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
Restaurant 96. 성장하는 용성우
5월 23일 수요일 아침.
여의도역 앞엔 분식집 외동딸 한지민이 변함없이 김밥을 들고 나와 분식집 홍보를 하고 있었다.
역 근처의 작은 분식집 지민 분식은 다음 주면 오픈을 한다.
한지민은 근 일주일 동안 하루도 빠지지 않고 열심히 홍보를 해왔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시식하고 가세요~ 맛있는 김밥이에요~! 지민 분식 오픈을 앞두고 시식 이벤트 진행 중이에요~!”
한지민의 호객 행위에 남자 한 명이 호기심을 보이며 다가왔다.
그가 김밥 반줄을 건네받고서 그냥 휙 떠나갔다.
지민 분식의 오픈 같은 것엔 관심이 없었다.
허기지던 차에 김밥 반줄을 공짜로 먹으려고 다가왔던 것이다.
한지민은 그런 남자의 내심을 알면서도 실망 않고 인사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맛있게 드세요~!”
그러거나 말거나 남자는 무심하게 멀어지며 김밥 한 개를 꺼내 먹었다.
한데 김밥을 씹어 삼킨 남자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그가 갑자기 뒤돌아서 성큼성큼 다가와 한지민에게 물었다.
“분식집이 어디예요?”
한지민이 생긋 웃으며 뒤쪽의 작은 건물을 가리켰다.
“저~ 기 지민 분식이라는 간판 보이죠? 거기예요.”
“언제 오픈한다고요?”
“다음 주 중에 오픈하니까 꼭 찾아주세요.”
“아……. 네.”
남자가 지민 분식 간판을 한 번 더 눈에 담은 뒤 다시 등을 돌렸다.
멀어지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는 한지민의 가슴이 뿌듯해졌다.
‘그분 말을 듣길 잘했어.’
사흘 전, 한지민은 역 근처에서 강지한을 만났다.
강지한은 당시 김밥을 먹은 답례로 김밥맛을 업그레이드시킬 수 있는 두 가지 팁을 알려주었다.
더욱 고급스러운 쌀로 바꿀 것, 다시마와 멸치 육수로 육수밥을 사용할 것.
한지민은 이를 그녀의 부모님께 알려주었다.
부모님은 기존에 사용하던 것보다 비싼 쌀로 바꾼 뒤 육수밥을 만들어 김밥을 말았다.
그러자 김밥의 맛이 몰라보게 달라졌다.
김밥 한 알을 입에 넣으면 전에 없던 풍미와 감칠맛이 확 하고 퍼져 나갔다.
이 정도 김밥이면 충분히 경쟁력이 있겠다 싶었다.
이후부터 한지민은 홍보할 때 육수밥으로 만든 김밥을 들고 나갔다.
사실 사흘 전까지는 아무리 홍보를 해도 사람들에게서 별다른 반응이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데 바뀐 레시피로 만든 김밥을 들고 나선 뒤로는 방금처럼 그냥 가려다가 다시 찾아와 분식집 정보를 묻는 경우가 가끔 있었다.
“시식하고 가세요~ 맛있는 김밥이에요~! 지민 분식 오픈을 앞두고 시식 이벤트 진행 중이에요~!”
한지민이 다시 목청을 높였다.
그녀의 시선이 지나가는 사람들을 향하다가 가끔씩 역 쪽을 살피곤 했다.
‘오늘도 안 지나가나?’
한지민의 머릿속에 육수밥이라는 힌트를 알려준 강지한의 얼굴이 또렷하게 떠올랐다.
‘뭐하는 사람일까? 요식업 종사잔가?’
김밥을 먹어보고 이런 팁을 바로 내어줄 정도라면 요리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일 터.
갈수록 강지한이 궁금해지는 한지민이었다.
* * *
“……네?”
지한 분식의 오픈을 준비하는 아침.
주방에서 바쁘게 움직이던 용성우가 당황한 얼굴로 굳어버렸다.
그런 그에게 강지한이 같은 말을 한 번 더 반복했다.
“오늘 점심 피크 타임은 성우 혼자 책임져 보라고.”
“저, 저 혼자요?”
“응. 네가 주방장이 되는 거야.”
강지한은 오늘 조미옥과 함께 횡성의 김치 공장을 다녀오기로 했다.
신일중의 아버지와 계약을 맺기 위해서였다.
사실 이렇게까지 무리해서 다녀올 필요는 없었다.
그럼에도 일을 서두르는 건 용성우에게도 홀로설 수 있는 연습을 시켜 주기 위함이었다.
“제가 가능할까요?”
