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 하는 식당-127화 (127/330)

# 127

Restaurant 126. 배우고 싶어요

배틀 셰프 5라운드 페일 배틀에서는 총 8명의 지원자가 탈락했다.

지원자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이 탈락하고 만 것이다.

사실 노영철 피디가 8명 이상은 떨어뜨리지 말아 달라는 부탁을 해놓지 않았더라면 2명 정도는 더 탈락했을 것이다.

이번 룰이 지원자들을 무제한으로 떨어뜨리는 룰이었기 때문.

심사위원들은 조금이라도 맛이 없거나 사용한 해산물의 특징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이들을 가차 없이 탈락시켰다.

그간 정도 많이 들었을 터인데, 심사를 할 때 그들의 혀는 잘 벼린 칼보다 더 날카로워져 인정사정없이 탈락자를 쳐냈다.

그야말로 장내엔 칼바람이 휘몰아치는 것 같았다.

탈락자들이 눈물의 이별을 고한 뒤, 심사위원들의 마무리 멘트로 촬영은 끝났다.

강지한은 이번 촬영에서도 주가를 드높였다.

상금 2000만 원은 세금을 공제하고 다음 주 중에 당장 지급받기로 했다.

생각도 못했던 거금을 받을 생각에 세트장을 나서는 강지한의 발걸음이 다른 때보다 조금은 가벼웠다.

강지한뿐만 아니라 모두가 그랬다.

탈락자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살아남아서 돌아가게 되는 길은 어쩔 수 없이 즐거웠다.

꼬르륵.

전철역으로 향하는 길.

오늘도 어김없이 배꼽시계가 울려댔다.

한데 기차역 근처에 더 이상 한지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맞다. 저번 주 오픈이라고 했지.’

강지한은 전철역으로 향하던 걸음을 멈춰 고개를 돌렸다.

몇백 미터 떨어진 곳에 줄줄이 늘어선 상가 건물들이 보였다. 그중 하나의 간판이 눈에 확연히 들어왔다.

‘지민 분식.’

강지한이 잠깐 고민하다가 분식집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자신의 조언을 한 번 더 받은 김밥의 맛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궁금했다.

오늘은 촬영이 그리 늦게 끝나지도 않았으니 조금 느긋해도 괜찮았다.

강지한이 분식집 안으로 들어섰다.

20평 남짓한 분식집 내부엔 작은 주방과 테이블 7개가 놓여 있었는데, 이미 6개가 가득 차 있었다.

건물이 역 근처에 있어 목이 좋은 데다가 오픈빨이 있으니 손님이 바글바글거리는 것.

‘가장 중요할 때지.’

이때 손님들의 입맛을 사로잡으면 롱런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아무리 목이 좋아도 돈 맛 보기가 힘들다.

“어서 오세…… 아! 강 선생님!”

홀에서 열심히 서빙을 하던 한지민이 습관처럼 인사를 건네다 강지한의 얼굴을 확인하고 활짝 웃었다.

“선생님…… 은 아닌데요.”

“저한테는 선생님이죠! 얼마나 대단한 가르침을 주셨는데요. 식사하러 오셨어요?”

“네.”

“얼른 앉으세요!”

한지민이 강지한의 팔목을 잡아끌어 빈 테이블에 앉혔다. 그러고는 주방으로 다가가 크게 소리쳤다.

“엄마! 아빠! 선생님 오셨어요!”

“뭐?!”

“어이구머니나!”

한지민의 외침에 막 요리 두 개를 끝낸 그녀의 어머니와 설거지를 하던 아버지가 주방에서 후다닥 뛰쳐나왔다.

두 사람은 강지한에게 다가가자마자 거의 절하듯 허리를 숙였다.

“은사님을 이렇게 뵙네요!”

“지민이한테 얘기 다 들었습니다. 선생님 덕분에 우리 집 김밥 아주 좋은 소리만 듣고 있습니다! 오픈한 지 이제 2주짼데 벌써 단골 몇 잡았어요.”

