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
Restaurant 97. 이 떡볶이 어디서 사왔다고?
송만대는 이미 윤선아에게 지한 분식의 떡볶이에 대한 얘기를 해놓은 터였다.
그 식당 떡볶이를 연기자들이 맛보면 굳이 연기를 하려 들지 않아도 감독님이 원하는 감정선이 나올 거라 확신을 했다.
송만대는 그게 말이 되냐 싶었지만 이 상태로는 답이 나오질 않아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그리해 보기로 했다.
떡볶이는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넉넉히 10인분을 사왔다.
그중 한 접시 정도의 양을 따뜻하게 덥혀서 그릇에 담아 세팅하고 연기자들이 주변에 섰다.
드라마의 주연 좌경우가 분식집 막내아들 ‘나세민’으로 몰입해 들어갔다.
윤선아는 분식집 주방 보조 ‘소현화’가 되었다.
극중 두 사람은 연인이 될 기류를 풍기고 있는 설정이다.
소현화는 나세민이 아버지의 손맛을 찾아갈 수 있도록 물심양면 도와주는데 그러한 과정에서 사랑이 싹트게 되는 것.
때문에 이번 장면에서는 주연 두 명의 감정 연기가 다른 때보다 중요했다.
조연들 역시 마찬가지.
아버지의 손맛을 찾아낸 것에 대한 환희와 환장할 것 같은 떡볶이의 맛을 동시에 표현해야 한다.
이번 컷에 등장하는 일곱 사람들은 떡볶이 주변에 서서 각자의 배역으로 빠져 들어갔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걱정이 들었다.
과연 타지에서 사온 저 떡볶이가 신의 한 수로 작용할 수 있을까?
아무리 맛있다고 해봤자 분식일 뿐인데.
배우들은 기대 반 걱정 반의 마음을 갖고서 연기에 돌입했다.
송만대 감독의 슛! 신호에 카메라 녹화가 시작되고 스텝들은 숨을 죽였다.
카메라가 돌기 전부터 나세민이 되어버린 좌경우가 기대 가득한 얼굴로 떡볶이 하나를 포크로 찍었다.
그는 떡볶이를 입에 가져가는 그 순간까지도 자신이 가져가야 할 감정선에 대해 계속해서 의식했다.
그런데 붉은 양념을 온몸에 바른 떡 하나가 입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
의식하고 있던 모든 감정선이 사라졌다.
떡볶이를 맛본 이후 해야 할 연기에 대해 몇 번이고 곱씹었는데, 그것들이 한 번에 날아갔다.
하지만 카메라를 보고 있던 송만대는 그 어느 때보다 만족스러운 얼굴이었다.
‘이거야!’
그가 원했던 감정선이 좌경우의 모습에서 전부 표현되고 있었다.
떡볶이 하나를 천천히 씹는 얼굴 속엔 그 강렬한 맛에 대한 감탄과 아버지의 손맛을 재현한 것에 대한 환희, 그리고 사라진 아버지의 그리움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하지만 정작 좌경우는 지금 자신이 그러한 연기를 펼치고 있다는 걸 인지 못했다.
‘미치도록 맛있다.’
바로 이 맛이었다.
좌경우가 분식집 막내아들의 주연 자리를 꿰찰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그 맛!
처음에는 그 맛을 기억하며 발군의 연기를 펼쳤다.
송만대 감독도 크게 만족했다.
한데 갈수록 기억은 희미해졌다.
하지만 좌경우는 지한 분식을 다시 찾지 않았다.
욕심이 생긴 것이다.
지한 분식을 맛보지 않아도 스스로의 연기력으로 해내보겠다는 배우적 욕심이.
해서 좌경우는 노력했고 다행스럽게도 그 노력은 빛을 보았다.
그러나 이번 촬영에서 한계에 부딪혔다.
도저히 당장의 연기력만으로는 송만대 감독이 원하는 감정선을 건드릴 수 없었다.
그러던 와중 윤선아 덕분에 다시 그 떡볶이를 맛보게 됐다.
