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3
Restaurant 192. 조련 당하는 정현수
10월 9일은 한글날이다.
지한 식당은 매주 수요일과 공휴일은 꼭 챙겨서 쉰다.
오늘도 아침 일찍 김상수 일행이 찾아왔다.
워낙 부지런한 생활이 몸에 밴 강지한은 이미 눈을 떠서 손님에게 대접할 아침밥을 차리고 있었다.
한데 오늘은 강지한뿐만 아니라 조정호도 함께 주방에 섰다.
그는 여태껏 한집에 살면서도 영화 관계자들과 함께하는 것이 어색해서 따로 식사를 하곤 했다.
강지한은 그런 조정호의 입장을 배려해 주었다.
조정호 스스로 바뀌려는 노력을 많이 하고 있는 걸 알기에 언제든 먼저 용기 내어 줄 것이라 믿었다.
그게 바로 오늘이 되었다.
김상수 일행은 거실에 두런두런 모여앉아 설탕이와 놀아주고 있었다.
그들이 크게 한 번씩 떠들 때마다 강지한을 도와 음식을 만들던 조정호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정호 씨, 괜찮아요?”
“네, 괜찮습니다.”
조정호는 자신의 혀만 믿고 요식업 사업에 도전했다가 연이은 실패를 경험했다.
그 원인에는 스스로 자만해서 연구를 게을리한 것도 있지만, 질 나쁜 사람들에게 뒤통수를 맞은 사건 또한 많았다.
그로 인해 알거지가 되어 길바닥을 전전하면서 대인기피증이 생긴 그였다.
오죽하면 죽을 생각까지 했을까.
지한 식당 주방에서 일하는 건 어차피 말 섞을 필요 없는 손님들을 대하는 것이기에 힘들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달라서 살짝 버거웠다.
그래도 용기를 내서 여러 가지 음식들을 강지한과 함께 완성해서 상에 내놓았고, 자리에도 함께했다.
다 같이 상에 둘러앉아 식사를 하는데 모든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얘기를 주고받으며 맛있게 음식을 먹는 반면, 조정호는 영 힘들어 하는 중이었다.
“정호 씨, 어디 아파요? 안색이 좀 안 좋아 보이네.”
조정호의 사정을 잘 모르는 김상수가 물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그때였다.
강지한의 곁에 얌전히 누워 있던 설탕이가 갑자기 상 근처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다가 폴짝거리며 점프를 해댔다.
“설탕이 신났다!”
그것을 보며 아역배우 차인우가 좋아했다.
하지만 다른 어른들은 조금 걱정스레 설탕이를 바라봤다.
식사 중에 상 근처에서 저렇게 난동을 부리면 털이 많이 날려 음식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
그에 강지한이 얼른 설탕이를 진정시키려 했다.
“설탕아, 그만. 얌전히 있어야지.”
그런데 오늘따라 강지한의 말을 듣지 않는 설탕이였다.
‘이런 적이 없었는데, 이상하네?’
평소 강지한의 말이라면 칼 같이 따른 설탕이건만 오늘은 어째 통제가 되지를 않았다.
‘내가 나설 차례인가?’
상황을 지켜보던 강아지 조련사 정현수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어렸다.
설탕이가 아무리 똑똑해도 이처럼 통제가 안 될 때도 있는 것을 보니 역시 아직 어린 강아지였다.
바로 이럴 때 정현수 소장의 진가가 드러나는 법.
그가 설탕이를 지그시 바라봤다. 그러다 천방지축 까불던 설탕이의 시선이 그의 시선과 마주쳤을 때 손가락을 한 번 딱! 튕기며 주의를 자신에게 집중시켰다.
“설탕아, 기다려.”
같은 명령이라도 정현수가 하면 달랐다.
한 가지 일을 지속적으로 해온 사람에게는 경력과 연륜이 쌓이고 그에 따른 에너지가 흘러나온다.
정현수는 이 바닥에서 20년이 넘게 일을 해왔다.
보통의 사람들과는 강아지를 대할 때의 에너지가 달랐다.
해서 대부분의 강아지들은 정현수가 명령을 내리면 한 번에 듣곤 했다.
한 번에 해서 안 되면 세 번 안에 버릇을 딱 잡는 정현수였다.
그런데,
“설탕아, 기다려. 기다려야지? 한 번만 좀 기다려 보면…….”
벌써 열 번을 넘게 기다리라고 했는데도 설탕이는 들은 척조차 하지를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전부 설탕이를 말려도 막무가내였다.
‘대체 쟤가 왜 저러지?’
