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
Restaurant 128. 시각, 청각, 후각
“여긴…….”
진상명이 뒷좌석에서 창밖을 살폈다.
강지한이 두 사람을 데리고 온 곳은 다름 아닌 시장이었다.
“내리시죠.”
강지한의 말에 진상명이 백진목을 부축해서 내렸다.
백진목은 시장 초입을 바라보며 물었다.
“시장에서 잃어버린 내 입맛을 찾아주시겠다?”
“네.”
“글쎄……. 그렇다면 좋겠지만 이제는 내 혀가 예전 같지 않아서 뭘 먹어도 그 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오. 그저 다 심심하고 싱거울 뿐이지.”
백진목이 회의적으로 말했다.
그때 검은색 세단 한 대가 주차장으로 들어서더니 강지한의 차 뒤에 주차를 했다.
진상명과 백진목이 타고 왔던 차였다.
세단의 운전석과 조수석 문이 열리고 수행원 두 명이 내려 백진목의 양옆에 호위하듯 섰다.
그에 백진목이 손을 내저었고 두 사람은 뒤로 조금 물러섰다.
“아직 걸어가다 자빠질 만큼 늙진 않았으니 과잉보호는 그만둬.”
수행원 두 명이 얼른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사람들 많은 데서 그렇게 과장된 행동도 하지 말고. 원, 남사스럽게.”
백진목은 귀찮다는 듯 고개를 내젓고 설렁설렁 앞으로 걸어 나갔다.
강지한과 진상명이 시선을 주고받은 뒤 픽 웃고서는 그런 백진목을 따라 걸었다.
“근데 강 선생.”
백진목이 옆에서 나란히 걷고 있는 강지한을 불렀다.
“네, 백 어르신.”
“자네가 요리를 그렇게 잘한다고 상명이가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는데, 그냥 맛있는 음식 한 그릇 만들어주는 게 더 낫지 않았겠는가?”
“둔해진 혀로는 제가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낸다 한들, 아무 맛도 느끼지 못할 겁니다.”
그렇다고 간을 세게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음…….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도 역시 소용없는 건가.”
백진목이 조금 힘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진상명이 그런 백진목의 눈치를 살피며 강지한에게 귓속말을 건넸다.
“오늘 굳이 이른 시간에 오라고 한 이유가 시장 때문이었군요.”
“네, 여기가 풍물시장이라는 곳인데 춘천 장중에서 제법 크거든요. 매달 2와 7이 들어가는 날마다 열리는 오일장이에요. 근데 마침 오늘이 12일이기에 일찍 오시라고 했어요.”
“시장에 맛있는 먹거리라도 있는가 보군요.”
“아주 많죠.”
“우리 은사님 입맛을 돌아오게 할 만한 음식도 있을까요?”
“여기서 뭘 먹지는 않을 거예요.”
“음? 먹지 않는다? 그럼 어찌하여…….”
진상명이 의아해할 때였다.
그의 코로 고소한 튀김 냄새가 스며들어 왔다.
이어 무언가가 기름에 튀겨지는 소리가 들렸다.
치이이이이이-
진상명의 고개가 절로 돌아갔다.
세 사람이 지나는 길 우측으로 맛있는 꽈배기들이 설탕옷을 입고 가득 쌓여 있는 광경이 보였다.
“꽈배기. 어렸을 적에 참 많이 먹었지.”
백진목의 말이었다.
그도 꽈배기를 튀기는 소리와 고소한 냄새를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하지만 거기까지.
꽈배기를 먹지는 않고 멈췄던 걸음을 다시 옮겼다.
추억 속 맛을 떠올려 주기는 했으나 그것만으로 입맛이 돌아오지는 않았다.
강지한이 백진목과 걸음을 함께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다 무언가를 발견하고서 입을 열었다.
“어르신, 촌떡이라고 아세요?”
강지한이 손으로 가리킨 전집의 진열대 위로 촌떡이 가득 쌓여 있었다.
