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0
Restaurant 219. 서울 상경
아무리 워커홀릭인 강지한이라고 해도 크리스마스 저녁엔 예소린과 데이트를 즐기기로 했다.
지한 식당은 이제 강지한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가 없어도 잘 돌아간다.
아무리 바빠도 강지한의 빈자리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모두 완벽한 호흡을 자랑했다.
강지한은 오늘 점심 피크 타임에만 지한 식당 주방에 있었다.
실상 그가 주방에서 한 일은 거의 없었다.
그저 사람들이 제 몫을 충분히 해내는지 관찰할 뿐이었다.
가끔 참치계란말이 몇 개나 만들어 주는 게 전부였다.
브레이크 타임 때, 강지한은 식당을 떠나 집으로 돌아왔다.
어제까지만 해도 도근한과 함께였는데, 이제 그는 춘천에 없었다.
레스토랑 오픈을 준비하겠다며 어제 서울로 돌아갔다.
지한 레스토랑을 열기 위한 모든 준비는 갖추어졌다.
새로운 메뉴, 리모델링, 새로운 간판에 함께 시작할 직원까지.
도근한은 이틀 간 최종 점검을 하면 될 일이다.
예소린과의 저녁 데이트를 위해 강지한은 외출 준비를 서둘렀다.
아침에 입고 나갔던 옷을 벗고 샤워를 마친 뒤, 새로운 옷을 꺼내 입었다.
그동안 이향숙에게 여러모로 스타일 도움을 받다 보니 이제 혼자서도 제법 옷을 멋지게 입을 줄 알게 됐다.
강지한이 오늘 선택한 조합은 화이트 셔츠에 블랙 니트, 어두운 톤의 차콜 슬렉스와 블랙 옥스퍼드 슈즈였다.
그리고 클래식한 베이지색 롱코트를 걸치는 것으로 마무리.
“이 정도면 괜찮겠지.”
그가 전신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감상했다.
예소린과 만나기로 한 시간은 5시.
슬슬 밖으로 나가려는데 도근한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 근한아.”
-야, 오픈일 사흘만 늦추자.
“응? 뭔 일 있어?”
-수도가 얼어서 터졌다. 좀 크게.
“아…….”
도근한의 스테이크 하우스는 독립된 건물이었다.
그런데 날씨가 추워지면서부터 한 달이 넘도록 방치되었다.
한겨울인 만큼 수도 관리를 안 해주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사흘이면 복구돼?”
-응.
“그래. 알았다. 차라리 잘됐어. 나도 미리 가서 주방 동선도 익히고 하지 뭐.”
-일전에 한 번 서봐서 그런 거 필요 없다더니.
“넘어진 김에 쉬어가는 거지.”
-그럼 내일 오냐.
“응.”
-알았다. 연락해.
통화를 끝낸 강지한이 외출을 서두르며 유진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형수님. 다른 게 아니라 레스토랑 오픈일을 좀 늦춰야 할 것 같아서요. 네. 홈페이지에 올라온 공지글 내용을 12월 29일 토요일로 수정 부탁드릴게요. 네 감사합니다.”
지한 푸드의 총무실장 유진아는 현재 홈페이지 관리도 겸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레스토랑 관련 사항을 알리고 나서야 강지한은 마음 편히 차를 몰고 떠날 수 있었다.
* * *
강지한과 예소린은 구봉산의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오늘을 기념하기 위해 강지한이 이미 예약을 해두었던 것.
레스토랑은 양식 코스를 서비스하는 곳이었다.
강지한은 디너 메인 코스 요리 2세트를 주문했다.
본격적인 메뉴 서빙 전에 나온 식전빵을 찢어 먹으며 강지한과 예소린은 차창 너머 보이는 춘천의 야경을 감상했다.
아직 6시밖에 되지 않았지만 겨울의 낮은 짧았다.
노을을 밀어내며 어두워지는 하늘은 주홍빛과 보랏빛이 뒤섞여 황홀경을 자아내고 있었다.
“아름답다, 그치?”
예소린이 창밖을 보며 물었다.
“응. 정말 아름답네.”
대답하는 강지한의 시선은 야경이 아닌 예소린의 얼굴에 꽂혀 있었다.
강지한은 그녀가 자신의 애인이라는 사실에 가끔씩 놀라곤 한다.
예소린의 미모는 객관적으로 봐도 여느 여배우들에게 절대 밀리지 않는 수준이다.
지금만 해도 다른 테이블에 있는 사내 녀석들이 제 짝을 앞에 두고서 힐끔거리며 예소린을 훔쳐보고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뽀삐의 하루에 오는 남자 손님들은 사실 강아지보다는 예소린을 보러 오는 것이었다.
이미 그녀는 춘천의 미인으로 넷상에서 명성이 자자했다.
강지한에게는 말 안 했지만 수많은 연예기획사 관계자로부터 명함도 받곤 했다.
