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7
Restaurant 216. 강지한 띄우기 대회
춘천 식문화 알림이 요리 대회가 열리는 서면 어린이글램핑장.
고급 대형 세단 한 대가 다급히 주차장에 섰다.
그리고 뒷좌석 문이 벌컥 열리며 변노민 의원이 튀어나왔다.
그는 얼굴이 파랗게 질려서 대회장을 향해 전력 질주했다.
변노민의 머릿속에는 지금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대체 왜? 그 늙은이가 뭣 때문에 여길 와?’
진상명은 이미 정계를 은퇴한 사람이다.
장관직까지 보내다가 지금은 일반인의 신분으로 유유자적 살아가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실존하는 정재계 인물들 대부분을 때려잡을 수 있는 이가 진상명이었다.
오죽하면 별명이 신사, 아니 사신이겠는가.
그런 진상명이 춘천까지 와서 변노민을 찾고 있었다.
눈썹이 휘날리도록 달려가는 그의 시야에 대회장 무대가 언뜻 보였다.
한데 대회장 위에는 어디선가 많이 본 것 같은 늙은이가 서 있었다.
‘누구더라?’
생각은 짧았다.
변노민의 머릿속에 노인의 이름 세 글자가 떠올랐다.
‘배, 배배, 백진목!’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거대 식품 회사 세진 그룹의 회장.
어지간한 정재계 사람들도 한 수 접어주고 보는 이가 바로 그였다.
‘저 노인은 또 왜 온 거야?’
함기택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는 변노민의 귀에 스피커를 통한 백진목의 음성이 들려왔다.
“저는 오늘 여기 이 자리에 강지한 사장님의 초대로 함께하게 되었습니다. 아, 물론 특별심사위원 자리는 제가 욕심이 생겨서 주최 측에 땡깡 좀 피웠습니다. 하하. 특별심사위원으로 자리한 만큼 점수는 매기지 않겠으나 음식들 맛은 좀 보고 가겠습니다.”
‘가, 강지한의 초대로 왔다고?’
순간 변노민은 무언가 잘못 건드렸다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사신 진상명에 이어 세진 그룹 회장 백진목까지.
한 명만 움직여도 춘천시를 떠들썩하게 만들 수 있는 거목이 둘이나 걸음했다.
“헉! 허억! 헉!”
변노민의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함기택과 이양규가 있는 무대 뒤 상황실에 겨우 도착한 그가 진상명을 바로 알아보고서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어, 어르신! 허억! 헉! 부, 부름 받고 바로 달려왔습니다.”
차마 숨도 고르지 못하고서 인사부터 건네는 변노민을 진상명이 바라보며 빙그레 미소 지었다.
“오래간만이야, 변 의원. 잘 지냈는가?”
“그, 그러믄요! 어르신 덕분에 후우우. 후우. 자, 잘 지내고 하아, 있었습니다. 하아아.”
변노민이 겨우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진상명의 말에 다시 숨이 턱하고 막혔다.
“내 덕분에 잘 지냈다? 내가 뭘 해준 기억이 없는데. 이거 사과부터 해야겠군. 이 시간 이후로 나 때문에 잘 못 지내게 될 테니.”
“네, 네? 어르신. 농담이 심하십니다. 저 간 떨어져 죽는 꼴 보려고 이러십니까? 하, 하하. 저, 시, 식사는 하셨습니까? 제가 춘천 최고의 식당으로 안내해 드리겠…….”
“하나 묻지. 강지한을 어찌 생각해?”
“네?”
“나 두 번씩 말하는 거 별로 안 좋아하는데.”
“아! 강지한 사장 말씀입니까. 보기 드문 건실하고 훌륭한 인재입니다. 그야말로 춘천의 자랑이라고 할 수 있지요.”
“진정 그렇게 생각하나?”
“그럼요.”
“근데 그 춘천의 자랑을 왜 밟아 죽이려 했을까?”
모든 것을 꿰뚫고 있는 듯한 진상명의 말에 변노민은 식은땀이 흘렀다.
“아니 그 무슨 당치도 않은 말씀이십니까. 하하.”
일단 변노민이 모른 척 발뺌했다.
그러자 진상명의 미소가 더 짙어졌다.
한데 웃고 있는 것은 입모양뿐이었다.
눈은 전혀 웃고 있지를 않았다. 오히려 진득한 살기가 흉흉하게 뿜어져 나와 변노민을 옭아맸다.
“변의원이 아직 날 잘 모르는 것 같으니, 나에 대해 두 가지를 알려주도록 하지. 우선 첫째, 나는 인내심이 없어. 둘째, 사람 보는 눈 하나는 기가 막히지. 이게 뭘 뜻하는지 알겠어?”
진상명이 언젠가부터 완벽한 하대를 하고 있었다.
자존심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사람이 바로 변노민이다. 다른 사람의 눈도 있는데 이렇게까지 하대를 하면 고운 눈으로 상대를 보지는 못했다.