‘이거야.’
떡볶이를 먹자마자 잊혔던 그때의 감동이 다시 파도처럼 밀려 들어왔다.
‘이 맛을 여기서 다시 느끼게 될 줄이야.’
춘천까지 가지 않고 촬영장에서 강지한의 손맛을 접하게 될 줄은 몰랐다.
사실 춘천에서 떡볶이를 공수해 왔다고 했을 때는 다 불어터지고 식어서 과연 그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을까 걱정이 됐다.
그런데 식어버린 떡볶이를 데우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본래의 맛과 가깝게 재현이 가능했다.
‘아, 사장님.’
좌경우가 강지한을 떠올렸다.
자신이 이 자리에서 연기할 수 있었던 건 그의 음식 덕이 컸다. 그 고마움을 잊지 않고 꼭 찾아뵙겠다며 방송에서 인터뷰까지 했는데, 도저히 그럴 틈이 없어 방문을 차일피일 미루게 됐다.
이제와 그의 음식을 이렇게 다시 먹게 되니 왠지 모를 그리움까지 밀려들 정도였다.
그 복합적인 감정들이 표정과 행동으로 드러나며 송만대 감독을 만족시켰다.
“이 맛이야……. 아버지의 맛이야!”
한참 동안 떡볶이에 빠져 있던 좌경우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서 대사를 쳤다.
그러자 윤선아가 얼른 떡볶이 하나를 집어 먹었다.
대본에 나와 있는 대로 움직인 것이지만, 지금 윤선아의 행동은 연기라기보다는 진심에 가까웠다.
지한 분식의 음식 맛이 어떤지 알고 있는 그녀는 빨리 떡볶이를 맛보고 싶어 안달이 날 지경이었다.
그리고 떡볶이를 씹자마자 황홀경에 가득 찬 표정으로 녹아내렸다.
‘선아, 연기 미쳤네!’
송만대가 소리 없이 웃었다.
두 사람의 연기에 이어 조연들도 떡볶이를 먹었다.
그리고 하나같이 발군의 연기력을 자랑하게 됐다.
‘이거 뭐야?’
‘떡볶이 겁나 맛있다.’
‘와, 혀가 녹는 것 같아.’
조연들은 진심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저 표정들 좀 봐. 역시 하면 되는 거야. 불가능이 어디 있냐고.’
모니터를 지켜보던 송만대가 흡족해서 쾌재를 불렀다.
될 때까지 했더니 드디어 배우들이 한계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그는 떡볶이 맛이 배우들의 연기를 살렸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렇게 도저히 답이 나오지 않을 것 같던 신의 촬영이 만족스럽게 끝났다.
“다들 수고했어! 멋졌어! 하하하.”
송만대 감독이 박수까지 치며 크게 웃었다.
거장이 미소를 되찾자 비로소 촬영장에도 평화가 찾아왔다.
“자자. 다들 밤샘 촬영으로 고생했으니 오늘은 이만하고 하루 푹 쉬자고.”
“고생하셨습니다!”
“수고하셨어요~!”
드디어 해방이다.
스텝들은 편히 쉴 생각에 벌써부터 마음이 들떴다.
그런데 촬영이 끝났음에도 배우들은 세트장에서 나오지 않았다.
송만대가 뭘 하나 봤더니 선동수가 가져온 떡볶이를 먹고 있었다.
‘배들이 많이 고팠나?’
송만대는 그런가 보다 하고 놔두었다.
그러다 조감독에게 배고픈 사람들 있으면 떡볶이들 나눠 먹게 하라고 일렀다.
하지만 스탭들 대부분은 허기보다 피곤이 더 심했기에 대부분이 돌아가고 몇 남지 않았다.
그들은 식어버린 떡볶이를 집어먹기 시작했다.
송만대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그런데 떡볶이에 손을 댄 스텝들 사이에서 오가는 말이 없었다.
뭔가에 홀린 듯한 얼굴로 떡볶이만 정신없이 집어 먹을 뿐이었다.
