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1
Restaurant 190. 영상의 기적
10월 4일.
아침 일찍부터 강지한은 자신의 집을 방문한 김상수 감독과 스텝들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있었다.
거실에 펼쳐진 큰 상 주변으로 도란도란 둘러앉은 사람의 수는 총 여섯.
일전에 지한 식당을 방문했던 김상수와 조감독 하동만, 시나리오 작가 이지안, 아역배우 차인우, 그리고 낯선 얼굴이 둘이었다.
그 두 사람 중 한 명은 연극판을 주 무대로 삼으면서 영화와 드라마에 단역으로 가끔 나들이를 했던 노년 배우 최만후였다.
김상수는 그를 이번 영화의 주연으로 캐스팅했다.
최만후는 행동거지가 차분하고 공손한 데다 인상도 인자하기 그지없는 것이 시나리오 속 할아버지 캐릭터와 이미지가 딱 맞아 떨어졌다.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강아지 조련사 정현수 소장이었다.
그는 각종 동물 방송에 모습을 드러내며 활발한 활동을 해나가고 있었다.
때문에 동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그의 얼굴과 이름 정도는 기억할 만했다.
정현수 소장은 이번 영화에 자문 겸, 촬영 현장에서 설탕이의 건강 매니저로 김상수가 모신 것.
즉 강지한의 거실에 모인 여섯 사람은 전부 영화 촬영을 할 때 설탕이와 많은 시간을 함께할 사람들이었다.
김상수는 그들이 사전에 설탕이와 유대감을 다져놓으면 좋을 것 같아 오늘부터 매일 아침 강지한의 집에 들르기로 한 것이다.
강지한이 식당 일을 나가서 돌아올 때까지 여섯 사람들은 설탕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게 될 터였다.
하지만 개인 스케줄이 따로 있는 정현수 소장은 점심때까지만 함께하기로 했다.
여섯 사람이 모여 앉은 상 위엔 쌀알들이 노랗게 코팅 된 황금빛 계란볶음밥과 맑은 계란국이 놓여 있었다.
반찬은 지한 식당에서 사용하는 것들이 그대로 세팅되었다.
계란볶음밥에서 솔솔 풍겨 올라오는 고소한 냄새에 손님들의 입에 침이 고였다.
강지한이 그 사이에 껴 앉아 식사를 권했다.
“드시죠.”
“이거 우리가 괜히 폐 끼치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허허.”
최만후가 괜히 황송한 마음에 너스레를 떨었다.
“폐는요. 저 없는 동안 설탕이 봐주시니 오히려 감사하죠.”
“그래도 이게 참 아침 대접을 받고 주인 안 계시는 집에서 계속 있으려니까 맘이 편치만은 않습니다. 허허.”
“편히 계세요. 요리도구 빼고는 딱히 훔쳐갈 것도 없는 집이에요.”
“자자, 그럼, 식기 전에 어서 먹어볼까요?”
지한 식당에서 강지한의 음식을 맛보았던 김상수가 참지 못하고 식사를 재촉했다.
그에 차인우가 기다렸다는 듯 볶음밥부터 크게 떠서 입안에 넣었다.
고슬고슬한 황금빛 볶음밥은 입안에 들어오는 순간 불향이 확 났다. 밥알은 한 알 한 알이 탱탱하게 살아서 전부 따로 놀았다. 그 안에 잘 익은 계란과 잘게 썰린 햄이 함께 씹히며 풍미를 발산했다.
볶음밥에 되어 있는 간 또한 짭조름한 것이 감칠맛까지 느껴져서 딱 좋았다.
시판 소금과 천연조미료의 힘이었다.
“우와! 진짜 맛있다. 우리 동네 중국집에서 먹는 것보다 훨씬 맛있어요. 짜장이랑 안 비벼도 맛있는 중국집 볶음밥은 처음이에요!”
달걀 볶음밥은 일반 식당에서 따로 파는 경우가 드물고 중식집에서나 볼 수 있었다.
그러니 어린 차인우는 그것이 중국집 볶음밥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에 김상수가 볶음밥 맛에 감탄을 하며 말했다.
“죽이지 인우야? 원래 볶음밥은 짜장과 비벼 먹지 않는 것이 정석이야. 그냥 이렇게 먹어도 맛있어야 제대로 된 볶음밥인 거야. 내가 이렇게 볶음밥 잘하는 중식집을 두 군데 아는데, 그 곳들과 견주어도 밀리지를 않네요. 아니 가정집이라 화력도 약한데 불맛은 어찌 잡으셨을까? 진짜 요리사가 아니라 마술사네, 지한 씨.”
김상수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계란국 지이이인~짜! 맛있어요. 하아, 몸이 포근해지는 기분이야.”
계란국을 맛본 이지안 작가의 눈이 사르르 감겼다.
사실 그녀는 어제까지도 시나리오 최종고를 마무리 짓느라 밤을 꼴딱 샜다.
