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1
Restaurant 240. 설윤진
엄마의 이름 세 글자를 입 밖에 내놓으며 강지한은 한돈선의 안색을 살폈다.
“설…… 윤진?”
이제는 세상에 없는 여인의 이름을 곱씹는 한돈선의 턱이 덜덜 떨려왔다.
“들어본 적 있으세요?”
한돈선은 대답 대신 차를 한 모금 삼켰다.
그리고 한 차례 마음을 진정시키고서 강지한에게 되물었다.
“혹시 그 여인과 어떤 관계인지 알 수 있을까요?”
“제…… 어머니 되십니다.”
“……!”
한돈선은 이제 거의 기절할 것 같은 얼굴이 되었다.
겨우 진정시켰던 가슴이 다시 쿵쾅거리며 뛰었고 호흡이 가빠졌다.
“대가님, 괜찮으세요?”
강지한은 그가 저러다 쓰러지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됐다.
한돈선이 손을 들어 아래위로 천천히 흔들었다.
“아아…….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후우우.”
다시 녹차로 목을 축인 그는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래요. 그랬군요. 지한 씨가 윤진이의 아들이었군요.”
그제야 한돈선은 강지한을 처음 보는 순간부터 느꼈던 이유 모를 끌림의 원인을 알 수 있었다.
“어쩐지 첫 만남부터 어디선가 만난 적이 있던가 싶었어요. 낯설지가 않았지요.”
“어머니를 아시는군요?”
한돈선의 눈동자가 회한으로 물들었다.
“윤진이는 참 선한 눈을 가진 아이였습니다. 지금 저를 보는 지한 군의 눈과 똑 닮았지요. 눈은 사람의 마음일 비추는 거울이라 하지요. 그처럼 윤진이는 맑고 깨끗했어요.”
“한 대가님, 말씀해 주세요. 우리 어머니를 어떻게 아시죠? 어머니가 신선정의 사람들과 무슨 관련이 있는 겁니까?”
재촉하는 강지한을 보며 한돈선의 마음이 착잡해졌다.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요. 그런데 정리가 쉽게 되지를 않네요.”
말을 하며 한돈선이 한정신의 칼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이건…… 아버지가 살아생전 가장 아끼는 명장의 칼이었지요. 일찍부터 아버지의 뒤를 이어 차기 신선숙수를 꿈꾸던 나와 형님은 이 칼을 물려받기 위해 참으로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신선숙수의 자리에 오르게 되면 물려받게 되는 증표라는 것이 바로 이 칼인 줄로만 알았기 때문이지요. 한데 아니었어요. 신선숙수의 증표는…… 아니, 그건 당장 지한 씨가 듣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겠군요.”
한돈선은 일단 설윤진의 이야기부터 풀어 나가기로 했다.
“아무튼 지한 씨가 이 칼을 가져옴으로써 이미 짐작한 바 있겠지요. 내 아버지께서는 가장 아끼던 당신의 칼을 우리 형제가 아닌 윤진이에게 물려주었답니다. 그 말인즉 윤진이의 재능을 제일 높게 샀다는 것이겠지요.”
“한정신 명인님과 제 어머니는 어떻게 연을 맺게 된 겁니까?”
강지한의 엄마가 같은 한씨라면 핏줄이라 여겼겠으나 성이 다르니 그건 아니었다.
즉 애초에 남이었다는 것이다.
“조금 긴 얘기가 될 겁니다.”
한정신이 과거를 회상하듯 허공을 응시했다.
* * *
설윤진은 부모에게 버려져 고아원에서 지내던 아이였다.
그리고 한정신은 그 고아원의 원장과 깊은 연이 있어 달에 한두 번은 꼭 봉사활동을 다니고는 했었다.
그러다 일곱 살 난 설윤진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그 아이는 한정신을 만날 때마다 장래희망이 요리사라고 당당하게 말해왔었다.
한데 말뿐만이 아니었다.
설윤진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요리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한정신이 찾아올 때마다 꼭 스스로 요리를 만들어 대접하고는 했는데 그 맛이 범상찮았다.
설윤진의 요리 실력은 날이 갈수록 빠르게 늘어만 갔다.
