더 좋아. 한에어 기내식은 민국항공보다 맛이 덜하단 말이야.”
그 말에 비로소 한정국이 우유나를 바라봤다.
“그렇게 생각해?”
“응. 오빠는 두 항공사 기내식 전부 안 먹어봤어?”
“먹어봤지. 나도 민국항공이 낫더라.”
한정국이 민국항공의 기내식 레시피를 제공했다는 건 대외비다. 그래서 애인인 우유나에게도 일절 말을 하지 않았다.
한정국은 모른 척하며 이런 말을 꺼냈다.
“근데 요새 인터넷 보면 한에어 기내식이 훨씬 낫다 그러던데.”
그러자 우유나의 음성이 낮아졌다.
그녀가 한정국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에이, 그거 다 한에어 측에서 수작 부린 거지. 오빠는 나이에 맞지 않게 너무 순진하다니까.”
“하하. 그런가?”
“그럼~”
한정국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돌아가는 사정도 모르는 우유나였지만 그래도 민국항공 편을 들어주는 것이 기분 좋았다.
“아무튼 우리 순진한 오빠 때문에 기내식은 기대하지 말아야겠네.”
그때 기내식이 서비스되기 시작했다.
메뉴는 데리야끼치킨 백반과 비빔밥이었다.
“유나 뭐 먹을 거야?”
“데리야끼치킨.”
“그럼 전 비빔밥 주세요.”
승무원이 친절한 미소로 기내식을 두 사람에게 건네주고 지나갔다.
그것은 강지한의 레시피대로 케이터링 업체에서 만든 기내식이었다.
우유나는 크게 기대하지 않고 도시락을 열었다.
반면 한정국은 은근히 긴장하고 있었다.
그가 기내식의 구성을 살폈다.
가장 큰 용기에 계란 지단, 애호박, 콩나물, 시금치, 느타리버섯, 소고기가 비빔밥용으로 조리되어 담겨 있었다.
그리고 따뜻하게 데워서 나온 즉석밥과 작은 용기에 담긴 고추장이 보였다.
‘보통은 튜브형 고추장을 주곤 하는데 특이하네.’
아울러 곁들여 먹을 수 있는 된장국은 소형 컵라면 용기 같은 곳에 담겨 나왔는데, 건더기가 거의 없고 색이 묽은 것이 전형적인 레토르트 식품이었다.
반찬은 배추김치와 무생채가 전부.
무생채는 취향에 따라 비빔밥에 넣어서 먹으라고 따로 빼서 준 것 같았다.
그리고 후식으로는 계절과일이 한 조각씩 담겨 나왔다.
‘사진으로 봤던 것처럼 구성은 평범한데.’
과연 맛은 어떨지.
한정국이 비빔밥 고명들을 하나하나 맛보았다.
‘맛있어.’
우선 맛있었다.
모든 재료들을 각각의 기법으로 따로 조리한 것 같았다.
아울러 신선도 또한 좋은 것으로 보아 케이터링 업체에서 상품의 원재료를 사용하면서 관리까지 잘한 모양이다.
다음으로는 고추장을 맛봤다.
한데 그냥 고추장과는 뭔가 달랐다.
짠맛이 덜하고 단맛이 더 많이 느껴졌다.
하지만 거부감을 일으키는 맛은 아니었다.
자연스러운 달달함이라고 해야 할까?
한정국은 고명 위에 밥과 고추장을 넣고 본격적으로 비볐다.
참기름이 이미 뿌려져 있었던지 비빌수록 고소한 향이 스멀스멀 올라와 식욕을 자극했다.
잘 비벼진 비빔밥을 한입 크게 떠먹으려 할 때였다.
“와.”
옆에서 우유나의 감탄이 들려왔다.
한정국이 밥을 입에 넣으려다 말고 그녀에게 물었다.
“왜?”
우유나는 상상도 못했다는 투로 말했다.
“완전 맛있어.”
“맛있다고? 아까는 한에어 기내식 별로라 그랬잖아.”
그 물음에 우유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야. 진짜 맛있어.”
단호한 애인의 반응에 한정국이 살짝 긴장해서 재차 물어보았다.
“그럼 민국항공 기내식이랑 비교하면 어때?”
제발 그녀의 입에서 민국항공의 기내식이 더 맛있다는 말이 나왔으면 하고 바랐다.
하지만 현실은 그의 뒤통수를 강력하게 후려쳤다.
“이게 더 맛있는데?”
우유나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그리 말했다.
“이게 더…… 맛있다고?”
“응. 진짜 상상도 못했어, 오빠. 한에어 직원들이 수 쓴 건 줄 알았는데 아니었네. 진심 민국항공 비즈니스 기내식보다 맛있는 것 같아.”
우유나의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한정국의 기분이 언짢아졌다.
한정국은 신경질적으로 비빔밥을 한술 퍼서 입에 넣고 우적우적 씹었다.
