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
Restaurant 114. 입방정
“아는 척이라도 해야 하나?”
거실에서 강지한과 차를 마시던 예소린이 나직이 말했다.
그녀의 시선은 소란스럽게 들어서는 베이스와 소프라노 커플에게 향해 있었다.
“저 사람들은 우리를 모를 텐데요?”
강지한의 말에 예소린이 웃었다.
“호호, 농담이에요.”
두 사람은 그런가 보다 하고 둘만의 시간을 만끽하려는데 그들이 먼저 인사를 건네왔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참 사교성도 좋은 커플이었다.
남녀가 한 목소리로 입을 맞춰 인사하니 정말 오페라를 듣는 것 같았다.
“오늘 여기서 지내시나 봐요.”
여자가 물었다.
예소린이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네, 여기서 지내요.”
순간 그녀의 얼굴을 본 남자가 입을 헤 벌리고 넋이 빠졌다.
‘장난 아니게 예쁘다.’
남자는 여자 친구가 옆에 있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그런 생각을 했다.
예소린의 미모는 그만큼 아름다웠다.
그런 애인의 반응을 눈치챈 여자가 옆구리를 쿡 찔렀다.
“뭐해?”
“어? 아, 아니야. 반갑습니다. 우리도 오늘 여기서 지내는데…… 이따 바비큐 파티 나오세요?”
게스트하우스에서는 밤 아홉 시에서 열 시경, 바비큐 파티를 연다.
신청 인원이 최소 5인 이상이어야 하고 참가비는 1만 원 선이었다.
예소린은 바비큐 파티 참가 신청도 해놓은 상태였다.
“그럼요. 두 분도 신청하셨나 봐요?”
예소린이 참가한다는 얘기에 남자의 얼굴이 더 밝아졌다.
“네. 모처럼 놀러왔는데 밤을 즐겨야죠. 하하. 아, 저 채희준이라고 합니다.”
남자가 별안간 통성명을 해왔다.
“예소린이에요.”
“아, 이름 되게 예쁘시네요. 반갑습니다.”
채희준이 자연스레 손을 내밀어 악수를 건넸다.
예소린이 그 손을 잡으려 하자 갑자기 여자가 채희준을 밀어내고 대신 손을 잡았다.
“저는 심이영이에요! 반가워요.”
“네, 하룻밤이지만 잘 지내봐요.”
“근데 남자분은 성함이…… 어?”
심이영이 강지한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러고서는 두 번 놀랐다. 한 번은 상당히 훈훈한 외모에, 또 한 번은 낯설지 않은 느낌에.
심이영은 그를 어디서 봤는지 동상처럼 굳어서 생각했다.
그때 그의 옆에서 채희준의 놀란 음성이 터져 나왔다.
“강지한! 맞죠?”
“아! 강지한!”
채희준에 말에 심이영도 그제야 알아챈 듯 덩달아 소리쳤다.
두 사람의 호들갑에 강지한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반갑습니다.”
심이영이 예소린의 손을 뿌리치고 후다닥 강지한에게 다가가 손을 덥석 잡았다.
“와! 팬이에요! 배틀 셰프 진짜 잘 보고 있어요. 그런데 어쩜. 실물이 훨 낫다. 피부도 완전 애기 피부네요. 호호.”
심이영을 지켜보던 채희준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가 얼른 애인의 팔뚝을 잡아 자기 쪽으로 당겼다.
“아야! 아프잖아, 자기야.”
“우리 일단 짐부터 풀어야지.”
“으응……. 조금 이따 풀어도 되지 않아? 급할 거 있어?”
심이영의 반응이 채희준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평소엔 그가 하자는 대로 따라주던 그녀였다.
한데 강지한을 앞에 두자 갑자기 태도가 달라졌다.
“나 피곤해. 들어가서 좀 쉬자고.”
채희준의 냉랭한 태도에 결국 심이영이 고집을 꺾었다.
“알았어. 그러자. 그럼 이따 봐요~”
심이영이 아쉬운 음성을 흘리며 뒤돌아섰다.
채희준은 냉랭한 시선으로 강지한을 쏘아본 뒤, 예소린에게는 헤벌쭉한 얼굴로 눈인사를 건네고 사라졌다.
그에 예소린이 픽 웃었다.
“재미있는 커플이네요.”
“그러게요.”
* * *
“향숙 씨, 안녕하세요.”
이향숙의 집 앞에서 차를 대고 대기 중이던 독고진은, 그녀가 조수석에 올라타자 싱글벙글해서 인사부터 건넸다.
“네~”
이향숙은 짧게 대답하고 말았다.
