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9
Restaurant 208. 양심이냐, 친분이냐
느닷없는 제안이었다.
구자승이 크게 뜬 눈으로 변노민을 쳐다봤다.
본업이 조각가인 자신에게 요리대회 심사위원으로 나오라고 하다니.
그러나 요새 그의 활동을 보고 있자면 이런 부탁을 하는 것이 무리도 아니었다.
하지만 조금 과한 자리가 아닌가 싶었다.
“형님, 심사위원까지는 좀 멀리 간 것 같소.”
“멀리 가긴. 에세이 쓴 거 보니까 글빨 죽이던데.”
“그걸 봤소?”
“SNS에도 글 열심히 올리더만. 어지간한 사짜들보다 낫더라.”
“하하, 금칠해 주니까 기분은 좋네.”
“금칠이 아니야. 춘천에서 너만 한 미식가도 없어. 하는 거다?”
기분이 좋아진 구자승은 결국 변노민의 제안을 수락했다.
“그래요, 뭐. 합시다. 대회는 언제쯤 열립니까?”
“다음 달 정도로 생각하고 있어.”
“12월이면 한창 춥겠네. 그걸 사람들이 많이 보러 올까 몰라.”
“인경 고등학교 체육관 빌려서 할 거니까 괜찮아.”
“한겨울엔 체육관도 추워요.”
“히터 빵빵하게 틀어놓으면 돼. 대회는 내가 열 건데 왜 네가 열을 내냐. 심사위원 감투 받아 놓으니까 막 소속감이랑 책임감이 생기고 그래?”
변노민의 핀잔에 민망해진 구자승이 헛기침을 했다.
“허험. 근데 갑자기 요리대회는 왜 여는 거요?”
“우리 춘천도 이제 다양한 음식문화를 광고해야 할 때가 되었지 않았나 싶어. 그래서 춘천의 유명한 식당 주방장들을 참가시키려고 하지. 그들에겐 주최 측에서 참가를 독려하는 개별 통보가 갈 거야. 물론 참가여부는 그들 뜻에 달렸겠지만. 우선은 공식적으로 홈페이지 접수 방식이니까. 지원한 식당 중 서른 곳을 뽑아 예선 치르고, 10팀만 붙일 거야. 그 10팀으로 본선 무대를 펼쳐서 1, 2, 3등을 뽑는 거지.”
“그래요? 그럼 명옥정과 지한 식당에도 참가 독려를 하겠군요.”
그 두 식당은 구자승이 춘천에서 최고로 치는 곳이었다.
맛있는 음식을 맛볼 기대에 잔뜩 부푼 구자승.
그런 그의 귀에 찬물을 끼얹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한 식당은 참가하지 않을 거야.”
“아니, 왜요?”
“이번 요리대회 취지가 춘천의 뛰어난 식문화를 알리자는 거잖아. 그러니 되도록 겹치지 않는 분야의 대가들을 한 명씩 모시는 게 좋다고. 명옥정도, 지한 식당도 한식이잖아. 그렇다면 누가 봐도 춘천에서 제일가는 한식당의 대가를 모시는 게 낫지.”
그 말을 듣고 난 구자승이 고개를 저었다.
“요즘 지한 식당 음식 먹어보면 그런 말씀 안 나올 거요. 솔직히 나는 지한 식당 음식들이 명옥정에 밀리지 않는다고 봐요. 게다가 손님들의 입에 많이 오르내리는 한식집도 명옥정 보다는 지한 식당이고.”
“허허. 천 여사가 들으면 서운할 소리 하고 있네. 너 천 여사랑 쌓아왔던 우정은 다 내다버린 참이야?”
“그건 그거고, 판단은 냉정하게 해야 하지 않소?”
“냉정하게 판단한 거야, 실질적 주최자인 내가.”
“너무 주관적인 생각 같은데요.”
“너 왜 이렇게 지한 식당을 두둔하냐? 거기 사장이랑 정이라도 들었어?”
“갑자기 대화가 왜 그쪽으로 튑니까?”
“이놈아, 애초에 이게 다 명옥정 띄워주려고 하는 일이야. 너 그런 식으로 나오면 나 불안해서 심사위원 자리 못준다.”
“명옥정에서 뭐가 아쉽다고 이런 일을…….”
고개를 갸웃거리던 구자승의 머릿속에 번개가 쳤다.
명옥정을 위해서 벌이는 대회.
하지만 대외적인 명목은 춘천시의 다양한 음식문화를 알리기 위함이라 포장되었다.
그런데 지한 식당은 참가 자체를 배척하고 있다.
그런 말인즉.
‘지한 식당 죽이려고 여는 대회란 말이야?’
구자승의 표정을 가만히 관찰하던 변노민이 씩 웃었다.
“이해했나 보네. 명옥정 관계자로는 천 여사가 직접 나설 거야. 그리고 요리대회 우승자는 무조건 천 여사가 되어야 해. 잘할 수 있지?”
“…….”
구자승이 대답을 망설였다.
그래, 변노민은 원래 이런 인간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구자승은 그를 따랐다.
