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2
Restaurant 241. 신선숙수의 후계자
“후우, 말을 너무 많이 했더니 진이 쭈욱 빠지는군요.”
한돈선의 말이 잠시 끊겼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녹차를 다시 한 모금 넘기는 그의 시선이 깊은 생각에 빠진 강지한의 얼굴을 살폈다.
‘윤진아, 너한테 이토록 훌륭한 아들이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구나.’
한돈선은 그동안 아무것도 모르고 살았다.
그래서 강지한이 그의 얘기 속에서 부모의 과거를 찾아가는 것처럼, 한돈선도 강지한과 대화를 나누며 몰랐던 사실들을 알아가는 중이었다.
“지한 씨.”
한돈선이 강지한을 불렀다.
그러자 상념에서 빠져나온 그의 동공에 한돈선의 모습이 잡혔다.
강지한은 씁쓸한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대가님, 이제부터는 그냥 절 편하게 대해주세요.”
“그래도 되겠어요?”
“그럼요.”
생각 못했던 제안이 한돈선은 마냥 반가웠다.
그는 사실 강지한을 처음 볼 때부터 마냥 친근해서 더더욱 가까이 지내고 싶었다.
하지만 강지한의 심정도 과연 자신과 같을지는 모르는 일이기에 필요 이상으로 다가가지는 않았다.
그 인내의 시간이 지금 달콤한 과일로 돌아온 것만 같았다.
한돈선의 입에 그린 듯한 미소가 자리했다.
“그럼 지금부터 말 편하게 하도록 할게요.”
“아직 높이고 계신데요.”
슬쩍 장난치는 강지한의 손을 한돈선이 슬며시 잡았다.
그러고는 그 어느 때보다 포근한 음성으로 말했다.
“이렇게 멋있게 자라주어서 정말 고맙구나, 지한아.”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한돈선은 사실 강지한이 설윤진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고 난 이후부터 묻고 싶은 얘기가 있었다. 하지만 선뜻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가 않았다.
그러나 물어보지 않고 넘어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부모님은…… 어찌 눈을 감았는지 말해줄 수 있겠니?”
한돈선은 배틀 셰프의 심사위원이었다.
배틀 셰프의 결승에서는 맞붙게 된 두 참가자의 가족들이 몰래 방문을 해서 응원해 주는 연출을 담아내야 했다.
그래서 작가진들이 도근한과 강지한의 가족 구성원을 조사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강지한의 부모가 다 돌아가셨음을 알게 됐고, 이를 한돈선에게 전해주었다.
그로 인해 한돈선은 강지한의 부모, 설윤진과 강민태가 모두 고인이 되었음을 알고 있었다.
강지한은 잠시 아랫입술을 잘근거리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2005년 2월 25일. 두 분은 잠시 다녀올 곳이 있다며 새벽부터 집을 나섰어요. 어디로 간다는 말은 없었고요. 점심이 되기 전까지는 돌아온다는 말에 저는 기다렸어요. 그런데 부모님은 돌아오시지 않았고 대신 교통사고가 크게 났다는 얘기만 들려왔죠. 엄마가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가봤더니 너무나 위급한 상황이었고, 아빠는 이미 돌아가시고 난 뒤였어요.”
강지한의 얘기를 듣는 한돈선의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설윤진이 신선정을 바로 세우고자 자신을 다시 찾아온다고 했던 것이 2월 말 경의 새벽이었다.
하지만 아침이 밝아오고 해가 중천에 떠도 설윤진은 나타나지 않았었다.
“그랬구나. 그날 사고를 당한 것이었어. 하늘도 무심하시지. 어찌하여 그 착한 사람들을…… 그 착한 아이들을……!”
한돈선이 주먹을 쥐고 자신의 가슴을 탕탕 때렸다.
꽉 감은 눈에서는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그 모습을 보는 강지한도 덩달아 눈물지었다.
한참 동안 마음을 다스리던 두 사람은 겨우 진정하고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후우……. 내가 주책이었구나.”
“아니에요. 오히려 감사하는 마음 큽니다. 저 못지않게 부모님의 죽음을 아파해 주셔서 감사해요.”
