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8
Restaurant 107. 레몬 소르베의 마법
하얀색 투표함에서는 쪽지가 나온 반면, 검은색 투표함에서는 빈 손만 나왔다.
당황한 레이먼 박이 투표함을 들여다보더니 이내 손으로 들어 거꾸로 잡고 탈탈 털었다.
하지만 투표함에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나 하얀색 투효함에서는 계속해서 쪽지가 나오는 중이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도근한의 안색이 파리해졌다.
블랙 팀원들의 어깨가 축 쳐졌고 하나같이 인상이 구겨졌다.
그와 대비되게 강지한의 화이트 팀에서는 격한 환성이 터져 나왔다.
“이겼다!”
“우와아아아아아!”
모든 팀원들이 강지한의 주변으로 몰려들어 그를 얼싸안고 기뻐했다.
최종 스코어는 35:16.
압도적인 표수 차이로 화이트 팀이 블랙 팀에게서 승리했다.
희비가 엇갈리며 한동안 어수선하던 장내가 진정된 이후, 한돈선이 입을 열었다.
“4라운드 베네핏 배틀, 단체 경합은 화이트 팀의 승리로 끝이 났습니다. 그럼 그 소중한 표를 행사한 학생 여러분의 의견을 들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원자들에게 향해 있던 한돈선의 시선이 무대 밖 계단형 의자에 앉아 있는 학생들에게로 향했다.
“화이트 팀에 투표를 한 분들 손들어 보시겠어요?”
서른다섯 명의 남녀 학생이 손을 들자 한돈선이 물었다.
“여러분이 화이트 팀에 투표하게 된 이유가 뭔지 듣고 싶네요.”
그러자 강지한에게 요리를 만들어 주었던 구나연이 입을 열었다.
“일단은 개취 저격이었어요. 그런데 블랙 팀의 음식도 맛있어서 고민이 좀 됐죠. 어디다 투표를 하는 게 맞을까 고민했는데 결국 레몬 소르베가 화이트 팀을 선택하게 도와줬어요.”
“어째서 그렇죠?”
“저랑 비슷한 생각을 한 학생들이 제법 있었는데요. 음……. 레몬 소르베는 마치 블랙 팀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기 위해 만든 음식 같은 느낌이었거든요.”
“조금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화이트 팀의 음식은 사실 레몬 소르베를 빼놓고 봐도 괜찮았어요. 굳이 있어야 할 필요가 없었죠. 떡볶이, 튀김, 샤오롱바오까지. 하나같이 맛있지만 강렬함과 약간의 느끼함은 피할 수 없는 부분인데 그걸 어묵탕이 잡아줬거든요.”
강지한은 오늘 어묵탕을 기존에 만들어오던 것과 달리 조금 더 얼큰하고 심심하게 만들었다.
개성이 강하고 강렬한 다른 음식들 사이에서 쉬어갈 포인트를 주기 위함이었다.
덕분에 한 쟁반 안에 담긴 요리들의 밸런스가 완벽하게 맞아 떨어졌다.
구나연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반면 블랙 팀의 음식은 따로 놓고 봤을 때 더없이 훌륭했지만…… 한 쟁반 위에 함께 올라가니 나중에는 조금 부담스럽더라고요.”
떡갈비 스테이크는 무겁고, 연어 아보카도 롤은 느끼할 수 있었다. 연어 자체가 기름진 생선인데다 아보카도 또한 버터 같은 식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토마토 해산물 스튜는 매콤하긴 했지만 이 역시 가벼운 음식은 아니었다.
맛이 강렬하고 진했다.
때문에 쉴 포인트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걸 생각지도 못한 레몬 소르베가 잡아줬어요.”
구나연의 말에 다른 학생들이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그들은 레몬 소르베를 화이트 팀의 음식보다 블랙 팀의 음식을 먹을 때 중간중간 떠먹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화이트 팀의 음식이 블랙 팀의 음식에 도움을 준 격이잖아요? 그래서 화이트 팀에 표를 줬어요.”
구나연의 말을 듣고 난 한돈선이 흡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는 이어 몇 명의 학생들에게 더 의견을 물었다.
한데 대부분 구나연과 비슷한 얘기를 했다.
