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3
Restaurant 112. 아바이마을에서 생긴 일
“설탕아, 향숙이 누나 말 잘 듣고 있어야 돼.”
왕! 헥헥헥.
6월 3일, 일요일.
강지한은 예소린과 만나 함께 이향숙의 집을 방문했다.
설탕이를 맡기기 위해서였다.
김숙자는 일찍부터 식당에 나가고 없었다.
이향숙이 졸린 눈을 비비며 설탕이의 목줄을 쥐었다.
“흐아암~ 근데 어디로 여행가요?”
“속초.”
예소린이 대답했다.
“1박 2일?”
“응.”
이향숙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더니 주먹을 불끈 쥐었다.
“화이팅.”
“……응?”
강지한이 파이팅에 담긴 여러 가지 의미를 추측하는 사이 이향숙은 또 한 번 하품을 하며 설탕이와 들어갔다.
밤을 꼴딱 샜으니 이제 그녀는 꿈나라에 빠질 시간이었다.
“그럼 가볼까요?”
예소린이 강지한의 팔을 잡아끌었다.
“아, 네.”
두 사람이 차에 올랐다.
부르릉!
그들의 설레는 마음을 대변하듯 자동차는 급하게 출발했다.
* * *
“아니 이게 무슨 일이래?”
갑자기 폭주한 김치 주문으로 인해 조미옥은 신이 났다.
당분간은 휴일 없이 공장을 돌리기로 했기에 직원들은 일요일에도 2교대로 출근해야 했다.
물론 그만큼 보너스를 두둑이 챙겨주기로 한 데다 사전합의가 된 사항이라 불만을 가진 이는 없었다.
“주말에 쉬라 그랬으면 큰일날 뻔했네. 그나저나 이렇게 주문이 밀려들어오면 쉴 틈이 없겠어. 사람도 더 구해야겠는데? 늘그막에 고생길이 열리네, 열려.”
말은 그리하면서도 만면에 미소가 가시지 않는 조미옥이었다.
* * *
근 일주일 동안 강지한은 식당일 외에 신장호와 계약한 레토르트 식품과 관련한 레시피 개발에도 열심이었다.
아무래도 레토르트 식품의 특성상 천연조미료나 좋은 재료가 들어가는 강지한의 분식집 레시피를 그대로 따라하기는 힘들었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신장호와 처음으로 런칭하기로 한 식품들이 전부 김치가 주재료라는 것이었다.
김치는 이미 재료 단가를 확 낮춘 상태에서 꾸준히 6레벨로 만들어내고 있는 상태였다.
때문에 강지한의 김치로 만들어내는 음식들은 기존의 레토르트 식품들보다 그 맛이 훨씬 좋을 건 자명한 일.
그렇다고는 해도 이 역시 분식집 레시피를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었다.
해서 강지한은 좀 더 레토르트 식품에 맞도록 레시피를 수정해 신장호와 자주 연락을 주고받았다.
이번 금요일, 김치 공장을 방문했을 때도 돌아오는 길에 서울에 들러 신장호를 만났던 터였다.
당시 강지한은 다섯 번째로 수정된 레시피를 신장호에게 전해주었다.
신장호는 강지한과 헤어지고 난 뒤 바로 레시피에 착수해 음식을 만들었다.
그리고 금요일에 연구개발팀원들과 회사 이사진을 소집회 품평회를 가졌다.
신장호의 회사 ‘신푸드’에서는 새로 만들거나 레시피를 바꾼 음식을 출시하기 위해서는 항상 이런 품평회의 단계를 거쳐야 했다.
이 품평회에서 사람들의 총 만족도가 78점 이상이어야 출시가 가능했다.
그런데 강지한의 레시피와 김치로 만들어낸 김치찌개, 돼지목살김치찜, 김치볶음밥, 김치만두는 전부 90점 이상을 받았다.
지금껏 품평회에서 합격을 했던 음식들의 평균치가 82점인 걸 감안하면 어마어마하게 높은 점수였다.
그에 탄력이 받은 신장호는 당장 이번 주말부터 새로운 레토르트 식품의 생산 작업에 들어갔다.
회사의 사장이 주말까지 팽개치고 일을 매달리니 그 밑의 사원들이 놀고 있을 수는 없는 일.