강원도에서는 촌떡이지만 보통은 전병이라고들 많이 부른다.
전집 주인아주머니는 진열대 옆에 앉아 뜨겁게 달궈진 철판 위에 메밀반죽으로 촌떡 피를 굽고 있었다.
치이익 소리를 내며 노릇노릇 구워지는 피가 그렇게 맛깔나 보일 수 없었다.
다 구워진 피 안에다가는 잘게 다져 양념한 김치소를 넣어 둘둘 말았다.
백진목이 그 과정을 재미있게 지켜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지. 몇 년 전 까지만 해도 즐겨 먹었지. 그거 참 들어간 것도 없는데 영 맛이 있었소.”
“냄새가 고소하죠?”
“입맛 돋게 하기로는 그만이오.”
“맞습니다. 하하.”
강지한은 촌떡을 잠시 구경하다가 백진목과 함께 또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쯤 되자 진상명은 강지한이 왜 시장으로 그들을 안내했는지 알 것 같았다.
하지만 모른 척 아무 말도 않고 상황을 조용히 따라만 다녔다.
시장에는 참으로 많은 먹거리들이 있었다.
기름에 튀긴 옛날통닭, 닭똥집, 부침개, 각종 전들, 장어구이, 삼겹살, 돼지껍데기볶음, 잔치국수, 막국수, 호떡, 빈대떡, 국물닭발, 꼼장어, 순대국 등등.
그 많은 먹거리들을 눈으로 보고 냄새 맡고, 만들어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거리를 거님에 따라 백진목의 얼굴에 웃음이 걸리고 있었다.
그러다 허름한 노포에서 우거지국밥을 먹는 사람들을 지켜볼 땐 입맛을 다시기도 했다.
“나도 저 시장국밥을 참 좋아했는데.”
오래 된 고무 그릇에 밥을 말아 투박하게 담겨 나온 우거지 국밥 한 그릇은 시장이라는 공간 안에서 참 특별해진다.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음식인데, 시장 안에서만 맛볼 수 있는 향취가 있었다.
“더 안으로 들어가 보시죠.”
강지한이 백진목을 계속 이끌었다.
시장 안에는 음식만 있는 게 아니었다.
옷과 신발, 오래된 잡동사니, 지금은 많이 볼 수 없는 옛 물건 등등.
소박하고 정겨운 것들이 보는 이의 마음을 즐겁게 만들어줬다.
그렇게 거닐다 보면 갑자기 생선 비린내가 콧속을 파고든다.
각종 생선과 수산물을 파는 상인들이 바다를 시장으로 옮겨온 것이다.
“참 싫지 않은 비린내야.”
백진목이 나직이 말했다.
그곳을 지나고 나니 분식을 파는 작은 포장마자차가 나왔다.
떡볶이, 오뎅, 순대, 튀김은 한국인에게 더 없이 친근한 먹거리였다.
조금 더 가니 캬라멜 색 껍질을 두른 족발이 구수한 향으로 유혹했다.
그 옆에서는 군밤 장수가 열심히 밤을 구워내고 있었다.
매대 한쪽에는 쥐포와 말린 문어 다리 같은 것이 한가득 쌓여 있는데 그게 또 참 맛깔스러워 보였다.
거기에 화룡 정점으로 소라와 번데기도 마련되어 있었는데, 특히 번데기 냄새에 진상명의 입안 가득 침이 고였다.
백진목도 군침을 꿀꺽 삼켰다.
그렇게 이런저런 먹거리와 구경거리들을 보며 거닐던 백진목의 걸음이 턱 하고 멈췄다.
그의 시선이 작은 식당 안에서 잔치국수를 먹고 있는 노인들에게 꽂혀 있었다.
“저거 참 맛있지.”
멸치 육수에 잘 삶은 국수를 말아 고명을 얹어 내놓으면 입맛에 맞게 양념간장을 섞어 한 입 크게 후루룩 욱여넣는 그 맛이란.
