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5
Restaurant 214. 타고난 연기자
12월 23일 아침.
춘천 식문화 알림이 본선이 펼쳐지는 날.
강지한은 촉촉하고 따스한 무언가가 뺨과 입을 핥는 느낌에 눈을 떴다.
그러자 몽글몽글 솜사탕 같은 것이 뿌연 시야에 잡혀 두둥실 떠다니는 게 보였다.
눈을 비비고 자세히 보니 설탕이 얼굴이었다.
헥헥헥!
설탕이는 자신의 주인이 잠에서 깨자 꼬리를 흔들었다.
한동안 아침에 홀로 맞았던 강지한은 설탕이가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설탕아~ 잘 잤어?”
왕!
강지한이 설탕이를 품에 안고 데굴데굴 굴렀다.
한참 동안 애정 표현을 하고나서 시간을 확인하니 8시.
“설탕이가 와서 그런가. 다른 날보다 더 푹 잔 것 같다.”
말미에 기지개를 켠 강지한이 방을 나와 잠든 주방을 깨웠다.
그가 얼마 전 들여놓은 대형 냉장고를 열었다.
그 안에는 가지각색의 육수통이 여덟 개나 들어 있었다.
한돈선의 지식이 레벨 업 한 이후 육수의 종류를 두 개에서 다섯 개로 늘린 그였다.
한데 그 사이에 다시 세 개가 더 늘어난 것.
기존의 다섯 개는 채수 두 개와 고기 육수 둘, 해물 육수가 하나였다. 거기에 고기 육수, 고기와 해물 혼합 육수, 채수, 고기, 해물 혼합 육수가 하나씩 추가됐다.
강지한은 그중에서 해물 육수를 꺼냈다.
그것을 냄비에 붓고 손질한 꽃게 두 마리와 대파, 무를 큼직하게 썰어 넣은 뒤 팔팔 끓였다.
꽃게와 무, 파의 풍미가 충분히 우러나자 직접 담근 맛간장과 천연 소금을 넣어 간을 잡았다.
“호록. 흠, 좋다.”
강지한이 완성된 국물에 어제 만들어 둔 수제 어묵을 넣고 조금 더 끓였다.
그것으로 어디에서도 흉내 낼 수 없는 고급 어묵탕이 완성되었다.
거기에 후추를 살짝 뿌리는 것으로 마무리.
강지한은 뜨끈한 어묵탕을 통에 넣어 담은 뒤, 바로 화장실에 들어가 샤워를 했다.
설탕이는 강지한이 들어간 화장실 문 앞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그러고서는 닫힌 문을 바라보며 목석처럼 자리를 지켰다.
샤워를 마친 강지한이 나오자 헥헥 대며 그 뒤를 졸래졸래 따라다녔다.
외출복을 걸치는 강지한은 그런 설탕이를 보며 헤헤 웃었다.
“설탕아, 넌 귀여우려고 태어났니?”
왕!
“흐흣, 오늘 오래간만에 친구들 만나러 가는데, 어때? 기분 죽이지?”
왕왕! 헥헥헥.
“그래, 가자 설탕아!”
외출 준비를 마친 강지한이 어묵탕을 챙겨 설탕이와 함께 집을 나섰다.
* * *
오전 9시.
예소린은 뽀삐의 하루 오픈 준비를 위해 분주했다.
그녀의 애견카페에서 일을 도와주고 있는 연주연도 함께였다.
두 사람의 포지션은 확실히 정해져 있었다.
예소린이 강아지들의 상태와 컨디션을 체크하며 한 녀석 한 녀석 케어해 주는 동안 연주연이 주방과 홀을 정리한다.
전에는 예소린 혼자 했던 일이었는데 둘이 함께한 이후부터는 출근 시간에 한 시간 반이나 여유가 생겼다.
두 사람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을 때였다.
헥헥헥!
왈왈!
멍멍!
갑자기 강아지들이 난리가 났다.
하나같이 꼬리를 흔들며 현관 근처로 가서 오두방정을 떨어댔다.
“안 돼~ 소금아. 미소야. 레미! 얌전히~”
예소린이 강아지들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듣는 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럴수록 더 안달이 나서 날뛰었다.
카페에 있는 강아지들은 한 마리 예외 없이 현관에 모여서 폴짝폴짝 뛰고 크게 짖었다.