시나리오라는 것이 크랭크인이 들어가기 전까지 몇 번이고 수정되게 마련이다.
욕심 많은 감독을 만나게 되면 더더욱 그런 경우가 빈번했다.
한데 김상수는 욕심 많은 감독이었다.
그 바람에 이지안이 혹사를 당하고 있었다.
물론 그만큼 김상수는 이지안에게 충분한 고료를 지급했다.
부당노동을 시키는 건 아니었다.
이지안이 다시 계란국을 몇 번 뜨다가 아예 국그릇을 들고 마셔댔다.
“호록. 호로록. 꿀꺽. 하아아.”
특제 육수로 만든 맑은 황금빛 국물 안에 비단처럼 풀어져 너울거리는 계란이 입으로 들어와 사르르 녹아 흩어졌다.
대체 어떻게 하면 계란을 이런 모양과 식감으로 풀어서 익힐 수가 있는 건지 놀라울 따름이었다.
계란국에 푹 취해 몸이 축 늘어진 이지안을 보며 김상수가 피식 웃었다.
“지안 작가, 편안함에 이른 것 같은 얼굴이네.”
“네. 완벽하게요.”
음식으로 힐링을 한다는 게 이런 것이구나 싶었다.
그러는 사이 강지한의 요리를 처음 먹어본 최만후와 정현수는 들고 있는 수저를 잠시도 쉬게 두지 않았다.
‘맛있다. 정말 맛있어.’
강아지 조련사 정현수는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만약 강아지라면, 이런 음식을 앞에 두고 참으라 그랬을 때 참을 수 있었을까?’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만큼 강지한의 음식은 밥과 국, 그리고 반찬들까지 모든 것이 끝내줬다.
“셰프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한 그릇 더 먹어도 될까요?”
생긴 것과 다르게 수줍음이 많은 하동만 조감독이 용기 내어서 빈 그릇을 내밀었다.
“얼마든지 더 드셔도 됩니다. 많이 있어요.”
그 말에 하동만이 신이 나서 주방으로 달려갔다.
“나도 그럼 더 먹을게요.”
김상수도 망설임 없이 엉덩이를 뗐다.
다른 사람들도 자기 그릇이 비어지기 무섭게 주방에 가서 볶음밥을 퍼왔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강지한의 마음이 따뜻해졌다.
이렇게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아침이 대체 몇 년 만인지 몰랐다.
당분간은 이 광경을 매일 접할 수 있다 생각하니 절로 든든해지는 강지한이었다.
* * *
두 달 전의 일이었다.
조미옥은 갈수록 늘어가는 김치 주문량에 주말에도 춘천에 못 돌아오는 날이 늘어만 갔다.
이미 신장호에게 김치 공장을 두 개나 계약해서 돌리고 있는데도 주문량을 소화하기가 버거울 정도였다.
이런 상황을 접수한 강지한은 신장호에게 사정을 얘기했고, 신장호는 이 사실을 세진 그룹 회장이자 신푸드 사업 파트너인 백진목에게 전달했다.
백진목은 나이가 들어 둔해진 미각 때문에 식도락을 즐기지 못해 고민이 많았었다.
그것을 강지한이 해결해 준 바 있어, 이후로 그를 무척이나 아끼는 사람이었다.
백진목은 당장에 밑에 사람들 몇 명에게 전화를 넣었고 계약 가능한 좋은 김치 공장 몇 군데를 강지한에게 다이렉트로 소개시켜 주었다.
이에 강지한은 이 사실을 조미옥에게 알린 뒤, 몇 군데의 공장과 계약할 것인지는 스스로 판단해도 좋다고 했다.
조미옥은 연락이 닿은 김치 공장 중 두 곳과 계약을 맺었고 그녀가 크게 믿는 사람 둘을 각각의 공장으로 파견시켜 공장장으로 임명했다.
그렇게 하고 나서야 비로소 들어오는 주문량을 원활히 소화할 수 있게 됐다.
덕분에 요즘 조미옥은 조금 더 여유로워진 생활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잠자는 시간이 전보다 늘어난 것뿐이었지만.
오전 내내 사무실에서 들어오는 주문을 체크하고 다른 공장들의 상황을 확인하고, 필요한 재료들을 발주 잡고 하느라 머리가 지끈거리는 조미옥은 11시가 땡! 하자마자 식당으로 향했다.
그리고 직원들의 식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밥은 미리 지어놓았고 반찬들도 어제 만들어 둔 것이 제법 많이 남아서 계란프라이를 추가하고 국만 끓이면 될 것 같았다.
나름 손맛이 있는 그녀의 요리를 직원들은 전부 맛있게 먹어주었다.
조미옥은 그게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갈수록 요리를 만드는 것이 재미있어졌고 지금은 그 시간이 조미옥의 힐링타임이었다.
12시.
식사 준비를 마치기가 무섭게 직원들이 식당으로 우르르 몰려들어 왔다.
직원들 사이엔 사흘 전, 처음으로 일을 나온 새로운 얼굴도 섞여 있었다.