용성우가 잔뜩 긴장해서 물었다.
하지만 강지한은 그를 믿었다.
용성우가 만드는 메뉴들 중 김치가 들어간 것들은 전부 레벨 5 이상이었다.
그 밖의 메뉴들도 레벨 4 밑으로 내려간 적은 없었고, 지금은 대부분 레벨 5의 퀄리티를 뽑아낸다.
아직 컨디션에 따라 4와 5사이를 왔다 갔다 하지만 그 정도만 해도 훌륭했다.
“할 수 있어, 성우야. 생각해 봐. 네가 우리 매장에서 만들어 보지 않은 음식이 있어?”
성우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다 네가 직접 만들어봤던 거야. 하던 대로만 하면 돼. 그리고 중만 아저씨 적당히 부려먹고.”
그 말에 양파를 까던 고중만이 강지한을 샐쭉 바라봤다.
“그럼 오늘은 내가 부주방장 되는 거야?”
“네.”
“으하하하! 좋아! 어이, 용 주방장! 얼마든지 이 몸을 부려 먹어봐! 어디 네 멋대로 한 번 해보라고!”
고중만은 기분이 좋아서 소리친 건데 용성우는 화들짝 놀라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잘할 수 있지?”
강지한의 물음에 용성우가 마음을 굳게 먹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해볼게요.”
그의 목표는 강지한처럼 멋진 요리사가 되어 하나의 주방을 책임지는 것이다.
목표에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이런 훈련도 필요했다.
항상 기회는 위기 속에 오기 마련.
용성우는 이번에 그 기회를 잡고자 했다.
“그래. 든든하다.”
그때 창밖에서 빵빵! 하고 경적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독고진의 트럭이었다.
“그럼 성우야. 잘 부탁할게. 중만 아저씨. 성우 도와서 열심히 보조 부탁해요.”
“알겠습니다, 사장님!”
“믿고 다녀와. 식당개 삼 년이면 라면을 끓이는 법이야.”
아직 홀 담당들이 출근하지 않은 시각.
강지한이 두 사람을 일별하고 분식집을 나섰다.
그러자 트럭 조수석에서 조미옥이 내렸다.
독고진은 열린 창문 너머로 강지한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오늘 울 엄마 잘 부탁드립니다! 횡성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네. 걱정 말고 어서 가보세요. 매장 오픈해야 하실 텐데.”
“넵! 수고하세요!”
독고진이 부지런히 트럭을 몰아 떠났다.
“김치 공장 보러 갈 생각하니 두근두근하네. 호호호.”
조미옥이 상기된 음성으로 말했다.
“저도 그래요. 김치는 가져오셨죠?”
“그럼~!”
조미옥이 들고 있던 큼직한 반찬통을 내밀었다.
“강 사장도 김밥 싸왔지?”
“네.”
강지한의 손에는 김밥 도시락 두 개가 담긴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다.
두 사람은 끼니를 횡성 가는 차 안에서 김밥으로 해결하기로 했다.
“그럼 가볼까요?”
“좋지~!”
* * *
강지한이 떠나고 오픈이 임박해 오는 시각.
차창 밖으로 벤 한 대가 다급히 주차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벤의 운전석에서 내린 이는 윤선아의 매니저 선동수였다.
현재 시각 10시 42분.
아직 오픈을 하기 전이다.
그럼에도 선동수는 급한 마음에 식당 문을 빼꼼이 열었다.
“저…….”
그가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이리나가 다가가 친절한 미소로 응대했다.
“안녕하세요 손님~ 찾아주셔서 감사해요. 근데 우리 매장이 11시부터 오픈인데 어쩌죠? 조금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아 저기, 제가 급하게 떡볶이만 포장을 좀 해가려는데 어떻게 안 될까요?”
“포장해 가시려고요?”
“네. 한 10인분 정도요.”
“잠시만요.”
이리나가 주방으로 다가가 용성우에게 상황을 전했다.
평소 같았으면 강지한이 있었어야 할 자리에 용성우가 서 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아무튼 지금은 용성우가 주방장이니 모든 결정권은 그에게 있었다.
“떡볶이 포장 손님…… 몇 인분?”
“10인분.”
10인분이면 양이 상당하다.
식당이 오픈하고 나서 손님들이 들이닥치기 시작할 때 포장 요리를 시작하면 이후의 주문이 딜레이될 수도 있었다.
오픈하기 전에 포장해서 주는 게 더 나았다.
결단을 내린 용성우의 입이 열렸다.
“지금 해드린다 그래.”
“네!”
평소 용성우에게 반말을 사용하는 이리나였다.