두 어르신이 강지한의 손을 한쪽씩 나눠 잡고 감사의 마음을 표했다.

당황한 강지한이 어쩔 줄 몰라 하자 한지민이 둘을 떨어뜨려 놓았다.

“자자, 장사 계속해야 하니까 이제 그만 들어가세요. 그 정도면 두 분 마음 충분히 전달됐을 거니까.”

한지민은 강지한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둘을 억지로 주방에 밀어 넣었다.

“감사해요, 은사님!”

“방송 잘 보고 있습니다! 강지한 선생님, 파이팅!”

강지한이라는 말에 식당에 있던 사람들 중 몇몇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강지한? 배틀 셰프에 나오는 그 강지한?”

“어머어머. 그 강지한 맞네!”

“세상에. 실물이 훨 나아요. 잘생기셨어요.”

“방송 잘 보고 있습니다. 팬이에요, 형님!”

“저 춘천 놀러갔을 때 분식집 들렀었어요! 진짜 맛있었어요!”

갑자기 쏟아지는 사람들의 인사에 강지한이 어색하게 화답했다.

“하하, 감사합니다.”

“강 선생님. 주문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저기 지민 씨. 그냥 이름 불러주세요.”

“김밥 드시겠어요?”

한지민이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물었다.

“네. 김밥 먹으러 오긴 한 건데…… 선생님이라는 호칭은 좀 빼주심이.”

“김밥 두 줄! 강 선생님께는 서비스 드릴게요!”

주문을 받은 한지민이 후다닥 주방으로 달려갔다.

‘저 아가씨…… 원래 저렇게 듣고 싶은 말만 골라 듣는 스타일이었나?’

정신이 하나도 없는 강지한이었다.

* * *

[정미자의 상당한 수준의 김밥]

요리 등급: LV4

-감칠맛 나는 육수밥을 사용했고 각각의 재료들을 따로 조리해 넣었다. 밥 간이 잘되어 있어 입에 착착 감기는 맛이다. 밥 안에서 톡톡 씹히는 튀김가루가 별미.

정미자는 한지민의 엄마였다.

식당을 홍보할 땐 한지민도 김밥을 같이 말았으나, 지금은 정미자가 홀로 음식을 담당하는 중이었다.

정미자의 남편 한승호는 설거지와 주방보조 일을 맡았다.

한지민은 알바생 한 명과 홀을 돌봤다.

강지한이 김밥을 맛봤다.

‘맛있어.’

과연 레벨 4의 김밥이었다.

자신이 해준 조언을 그대로 받아들여 연구한 결과 탄생한 김밥의 완성도는 만족스러웠다.

사실 그 정도의 조언을 들어도 노력하지 않으면 레벨 4의 김밥은 나올 수 없었다.

각 재료의 알맞은 조리법과 간은 스스로 노력해서 알아내야 했다.

‘손맛이 있다는 건데. 간을 보는 혀도 정확하고.’

이 정도면 걱정이 없을 것 같았다.

충분히 식당을 잘 이끌어 나갈 수준이었다.

김밥 두 줄을 순식간에 먹어치운 강지한이 카운터로 다가갔다.

그러자 빈 그릇을 치우던 한지민이 다가와 말했다.

“그냥 가세요, 강 선생님.”

“그래도 처음 방문한 건데 밥값은 내야죠.”

지갑을 꺼내는 강지한에게 한지민이 갑작스런 말을 뱉었다.

“저, 배우고 싶어요.”

“……네?”

뜬금없는 한지민의 말에 강지한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런 말 황당하시겠지만 뵙지 못한 2주 동안 많이 생각해 봤거든요. 부모님이랑도 상의해 봤고요.”

“뭐를요?”

“제가 강 선생님 밑에 들어가서 요리 배우는 거요.”