다음으로는 블랙팀을 선택한 학생들의 얘기도 들어보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개인적으로 느끼하거나 무거운 음식을 좋아해서 크게 거부감이 없었고 오히려 만족스러웠다는 대답을 내놓았다.
간단한 인터뷰가 끝난 뒤 한돈선의 말이 이어졌다.
“학생 여러분의 얘기 잘 들었습니다. 한데 흥미로운 부분이 있었어요. 화이트 팀이 내놓은 레몬 소르베에 관한 것인데요. 얘기를 들어보면 레몬 소르베가 결국 블랙 팀의 음식을 더 맛있게 즐길 수 있도록 도움을 줬다고 하는데…… 화이트 팀의 팀장 강지한 씨에게 묻죠.”
한돈선의 시선이 강지한에게 향했다.
“강지한 씨, 레몬 소르베를 왜 준비했습니까?”
“구나연 학생의 말대로입니다. 더 부연 설명할 것이 없습니다.”
“그럼 화이트 팀은 레몬 소르베로 블랙팀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한편, 밸런스를 맞출 수 있도록 도움을 준 것이군요.”
“그렇습니다.”
한돈선이 강지한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러다 예고도 없이 갑작스레 웃음을 터뜨렸다.
“호호호! 훌륭해요. 상대팀의 문제점을 이렇게 영리한 방법으로 지적할 줄은 몰랐습니다. 맞아요. 블랙 팀의 음식은 짜고, 맵고, 느끼하죠. 도대체 혀가 쉬어갈 곳이 없어요. 그런데 이 레몬 소르베는 그 사이사이에 쉬어갈 틈을 마련해 주더군요.”
그때 최현식이 한돈선의 말을 이어 받았다.
“사실 레몬 소르베만 놓고 보자면 잘 만들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기본도 지키지 못한 요리죠. 레몬의 신맛도 강렬하게 와 닿지 않아요. 한데 따로 놓고 보면 형편없는 이 소르베가 블랙 팀의 음식 안에서는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밸런스를 잡아주는 완벽한 요리가 되는 거죠.”
최현식의 얘기를 듣는 학생들의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그들 모두 느꼈던 부분이기에.
가끔은 그냥 흘려 넘어갈 수 있는 문제들도 있는 법이다.
그런데 그것을 누군가 지적하면 그때부터 계속해서 신경이 쓰이고는 한다.
레몬 소르베는 블랙 팀의 문제점을 지적해 부각시켰다.
그 결과가 지금 이 투표의 격차로 나타났다.
레이먼 박이 한마디 감상을 뱉으며 심사평을 마무리했다.
“레몬 소르베의 매직이군요.”
이어 최현식이 진행을 이어나갔다.
“화이트 팀 지원자 여러분. 축하드립니다. 본선 4라운드 베네핏 배틀 단체 경합에서 우승하셨습니다. 화이트 팀 전원에게는 베네핏이 주어져 페일 배틀에서 제외됩니다.”
강지한의 활약에 힘입어 그와 같은 조가 된 열한 명의 사람들은 무사히 다음 라운드에 진출하게 됐다.
반면 블랙 팀의 팀장이었던 도근한은 밸런스를 신경 쓰지 못한 스스로의 부족함에 치를 떨었다.
‘아직도 이렇게나 부족하다니.’
조금만 신경 썼어도 충분히 커버할 수 있는 문제였다.
자존심이 상했다.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구겨진 자신의 모습을 담고 있는 카메라도 짜증이 났다.
하지만…… 화만 낸다고 해결되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무엇보다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도근한이 팀원들에게 고개 숙여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다 제 부족함에서 벌어진 일이예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평소 자존심 강하기로 유명한 도근한이었다.
그런 그가 팀원들에게 잘못을 빌고 있었다.
그는 지금의 치욕을 가슴속에 더 깊이 박아두기 위해 스스로를 몰아치는 중이었다.
두 번 다시 이런 기분을 느끼지 않기 위해서.
그러려면 스스로를 채찍질해 더 빨리 성장하는 수밖에 없다.
당장은 입에 쓴 약이지만 결과적으로 자신에게 큰 도움이 될 터였다.