“얘들이 왜 이래?”
청소를 하던 연주연이 놀라서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반면 예소린은 강아지들이 난동을 벌이는 원인을 이미 알고 있었다.
딸랑-
카페 문이 열리며 반가운 얼굴들이 들어왔다.
강지한과 설탕이였다.
“소린 씨, 안녕. 주연 씨 좋은 아침입니다.”
“왔어, 내 사랑? 설탕이도 오래간만이야! 꺄아~ 간만에 보니까 더 귀엽다, 너.”
“앗! 강 사장님! 설탕이도 왔네?”
예소린이 강지한에게 진한 포옹을 했다.
이를 본 연주연이 울상을 지었다.
“싱글인 사람 서러워서 살겠냐고.”
한편.
끼잉! 끼잉!
멍멍!
헥헥헥헥!
설탕이를 코앞에 둔 강아지들은 더더욱 난리가 났다.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도는가 하면, 오줌을 찔끔거리는 녀석까지 있었다.
설탕이도 그런 강아지들을 보며 반가운 기색으로 꼬리를 흔들었다.
“자자, 들어가자.”
강지한이 현관과 홀 사이를 막고 있는 간이문을 열어주었다.
그러자 설탕이가 바람처럼 홀 안으로 들어서서 여기저기로 뛰어다녔다.
그런 설탕이의 뒤를 강아지들이 우르르 쫓아 달리며 진풍경이 펼쳐졌다.
“으앗!”
놀란 연주연이 얼른 주방으로 대피했다.
강지한과 예소린은 손을 잡고 서서 그런 강아지들의 모습을 재미있게 구경했다.
한참을 우다다다! 하며 달리던 강아지들은 설탕이가 멈춰 서자 똑같이 멈춰 서서는 애정공세를 퍼부었다.
핥고, 털을 비비고, 벌렁 뒤집어져서 배를 보이고.
설탕이는 그런 강아지들을 한 마리 한 마리 건드려 주고는 마지막으로 소금이를 바라봤다.
설탕이와 시선이 마주치자 소금이의 입꼬리가 마치 웃는 것처럼 위로 말려 올라갔다.
설탕이는 그런 소금이의 코를 할짝 핥아주었다. 소금이도 설탕이의 코를 핥았다. 그러고는 서로가 서로를 구석구석 핥고 비벼대기 시작했다.
그에 주방에 있던 연주연이 좌절했다.
“강아지도 연애를 하는데…… 외로워라.”
푸념을 늘어놓는 연주연을 예소린이 타박했다.
“자기 좋다는 남자 많으면서. 주연 씨가 눈이 너무 높은 거예요.”
“저는요. 적어도 강 사장님 정도는 되는 남자 아니면 만나지 않을 거예요.”
“어머. 그런 남자 흔하지 않을 텐데요.”
“그래서 제 연애가 계속 늦어지네요.”
두 여인이 수다를 떠는 동안 강지한은 가져온 어묵탕을 오픈했다.
그러자 확 하고 풍기는 고소한 냄새에 강아지들이 강지한의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요 녀석들. 이건 너희들 먹을 거 아니야.”
어묵탕을 본 연주연이 주방에서 센스 있게 개인 접시와 국자, 포크를 가지고 왔다.
“근데 갑자기 웬 어묵탕이야?”
“마스코트 설탕이가 복귀하는 날인데 빈손은 허전해서 좀 만들어왔어. 그리고 겨울이잖아.”
“맞아. 겨울엔 어묵탕이지.”
세 사람은 한 테이블에 도란도란 둘러앉아 어묵탕을 먹기 시작했다.
이미 예소린과 연주연은 강지한의 솜씨를 알고 있었다.
바로 옆이 지한 분식이라 어묵탕도 자주 사먹었다.
그런데,
“어머.”
“와…….”
지한 분식에서 먹어봤던 그 어묵탕 맛이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맛있었다.
까놓고 말해서 비교가 되지를 않았다.
이미 지한 분식의 어묵탕도 다른 분식집에 견줄 바가 아니었는데 그 이상이라니.
예소린과 연주연은 어묵탕을 맛있게 먹으면서도 이게 정말 말이 되는 일인가 싶었다.
“냠냠. 호록. 꿀꺽. 아, 정말 맛있어, 지한 씨!”