그러다 열두 살이 넘어서는 어지간한 어른도 함부로 대적할 수 없는 손맛을 자랑했다.
요리를 제대로 배우지 않고 대충대충 장사를 하는 식당들은 명함도 못 내밀 수준이었다.
그런 설윤진의 재능이 탐났던 한정신은 그 아이를 자신이 데려가 가르치기로 마음먹었다.
생각 같아서는 아예 양녀로 입양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내의 거센 반대로 차마 호적에 올릴 수는 없었다.
그래도 이왕 데리고 왔으니 자식처럼 정을 주며 한남선, 한돈선 형제와 함께 요리를 가르쳤다.
설윤진은 한씨 형제들보다 더욱 무서운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설윤진이 15세가 되던 해, 신선정 내부적으로 치러진 작은 요리대회에서 드러났다.
설윤진은 한씨 형제를 비롯, 신선정 주방 경력 5년 이하의 요리사들이 참가한 한정신배 요리대회에서 모든 이들을 제치고 당당히 우승을 거머쥐었다.
한정신은 그에 대한 상품으로 자신이 아끼던 세 자루의 칼 중 한 자루를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그 칼의 이름은 신룡도(神龍刀).
한정신에게는 명장이 혼을 담아 만들어 낸 풍운도(風雲刀), 천화도(遷化刀), 신룡도의 세 자루 칼이 있었다.
풍운도는 구름처럼 가벼워 바람과 같이 날렵하게 다룰 수 있는 칼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천화도의 천화(遷化)는 변하여 바뀐다는 뜻을 담고 있는 불가의 말이다. 정확히는 이승의 교화를 마치고 다른 세상의 교화로 옮겨간다는 것으로 고승의 죽음을 얘기한다.
즉, 천화도는 그 생을 끝낸 식재료들이 더 맛있고 제대로 된 음식으로 바뀔 수 있도록 인도하는 칼이란 뜻이다.
신룡도는 영물 중의 영물인 용들의 신을 뜻한다. 그만큼 이 칼이야말로 모든 칼 중에서 으뜸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한정신이 이 세 자루의 칼 중에서도 가장 아끼는 건 단연 신룡도였다.
한데 그것을 요리대회의 우승 상품으로 설윤진에게 준 것이다.
당연히 한남선과 한돈선의 배가 아플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두 형제는 곧 이를 인정하고 스스로의 실력을 더욱 다져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중요한 건 한돈선은 설윤진에 대한 순수한 호승심이 작용한 반면, 한남선의 마음속에서 자라나는 건 질투와 시기였다는 것이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1987년, 신선정에는 32년 주기로 한 번 찾아오는 후계자 경합이 벌어지는 날이었다.
당시 신선숙수였던 한정신은 신선정 후계자 경합의 법도에 따라 외부에서 몇몇 후보들을 점찍어 놓고 2년 간 잠행단을 붙여 심사를 봤다.
그 결과 외부 인원 중 경합 자리에 나설 자격을 갖춘 이는 단 한 명이 선출되었다.
당시 스무 살이던 설윤진은 경합의 자격이 없었다.
일단 호적 등록이 안 되어 있었기에 외부인이었고, 외부인이 경합에 참가하려면 어느 정도 이름 있는 식당을 운영하며 2년 간 심사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그녀에겐 식당 같은 게 없었으니 자연스레 경합에서 제외되었다.
결국 세 사람의 경합이 이어졌고 한남선이 우승을 거머쥐었다.
그러나 정당한 승부가 아니었다.
한남선은 한돈선의 식재료에 수작을 부렸다.
이를 경합이 시작되고 난 후에야 알게 된 한돈선은 이의를 제기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재료를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관리해야 하는 건 요리사로서의 기본이었다.
누군가 재료에 수작을 부렸다고 해도 그러지 못하도록 끝까지 지키지 못한 요리사 본인의 잘못이 컸다.
아울러 한남선이 수작을 부렸다는 증거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러니 한돈선의 억울함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한남선이 차기 신선숙수로 낙점되었다.
경합에서 승리한 한남선은 앞으로 2년 간 한정신의 밑에서 올바른 신선숙수로서의 정신과 실력을 다지기 위한 수련을 받게 될 예정이었다.
