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4
Restaurant 223. 손맛의 주인은 춘천에
“웃차!”
오만석은 파트너 직원과 빠르게 배식 준비를 해나갔다.
이미 지한 밥차에 대한 소문을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스텝들은 벌써부터 군침을 꿀꺽꿀꺽 삼켰다.
특히 지한 밥차를 부르자고 총대를 맸던 조감독은 준비 중인 지한 밥차의 반찬들을 두루 살폈다.
일단 1인분에 6,000원짜리 식단 치고 실한 반찬이 제법 있었으며 가짓수도 많았다.
‘이건 합격.’
영화판의 사람들 입맛이 가지각색인지라 여러 가지 반찬이 있어야 누구 한 명 투정 없이 맛있는 식사를 하는 게 가능했다.
그런데 나물부터 시작해서 김치도 세 종류에다 소, 돼지, 닭, 생선까지 다양한 종류의 고기와 국 또한 두 종류였다.
이렇게 팔아서 남긴 할까? 싶을 정도로 넉넉한 구성이었다.
이제 중요한 건 맛이었다.
‘제발 소문만큼만 해라.’
지한 밥차를 이용해 본 관계자들은 하나같이 밥차 중에서 최고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제법 유명하다고 소문난 맛집의 반찬과 요리들을 그대로 담아온 것 같다는 평가가 대부분이었다.
독고진의 실력이 늘어 이제 밥차의 요리들도 일괄적으로 레벨 5 수준으로 맞출 수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자, 식사 시작하시면 됩니다.”
빠르게 배식 준비를 마친 오만석이 소리쳤다.
그러자 미리부터 줄 서 있던 사람들이 차례대로 자율 배식을 해나갔다.
이 바닥 어딜 가나 그렇듯이 이런 자리에서 먼저 식사를 하는 건 배우들이었다.
아침을 만족스럽게 먹지 못해 잔뜩 언짢아 있던 손현중은 원로 선배님들과 함께 앞쪽 줄에 서 있었다.
“음~ 냄새 좋다.”
“이야, 제육볶음 색이 아주 빨간 게 식욕 확 당기네.”
“어머. 밥 차지게 잘 지었네요. 밥차에서 이런 밥 보기 힘든데.”
원로배우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하며 이것저것 음식들을 담아갔다.
손현중도 자신이 좋아하는 음식 위주로 넉넉하게 한 접시를 가득 채웠다.
“선배님들. 맛있게 드세요.”
“그래, 현중아. 많이 먹어라.”
선배들과 같은 곳에 자리를 한 손현중이 인사를 건네고서 식사를 시작하려 했다.
그때 후배 배우 한 명이 식판을 들고 지나가며 넌지시 말을 흘렸다.
“선배님들. 저기 있는 밥차가 요즘 이 바닥 다 잡아먹고 있답니다. 맛이 장난이 아니랍니다. 배에 자리 남는다 싶으시면 무조건 더 드세요.”
후배의 얘기에 손현중은 코웃음을 쳤다.
“밥차가 다 거기서 거기지, 무슨…….”
혼잣말을 뱉으며 보니 밥은 제법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게 썩 괜찮아 보였다.
“어디.”
손현중이 밥부터 크게 한술 떴다.
그 모습을 나현철 감독과 조감독이 배식판을 들고서 유심히 관찰했다.
“음.”
밥을 씹는 손현중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밥이 별로여서가 아니었다. 맛이 있을 때 나오는 그만의 버릇이었다.
원로배우 중 누군가 했던 말처럼 밥이 적당히 차지고 탱글탱글한 것이 일단은 만족스러웠다.
‘좋은 쌀 썼나 보네. 밥물도 잘 맞췄고. 이렇게 대량으로 짓다 보면 보통 떡밥이 되게 마련인데. 솜씨가 보통이 아니야.’
밥을 먹고 나니 다른 음식들에도 살짝 기대가 생겼다.
‘김치는 어떤가?’
한국인의 밥상에는 기본으로 올라오는 반찬이 바로 김치다.
무엇보다 김치가 맛있어야 그 사람의 손맛을 믿을 수 있는 법.
손현중은 배추김치, 무김치, 파김치를 모두 담아왔다.
입안에서 밥의 달짝지근한 맛이 감돌 때쯤 배추김치부터 집어 입에 넣었다.
우적우적.
김치를 호방하게 씹던 그의 눈이 부릅떠졌다.
‘어?’
손현중은 입안 가득 퍼지는 배추김치 특유의 시원함과 청량함, 그리고 완벽한 양념 맛의 밸런스에 깜짝 놀랐다.
꿀꺽!
