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2
Restaurant 131. 지한 식당
“와, 내가 분식집 들어오려고 줄을 서보긴 또 처음이네.”
테이블에 앉은 하준수가 투덜댔다.
웨이팅이 긴 건 아니었지만 고작 분식집 음식 먹자고 줄까지 설 마음은 없었다.
일단 스텝 두 명은 카페에 놔두고 왔다.
로버트 정은 다 같이 가자고 했지만 하준수가 거절했다.
자리를 비운 사이 설탕이가 또 어떤 모습을 보여줄 줄 모르는 일이다.
오전에 잠깐 봤는데도 말도 안 되는 천재성을 보여준 강아지다.
때문에 한시라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같이 못 오신 분들 정말 안타깝게 됐네.”
하준수의 맞은편에 앉은 로버트 정이 입맛을 다셨다.
“에이, 아까부터 너무 오버하신다.”
“준수 씨, 먹어보면 그런 소리 안 나올 걸.”
“먹어도 나올 걸.”
둘이 티격태격하는 사이 이리나가 다가왔다.
“정 디렉터 님! 오래간만이에요.”
“리나 씨, 잘 지냈어요?”
“그럼요~ 저는 잘…….”
“아니 잠깐! 그 눈빛. 슬퍼 보이네요. 제가 너무 오랫동안 격조했죠? 절 보지 못해 힘들어했을 이리나 씨의 모습이 그려지네요. 마음 아프게 만든 것, 사죄드릴게요.”
“……그래서 뭐 드시겠어요?”
이리나가 방긋 웃으며 물었다.
헛소리를 완전히 차단해 버리는 지극히 만들어진 미소였다.
“저는 김치찌개 하나요.”
하준수는 메뉴를 죽 훑어보고서는 말했다.
“비빔밥 주세요.”
어느 분식집을 가든 비빔밥은 맛의 편차가 크지 않고 무난했다.
그냥 고추장에 참기름 맛이기 때문.
“김치찌개랑 비빔밥. 주문 받았습니다.”
이리나가 생긋 웃고서 테이블을 떠났다.
그러자 하준수가 재미있다는 듯 로버트 정에게 물었다.
“이 상가 정체가 뭐야?”
“왜?”
“카페 주인도 그렇고 여기 직원들도 하나같이 외모가 괜찮네.”
“소린 씨는 괜찮은 정도가 아니지.”
“맞아.”
“근데 비빔밥 말고 다른 거 시키지.”
“별로야?”
“그건 아니야. 맛있긴 맛있기는 한데, 다른 음식들보다는 개성이 조금 떨어지거든.”
“괜찮아. 그거면 됐지.”
그때 이주희가 다가와 물과 반찬을 세팅해 줬다.
김치와 두부조림, 콩자반, 햄어묵볶음으로 김치는 레벨6, 나머지는 레벨 5였다.
“오, 나왔다.”
로버트 정이 반찬을 과하게 반겼다.
“누가 보면 음식이라도 나온 줄 알겠네. 고작 반찬 가지고 호들갑이셔?”
“김치 때문에 그래. 먹어보면 그런 말 쏙 들어갈걸.”
로버트 정이 김치 한 조각을 먹고 눈을 크게 떴다.
“전보다 더 맛있어졌네? 나 이대로 열반의 경지에 들지도 몰라, 준수 씨.”
“거 참. 알았어, 장단 맞춰줄게.”
하준수가 졌다는 얼굴로 김치를 집어 먹었다.
“아~ 되게 맛.”
아삭.
“……있다.”
놀란 하준수를 보며 로버트 정이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거봐. 오버한 거 아니지?”
“정 디렉터가 여기 오자고 한 이유를 알겠네. 김치 맛집이구나. 아! 그래서 김치찌개 주문한 거? 나도 김치찌개 먹을걸.”
착각은 자유였기에 로버트 정은 더 이상 아무 말 않고 음식을 기다렸다.
