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 하는 식당-128화 (128/330)

# 128

Restaurant 127. 랜덤 박스

-제가 편히 말씀을 드려도 괜찮을는지……. 허허.

강지한을 대하는 진상명의 음성이 더욱 조심스러워졌다.

그는 나이로 보나 사회적 위치로 보나 강지한 보다 훨씬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이었다.

춘천에서 제법 그럴듯한 연줄 믿고 까불던 민정욱 의원을 전화 한 통으로 뭉개버릴 만큼.

그런 그가 강지한은 어려운 사람 대하듯 신중을 기했다.

그만큼 진상명이 강지한을 아끼고 높게 산다는 반증이었다.

“그럼요.”

-그럼… 염치불구하고 말씀드리지요. 실은 내일 아주 소중한 손님께서 저를 보러 오십니다. 혹 세진 그룹이라고 아시는지요?

세진 그룹.

한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대기업 중 하나였다.

“네, 알고 있어요.”

-그 세진 그룹의 회장이신 백진목 어르신께서 저를 보러 오신답니다.

진상명이 대단한 사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세진 그룹의 회장과도 친분이 있을 줄은 몰랐다.

정재계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라더니 그 말이 꼭 맞았다.

“저는 감히 상상도 못해봤던 분을 모시는군요.”

-어렵기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걸 떠나서 제게는 은사 같은 분이시지요.

사실 지금 진상명의 위치에서 누구를 어려워할 일은 아니었다.

권력도 금력도 어디 가서 아쉬운 소리 하지 않을 만큼은 있었다.

다만 백진목은 진상명이 혈기 넘치는 젊은 시절 스승처럼 모셨던 사람이기에 이토록 어려워하는 것이다.

-백 어르신과는 한 동안 격조했었는데, 근래 연락이 잦아지다 보니 서로가 그리운 마음에 얼굴을 보자고 하시기에 저녁을 제가 대접하기로 했습니다. 백 어르신께서도 식도락을 상당히 즐길 줄 아시는 터라 당장 강 선생님의 분식집부터 떠올랐지요. 제가 정말 맛있는 식당을 알고 있으니 모시겠다 호언장담을 했습니다. 한데 우리 백 어르신께서 하시는 말씀이 이제는 혀가 예전 같지 않다시더군요.

“혀가 예전 같지 않다 하심은?”

-전체적으로 간이 강해야 음식 맛이 느껴지신답니다. 남들 먹듯이 먹으면 영 싱겁다고 하시네요.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맛을 느끼는 혀의 감각이 둔해진다.

그래서 노인들이 점점 음식을 짜게 먹는 것이다.

“어르신 건강 상태는 어떠시죠?”

-딱히 좋지는 않은 모양이에요. 나이가 있다 보니 병원 찾는 일도 잦아졌답니다. 주치의는 무조건 싱겁게 먹어야 한다는데 어르신께서는 자기 입에 맛없는 건 절대 삼키지 않는다는 주의여서 여러모로 곤란하신 모양이에요. 그렇다 보니 요즘에는 입맛이 없어 하루에 한 끼도 겨우 넘기는 것 같더군요.

“그렇군요.”

강지한의 걱정대로였다.

나이가 들수록 건강이 악화되니 그만큼 심심한 맛을 즐겨야 하는데 혀가 무뎌져 짠 걸 찾게 되니 비슷한 문제를 안고 사는 노인들이 많았다.

-해서 처음에는 단순히 요리 한 그릇 먹으러 가려다 뭔가 방법이 없을까 해서 이렇게 전화를 드리게 됐지요. 이거 제가 괜히 무거운 숙제만 던져 드린 거 아닌지…….

“아닙니다. 내일 저녁이라고 그러셨죠?”

-맞습니다.

“제가 내일 점심나절까지 생각을 해보고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어르신께서는 은사님 모시고 저녁 시간에 맞춰 춘천으로 오세요.”

