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
Restaurant 93. 우울할 때 먹는 음식
“이게 다 뭡니까?”
“다른 고기집 사장님들이 우리 식당 염탐하러 오면 꼭 김치 맛에 반해서 정체 드러내고 솔직히 묻더라고요. 대체 김치를 어디서 공수했는지.”
“오오!”
“사장님, 대박!”
선동엽의 말에 지한 김치 식구들이 탄성을 터뜨렸다.
“이게 김치 구입처를 나중에라도 알려 달라며 주고 간 명함들입니다.”
선동엽의 손에 들린 명함이 무려 7장이었다.
저기에만 김치를 다 납품해도 그게 얼마인가?
한데 강지한은 선동엽이 신경 쓰였다.
김치를 다른 곳에도 납품하게 되면 상대적으로 이 식당의 손님이 떨어져 나가는 게 아닌가 싶었기 때문.
“명함 전부 드릴 테니 생각 있으시면 연락해 보세요, 사장님.”
“그래도 괜찮겠어요?”
“에이, 사장님네 김치 다른 집에서도 납품 받는다고 무너질 고기집이면 애초에 경쟁력이 없던 겁니다. 우리 식당이 꼭 김치 때문에만 잘되는 건 아니니까요. 그 정도 프라이드는 있습니다! 그러니 걱정 마세요.”
“제가 실례되는 걱정을 했네요. 알겠습니다.”
선동엽은 생각했던 것보다 더 자신의 장사에 확신과 자존심이 있는 사람이었다.
강지한이 명함을 모두 넘겨받았다.
“그럼 맛있게 드세요. 아, 오늘 사장님께서 드시는 건 전부 서비스입니다.”
서비스라는 말에 강지한이 만류하려는 데 문정연이 선수를 쳤다.
“어머나~ 사장님~ 감사해요~ 잘 먹을게요~ 호호홍.”
특유의 간드러지는 콧소리로 화답하니 선동엽이 방긋 웃으며 자리를 떴다.
“하여튼 정연이 공짜 좋아하는 건 알아줘야 한다니까.”
문정연과 일을 하며 언니 동생을 하게 된 진경혜가 핀잔을 줬다.
“뭐 어때요~ 사장님 김치 덕 톡톡히 봤다는데, 이 정도는 괜찮잖아요. 그리고 사람 성의 무시하면 민망해진다고요. 자, 건배~”
문정연의 넉살에 다들 피식 웃고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 * *
5월 21일 월요일.
지한 분식의 분위기는 영 우중충했다.
늘 밝기만 하던 분위기 메이커 이리나가 축 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다들 말은 안 했지만 은근히 그녀를 신경 쓰고 있었다.
특히 용성우는 이리나의 상태가 걱정되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지경이었다.
브레이크 타임이 지나고 다시 손님들이 몰려드는 저녁 시간.
쏟아지는 주문에 강지한은 고중만의 손도 빌려야 했다.
“중만 아저씨 설거지 조금 이따 하시고 김밥부터 두 줄 말아주세요.”
“오케이!”
고중만도 이제 간단한 음식 정도는 충분히 만들 만한 실력이 됐다.
“성우는 김치찌개 하나랑 김치볶음밥 하나 만들고.”
“…….”
“성우야?”
“아, 네!”
“오늘 하루 종일 왜 그래? 점심때도 넉 놓고 있더니. 몸 안 좋으면 일찍 들어가서 쉬어.”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정말 괜찮아?”
“네! ……근데 뭐 하라 그러셨죠?”
“김치찌개랑 김치볶음밥.”
“바로 만들겠습니다!”
씩씩하게 대답하는 용성우를 보며 강지한은 피식 웃었다.
‘녀석. 리나가 많이 신경 쓰이나 보네.’
용성우가 이리나를 좋아하고 있다는 건 두 달 전 최지민의 언질로 인해 알게 됐다.