자신에게는 인간적으로 서운하게 했던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그는 불화를 싫어하고 싸움에 휘말리는 걸 귀찮아하는 인물이었다.
해서, 변노민이 춘천의 문화예술을 위한답시고 자기 배를 채우는데 혈안이 되었을 때도 못 본 척 입을 닫았다.
오히려 변노민의 편에 서서 그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곤 했다.
그렇게 하면 자신에게 떨어지는 콩고물이 제법 달았다.
이번일도 마찬가지일 터.
분명 변노민은 천명옥에게 돈을 받았고, 그중 일부를 힘 있는 몇몇 사람들에게 먹여서 요리대회를 열게 한 것이다.
그리고 자신에게도 분명 돈푼 떨어질 테지.
‘그러고 보니 천 여사 아들놈이 강지한에게 된통 당했지. 지한 식당 막내한테도 발려 버렸고.’
구자승이 얼마 전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천명옥은 그런 수모를 그냥 넘어갈 여인이 아니었다.
소리장도(笑裏藏刀).
그녀는 웃음 속에 칼을 숨기고 다니는 사람이다.
‘강 사장이 제대로 찍혔구나.’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한 구자승의 심경이 복잡해졌다.
그때 변노민의 은밀한 음성이 뱀처럼 그의 귓속을 스멀거리며 파고들어왔다.
“왜 대답을 못해? 잘할 수 있잖아, 자승아. 여태 그래왔던 것처럼. 천 여사가 말하길 강지한이 성정으로 봐서 누가 옆구리만 찌르지 않으면 굳이 그런 대회에 나오려 하지 않을 거라더라. 그러니까 너도 괜히 쓸데없는 얘기 하지 말고 가만히 있으면 돼. 그리고 대회에서 천 여사를 1등으로 올리면 조용히 끝나는 거야.”
얼핏 들으면 지한 식당에는 아무런 피해도 주지 않고 그저 명옥정의 명성만 드높여 줄 것처럼 들리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천명옥이 그런 식으로 조용히 넘어갈 여인은 아니었다.
사이즈를 이만큼 키워 놓았다면 감추고 있는 칼날은 더욱 날카로울 것이다.
강지한은 이 대회에 참가하지 않는 것만으로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을 것이 분명했다.
‘그게 무얼까?’
구자승은 생각했고 답은 바로 나왔다.
춘천의 식문화를 알리기 위한 대회에 참가하지 않은 것으로 쏟아져 나올 시민들과 동종업계 종사자들의 비난.
지금은 서로 겹치지 않는 분야의 대가들을 부를 계획이라고 말하는 변노민이지만, 대회가 끝난 뒤엔 손바닥 뒤집듯 말을 바꿀 것이 뻔히 보였다.
지한 식당이 대회 자체에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았다는 루머를 퍼뜨리겠지.
‘근데 만약 지한 식당이 참가 신청서를 낸다면?’
그럼 어쨌든 관심을 보인 것이니 비난의 면피로 삼을 수 있지 않을까?
‘아니야. 또 무슨 수를 내어서 참가 자체를 하지 않은 것처럼 만들어 버릴 사람이야.’
저도 모르게 강지한의 편에 서서 고심하는 구자승이었다.
그런 구자승의 어깨에 커다란 손이 턱 하고 올라왔다.
“자승아, 생각이 길어지면 인생이 고달프다. 마지막으로 물을게. 내가 너 믿고 심사위원 자리 줘도 되겠냐?”
질문하는 변노민의 얼굴이 무섭게 굳어 있었다.
지금 그가 말하는 심사위원 자리란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뜻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구자승이 이를 거절하면 변노민과의 관계도 끝나고 말 것이다.
‘그럴 수야 없지.’
구자승도 예술바닥에서 그의 덕을 많이 봐왔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춘천 바닥에서 그가 가장 잘나가는 예술가로 떵떵 거릴 수 있는 기반을 다져준 데에는 변노민의 힘이 컸다.
“믿으세요, 형님.”
원하는 대답이 나오자 비로소 변노민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래, 잘 생각했다. 그래야 내 동생이지. 하하하!”
시원하게 웃는 변노민.
애초에 그는 오늘 이 자리에서 구자승을 시험해 볼 생각이었다.
천명옥은 갈수록 명옥정보다 강지한의 식당에 걸음을 하는 구자승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해서 그와의 관계를 확실히 하고자 변노민에게 언질을 주었다.
구자승은 변노민의 시험을 통과했다.
그러니 천명옥과의 관계에서도 이변은 없을 것이었다.
“자자, 한잔해.”
“그럽시다.”
변노민이 잔에 채워준 술을 훌쩍 넘기는 구자승.
어째, 오늘은 유난히 술이 썼다.
* * *
“아빠!”
변노민과의 술자리가 끝나고 집으로 귀가한 구자승의 앞에 천사 같은 여인이 서 있었다.
바로 그의 딸 구나연이었다.
“나연아!”
구자승이 사랑하는 딸을 품에 꼭 끌어안았다.
“아니 언제 왔어?”
“어제 방학해서 오늘 일찍 왔지. 근데 아빠 없더라. 작업실에도 안 보이고. 어딜 그렇게 돌아다녀?”