그런데 지금, 저도 모르게 존댓말이 튀어나왔다.
용성우에게서 평소와는 다른 기운이 풍겨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리나가 선동수에게 다가가 용성우의 말을 전했다.
“해주신대요. 죄송한데 잠깐만 밖에서 기다려 주세요!”
아직 오픈 전이라 선동수를 식당 안에 들일 수는 없었다.
한 명을 들이면 이후로 오는 손님도 받아야 하기에, 어쩔 수 없이 그를 밖에서 기다리게 해야 했다.
하지만 선동수의 입장에서는 당장 포장을 해준다고 한 것만도 감지덕지였다.
‘후우. 하던 대로만 하자.’
용성우가 마인드 컨트롤을 한 뒤 바로 손을 움직였다.
큰 웍에 떡볶이 10인분 조리에 필요한 재료와 비법 육수, 특제 양념이 들어갔다.
처음에는 종이에 적어 달달 외운 대로 신중하게 만들었었다.
그런데 지금은 완전히 몸에 익어 생각하기도 전에 손이 먼저 움직였다.
정확하게 10인분을 조리하는 데 필요한 만큼의 양이 웍 속에서 맛있게 조리되고 있었다.
어차피 떡볶이의 핵심 양념과 육수는 강지한이 다 만들어 놓았으니 정량을 지키고 정확한 시간을 계산해 조리만 하면 그 맛을 얼추 흉내낼 수가 있었다.
용성우가 드디어 완성된 떡볶이 10인분을 전용 용기 네 개에 나누어 포장했다.
용성우는 볼 수 없었지만 떡볶이의 레벨은 5였다.
강지한이 직접 만드는 떡볶이가 레벨 6이니 그보다 한 단계 낮은 정도의 수준이었다.
“리나야, 가져다 드려.”
“네!”
이리나가 포장된 떡볶이를 선동수에게 넘겨주었다.
“3만 원입니다!”
지난 주 부터 떡볶이, 라볶이, 밥볶이의 가격은 500원이 더 올라 1인분에 3천 원이 되었다.
지한 분식에 고중만이 함께하게 되니 인건비가 더 들어 어쩔 수 없이 인상을 하게 됐다.
물론 손님들 사이에서 불만은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3,000원도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맛과 퀄리티를 자랑하는 떡볶이였기 때문이다.
이리나는 선동수가 내민 카드로 결제한 뒤 영수증과 함께 돌려주었다.
“감사합니다! 복 받으실 겁니다!”
선동수가 식당 안으로 상체만 들이밀고서는 용성우에게 구십 도로 허리를 숙여 보인 뒤 후다닥 밴에 올라탔다.
부우우웅~
급하게 멀어지는 밴의 뒷모습을 보며 용성우는 알 수 없는 희열감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런 용성우에게 다가온 이리나가 엄지를 척 내밀어보였다.
“첫 주문 무사히 패스한 거 축하해요!”
말미에 헤헷 웃는 이리나의 모습이 그렇게 귀여울 수 없었다.
용성우가 멍하니 이리나를 바라보고 있는데, 곁에 다가온 고중만이 툭 던지듯 물었다.
“근데 너 성우한테 왜 갑자기 존대하냐?”
“네? 어? 아…… 지금은 주방장님이니까?”
이리나 본인도 존댓말을 사용한다는 걸 인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리나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감정의 변화 역시도 인지하지 못했다.
강지한이 자리를 비운 사이 지한 분식 식구들에게 많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 * *
송만대 감독은 여전히 저기압이었다.
어제 밤샘 촬영에 이어 오늘도 촬영 강행군이었다.
스탭들도 배우도 하나같이 지쳐 파김치가 됐다.
보통 같았으면 이 정도쯤에서 하루 정도 쉬고 갈 텐데, 원하는 퀄리티가 나오지 않아 촬영이 지체되니 그럴 수가 없었다.
사실 당장 급한 신은 전부 촬영을 마쳤다.
그런데 여전히 아버지의 떡볶이를 재현해 내, 그것을 먹는 장면은 소화가 되지 않았다.
점심시간이 다가오는 무렵.
사람들의 배꼽시계가 요동을 치는데 누구도 배고프다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너무 지쳐서 허기를 인식 못하는 이들도 있었고, 차가운 분위기에 말을 삼키는 사람도 있었다.
그때였다.
세트장 안으로 선동수가 양손 가득 포장된 떡볶이를 들고 다급히 들어섰다.
이를 본 윤선아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녀가 송만대 감독에게 말했다.
“감독님! 우리 매니저가 사온 떡볶이로 다시 촬영해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