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 하는 식당-222화 (222/330)

# 222

Restaurant 221. 값어치 이상의 미니 코스

지한 레스토랑의 문이 열리자마자 첫 번째로 들어선 손님들은 강지한의 지인이었다.

한 명은 정장을 말끔하게 차려 입은 노신사였고, 다른 한 명은 수수한 옷차림의 친근한 인상을 가진 노인이었다.

노신사는 진상명, 노인은 백진목이었다.

강지한이 그들을 보자 밝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오셨어요? 어르신들.”

강지한의 알은 체에 홀매니저는 센스있게 그들을 최대한 주방과 가까운 테이블로 안내해 주었다.

진상명은 백진목의 의자를 빼내어 앉게 해주고서는 자신도 테이블에 자리했다. 그리고 강지한에게 인사를 건넸다.

“레스토랑 오픈을 축하드립니다, 강 선생님.”

“초대에 응해주셔서 감사드려요.”

그에 백진목이 허허 웃었다.

“뭘 그렇게 큰 빚을 졌다고 식사 대접까지 하려 그래?”

“두 어르신의 도움이 정말 컸습니다. 어르신들께서 힘써 주시지 않았다면 천명옥의 간계를 알면서도 당했을지 모릅니다.”

“나야 뭐, 한 게 있나. 그냥 무대 나가서 말이나 몇 줄 읊었지. 고생은 상명이가 다 했지.”

“은사님께서는 곁에 서 계시기만 해도 대단한 힘이 된다는 걸 모르십니까? 하하.”

진상명이 백진목을 띄워주었다.

백진목은 그게 싫지 않은지 별다른 말 없이 그윽하게 미소 지었다.

“아무튼 그날 두 분 다 인사도 없이 돌아가셔서 놀랐습니다.”

춘천 식문화 알림이 본선 무대가 열린 날.

강지한을 돕기 위해 춘천으로 내려왔던 진상명과 백진목은 처리해야 할 일이 끝나자마자 바로 서울로 돌아갔었다.

당시 백진목이 바쁜 스케줄을 쪼개서 온 것이기도 했거니와 강지한이 시민들 틈에 둘러싸여 인기몰이를 하고 있어 차마 인사를 건넬 틈이 나질 않았다.

그래서 그냥 와버렸는데 강지한은 그게 못내 미안했다.

해서 이번에 레스토랑을 오픈하며 두 사람에게 음식을 대접하고자 부른 것이다.

“아무튼 이왕 왔으니 맛있는 음식 부탁하지.”

“알겠습니다, 어르신.”

대답을 하는 강지한의 시선이 두 사람의 머리 위로 향했다.

사실 그들이 홀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머리 위엔 파란색 숫자가 떠 있었다.

진상명이 22, 백진목이 58이었다.

진상명은 예전에 장관직을 내려놓고 요즘엔 공적인 자리에 얼굴을 드러내는 일이 없으니 국내 인지도가 낮은 것이 이해가 갔다. 그래도 도근한보다는 높았다.

이는 곧 전국에 도근한보다 진상명을 아는 사람이 더 많다는 얘기다.

그런데 백진목의 국내 인지도가 의아했다.

‘세진 그룹 회장인데 58밖에 안 된다고?’

살짝 놀란 강지한이었지만 침착하게 생각해 보니 58이라는 숫자가 이해되었다.

세진 그룹은 대단한 기업이긴 하지만 대한민국 제일가는 곳은 아니다.

그리고 회장 백진목은 연예인이 아닌 기업인이다.

그런 만큼 그가 브라운관이나 뉴스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많지 않았다.

때문에 사람들에게 크게 알려진 인물은 아니었다.

특히 사회적 이슈에 관심이 없는 요즘 젊은 세대들에겐 더더욱 모를 사람이었다.

국내 인지도라는 걸 남녀노소 많은 사람들이 두루 알고 있을수록 숫자가 높아진다고 정의해 보면 58이라는 수치가 납득이 갔다.

강지한이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홀엔 일곱팀이 들어찼다.