한데 지금의 변노민은 흡사 고양이 앞에 놓인 쥐 같았다.
기분 나쁜 기색은커녕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넘길 수 있을지만 고민하고 있는 게 여실히 보였다.
“이미 강 사장에게 자초지종을 듣고 왔어. 더러운 목적을 가지고 이 대회를 열었다지?”
“아니 강지한 사장이 왜 그런 말을……. 당치도 않은 모함입니다.”
“모함이라? 그럼 이건 어떻게 설명할래?”
말을 하며 진상명이 스마트폰을 꺼내 캡처 된 누군가의 문자 내역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것은 강지한이 구자승과 주고받은 것이었다.
변노민은 당황한 기색을 겨우 감추고서 너스레를 떨었다.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어르신. 대체 이런 모함을 해봤자 본인들에게 어떤 이득이 있다고…….”
“내가 말했지. 사람 보는 눈 하나는 기가 막히다고. 강지한 사장은 그런 비틀린 버러지가 아니야. 그리고 인내심이 없다는 것 또한 얘기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결국 내 인내심을 시험하는 우를 저지르는구나.”
진상명의 미소가 사라지고 눈에 불길이 확 일었다.
“어르신! 그게 아니라!”
“입 다물어.”
“헙!”
“네 두 귀로 똑똑히 들어라, 노민아.”
진상명은 이번엔 스마트폰으로 음성 파일 하나를 플레이시켰다.
그러자 변노민의 귀에 아주 낯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하나는 자신의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구자승의 것이었다.
-자승아 다섯 장 줄게. 하여튼 강지한 그놈 점수만 최저로 매기면 돼. 우승은 무조건 천 여사고. 다른 녀석들도 그렇게 하기로 하고 다섯 장씩 챙겨갔어. 네 작품 만들다 만 거 아무거나 보좌관 편으로 보내. 그거 오백 주고 산 걸로 할 테니까.
-됐소, 형님. 돈은 필요 없고…… 대신 다른 부탁 좀 들어줬으면 하는데요.
-뭔데?
-이번 일 끝으로 나 더 이상 형님이 내미는 불편한 손 안 잡았으면 하오.
녹음 파일을 들려준 진상명이 바로 물었다.
“많이 들어본 목소리지?”
“…….”
변노민의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것 같았다.
‘구자승 이 새끼…… 통화를 녹음해 둬?’
게다가 녹음 파일까지 넘겼다.
이렇게 뒤통수를 맞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사고를 쳐도 제대로 쳐버렸다.
‘여기서 더 발뺌하다가는 뼈도 못 추린다.’
계산을 끝낸 변노민이 바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렸다.
“죄,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어르신! 강지한 사장님이 어르신께서 아끼는 사람인 줄 모르고 크나큰 우를 범했습니다! 살려주십시오!”
그 모습에 이양규 예술감독과 함기택 이사장이 크게 놀랐다.
조금 전까지는 모른다고 잡아떼던 사람이 어찌 저렇게 바로 태도를 전환하는지, 흡사 블랙코미디를 보는 것만 같았다.
그건 그렇고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었다.
“아니…… 노민이 너…….”
함기택이 변노민을 보며 부들부들 떨었다.
그는 자신에게 춘천시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요리대회를 열자며 부추겼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것이 다 더러운 음모를 위한 거짓놀음에 불과했던 것이다.
친구를 철썩같이 믿고 있었던 함기택은 배신에 울화통이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변노민은 지금 그런 함기택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우선은 눈앞의 화산부터 잠재워야 했다.
“제발 살려주십시오, 어르신!”
바닥에 머리를 쾅쾅 찍어 누르는 변노민.
그 모습을 보던 함기택이 아랫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고서는 떠나 버렸다.
이양규 감독은 변노민의 행동에 질려 속이 울렁거렸다.
하지만 진상명은 일말의 동요도 없는 고요한 음성을 던질 뿐이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어차피 너는 옷 벗어야 돼. 어떻게 할래? 스스로 벗을래? 아니면 내가 벗겨줄까?”
“어르신! 제발 한 번만 사정 봐주십시오! 제가 이렇게 빌겠습니다!”
“한 번만 더 묻는다. 네가 벗을래? 내가 벗겨줄까?”
“어르신! 이러시면 안 됩니다. 저 정말 여기까지 힘들게 올라온 불쌍한 인간입니다! 제발 저 좀 봐주십시오! 으허어어엉!”
변노민은 결국 진상명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지며 눈물을 흘려댔다.
그 모습이 필요 이상으로 과장되어 있는 것이 누가 봐도 연기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너 아무래도 크게 혼나야겠다.”
결국 진상명의 꼭지가 돌았다.
* * *
한편, 무대 위에서는 백진목의 얘기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그는 강지한과의 사이에서 있었던 고마운 일화를 간단히 얘기해 주었다.