하지만 강지한은 이를 모른 척하고 있었다.
실상 용성우의 마음은 이리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다 눈치채고 있는 상황.
용성우는 그런 줄도 모르고서 자신의 마음을 잘 감추고 있다 여겼다.
아무튼 강지한은 용성우가 이리나를 정말 많이 좋아한다는 걸 다시 한 번 느꼈다.
‘그건 그렇고.’
강지한의 시선이 이리나에게 향했다.
그녀는 여전히 빠릿빠릿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손님들에게 인사도 잘하고 부탁하는 것도 센스 있게 챙겨줬다.
하지만 평소의 그 활기 넘치는 에너지가 보이지를 않았다.
‘무슨 일 있나.’
용성우의 마음은 알고 있으면서 정작 이리나의 마음은 전혀 모르는 강지한이었다.
* * *
식당에서 퇴근하자마자 용성우는 근처 대형 마트로 향했다.
그는 작은 바구니를 들고 마트 구석구석을 헤집고 다니며 필요한 것들을 담았다.
밀크 초콜릿, 다크 초콜릿, 홍차 티백, 무염 버터, 카카오가루, 생크림, 그리고 호두.
그것들을 사들고 집으로 돌아온 용성우는 손만 씻고 주방 싱크대 앞에 섰다.
아침잠이 없고 밤잠이 많은 부모님은 9시면 늘 곯아떨어진다.
용성우는 두 분이 깨지 않도록 조심조심 손을 놀렸다.
그가 만들려고 하는 것은 호두가 들어간 파베 초콜릿이었다.
파베(pav?)란 프랑스어로 벽돌이라는 뜻이다.
완성된 초콜릿의 모양이나 색감이 벽돌과 비슷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사실 요즘은 흔하게 접할 수 있는 생초콜릿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만드는 법도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용성우가 우선 냄비를 꺼내 생크림과 물엿을 적당량 혼합한 뒤, 홍차 티백을 넣고 따뜻하게 데웠다.
홍차의 맛과 향이 너무 진하게 우러나오면 초콜릿 본연의 풍미를 해칠 수 있기에 적당히 우린 뒤 빼줬다.
그것을 더 작은 볼에 담고 밀크 초콜릿과 다크 초콜릿을 잘게 잘라 넣어가며 중탕했다.
초콜릿이 완전히 녹았을 때 생크림을 조금 더 추가하고 버터도 섞어줬다.
‘쿠앵트로 있었으면 그걸 넣었을 텐데.’
쿠앵트로는 오렌지 향이 나는 술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쉽게 구하기가 힘들었다.
집에서 만들 수도 있지만 숙성 기간이 한 달이나 걸리기에 당장은 무리였다.
용성우가 생각하는 파베 초콜릿은 사실 쿠앵트로를 넣어주는 게 더 좋았다.
하지만 그게 없으니 아쉬운 대로 홍차를 우려낸 것이다.
이제 마지막 단계였다.
초콜릿을 굳힐 모양 틀을 준비해, 유산지를 깔았다.
그 안에 초콜릿을 붇고 잘게 부순 호두를 뿌려주었다.
‘끝.’
용성우가 그것을 냉장고에 넣었다.
그리고 1시간이 지난 후 다시 꺼내보았다.
초콜릿은 틀 안에서 예쁘게 모양이 잡혀 잘 굳어 있었다.
그것을 꺼내 벽돌 모양으로 균일하게 자른 뒤 코코아가루를 묻히는 것으로 완성.
초콜릿을 만드는 솜씨가 예사롭지 않은 것이 많이 해본 깜냥이었다.
용성우는 금방 사랑에 빠지는 사내였다.
그래서 여러 여자들에게 초콜릿을 만들어 사랑을 고백했으나 번번이 차이고 말았다.
성공한 경우도 간혹 있었다.
그러나 오래가지는 못했다.
