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4
Restaurant 133. 요리 대역
윤신현은 강지한의 눈치만 살피며 마른침을 꼴깍꼴깍 삼켰다.
“많이 급한가요?”
강지한이 물었다.
“사정이 좀…… 그렇게 됐어요.”
송만대는 윤신현에게 강지한을 딱 오늘 하루만 모셔오라 했다.
지한 분식의 휴일이 일요일이라는 건 인터넷에 쳐보니 바로 나왔다.
그때 강지한을 데려오면 더 쉽겠으나, 드라마 촬영 스케줄을 바꾸기 어려웠다.
배우들 시간 맞추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
하나를 바꾸면 나머지가 다 틀어진다.
그나마 여유가 있는 게 오늘이었다.
난감해하는 윤신현의 눈치를 살피며 강지한이 슬쩍 떠봤다.
“오늘이 아니면 안 되나 보네요.”
“네. 상황이 그렇습니다.”
“사정이 급한 건 알겠어요. 그런데 지금 이런 행동 제 입장에서는…….”
강지한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윤신현이 선수를 쳤다.
“압니다. 썩 유쾌하지 않으시겠죠.”
그렇게 말할 것까지는 아니었는데, 본인이 알아서 오해를 해주니 땡큐였다.
“그래도 어떻게든 안 되겠습니까? 아, 출연로도 지급됩니다. 그리고 오늘 하루 장사에 지장이 간다면 저와 감독님 재량으로 어떻게든 손해 범위 채워 드릴게요.”
“음……. 그럼 이건 어떨까요.”
강지한이 협상의 여지를 보이자 윤신현의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네! 뭐든 말씀하세요.”
“얼마 전 신푸드에서 레토르트 식품 네 가지를 출시했어요.”
“알고 있어요. 윤선아 씨가 그렇게 맛있다고 하시던데요.”
“그래요? 실은 그 신제품이 저와 신푸드의 협업으로 만들어진 겁니다.”
“아, 그러셨군요. 한데 그 얘기를 지금 꺼내시는 이유가…… 혹시, PPL 때문에?”
윤신현은 눈치가 빠른 사람이었다.
강지한의 의중을 바로 읽어내고 그리 물었다.
“네. 신푸드 측에서 분식집 막내아들에 PPL을 넣으려고 여러모로 접촉해 봤는데 어려운 모양이더라고요.”
“그렇죠. 지금도 계속 PPL을 요구하는 업체가 있어요.”
자세히는 얘기할 수 없었지만 PPL광고만 전문으로 연결시켜 주는 거대 업체에서도 뒷돈까지 들이미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송만대 감독은 절대 그런 돈을 챙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의 입장에서 봤을 때 PPL이 들어가도 진행에 무리가 없겠다 싶을 경우에만 받아들였다.
물론 제작사 입장에서는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게 다 돈인데 100이 들어올 걸, 60 정도만 거두어들이는 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연일 시청률 대박을 치는 스타 감독을 쳐낼 수도 없는 일.
결국 드라마가 순항하려면 감독의 뜻을 존중해줘야만 했다.
“아, 그럼 PPL은 어렵겠네요.”
강지한의 그 말이 윤신현에게는 촬영장에 걸음할 수 없겠다는 뜻으로 다가왔다.
“잠시만요!”
윤신현이 식당 밖으로 후다닥 달려 나갔다.
그러고는 송만대 감독에게 전화를 걸었다.
카메라가 돌고 있지 않았는지 다행스럽게도 그가 전화를 받았다.
-어떻게 됐어?
“저, 감독님. 그게…….
윤신현이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그러자 잠시 동안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과연 송만대 감독이 이 협상을 허락할지 윤신현은 궁금했다.
-신현아, PPL 넣어준다고 해.
“네? 감독님…… 그거 제작사랑 의견 조율도 해야 하고…….”
-지금 일분일초가 급한데 그럴 여유가 어디 있어! 일단 해준다고 해. 각서 써달라면 써줘. 제작사에는 내가 바로 얘기할 테니까 조금이라도 빨리 모시고 와.
송만대가 저렇게까지 말할 때는 그냥 따르면 된다.
“알겠습니다!”
통화를 끝낸 윤신현이 분식집 안으로 헐레벌떡 뛰어 들어와 말했다.
“지한 씨, 감독님께서 그렇게 하시겠답니다.”
“확실한가요? 나중에 가서 말 달라지면 서로 피곤해질 텐데요.”
“각서를 써달라면 써드리겠습니다.”
“가서 계약서 작성하시죠. 그런 다음에 촬영하겠습니다.”
윤신현의 뒷골이 살짝 당겨왔다.
그냥 요리만 잘하는 분식집 사장인 줄 알았더니 의외로 치밀하고 확실한 사람이었다.
“지금 바로 감독님께 말 전할게요.”
