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7
Restaurant 116. 넉살이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한마디로 끝내주는 밤이었다.
강지한의 역사상 이토록 어메이징하고 스펙터클한 밤은 없었다.
동이 트는 시각.
창 너머로 여명이 들며 따스한 온기가 얼굴을 간질였다.
강지한이 포근한 이불의 감촉을 느끼며 옆을 돌아봤다.
거기엔 세상 행복한 얼굴로 새근새근 잠든 아름다운 여인이 있었다.
예소린이었다.
목까지 덮고 있는 이불 아래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이 있을 터였다.
꿀꺽.
순간 강지한은 저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아직도 어제 그녀를 만지던 손과 부딪히던 온몸의 감촉이 생생하게 전해지는 것 같았다.
따뜻하고, 부드럽고, 격렬하고, 뜨거웠으며 격정적이었다.
여태껏 살아오며 그토록 자신을 가득 채운 사람은 없었다.
전날 본인의 모습을 회상하던 강지한이 머리를 휘휘 저었다.
어젯밤 그는 완전히 색에 굶주린 사람 같았다.
그만큼 예소린의 몸은 그의 모든 욕정을, 저 안 깊숙이 있던 것까지 끄집어 올려내 전부 쥐어 짜내야 만족이 될 만큼 대단했다.
강지한은 그녀의 위에서 몇 번이나 절정을 느꼈고, 그것은 예소린 또한 마찬가지였다.
둘은 몇 년 만에 재회한 오래된 연인처럼 격한 밤을 보냈다.
강지한이 예소린의 얼굴을 가만히 어루만졌다.
지금 보면 아이처럼 순수한데, 어젯밤엔 요녀(妖女)가 따로 없었다.
그때 예소린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그녀는 자다 일어났음에도 또렷한 시선으로 강지한을 바라봤다.
“잘 잤어요?”
강지한이 물었다.
“네. 지금 몇 시예요?”
“글쎄요. 이제 막 동트고 있는 것 같은데.”
“배 안 고파요?”
“음……. 아직 괜찮아요.”
“난 고파요.”
“아, 그럼 뭣 좀 먹을래요?”
“응, 먹을래요.”
대답을 한 예소린이 이불 안으로 쏙 들어갔다.
그리고 이불이 들썩이며 강지한의 눈이 스르르 풀렸다.
밤뿐만 아니라 언제든 요녀가 될 수 있는 예소린이었다.
* * *
정말 오래간만에 연애를 시작한 강지한은 모든 것이 낯설고 설레고 즐거웠다.
연인이란 이럴 수 있는 거구나.
둘만이 있는 비밀스런 공간에서는 얼마든지 긴밀해질 수 있는 거구나.
만족스런 아침을 맞으며 방을 나서는 그의 곁엔 예소린이 딱 달라붙어 있었다.
하룻밤이 지난 사이 두 사람은 훨씬 더 가까워졌다.
무엇보다 강지한을 바라보는 예소린의 눈에 전보다 짙은 애정이 가득 담겨 있었다.
누가 봐도 그녀가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둘은 게스트하우스를 나서기 전 거실에서 아침을 만들어 먹기로 했다.
어젯밤, 게스트하우스 사장 정호찬은 강지한의 요리에 감동받아 아침을 부탁했다.
주방에 있는 재료들은 얼마든지 사용해도 좋으니 실례가 안 된다면 아침을 해줄 수 있겠느냐 물었다.
돈을 지불해야 한다면 얼마든지 지불하겠다고도 했다.
그만큼 강지한의 음식을 한 번 더 먹어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누군가 자신의 음식을 맛있게 먹어준다는 것은 강지한의 가장 큰 기쁨이었다.
그에 흔쾌히 이를 허락했다.
그러자 너도 나도 슬쩍 끼어들었고 결국 모든 사람들의 아침을 강지한이 책임지게 됐다.
채희준은 끝까지 그 대열에 합류하지 않았으나 심이영은 가장 먼저 발을 들여 채희준의 속을 뒤집어 놓았었다.
참 눈치 없고 맹하기로는 1등이었다.
“뭘 해볼까.”
강지한이 중얼거리며 냉장고 문을 열었다.
아침이니 가벼우면서 산뜻하게 준비해 볼 생각이었다.
냉장고를 뒤적여보니 고갱이가 제법 많았다.
고갱이란 배추의 연하고 노란 속살을 뜻하는 순 우리말이다.
“고갱이를 좋아하시나 보네.”
고갱이를 보자마자 두 가지 메뉴가 떠올랐다.
배추된장국과 고갱이김치.
계란이 있으니 계란프라이도 곁들이면 좋을 것 같았다.
남은 건 메인 메뉴.
강지한이 냉장고를 더 샅샅이 살폈다.
그러자 몇 가지 쓸 만한 재료를 더 발견할 수 있었다.
무생채, 호박 볶음, 콩나물 무침, 고사리 부침, 청포묵까지.
조금씩 시식해 보니 하나같이 간이 잘되어 있어 맛있었다.