아직 알려지지도 않은 레스토랑의 첫 오픈 날인데 문을 열자마자 이 정도로 손님이 들어오는 건 쾌조의 스타트라 볼 수 있었다.

“주문하시겠습니까?”

홀 직원들은 손님들이 들어선 순서대로 주문을 받아 나갔다.

가장 먼저 주문을 하게 된 건 진상명과 백진목이었다.

그들은 런치 한정으로 준비된 미니 코스를 주문했다.

미니 코스는 파스타와 메인을 취향껏 고를 수 있었다.

진상명은 명란냉파스타와 안심스테이크를 선택했고, 백진목은 로제파스타와 찹스테이크를 선택했다.

주문을 받자마자 따뜻한 식전빵이 나갔다.

두 사람이 빵을 조금 뜯어먹고 있자니 금세 신선한 샐러드가 서빙되었다.

강지한과 도근한은 밀려들어오는 주문을 빠르게 소화해 나갔다.

도근한은 메인 메뉴만을 담당했고 도근한은 에피타이저를 책임지면서 도근한이 힘에 부칠 때 메인을 서포트했다.

그 외의 것들은 함께 일하는 직원들에게 맡겼다.

그래 봤자 그들이 만들어야 하는 건 파스타가 대부분이었다.

파스타 소스는 오전 중에 종류별로 미리 만들어 둔 터였다.

때문에 면만 제대로 삶아 들어가는 재료들을 소스와 함께 넣고 잘 볶아주면 간단하게 완성할 수 있었다.

물론 소스는 강지한과 도근한이 함께 연구해서 탄생한 것으로 면만 제대로 삶아 내서 정확한 시간으로 볶는다면 무조건 레벨 5 이상의 파스타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만약 면을 완벽하게 삶아 적절하게 볶아낼 경우 레벨 6의 파스타가 완성된다.

이번에 고용한 직원들은 하나같이 이 바닥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라 레벨 6의 파스타를 기대해 봄직했다.

아무튼 소스가 이미 준비되어 있으니 파스타를 만드는 데 드는 시간은 10분 내외였다.

메인 요리를 만드는 시간 또한 그와 비슷했다.

파스타와 마찬가지로 사전 준비가 완벽하게 끝난 재료들을 그저 볶거나 구워내면 되기 때문.

물론 말이 쉽지 그 10여 분 안에는 일반인은 흉내도 낼 수 없는 기술과 노하우가 집약되어 있었다.

아울러 도근한은 최대 세 개의 화구를 동시에 관리하는 게 가능했다.

즉, 요리 세 가지를 한 번에 조리하는 것이 된다는 뜻이다.

마지막으로 강지한이 그때그때 만드는 에피타이저는 조리 시간이 가장 짧았다.

그러니 다들 자신의 역할만 제대로 해주면 미니 코스 하나가 완성되는 데 고작 10여 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게 되는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주방의 사람들은 매끄러운 팀웍을 자랑하며 주문을 소화해 나갔다.

진상명과 백진목이 주문한 미니 코스 두 개가 완성되어 오더 테이블에 놓였다.

강지한이 거기에 담긴 음식들의 레벨을 살폈다.

파스타의 레벨은 5, 스프와 에피타이저, 메인 메뉴의 레벨은 6이었다.

그러니까 직원들의 손이 닿은 건 레벨 5, 그렇지 않은 건 레벨 6으로 나뉜 것이다.

직원들이 조금만 파스타 면을 잘 다루어주면 6레벨로 통일된 미니 코스를 완성할 수 있었을 텐데 조금 아쉬운 강지한이었다.

‘그래도 저 정도면 나쁘지 않지.’

진상명과 백진목의 앞에 드디어 음식이 서빙되었다.

둘 다 강지한의 손맛을 익히 알고 있는지라 양식은 과연 어떨지 기대가 됐다.

“어디…….”

백진목이 우선 옥수수 크림 스프를 떠서 맛봤다.

“오호.”

옥수수 크림 스프의 풍미는 아주 강렬했다.

미각이 보통 사람보다 많이 떨어지는 백진목에게는 풍미가 강한 음식들이 좋았다.