신선정의 후계자 수업이 32년이라는 애매한 주기로 벌어지는 건 바로 후계자 수업을 받는 2년이 포함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2년의 수업이 다 끝나갈 무렵 한정신은 지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고 만다.
평생을 신선정의 발전만 생각하며 몸을 돌보지 않고 달려왔던 것이 화가 되었던 것.
한정신이 그리되고 나자 한남선의 본성이 바로 드러났다.
그는 신선정을 평소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모습으로 바꿔 나가려 했다.
이를 한돈선이 막으려 하자, 한남선은 신선숙수로서의 권력을 휘두르며 그를 모함하고 좋지 못한 사람으로 만들어 신선정에서 쫓아내 버렸다.
그것이 1989년에 벌어진 일이었다.
한편, 한씨 일가의 곁에서 이 사건들을 지켜보던 설윤진은 갑자기 모든 게 무서워졌다.
한정신이 있을 땐 평온한 둥지 같았던 곳이, 한남선의 정권교체로 인해 모진 태풍이 휘몰아치는 가시밭길로 변했다.
당시 설윤진의 나이 스물둘.
그녀에게는 사랑하는 남자가 있었다.
신선정의 부주방장 중 한 명이었는데, 정직하고 자상한 성품에 반해 눈이 맞아 2년 넘도록 사랑을 키워 나가는 중이었다.
그 부주방장의 이름은 강민태.
훗날 강지한의 아버지가 되는 사람이었다.
* * *
한돈선은 한참 이야기를 늘어놓다 입에 침이 마르자 녹차를 한 모금 더 마셨다.
“내가 신선정에서 쫓겨난 직후 윤진이가 민태와 함께 저를 찾아왔어요. 신선정을 떠나며 마지막 인사를 드리기 위함이라더군요. 그러고는 앞으로 신선정과 관계된 이들과는 절대 연락을 하지 않을 것이라 못을 박았지요. 저는 그런 두 사람의 의견을 존중했습니다. 이제부터는 나와도 연락을 끊고 둘이서 행복하게 살아 달라 했지요. 그렇게 서로를 마음으로만 그리워하며 살아가게 되는가 싶었습니다.”
강지한은 한돈선의 이야기를 단 한마디도 놓치지 않기 위해 두 귀를 쫑긋 세우고 집중했다.
“그런데 15년 정도가 지났을 무렵. 나도 이제 윤진이에 대해 잊고 살 즈음 별안간 연락이 왔어요. 한 번 꼭 만나보고 싶다고.”
설윤진이 한돈선에게 연락을 취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당시의 그는 아띠를 성공가도에 올려놓고 방송 출연도 열심히 하는 중이었으니.
“이상한 일이었지요. 신선정과 연을 끊고 조용히 숨어 살던 윤진이가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겨 날 만나려 하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답니다.”
한돈선의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던 강지한이 뭔가 짚이는 부분이 있어 물었다.
“그때가 정확히 몇 년도였는지 기억이 나십니까?”
“2005년도였던 걸로 기억해요. 아직 봄이 시작되기 전이었으니 2월 무렵이었던 것 같군요.”
“2005년 2월…….”
설윤진과 강태민이 죽은 것이 2005년 2월 25일이다.
그리고 2월에는 그것 말고도 중요한 사건이 하나 더 있었다.
강지한이 부모님을 조르고 졸라 신선정에 가서 식사를 했던 것이다.
강지한은 요리에 관심이 많았던 아이인만큼 신선정이라는 곳이 한국 최고의 한정식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 그 곳을 꼭 가보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의 부모님은 다른 곳은 다 데려가도 신선정만큼은 데리고 가지 않으려 들었다.
이유를 물어보면 시원하게 대답을 해주지도 않았었다.
강지한은 당시 그런 부모님의 속내를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에서야 이해가 되었다.
본인들이 도망쳐 나온 곳을 제 발로 다시 밟고 싶어 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아무것도 몰랐던 강지한은 한사코 부모님을 졸라댔고, 결국 설윤진과 강태민은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이 진실임을 증명하게 됐다.
두 사람은 큰마음을 먹고 강지한과 신선정을 찾았다.