* * *
강지한은 드라마 속 주연을 맡은 좌경우와 같은 조리사복을 입고 있었다.
그가 드라마 세트장에 마련된 주방에 섰다.
주연 배우와 조연들은 오늘 오후 네 시까지 스케줄이 없었다.
새벽 촬영을 마지막으로 잠시 쉬었다가 다시 이어가기로 했다.
“지한 씨, 어차피 카메라엔 뒷모습과 요리하는 손 위주로 나옵니다. 그러니까 표정엔 신경 쓸 필요 없어요. 그냥 부탁드린 요리 몇 가지만 해주시면 됩니다. 아셨죠?”
“네.”
강지한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일반인 치고 카메라 앞에 서 있는 모습이 상당히 자연스러웠다.
보통은 카메라만 들이대면 위축되거나 뻣뻣하게 굳어버리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강지한에게서는 전혀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배틀 셰프의 촬영으로 익숙해진 덕이다.
그에 모니터를 하는 송만대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좋군.’
식칼을 들고 준비를 하고 있는 강지한.
그가 처음으로 부탁받은 요리는 떡볶이였다.
이후로도 김밥, 라면, 튀김, 만두, 쫄면, 돈까스 등등 만들어 내야 할 메뉴가 많았다.
원했던 대로 계약서에는 이미 사인한 상황.
강지한은 최대한 열심히 촬영에 임해주기로 마음먹었다.
상황을 지켜보던 송만대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스텝이 슬레이트를 탁! 쳤다.
녹화 들어가기 전에 무엇이든 잡소리가 들어가면 이입하고 있는 감정이 깨질 수 있다는 게 송만대의 철학이었다.
해서 슬레이트 소리 하나만으로 촬영을 알렸다.
그 순간 강지한의 눈빛이 변했다.
지금 이곳이 드라마 세트장이며, 촬영하고 있다는 생각을 모조리 지워내고 오로지 요리에만 집중했다.
강지한이 웍에 육수와 양념장을 적당히 섞어 불 위에 올렸다.
육수와 양념장은 윤신현의 부탁으로 식당에 있는 것을 가져온 터였다.
그의 손이 빠르게 움직이며 떡볶이에 들어갈 파를 어슷 썰었다.
슥슥슥슥슥.
특별할 것 없는 식칼을 들고 파를 잘라내는 그 손놀림이 그렇게 빠르고 정확할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파를 썰어낸 그가 이번엔 어묵을 네 장 겹쳐 일정한 모양으로 잘라냈다.
그것들을 이제 막 끓으려 하는 웍 안에 집어넣었다.
밀떡은 하나하나 빠르게 떼어 찬물에 담가 한 번 씻어낸 뒤 웍으로 투하했다.
이제 국물이 걸쭉해질 때까지 끓이기만 하면 끝이다.
그러는 동안 강지한은 바로 김밥을 말아냈다.
김밥 재료들 역시 밥을 제외한 나머지 것들을 식당에서 가져왔다.
밥은 촬영장 스텝들이 밥솥에다 미리 지어놓은 상태였다.
강지한이 오이와 햄을 김밥용으로 썰었다.
타타타타타탁!
그리고 각각의 재료들을 볶고 데치고 간장이나 소금으로 간했다.
달걀지단까지 만들어 썰고 나니 순식간에 김밥 속 재료들이 완성됐다.
밥을 한 대접 퍼서 거기에 맛소금과 참기름으로 간을 했다.
이후 김 한 장을 펴서 밥을 펴 바르고 속재료를 넣어 발도 없이 단숨에 말아내니 예쁜 김밥 한 줄이 탄생했다.
“와아.”
스텝 중 누군가가 저도 모르게 탄성을 흘렸다.
요리에 집중하는 강지한의 모습은 감탄이 나올 만큼 멋졌다.
그의 손이 쉬지 않고 움직일 때마다 먹음직한 요리가 하나둘 완성되고 있었다.
카메라 감독은 강지한이 만들어내는 음식들을 앵글에 담으며 계속 꼴딱꼴딱 군침을 삼켰다.
세트장 안에 고소한 음식 냄새가 퍼져 나가고 있었다.
촬영에 들어가면 누구보다 냉철해지는 송만대 감독 역시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입안에 흥건히 고이는 침을 막을 수 없었다.
강지한의 떡볶이를 먹어봤기 때문이다.
원래 아는 맛이 제일 무서운 법이다.
* * *
강지한은 몇 시간 동안 NG 한 번 없이 많은 음식들을 만들어 냈다.
상황에 따라서 같은 음식을 여러 번 다시 만들기도 했고, 다른 세트장에서 요리를 하기도 했다.
그렇게 모든 촬영을 마치고 나니 어느새 오후 세 시가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지한 씨, 고생했습니다. 정말 멋졌어요. 하하.”
촬영장에서는 잘 웃지 않기로 소문난 송만대가 강지한을 칭찬하며 밝게 미소 지었다.