물론 연예계에 진출할 생각이 전혀 없었던 예소린은 절대 연락하지 않았지만.
두 사람이 야경을 감상하는 가운데 웰컴 드링크를 시작으로 음식들이 적당한 간격을 두고 서빙되었다.
진한 크림과 양송이의 풍미가 가득 퍼지는 양송이 스프가 첫 타자였다.
그 다음에는 계절 야채에 발사믹 오일과 브리 치즈로 맛을 낸 샐러드가 나왔다.
에피타이저는 찐 굴을 메인으로 한 요리였는데, 곁들여 나온 새우와 생연어, 치즈 튀일, 홀랜다이즈 소스가 조화롭게 어울렸다.
파스타는 작은 접시에 한두 입 거리로 담겨 나왔다.
강지한은 사프론 크림에 연어살이 들어간 살모네, 예소린은 비스크 소스에 새우를 넣어 딸리아뗄레 면으로 조리한 그랑끼오를 선택했다.
대식가인 두 사람에겐 참 아쉬운 양이었으나 맛은 만족스러웠다.
이어진 메인.
강지한은 양안심스테이크를 미디움 템포로, 예소린은 한우안심스테이크를 미디움레어템포로 주문했다.
둘 다 익힘 정도가 괜찮았고, 곁들인 소스와 가니쉬도 나쁘지 않았다.
특히 양안심에서는 양고기에서 맡아질 수 있는 특유의 냄새를 잘 잡아서 양고기를 먹지 못하는 사람도 거부감을 느끼지 않을 것 같았다.
다만, 강지한은 그 냄새를 좋아하기에 특징이 사라진 것 같아 조금 아쉬웠다.
후식은 수제 아이스크림과 드립 커피 중에서 선택할 수 있었는데, 둘 다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만족스럽게 식사를 마치고 나니 한 시간이 훌쩍 넘어 있었다.
오늘 레스토랑에서 서빙된 음식의 레벨은 파스타와 메인이 5, 그 외에는 4였다.
보통 사람들이 맛있다고 느낄 수 있는 수준이었으나 고급 요리를 먹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다만 차창 너머 경치나 레스토랑 내부의 분위기가 좋았고 가격 역시 1인 5만 원 수준으로 터무니없이 비싸지 않았기에 분위기 값을 더 지불했다고 생각하면 만족스러웠다.
레스토랑을 나온 두 사람은 차에 타자마자 시선을 교환하며 씩 웃었다.
뭔가가 통한 것.
“소린 씨, 배 안 찼지?”
“나도 그거 물어보려고 했는데.”
“곱창전골에 한잔?”
“콜!”
강지한이 신나게 곱창전골 맛집으로 차를 몰았다.
* * *
크리스마스이브라고 모두가 행복한 건 아니다.
연인이 있는 청춘은 세상이 핑크빛이지만 싱글인 청춘은 외롭다.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애인이 있었으나 지금은 싱글이 된 최동현은 친구 두 녀석과 곱창집에서 술을 들이붓고 있었다.
낮부터 달리다 보니 아직 밤이 깊지도 않았는데 벌써 3차였다.
그의 시선은 한 시간 전부터 새로 들어온 어느 남녀 커플에게 향해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여자 쪽이었고 그녀는 예소린이었다.
“야, 쟤 진짜 예쁘지 않냐.”
최동현이 친구들에게 물었다.
친구들은 짜증 섞인 반응을 보였다.
“그만 좀 물어 병신아.”
“벌써 100번째다. 관심 있으면 남자답게 가서 꼬시던가.”
“개새들아, 애인이 있잖아.”
“올~ 지금 일면식도 없는 애인 걱정해 주시는 거예요? 천하의 최동현이도 많이 죽었네.”
친구의 도발에 최동현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그때 강지한이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최동현은 친구들을 똑바로 노려보며 말했다.
“남자 새끼 화장실에서 나오기 전에 번호 따온다.”
장담을 한 최동현은 잽싸게 예소린의 곁으로 다가가 물었다.
“저기요. 방금 화장실 간 사람 애인이에요?”
“네?”
예소린이 최동현을 바라봤다.
많이 쳐주어야 이제 스무 살 중반이나 되었을 법해 보였다.
얼굴은 일반인 치고는 대단히 잘생겼다.
“그런데요, 왜요?”
“그쪽 마음에 들어서요.”
“남자친구 있다고 대답했는데요.”
“남자친구라는 게 그렇잖아요. 있다가도 다른 사람으로 바뀌고 그런 거잖아요. 제가 진심으로 마음에 들어서 그러는데 번호 한 번 살짝 주실래요?”
아무래도 얼굴 하나 믿고 이런 식으로 여자한테 들이댔다가 성공한 경험이 많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예소린에겐 먹히지 않았다.
“죄송해요. 생각 없어요.”