그런데 과격하던 그의 턱운동이 점차적으로 느려지더니 얼굴 가득 당혹감이 차올랐다.
‘뭐야 이거?’
한정국은 혀 위에서 폭발하는 풍미와 감칠맛에 적잖이 놀라고 말았다.
‘기내식이라고, 이게?’
도저히 기내식으로는 재현하기 힘든 맛이었다.
일반 식당에서 만들어 판다고 하면 이것보다 수준 높은 음식들을 얼마든지 선보일 수 있었다.
당장 한정국 자신만 해도 가능했다.
그런데 기내식에는 엄연히 한계라는 것이 있었다.
셰프들은 최상의 맛을 낼 수 있는 레시피만 건네줄 뿐, 이후의 조리과정은 케이터링 업체의 기계들과 사람의 합작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이 비빔밥은 기내식의 수준을 넘어섰다.
‘이코노미가 이렇다면 비즈니스랑 퍼스트는 어떻다는 거야?’
그가 한 번 더 비빔밥을 떠서 천천히 음미했다.
음식을 씹으면 씹을수록 숟가락을 든 그의 손이 덜덜 떨려왔다.
이건 반칙이라고 할 만큼 맛있었다.
한정국은 자신이 개발한 민국항공의 기내식과 지금 먹고 있는 기내식을 비교해 봤다.
본인의 완패였다.
그런 한정국의 속도 모르고 우유나가 그의 비빔밥을 한술 떠 갔다.
“비빔밥은 어떨까? 냠! 와아……. 진짜 맛있다.”
우유나의 감탄이 비수가 되어 한정국의 가슴에 팍팍 꽂혔다.
하지만 숟가락을 멈출 수 없었다.
어떻게 해서 이런 퀄리티의 기내식을 만들어 낸 건지 알아야 했다.
파악이 필요했다.
한정국은 우유나의 데리야끼치킨도 맛보았다.
역시 맛있었고, 기내식을 넘어선 수준이었다.
단순한 레토르트 식품이라고 생각했던 된장국 또한 맛이 상당했다.
어디에서 만들어 공급받는 것인지 황급히 확인해보니 ‘신푸드’라는 글씨가 용기에 선명히 적혀 있었다.
하지만 케이터링 업체가 신푸드라고 보기에는 어려웠다.
거기에서는 단순히 된장국만 납품하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이후로 묵묵히 먹는 데만 집중하던 한정국의 시선이 비빔밥에 반찬으로 딸려 나온 김치로 향했다.
‘설마.’
김치까지 맛있지는 않겠지 하는 심정으로 한 점을 집어 먹었다.
그런데 설마가 사람을 잡았다.
‘미치겠네.’
김치 또한 환장하도록 맛있었다.
‘이거 어디서 많이 먹어본 맛인 것 같은데…….’
그가 지금 먹고 있는 것은 지한 김치였다.
한데 기내에서 먹다 보니 지상에서 먹던 것과 그 맛이 미묘하게 다르게 느껴졌다.
게다가 한정국의 상태가 평온하지 못했기에 기내에 있는 자신의 상황을 대입해 김치의 본래 맛을 그려내는 것이 힘들었다.
한정국이 결국 승무원을 호출했다.
“네, 손님. 뭐 필요하신 것 있으십니까?”
친절하게 묻는 스튜어디스에게 한정국이 물었다.
“여기 김치 어느 회사 것 쓰고 있습니까?”
“아, 김치말입니까? 그건 케이터링 업체에서 관리하는 부분이라 확실한 답변 어려운 점 양해 부탁드리겠습니다.”
“음……. 알겠습니다.”
한정국은 한국으로 돌아오면 당장 한에어의 케이터링 업체가 어딘지부터 알아내겠다고 마음먹었다.
‘거기부터 시작하면 이걸 만든 셰프가 누군지도 알 수 있겠지.’
한정국의 부릅뜬 눈으로 어느새 텅 비어버린 자신의 그릇을 바라보고 있었다.
* * *
여섯 마리의 인절미들은 설탕이와 소금이의 돌봄 속에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었다.
이제 강지한의 집으로 완전히 들어와 살게 된 달콤이, 새콤이, 짭짤이, 매콤이, 감칠이, 담백이는 금방 새로운 환경에 적응했다.
그런 연유에는 설탕이와 소금이, 그리고 강지한의 지극한 애정이 한 몫을 톡톡히 했다.
거기에 한 명 더.
강아지 육남매의 성장 과정을 강지한이 부재중일 때 마다 와서 생방송으로 내보내 주는 유정미의 역할도 컸다.
유정미는 프로 BJ다.
때문에 방송을 켜게 되면 단 한 순간도 본분을 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번만큼은 달랐다.
설탕이만 봐도 가슴이 제멋대로 나대서 정신이 없을 지경인데, 녀석을 닮은 인절미 여섯 마리가 헥헥거리며 달려들 때면 행복해서 그대로 승천할 것만 같았다.