오래도록 잃어버렸던 입맛을 강지한 덕분에 춘천 시장에서 되찾을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에 모든 시민들이 감격의 박수를 터뜨렸다.
백진목이 등장함으로써 강지한의 존재감이 더더욱 커져가고 있었다.
강지한을 죽이기 위해서 벌인 요리대회가 강지한을 띄워주기 위한 자리로 변해 버렸다.
천명옥은 흘러가는 상황을 막을 방법이 없어 그저 쓴웃음만 삼켰다.
속은 까맣게 타들어갔다.
“늙은이가 말이 길어졌네요. 그럼 저도 이제 손님으로서 대회를 즐겨보도록 하겠습니다.”
인사를 마친 백진목이 심사위원들 사이에 새로 놓인 의자에 앉았다.
그의 자리는 공교롭게도 구자승의 옆이었다.
백진목은 마이크를 끄고 구자승에게 귓속말을 건넸다.
“큰 용단을 내리셨습니다.”
“……강 사장이 두 분 얘기를 저한테 하고 나서야 내린 결정입니다. 심히 부끄럽습니다.”
강지한은 오늘 본선이 열리기 한 시간 전, 구자승에게 자신의 계획을 얘기했다.
아울러 구자승에게는 어떠한 피해도 가지 않도록 두 어르신에게 말을 잘 해주겠다는 약속까지 더했다.
어찌되었든 구자승으로 인해 천명옥과 변노민의 음모를 알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에 구자승은 이왕 이렇게 된 거 제대로 강지한을 돕고자 마음먹었다.
그래서 혹시 몰라 녹음해 두었던 변노민과의 통화 내역 파일을 보내준 것이다.
“강 사장이 말하길 구 조각가님의 용단이 없었다면 꼼짝없이 당할 뻔했다더군요. 그러니 달콤한 사탕발림에 잠시 흔들린 건 없던 일로 하십시다.”
“…….”
구자승은 스스로가 부끄러워 더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다른 심사위원 두 명은 이 일을 이제 어찌해야 하나 싶어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다.
그런 그들에게 백진목이 친근하게 말을 걸었다.
“두 분 모두 양심에 한 치의 어긋남 없는 심사해 주실 거죠? 그럴 거라고 믿어요.”
심사위원들에겐 그 말이 제대로 하지 않을 경우 재미없을 거라는 협박으로 들렸다.
그리고 시식이 시작되었다.
* * *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백진목은 강지한의 음식을 맛보며 황홀경을 느낄 지경이었다.
‘멈춰 있지 않고 계속해서 나아가는 구나.’
강지한이 미각을 많이 찾아주었다 해도 평범한 사람들에 비해서는 여전히 혀가 무딘 그였다.
그런데 오늘 맛본 강지한의 음식은 그 안에 담겨 있는 모든 맛들을 전부 음미할 수 있었다.
미각이 둔감해진 사람도 이럴진대 심사위원들은 어땠겠는가?
‘다시 먹어도 놀랍다.’
‘확실히 천명옥보다 위야.’
다들 강지한의 음식에 감탄을 했다.
“자~ 시식이 끝났습니다. 심사위원 여러분께서는 조속히 채점을 마쳐 주시기 바랍니다.”
진행자의 말에 구자승은 빠르게 채점을 끝냈다.
하지만 다른 두 심사위원들은 강지한의 채점란에서 쉽게 손을 놀리지 못했다.
이미 변노민으로부터 받은 돈이 있었다.
그런데 그 사람만 믿고 최하점을 주자니 강지한과 백진목의 관계가 영 거슬렸다.
고민하는 두 사람에게 구자승이 나직이 한마디를 흘려주었다.
그러자 정신이 번쩍 든 심사위원들은 빠르게 손을 놀려 채점을 마쳤다.
구자승이 건넨 말은 간단했다.
“밑에 진상명 어르신도 와 있다.”
신사 진상명.
그 이름은 변노민에게 이미 여러 번 들은 적이 있어 익히 알고 있었다.
안 좋은 쪽으로 찍히면 무조건 죽었다고 생각해야 하는 악마가 바로 진상명이라고 변노민은 그들에게 우스개소리처럼 말했었다.
그때는 몰랐겠지.
사신의 낫이 자신의 목을 베어갈 줄은.
심사위원들의 채점지를 걷어간 진행자가 그것을 스텝에게 넘겨주었다.
스텝이 총합점을 계산해 순위를 매기는 동안 천명옥은 불안한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그저 눈만 꼭 감았다.
어쩐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곁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강지한의 음성이 귓전을 때렸다.
“인간의 가장 무서운 적은 두려움이라고 하더군요. 제 무엇이 그렇게 두려우셨습니까. 저는 그저 제가 좋아하는 일을 해나갔을 뿐입니다. 앞으로 벌어질 모든 일은, 천명옥 대가님이 품고 있던 쓸데없는 두려움으로 인해 저지른 과오가 초래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