하나같이 주말을 반납하고 나와 신제품 출시에 박차를 가했다.
그렇게 어제 오늘, 이틀 동안 열심히 달려든 결과 네 가지 식품의 모든 생산 공정 라인을 수정할 수 있었다.
이제 다음 주부터는 홍보용 제품을 확보한 뒤, 그다음 주부터 시판에 들어갈 예정이었다.
그쯤이면 시중에 내보낸 기존 동일 식품들은 70퍼센트 이상 소진될 터.
모든 일이 스무스하게 맞물려 돌아갈 것이었다.
새로운 사업이 가져올 회사의 미래가 밝았다.
도약을 앞둔 신장호의 기분이 화창한 오늘 날씨처럼 맑았다.
* * *
오늘 하루만큼은 도근한도 푹 쉬는 중이었다.
얼마만에 만끽하는 휴일인지 몰랐다.
이렇게 여유가 조금이라도 날 때면 항상 찾게 되는 사람이 있었다.
도근한이 스마트폰을 들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몇 번 가지 않아 그의 귓전에 반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아이구~ 내 새끼.
이에 도근한의 굳어 있던 얼굴이 확 펴지며 천진한 미소가 담겼다.
“문 사장님~ 잘 지냈어? 지금 바빠?”
-아직 이른 시간이라 괜찮아. 그리고 바빠도 안 바빠! 얼마든지 전화할 수 있지~ 그럼.
“하하하. 다행이다.”
이후로 도근한은 시간 가는 줄도 모른 채 한참 동안 전화기를 붙잡고 신나게 수다를 떨었다.
* * *
강지한과 예소린은 점심나절 속초에 도착했다.
게스트하우스 입실은 4시부터. 아직 네 시간이나 여유가 있었다.
두 사람은 속초 중앙시장 주차장에 차를 댔다.
주말이라 주차장은 혼잡 그 자체여서 몇 번씩 돌아 빈자리를 겨우 찾아냈다.
“우리 일단 허기부터 채우죠?”
“좋죠.”
두 사람은 시장거리를 거닐며 먹거리들을 구경했다.
하지만 시장 안에서 딱히 입맛 당기는 곳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냥 아바이마을로 갈까요?”
예소린이 제안했다.
“아바이마을이요?”
“네. 속초하면 뭐니뭐니해도 아바이 마을에는 한 번 들러봐야죠. 거기서 순댓국 먹어요.”
속초는 아바이마을이 유명했다.
마을 안에는 수많은 순댓국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는데, 주력 메뉴는 순댓국와 아바이순대, 그리고 오징어순대였다.
“지한 씨 여기 와본 적 없구나?”
“네. 속초 자체가 처음이라서.”
“그럼 내가 안내해 줄게요.”
활기차게 말한 예소린이 강지한에게 팔짱을 껴 꽉 끌어안았다.
그러자 팔에서 느껴지는 부드럽고 탄력 있는 감각에 강지한의 얼굴이 잔뜩 붉어졌다.
그동안 손은 많이 잡아왔지만 이렇게 팔짱을 끼고 걸었던 적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속초에 오니 전보다 더 대담해지는 예소린이었다.
강지한은 예소린에게 거의 끌려가다시피 걷고 있었다.
신이 난 그녀의 걸음이 빨라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장터를 벗어났을 때 예소린이 문득 물었다.
“지한 씨, 내가 왜 이렇게 팔짱을 꽉 끼고 걷는지 알아요?”
“아니요.”
“여행 왔으니까. 나 애인이랑 놀러온 거 티내고 싶어서 그래요. 싫어요?”
“좋아요. 엄청.”
예소린이 해맑게 미소 지었다.
그러자 주변의 모든 광경이 환해지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화창한 날씨보다 더욱 맑고 하늘의 태양보다 훨씬 빛나는 여인이었다.
이렇게 예쁜 여인이 먼저 팔짱을 껴주는데 누가 싫다고 하겠는가.
강지한은 마치 구름 위를 걷는 듯한 기분에 취해 있었다.
그러다 정신을 차려보니 두 사람은 어느 작은 선착장 같은 곳에 서게 됐다.