드디어 두 사람이 주문한 음식이 서빙됐다.
김치찌개와 비빔밥은 겉보기엔 다른 분식집에서 먹는 것과 다를 것이 없는 비주얼이었다.
“후루룩. 크, 브라보.”
로버트 정이 고개를 저으며 박수를 쳤다. 그러고서는 말없이 먹는 데만 집중했다.
하준수도 비빔밥을 슥슥 비벼서 크게 한입 떴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했던 풍부한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그건 그가 일반적으로 먹어왔던 그런 비빔밥이 아니었다.
일단 입안에서 돌아다니는 밥부터가 달랐다.
하준수는 요리사가 아니었기에 그걸 어찌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
다만, 비빔밥을 만들었을 때 가장 잘 어울리는 밥을 지으면 지금 이 상태가 아닐까 싶었다.
비빔밥에 들어간 각종 채소들은 각각의 개성이 오롯이 살아 있었다. 신선한 야채 속에 숨어 있는 소고기 고명은 완벽한 존재감을 뿜어내며 전체적인 감칠맛을 한층 높여주었다.
한데 가장 인상적인 건 장맛이었다.
혀에서 느껴지는 맛과 비강을 넘어 들어오는 향이 비빔밥에 들어가는 일반적인 고추장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지나치게 맵지 않고 살짝 달달한 그 맛이 전체적인 비빔밥의 재료들을 하나로 완벽하게 잡아주고 있었다.
거기에 고소한 참기름 향이 씹을수록 그윽하게 퍼져 나가니 기가 막혔다.
비빔밥 한 숟갈에 생각지도 못했던 맛의 향연을 체험한 하준수가 목을 까딱거렸다.
기분이 좋으면 나오는 버릇이었다.
그는 비빔밥에 서비스로 달려 나온 어묵국을 한술 떴다.
그런데 이 어묵국도 범상치가 않았다.
일반적인 분식집에서 내어주는 어묵국은 맛간장 같은 조미료 맛이 전부인데, 여기는 달랐다.
아주 잘 우려낸 멸치 육수에 풍부한 어묵의 맛이 배어들어 있었다.
“여기 대박이네.”
결국 하준수의 입에서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내가 뭐라 그랬어.”
로버트 정이 씩 웃었다.
그때 하준수의 눈에 이미 반이나 먹어치운 상대방의 김치찌개가 들어왔다.
이를 눈치챈 로버트 정이 손으로 뚝배기를 가리며 고개를 저었다.
“이건 내 거야. 준수 씨 새로 하나 시키든가.”
하준수는 평소에 그리 많이 먹는 편이 아니었다.
그런데 비빔밥을 먹고 나니 다른 음식들이 몹시 궁금해졌다.
‘가장 맛의 편차가 없는 음식이 이 정도인데 다른 것들은…….’
과연 어떨까?
고민하던 하준수는 결국.
“여기요! 김치찌개 하나 더 주세요!”
과식을 하기로 했다.
* * *
오후.
설탕이를 찍는 내내 하준수의 머릿속에서는 아까 맛봤던 비빔밥과 김치찌개의 맛이 떠나지를 않았다.
‘저녁도 거기서 먹어야지.’
눈은 설탕이를 보고 있는데 마음은 딴 데 가 있으니 도통 촬영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하준수는 혼자만 지한 분식에서 배를 채운 것이 미안한 나머지 김밥을 포장해 와서 스텝들에게 돌렸다.
근데 배가 터질 것 같은 와중에도 김밥 한 줄을 해치웠다.
과연 김밥은 또 어떨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김밥 역시 대박이었다.
‘사장님이 나이도 많지 않던데 그 손맛은 어디서 가져온 거야?’
갑자기 강지한에게 궁금한 것이 많아졌다.
어차피 강지한은 설탕이의 주인으로 영업이 끝난 후 촬영을 해야 하는 상황.
하준수는 그때 여러 가지를 물어보기로 했다.
‘아, 김치찌개 또 먹고 싶다.’