설탕이를 가만히 살피던 강지한의 뇌리에 어떠한 느낌이 강렬하게 꽂혔다.
그것은 설탕이와 강지한 사이의 높은 교감으로 인한 텔레파시 같은 것이었다.
강지한은 그 느낌을 믿고 조정호에게 귓속말을 건넸다.
“정호 씨, 정호 씨가 해봐요.”
“네? 제가요?”
“네.”
“지금…… 누구의 말도 듣지를 않는데.”
“그러니까 해보셔야죠. 정호 씨만 아직 시도 안 해봤잖아요.”
강지한이 농담처럼 그를 부추겼다.
그에 조정호가 설탕이를 바라봤다.
순간 그와 시선이 부딪힌 설탕이가 정신없이 뛰어놀다가 멈칫! 했다.
그 작은 반응에 조정호의 마음속에서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용기가 피어났다.
“설탕아.”
조정호가 설탕이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손바닥을 내밀어 진정시키듯 제스처를 취하면서 말했다.
“기다려.”
조정호의 말과 행동에 천방지축하던 설탕이가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이를 본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특히 정현수가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설탕이가 자신의 말을 듣자 기분이 좋아진 정현수가 다른 명령을 내렸다.
“이리 와.”
놀랍게도 설탕이가 얌전히 걸어 조정호의 곁으로 왔다.
“앉아.”
앉으라는 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조정호를 쳐다봤다.
그런 설탕이의 머리를 조정호가 쓰다듬어 주었다.
“잘했어.”
그 누구의 말도 듣지 않던 설탕이가 자신의 말은 들어주었다.
조정호의 가슴속에서 엄청난 희열이 일었다.
‘이, 이런…….’
반면 정현수는 충격을 잔뜩 먹어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의 조련사 인생 20년 역사상 오늘처럼 치욕적인 날은 없었다.
강지한이 조정호를 슬쩍 살폈다.
조금 전까지는 음식도 제대로 못 먹고 힘들어 하던 그가 이제 편하게 수저를 놀리고 있었다.
설탕이로 인해 얻게 된 용기가 그의 마음을 편하게 만들어 주었다.
조정호의 분위기가 확 바뀐 것이 그 자리에 있던 다른 사람들에게도 전부 전해졌다.
그는 비로소 김상수 일행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어가며 맛있게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설탕이가 그런 조정호를 흐뭇하게 바라봤다.
* * *
아침을 먹은 조정호는 바쁘게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에게 강지한이 물었다.
“정호 씨, 외출하시려고요?”
“저, 오늘 어디 좀 다녀올 생각입니다.”
“친구 만나러 가시나 봐요?”
“아니요. 한글날 기념행사 중에 요리대회가 있습니다. 거기에 신청을 해둬서 나가야 합니다.”
“그런 행사가 있었어요?”
“네, 약사천 수변공원에서 12시부터 시작입니다.”
조정호가 신청한 요리대회는 한글날을 기념, 한글과 함께 우리나라의 식문화도 알리자는 취지하에, 외국인들을 심사위원으로 모셔서 한식을 평가토록 하는 것이었다.
강지한은 그런 것이 있었는지도 몰랐다.
“와~ 재밌겠다. 저도 같이 가요. 제 차로 움직이면 되겠네요. 필요한 재료는 직접 구매해서 가야 되는 거죠?”
“그렇습니다.”
“지금 나가서 같이 장도 보면 되겠네요.”
“그래 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강지한은 조정호와 함께 행동하기로 하고 설탕이를 다른 사람들에게 부탁한 뒤 집을 나섰다.
* * *
두 사람이 나가고 난 뒤, 정현수는 설탕이를 데리고 마당으로 나왔다.
“설탕아, 앉아. 일어서. 빵! 점프! 하이파이브!”
설탕이는 좀 전과 달리 정현수의 말을 고분고분 잘 들었다.
그런 설탕이를 정현수가 품에 와락 안고 마구 쓰다듬어 주었다.
“이렇게 잘하는데 아까는 왜 튕겼어? 응? 앞으로는 그러면 안 돼? 알았지?”
왕! 헥헥헥.
알았다는 듯 짖어주는 설탕이.
그런 녀석을 보는 정현수의 입에 미소가 어렸다.
“고마워, 설탕아. 하하.”
생각해 보면 별것도 아닌 일인데 아까 쌀쌀맞게 대했다가 지금 조금 말 잘 들어주니 그게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다.
강아지 조련사 정현수.
그는 저도 모르는 사이, 설탕이에게 조련을 당하고 있었다.
