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4
Restaurant 113. 베이스와 소프라노
강지한은 눈앞의 노사장을 어디서도 본 기억이 없었다.
“누구신지……?”
강지한이 아리송한 얼굴로 묻자 노사장은 심호흡을 한 번 하고서 대답했다.
“나, 도근한이 친할머니 되는 사람이에요.”
“…….”
갑자기 머리가 멍했다.
사람은 너무 예상 밖의 상황에 처하면 사고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법이다.
단지 배를 채우러 들어온 순댓국집에서 도근한의 가족을 만날 줄이야.
강지한은 정리되지 않는 머릿속을 겨우 달랜 뒤 어색한 인사부터 건넸다.
“아……. 안녕하세요.”
“아니 어떻게 우리 집에서 이리 만나나 그래?”
“근데 절 어떻게 아셨어요?”
강지한은 도근한과 친분이 있는 사이가 아니었다.
오히려 악연이었다.
그런 상황이니 도근한의 가족들과 인사를 나눌 기회 역시 없었다.
“배틀 셰프에서 맹활약 중이시더구만.”
“아.”
그제야 강지한은 이게 어찌 돌아가는 판인지 전부 이해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은 배틀 셰프로 인해 벌어진 일이었다.
그런 연유라면 도근한의 할머니라는 분이 왜 자신을 아니꼽게 보고 있는지도 이해가 됐다.
“아주 얘기 들어보니까 매 라운드마다 우리 손자 자근자근 밟아놓는 것 같더만.”
할머니가 목소리를 팍 낮추더니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며 은밀하게 말했다.
배틀 셰프는 이제 겨우 4화까지 방영됐을 뿐이다.
강지한과 도근한의 라이벌 구도는 아직 전파를 타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강지한에 대한 이야기를 도근한에게 먼저 전해 들은 것이다.
그러다 텔레비전에 나온 강지한의 얼굴을 보고서 ‘그놈이 바로 저놈이구나’ 알게 되었을 테고.
한데,
‘그래도 되나? 녹화의 진행 상황은 누구한테도 발설하면 안 될 텐데.’
도근한 이 녀석, 의외로 입이 가벼운 것 같았다.
“아주 전화 통화 할 때마다 우리 손주가 귀 아프게 떠들어대요. 이길 것 같으면 앞서가고. 또 잡을 것 같으면 멀어지고. 아무튼 한 번을 이기기가 힘들다고. 뭐, 어찌어찌 우격다짐으로 한 번은 이긴 것 같다만…… 그건 자기 실력으로 이긴 게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할머니의 말을 듣고 보니 도근한은 경연의 전체적인 결과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그저 강지한에 대한 이야기만 한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해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이런 말을 꺼내면서 주변을 과하게 의식하는 할머니의 태도를 보니, 배틀 셰프의 경연 결과가 새나가는 일은 없을 듯했다.
아무튼 손주를 아끼는 할머니의 마음으로 아쉬운 소리를 한 것이니만큼 강지한은 사과를 드렸다.
“본의 아니게 그리됐어요. 죄송해요.”
그 말에 할머니는 대뜸 다른 말을 던졌다.
“어땠어요, 우리 집 순댓국.”
“……네? 아, 맛있었어요.”
“정말로?”
“네. 제가 먹어본 순댓국 중에 가장 맛있었어요.”
미각 레벨이 올라가기 전까지는 맛이라는 걸 잘 모르고 살았던 강지한이었다.
때문에 질 낮은 순대국도 그냥 맛있구나 하고 먹어왔다.
한데 지금 당시의 맛을 떠올려 보면 그냥 조미료로 범벅이 되었던 것뿐이었다.
제대로 된 미각을 얻은 상황에서 맛본 이 집의 순대국은 진정으로 맛있었다.
강지한의 대답에 할머니가 코로 숨을 훅 뱉었다.
“근한이가 그렇게 요리 잘한다고 떠들어대던 사람한테 맛있다는 얘기 들으니 기분은 좋네요.”
“아……. 네.”
이야기를 계속 듣자 하니 도근한은 강지한의 흉을 본 게 아닌 모양이다.
오히려 칭찬에 가까운 얘기들이었다.
그는 강지한을 진심으로 인정했고, 그의 실력에 감탄하고 있었다.
그것을 순수하게 할머니에게 말해준 것뿐이다.
하지만 손자를 사랑하는 할머니 입장에서는 그 말이 마냥 좋게 들릴 리만은 없었다.
“근데 근한 씨가 할머님은 끔찍하게 생각하시나 봐요? 전화도 그렇게 자주 하고.”
예소린이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 말에 할머니의 구겨졌던 인상이 확 펴졌다.
“그럼그럼~ 어렸을 때는 내가 끼고 살았으니까요. 어떻게 보면 속초가 우리 근한이 고향이라 할 수 있어요. 서울에서 바쁜 제 부모들 대신 내가 밥 먹이고 씻기고 학교 보내고 다 했으니까. 중학생 되면서 서울로 올라가 제 부모랑 다시 합쳤지.”