“아니다. 아니야. 모두 다 내 잘못이다. 윤진이가 전화를 했을 때 더는 신선정 일에 나서지 말고 조용히 지내라 일렀어야 했던 것을. 전부 내 욕심이 자초한 화인 거야.”
자신을 책망하는 한돈선을 보며 강지한이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그게 대가님 탓입니까? 옳은 일을 하려 했던 겁니다. 대가님도, 우리 엄마도, 아빠도 잘못된 걸 바로 잡으려 했던 것뿐입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뜻을 세운 뒤 대가님을 만나러 가는 날 두 분께서 교통사고로 화를 당했어요. 이게…… 과연 자연스러운 일일까요?”
“……!”
강지한의 말이 한돈선의 정곡을 찔렀다.
자신의 욕심으로 인해 괜한 사람이 죽고 말았다는 비통함에 원활한 사고가 되지 않았던 한돈선이었다.
한데 강지한은 감정이 격해진 와중에도 냉정하게 사건을 바라봤다.
그러자 자신의 부모님에게 벌어진 일련의 일들이 너무나 자연스럽지 못했다.
“설마…… 누군가의 사주가 있었다는 말이냐?”
“그저 짐작입니다. 하지만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사주를 할 만한 사람은…….”
“내 형님이 유력하겠지.”
한돈선은 자신의 형이 그렇게까지 최악은 아니라 믿고 싶었다.
하지만 강지한의 말대로 돌아가는 상황이 너무나 작위적이었다.
때문에 그 가정을 허투루 넘길 수가 없었다.
‘만약 그렇다면…… 더는 지한이를 끌어들여선 안 된다.’
그는 원래 강지한을 차기 신성숙수 후계자 후보로 등록시키려 했다.
그러나 몰랐던 사실들을 알고 나니 그래서는 안 된다는 판단이 들었다.
“지한아, 고생이 많았다. 네 말 무슨 뜻인지 잘 알았다. 하지만 아직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으니 속단하지는 말자꾸나.”
“네……. 알겠어요.”
“네 부모의 죽음과 관련된 일은 내가 제대로 조사해 보도록 할 테니 너는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네가 할 일만 꾸준히 해나가도록 하렴.”
한돈선의 말속에 숨어 있는 뜻을 강지한은 바로 알아챘다.
“후계자 경합에서 빠지라는 말씀이시지요?”
“윤진이 딸 아니랄까 봐 영특한 것도 쏙 빼닮았구나. 호호호. 그래, 그 말이란다.”
강지한은 잠시 입을 꾹 다물고 한돈선의 눈을 바라봤다.
오늘 그를 만나기 전까지는 사실 굳이 자신이 상관도 없는 신선정의 후계자 경합에 꼭 끼어들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
한돈선의 사정은 참 안됐지만 그렇다고 강지한이 발 벗고 나설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었다.
자신의 엄마 설윤진과 아빠 강민태는 신선정의 사람이었고 한남선의 독재에 그곳을 나와 살았다.
특히 한남선은 설윤진의 능력을 심하게 경계했었다고 한돈선이 말해주었다.
그런 상황에서 신선정의 몰락을 막기 위해 한돈선과 손을 잡기로 한 시점에 사고가 나 운명을 달리했다.
강지한은 석연찮은 이 상황을 제대로 파헤치고 싶었다.
그리고 그 일을 다른 사람의 손이 아닌 본인의 손으로 직접 해나가길 원했다.
“대가님, 죄송합니다. 그 말은 따르지 못하겠어요.”
“지한아.”
“신선정 후계자 경합에 참여하겠습니다.”
“거기에 들어가서 네가 얻을 게 뭐가 있다고 이러느냐.”
“신선정의 정당한 숙수가 되어 부모님의 뜻을 바로 세우겠습니다.”
그 말은 곧, 신성정을 예전의 모습으로 돌려놓겠다는 것이었다.
강지한에게는 한정신의 지식이 있으니 그것이 꼭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뜻은 갸륵하지만 녹록지 않을 거란다. 한남선이 네가 잘되도록 그냥 두고 볼 리 없을 테니.”