한밤중에 그녀는 예정에도 없던 독고진을 만나게 됐다.
물론 설탕이도 함께였다.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요.”
“그러게요.”
이향숙은 오늘도 분홍색 추리닝 차림이었다.
그럼에도 독고진의 눈엔 그게 그렇게 예뻐 보일 수 없었다.
“우리 사장님 톡 보고 향숙 씨가 혼자 움직인다고 나서는데 가만있을 수가 있어야죠.”
“가만있으셔도 괜찮은데.”
“이 한밤중에 여자 혼자 다니면 위험해요. 특히 향숙 씨처럼 예쁜 사람은 더더욱!”
그 말에 이향숙이 새침하게 머리카락을 휙 넘기며 대답했다.
“예쁜 건 맞는데 혼자는 아니에요. 우리 설탕이가 있잖아요. 그치~ 설탕아?”
왕!
“아고 귀여워! 쪽쪽쪽!”
이향숙이 설탕이의 입에 입술을 마구 문댔다.
지금 이 순간 독고진은 설탕이가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그나저나 넉살이라는 강아지가 매일 찾아온다고요?”
강지한이 단톡방에 보낸 톡은 넉살이에 관한 것이었다.
지한 푸드 식구 중 혹시 여유가 있는 분은 오늘 밤에 자기 집으로 가서 넉살이 밥 좀 챙겨 달라는 내용이었다.
대문은 열어놨고 밥그릇도 내놨으니 창고에서 사료와 캔사료를 꺼내 적당히 섞어주면 된다고 했다.
그에 독고진이 본인이 하겠다 말을 하려는 찰나, 이향숙이 선수를 쳤다.
순간 독고진은 기회다 싶어 밤이 위험하니 자신이 같이 가주겠다며 끼어들었다.
이향숙을 어제 처음 본 이후부터 계속 그녀의 얼굴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그래, 아무래도 이것은 사랑의 징조인 것 같았다.
이향숙을 차에 태우고 강지한의 집까지 가는 내내 독고진은 설렘과 떨림으로 정신이 반쯤 나가 있었다.
혹여라도 이향숙이 불편해할까 봐 운전도 조심조심 해가며 강지한의 집 앞에 도착했다.
독고진이 먼저 내려 후다닥 조수석으로 가서 문을 열어주었다.
이향숙은 고맙다는 말도 없이 설탕이를 안고 당연한 듯 내렸다.
아주 공주님과 시종이 따로 없었다.
두 사람은 열린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독고진이 능숙하게 창고문을 열고 사료를 가져왔다.
이향숙이 캔사료를 뜯어 밥그릇에 담으니 독고진은 건사료를 부어 잘 섞었다.
그러는 사이 이향숙은 물그릇에다가 물도 가득 받아왔다.
그것들을 대문 앞에다가 놓아두었다.
“이렇게 놓고 가면 되는 건가?”
이향숙이 혼잣말 하듯 중얼거렸다.
독고진은 그것을 놓치지 않고 대답했다.
“그럴 거예요. 이제 조금 있으면 넉살이 올 테니까 알아서 먹고 가겠죠.”
“근데 다른 길냥이나 강아지가 먹으면 어떡해요?”
“……그러게요.”
생각이 원체 깊지 못한 독고진이었다.
“넉살이 올 때까지 조금 기다렸다 가요.”
“그럴까요?”
이향숙과 조금이라도 더 있을 수 있다면 독고진으로서는 환영이었다.
“괜찮지, 설탕아?”
이향숙이 옆을 돌아보며 설탕이를 찾았다.
그런데,
“어? 설탕아?”
설탕이가 보이지 않았다.
놀란 이향숙이 강지한의 집 마당을 빠르게 뛰어다니며 설탕이를 찾았다.
“설탕아~! 설탕아! 어디 갔니, 설탕아!”
그에 독고진도 열심히 설탕이를 찾기 시작했다.
그렇게 5분쯤 지났을까.
왕!
대문 밖에서 설탕이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에 이향숙이 마당을 후다닥 뛰쳐나갔다.
설탕이는 대문 앞에 서서 꼬리를 흔들며 이향숙을 반겨주었다.
“설탕아~!”
녀석을 와락 품에 안는 이향숙의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말도 없이 어디 갔었어? 누나 놀랐잖아잉~! 흐이잉!”
이향숙이 서럽게 흐느끼자 독고진이 설탕이에게 따끔하게 한마디를 내뱉었다.
“설탕이 이 녀석! 말도 없이 어딜 가면 어떡해! 어른 걱정하게!”