혀 이외의 다른 감각들로 음식을 즐길 수 있기 때문.

백진목의 반응을 살피던 진상명이 싱긋 웃었다.

“스프가 참 좋지요?”

“아주 좋구만. 어디 다른 건 어떨까.”

백진목의 포크가 이번엔 에피타이저로 향했다.

강지한이 직접 만든 에피타이저는 염장전어를 곁들인 카포나타(Caponata)였다.

카포나타는 튀긴 가지를 토마토, 케이퍼, 샐러리 등과 함께 볶아 새콤달콤한 소스로 버무리는 이탈리아의 채소 요리다.

백진목이 염장전어를 조금 잘라 카포나타를 위에 올려 한 입에 넣고 천천히 씹었다.

“으흠.”

염장전어의 짭쪼름한 맛과 카포나타의 톡 쏘는 새콤함은 둔해진 그의 미각에도 충분히 전달되었다.

게다가 카포나타에 들어간 채소들은 대부분 강렬한 향과 맛을 자랑하는 개성적인 것들이라 그 다채로움이 백진목의 입안을 즐겁게 해주었다.

염장전어 역시 처리를 아주 깔끔하게 해서 비린내는 없애고 풍미만을 살려냈다.

다음으로 손이 간 로제파스타 또한 진한 소스가 비강을 자극했고, 적당히 잘 삶아진 면이 씹는 맛을 충분히 안겨주어 좋았다.

마지막으로 도근한이 만든 찹스테이크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우선 소스가 기막혔다.

맛을 몰라도 향으로만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최고의 풍미를 자랑했다.

그 소스를 고루 입은 잘 익은 소고기 안심은 이로 씹는 순간 육즙을 뿜어내며 스르르 녹아 사라졌다.

마치 입안에서 마법이 벌어지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반면 야채들은 센 불에 빠르게 볶아 뭉개지지 않고 싱싱하게 살아서 아삭거리며 씹혔다.

모든 메뉴를 맛본 진상명이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흡족해했다.

무엇 하나 흠잡을 데가 없는 완벽한 미니 코스 요리였다.

진상명 또한 만족한 얼굴로 미소를 머금었다.

두 사람은 서로 간에 오가는 대화가 거의 없이 음식에만 푹 빠져 식사를 마쳤다.

백진목이 앞에 놓은 접시를 싹 비우고서 냅킨으로 입을 닦으며 말했다.

“역시 강 사장이야. 한식만큼은 아니지만 양식도 상당한 수준이구만.”

“전문 분야가 아니라 그런 모양입니다. 한데, 조금만 더 지나면 아마 한층 더 발전해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겠지.”

두 사람 다 강지한의 성장이 얼마나 빠른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가격이었다.

“겨우 3만 원도 안 되는 돈으로 이런 음식을 맛볼 수 있다니.”

“그러게 말입니다. 겉멋만 잔뜩 든 레스토랑에 가면 두 배 이상 후려칠 겁니다.”

진상명은 이름이 좀 있다고 하는 레스토랑을 많이 찾아다녀 봤다.

그 결과 가격에 거품이 너무 많이 낀 레스토랑이 상당히 많았다.

음식들이 맛이 없는 건 아니었다.

일반적인 식당들보다는 확실히 한 수 위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 정도의 프리미엄이 붙을 만큼은 아니었다.

그저 화려한 홀과 있어 보이는 요리의 플레이팅, 손님을 왕으로 대접하는 직원들의 태도 같은 것들이 혀를 착각하게 만들어 식사의 질을 높여주는 것뿐이었다.

진상명이 그리 느낀 레스토랑의 음식 레벨은 대부분 5를 넘지 못했고 4 정도 수준인 곳도 수두룩했다.

물론 충분히 그만한 돈을 지불해도 적당하다 생각되는 곳 역시 있었다.

하지만 그런 곳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진상명이 전국에 있는 레스토랑을 모두 다녀본 것은 아니니 순전히 그의 기준에서 봤을 때의 얘기였다.

아무튼 지한 레스토랑의 음식들은 거품이 낀 레스토랑의 음식보다는 수준이 높았고, 일류에 꼽는 레스토랑보다는 낮았다.