저도 모르게 김치와 밥을 삼켜 버린 손현중은 이번엔 무김치와 파김치도 맛봤다.
“우적우적. 꿀꺽! 와.”
절로 ‘와’ 소리가 나올 만큼 끝내주는 맛이었다.
이 김치 삼총사만 있어도 공기밥 두 그릇은 물에 말아서 그냥 해치울 것 같았다.
‘아니 무슨 김치가 이렇게 맛있어? 조리사가 김치 명가 출신인가?’
손현중이 먹은 것은 지한 김치에서 판매하고 있는 것들이었다.
지한 김치의 레벨은 어떤 종류의 김치든 일괄적으로 7을 자랑한다.
독고진이 밥과 국, 반찬, 메인 메뉴들은 직접 만들지만 김치만큼은 직접 담그지 않고 지한 김치를 가져왔다.
그러니 김치의 맛이 끝내주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환장할 맛이네, 그거.”
손현중은 김치를 몇 번 더 맛보다가 다른 반찬들에도 눈을 돌렸다.
제육볶음, 소불고기, 콩자반, 콩나물 무침, 고사리 볶음, 소고기 장조림, 소시지야채볶음 등등.
모든 반찬을 맛보고 난 손현중의 얼굴이 확 펴졌다.
“다 맛있네. 다.”
이제 마지막으로 맛볼 것은 김치찌개와 된장찌개였다.
두 개의 찌개는 취향대로 퍼갈 수 있게 마련해 놓았는데, 손현중은 전부 한 그릇씩 퍼왔다.
“호로록. 으아.”
김치찌개를 먹은 손현중이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정말 맛있다는 제스쳐였다.
“이게 어떻게 밥차 김치찌개야? 내가 자주 가는 전문점보다 김치찌개를 더 잘하는데.”
이번에는 된장찌개를 떠먹었다.
“미쳤네. 미쳤어. 완전 맛의 타짜야.”
김치찌개가 얼큰한 맛으로 어필했다면 된장찌개는 진하고 구수한 맛, 그리고 풍미 가득한 향으로 손현중을 사로잡았다.
“우리 어머니 손맛 저리 가라다.”
냉정하게 얘기해서 어머니의 된장찌개보다 몇 배는 더 맛있었다.
아니, 손현중이 태어나서 먹어봤던 된장찌개 중 으뜸이었다.
한참을 자기 혼자만의 세계에 빠져서 음식을 탐닉하던 그가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살폈다.
“인생 밥차 찾았네요.”
“와, 반찬 하나하나가 예술입니다.”
“말 그만하고 빨리 찌개 먹어봐요. 근데 조심해. 너무 맛있어서 죽을지도 몰라.”
모든 이들이 자신과 별반 다를 게 없는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손현중과 가까운 곳에 앉아서 그의 안색을 살피려 했던 나현철 감독과 조감독도 본연의 의무를 망각하고 먹는 행위에 푹 빠져들었다.
손현중은 순식간에 한 접시를 다 비우고 다시 밥차로 다가갔다.
그리고 아까 먹어보지 못했던 반찬들 위주로 한가득 담아 두 번째 식사를 즐겼다.
미식에 눈을 뜬 이후 오늘이 가장 혀가 즐거운 날이었다.
* * *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시각.
“컷! 오케이!”
나현철 감독의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자 역할에 푹 빠져 있던 손현중이 언제 그랬냐는 듯 바로 현실의 자신으로 돌아왔다.
순간적으로 몰입했다가도 바로 감정선을 정리해 버리는 것이 역시 베테랑다웠다.
국민배우라는 칭호가 괜히 붙은 게 아니었다.
“선배님, 오늘 연기 아주 좋았습니다.”
나현철이 손현중의 연기를 칭찬했다.
“그랬어?”
“아유. 하이라이트 제대로 뽑았어요.”
“그럼 다행이고. 하하. 점심을 매일 그렇게만 먹여봐. 영화에 들어가는 모든 장면들에서 명품 연기 바로바로 나오지.”
손현중이 지한 밥차 얘기를 꺼냈다.
점심을 세 접시나 비워 배가 터지도록 먹었는데도 밥차가 떠나고 나니 다시 그 맛이 그리워지는 손현중이었다.
“정말 입에 잘 맞으셨나 봅니다.”
“입에 맞는 정도가 아니야. 그 음식들 조리한 양반 손맛이 미쳤다니까? 전국구 손맛이야. 아니, 그런 양반이 왜 밥차만 돌리고 있대? 나 같으면 편하게 식당 하나 차려서 대박 내겠네.”
손현중의 말에 근처에 있던 조감독이 다가와 말했다.