강지한의 말에 진상명의 목소리가 밝아졌다.

-알겠습니다. 너무 부담 갖지는 마세요. 답을 찾기 어려우면 그저 강 선생님 음식을 대접하는 것으로도 족합니다.

“네. 편하게 생각하고 있을게요.”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통화를 끝낸 강지한이 차에 타려다 말고 후다닥 애견 카페로 향했다.

“이크. 설탕이 데려가야지.”

* * *

집에 돌아오니 10시 반이 조금 넘어 있었다.

샤워부터 마치고 나온 강지한은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거실 소파에 누워 생각에 잠겼다.

‘혀는 심심한 맛을 거부하는데 건강은 좋지 않고…… 입맛까지 잃었다라.’

뭔가 좋은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는 강지한의 옆에서 설탕이가 하늘을 유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허공을 두둥실 떠다니는 여러 개의 선물 상자가 설탕이를 유혹했다.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날카로운 눈빛으로 상자를 바라보던 설탕이가 한순간!

타탓!

힘차게 뛰어올랐다.

그리고 상자 하나를 입으로 낚아챘다.

실로 오래간만에 물어오기 스킬에 성공한 것이다.

그런 줄도 모르고 소파에 누워 있던 강지한의 눈앞에 메시지가 나타났다.

[설탕이가 물어오기 스킬로 선물을 물어왔습니다.]

“어?”

강지한이 얼른 옆을 돌아봤다.

그러자 설탕이가 선물을 물고서 늠름한 자태로 강지한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와~ 잊을 만하면 한 건씩 터뜨리는 구나, 내 새끼.”

강지한이 설탕이를 품에 안고 마구 쓰다듬었다. 그거로도 모자라서 온몸에 뽀뽀 세례를 퍼부었다.

설탕이가 헥헥 대며 자지러지게 좋아했다.

강지한은 선물 상자를 터치했다.

[축하합니다! 설탕이가 아이템을 물어왔습니다. ‘네잎 클로버’를 얻었습니다.]

메시지와 함께 상자가 사라지고 네잎 클로버 하나가 강지한의 손에 쥐어졌다.

[네잎 클로버: 사용 시, 랜덤 박스에서 좋은 아이템이 나올 확률이 300% 증가합니다. 클로버 이파리 하나당 한 번, 총 네 번 사용 가능합니다.]

설명을 본 강지한이 눈을 꿈뻑꿈뻑거렸다.

“랜덤 박스? 그게 뭐더라……. 아!”

고민하던 강지한이 바로 단골 포인트 상점에 접속했다.

허공에 색종이로 접어 만든 것 같은 작은 상점이 나타났다. 이어, 상점의 문이 활짝 열리며 그 안에서 메뉴판이 튀어나왔다.

[메뉴판]

<음식 LV3 MAX>

매진

<인테리어 LV3 MAX>

간판 디자인-50단골 포인트.

<도박 LV1 MAX>

랜덤 박스-100단골 포인트.

음식 카테고리는 매진이 됐고, 인테리어는 간판 디자인 하나가 남아 있었다.

그리고 맨 아래 도박 카테고리에 랜덤 박스라는 것이 존재했다.

비용은 100단골 포인트.

네잎 클로버의 힘은 총 네 번 이용 가능한데 현재 강지한에게 누적된 단골 포인트는 87이 고작이었다.

정작 가장 중요한 단골 포인트가 모자라니 네잎 클로버도 무소용이었다.

강지한이 아쉬움에 입맛을 다실 때였다.

[만족도 포인트를 100포인트당 1단골 포인트로 환전 가능합니다. 환전하시겠습니까?]

현재 강지한에게는 14만이 넘는 만족도 포인트가 누적되어 있는 상황.

사실 이것을 돈으로 바꾸고 싶었으나 세무적인 문제 때문에 그대로 썩히고 있던 터였다. 게다가 나중에 만족도 포인트가 또 어떻게 쓰일지 모르기에 섣불리 사용하지 않고 아껴두었었다.