도근한이 날 때부터 은수저였던 건 아니었다.
그의 부모들에게도 사업에 실패해 힘든 순간이 있었다.
도근한이 어렸을 적 일이지만, 그의 부모는 실패를 딛고 일어서서 무사히 재기했다. 그 덕을 지금 도근한이 보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할머니의 입장에서는 곁에 끼고 살았던 도근한이 자식보다 더 중할 터였다.
도근한 역시 할머니가 소중할 것이고.
상황을 이해하니 도근한을 생각하는 할머니의 심정까지 느끼게 된 강지한이었다.
그가 할머니의 투박한 손을 덥썩 잡아주었다.
“할머니, 근한이 지금 배틀 셰프에서 정말 잘하고 있어요. 근한이가 말은 그렇게 하지만 저보다 더 뛰어난 요리사예요. 저는 운이 좋았던 것 뿐이에요.”
“그게…… 그런 거예요?”
강지한을 바라보는 할머니의 얼굴에서 야속함이 사라졌다.
어느 정도는 입 발린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손자 칭찬에는 마음이 약해지게 마련이었다.
“그럼요. 오히려 제가 근한이 보면서 공부 많이 하는걸요,”
“우리 손자가 요리를 좀 잘하긴 하죠?”
“충분히요. 아니, 놀랄 정도로요. 그리고 근한이가 또 한 얼굴 하잖아요. 촬영장에서 여자들한테 인기도 많아요.”
“홀홀홀. 우리 손주가 나 닮아서 잘생기긴 했지요.”
급기야 할머니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강지한의 말에 기분이 완전히 풀려 버린 것이다.
“근데 이렇게 보니까 우리 총각도 참 잘생겼네.”
이제는 조금 전까지 노려보던 강지한에게 칭찬까지 건넨다.
“옆에 처자는 애인인가 봐요?”
“네. 잘 어울리죠?”
“정말 예뻐요. 아주 선남선녀야. 우리 근한이도 빨리 이렇게 참한 처자 하나 데려와야 하는데. 총각이 근한이랑은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라며?”
“아, 네.”
대답을 하면서 강지한은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도근한이 자신을 친구라고 소개했다니.
참 묘한 감정이 들었다.
“그럼 우리 근한이 신경 좀 써줘요. 여기 처자처럼 좋은 처녀 있으면 소개 좀 시켜주고 그래요.”
“노력할게요, 할머니.”
“아유, 내가 바쁜 사람들 붙잡고 말이 길었네.”
“아녜요. 아, 식사 정말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얼마죠?”
“됐어요, 돈은 무슨. 그냥 가요. 가.”
“너무 맛있게 먹어서 그럴 수가 없어요, 할머니.”
“괜찮다니까.”
계속 만류하는 할머니에게 강지한이 5만 원짜리 지폐 두 장을 꺼내 억지로 손에 쥐어주었다.
“아니, 무슨 돈을 이렇게나 줘?”
“친구 할머니면 저한테도 할머니죠. 손자가 용돈 드린다고 생각하고 받아주세요.”
“안 그래도 돼. 가져가, 가져가.”
가져가라고 말을 하면서 만류하는 손길에 힘이 없었다.
내심 싫지는 않은 모양.
강지한이 웃으면서 카운터를 떠났다.
“근한이한테 맛있게 먹었다고 얘기 전할게요. 할머님 안부도 전해드릴게요. 건강하세요.”
“아이고……. 내가 신세만 지네. 재미있게 놀다가 조심해서 가요들~!”
밖으로 나온 강지한이 식당의 간판을 다시 눈에 담았다.
‘도가식당.’ 그리고 순댓국을 만든 사람의 이름은 ‘도진만’이었다.
‘아…… 도가라는 게, 도 가(家)였구나.’
강지한이 오늘 먹은 순댓국은 도근한의 친할아버지 솜씨였다.
* * *
배를 채운 다음 코스는 바다 구경이었다.
강지한과 예소린은 서로 딱 붙어 애정을 과시하며 해변가를 거닐었다.
드라마 가을동화의 촬영지를 지나 설악대교 밑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주변의 광경을 눈에 담았다.
설악대교 밑으로는 바닷물에 낚싯대를 드리운 채 시간을 보내는 낚시꾼들이 제법 있었다.
“여기 낚시도 할 수 있나 보네요.”
“우리도 해볼래요?”
“지금 아무것도 없는데?”
“낚시용품점에서 사면 되죠. 아무래도 여기가 포인트인 모양인데, 이런 장소에는 으레 하나 정도는 있게 마련이에요.”
“낚시 좀 해보셨나 봐요?”
“그냥 몇 번?”
참 알면 알수록 재미있는 여인이었다.
“낚시…… 는 내일 해요. 오늘은 구경만 하고.”
“그럴까요?”
이번에도 별다른 말 없이 강지한의 의견에 따라주는 예소린이었다.
둘은 낚시꾼들을 가까이서 구경하며 느긋하게 걸었다.