그 말에 이향숙이 도끼눈을 하고 독고진에게 소리쳤다.
“설탕이한테 왜 그래요!”
“네, 네?”
“그리고 설탕이가 어떻게 말을 해요! 진 씨는 말하는 개 봤어요?”
“……죄, 죄송합니다.”
“설탕아~ 놀랐지? 괜찮아, 괜찮아. 우쭈쭈.”
이향숙에게 잘 보이려고 설탕이에게 한마디 했다가 미움만 산 독고진이 민망하고 속상함에 괜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런데,
“어? 넉살이다.”
멀지 않은 곳에 넉살이가 앉아 있었다.
그에 이향숙이 꾀죄죄한 넉살이를 가만히 살펴보다가 설탕이에게 물었다.
“설탕아, 너 혹시 우리 기다리지 말라고 넉살이 찾아온 거야?”
왕! 헥헥헥.
설탕이가 맞다는 듯 짖고서 꼬리를 흔들었다.
“어쩜……. 너처럼 배려 깊고 똑똑한 강아지가 세상에 또 있을까?”
설탕이가 사람이었으면 당장 반할 각이었다.
한편 독고진은 넉살이를 손짓하며 불렀다.
“넉살아, 이리와. 밥 먹어, 밥.”
하지만 넉살이는 독고진을 경계하며 다가오지 않았다.
그에 설탕이가 그릇을 물어 넉살이 앞에 가져다주었다.
그러자 비로소 넉살이는 사료며 물을 허겁지겁 먹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식사를 끝낸 넉살이가 설탕이를 가만 바라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설탕이의 코를 날름날름 핥고서는 다시 골목 어귀로 모습을 감췄다.
처음으로 설탕이에게 애정을 표시한 넉살이었다.
“강아지 밥 줬으니까 이제 가볼까요?”
이향숙이 귀가를 서둘렀다.
그러자 독고진이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물었다.
“저, 향숙 씨! 혹시 둘이 차 한 잔 안 하시겠…….”
“싫어요.”
이향숙은 독고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딱 잘라 거절했다.
“아…… 네.”
결국 독고진은 잔뜩 풀이 죽어 아무 말도 없이 이향숙을 집까지 태워줬다.
한데 이향숙이 차에서 내리며 기대도 못했던 말을 건넸다.
“오늘은 설탕이도 있고 난 추리닝 차림인데 이런 상황에서 카페 가고 싶겠어요? 다음부턴 상황 좀 보고 제안해요. 갈게요.”
이향숙이 조수석 문을 닫고 설탕이와 집 안으로 들어갔다.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던 독고진의 머릿속에 ‘다음부턴’이라는 단어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 * *
밤 10시.
게스트하우스의 마당에서는 예정된 대로 바비큐 파티가 벌어졌다.
두 개의 커다란 바비큐 통 위에서는 돼지고기가 자글자글 익어갔다.
그 옆에 높인 테이블엔 총 열한 명이나 되는 인원이 둘러앉아 있었다.
고기는 게스트하우스 사장님이 직접 굽는 중이었다.
사장님은 올해 스물여덟 살의 청년으로 이름은 정호찬이라고 했다.
고기가 익어가고 손님들 사이에 술이 몇 순배 도니 분위기는 금세 화기애애해졌다.
남녀의 비율도 적당해서 파티는 갈수록 흥이 오르고 있었다.
강지한과 예소린도 모처럼 신나게 이 여유를 즐겼다.
파티에 모인 사람들은 전부 유쾌했고 게스트하우스 사장 정호찬도 입담이 좋아 재미있었다.
고기 또한 맛있었다.
정호찬은 두꺼운 삼겹살을 타지 않게 고르게 구워 테이블로 열심히 서빙했다.
그때쯤 이미 다른 사람들은 서로의 대한 정보 공유를 마친 상태였다.
따라서 강지한이 분식집 사장이며 배틀 셰프에 참가 중이라는 것도 알았다.
사실 그가 자기소개를 하기 전에 이미 반 정도 되는 사람들이 강지한을 먼저 알아봤다.
연예인은 아니지만 그래도 지상파 방송을 탄 사람이 자리에 있으니 다들 설레는 기분이었다.
거기다 외모는 또 좀 훈훈한가?
더불어 그의 애인 예소린은 어지간한 연예인들이 명함도 못 내밀 만큼 아름다웠다.
마당에 모인 사람들 사이에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그런데 이 좋은 분위기에 균열을 일으키는 말이 누군가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근데 지한 씨, 우리 자기가 그러던데 배틀 셰프 다 대본대로 짜고 치는 거라면서요?”
소프라노 심이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