“선배님, 밥차 운영하는 사장님은 따로 식당도 갖고 있어요.”
“그래?”
“네. 밥차 맛에 감동한 사람들이 열심히 정보를 캐냈죠.”
“어디서 장사하는데?”
그리 묻는 손현중의 눈이 반짝거리며 빛났다.
“춘천이요.”
“강원도 춘천?”
“네. 거기서 식당 몇 개 돌리는 모양이던데요? 하나같이 대박이 나서 돈을 바가지로 긁어모은답니다.”
“그럼 그렇지! 그러니까, 식당 사업 하면서 밥차 사업까지 손을 뻗은 거라 이거지?”
“그런 모양이에요.”
“식당 이름이 어찌 되는데?”
“그게 참 재미있어요. 제가 아는 것만 열거해 보자면 지한 분식, 지한 김치전골, 지한 식당, 지한 만두. 이런 식이에요.”
“주인장 이름이 지한인가 보네.”
“네, 강지한이라고 배틀 셰프 아세요? 거기 우승자예요.”
“아, 그 요리 프로그램. 얘기는 들어서 알고 있는데. 거기 우승자라고?”
“그렇다니까요.”
“어째 보통 실력이 아니다 싶더니만…….”
손현중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입을 닫았다.
이제 마무리 촬영까지는 2회차밖에 남지 않았다.
촬영이 끝나자마자 춘천부터 찾아갈 생각을 하는 손현중이었다.
* * *
새벽 1시.
강지한은 오늘도 파김치가 되어 집으로 돌아왔다.
지한 레스토랑 운영을 위해 서울로 떠나기는 12월 31일에 떠났는데 돌아와 보니 1월 1일 새해가 밝아 있었다.
제야의 종소리는 돌아오는 자동차 안에서 라디오로 들었다.
춘천에 오자마자 이향숙의 집에 들러 설탕이를 데려왔다.
사실 예소린에게 맡기는 것이 더 좋았지만 그녀는 엄격한 집안 사정으로 밤늦게 출입이 자유롭지 않아 그러긴 힘들었다.
이향숙은 설탕이를 넘겨주며 영화 시나리오 두 개와 드라마 제작 피디 명함, 광고주 세 명의 명함을 함께 쥐어주었다.
근 며칠 사이 설탕이 앞으로 들어온 일거리들이었다.
설탕이가 어떤 일을 계약할지는 전적으로 강지한에게 맡긴다고 그녀는 말했다.
우선은 강지한이 주인인 만큼 그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강지한은 설탕이와 함께 소파 위에 누워 여태 쌓인 시나리오들과 명함을 훑어봤다.
“설탕아, 너 이 중에 하고 싶은 거 있니?”
왕! 헥헥.
“있다고? 어디 그럼.”
소파 밑으로 내려온 강지한이 시나리오와 명함을 주르륵 늘어놓고 물었다.
“이 중에서 어떤 거?”
강지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설탕이가 명함 한 장을 발로 탁 짚었다.
“이거?”
설탕이가 택한 명함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한국유기동물보호협회. 협회장 정금자.’
명함을 확인한 강지한의 머릿속에 이향숙이 명함과 함께 건넸던 말이 떠올랐다.
“정금자 협회장님은 유기동물 공익광고를 찍고 싶어 하시더라. 근데 출연료를 많이 줄 수 없을 것 같아서 과연 설탕이랑 계약을 할 수 있을지 불안한 눈치시더라고. 선택은 오빠가 해.”
한국유기동물보호협회는 돈을 많이 버는 단체가 아니다.
때문에 큰 자본금이 없어서 공익광고를 저가에 만들고는 했다.
그나마도 TV로는 자주 보내지 못하고 인터넷 동영상으로 올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설탕이가 유기동물보호협회장의 명함을 선택했다.
그 사람이 준 일을 하고 싶다는 뜻이었다.
강지한의 시선이 정금자의 명함에서 설탕이에게로 옮겨갔다.
설탕이는 동그란 눈동자로 강지한을 바라보며 해맑은 미소를 머금은 채 꼬리를 팽팽 돌리고 있었다.
강지한이 그런 설탕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 네가 하고 싶다면 해야지. 진짜 기특한 선택했어, 마이 보이!”
왕! 헥헥헥!
주인의 칭찬에 바로 품에 뛰어들어 얼굴을 마구 핥아대는 설탕이였다.
* * *
다음 날.
지한 레스토랑에는 뜻밖의 인물 두 사람이 찾아왔다.
한창 정신없는 런치 타임.
주방에서 요리를 만들던 강지한과 도근한은 홀에 들어서는 두 사람을 보고서 쌍둥이처럼 눈을 크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