‘말할 기력도 없나?’
송만대가 떡볶이를 먹고 있는 배우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들은 접시에 담긴 떡볶이를 다 먹고 새로 떡볶이를 덜어 먹는 중이었다.
하나같이 뭐에 홀린 듯 침묵 속에서 쩝쩝 소리만 요란했다.
그제야 송만대는 떡볶이에 뭔가가 있다는 걸 느꼈다.
그가 스텝들 사이에 끼어서 젓가락을 들었다.
보통 같았으면 감독이 다가오는 걸 인지한 순간 바로 자리를 내어주는 스텝들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아무도 송만대 감독이 오는 걸 인지 못했다.
그가 끼어들고 나서야 알아챘다.
이어 송만대의 손에 젓가락이 쥐어지자 다른 스텝들의 젓가락질이 빨라졌다.
‘이놈들 봐라?’
감독이 떡볶이 좀 먹겠다는데 이것들이 왜 이러는가 싶었다.
송만대가 괘씸한 와중에도 떡볶이 맛이 궁금해 얼른 하나를 집어먹었다.
‘……!’
이어 그 역시 다른 스텝들과 같이 침묵 속에서 오로지 떡볶이 맛에만 집중하며 젓가락질을 열심히 해댔다.
시간이 흘러 떡볶이가 전부 소진되고 나서야 사람들은 정신을 차렸다.
송만대가 부른 배를 어루만지며 윤선아를 불렀다.
“선아야!”
“네, 감독님!”
만족스럽게 배를 채운 선아가 빠르게 대답하며 후다닥 달려왔다.
그런 그녀에게 송만대가 물었다.
“이 떡볶이 어디서 사왔다고?”
드라마의 성공을 위해 이 떡볶이는 앞으로도 반드시 필요했다.
* * *
횡성에 도착한 강지한과 조미옥은 신일중의 안내로 김치 공장을 둘러보는 중이었다.
세 개의 김치 공장 중 두 개는 열심히 돌아가는 중이었고 한 곳은 텅 비어 있었다.
바로 거기가 곧 계약이 만료되는 공장이었다.
실질적으로 만료되는 건 다음 주 월요일인데 벌써부터 가동이 중지된 상태였다.
신일중의 말에 의하면 전에 계약한 사장님의 김치 사업이 잘 안 됐기에 더 손해 보기 전에 미리 손을 뗀 것이라고 한다.
“깔끔하고 좋네요.”
김치 공장을 둘러보고 나온 조미옥이 만족스럽게 말했다.
“네……. 관리 하나는 확실하게 했거든요.”
신일중이 어색한 미소를 머금고서 대답했다.
그의 음성은 전화 통화를 할 때 보다 조금 주눅 들어 있었다.
처음 보는 조미옥 때문이었다.
하여튼 쑥스러움이 많은 청년이었다.
“보고 나니까 더 마음에 드네요.”
강지한이 만족스러운 반응을 보이자 신일중은 뿌듯함을 느꼈다.
그때 세 사람에게 누군가가 다가왔다.
“안녕들 하십니까. 하하하.”
크고 화통한 인사에 고개를 돌려보니 정장을 쫙 빼 입은 중년의 신사가 다가오고 있었다.
머리를 2:8로 가지런히 빗어 넘기고 콧수염을 멋지게 기른 그는 신일중의 아버지 신장호였다.
“아, 우리 아버지예요.”
“신장호라고 합니다.”
신장호가 지척까지 다가와 고개 숙여 인사했다.
“강지한이라고 해요.”
“조미옥이예요.”
“반갑습니다. 강사장님은 특히 더 반갑습니다. 우리 아들한테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배틀 셰프에서 아주 큰 도움을 주셨다고요.”
“그렇게까지 큰 건 아니었는데 제 얘기를 잘 해줬나 보네요.”
“하하하. 겸손하시기는. 아무튼 제가 아들은 끔찍이 아껴서 이놈 부탁이라면 거절을 못합니다. 계약 조건은 이미 들으셨죠?”