딱 그 중간 어느 지점 즈음에 있었는데, 진상명은 필시 지한 레스토랑의 소문이 빠르게 퍼져 나갈 것이라 장담했다.

이유는 역시 가격에 있었다.

“강 선생님은 정말 성실하고 심지가 곧은 분이십니다. 게다가 머리도 좋지요.”

진상명의 말에 백진목이 동의했다.

“저러니 손대는 사업마다 대박을 터뜨리지. 꼭 나 젊을 때를 보는 것 같구만. 어험.”

“하하하. 그러십니까, 은사님?”

“잘 먹었으니 그만 일어나지.”

“네, 그러시지요.”

두 사람이 테이블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백진목이 갑자기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이에 진상명이 얼른 달려가 그를 부축해 주었다.

“은사님,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현기증이 좀 났을 뿐이야.”

백진목은 이내 진상명의 손을 뿌리치고서 지팡이에 의지했다.

“하여튼 나이를 먹으면 군데군데 맛이 가기 시작한다니까.”

“은사님 연세에는 어디가 이상하다 싶으면 병원부터 가셔야 해요.”

“그 정도는 아니니 호들갑 떨지 말아.”

말미에 진상명의 시선이 주방으로 향했다.

강지한은 밀려드는 주문으로 인해 바쁘게 요리를 만드느라 두 사람을 신경 쓰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도 작별인사는 못하고 가겠구만.”

“그렇겠네요. 하하.”

백진목과 진상명이 카운터로 향했다.

그러자 카운터를 맡고 있던 여직원이 미소로 둘을 맞았다.

“식사는 입에 맞으셨나요?”

“아주 만족스럽게 잘 먹었다고, 강 사장에게 전해줘요.”

백진목이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식사 계산해 드리겠습니다. 두 분 미니 코스 드셔서…….”

“아아, 됐어요.”

백진목이 여직원의 말을 자르고서는 지갑에서 100만 원짜리 수표 두 장을 꺼내 이서했다.

“강 사장에게 건네주도록 해요. 그만한 가치가 있었다는 말도 빼먹지 말고.”

“아…… 저, 존함을 알려주시면 전해드리겠습니다.”

그에 진상명이 웃으며 말했다.

“그냥 말만 전해주시면 그 돈이 누구 주머니에서 나온 건지 아실 겁니다. 어르신. 나가시죠.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여직원이 얼떨떨한 얼굴로 당황하는 사이 두 사람은 레스토랑을 나섰다.

* * *

영화 ‘예언자’의 촬영 현장.

“식사하고 가겠습니다!”

촬영장 막내의 외침에 배우와 스텝들의 긴장이 살짝 풀렸다.

오늘 점심은 미리 구입해 온 도시락이었다.

예언자의 주연을 맡은 중견 남자 배우 손현중은 지급된 도시락을 먹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아, 이거 아닌데.”

그러자 옆에 있던 여배우가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이것도 입에 안 맞아요? 나름 괜찮은데.”

“난 별로…… 잘 모르겠어.”

요즘 손현중의 밥투정이 부쩍 늘었다.

사실 그는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주는 대로 잘 먹는 머슴 타입의 사내였다.

그런데 갑자기 미식에 눈을 뜨기 시작하더니 맛집을 찾아다니면서 입이 까다로워졌다.

이제는 맛있는 밥을 먹지 못하면 연기에 까지 지장이 올 정도였다.

만약 짬도 안 되는 신인 초짜가 이랬다면 감독에게 욕을 들어먹고 당장 배역에서 잘렸을 것이다.

한데 손현중이 누구인가?

대한민국에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는 국민배우였다.

그런 그가 밥투정을 하니 감독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죽을 맛이었다.

멀리서 손형중이 투덜거리는 걸 지켜보던 나현철 감독이 한숨을 푹 쉬었다.

“아니, 왜 갑자기 미식에 눈을 떠서 저러신대.”

그러자 옆에 있던 조감독니 넌지시 말을 건넸다.

“저…… 그럼 다음번에 지한 밥차 한번 불러보는 게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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