아무튼 그러는 동안 초콜릿을 만드는 실력이 절로 는 것이다.
물론 오늘은 고백하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니었다.
기운 없어 보이는 이리나에게 힘을 불어넣어 주기 위해 만들었다.
시간을 보니 벌써 자정이 넘어 있었다.
이미 자고 있겠거니 하면서도 혹시 몰라 이리나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리나야, 자?
이 시간에 개인적으로 메시지를 보낸 건 처음이었다.
‘괜히 보냈나? 그냥 내일 식당에서 얘기할 걸 그랬나? 전송된 메시지는 취소 못하겠지?’
이런저런 생각에 가슴만 두근거리던 그때,
-아직! 무슨 일 있어?
이리나에게서 답장이 왔다.
용성우가 후다닥 스마트폰을 들고 빠르게 답장을 보냈다.
-아니 그냥. 뭐 줄 게 있어서 혹시나 하고.
용성우와 이리나의 집은 걸어서 3분 거리였다.
때문에 이 시간에 뭘 준다고 해도 크게 이상할 건 없었다.
-어? 나 생일 멀었는데?ㅋㅋ
-ㅋㅋㅋㅋ생일 때문에 주려는 거 아니었는데. 그럼 생일 선물 대신이라 생각하고 받을래?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잠깐 볼 수 있어?
-나 지금 밖이야.
-어딘데?
-집 근처 걷고 있어. 좀 답답해서.
-그럼 내가 거기로 갈게.
-ㅇㅋ
용성우가 바로 파베초콜릿을 상자에 담아 집을 나섰다.
* * *
이리나는 집 근처 골목에서 롱보드를 타고 있었다.
시원하게 달리는 보드 위에서 이리저리 발을 놀리며 자유자재로 몸을 놀리는 것이 마치 춤을 추는 것만 같았다.
용성우는 그런 이리나를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다.
너무 아름다워 차마 말을 붙이지 못한 채 넋을 놓아 버렸다.
한참 후에야 그를 발견한 이리나가 웃으며 다가왔다.
“뭐야~ 왔으면 불러야지.”
“어? 어, 미안. 하하.”
‘헤헤’ 하고 웃는 용성우가 이리나 앞에서 ‘하하’ 하고 웃었다.
“근데 너 롱보드 잘 탄다.”
“아~ 이거. 댄싱롱보드라고 그냥 취미로 몇 달 전부터 연습하는 중이야.”
“댄싱롱보드? 어쩐지~ 보드 위에서 춤추는 것처럼 보이더라.”
“정말? 나 춤추는 것 같았어?”
이리나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응.”
“와아! 그렇게 보이고 싶어서 연습한 건데, 진짜 보람 있다.”
오늘 처음으로 이리나의 밝은 모습을 보는 용성우였다.
“그래서 그 상자에 든 게 나 줄 선물?”
“아, 응.”
용성우가 상자를 내밀었다.
이리나가 그것을 넘겨받아 뚜껑을 열었다.
그러자 카카오가루를 입은 스무 조각의 예쁜 생초콜릿이 그녀를 반겼다.
“와~ 웬 초콜릿이야?”
“내가 만들었어. 안에 호두도 들었어.”
그 말에 이리나의 눈이 커졌다.
“이걸? 오빠가 만들었다고? 진짜? 왜?”
“너 오늘 너무 기운 없어 보여서. 음……. 다크 초콜릿에는 코르티솔이라는 항우울 성분이 들어 있어서 스트레스 호르몬을 줄여주거든. 그리고 호두에는 비타민E와 오메가3 성분이 많아서 세로토닌 호르몬 분비를 촉진시켜 우울한 기분이 완화되는 효과가 있대.”
쑥스러워진 용성우가 머리를 긁적이며 속사포처럼 내뱉었다.
다시 초콜릿을 바라보는 이리나의 뺨에 살짝 홍조가 어렸다.