그 생소한 모습에 스텝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괜찮았는지 모르겠네요.”
“괜찮고말고. 대단했습니다. 내가 머릿속에 그리고 있던 이미지를 그대로 재현했어요. 스물아홉이라 그러셨나?”
“네.”
“아직 서른도 안 된 나이인데 요리에 담긴 연륜은 여느 대가 못지않아요. 덕분에 남은 촬영이 든든할 것 같습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그리고 PPL 건은 잘 부탁드릴게요.”
그 말에는 옆에 있던 메인 작가 나일영이 대답했다.
“걱정 말아요. 네 가지 신제품 전부 시나리오 안에 자연스럽게 비벼 드릴게요.”
나일영은 이 바닥 최고의 드라마 작가 중 한 명이다.
그녀가 그렇게 하겠다면 할 수 있는 것이다.
“네. 마음 놓고 있겠습니다.”
그때 세트장으로 좌경우와 윤선아가 함께 도착했다.
네 시부터 이어질 촬영을 위해서였다.
강지한의 실물을 처음 본 윤선아는 괜한 감동이 차올랐다.
그녀는 강지한의 김밥에 처음 반했고, 그가 만든 다른 음식들에 두 번 반했으며 배틀 셰프를 보면서 세 번 반했다.
한마디로 연예인이 일반인의 팬이 되어버린 것.
“반가워요, 강지한 씨! 배틀 셰프 잘 보고 있어요!”
윤선아가 팬심에 가득 차 강지한의 손을 덥썩 잡았다.
“아, 네. 감사합니다.”
강지한이 어색하게 웃어 보일 때, 면식이 있는 좌경우도 반갑게 다가와 허리 숙여 인사를 건넸다.
“강 사장님!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세요, 좌경우 님. 드라마 재미있게 잘 보고 있어요. 연기가 물이 오르셨던데요.”
“그게 다 강 사장님 덕이라는 거 아세요? 우리 선아가 강 사장님 분식집 소개시켜 주는 바람에 드라마 주연 자리도 꿰차게 된 겁니다. 제가 분식집에 며칠 동안 드나든 거 모르시죠?”
좌경우는 강지한이 자신을 텔레비전으로 접해서 알겠거니 했다.
“기억합니다. 어느 날 갑자기 안 보이신다 싶더니 이후로는 텔레비전에서 뵐 수 있었죠.”
그 말을 들은 좌경우의 얼굴에 감동이 차올랐다.
“영광입니다, 강 사장님. 저한테는 정말 은인이세요.”
“저는 평소처럼 장사만 했는데요.”
“그게 사장님께는 일상이었지만 저에게는 인생이었습니다.”
좌경우의 벅찬 마음이 강지한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 * *
윤신현은 강지한을 춘천까지 모셔주기 위해 함께 촬영장을 떠났다.
두 사람이 사라진 세트장 안에는 여전히 식욕 당기는 고소한 냄새가 가득 퍼져 있었다.
“감독님~ 빨리 촬영 들어가죠.”
오늘 촬영해야 할 장면은 아버지 대신 분식집 주방을 맡은 주인공이 분식집을 다시 오픈하기 전, 모든 메뉴의 맛을 최종 점검하는 것이었다.
강지한이 만들어 놓고 간 음식들이 가득 쌓여 있으니 배우들은 열심히 먹고 연기만 잘해주면 되는 일.
때문에 그 맛을 아는 배우들의 마음이 급해졌다.
송만대 감독과 나일영 작가도 음식이 탐났지만 체면 때문에 맛볼 수가 없었다.
탁!
현장이 조용한 와중 송만대 감독의 사인에 슬레이트가 쳐졌다.
배우들의 모습이 카메라에 담겼다.
그들은 세팅 된 음식 주변에 둘러앉아 저마다 이것저것 맛을 보기 시작했다.
강지한의 음식을 음미하는 배우들은 하나같이 진심 어린 감탄을 뱉었다.
“와아.”
“진짜 맛있는데?”
“미쳤다. 완전 미쳤어.”
“이 정도면 당장 내일부터 분식집 문 열어도 되겠어!”
저마다 자신에게 할당된 대사를 내뱉었다.
한데 그건 이미 연기가 아니었다.
진심이었다.
다들 허겁지겁 음식을 먹어치우며 끊임없이 찬사를 뱉었다.
그것을 찍고 있는 카메라 감독들은 계속 입맛만 다셨다.
고문도 이런 생고문이 따로 없었다.
“컷!”
송만대 감독이 충분하다 싶은 시점에 컷을 외쳤다.
그런데.
“우물우물. 꿀꺽.”
“호록. 크으.”
배우들은 음식에서 손을 뗄 줄 몰랐다.
“컷. 컷. 컷! 음식 가져와!”
결국 송만대 감독의 목청만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