“전화를 하지.”
“그러려다가 서프라이즈 해주려고 안 했지롱. 이리 와봐.”
구나연이 구자승의 손을 잡고 거실로 끌어당겼다.
넓은 거실의 중앙엔 작은 상 위에 얼큰한 김치찌개가 놓여 있었다.
“아빠 술 먹고 들어올 줄 알고서 찌개 끓여놨어.”
“저게 안주야? 해장국이야?”
“속 안 좋으면 해장하시고, 더 드실 수 있으면 나랑 한잔하시고.”
“당연히 한잔 더해야지!”
그렇게 부녀간의 즐거운 술자리가 시작됐다.
구자승의 딸인 구나연은 한국대학교 호텔조리과 4학년으로 내년 2월 졸업을 앞두고 있었다.
“어디, 우리 딸내미 솜씨가 얼마나 좋아졌나 볼까?”
그러면서 김치찌개를 맛본 구자승은 흐뭇함을 감추지 못했다.
적당히 칼칼하면서 돼지고기의 풍미가 확 퍼진 진한 김치 국물이 만족스럽게 식도로 넘어갔다.
“크으, 좋다.”
“어때?”
“끝내주지.”
“얼마나 끝내주는데? 춘천 최고야?”
“아니지, 춘천 최고는 지한 식당이지.”
무심코 말을 내뱉은 구자승이 쩝 입맛을 다셨다.
변노민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 못내 마음에 걸렸기 때문.
“지한 식당? 아~ 지한 오빠가 운영하는 거기?”
“알아?”
“춘천에서 그렇게 유명한데 내가 모르겠어? 근데 거기 김치찌개가 그렇게 맛있어?”
“김치찌개뿐이니? 미니한정식 스타일로 한 상에 이것저것 나오는데 거기 담긴 음식들 전부 다 밥도둑이다.”
“그 정도야? 와아. 배틀 셰프에서도 대단하다고 생각하긴 했었는데.”
“배틀 셰프 챙겨봤구나, 딸.”
“호텔조리과 다니고 있는데 당연하지. 근데 나는 직접 만나봤었어.”
“강 사장을? 언제?”
“배틀 셰프 촬영 때.”
그렇게 말하는 딸을 구자승이 놀라서 쳐다봤다.
구나연의 말은 진짜였다.
그녀는 배틀 셰프에서 강지한과 만났었다.
호텔조리과 학생들의 입맛을 저격해야 하는 단체 미션에 그녀가 섞여 있었던 것.
본격적인 미션이 시작되기 전에, 호텔조리과 학생들은 파트너로 짝지어진 출연자 한 명에게 자신 있는 요리를 해줘야 했는데 그때 구나연은 강지한의 짝이 되어 떡볶이를 만들어 줬었다.
그러면서 몇 마디를 나눠봤었다.
당시 구나연에게 전해진 강지한의 이미지는 상당히 좋았었다.
한데 그런 얘기를 여태 구자승에게는 하지 않았다.
그러다 강지한에 대한 얘기가 나와 이제야 털어놓게 되었다.
“그런 일이 있었어?”
“응. 있지, 나는 지한 오빠가 진짜 멋있다고 생각해. 보니까 춘천에서 손대는 요식업 사업마다 전부 잘되는 모양이던데. 배틀 셰프에서 내가 시식했던 요리들도 하나같이 엄청 맛있었어.”
“그렇지? 너도 맛있었지?”
“응. 안 그래도 나 춘천 오면 아빠랑 지한 오빠가 운영하는 식당들 여기저기 같이 다녀보려고 했는데. 그럴 거지?”
“우리 딸이 원하면 그렇게 해야지, 암.”
“아싸! 히힛. 있잖아, 아빠. 나 졸업하면 바로 제법 큰 호텔 레스토랑에 들어가서 일하게 될 것 같아.”
“그래?”
“응, 담당 교수님이 날 좋게 봐주셔서 추천해 주셨거든. 거기서 몇 년 고생하고 나면 나도 한 주방을 이끌어갈 만한 실력이 쌓이겠지?”
“그럼. 열심히 하면 충분히 그렇게 될 수 있지.”
“맞아. 열심히 하면 그렇게 될 수 있어. 그래서 난 주방이 좋아. 이런저런 더러운 수작 같은 거 부리지 않고 오직 실력으로만 말하는 무대니까. 아빠도 그래서 예술이 좋은 거지?”
“…….”
“아빠? 무슨 생각해?”
“응? 아…… 아무것도 아니야. 꿀꺽. 크으. 오늘 술이 너무 쓰다. 냉장고에 음료수 좀 갖다 줄래?”
“응~”
구나연이 냉장고에 다가가 음료수를 꺼냈다.
그런 딸의 뒷모습을 보는 구자승의 심경이 복잡해졌다.
‘더러운 수작 같은 거 부리지 않고 오직 실력으로만 말하는 무대. 그래……. 그게 내 딸이 생각하는 주방이었구나.’
구자승의 가슴 속에 시들어가던 양심이라는 것이 다시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