“에이, 제일 열심히 하셨는데 왜 그래요.”
“도 팀장 없었으면 우리 더 엉망이었을걸?”
“그러니까. 이 오빠 엄살 심하네.”
도근한은 팀원들이 분명 자신을 원망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들은 오히려 도근한을 위로해 주었다.
그 행동에 어떠한 가식이나 위선은 보이지 않았다.
도근한이 자신의 위치에서 얼마나 열심히 최선을 다했는지 모두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그러한 반응은 도근한 본인으로 인해 만들어진 결과물이었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차올랐다.
도근한 결국 화장실을 핑계로 자리를 떠났다.
그때 노영철이 소리쳤다.
“출연자분들! 화장실 급하신 분 다녀오시고 15분 뒤에 세트장으로 복귀하겠습니다!”
페일 배틀은 다시 세트장에서 치러질 예정이었다.
카메라가 멈추자 지원자들은 한결 긴장이 풀린 모습으로 휴식을 취했다.
그때 구나연이 강지한에게 다가왔다.
“오빠, 진짜 맛있었어요.”
“고마워요.”
“지한 분식 사장님 맞죠?”
구나연이 뜬금없이 알은척을 했다.
“네, 맞아요. 방송 봤어요?”
“인터넷에서 먼저 알았죠. 춘천의 분식집 사장님이 인기 검색에서 오르니까 반갑던데요?”
“혹시 춘천분이세요?”
“네, 저 춘천 살아요. 한국대 합격하면서 4년째 자취하고 있긴 하지만. 방학 때는 꼬박꼬박 내려가는데 사장님 식당에는 왜 안 가봤는지 몰라요.”
“식당 오픈한 지 얼마 안 됐어요.”
“그러셨구나. 우리 아빠는 얼마 전부터 사장님 식당 단골 됐대요. 제가 지한 분식 아냐고 물어봤더니 바로 자랑하던데요?”
이야기가 이렇게 흘러가자 강지한도 구나연이 전보다 더 반가워지기 시작했다.
“아……. 그럼 제가 얼굴 보면 누군지 알 수 있겠네요.”
“잠깐만요.”
구나연이 스마트폰의 사진첩을 열어 뒤적거리더니 강지한에게 보여주었다.
“여기요. 우리 아빠.”
액정을 본 강지한의 입에 미소가 걸렸다.
누군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사진 속 구나연과 끌어안고 익살맞은 얼굴을 하고 있는 남성은 다름 아닌 구자승이었다.
춘천에서 조각계의 거목으로 불리는 제법 힘있는 예술가이자 천명옥의 지인이기도 한 사람이었다.
그는 강지한에게 자신에 대해서 몇 번 얘기한 적이 있었다.
이를 강지한은 똑똑히 기억했다.
“구 선생님이 아버지셨군요.”
“맞아요! 헤헤.”
강지한이 알아보자 구나연의 기분이 좋아졌다.
“저 이번에 춘천 가게 되면 아빠랑 꼭 들를 테니까 아는 척해 주기예요. 알았죠?”
“그럼요. 우리 인연이 깊으니 서비스도 줄게요.”
“듣기만 해도 설레네요, 서비스. 그럼 저 가볼게요. 아! 그리고 오빠는 분명 파이널 라운드까지 갈 수 있을 거예요! 남은 라운드도 파이팅하세요!”
구나연이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고 친구들 틈에 섞여 멀어져 갔다.
강지한은 세상이 참 좁다고 생각했다.
* * *
구자승은 후배 예술가 방민호를 데리고 지한 김치전골을 찾았다.
방민호는 초현실주의 화가로 2년 전부터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사람이었다. 한창 몸값이 상승주가를 타던 요즘, 갑작스레 찾아온 슬럼프로 인해 괴로워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곁에서 이를 지켜보던 구자승이 뜬금없이 그를 지한 김치전골집으로 데려온 것이다.
지한 전골은 지한 분식과 휴무일이 달랐다.
해서 일요일엔 오픈을 하는 상황이었다.
“선배……. 나 안 먹어도 된다니까.”
방민호는 도통 벗어나기 힘든 슬럼프로 인해 식욕이 없었다.
