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8
Restaurant 177. 세 가지 파스타
지한 식당의 하루 일과가 끝났다.
퇴근을 한 강지한은 예소린의 애견카페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예소린이 그를 반겼다.
“지한 씨~ 안녕?”
왕!
설탕이는 당장 폴짝 뛰어올라 강지한의 품에 와락 안겼다. 그러고는 그의 뺨을 정신없이 핥아댔다.
헥헥헥헥!
“아이구, 내 새끼. 아빠 보고 싶었구나.”
강지한의 품에 안긴 설탕이의 프로펠러 꼬리가 휙휙 돌아갔다.
설탕이를 얼러주던 강지한이 예소린의 옆에 서 있던 낯선 사내에게 향했다.
나이를 확실히 가늠하기 힘든 얼굴의 사내는 청바지에 무지 흰 티를 걸치고서 야구 모자를 뒤로 돌려 쓴 차림이었다.
한 손에는 자동차 바퀴 휠 모양을 닮은 메탈 피젯스피너가 들려 있었다.
사내는 그것을 빙빙 돌리면서 웃음기 머금은 얼굴로 강지한을 바라봤다.
“전화 통화하셨던 감독님?”
애견 카페도 영업이 끝난 시간이라 손님을 다 내보냈을 테니 그 사내가 당연히 감독일 터.
강지한이 묻자 그제야 사내가 정체를 밝혔다.
“맞아요. 반가워요, 지한 씨. 김상수라고 해요.”
김상수.
올해 마흔하나인 그는 나이에 비해 젊어 보였다. 동안이라기보다는 패션 스타일, 목소리 톤, 어투, 제스쳐 등등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그를 젊어 보이게 만들었다.
실제로 그는 권위의식이나 꼰대사상이 전혀 없는 사람이었다.
김상수가 오른손으로 악수를 청했다. 왼손에서는 여전히 피젯스피너가 돌아가고 있었다.
강지한이 그의 손을 맞잡고 가볍게 흔들었다.
“강지한입니다. 반갑습니다.”
말을 하는 강지한의 시선이 저도 모르게 왼손의 피젯스피너로 향했다. 그러자 김상수가 피젯스피너를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고 어깨를 으쓱했다.
“운동선수들이 하는 일종의 루틴(Routine)같은 거예요.”
“아, 네.”
“음……. 이야기가 조금 길어질 것 같은데 우선 앉을까요?”
김상수의 제안에 세 사람은 한 테이블에 착석했다.
“얘 이렇게 키운 비결이 뭐예요?”
자리에 앉자마자 김상수가 대뜸 물었다.
그의 시선이 강지한의 의자 아래 앉아 있는 설탕이에게 향했다.
“비결 같은 건 딱히 없어요. 그냥 혼자 잘 컸어요.”
“혼자서? 그러기 쉽지 않은데. 진짜 천재견이네. 지한 씨 기다리면서 이것저것 시켜봤거든요. 근데 못하는 게 없어요. 사람 말을 전부 다 알아듣는 것 같아. 김다윗 감독이 나만 보면 그렇게 입을 털더니 그게 다 사실일 줄은 몰랐죠.”
김다윗은 신푸드와 도그 푸드의 CF를 찍었던 감독이다.
“김 감독님이랑 친하신가 봐요.”
“호형호제하는 사이죠. 물론 제가 동생이고.”
김상수가 한쪽 눈을 찡긋 거렸다.
‘어쩐지 이 양반한테서 로버트 정의 기운이 느껴진다.’
강지한은 로버트 정과 김상수가 만나면 죽이 참 잘 맞을 거라고 생각했다.
“한데 설탕이가 영화에 출연하면 무슨 역을 맡는 거죠?”
강지한이 물었다.
김상수가 설탕이를 지그시 바라보며 대답했다.
“주연이죠.”
“……주연이요?”
생각지 못했던 역할에 강지한의 입에서 말이 한 박자 늦게 흘러나왔다.
“이렇게 똑똑한 강아지를 조연이나 단역으로 쓴다는 건 죄악이에요. 능력이 있으면 그걸 백분 발휘해야죠. 그 기회의 장을 제가 만들어 줄게요.”
“영화 내용에 대해서 들어볼 수 있을까요?”
“소린 씨, 휴지 좀 많이 갖다 주세요.”
뜬금없는 김상수의 부탁에 예소린이 되물었다.
“왜요?”
“영화 줄거리 듣고 나면 휴지가 필요해질 테니까요. 그럼 시작합니다. 어느 날, 이야기의 주인공인 시골 마을의 할아버지와 그 손자는 말하는 강아지를 주워옵니다.”
“……네?”
* * *
“……결국 행복이는 제 이름처럼 할아버지와 손자, 손녀의 행복을 찾아주고 세상을 떠나게 되죠.”
김상수의 말을 듣고 난 예소린은 눈가에 맺히는 눈물을 휴지로 찍어 눌렀다.
그런데 옆을 보니,
“흐으으으. 패앵!”