강지한이 반찬들의 상태창을 확인했다.
전부 레벨 3으로 게스트하우스 사장님이 직접 만든 것이었다.
‘어제 고기 굽던 솜씨도 예사롭지 않더라니.’
확실히 요리 쪽에 일반 사람보다는 조예가 있는 것 같았다.
“비빔밥도 좋아하시나 보네.”
나물이나 볶음류의 반찬이 많은 걸 보니 자주 밥을 비벼 먹는 모양.
강지한은 메인을 비빔밥으로 정했다.
대신 고추장은 무거우니 맛간장을 따로 만들어 간장비빔밥을 만들 생각이었다.
메뉴가 정해지자 강지한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도와줄까요? 시킬 거 있으면 말해요.”
예소린도 팔을 걷어붙이고 강지한의 옆에 섰다.
“그럼 배추 좀 다듬어 줄래요?”
“뭐할 건데요?”
“배추된장국이랑 고갱이김치요.”
“와, 맛있겠다.”
“고갱이가 뭔지 알아요?”
강지한이야 그간 요리 공부를 해온 데다 한정신의 지식도 있어서 알지만 보통 사람들은 그게 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한데 예소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 보기보다 음식에 관심 많아요.”
까면 깔수록 계속해서 매력이 나오는 양파 같은 여인이었다.
그에 강지한은 마음 놓고 예소린에게 이것저것 부탁했고, 두 사람이 합을 맞춰 음식은 척척 진행됐다.
가장 먼저 완성된 건 고갱이김치였다.
소금에 절일 시간은 없어서 그냥 생고갱이를 씻은 뒤, 양념장에 간을 조금 더 세게 해서 버무렸다.
고갱이김치를 맛본 예소린이 엄지를 들어 올렸다.
강지한은 웃으며 냄비에 배추된장국 재료들을 전부 넣어 불에 올렸다.
배추된장국은 이대로 오래 끓이면 끓일수록 맛이 좋아진다.
마지막으로 한정신의 지식 속에서 찾아낸 비법 맛간장을 만들었다.
다른 재료들은 충분한 만큼 맛간장만 넣고 비비면 끝이니 더 손갈 데가 없었다.
그 사이 예소린이 옆에서 계란프라이를 만들어 나갔다.
계란 5개를 넓은 프라이팬에 한 번에 깨서 익히는 그녀.
한데 강지한이 익힌 상태를 보니 하나같이 써니 사이드 업(sunny side up)이었다.
써니 사이드 업이란 노란자를 터뜨리지 않고 한쪽 면만 익힌 계란프이다.
강지한은 전부 써니 사이드 업으로 해서 프라이를 내려나 보다 생각했다.
그러나 아니었다.
예소린은 거기서 물을 조금 넣은 뒤, 프라이팬에 뚜껑을 덮고 30초 정도 더 익혔다.
그러자 수증기가 달걀의 익지 않은 윗면을 살짝 익혀 주었다.
이를 본 강지한이 약간 놀랐다.
‘스팀 베이스티드(steam basted)도 할 줄 아네?’
지금 예소린이 만들어낸 계란프라이가 스팀 베이스티드였다.
노른자를 덮고 있는 흰자는 익지만 노른자는 익지 않아, 흰자 속에 코팅이 된 것처럼 느껴지는 계란프라이였다.
스팀 베이스티드로 익히면 맛도 맛이지만 눈으로 보는 맛 또한 좋았다.
예소린은 다 익은 계란프라이에 맛소금으로 간을 하고 접시에 담았다. 그렇게 넉넉히 15개나 되는 계란을 프라이했다.
그러는 사이 압력솥에 지은 밥이 완성됐다.
강지한은 물에 살짝 불린 쌀과 보리로 밥을 만들었다.
갓 지은 쌀보리밥은 고슬고슬한 것이 비빔밥을 하기에 딱 알맞았다.
요리를 좋아하는 사장의 주방인 만큼 식기도 많았다.
강지한은 큰 대접 11개를 꺼내 쌀보리밥을 담고 고명을 얹은 뒤, 특제 맛간장과 들기름을 둘렀다.
국그릇에는 배추된장국을 알맞게 나눠 담았다.
그것들을 예소린이 부지런하게 식탁으로 날랐다.
계란프라이와 고갱이김치도 넉넉하게 접시에 담겨 식탁 위에 놓였다.
그렇게 아침상 준비가 다 끝날 무렵 맛있는 냄새에 눈을 뜬 사람들이 삼삼오오 주방으로 모여들었다.
개중엔 심이영과 채희준의 모습도 보였다.
“우와~ 맛있는 냄새.”
행복해하며 의자에 앉는 심이영과 달리 채희준은 떨떠름한 얼굴이었다.
사실 어제 파티가 끝날 때까지만 해도 그는 강지한의 음식을 절대 먹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다들 들어가고 난 뒤 냄비에 남은 식은 국을 맛보고 나니 도저히 이 자리에 나오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었다.
결국 바비큐 파티를 즐겼던 멤버 전원이 다 함께 아침식사를 하게 됐다.