“상관없습니다. 제게도 한남선의 수작질을 막아줄 수 있는 큰 사람들이 있습니다. 절 후보로 추천해 주세요.”
“난 그렇게 못하겠다. 어쩌면 네가 위험에 처할 수도 있는 길을 걸으라 할 수는 없단다.”
“대가님.”
강지한이 낮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한돈선을 불렀다.
한돈선에게 향해 있는 그의 눈동자가 큰 열망을 담은 채 들끓었다.
‘그래. 모르면 몰랐지, 알면서도 그냥 가만있을 수는 없겠지.’
심지어 부모의 죽음이 우연한 사고가 아닐 수도 있다는 가정이 세워진 상황이었다.
‘내가 네 입장이었어도 같은 심정이었겠지.’
강지한은 제4대 신선숙수가 되어 모든 진실을 밝히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내 형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다면 어쩔 것이냐.”
“그때는 대가님이 당했던 질곡의 시간이나마 똑같이 느끼도록 해주고 싶습니다.”
강지한의 눈은 평소와 달리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한돈선이 그를 만나오며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눈이었다.
그가 아는 강지한은 늘 호수처럼 잔잔했고 바다처럼 깊었으며 청명한 하늘처럼 맑은 사람이었다.
이토록 격정적인 강지한을 접하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잔뜩 열이 올라 있는 강지한을 한돈선이 달랬다.
“지한아, 복수는 복수를 낳는 법이다. 내가 원했던 것은 그저 신선정의 옛 모습을 찾기를 바랐던 것, 그게 전부란다.”
“대가님, 전 대가님과 이렇게 마주앉아 과거의 조각들을 맞추어 나간 것이 돌아가신 부모님의 뜻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미 제가 가야 할 길은 정해져 있는 것 같아요.”
듣고 보면 강지한의 마음도 이해 못할 건 아니었다.
한돈선 본인이었더라도 강지한과 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똑같은 말을 하고 고집을 피웠을 터였다.
세상 어느 자식이 부모의 죽음과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를 비사 앞에 초연할 수 있겠는가.
“후우우.”
긴 한숨을 내쉰 한돈선이 강지한을 지그시 바라봤다.
“지한아, 한 번 발을 들여놓으면 아무리 후회되더라도 다시는 돌아갈 수 없단다. 그래도 괜찮겠느냐?”
“괜찮습니다.”
“너 역시 어떠한 화를 당할지 모르며 내가 늘 지켜주리란 보장도 없을 텐데 그 또한 괜찮겠느냐?”
“괜찮습니다. 제 선택이에요. 제 몸은 저 스스로 지킬 것이고 누구도 원망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말씀드렸다시피 제게는 믿을 수 있는 분들이 계십니다.”
강지한은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앙다문 입술에서 꺾이지 않겠다는 고집이 엿보였다.
‘윤진이는 저렇게까지 고집이 세지 않았었는데.’
저도 모르게 설윤진과 강지한을 비교하던 한돈선은 이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한 가지만 약조해 다오. 절대로 복수할 마음으로 경합에 참가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누차 얘기했으나 네 생각은 가정일 뿐 확실한 정황이 나온 건 아니잖니?”
“……네. 저도 정황만 가지고 무얼 어떻게 하겠다는 건 아니에요.”
“그래. 너는 오로지 네 부모와 나의 뜻을 이어 신선정을 바로잡는 것에만 신경을 쓸 것이라고 약조하려무나.”
“그렇게 하겠습니다.”
“후우, 알겠다. 내가 널 신선정 차기 신선숙수 후계자 경합의 후보로 등록하마.”
“감사합니다.”
“이제부터는 정신을 더 똑바로 차리고 생활해야 한다. 항상 주변을 살피고 긴장을 늦추지 말거라. 알겠니?”
“그렇게 할게요.”