시선을 조금 멀리 두면 저 앞에도 이곳과 비슷한 선창작이 있었는데 두 선착장 사이를 바다가 가로질렀다.
바다 위로 별 특징 없는 작은 배 두 대가 교차하며 서로 다른 선착장으로 관강객들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
“지한 씨, 저게 갯배라는 거예요. 여기는 갯배 선착장이고.”
강지한과 예소린은 갯배 이용요금을 500원씩 지불하고 올라탔다.
갯배는 손님 한 두 사람이 갈고리를 쇠줄에 걸어 당겨야 이동할 수 있는 형식이었다.
이를 강지한과 예소린이 직접 체험했다.
재미있는 경험을 하며 건너편으로 넘어온 둘은 아바이마을 땅을 밟았다.
예소린이 강지한을 아바이순대거리로 이끌었다.
순댓국집 앞에는 점원들이 나와 호객행위를 하는 곳도 있었고 그렇지 않은 곳도 있었다.
“어느 집으로 가는 게 좋을까.”
예소린이 매의 눈으로 순댓국집을 열심히 살폈다.
“아무래도 사람 많은 곳에 가는 게 무난하겠죠?”
“글쎄요.”
강지한은 사람 많은 집이 맛집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정말 맛이 있어서 손님이 끊이지 않는 집도 분명 있지만 요즘엔 TV 홍보나 다른 광고의 효과를 톡톡히 보는 경우가 많았다.
사람들로 바글바글해서 맛집인가 보다 하고 들어가면 의외로 평범하거나 영 아닌 곳이 상당했다.
강지한은 순댓국집을 지나치며 그 내부를 자세히 살폈다.
그러자 넓은 유리문 너머로 식사를 하는 손님들의 순댓국 레벨이 나타났다.
대부분 레벨 3에서 4 수준이었다.
거의 모든 식당이 같은 메뉴로 승부를 보다 보니 경쟁이 붙어 그런지 음식 레벨이 형편없지는 않았다.
어디를 가도 기본은 할 것 같았다.
“아, 저기 들어갈까 지한 씨?”
예소린은 유독 사람들이 많은 순댓국집을 가리켰다.
매장이 상당히 넓은데도 손님들로 가득 차 있었다.
잘못하다가는 웨이팅이 걸릴 판이었다.
강지한이 매장 안을 살폈다.
그러자 순댓국들의 레벨이 새창으로 주르륵 나타났다.
[임우말의 상당한 수준의 순댓국]
요리 등급: LV4
-보통의 순댓국보다 깊은 맛이 더하다. 임우말의 비법양념장이 풍미를 더했으나 화학조미료로 감칠맛을 잡은 것이 아쉽다. 그날그날 육수와 양념장의 상태에 따라 요리 등급이 변할 수 있다. 혹은 한 뚝배기에 들어가는 각 재료의 양이 달라지거나 끓이는 시간이 달라져도 레벨이 내려간다.
[정신자의 맛있는 순댓국]
요리 등급: LV3
-임우말의 비법양념장과 육수를 사용했으나 들어가는 양의 비율이 적절치 않았다. 맛은 있지만 특별한 순댓국을 먹었다고 생각하기에는 아쉽다.
가만보니 레벨3, 레벨4의 순댓국들이 제멋대로 뒤섞여 있었다.
순댓국을 만든 사람들의 이름도 네 명이나 됐다.
임우말이 만든 게 아니면 대부분 레벨이 3이었다.
‘여긴 복불복이네.’
자칫 잘못하면 높은 확률로 속초까지 와서 레벨3의 특징 없는 순댓국을 먹게 될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이렇게까지 장사가 잘 되는 이유는.
‘방송 잘 타서 그렇지.’
순댓국집의 전면에는 지상파와 케이블, 종편 방송 등등 여러 방송국들에 소개된 이력이 잔뜩 써 붙어 있었다.
강지한은 예소린의 손을 잡고 다른 곳으로 이끌었다.
“딴 데 가죠.”
“그래요.”
예소린은 군말 없이 강지한의 의견을 따랐다.
기가 센 그녀였지만 자기 남자에게만큼은 순종적인 타입이었다.