“대박이네요, 진짜. 어제까지 인생 어묵탕은 지한 분식이었는데, 지금 이걸로 바뀌었어요.”
“맛있게 먹어줘서 고마워요.”
“사장님, 또 실력이 일취월장하셨나 봐요.”
“전보다 조금 늘었어요.”
“비결이 뭐예요?”
“꿈속에서 만난 영감님께서 영감을 줬어요.”
“……사장님은 앞으로도 요리만 하시고 개그는 하지 마세요.”
연주연의 정색에 강지한이 픽 웃었다.
농담 같은 말이었지만 농담이 아니었다.
정말 꿈속에서 한정신을 마주하고 난 뒤 강지한의 그레이드가 올라갔으니까.
“근데 자기 오늘 춘천 식문화 알림이 본선 나가야 하지 않아?”
어묵탕을 한참 먹던 예소린이 갑자기 떠오른 듯 물었다.
“12시부터라서 시간 널널해.”
“1등 하고 올 거지?”
“그럼~”
강지한은 자신했지만 주최 측 심사위원들은 이미 그에게 최하점을 주게 되어 있었다.
이를 모르는 강지한이었으나 필시 변노민이 무슨 수작을 부렸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고 있던 바다.
그럼에도 당당하게 1등을 하고 돌아올 거라 대답할 수 있는 이유가 있었다.
강지한이라고 아무런 준비도 없이 부딪히려는 건 아니다.
그는 무엇보다 강력한 카드 한 장을 손에 쥐고 있었다.
감히 변노민과 천명옥은 상상도 못할 그런 카드를.
때문에 이토록 마음이 여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세 사람이 어묵탕을 거의 다 먹어갈 때쯤이었다.
딸랑-
애견 카페 문을 열고 두 명의 청년이 들어섰다.
그와 동시에 진득한 알콜 냄새가 확 하고 풍겼다.
대략 이십대 초반 정도 되어 보이는 그들 중 한 명은 머리카락이 빨간색이었고, 다른 한 명은 코와 입에 피어싱을 했다.
아울러 둘 다 손등이나 목 등 드러나는 곳에는 휘황찬란한 문신이 가득했다.
연주연은 그 비주얼만 보고서 겁을 집어먹었다.
하지만 예소린은 태연했다.
그녀가 시간을 확인했다.
현재 시간 9시 30분. 오픈까지 30분이 남은 상황.
“손님들, 죄송하지만 아직 오픈하지 않았거든요. 오픈하면 술 깨고 다시 찾아주세요.”
예소린이 정중하게 부탁했다.
그러나 젊은 취객들의 귀에는 그녀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어우, 강아지 새끼들 봐라. 존나 귀엽네.”
“여기 음료수 두 잔 아무거나 좀 주세요. 먹고 쉬었다 가게.”
취객들이 막무가내로 간이문을 젖히고 들어서려 했다.
그러자 예소린이 그 앞을 막아섰다.
“죄송한데 말씀드렸다시피 아직 영업시간 아니에요, 손님.”
“아니 그럼 문을 잠가 놓으시던가. 사람 헷갈리게. 문 다 열어놓고 뭐하는 거예요.”
“문 앞에 알림판이 클로즈로 되어 있는 거 못 보셨어요?”
“그럼 몇 시부터 여는데요?”
“10시 오픈이에요.”
“시간 거의 다 됐네. 그냥 30분 일찍 연 셈 쳐요.”
“그리고 취객은 출입 금지거든요.”
“별로 안 마셨어요. 우리. 야, 들어가 앉자.”
두 사내는 도저히 말이 통하지가 않았다.
그에 상황을 지켜보던 강지한이 몸을 일으키려 했다. 바로 그때였다.
갑자기 예소린의 눈빛이 확 변했다.
그녀가 전에 없이 살벌한 시선을 두 사내에게 던졌다.
“너희들……. 이 동네 몇 년 살았어?”
예소린의 입에서 서슬 퍼런 음성이 흘러나왔다. 동시에 기세 또한 확 변했다.
그 여리여리한 몸에서 닿기만 해도 얼어 버릴 것 같은 칼바람이 휘몰아치는 것 같았다.
잔뜩 취한 두 사내의 정신이 일순 확하고 깨어났다.
“……살 만큼 살았는데요?”
“그건 왜 물어봐요?”
“근데 날 몰라?”
“당신 누군데?”