“일월 중으로 등록을 하면 이후로 이 년 동안 조용한 심사가 이루어질 것이란다. 처음 일 년은 잠행단이 네 이름으로 운영되는 식당 중 가장 평가가 좋은 곳을 열 번 방문해 음식의 맛과 질, 서비스 등을 평가할 테고, 여기서 합격하면 다음 일 년 동안 네 실력이 얼마나 발전했는지, 그래서 결과적으로 경합에 참여할 수준이 되는지를 판단하여 최종 통보를 해올 것이다.”
“그런데 대가님. 만약 그 과정에서 한남선이 손을 쓰면 어떡합니까. 제가 최종 경합에 끼어들지도 못하도록 점수를 조작해서 후보 자격 미달 처리라도 시켜 버리는 날엔…….”
“그건 걱정 말거라. 신선정의 잠행단이 누구인지는 신선숙수도 모르고 있으니.”
“네?”
“잠행단은 비밀리에 활동하며 후세에게 그 역할을 대물림하고 있단다. 잠행단의 존재를 알았던 사람은 초대 신선숙수밖에 없었지. 내 아버지 때부터 잠행단의 존재는 완벽하게 감추어져서 그 누구도 알지 못하고 있지.”
“그런 게 가능한 일인가요?”
“세상엔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 법이지. 잠행단들에게 외부 후보자의 정보를 알려주는 방법과 검증비용을 지불하는 방법 역시 말로 다 설명 못할 만큼 은밀하고 복잡한 시스템으로 만들어져 있단다.”
게다가 잠행단은 일상을 살아가다 평생에 딱 2년 동안만 후보자 검증을 하면 되기에 꼬리가 길어 밟힐 염려 또한 없었다.
“경합에 올라가기 전까지의 심사는 공정하게 치러질 것이야.”
“그렇게 알고 있을게요.”
대략 필요한 얘기를 전부 주고받았다 싶었을 때, 한돈선이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4시 48분.
12분 뒤에는 지한 레스토랑의 저녁 장사가 시작된다.
“그래. 이제 그만 일어나도록 하자꾸나.”
“네.”
자리에서 일어난 두 사람은 카페를 나왔다.
그리고 작별 인사를 건네던 와중 한돈선이 강지한에게 물었다.
“지한아, 한번…… 안아봐도 되겠니?”
“그럼요.”
일말의 망설임 없이 강지한이 허락하자 한돈선이 기꺼운 마음으로 그를 안았다.
그러고는 강지한의 등을 토닥토닥 두들겨 주었다.
“그동안 고생 많았다. 홀로 이겨내느라 참 많이 힘들었을 테지. 하나 이제 넌, 더 이상 혼자가 아니란다. 네 뒤엔 언제나 내가 있다는 걸, 나는 네 가족이나 다름없다는 걸 잊지 말렴.”
가족.
강지한에게 있어 그 단어보다 따뜻한 것이 세상에 또 있을까?
강지한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 * *
“아이고, 삭신이야.”
오늘 하루도 신선정의 주방에서 전쟁 같은 하루를 보낸 한남선이 집으로 돌아와 찌든 땀을 물로 씻어낸 뒤, 침대에 드러누웠다.
그리고 텔레비전이나 시청하려는 순간,
똑똑.
“구민호입니다.”
그의 개인비서 구민호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
한남선의 명에 방으로 들어온 구민호가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인 뒤 손에 들고 있던 하늘색 봉투 하나를 건넸다.
봉투의 겉면에는 ‘신선정 제3대 신선숙수 한남선 앞’이라는 글씨만 달랑 적혀 있었다.
“뭐야?”
“우편함에 들어 있었습니다. 발신인은 확인되지 않습니다.”
한남선이 당장 봉투를 뜯었다. 그 안에는 두 번 접힌 서류 하나가 들어 있었다. 그것을 쫙 펼치니 드러나는 내용에 한남선의 눈썹이 씰룩였다.
-신선정 제4대 신선숙수 후계자 경합 외부인 후보 강지한. 그의 사업수완과 요리들의 수준을 잠행단 10인이 세간의 평가 및, 1차 방문만으로 평가해 본 바 후보로서 적합하다는 판단을 내림.
비로소 전쟁의 서막이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