그가 부른 배를 어루만지면서도 아까 먹었던 김치찌개 맛을 떠올리고 있을 때였다.
“어머나~!”
“어쩜~ 너무 예쁘다. 우리 설탕이.”
갑자기 카페 안에 있던 손님들이 난리가 났다.
그에 딴 곳에 가 있던 하준수의 정신이 다시 돌아왔다.
그가 카메라 앵글에 담긴 설탕이의 모습을 확인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얼굴 근육이 전부 풀려 헤벌쭉 미소 짓고 말았다.
화면 속 설탕이는 손님 중 누군가가 검지와 엄지를 모아서 만든 동그라미에 코를 박고 있었다.
손님이 설탕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서는 다시 녀석의 얼굴 앞에다가 검지와 엄지를 모아 동그라미를 만들었다.
그러자 설탕이가 거기에 다시 얼굴을 들이밀더니 코를 콕 박았다. 동그라미 밖으로는 설탕이의 코와 입이 배꼼 튀어나왔다.
“꺄아~ 설탕아!”
“나도 해볼래!”
“나도!”
생각지도 못했던 설탕이의 개인기에 손님들의 환호가 쏟아졌다.
하준수가 옆에 있던 메인 작가에게 속닥댔다.
“강아지 주인이 어떻게 해야 귀여워 보이는지를 잘 아는 것 같지? 저런 것도 훈련시키고.”
그러자 메인 작가가 그를 이상하게 쳐다봤다.
“피디님 방금 뭐 보셨어요?”
“응? 뭘?”
“아니, 그거 방금 설탕이가 저 여자 손님이 보여준 동영상 보고 그대로 따라한 거잖아요.”
“……뭐라고?”
하준수는 지한 분식의 음식을 생각하느라 잠시 동안 눈앞의 상황을 놓쳤다.
그런데 작가가 하는 말을 듣고 나니 머릿속에서 벼락이 쳤다.
“손님이 보여준 동영상 보더니 따라했다고?”
“네. 요새 인튜브에서 제법 핫한 영상인데 모르세요? 주인이 검지랑 엄지로 동그라미 만들어서 얼굴 앞에 가져가니 강아지가 거기에 코 박는 거. 귀염 터지는 바람에 조회수가 300만이 넘었어요.”
“근데 그걸 설탕이가 방금 보고 따라했다 이거야?”
“그렇다니까요. 쟤 아이큐 테스트 제대로 한 번 받아봐야 할 것 같아요.”
“내 보기에 최소 돌고래 이상일 것 같다.”
어떻게 강아지가 동영상을 한 번 보고 그것을 바로 학습해서 따라할 수 있는 건지, 하준수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카페의 손님들은 그런 설탕이의 행동을 당연한 듯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 말은 이런 설탕이의 모습이 처음으로 접하는 게 아니라는 얘기일 터.
아직 태어난 지 일 년도 되지 않은 강아지가 보통 예사롭지 않았다.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설탕이의 가장 큰 매력은 바로,
“우리 설탕이 나한테 배 보여주는 거야?”
“얘는 어쩜 배꼽까지 귀여워?”
“발바닥에 말랑말랑 곰돌이 좀 만져볼까?”
바로 사람의 정신을 놓게 만드는 사랑스러움이었다.
* * *
촬영은 다음 날까지 이어졌다.
전날은 애견 카페에서 노는 설탕이의 모습을 담았으니 오늘은 밖에서 활동하는 장면들을 주로 담았다.
설탕이가 주인도 없이 돌아다니게 할 수는 없는 일이니 강지한에게 양해를 구해, 그와 함께 촬영이 진행됐다.
사실 분식집이 너무 바빠 그가 허락을 해줄까 싶었는데 흔쾌히 그러겠다며 나섰다.
강지한은 요즘 이런 상황이 생길 때마다 용성우를 훈련시키는 기회라고 생각했기에 큰 고민 없이 이를 수락한 것이다.