빨간 머리가 눈을 부라렸다.
그러나 예소린은 전혀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강렬한 기세로 몰아붙였다.
“아, 모르시면 할 수 없고. 근데요. 모를 때 그냥 조용히 나가세요.”
“못 나가겠다면?”
“그럼 들어와 보시던가요. 대신 이후에 일어나는 일은 책임 못 져요.”
예소린이 생긋 웃었다.
그 미소가 잘 벼린 칼처럼 날카로웠다.
그저 카페 주인으로 생각했던 여인이 갑자기 세게 나오니 두 취객은 뭔가 찝찝해서 섣불리 밀고 들어갈 수가 없었다.
풍기는 기세도 그렇고 자신들을 앞에 두고서 눈 하나 깜빡 안 하는 저 여유하며 무언가 뒷배가 어마어마한 것 같았다.
그렇다고 여기서 그냥 내빼기에는 쪽팔렸다.
그때, 빨간 머리 청년의 눈에 간이문 앞으로 다가온 귀여운 강아지가 보였다.
설탕이였다.
‘저거다.’
빨간 머리 청년이 괜히 설탕이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으며 말했다.
“사실 제가 강아지를 좋아해서 그러는데 음료수만 마시고 바로 갈게요. 좀 들어가도 되죠?”
이렇게 은근슬쩍 분위기를 좋게 만들어서 쪽팔리지 않게 카페에 입성하려는 수작이었다.
한데 그때였다.
깨앵! 깽! 깨갱!
갑자기 설탕이가 죽겠다고 비명을 지르며 드러누웠다.
“왜, 왜 이래!”
빨간 머리 청년이 깜짝 놀랐다.
자신은 머리를 쓰다듬기만 했는데 왜 저러는 건지 모를 노릇이었다.
한데 문제는 그다음에 벌어졌다.
으르르르!
크르릉!
크르르르르!
설탕이가 괴로워하자 카페에 있던 모든 강아지들이 이를 한껏 드러내고서 두 청년에게 다가오고 있는 게 아닌가?
그 소름끼치는 광경에 청년들의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그때 예소린이 결정타를 날렸다.
“그렇게 들어오고 싶으면 들어들 오시던가.”
예소린이 간이문을 휙 열었다.
그에 청년들은 술이 확 깨서 소리쳤다.
“으악!”
“그걸 열면 어떡해요!”
멍멍멍!
왕왕!
컹컹!
청년들의 고함에 강아지들이 마구 짖어대며 다가왔다.
“아아악!”
“가, 같이 가!”
청년들이 걸음아 나 살려라 하며 카페를 나섰다.
이를 본 설탕이가 언제 아파 했냐는 듯 벌떡 일어나서 꼬리를 흔들었다.
연주연은 기가 막혀서 혀를 내둘렀다.
“설탕이 설마 연기한 거야? 대박.”
“역시 연기파 배우, 내 새끼.”
강지한이 설탕이의 연기력에 감탄했다.
“아니, 그보다 소린 씨. 방금 그건 무슨 소리예요? 내가 누군지 아냐고……. 설마 소린 씨도 연기한 거였어요?”
연주연의 물음에 예소린이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 연기 어땠어요?”
“어머나. 미쳤나 봐. 나 진짜인 줄 알았어요. 소린 씨한테 무슨 엄청난 뒷배경 같은 게 있는 건가 했다니까요.”
강지한도 연주연과 같은 심정이었다.
“소린 씨, 무슨 연기를 이렇게 잘해?”
예소린의 연기는 정말 범상치가 않았다. 그녀의 가정사나 인간관계에 대해 강지한은 이미 다 알고 있었다. 그저 홀아버지를 모시고 평범하게 사는 여인이었다. 그걸 인지하고 있는 강지한인 데도 조금 전 예소린의 연기를 볼 때는 뭔가 다른 배경이 있나? 싶을 정도였다.
그만큼 사람을 홀리는 연기였다.
“그러게. 그냥 상황이 이렇게 되니까 나도 모르게 막 그렇게 되네. 타고났나 봐. 호호. 그치, 설탕아?”
왕!
예소린이 허리를 숙이고 손바닥을 내밀자 설탕이가 거기에 앞발을 탁 갖다 대며 하이파브를 맞췄다.
“둘 다 타고난 연기자네.”
강지한이 그런 둘을 보며 그저 감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