그렇다 보니 낚시꾼들이 나누는 대화가 바닷바람에 실려와 본의 아니게 들리곤 했다.
“우리 오늘도 한잔해야지.”
“웃기네. 어제 술 처먹고 서질 않아서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먹지 마.”
“졸려서 그랬어, 그건.”
“시끄러. 진짜 턱 빠지는 줄 알았다고. 20분을 넘게 해줘도 푹 시들어 가지고.”
여자가 화를 냈고 남자가 어쩔 줄 몰라 했다.
주어가 빠져 있었으나 대화의 내용을 익히 짐작한 강지한의 걸음이 빨라졌다.
예소린은 쿡쿡 웃으며 그런 강지한과 걸음을 맞춰주었다.
“부끄러워요?”
“남사스럽네요.”
“우리도 다 큰 성인인데 어때요. 그냥 듣고 웃으면 되는 거죠.”
“내가 소린 씨 때문에 자주 놀라는 거 모르죠?”
“나랑 같이 있는 게 지루하지 않다는 얘기로 들을게요.”
정말이지 말로 당할 수 없는 여자였다.
그때 또 다른 낚시 커플의 대화가 귓전을 울렸다.
“이번 주 배틀 셰프 봤어?”
여자가 낚시 바늘에 미끼를 꿰며 남자에게 물었다. 한데 여자의 목소리는 접하기 드문 하이톤이었다.
배틀 셰프라는 단어에 강지한과 예소린의 귀가 쫑긋하고 섰다.
“봤지. 지루하더라.”
남자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재미있게도 남자의 음성은 여자와 상반되게 묵직하고 상당히 낮았다.
마치 성악을 하는 남녀가 소프라노와 베이스의 톤으로 대화를 나누는 것 같았다.
“지루해? 난 재미있던데.”
“그거 다 짜고 치는 대본이야. 아마 우승자도 정해져 있을 걸.”
“에이. 서바이벌 프로그램인데 그러려고.”
“순진하기는.”
남자는 여자가 귀엽다는 듯 뺨을 어루만졌다.
“근데 자기도 요리 좋아하잖아. 한 번 나가보지.”
“짜고 치는 판엔 나가서 뭐해. 강지한 들러리나 서다 끝날 텐데.”
“강지한이 우승한다는 얘기야?”
“애초에 강지한만 엄청 띄워주잖아. 무슨 분식집 사장이 회를 2분 만에 뜨고 닭 발골을 순식간에 해치우냐.”
그러자 여자가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그럼 시나리오 없다 치고 자기가 나갔으면? 몇 등 했을 것 같아?”
“그래도 내가 이 바닥 짬이 얼만데 탑 10 안에는 들지.”
“올~ 너무 자신만만한 거지.”
“실력이 있으니까 그런 거지.”
“라임 정말 거지같다. 키키.”
“아무튼 대본이 탄생시킨 허깨비 요리사들이랑 비교하지 말아주라.”
“강지한이 형편없다는 거?”
“아니, 강지한뿐만 아니라 주목 받는 사람들 전부…… 그렇게 뛰어난 실력은 아니라는 거야. 내 주변에 방송 쪽에서 일하는 친구들 몇 있는 거 알지? 걔들 얘기 들어보면 거기가 바로 조작의 천국이라니까.”
“와~ 그렇구나. 자기 멋지다.”
남자는 괜한 헛바람이 상당히 많이 든 스타일이고 여자는 좀 맹했다.
강지한과 예소린은 둘의 대화에 웃음이 터지려는 것을 겨우 참고 멀리 떨어졌다.
그제야 참았던 웃음을 내보냈다.
“아하하! 크크큭.”
“킥킥.”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멀리 퍼져 나가 수평선 너머로 사라졌다.
* * *
‘낭만 게스트하우스.’
예소린이 예약한 곳이었다.
두 사람은 6시쯤 그곳에 도착했다.
강지한은 당연히 남녀가 따로 묵는 다인실을 예약했겠거니 했다.
한데 짐을 풀러 들어간 곳은 2인실이었다.
“맘에 들어요?”
당황해서 굳어버린 강지한과 달리 예소린은 아무렇지 않게 행동했다.
“소린 씨. 괜찮겠…… 어요?”
그리 묻는 강지한을 보며 예소린이 콧바람을 한 번 폭 내뿜고서 말했다.
“지한 씨, 호랑이가 토끼 잡아먹을 때 물어보고 잡아먹어요?”
“……네?”
“저녁부터 먹고 와요, 우리.”
큰 짐을 풀고 지갑 하나만 챙긴 예소린이 먼저 방을 나갔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강지한은 생각했다.
‘그러니까…… 누가 호랑이라는 거야?’
* * *
오후 8시.
저녁을 먹고 다시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온 두 사람의 귀에 건물 입구에서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오빠~ 낚시할 때 너무 멋졌어.”
“거기서 다섯 마리나 낚은 사람 나밖에 없다니까.”
낮에 바닷가에서 낚시를 하던 베이스와 소프라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