강지한과 설탕이는 촬영팀이 미리 보아둔 장소들을 돌아다니며 주인과 반려견의 행복한 모습을 그려냈다.
사실 촬영은 어제 한 번으로도 충분했다.
설탕이가 애견 카페 안에서 기가 막힌 모습을 숱하게 보여주었으니.
그럼에도 촬영을 연장한 건 지한 분식의 음식을 더 맛보고 싶었던 하준수의 욕심 때문이었다.
그는 오늘도 촬영 중간중간 끼니를 지한 분식에서 해결했다.
어제 먹어보지 못했던 메뉴들로 배를 채웠는데 역시나 그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심지어 오늘은 강지한 본인이 아닌 부주방장 용성우가 요리를 했음에도 말이다.
이틀간의 촬영을 모두 마치고서 하준수와 촬영팀은 춘천을 떠났다.
설탕이의 촬영분은 다다음 주 중에 방영될 것이라는 말을 전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서울로 향하기 위해 고속도로를 달리는 승합차 안.
하준수는 오늘 촬영한 영상을 돌려보며 몇 번이나 감탄을 자아냈다.
모니터에 담긴 설탕이의 모습은 더 말할 것도 없이 귀여웠다.
한데 강지한 또한 상당히 괜찮았다.
카메라 앞에서 행동하는 모습이나 미소가 전혀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러웠다.
게다가 키가 크고 비율 좋은 몸에 워낙 훈훈한 외모의 소유자인 데다 패션 센스까지 좋아서 보는 눈이 즐거웠다.
“강지한 씨 정말 괜찮죠?”
옆에서 모니터를 같이 보던 메인 작가가 물었다.
“응. 아주 좋은 마스크야. 근데 음식 솜씨가 범상치 않다 했더니 배틀 셰프 출연자일 줄은 몰랐네.”
“피디님은 그게 문제예요. 동물 관련 프로만 보지 말고 다른 예능이나 방송도 좀 챙겨봐요. 내가 뭐랬어요? 강지한 저분 나름 유명인이라고 했었잖아요. 그때는 귓등으로도 안 들으려고 하더니.”
하준수는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저었다.
메인 작가가 콧잔등을 찡그리며 고개를 휙 돌렸다.
하준수의 시선이 다시 모니터 안으로 깊숙이 빠져들었다.
‘배틀 셰프에서 맹활약 중인 지한 분식 사장과 천재견 설탕이. 아이템 아주 잘 빠졌다. 후후.’
올라가는 시청률을 그려보는 그의 입꼬리가 귀에 닿을 지경이었다.
* * *
밤 9시.
촬영이 끝나고 난 뒤, 강지한은 설탕이와 함께 거두리에 있는 50평 식당 건물로 향했다.
‘이게 내 건물이라는 거지.’
감회가 새로웠다.
어제는 들를 여유가 없었기에 계약을 마치고 나서 오늘 처음으로 들른 것이다.
백진목은 식당을 선물 받으며 내야 하는 증여세도 본인이 해결해 주겠다고 전해왔었다.
하지만 강지한이 거기까지는 마다했다.
그 정도의 돈은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설탕아, 한 번 들어가 볼까?”
왕!
강지한의 물음에 설탕이가 꼬리를 흔들며 좋아했다.
건물의 잠긴 문을 열고 천천히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어두컴컴한 식당 안에 설레는 메시지가 나타났다.
[Stage 3. 지한 식당]
[목표: 분점을 한 개 이상 내십시오.]
[성공 보상: 잃어버린 강지한의 기억 한 조각]
[오픈 전입니다.]
[레벨 업은 오픈 이후 가능합니다.]
[상급자의 난이도가 적용 됩니다.]
[만족도는 10일 동안만 습득 가능합니다.]
강지한은 주르륵 떠 오른 메시지를 보며 환희에 가득 찼다.
그런데 조금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바로 성공 보상에 관한 항목이었다.
‘내…… 잃어버린 기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