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2
Restaurant 161. 한여름 밤의 땡모반
7월 24일 화요일.
식당 오픈을 준비하던 강지한에게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전화를 건 사람은 푸드스타일리스트를 교육하고 있는 구자영 교수였다.
-지한 선생님, 요새 통 수업에 오시지 않아서 연락 드렸어요.
강지한은 지한 식당을 오픈하고 난 이후 푸드스타일리스트 수업에 나갈 여유가 없었다.
휴일이 일요일인데 수업 시간은 수요일 오후 6시 40분.
한창 저녁 장사를 이어나갈 시간인지라 참석 자체가 불가능했다.
해서 저번 주부터 손님들에게 당분간 휴일을 수요일로 바꾼다고 공지한 터였다.
“안 그래도 내일부터는 다시 참석하려고 했어요. 죄송합니다.”
-네네. 바쁘시겠지만 이렇게 좋은 가격에 쉽게 자격증 딸 수 있는 기회가 많지 않으니까 꼭 참석하셔요. 내일은 자리 빛내주실 것이라 믿을게요.
“감사합니다. 내일 뵐게요.”
* * *
지한 김치전골.
김숙자가 주방에서 잡일을 하고 있는 장주희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얼마 전부터 그녀의 안색이 영 좋지 않았기 때문.
“주희 씨.”
“네, 언니?”
반찬가지를 담던 장주희가 김숙자를 쳐다봤다.
“요새 뭐 안 좋은 일 있어?”
“아뇨.”
“근데 시종일관 표정이 왜 그래? 무슨 기분 나쁜 일 있는 것처럼.”
“아……. 제가 그랬어요? 미안해요, 언니. 호호.”
장주희가 억지로 웃고 넘어갔다.
아무래도 뭔가 일이 있는 것 같은데 본인이 저리 나오니 더 이상 따질 수도 없는 김숙자였다.
사실 그녀의 짐작이 맞았다.
장주희는 며칠 동안 기분이 영 좋지 않았다.
얼마 전, 그녀는 지한 김치와 김치전골을 포장해 갔다. 그것을 친구 중 나름 절대미각의 소유자인 최민구에게 먹였다.
최민구는 두 가지 음식을 환장하며 먹더니 그 레시피를 착착 불러냈다.
장주희는 집에 가서 그 레시피대로 김치도 담가보고 김치전골도 만들어봤다.
그런데, 전혀 똑같은 맛이 나질 않았다.
‘엉터리 인간 같으니라고. 하긴, 정말 그런 재주가 있었으면 지금 그 모양으로 살고 있지는 않겠지.’
장주희는 최민구가 엉터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최민구는 절대미각까지는 아니었지만 나름 훌륭한 미각의 소유자였다.
그가 음식을 먹고 줄줄 뱉은 재료 중 87퍼센트 이상은 맞아 들어갔다.
다만, 나머지 13퍼센트의 핵심 재료와 각각의 재료들이 어떠한 비율로 들어가는지를 몰랐을 뿐.
장주희는 그것도 모르고서 최민구 탓만 했다.
‘레시피만 알아내면 인생 역전 금방인데.’
나름 요리 솜씨가 있는 장주희는 본래 자기 식당을 가지고 일을 해나가던 여인이었다.
한데 그것이 잘 안되어 말아먹은 후로는 남의 식당에서 주방 보조를 전전해 왔다.
그러다 지한 김치전골까지 오게 됐다.
바로 여기서부터 문제가 생겼다.
이곳의 김치전골은 여느 식당들과 다른 독보적인 맛을 자랑했다.
레시피를 알아내서 자기 것으로 만든다면 따로 식당을 차려도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그 맛의 비법을 찾아내는 것이 불가능했다.
“휴우.”
장주희가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전골을 만들어 내는 김숙자는 힐끔거렸다.
‘진짜 비법 모르는 거 맞아?’
그때.
“주희 씨.”
김숙자의 부름에 그녀가 화들짝 놀라 대답했다.
“네?”
“창고 가서 양파 좀 가져와.”
“네, 언니~”
대답을 하고서 주방을 나서는 장주희.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김숙자가 가늘게 뜬 시선으로 쳐다봤다.
* * *
지한 식당의 브레이크 타임.
강지한은 식사를 일찍 하고 나서 잠시 외출을 했다.
그의 걸음이 향한 곳은 지한 김치전골 매장이었다.
그는 가끔씩 불시에 매장을 방문하곤 했다.
함께하는 직원들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니다.
다만 사람이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정신이 해이해지기도 하는 법.
그걸 막기 위해서는 약간의 긴장이 필요했고, 그 방법으로 불시에 방문하는 것을 택했다.
김치전골 매장은 따로 브레이크 타임이 없었다.
강지한이 방문한 시각은 오후 4시 경.
피크 타임이 아닌 데도 홀의 테이블은 반 이상이 차 있었다.
강지한을 알아본 홀 종업원이 후다닥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사장님, 오셨어요?”
“김 전무님 안에 계시죠?”
“네, 들어오세요.”