“네.”
“그 조건 그대로 계약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에이, 뭐 감사까지야. 하하하!”
신장호가 크게 웃었다.
쑥스러움을 안고 사는 신일중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성향의 사람이었다.
“어떻게 자리를 옮겨서 얘기를 좀 할까요? 오신 김에 계약서도 작성하고요.”
“좋습니다.”
“그럼 제 단골 카페로 안내하겠습니다.”
* * *
신장호가 추천한 카페로 자리를 옮긴 이들은 커피나 음료수들을 시켜 놓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눴다.
애초에 만나는 이들이 강지한에게 호감 가득한 상황인지라 대화 자리는 화기애애했다.
“그럼 계약서 작성하시죠.”
이야기가 무르익었을 때 신장호가 계약서를 꺼냈다.
강지한이 계약서를 꼼꼼히 읽어본 뒤 필요한 정보들을 기입하고 도장을 찍었다.
이로써 김치 공장과의 계약이 완료되었다.
계약이 효력을 발휘하는 것은 6월 1일부터로 조정했다.
그 전까지 조미옥도 사람을 모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저 때문에 괜히 손해 보시는 건 아닌지 모르겠네요.”
“전혀 아니니 그런 생각 마십시오.”
사실 신장호가 오로지 아들의 부탁 때문에 손해를 봐가면서까지 강지한과 계약한 건 아니었다.
갈수록 김치 공장에 들어오겠다는 업체가 줄어들고 있었다.
본래는 여기저기서 연락이 주기적으로 와야 공장이 놀리는 날 없이 돌아가는데 일 년 전부터 그 사이클이 사라졌다.
해서 잘못하다간 이번에 공장 하나가 통으로 놀게 생긴 상황이었다.
그때 신일중이 강지한의 사정을 얘기하며 공장 계약건을 제안해 왔다.
놀리는 것보다는 가격을 내려서라도 계약을 하는 게 신장호의 입장에서도 이득이었다.
그렇게 이 계약이 성사된 것이다.
“자,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신장호가 강지한과 조미옥에게 차례대로 악수를 나누었다.
그에 조미옥이 준비해 온 김치를 건네주었다.
“이게 우리 사장님의 비법 양념으로 만든 김치예요. 한 번 드셔보시라고 가져왔어요.”
“아이고, 김치 좋죠!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별탈 없이 김치 공장과 계약을 하게 된 강지한이 신일중에게 고마운 시선을 던졌다.
이를 마주한 신일중이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 * *
강지한과 조미옥이 떠나고 난 뒤, 신장호와 신일중은 집으로 돌아왔다.
점심때도 되었겠다 김치도 얻었겠다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신장호는 김치 사업을 했던 사람인만큼 김치를 참 좋아했다.
그래서 이렇게 남의 집 김치를 얻을 땐 그 맛이 궁금해서 꼭 집에 들어와 식사를 하고는 했다.
신장호는 아내에게 김치를 넘겨주었다.
그러자 그의 아내는 김치를 먹기 좋게 썰고 집에 있던 다른 반찬들과 국을 덥혀서 상에 내놓았다.
아내는 이미 혼자 끼니를 해결한 터라 상에는 신장호와 신일중만 앉았다.
“어디.”
마음이 급한 신장호가 대뜸 김치부터 집어 맛봤다.
그의 입에 들어간 김치가 아삭 하며 씹혔다.
동시에 신장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를 본 신일중이 놀라 물었다.
“아빠. 왜…… 그래요?”
“…….”
신장호가 몇 번 더 김치를 씹고 그 맛을 천천히 음미한 뒤 꿀꺽 삼켰다.
그러고는 한껏 부릅떠진 눈을 하고 말했다.
“일중아, 이 김치…… 미쳤다. 이거 어쩌면 아빠 사업에 날개를 달아줄 김치가 될지도 모르겠다.”
신장호의 머릿속에서 그가 만들어내는 즉석식품과 강지한의 김치가 여러 가지 형태로 조합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