올해 서른여덟 살의 여인 서정혜였다.
서정혜는 어딘지 모르게 음울한 기운이 가득했고, 말수가 상당히 적었다.
“자~ 맛있게들 드세요!”
조미옥의 말에 다들 허기진 속에 음식들을 채워 넣었다.
김치 공장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점신 시간을 가장 좋아했다.
조미옥의 손맛도 끝내줬지만 그보다 더 끝내주는 지한 김치를 맛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시종일관 우울하기 그지없던 서정혜도 지한 김치를 맛볼 때만큼은 잔잔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런 서정혜를 가만히 바라보던 조미옥이 말을 걸었다.
“정혜 씨, 김치 참 맛있지?”
“네, 제가 이런 김치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게 거짓말 같아요.”
“많이 먹어요. 여기에 차고 넘치는 게 김치니까. 그런데 그 김치 만드는 사장님 얼굴은 본 적 있어?”
“아니요.”
“없어? 인터넷에 지한 김치라고 쳐보기만 해도 사장님 얼굴 검색되는데.”
“인터넷을 잘 안 해요.”
“헐, 나도 요즘에는 스마트폰 없인 못살아. 참 보기 드문 사람이네. 아무튼 우리 사장님 얼굴 모른다고 하니 보여줘야지.”
조미옥이 신나서 식당 한 편에 놓인 대형 텔레비전을 켰다.
직원들이 식사하면서 심심할 때 보라고 갖다놓은 것이었는데 다들 김치 맛에 뿅 가서 먹는데 집중하느라 조미옥이 틀지 않으면 줄곧 꺼져 있었다.
텔레비전은 일반 방송과 케이블도 나왔고, 컴퓨터와 연결되어 있어서 컴퓨터 모니터로도 사용이 가능했다.
조미옥은 외부 입력을 눌러 컴퓨터 화면으로 돌린 뒤 인튜브에 접속했다.
그리고 즐겨찾기 해놓았던 영상을 틀어주었다.
“내가 얼마 전에 우리 사장님이 등장하는 영상 하나를 찾았는데 어찌나 감동적이던지……. 보다가 울었잖아. 다들 이 영상 한 번 봐봐요. 우리 강 사장이 얼마나 된 사람인지 알 수 있을 테니.”
조미옥의 말에 사람들은 무슨 영상이 나오나 싶어 일제히 텔레비전으로 시선을 돌렸다.
서정혜 역시 마찬가지였다.
텔레비전에서는 얼마 전, 프로덕션 이리에서 생방송으로 내보냈던 영상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강지한은 오만석과 그의 아들딸들에게 크림스파게티를 대접했고, 세 사람은 그것을 맛있게 먹었다.
영상의 하단부엔 지금 이것이 어떠한 상황인지에 대한 설명이 자막으로 나왔다.
자초지종을 알게 된 직원들 몇몇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영상이 길게 이어질수록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이들이 속출했다.
조미옥은 슬쩍 서정혜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는 울고 있지 않았다.
다만, 엄청난 충격을 받은 얼굴로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얼굴은 창백하게 질렸고 손을 달달 떨었다.
‘왜 저렇게 긴장을 해?’
서정혜의 반응이 의아했으나 조미옥은 모르는 척 넘어갔다.
영상은 클라이맥스를 향해 갔다.
크림스파게티를 먹던 오만석이 돌연 카메라를 보더니 터지려는 울음을 참으며 말했다.
-정혜야……. 내가 미안했다. 내가 잘못했다. 나 이제 술도 끊고 도박도 끊었다. 나는 용서하지 않아도 돼. 그런데 아이들은 무슨 죄냐. 혹시라도 방송 본다면…… 다시 한 번 기회를 줬으면 좋겠다. 미안하다, 정혜야.
그러자 아이들이 먹던 것을 멈추고 울먹였다.
-엄마…… 보고 싶다. 히잉.
-……나도.
-나…… 엄마 진짜 많이 보고 싶어, 오빠. 흐윽. 흐아아앙.
-……끄흑. 끅.
급기야 아이들은 울음을 터뜨렸고 이를 보는 직원들도 모두 울고 말았다.
조미옥은 이미 한 번 보면서 펑펑 울었음에도 또다시 눈물을 흘렸다.
그러다 불현듯 알아챈 사실이 하나 있었다.
‘가만. 정혜? 우리 새 직원이랑 이름이 같네.’
조미옥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서정혜에게 향했다.
조금 전까지는 목석처럼 굳어 있던 서정혜가 그 누구보다 서럽게 엉엉 울고 있었다.
* * *
모든 사람들이 나른해지는 오후 한 시, 강지한의 집.
조련사 정현수는 설탕이의 영특함이 어느 정도인지 시험해 보기 위해 마당으로 데리고 나왔다.
그리고 10여 분이 지났을 때.
그는 눈앞에서 꼬리를 흔들고 있는 설탕이를 보며 기함을 했다.
“세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