강지한이 눈물을 주륵주륵 흘리며 휴지로 코를 풀고 있었다.
그 모습이 재미있어서 예소린이 쿡쿡 웃었다.
“하여튼 우리 지한 씨, 눈물 너무 많아. 하아아~ 근데 정말 감동적인 이야기네요.”
“후우……. 너무 울었네.”
두 사람의 반응이 김상수는 흡족했다.
김상수는 언어의 마술사 같은 사람이었다.
사실 말하는 강아지를 주웠다는 도입부만 들었을 때는 이 사람 사기꾼이 아닌가 싶었다.
그런데 그건 할아버지와 손자가 한 밤에 꾼 똑같은 꿈이었다.
두 사람이 같은 꿈을 꾸기란 참 힘든 일인데 그 일이 있던 날 버려진 행복이를 발견하게 된다. 이후로 행복이와 그들 사이에 벌어지는 일상과 사건을 다룬 감동드라마가 이야기의 골자였다.
때문에 설탕이가 행복이 역으로 캐스팅된다면 첫 데뷔 영화로 주연 자리를 꿰차는 것이다.
“이야기 듣고 나니까 더 욕심이 나죠?”
말을 하는 김상수의 손에는 어느새 다시 피젯스피너가 들려 있었다.
강지한은 설탕이를 보고 물었다.
“설탕아, 어때? 좋으면 한 번, 싫으면 두 번.”
그러자 설탕이가 꼬리를 흔들며 크게 한 번 짖었다.
왕!
“좋다고?”
왕!
또다시 한 번만 짖는 설탕이.
강지한은 결국 그런 설탕이의 의견을 존중해 주기로 했다.
“설탕이가 좋다고 하네요. 감독님 이야기가 마음에 들었나 봐요.”
주인과 강아지 사이의 놀라운 교감 능력에 김상수가 혀를 내둘렀다.
“이거 무슨 마술 보는 것 같네. 아무튼 출연 결정한 거죠?”
“네.”
“좋아요.”
의외로 시원시원하게 진행되는 상황이 김상수는 좋았다.
“메일 주소 하나 알려줘요. 며칠 내로 가계약서 보내드릴 테니까, 보시고 통화하면서 조건들 조율해 보죠.”
“여기서 더 얘기 안 하시나요?”
“계약서 읽어보면 내용 다 나와 있는데 뭐하러 그래요. 아, 그건 얘기해야죠. 우리 쪽에서 생각하는 설탕이 출연료는 5천만 원이었는데 직접 만나보니 더 올라갈 수도 있겠어요.”
“오천……만 원이요?”
예상보다 큰 액수에 강지한이 살짝 당황했다.
김상수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강아지들의 출연료는 견종과 촬영하는 시간, 장소, 연기하는 내용에 따라 달라진다.
즉, 사람들에게 더 호감 가는 견종일수록, 촬영 시간이 길수록, 야외에서 촬영하는 내용이 많을수록, 어려운 연기를 척척 해낼수록 몸값이 올라가는 것.
설탕이는 요즘 주가가 많이 상승하고 있는 시바견인 데다 자체의 인기도 대단했다. 전국적으로 설탕이 붐을 일으킬 정도였으니까.
실제로 설탕이를 보기 위해 예소린의 애견카페를 찾는 이들이 두 배나 늘었다.
이제는 ‘뽀삐의 하루’가 춘천 명소로까지 소문 날 정도였다.
아울러 설탕이는 주연인 만큼 촬영 시간이 길고 야외 씬도 많았다.
마지막으로 김상수가 만나 보니 사람과의 의사소통이 원활해서 어려운 연기도 무난하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몸값이 훌쩍 뛰는 건 당연한 일.
“적어도 저 녀석 몸값이 몇천은 더 오르겠는데요?”
어쩌면 1억까지 올라갈지도 모르겠다고 김상수는 생각했다.
그는 돈으로 치사하게 구는 인간은 아니었다.
연기자가 가치를 증명한다면 그만한 돈을 지불하고는 했다.
애초에 금수저 집안에서 태어나 영화판에 뛰어든 케이스였다.
그에겐 돈보다 자신의 영화를 완벽하게 찍는 것이 더 중요했다.
“설탕아 잘 부탁한다. 이번에는 대박 한 번 터뜨려 보자.”
여태 큰 흥행작이 없는 김상수였다.
이전까지 찍은 세 개의 작품은 전부 순익분기점에 살짝 못 미치고 끝이 났다.
그래서 이번만큼은 대박 작품을 하나 건지리라 마음먹었다.
꼬르륵.
파이팅을 다짐하던 김상수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감독님, 식사 안 하셨어요?”
예소린이 묻자 김상수가 눈을 깜빡였다.
“어? 그러고 보니 오늘 아무것도 안 먹었네. 아까 여기서 마신 음료수가 전부예요. 다들 식사하셨어요?”
마침 강지한도 예소린도 저녁을 건너뛴 상황이었다.
“그럼 같이 뭐라도 시켜 먹읍시다.”
김상수가 제안하자 예소린이 고개를 저었다.