강지한이 성큼성큼 주방으로 향했다.
그러자 모든 주문을 내보내고 주방에서 한숨 돌리던 이들이 일제히 인사를 건넸다.
특히 김숙자는 강지한의 손까지 잡아가며 반가워했다.
“강 사장, 왜 이렇게 자주 보러 안 와?”
그 말이 강지한은 고마웠다.
스스로 일을 게을리하고 있다면 저런 말이 나올 리 없었으니.
“죄송해요. 앞으로 더 신경 쓸게요. 별일 없으시죠?”
“강 사장, 잠깐 커피 한잔할까?”
“그럴까요?”
* * *
김숙자는 직원 휴게실로 강지한을 끌고 가 종이컵에 담긴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래요?”
“그래. 행동거지가 영 수상한 게 아니야.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 같은데 꼬리를 잡지 못하겠다니까. 내 괜한 의심인가 싶기도 하고.”
“음……. 그 직원분 좀 불러주시겠어요?”
“알았어.”
김숙자가 나가고 바로 장주희가 들어왔다.
“사장님, 부르셨어요?”
“네. 처음 뵙네요. 언제부터 일하셨어요?”
“한 달 정도 되어가나?”
“그렇군요.”
강지한이 정보의 눈으로 그녀의 상태창을 띄웠다.
<장주희의 능력치>
직급: 지한 김치전골 주방 직원
등급: D-
능력: 요리 LV 5, 서빙 LV 3, 청소 LV 5, 회계 LV 6, 화술 LV 3, 설거지 LV 4
정직도: 54/100
신뢰도: 23/100
종합 평가: 요리 쪽 자질이 없는 건 아니지만 잠재력이 낮다. 그마나 식당을 운영하며 키운 실력도 지금이 한계치다. 정직과는 거리가 먼 기회주의자. 지금도 지한 김치와 김치전골의 레시피를 알아내는 데만 혈안이 되어 있다. 사장에 대한 신뢰도도 없어서 레시피를 알아내는 즉시 떠나가서 자기 장사를 할 타입. 생각이 가볍고 성격은 상당히 급하다.
장주희의 상태창을 확인한 강지한의 입에서 기함이 터졌다.
“하.”
김숙자의 촉이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그런 강지한의 반응에 장주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러세요, 사장님?”
“아……. 아니에요. 듣자하니 그렇게 일을 잘하신다면서요?”
“……네? 아, 뭐…… 못하지는 않지요. 근데 초면이시면서 그런 말을 어디서 들으셨대요?”
“김 전무님한테요. 방금 저랑 잠깐 얘기하는 동안 주희 아주머니 칭찬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했어요. 그래서 모신 겁니다. 어떤 분인지 궁금해서요.”
“어머어머, 숙자 언니가 그랬어요?”
“네.”
그 말을 듣고 난 장주희의 입이 귀에 걸렸다.
“아유~ 진짜 내가 못살아. 평소에는 그런 티 하나도 안 내더니. 하긴, 열심히 하는 사람은 어디 가서 뒷말이 안 나오는 법이야. 그쵸?”
“그럼요. 앞으로도 지금처럼 열심히 해주세요.”
“알겠사와요~”
“가셔서 김 전무님 좀 불러주시겠어요?”
“네.”
장주희가 고개를 꾸벅하고 돌아갔다.
다시 들어온 김숙자가 강지한에게 물었다.
“어떤 거 같아?”
“글쎄요. 사람을 첫인상만 보고 뭐라 단정 짓기가 좀 애매하긴 한데…….”
강지한이 뒷말을 흐리자 김숙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다지 좋은 느낌으로 다가오지는 않았어?”
“네. 그래서 말인데 이렇게 하면 어떨까요?”
“어떻게?”
강지한이 김숙자의 귀에 대고 몇 마디를 건넸다. 그걸 듣고 난 김숙자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런 방법이 있었네! 호호호. 우리 지한 총각은 머리도 비상하다니까. 알았어. 내가 한 번 그렇게 해볼게.”
* * *
지한 김치전골의 장사가 끝난 밤.
김숙자가 장주희를 따로 불렀다.
“주희 씨, 오늘도 고생했어.”
“아유~ 고생은. 언니가 더 고생했죠. 호호.”
강지한에게 있지도 않은 얘기를 듣고 나서 장주희는 하루 종일 기분이 좋았다.
“표정 보니까 강 사장이 쓸데없는 말 했네.”
이미 강지한으로부터 귀띔 받은 것이 있는 김숙자는 표정 하나 안 변하고 연기를 시작했다.
“그런 말은 면전에 대고 좀 해주지. 언니도 참 깍쟁이라니까.”
“지금처럼만 해. 이 바닥 성실한 거랑 실력이 전부인 거 알지? 그렇게만 하면 곧 다른 사람들 보다 돈맛 더 많이 볼 수 있을 거야.”
“언니, 나 지금 상상만 해도 가슴이 벌렁벌렁 뛰는 거 알아요?”