그것이 이런 식으로 사용될 줄은 생각도 못했었다.

“환전하겠어.”

강지한의 대답에 다른 메시지가 나타났다.

[몇 포인트를 환전하시겠습니까?]

“4만 포인트.”

[만족도 포인트 40,000을 단골 포인트 400으로 환전했습니다.]

이제 강지한의 수중에 있는 단골 포인트는 487이다.

그는 우선 단골 포인트 50을 들여 간판 디자인부터 구입했다.

간판 디자인은 손님들의 눈길을 잡아끄는 디자인을 제공하며 식당의 인지도가 올라가는 기능이 있었다.

남은 단골 포인트는 437.

강지한은 우선 네잎 클로버를 사용했다.

그러자 네잎 클로버가 빛으로 화해 강지한의 몸 안으로 스며들었다.

[네잎 클로버의 힘이 활성화 됩니다.]

[랜덤 박스를 구매할 때 행운이 300% 증가합니다. 남은 횟수: 4]

‘해보자.’

강지한은 질질 끌지 않고 단골 포인트 400을 투자해 랜덤 박스를 네 번 구매했다.

단골 포인트가 사라지며 강지한의 앞에 상자 네 개가 나타났다.

상자들의 상단부에는 검은색 물음표 모양이 찍혀 있었다.

[네잎 클로버의 효력이 사라집니다.]

일단 네잎 클로버의 버프는 제대로 적용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 가지 상자 모두 좋은 아이템이 들어 있으리란 보장은 없었다.

좋은 아이템을 얻을 행운이 300%로 뻥튀기 되었을 뿐이다.

무조건 좋은 아이템을 뽑게 해주는 건 아니었다.

‘제발. 좋은 게 나와라.’

강지한이 속으로 빌며 상자들을 전부 건드렸다.

손길이 닿은 상자들의 뚜껑이 열리며 그 안에서 시스템 메시지가 튀어나왔다.

[랜덤 박스에서 ‘퀘스트’를 얻었습니다.]

[퀘스트-백진목의 입맛을 되찾아 주세요.]

[퀘스트 보상: 백진목의 만족도에 따라 달라짐.]

첫 번째 박스에서 나온 건 퀘스트였다.

그것도 내일 만나기로 한 백진목에 관련된 것이었다.

보상에 관련된 항목 서술이 애매했지만, 퀘스트 완료시 받았던 아이템들은 하나같이 좋은 것이었다.

때문에 강지한은 일단 첫 번째 랜덤 박스는 네잎 클로버의 효과가 제대로 적용된 것이라 생각했다.

그때 나머지 박스에서 나온 시스템 메시지가 주르륵 밀려 올라왔다.

[랜덤 박스에서 ‘퀘스트 보상 업그레이드 쿠폰’을 얻었습니다.]

[랜덤 박스에서 ‘퀘스트 보상 업그레이드 쿠폰’을 얻었습니다.]

[랜덤 박스에서 ‘손님 부스터’를 얻었습니다.]

손님 부스터는 하루 동안 매장을 찾는 손님의 수가 1.5배 증가하는 것으로 일전에 한 번 얻어서 사용해 본 적이 있었다.

한데 퀘스트 보상 업그레이드 쿠폰이라는 것은 처음이었다.

강지한이 자신의 손에 쥐어진 신용카드 크기의 종이 두 장을 바라봤다.

종이 쿠폰의 중앙에는 절취선이 있었다.

절취선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퀘스트 보상 업그레이트 쿠폰’이라는 글자가, 우측에는 ‘사용을 원할 시, 절취선을 따라 찢어주세요’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이거…… 네잎 클로버의 효력이 제대로 먹혀 들어간 건가?’

쿠폰의 효과를 적용했을 때 그 보상이 얼마나 더 좋아지는지 알 길이 없으니 확신하기 힘들었다.