강지한이 지나가는 순댓국집 안을 열심히 확인하며 움직이던 그때였다.
‘오.’
적당히 손님이 든 어느 순댓국집의 음식 레벨을 확인한 강지한이 걸음을 멈췄다.
[도진만의 대단한 순댓국]
요리 등급: LV5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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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진만의 대단한 순댓국]
요리 등급: LV5
-…….
순댓국의 레벨이 일괄적으로 5였다.
여기가 진짜 맛집이었다.
그러나 화려한 방송 경력으로 관광객을 끌어모으던 여느 순댓국집과 달리 이곳은 ‘도가식당’이라는 간판 하나만 딱 걸려 있었다.
호객행위도 없었다.
오징어순대와 아바이순대를 먹는 손님들도 보였다.
둘 다 레벨이 4였고, 쌀밥은 레벨 3이었다.
순댓국에 비해 다른 음식들의 레벨이 조금 떨어지지만 그 정도면 괜찮은 수준.
강지한이 예소린을 이끌고 도가식당으로 들어섰다.
“어서오세요~”
점원으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두 사람을 빈테이블로 안내했다.
“순댓국 두 개랑 아바이순대, 오징어순대 주세요.”
“두 분이서 많이 드시네? 호호.”
아주머니가 주문을 받으며 우스갯소리를 했다.
예소린은 보이는 것과 달리 상당한 대식가였고 강지한도 남들보다는 많이 먹는 편이라 이 정도는 주문을 해줘야 배가 찼다.
“근데 지한 씨, 이 식당 택한 기준이 뭐예요?”
“그냥…… 감으로.”
“대답이 무척 싱겁지만 지한 씨 감이니까 믿어볼게요.”
말을 하며 예소린이 수저를 놓아주고 컵에 물까지 따라주었다.
주문한 요리는 오래지 않아 나왔다.
순댓국은 다른 손님들 상에 서빙된 것과 마찬가지로 레벨5였다.
설마 아무 생각 없이 놀러왔다가 이렇게 수준 높은 음식을 접하게 될 줄은 몰랐다.
강지한이 설레는 맘으로 순댓국을 떠먹었다.
반응은 바로 찾아왔다.
“크으, 맛있다.”
“와~ 엄청 맛있어요. 여기 주방장님 손맛이 거의 지한 씨 수준인데요? 아니, 지한 씨보다는 조금 낮겠다.”
예소린은 눈에 음식 레벨이 보이는 것도 아니면서 정확하게 짚어냈다.
물론 순댓국에 한해서였다.
다른 음식들의 레벨은 그보다 낮았다.
“그 집보다 손님이 적어서 어떨까 싶었는데 안 왔으면 후회할 뻔했어요.”
그 말에 강지한이 살짝 으스댔다.
“맛있게 먹어요.”
“네~”
강지한이 뜨끈한 순댓국을 한술 더 뜨더니 바로 밥을 퍼서 국에 말았다.
반명 예소린은 밥과 국을 따로 먹다가 반 정도 줄어들었을 때 말아 먹기 시작했다.
이 집의 순댓국은 어떻게 먹어도 맛있었다.
뽀얀 육수에 붉은 양념장과 고추기름, 그리고 들깨가루가 들어가 칼칼하면서도 고소한 맛이 확 퍼지는 게 일품이었다.
국에 들어간 내장과 고깃살, 순대 또한 질이 좋았다. 돼지고기 특유의 큼큼한 냄새는 났으나 오래된 잡내는 없었다.
그래서 그 큼큼함이 오히려 더 식욕을 돌게 했다.
두 사람은 국밥을 단숨에 싹 비우고 오징어순대와 아바이순대도 전부 먹어치웠다.
만족스럽게 배를 채운 뒤, 두 사람은 자기가 계산을 하겠다고 티격 대며 카운터 앞에 섰다.
그런데,
“어?”
카운터에 서 있던 칠십 대가량 되어 보이는 할머니가 강지한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강지한은 영문 모를 노사장의 시선에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러시는지?”
순간 노사장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강지한 씨…… 맞죠?”
그녀의 입에서 가래 끓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절…… 아세요?”
그 말에 노사장이 심기가 불편한 어투로 물었다.
“내가 누군지 알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