가격도 2천 원에서 3천 원선으로 저렴하니 더 없니 좋았다.
“내가 저 잔치국수를 가장 좋아하는데. 비싸고 고급진 데서 먹으면 맛이 없어. 잔치국수는 무조건 잔칫집이나 시장터에 가서 싼값 내고 게걸스럽게 먹어야 된다고. 그 별거 없는 맛이 참 좋단 말이야. 우리 어머니가 참 자주 해줬던 음식이기도 하지.”
꼬르르륵.
잔치국수를 넋 놓고 보고 있던 백진목의 뱃속에서 급기야 꼬르륵 소리가 울렸다.
“이제 우리 뭣 좀 먹어야 하지 않겠소?”
결국 백진목의 입에서 뭘 먹자는 얘기가 나왔다.
식욕이 없어 하루에 한 끼를 겨우 먹는다는 그가 먼저 식사 얘기를 내뱉으니 진상명은 됐다 싶었다.
강지한도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아 두 사람을 차에 태워 다시 분식집으로 향했다.
오후 4시.
분식집은 브레이크 타임이었다.
직원들은 이미 밥을 먹고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강지한은 손님들에게 테이블 하나를 내어준 뒤, 바로 주방에 들어섰다.
그런 그에게 고중만이 물었다.
“저 백발노인은 누구야?”
“세진 그룹 회장님이요.”
“세진 그룹 회장…… 컥! 배, 백진목?”
“네.”
그제야 고중만은 눈을 닦고 백진목을 자세히 살폈다.
뉴스에서 심심찮게 봤던 그 얼굴이 맞았다.
“아니 그런 분이 왜 여기에……. 아니지. 진상명 씨 인맥이면 충분히 그럴 수 있지. 근데 왜 저런 거물을 모시고 왔대?”
“분식집에 왜 오셨겠어요?”
“밥 먹으러? 세진 그룹 회장이 굳이 여기까지? 와……. 강 사장 대단하네, 대단해.”
고중만이 떠드는 걸 한쪽 귀로 흘리며 강지한은 냄비에 물을 받아 불 위에 올렸다.
거기에 멸치와 다시마만 넣고 육수를 우렸다.
물이 끓을 동안 당근, 애호박을 채 썰어 따로 볶았다.
그러고는 계란 노른자와 흰자를 분리해 지단을 구워 채 썰었다.
그때쯤 다시마를 먼저 건져내고 멸치육수를 계속 우려냈다.
한데 육수를 내기 위해 들어간 멸치의 양이 조금 과했다.
강지한이 시장에서 국수를 사드리지 않고 굳이 식당에 모시고 와서 직접 국수를 만들어 주려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다.
혀의 감각이 둔해졌으니 강한 향으로 이를 보완하려 한 것.
육수의 멸치의 풍미가 가득가득 퍼져 나갈 때 김치를 조금 꺼내 종종 썰었다.
고명이 다 준비되었으니 이제 면을 삶을 차례.
냄비 하나에 더 물을 받아 끓였다.
물이 팔팔 끓어오를 때 소면을 투하했다.
육수는 이제 멸치의 풍미가 충분히 퍼졌으니 불을 끄고 맑게 걸러냈다. 거기에 소금을 살짝 넣어 간을 맞췄다.
잘 삶아진 소면은 건져서 채에 담아 찬물에 비벼 빨아 전분기를 빼줬다.
쫄깃한 소면을 그릇에 담아 멸치 육수를 붓고 고명을 얹는 것으로 잔치 국수 두 그릇이 뚝딱 완성됐다.
강지한은 그것을 진상명과 백진목의 테이블에 직접 서빙했다.
잔치국수를 만드는 과정 사이사이에 후다닥 제조한 양념간장도 함께였다.
시장에서부터 시장기를 느끼던 백진목이 가장 좋아한다던 잔치국수를 보자마자 침부터 꼴깍 삼켰다.