“몰라. 그건 그렇고 다음 주 화요일에 혹시 바빠?”
“왜요?”
“내가 일이 좀 있어서 그날 못 나올 것 같은데 식당을 믿고 맡길 사람이 있어야지. 주방에 중요한 것도 있고…….”
그 말에 장주희의 눈이 번쩍 뜨였다.
‘주방에 중요한 게 있다고? 혹시…….’
김치전골 레시피는 아닐까?
장주희가 바로 입을 열었다.
“제가 할게요. 저야 식당 출퇴근하는 거 말고 뭐가 바쁘겠어요.”
“그래줄래? 그럼 하루 전날 도어락 비번 알려줄 테니까, 오픈 좀 부탁할게.”
“네네. 알겠사와요.”
장주희가 돌아간 뒤, 김숙자는 강지한이 건네준 쪽지를 펼쳤다.
거기엔 특제 양념과 육수, 지한 김치 양념의 레시피가 죽 적혀 있었다.
* * *
7월의 중순도 지나가니 이제 초여름의 더위가 슬슬 기승을 부리려 하고 있었다.
해가 꺼진 한밤중에도 바닥에서 올라오는 뜨끈한 열기에 선풍기를 틀지 않으면 견디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강지한은 예외였다.
레벨 업 된 집은 외부의 온도와 상관없이 언제나 쾌적한 온도를 유지해 주었으니.
일을 마치고 귀가해 거실 소파에서 설탕이를 끌어안고 텔레비전 시청을 하던 강지한이 중얼거렸다.
“내가 배가 불렀나. 예전에는 여름에 더운 게 너무 싫었는데 지금은 필요 이상으로 쾌적하니까 뭔가 낭만이 좀 없네.”
열기가 가시지 않은 방 안에서 선풍기를 틀어 놓고 아이스크림이나 탄산음료, 시원한 과일로 더위를 식히면, 그때만 느낄 수 있는 작은 행복 같은 것이 있었다.
그런 걸 생각하자 강지한의 눈앞에 메시지가 나타났다.
[저택의 온도 조절 효과를 꺼두시겠습니까?]
“이런 것도 돼? 음……. 꺼볼까?”
[온도 조절 효과를 껐습니다. 앞으로는 의지의 발현으로 저택의 모든 효과들을 켜고 끄는 것이 가능합니다.]
온도 조절 효과가 사라지자마자 서서히 방 안으로 열기가 침투하기 시작했다.
‘이런 기능도 있었다는 걸 이제야 알려주다니.’
레벨 업 시스템은 친절한 건지 불친절한 건지 헷갈릴 때가 종종 있었다.
집 안이 더워지기 시작하자 뙤약볕에도 옥탑방에서 버티던 그 시절이 생각났다.
그때는 참 별것 아닌 것에도 감사하며 살았는데 지금은 그런 마음들을 잊어버린 건 아닌지 스스로 반성하게 되는 강지한이었다.
‘종종 이렇게 지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
그러면 초심을 조금은 더 붙잡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강지한이 그동안 모셔두기만 했던 선풍기를 틀었다.
미처 에어컨을 설치하지 않아 선풍기 바람으로만 더위를 달래야 했다.
거실과 복도의 창문을 활짝 열어버리니 조금 견딜 만해졌다.
그래도 뭔가 부족했다.
“아, 그거 해먹을까?”
강지한이 냉동실 문을 활짝 열고 껍질을 제거해서 잘게 잘라 얼려 놓은 수박을 꺼냈다.
얼마 전 수박을 사서 반통은 먹고 나머지 반통은 땡모반을 만들어 먹으려고 얼려뒀었다.
땡모반은 태국의 수박주스다.
땡땡 얼은 수박을 실온에 두고 30분 정도 살짝 녹였다.
땡땡 언 상태로 갈면 잘 갈아지지 않기 때문.
과육에 물기가 솔솔 맺힌 수박의 씨를 제거하고 믹서기에 담았다. 거기에 적당량의 설탕과 연유를 약간 넣고 신나게 갈았다.
위이이이이잉-!
입자가 고와지도록 한참을 간 뒤, 컵에 담았다.
보기만 해도 시원해지는 붉은색의 땡모반이 먹음직스러웠다.
강지한이 빨대를 꽂아 쭉 빨아 먹었다.
입안으로 시원 달콤한 땡모반이 죽 들어왔다.
‘달다.’
얼은 수박을 갈았더니 그 식감이 마치 슬러시를 먹는 것만 같았다.
고운 입자는 혀에 닿자마자 사르르 녹아 사라지며 비강을 수박의 풍부한 향으로 가득 채웠다.
혀끝에서부터 목 끝까지 달콤함이 전해졌다.
가슴 속이 시원해지며 입과 코에서 찬바람이 나왔다.
“끝내준다.”
땡모반은 정말이지 모든 과일 주스 중에 가장 완벽한 것 같았다.
한여름 밤, 땡모반으로 더위를 달래던 강지한이 문득 생각에 빠졌다.
‘장주희 씨…… 어머님이 잘 속였으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