제발 아는 사람을 마주치지 않기를 바라며, 선글라스로 나름 얼굴을 가렸다.
다행스럽게도 15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홀직원들은 대부분이 바뀌어 있었다.
간혹 아는 얼굴이 보여도 설윤정과 강민태를 몰라보는 눈치였다.
속이 편한 건 강지한뿐이었다.
대한민국 최고의 한식당에서 나오는 음식들의 맛은 어떨지 무척이나 기대가 됐다.
드디어 음식들이 하나하나 나오기 시작했고 강지한은 들뜬 마음으로 식사를 했다.
오지 않았으면 모르되 이왕 와버린 거, 설윤진과 강민태도 수저를 놀렸다.
그런데, 신선정의 음식은 그들이 기억하던 것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이건 신선정의 요리가 아니었다.
시대를 거쳐 올수록 음식의 형태와 맛과 조리법에 약간의 변화를 주기는 하였으나 옛것의 기본은 최대한으로 고수한다는 것이 신선정의 정신이었다.
그런데 지금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들은 전통의 맛이 사라지고 그저 화려함만을 추구하고 있었다.
설윤진과 강민태는 뭔가 참담한 기분을 느꼈다.
식사를 마치고 난 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설윤진은 강지한에게 오늘 음식이 어땠느냐 물었다.
그에 강지한은 이렇게 대답했었다.
“진짜 맛있었어. 그런데…… 엄마가 해주는 음식처럼 따뜻하지가 않아. 뭔가…… 되게 정 없는 느낌? 아무튼 그랬어.”
이후로 세 사람 사이에서 더 이상 신선정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았다.
그날 하루해가 저물도록 설윤진과 강민태의 얼굴은 밝지가 않았다.
그 이유를 강지한은 지금에서야 깨달았다.
강지한은 이러한 얘기들을 전부 한돈선에게 들려주었다.
“그랬군요. 그래서 윤진이가 내게 연락을 해온 것이었군요. 15년이 지난 신선정의 음식을 먹어보고서……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것이었겠지요.”
“어머니는 연락을 하고 바로 만난 겁니까?”
“아니에요. 나는 윤진이가 이쪽 일에 개입 말고 그저 평안하게 살기를 바랐어요. 해서 만나보기를 거절했지요. 하지만 윤진이는 이대로 한씨 일가 조상님들의 얼이 담긴 신선정을 내버려 둘 수 없다고 했어요. 그 말이 날 흔들어 놓았지요. 전화를 끊고 며칠 고민하다가 결국 윤진이에게 전화를 걸었어요. 한 번 보자고 했었지요.”
“혹시 그날이…… 2월 23일이었나요?”
“정확한 날짜는 기억 못하겠지만 2월 중후반 정도가 되었던 것 같군요.”
설윤진은 2월 23일 누군가의 전화를 받고 헐레벌떡 집을 나섰다가 밤늦게 돌아왔다.
아마 한돈선이 전화한 것이 그날이 맞을 터.
“우리는 짧은 시간 깊은 대화를 나누고 헤어졌어요. 여러 가지 말이 오갔으나 요점만 짚어 보자면 둘이 다시 손을 잡고 신선정을 바꿔 놓자는 것이었지요.”
“어떻게 바꿔 놓겠다는 것입니까?”
“윤진이가 제 뒤를 이어 아띠를 운영하는 것이죠. 그리고 저는 2019년이 되는 해에 그 녀석을 후계자 경합에 추천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그 이후로 연락이 닿지를 않았습니다. 내가 당시 알고 있었던 건 윤진의 핸드폰 번호가 유일했었는데 계속 꺼져 있다는 메시지만 들려오더니 나중에는 없는 번호라고 나오더군요.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이 됐지만 수소문을 해도 윤진이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었어요. 그렇게 또다시 오랜 시간이 흘러 지한 씨를 만나게 된 것이랍니다.”
한돈선을 만난 후 이틀 뒤, 설윤진과 강민태는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뭐가 어떻게 돌아갔던 건지 알겠어.’
한돈선의 얘기들로 인해 강지한의 머릿속에 늘어져 있던 복잡한 퍼즐 조각들이 하나둘 맞춰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