강지한의 음식을 먹을 때에도 이게 지금 방송을 탄다는 생각은 놓지 않았다.
하지만.
“꺄아아~ 어떡하면 좋아.”
강아지 여섯 마리의 육탄 공격에는 정신을 잡으려고 아무리 노력해 봐도 무소용이었다.
유정미는 지금 강지한의 집 거실에 누워 있었다.
그런 그녀의 몸 위로 인절미 여섯 마리가 마구 타고 올라와 얼굴이며 목이며 팔을 마구 핥아대는 중이었다.
짤뚱한 몸과 다리가 너무나 귀여웠는데, 무엇보다 귀여운 건 토실토실 엉덩이 위에 붙어서 팽글팽글 돌아가는 짧은 꼬리였다.
뭐가 그리 신나는지 인절미들은 꼬리를 쉼 없이 파닥이며 유정미에게 안겨들었다.
이를 보는 시청자들은 난리가 났다.
-아아아, 거기가 천국인가요? 제가 죽어서 가게 되는 곳이 거기 맞죠? 그쵸? ㅠㅠㅠㅠㅠ
-언니! 나도 댕댕이 무덤에 갇히고 싶어요!
-정미님. 이 컨텐츠 심장에 넘나 위험한 것~ㅠㅠㅠ
원래 유정미는 시청자들과의 소통이 잘되는 타입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시청자가 뭐라고 하는지 도통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의 관심은 온통 인절미들에게만 꽂혀 있었다.
하나같이 설탕이의 얼굴이 담겨 있어서 마치 아기 설탕이 여섯 마리가 있는 것만 같았다.
“여기는 천국이야.”
정말이지 천국이 따로 없었다.
* * *
5월 초.
설탕이가 주연으로 촬영한 영화 ‘설탕이 온다’가 개봉 초읽기에 들어갔다.
설탕이 온다의 촬영과 편집은 이미 예전에 끝났지만 가정의 달에 맞춰 개봉하기 위해서 여태 참아온 것.
영화를 촬영한 감독 김상수는 개봉일이 다가올수록 두근거리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의 촉이 분명 이 영화가 대박날 것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김상수는 영화의 개봉에 앞서 설탕이의 주인이자 떠오르는 스타 셰프 중 한 명인 강지한과의 미팅을 가졌다.
미팅 장소는 강지한의 집, 거실.
영화가 개봉하게 되면 주연배우 설탕이가 무대인사를 좀 다녔으면 했기 때문이다.
“무대인사 가능할까요?”
김상수의 제안을 전해들은 강지한은 설탕이의 의사를 물었고 녀석의 대답은 간단했다.
왕!
한 번 짖었다는 건 오케이 사인이었다.
“좋다네요.”
강지한이 설탕이의 의사를 김상수에게 전해주었다.
그에 김상수는 버릇처럼 피젯스피너를 돌리며 감사하는 인사를 하려 했는데, 바로 그때.
덥석! 토다다다다!
집 안을 정신없이 돌아다니며 놀고 있던 여섯 인절미 중 첫째 달콤이가 김상수의 피젯스피너를 물고 도망쳤다.
“어? 저거 삼키면 안 되는데.”
놀란 김상수가 벌떡 일어서려 하는데 설탕이가 빨랐다.
잽싸게 달려가 달콤이의 앞을 가로막은 설탕이는 아들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달콤이는 그런 설탕이와 장난을 치려고 피젯스피너를 입에 문 채 앞발을 타닥타닥 움직이며 신나했다.
그에 설탕이는 더욱 지긋한 시선을 달콤이에게 던졌다.
그러자 달콤이가 뭔가를 느낀 듯 물고 있던 피젯스피너를 내려놓았다.
설탕이는 그걸 다시 물어 김상수에게 가져다주었다.
“이야~ 고맙다, 설탕아. 네가 어지간한 사람보다 똑똑하다는 거 너도 알지? 정현수 소장님이 너 엄청 그리워하더라. 조련사 일을 시작하고 나서 강아지한테 조련 당한 적은 처음이래.”
“하하하. 전 소장님이 그래요?”
강지한이 물었다.
“네. 처음에는 자기가 설탕이를 조련하는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까 정반대였다네.”
“재미있네요.”
“아무튼 그럼 허락한 걸로 알고 일정 잡히면 연락드릴게요.”
“네, 알겠습니다.”
* * *
발리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한정국은 한에어의 케이터링 업체가 어디인지 알아냈다.
그리고 은밀한 루트를 통해 그 업체에서 사용하는 김치가 무엇인지까지도 알아낼 수 있었다.
바로 지한 김치였다.
한정국이 당장 지한 김치를 구매해서 바로 먹어보았다.
그러고는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거…… 유나 어머니 김치랑 맛이 똑같잖아.”
왜 강지한이 만든 김치에서 장모가 될지도 모를 사람의 손맛이 느껴지는 것일까.
한정국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뒤엉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