“갑자기 그게 무슨…….”

“네. 강 선생님한테는 갑작스럽겠지만 저는 수십 번 생각해 봤어요. 물론 배울 자리도 없는데 어거지로 부탁드리는 건 아니고 그럴 수 있는 상황이라면 그러고 싶다는 거였어요. 불가능할 테지만 말이라도 해보지 않고 넘어가면 너무 답답할 것 같아서 강짜 부려 봤네요. 호호.”

말을 늘어놓으며 한지민은 지갑을 꺼내던 강지한의 손을 자연스레 도로 밀어 넣었다.

“김밥은 맛있으셨나요?”

“상당히요.”

“다행이다. 강 선생님이 우리 가족한테는 정말 은인이세요. 다음번에도 꼭 다시 들러주세요.”

“그럴게요.”

강지한이 웃으며 식당을 나서려다 말고 카운터에 있는 명함 한 장을 챙겼다.

아무래도 조만간 한지민에게 따로 연락을 할 일이 있을 것 같았기에.

* * *

월요일.

브레이크 타임엔 반가운 손님이 분식집을 찾아왔다.

고중만의 아내 유진아였다.

그녀는 나이가 무색하게도 대단한 동안에다 미소가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고중만의 딸 고준희도 엄마의 손을 잡고 동행한 터였다.

올해 여섯 살인 고준희는 다행스럽게도 아빠가 아닌 엄마를 닮아 예쁘고 귀여웠다.

지한 분식 막내 알바 이주희는 어린아이를 워낙 좋아하는지라 고준희를 보자마자 착 달라붙어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이리나도 이주희와 함께 고준희의 매력에 푹 빠져서 눈이 하트가 되었다.

두 사람이 고준희와 놀아주는 사이 강지한은 유진아와 함께 사업 얘기를 해나갔다.

“초면인데 사업 얘기부터 꺼내게 돼서 죄송해요. 뭔가 제대로 대접한 다음에 진행했어야 하는 건데 면목 없습니다.”

“아녜요~ 강 사장님 얼마나 바쁘신지 우리 남편 통해서 들었어요. 눈 코 뜰 새 없으시다면서요. 그런 예의는 차리지 않으셔도 돼요. 게다가 저한테 일자리 주신다는 데 오밤중에 불러도 버선발로 달려 나와야죠.”

유진아가 더 없이 상냥한 어투로 말했다.

아무래도 회사 생활을 해본 적이 있는 사람인지라 자신보다 나이는 어려도 사장이 될 강지한을 대하는 태도가 남달랐다.

“네. 그럼 편안하게 바로 사업 얘기해 볼게요. 대략적인 얘기는 중만 아저씨 통해 다 들었죠?”

“그럼요. 지한 푸드로 사업자를 내서 다른 사업들을 하나로 묶으시려는 거죠? 세금 감면을 생각하셔야 하니까요.”

“간단히 말하자면 그렇죠.”

하지만 그 간단한 말을 실행하려면 세무 쪽을 모르는 사람들은 머리가 터지고 만다.

“알겠어요. 제가 부탁드리는 서류들만 건네주시면 강 사장님 신경 안 쓰실 수 있도록 알아서 진행할게요.”

“감사합니다. 부탁 좀 드릴게요. 아, 그리고 사무실은 이번 주에 계약하기로 했으니 편하게 출퇴근 하시면 됩니다. 형수님 일 도와드릴 부하 직원도 원하시면 우리 쪽에서 구해드릴게요.”

“어머나, 저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려요. 강 사장님 듣던 대로 너무 멋지고 배려가 크시네요.”

유진아가 포근한 미소를 머금고서 강지한을 마구 띄워주었다.

“아니에요. 중만 아저씨가 필요 이상으로 절 좋게 말씀해 주셨나 보네요.”

“호호, 우리 바깥양반은 저한테 거짓말 안 해요. 있는 얘기만 한답니다.”