* * *
강지한과 조정호는 약사천 수변공원에 도착했다.
수변공원엔 여러 가지 간단한 놀이시설들이 설치되어 있고 터가 제법 넓어서 춘천시에서 주최하는 행사 장소로 활용되거나 플리마켓(flea market:벼룩 시장)도 종종 열리고는 했다.
오늘은 그곳에서 열다섯 명의 참가자가 실력을 겨루는 조촐한 요리대회가 펼쳐지고 있었다.
한데 그 규모에 비해 몰려든 인파가 어마어마했다.
주최 측은 예상했던 것보다 몇 배 이상 집중된 구경꾼들로 인해 어리둥절해진 상황.
공원에 걸음을 한 사람들은 경연 무대를 바라보며 다들 비슷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강지한도 나오겠지?”
“춘천을 대표하는 요리사잖아. 안 나오겠냐.”
“일전에 천명옥이랑 생방송도 하고 그랬으니까 춘천시에서 주최하는 행사인데 나오겠지.”
“보통 그 정도 되면 시청에서 직접 찾아가서 섭외 부탁하지 않아?”
“에이, 그래도 규모가 너무 작잖아. 애들 장난 같은데, 배틀 셰프 우승자가 나오겠어?”
“하긴. 강지한 나오면 완전히 밸붕이지. 다른 사람들 전부 쩌리 되는 거야.”
“확실히 사기캐이긴 해.”
“너희들은 그렇게 부정적인 생각 가지고 왜 나왔냐?”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흐흐.”
강지한은 얼마 전, 프로덕션 이리와 함께 생방송을 진행한 이후 그 이름이 더욱 드높아졌다.
특히 춘천에서의 인기는 여느 스타 셰프 못지않았다.
그로 인해 사람들은 혹시나 강지한을 볼 수 있을까 싶어 걸음한 것.
자리에 모인 구경꾼들의 70퍼센트가 그러한 의도로 왔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들이 기다리던 강지한이 경연 무대가 아닌 관람 구역에 모습을 드러냈다.
“어? 강지한이다!”
“어디? 어디?”
“꺄악! 오빠, 잘생겼어요! 사인 좀 해주세요!”
“저도 사인 부탁드릴게요!”
“우와, 대박. 사진 좀 같이 찍어주세요!”
강지한의 등장에 그를 보러왔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며 일대 혼란이 빚어졌다.
태어나 난생처음 당해보는 상황에 강지한은 어쩔 줄을 몰랐다.
사인을 해 달라면 해주고, 사진을 찍어 달라면 찍어주고, 손을 잡아 달라면 잡아주었다.
그 광경을 오늘 경연을 위해 설치된 무대 위에서 지켜보던 주최 측 관계자들은 그제야 예상치를 웃도는 관람 인원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강지한이 자신을 둘러싼 팬들에게 서비스를 해주며 영혼이 탈탈 털리고 있던 그 시각.
조정호는 참가자 대기실에서 마인드 컨트롤을 하고 있었다.
“후우우.”
참가자 대기실엔 오늘 무대에 오르는 열다섯 명의 사람들이 한 명 빠짐없이 자리를 한 상황이었다.
오늘의 심사위원은 춘천시에 거주하고 있는 외국인 다섯 명.
그들에게 가장 높은 점수를 받는 사람이 1등의 영예를 차지하게 된다.
조정호가 선보일 음식은 바로 궁중떡볶이.
매콤한 고추장 양념으로 하는 일반 떡볶이와 달리 간장 양념을 베이스로 해서 소고기와 각종 야채가 들어가는 달콤짭짤한 한국 전통 떡볶이였다.
조정호가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궁중떡볶이의 레시피를 몇 번이고 곱씹었다.
그때, 스텝 한 명이 대기실 안으로 들어와 말했다.
“참가자 여러분, 무대 위로 올라와 주시면 되겠습니다.”
스텝의 말에 참가자들이 모두 무대 위로 올라갔다.
그때쯤 강지한을 흔들어 대던 팬들도 비로소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강지한은 겨우 정신을 바로 잡고 무대를 살폈다.
참가자 열다섯 사람 중 제일 왼편에 서서 잔뜩 긴장해 있는 조정호의 모습이 바로 눈에 들어왔다.
‘정호 씨, 파이팅이에요.’
스스로 요리 실력을 확인해 보기 위해 작지만 이런 대회에도 출전했다는 것이 마냥 기특했다.
한데 무대 위에 조정호 말고도 아는 얼굴이 하나 더 있었다.
바로 천명옥의 아들 백상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