보이지 않는 벽에 막혀 하루하루 답답한 속을 술로 달랬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뭔가 한 단계만 넘으면 더 멋진 그림이 나올 것 같은데 그게 영 힘들었다.
오전 내내 그림과 씨름하다 지쳐 낮술이나 자실까 하던 와중 그는 구자승의 호출을 받았다.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지한 김치전골에 엉덩이를 깐 이후였다.
“선배, 나 그냥 들어가면 안 돼요?”
“내가 이유도 없이 널 여기 데려왔겠니? 사람한테 먹는 즐거움이 얼마나 큰 건지 네가 알아야 돼. 예술가라는 게 뭐야? 세상 모든 즐거움을 탐닉하는 존재야. 그런데 너는 식도락에 너무 인색해.”
“나도 맛있는 거 먹을 줄 알고, 즐길 줄 알아요.”
“아니야. 내가 볼 때 넌 한참 멀었다.”
“그래, 뭐……. 그렇다고 칩시다. 선배 말대로 식도락의 즐거움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으면 좀 더 있어 보이는 곳으로 데려가지 동네 전골집이 뭡니까?”
“웨이팅 걸린 거 안 보여? 여기 어마어마한 맛집이야.”
“그래 봤자 김치전골이죠.”
“허허. 예술을 한다는 놈이 어찌 그런 편협한 잣대로 평가를 할꼬!”
그때 두 사람이 종업원이 김치전골 2인분을 테이블 위 가스레인지에 놓고 불을 올렸다.
“전골 끓여서 나온 거니까 바로 드셔도 돼요. 국물이 졸아들수록 맛이 계속 변하면서 진해지니까 재미있을 거예요. 육수 필요하시면 말씀하세요. 맛있게 드세요.”
종업원이 사라지자 구자승이 얼른 국물부터 한술 떴다.
“호록. 크흐~ 세상 시름 사라지는 맛이다.”
“무슨 국물 한 숟갈에 세상 시름이 사라지기까지 합니까.”
“흐흐, 이 어린놈아. 오늘 지한 분식이 문을 닫아서 여길 온 거다. 지한 분식 음식은 그냥 하늘로 승천하는 맛이야.”
방민호는 구자승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국물을 조금 떠 마셨다.
어제 술을 마셔서 속이 아픈 차라, 해장이나 하고 가자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
국물 맛을 본 방민호가 혀를 내둘렀다.
“와……. 이거.”
“죽여주지?”
이제껏 춘천 바닥에서는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맛이었다.
김치전골의 레벨은 김치의 레벨이 오르며 6으로 상승한 상태였다.
방민호의 이런 반응은 당연한 것이었다.
식도락이라고는 크게 관심 없던 그였던지라 더더욱 신선한 경험이었다.
맛에 대한 새로운 경험이 흘러들어오는 순간 그의 머리가 유연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래, 어쩌면 나는 너무 내 스스로의 틀에 갇혀 살아왔는지도 모르겠다. 조금은 다른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 다른 시도를 해볼 필요도 있는 법인데.’
예술가 방민호.
그가 맞이한 최대의 적은 항상 고지식함이었다.
예술가에게 있어서는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 있는 고지식함을 그는 가지고 있었다.
한데 그 고지식함이 식도락의 즐거움을 느끼게 됨으로써 깨지려 하고 있었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 행위는 필요 없는 유흥이라 생각했는데, 그것이 뒤집어지면서 고지식이라는 벽에 균열을 일으켰다.
그가 받은 충격만큼 숟가락질도 급해졌다.
“야야. 천천히 먹어라. 나도 좀 먹자.”
자기 몫을 지키지 못할 것 같은 위기감에 구자승이 그를 말렸다.
순간 방민호가 숟가락을 딱 멈추고서 구자승을 노려봤다.
식겁한 구자승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래그래. 알았다. 먹어라 먹어.”
한데 방민호의 입에서 의외의 말이 흘러나왔다.
“선배, 지한 분식 음식은 하늘로 승천하는 맛이라 그랬죠?”
“그랬지.”
대체 지한 분식의 음식들은 얼마나 맛있는 건지 궁금해 미칠 지경인 방민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