이후로 유진아는 법인 설립을 위해 필요한 서류와 정보들에 대해 간략히 일러주었다.

서류를 떼어와야 하는 곳도, 보내야 하는 곳도 많았다.

주민등록등본을 떼기 위한 주민센터부터 시작해서 시청, 은행, 세무서, 국세청, 지방법원까지.

한동안 브레이크 타임은 반납해야 할 상황이었다.

그렇게 서류들이 준비되면 법인이 설립되기까지는 짧게 잡아도 한 달 이상이 걸린다고 했다.

강지한이 혼자 움직이면 한 달이 아니라 일 년이 넘어도 법인사업자를 내지 못할 판이었기에 두세 달이 걸려도 감지덕지였다.

충분한 대화를 나눈 유진아는 고준희와 함께 돌아갔다.

두 사람을 보내고 브레이크 타임이 끝나가는 시각.

예경천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강지한은 예경천에게 두 가지 부동산 일을 맡겨놓은 터라 얼른 전화를 받았다.

“네. 예 사장님.”

-강 사장! 그, 전에 말했던 10평짜리 오피스텔은 예정대로 수요일날 도장 찍으면 되겠고! 같이 부탁했던 50평짜리 식당 자리 났는데 보러 가겠어? 목이 아주 좋아.

강지한의 눈이 번쩍 뜨였다.

“네. 보러 갈게요.”

드디어 지한 분식집에서 지한 식당으로 레벨 업 하기 위한 초석이 다져지고 있었다.

* * *

밤 10시.

하루 일과를 마치고 분식집을 정리하는 강지한의 머릿속이 복잡했다.

낮에 보고 왔던 50평 식당 건물 때문이었다.

‘목도 좋고 건물도 괜찮은데.’

문제는 이 식당이 월세가 아닌 매매로 나왔다는 것이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건물주가 식당을 무조건 팔고 싶어 한다고 했다.

한데 그 가격이 권리금까지 합쳐 총 4억이었다.

하지만 당장 강지한에게는 그만한 돈이 없었다.

포인트를 환전한다고 해도 닿지 않은 금액이었다.

‘다른 상가를 알아봐야겠네.’

그렇게 마음먹으면서도 낮에 봤던 그 상가가 너무나 마음에 들어 쉽게 포기할 수가 없었다.

‘대출을 받아?’

강지한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문을 걸어 잠근 순간,

지이이이잉-

바지 주머니에 있던 스마트폰이 몸을 떨어댔다.

그가 주차해 놓은 차로 다가가며 스마트폰을 꺼내 액정을 확인했다.

한데 발신인은 예상치 못한 사람이었다.

-진상명 어르신.

지금은 정계를 은퇴했으나 한때 장관직까지 앉았던 사람으로서 여전히 어마어마한 힘과 권력을 휘두르는 이였다.

강지한은 오늘 내일 하는 그의 아버지 진호산이 먹고 싶다던 음식의 정체가 상실운두병임을 알아내어 직접 만들어 주었고, 이를 계기로 진상명은 강지한을 은인으로 대했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이시지?’

한동안 연락이 없었는데 오밤중에 전화를 걸어오니 의아해하며 통화 버튼을 슬라이드했다.

“네, 어르신. 강지한입니다.”

-강 선생님, 잘 지내셨나요?

“그럼요. 어르신도 무탈하셨고요?”

-산전수전 다 겪은 입장이라 어지간해서는 탈이 나질 않더군요. 허허.

“다행이시네요. 한데 어쩐 일로 이렇게 전화를 주셨어요?”

-죄송합니다. 자주 연락드리고 했어야 하는데 아버지 간호에 정신이 팔려 있다가 한 가지 부탁할 일이 생겨 늦은 밤, 염치없게도 전화 드렸습니다.

“괜찮으니 편히 말씀해 보세요. 무슨 일이세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