강지한이 만든 모든 요리의 레벨은 5였고, 예소린의 스팀 베이스티드 계란프라이는 레벨3이었다.
그만큼 간 조절이 완벽했고, 계란을 굽는 온도와 익히는 시간을 정확하게 지켜냈다는 말이었다.
계란프라이가 별거 아닌 것 같아도 은근히 어려운 요리였는데, 예소린은 이를 완벽한 스팀 베이스티드로 해냈다.
“지한 씨, 잘 먹을게요.”
정호찬은 게스트하우스의 사장임에도 손님들보다 먼저 수저를 들었다.
그만큼 강지한의 음식을 빨리 맛보고 싶었다.
어제 술의 여파로 배추된장국에 먼저 손이 갔다.
“호록. 허, 좋습니다.”
정호찬을 시작으로 다른 사람들의 입에서도 동시다발적인 감탄이 쏟아졌다.
구수한 된장과 푹 삶아진 배추가 기막히게 잘 어울렸다.
멸치 베이스의 육수에 청양고추를 더해 감칠맛과 얼큰함이 일품이었다.
쌀보리비빔밥 역시 끝내줬다.
차지게 지어진 쌀과 보리가 다른 재료들과 잘 어우러졌다.
사실 들어간 재료들의 간과 맛이 서로 달라 고추장으로 비벼야 모든 재료의 맛이 조화롭게 섞일 수 있었다.
하지만 간장은 고추장처럼 다른 맛을 잡아낼 만큼 강하지 못했다.
그것을 강지한의 특제 맛간장은 해냈다.
고갱이김치는 아삭거리는 것이 상큼하기 그지없었고, 예소린의 계란프라이 역시 만족스러운 찬이 되어 주었다.
아침 식사는 순식간에 끝났다.
숙취에 시달리던 사람들은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 개운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제오늘 즐거웠어요. 그럼 남은 시간 잘 보내다 가세요.”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식사를 마치자마자 강지한과 예소린은 바로 채비를 갖춰 게스트하우스를 나섰다.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이 두 사람과의 이별을 아쉬워했다.
한편, 채희준은 또 한 번 자신의 치기 어림을 반성하며 부끄러움에 몸서리쳤다.
* * *
강지한과 예소린이 춘천으로 돌아왔을 땐 이미 밤이 늦어 있었다.
그들은 속초에서 뜻깊은 시간을 보내며 충분한 휴식을 취했다.
예소린을 집에 내려다 준 강지한은 돌아오는 길에 분식집에 들렀다.
10시가 넘어가는 시간의 분식집은 굳게 문이 잠긴 상태였다.
오늘은 처음으로 강지한이 처음부터 끝까지 분식집에 없었던 날이다.
단톡방에 오간 대화를 보아하니 용성우가 큰 문제없이 분식집을 잘 끌어간 것 같았다.
자신이 없이 하루 일과를 마친 분식집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강지한은 다시 차를 몰아 김숙자의 집을 찾아갔다.
거기서 이향숙에게 설탕이를 넘겨받아 겨우 귀가할 수 있었다.
그가 집 근처 골목에 주차를 하고 내려 잰걸음으로 움직였다.
고작 하루 비웠을 뿐인데 집이 그렇게 그리울 수 없었다.
빠르게 대문까지 도착한 그가 안으로 들어서려는데,
멍!
옆에서 강아지 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넉살이었다.
“넉살아!”
강지한이 부르니 평소에는 반만 먹으면 도망가기 바빴던 녀석이 천천히 다가오는 게 아닌가?
강지한은 반색하며 녀석을 마당으로 들인 뒤 사료와 물을 챙겨줬다.
한데 넉살이는 배를 다 채운 뒤에도 떠나가지 않았다.
“너 이제 나랑 친해지기로 한 거야? 하하.”
강지한이 넉살이의 털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런데 털이 엉망으로 뒤엉키고 먼지가 가득 묻어 영 지저분하기 짝이 없었다.
“안 되겠다. 너 좀 씻고, 이발도 하자.”
강지한이 가위를 가지고 나와 넉살이의 엉킨 털들을 자른 뒤, 얼굴과 머리털을 살짝 정리했다.
그리고 집 안으로 들였다.
넉살이는 생각보다 거부감 없이 강지한을 따라 집 안에 들어섰다.
녀석을 화장실로 데리고 들어가서 따뜻한 물로 깨끗이 씻긴 후, 드라이기로 털을 보송보송하게 말려주었다.
그렇게 때 빼고 광을 내니 지금껏 털에 가려 보지 못했던 예쁜 얼굴이 드러났다.
설탕이만큼은 아니지만 어딜 가나 사랑받을 귀여운 외모를 가진 녀석이었다.
“와~ 너 이런 얼굴을 가리고 다녔냐.”
감탄을 하며 넉살이를 가만히 바라보던 강지한.
한데 그의 눈이 갑자기 동그랗게 떠졌다.
“어……. 나, 너 본 적 있는 것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