강지한은 일단 쿠폰을 쓰고 보기로 했다.

그가 두 장의 쿠폰을 한 번에 찢었다.

[퀘스트 보상 업그레이드 쿠폰 두 장을 사용했습니다. 현재 적용 중인 퀘스트의 보상이 두 번 강화됩니다.]

[퀘스트-백진목의 입맛을 되찾아 주세요.]

[퀘스트 보상: 백진목의 만족도에 따라 달라짐. 2강화 상태.]

“흠.”

강지한이 퀘스트 메시지를 바라보다 지워 버리고 설탕이를 품에 안았다.

헥헥!

설탕이의 꼬리가 팽팽 돌았다.

어쩌면 그냥 지인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으로 끝날 뻔했던 일이 설탕이가 물어온 아이템을 사용하는 바람에 퀘스트로 바뀌었다.

과연 퀘스트를 성공할 경우 어떠한 보상이 주어질지 기대가 되던 찰나,

‘가만 내일이……?’

머릿속에 순간적으로 스친 생각에 강지한이 달력을 확인했다.

내일은 6월 12일. 화요일이었다.

‘그거다!’

어쩌면 퀘스트를 클리어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 * *

다음 날.

강지한은 아침 일찍 진상명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고는 꼭 밥 때에 만나지 않아도 상관이 없겠느냐 물었다.

진상명은 어느 때든 좋다고 했다.

그에 강지한은 3시까지 분식집으로 오시라 일렀다.

진상명은 강지한이 뭔가 수를 찾아냈구나 하는 마음에 흔쾌히 그러겠다고 했다.

이후, 분식집으로 출근한 강지한은 또다시 전쟁 같은 하루를 치러나갔다.

11시에 문이 열린 이후부터 하나둘 들어오던 손님은 11시 반을 기점으로 물밀 듯이 들이닥쳤다.

홀 담당 직원과 알바들이 열심히 주문을 전달했고, 주방 사람들이 빠르게 음식을 만들어 나갔다.

2시 57분.

점심 피크 타임이 끝나갈 때쯤, 검은색 세단 한 대가 가게 앞에 멈춰 섰다.

그러자 조수석에서 말끔한 정장을 입은 사내 한 명이 내리더니 얼른 뒷좌석 문을 열어주었다.

거기서 모습을 드러낸 이는 진상명과 깡마른 백발의 노인이었다.

강지한은 그 노인이 백진목이라는 걸 알았다.

손님이 많이 빠져 조금 여유 있게 돌아가는 홀을 보며 강지한이 앞치마를 벗었다.

“성우야.”

“네?”

“점심 마무리 좀 부탁할게.”

“어디 가십니까?”

“손님들 찾아오셔서 대접 좀 하고 오려고.”

“알겠습니다! 맡겨두십시오! 헤헤.”

용성우의 씩씩한 목소리를 뒤로하고 분식집을 나선 강지한이 진상명을 반겼다.

“오래간만에 뵙겠습니다, 어르신.”

“강 선생님, 정말 반갑습니다. 은사님, 이분이 제가 말씀 드렸던 강 선생님입니다.”

진상명의 소개에 백진목이 미소 지으며 악수를 청했다.

“내 상명이에게 얘기 많이 들었소. 백진목이라고 하오.”

“처음 뵙겠습니다.”

“그래……. 오늘 상명이가 어려운 부탁을 했는데 흔쾌히 들어주셨다고?”

“그렇게 어려운 부탁도 아니었어요. 우선 제 차에 타시죠. 두 분을 모시고 갈 곳이 있습니다.”

“그럴까요?”

진상명과 백진목은 타고 온 차를 두고 강지한의 차에 올랐다.

강지한은 5분 정도 차를 몰아 목적지에 도착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운 강지한이 두 사람을 돌아보며 말했다.

“제가 생각하기에 여기라면 백 어르신의 잃어버린 입맛을 다시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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