“돈 쓰지 말고 차려 먹어요. 우리 가게에 제가 먹으려고 갖다 놓은 반찬들 좀 있어요. 햇반만 돌려 먹으면 돼요.”
“반찬 뭐뭐 있어?”
강지한이 물었다.
“집에서 만들어온 전이랑 나물들이랑…… 된장, 청양고추, 마늘, 명란젓. 그 정도?”
“올리브 오일이랑 파스타면은 있지?”
“당연하지.”
예소린의 애견 카페에서는 얼마 전부터 간단한 샐러드와 파스타, 볶음밥 류도 팔기 시작했다.
예소린도 원체 손맛은 있었던 터라 한 번 시도해 봤는데 반응이 제법 좋아서 고정 메뉴가 되었다.
“그럼 내가 파스타 좀 만들어올게.”
눈을 빛낸 강지한이 주방으로 향했다.
* * *
강지한은 30분 만에 파스타 세 접시를 만들어 내왔다.
하나는 예소린에게 자주 해줬던 명란냉파스타였고, 하나는 크림파스타, 또 하나는 토마토파스타였다.
파스타들의 레벨은 전부 5였다.
그가 원하는 양질의 재료들이 갖추어지지 않았음에도 그 정도 수준으로 만드는 것이 가능했다.
“파스타~ 좋지. 잘 먹을게요.”
김상수는 강지한에 대해서 대충 알고 있었다.
배틀 셰프 우승자에다 그가 운영하는 식당들이 춘천에서 제법 유명하다는 것도.
하지만 그는 방송이 얼마나 심한 과장의 장인지 잘 알고 있었다.
시청률을 높이기 위해서는 파리도 새로 둔갑시켜 버리는 곳이 방송가였다.
때문에 큰 기대는 하지 않고 토마토파스타부터 한입 맛보았다.
“후룩. 쩝쩝. 꿀꺽. ……으힝?”
토마토파스타를 씹어 삼킨 김상수가 저도 모르게 이상한 소리를 냈다.
그가 토마토파스타를 한 번 더 맛봤다.
처음에 무심코 집어 먹었던 그 엄청난 파스타 맛은 착각이 아니었다.
공복으로 인해 평범한 파스타 맛이 대단한 것처럼 느껴지는 것 또한 아니었다.
이것은 진짜였다.
빛깔, 농도, 풍미, 향, 염도, 식감이 모두 만족스러웠다.
신선하고 입에 착착 붙는 토마토소스는 면과 완벽하게 어우러졌다.
‘일반 토마토소스 제품을 가지고 이런 맛을 내는 건 말도 안 되고. 뭔가를 가미했는데.’
그게 뭔지 도통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확실한 건 눈이 번쩍 뜨일 만큼 맛있다는 사실이었다.
크림파스타 역시 토마토파스타 못지않았다.
일반적인 크림파스타보다 소스의 양이 적고 농도는 더 걸쭉했다. 때문에 면발에 소스가 잘 딸려 올라와 입속 가득 진한 크림의 풍미가 느껴졌다.
면의 익힘 정도 역시 알 덴테(al dente)에서 살짝 더 익은 정도로 아주 좋았다.
‘이 정도 사이즈였어?’
강지한의 실력을 얕봤던 김상수의 생각이 바뀌었다.
그런데 히트는 명란냉파스타였다.
그는 냉파스타 자체를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었다.
파스타를 차게 먹는다는 것이 어쩐지 거부감이 들었기 때문.
그래서 명란냉파스타에도 가장 늦게 손이 갔다.
사실 토마토파스타와 크림파스타가 너무 맛있어서 두 가지에만 집중하고 싶었다.
하지만 만들어 온 성의를 무시할 수가 없어서 한입 먹어본 것.
“호록.”
그런데 명란의 고소한 알을 가득 묻힌 시원한 파스타 면이 입으로 들어오자마자 그의 눈이 홉떠졌다.
‘어어어?’
그것은 파스타의 혁명이었다.
입안에서 신세계가 열렸다.
차가운 파스타면이 주는 식감은 만족스러웠고 탱글탱글한 명란도 아주 좋았다.
거기에 알리오올리오의 풍미까지 가득 퍼져 나가니 홉떠졌던 눈은 절로 스르르 감겼다.
꿀꺽!
“하아.”
김상수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맛이 어떠세요?”
강지한이 그런 김상수에게 물었으나 맛의 향연에 넋이 나가 있던 김상수는 미처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자 김상수의 발치로 다가간 설탕이가 그의 신발을 앞발로 툭 치고서는 짖었다.
왕!
그제야 정신을 차린 김상수가 감았던 눈을 떴다.
그의 시야에 궁금해하는 강지한의 얼굴이 들어왔다.
파스타를 먹고 나니 사람이 달라 보였다.
‘요리 천재가 여기 있었네.’
김상수는 맛있다는 말 대신 다른 얘기를 꺼냈다.
“영화판에 오는 밥차 음식들이 이 정도 수준만 되면 얼마를 주든 매일같이 부르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