“그래. 아까도 이게 가장 먹고 싶었어. 어디.”
백진목이 잔치국수 한 젓가락을 크게 집어 후후~ 불고서는 한입 크게 넣었다.
“후루룩!”
진상명와 강지한은 그런 백진목의 반응을 살폈다.
“쩝쩝.”
백진목은 그런 줄도 모르고 오로지 국수를 먹는 데만 집중했다.
입안에서 통통 튀는 쫄깃한 소면을 씹어 삼킨 백진목이 이번엔 그릇을 째로 들어 국물을 맛봤다.
“호로록. 꿀꺽. 흐으.”
뜨끈한 국물이 식도를 타고 넘어가며 뱃속을 따뜻하게 만들었다.
면과 국물을 맛본 백진목의 입에 만족스런 미소가 걸렸다.
“맛있어.”
그에 진상명이 눈을 크게 뜨고 물었다.
“맛있어요? 정말 맛있습니까?”
“그래. 맛있어. 추억의 맛이야.”
그러고서는 백진목이 다시 국수를 흡입하기 시작했다.
너무 열정적으로 국수를 빨아들이는 그의 모습은 과연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입맛이 없다던 사람이 맞는 건가 싶을 정도였다.
이를 본 강지한이 남몰래 주먹을 꽉 쥐었다.
백진목을 시장으로 데려간 그의 노림수가 제대로 먹혔다.
‘어차피 둔해진 혀로는 무슨 음식을 만들어 준들 그 맛을 제대로 느끼기 힘들지.’
그렇다면 시각, 청각, 후각으로 음식을 느끼게 만들어 추억 속에 깊이 박혀 있는 맛을 떠오르게 해주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했다.
음식은 맛으로만 먹는 게 아니다.
만들어지는 소리, 혹은 누군가가 먹는 소리를 들으며 귀로 먹고, 맛깔스러운 모양새를 보며 눈으로 먹고, 군침 도는 냄새를 맡으며 코로도 먹는다.
거기에 한 가지 더.
추억으로도 먹는다.
오래전 쌀밥이 귀하던 시절, 보리밥이 지겹다던 어른들이 지금은 굳이 돈까지 내가며 보리밥을 사먹는 것도 거기에 추억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강지한은 백진목의 시각, 청각, 후각을 자극해 입맛을 돌게 한 다음 추억의 맛이 담긴 잔치국수를 내어줬다.
그러니 아무리 혀가 무뎌졌다고 한들 지금 이 잔치국수 한 그릇은 세상 무엇보다도 맛있게 다가왔다.
그런 백진목을 보며 진상명이 육수를 떠먹었다.
간이 심심하게 되어 있었다.
같이 나온 간장을 섞지 않으면 싱겁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게다가 강지한이 만든 음식 치고 육수에서 멸치 향이 강하게 풍기는 것 외엔 별로 특별한 것도 없었다.
그냥 어디서나 먹을 수 있는 잔치국수였다.
한데 백진목은 간장 한 방울 섞지 않고 국수를 순식간에 비워 버렸다.
“끄으! 잘 먹었다.”
백진목이 만족스럽게 배를 쓰다듬었다.
그런 은사님의 반응에 진상명은 안 먹어도 배가 부른 기분이었다.
“어르신, 맛있으셨어요?”
“아주 좋았어. 허허. 왜 날 데리고 시장 바닥을 쏘다녔는지, 이제 알겠소. 강 사장. 덕분에 참으로 오래간만에 음식 맛있게 먹었소. 자네 참 영리한 사람이야.”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강지한의 겸양에 백진목이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퀘스트 완료. 보상으로 백진목의 보답이 돌아옵니다.]
[‘퀘스트 보상 업그레이드 쿠폰’ 두 장의 영향으로 보답의 규모가 커집니다.]
“이렇게 맛있게 먹었으니 나도 뭔가 보답을 해야겠는데.”
백진목이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때 강지한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인은 예경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