입에는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이리나가 초콜릿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살짝 씁쓸한 카카오가루가 스르르 녹으며 쫀득한 파베 초콜릿이 이에 잘려 금세 스르르 녹아 풀어졌다. 그러자 말로 다 포현할 수 없는 진한 달콤함이 혀 위를 가득 수놓았다. 녹아버린 초콜릿 안에서 드러난 호두 알갱이들이 이에 씹히며 진한 고소함을 전해주었다.
“이거 진짜 맛있다.”
이리나의 입에서 절로 그런 말이 흘러나왔다.
“다행이다.”
용성우가 안도의 숨을 내쉬는데 갑자기 이리나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놀란 그가 어버버 하며 물러나려는데 벌어진 그의 입안으로 초콜릿 하나가 쏙 들어왔다.
“헙.”
세상에 이리나가 초콜릿을 들어 직접 입에 넣어주었다.
혹여라도 초콜릿이 입 밖으로 튀어나갈까 봐 얼른 입을 다무는 용성우에게 이리나가 물었다.
“달콤하지?”
용성우는 그저 황망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이리나가 밝게 웃었다.
“지금 내 기분이 꼭 그래. 달콤해. 고마워, 오빠.”
“다, 다 먹으면 얘기해! 내가 또 만들어 줄게.”
“사람이 은혜 갚을 줄 알아야지. 다음엔 내가 만들어 줄게.”
“진짜?”
“응. 후아아~ 보드도 타고 오빠도 보고 초콜릿 선물까지 받았더니 기분이 좀 나아졌다. 히히. 나 그만 들어가 볼게. 초콜릿 잘 먹을게. 진짜 고마워!”
“어어, 그래. 조심히 들어가, 리나야.”
“내일 봐!”
“응.”
이리나가 손을 흔들며 단독 빌라 정문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눈앞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어 주던 용성우가 두 주먹을 꽉 쥐고 파이팅 자세를 취했다.
유난히 달이 아름다운 밤이었다.
* * *
강지한은 설탕이와 함께 귀가한 뒤 자정이 넘어서까지 요리책을 읽으며 공부하는 중이었다.
“흐아암~ 그만 자야겠다.”
기지개를 켠 강지한이 책을 덮었다.
책상의 한편에는 선동엽에게 받았던 고기집 사장님들의 명함이 놓여 있었다.
‘이건 내일 미옥 아주머니 드리고 알아서 하시라 해야겠다. 계약할 때만 내가 나서면 되겠지. 아, 김치전골집도 들러야겠네.’
요 근래 바빠서 김치전골집에 들르지 못했다.
때문에 나흘 간 쌓인 만족도 포인트를 아직 수거 못한 상태였다.
“설탕아~ 이제 자자.”
강지한이 설탕이를 불렀다.
그런데 한참 전에 거실로 나간 녀석이 묵묵부답이었다.
“설탕아?”
강지한이 다시 한 번 설탕이를 부르는 순간,
타탓! 토닥. 토다다다다다!
높이 점프 했다가 착지하는 소리에 이어 마구 달려오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이윽고 설탕이가 입에 작은 상자 하나를 물고 나타났다.
물어오기 스킬로 또 선물을 가져온 것이다.
“우리 복덩이가 또?”
왕! 헥헥헥.
꼬리를 팽팽 돌리며 설탕이가 선물을 내려놓았다.
그러자 선물의 뚜껑이 열리며 메시지가 나타났다.
[축하합니다! 설탕이가 아이템을 물어왔습니다. ‘퀘스트’를 얻었습니다.]
[퀘스트-사람들에게 음식을 먹여 건강 수치를 80 이상 수집하세요. 0/80]
[퀘스트 보상: 호칭 ‘건강 요리사’]
[‘건강 요리사’ 호칭 사용 시, 음식을 먹는 손님들의 건강상태에 따라 그에게 필요한 영양소들이 2배로 섭취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