“에이, 그러지 말고 번호 좀 줘봐요.”
“저 생각 없다고 했는데요?”
“아이, 거 참. 되게 빼신다. 나 엄청 재미있어요. 자상하고. 한 번만 연락해 보시면…….”
최동현이 말을 하며 테이블 위에 놓인 예소린의 스마트폰을 가져가려 했다.
그 순간,
턱.
예소린의 손이 번개같이 최동현의 손목을 낚아챘다.
최동현은 그것을 무시하고 손을 쭉 뻗으려 했다. 여자 힘이 세 봤자 거기서 거기지라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손목이 잡힌 지점에서 손은 더 이상 앞으로 나가지 않았다.
‘어?’
당황한 최동현이 팔에 더욱 힘을 줬다. 그 순간 예소린이 최동현을 똑바로 쳐다보며 잡은 손목을 놓아버렸다.
“억!”
스스로의 힘을 주체 못해 중심을 잃은 최동현이 앞으로 튀어나갔다.
하마터면 테이블에 처박혀 고꾸라질 뻔했는데, 간신히 몸을 틀어 몇 걸음 비틀거리다가 겨우 중심을 잡고 섰다.
“흐어억.”
놀라 숨을 몰아쉬는 최동현에게 예소린이 물었다.
“괜찮으세요?”
“아…… 네.”
“술이 과하셨나 봐요. 그만 가보세요.”
예소린이 싱긋 웃었다.
최동현은 그 미소가 결코 달갑게 다가오지 않았다. 예소린이 최동현의 팔목을 놓기 직전, 마주쳤던 시선 속에서 느껴지던 말도 못할 위압감이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짧은 순간이지만 최동현은 본인이 호랑이 앞에 선 토끼라도 된 것 같은 느낌에 말 그대로 잔뜩 쫄아버렸었다.
‘뭐야, 이 여자?’
기(氣)에 완전히 압도당했다.
만약 싸운다면 반드시 지고 말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게다가 자신의 손목을 잡아채 꿈쩍도 않던 완력, 힘을 역이용하는 수단까지.
보통이 아니었다.
최동현은 쭈뼛거리면서 자신의 테이블로 돌아갔다.
“뭐야 병신. 지 혼자 다리 풀려서 꼴깝하다 오냐. 크크크.”
“미친놈. 몸 개그만 존나 보여줬어요? 아 개웃긴다.”
친구들이 미친 듯이 놀려댔지만 최동현의 귀에는 녀석들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그때 강지한이 화장실에서 나오자 예소린이 백을 챙겨 일어섰다.
“지한 씨, 다 먹었는데 자리 옮기자.”
“그럴까?”
예소린이 해맑게 미소 지으며 강지한의 팔짱을 끼고 곱창 집을 나섰다.
열렸다 닫히는 유리문을 최동현이 넋 나간 듯 바라봤다.
‘근데…… 어디서 본 것 같기도 한데.’
예소린의 정체가 뭔지 궁금해지는 최동현이었다.
* * *
크리스마스 다음 날.
강지한은 아침 일찍 서울로 향했다.
그의 목적지는 구(舊) 스테이크 하우스이자 현(現) 지한 레스토랑 건물의 지하 주차장이었다.
두 시간이 채 되지 않아 건물에 도착한 강지한이 차를 파킹해 놓고 건물 정문 앞에 서서 외관을 감상했다.
실내는 리모델링을 해 많이 바뀌었겠으나 외관은 간판 말고 거의 변한 게 없었다.
강지한의 시선은 뿌듯함을 가득 담은 채 간판에 박혀 있었다.
‘지한 레스토랑’.
그 여섯 글자에 강지한의 가슴이 마구 뛰었다.
그가 닫혀 있는 레스토랑의 문 앞에 섰다.
그러자 검게 코팅된 유리 자동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이미 도근한이 일찍 나와서 문을 다 열어놓은 것.
안으로 들어서니 불이 은은하게 켜져 있는 홀이 그를 반겼다.
넓은 홀은 강지한의 의도대로 빈티지함과 고급스러움이 잘 어우러져 있었다.
테이블과 의자, 조형물이나 벽에 걸린 그림, 예술품들, 작은 기물들까지 전부 전체적인 톤과 매너에 맞는 것들로 싹 바뀌어 있었다.
오픈되어 있는 주방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왔냐.”
주방에서 검은색 조리사복을 입고 선 도근한이 강지한을 반겼다.
“응.”
대답하는 강지한의 앞에 메시지가 주르륵 나타났다.
[Stage 4. 지한 레스토랑]
[목표: 국내 인지도 90 이상의 셀럽 세 명의 방문.]
[성공 보상: 잃어버린 강지한의 모든 기억.]
[오픈 전입니다.]
[레벨 업은 오픈 이후 가능합니다.]
[상급자의 난이도가 적용됩니다.]
[만족도는 10일 동안만 습득 가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