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 하는 식당-92화 (92/330)

# 92

Restaurant 91. Black & Bleu

레이먼 박의 얘기에 한돈선과 최현식이 의아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신일중도 의아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런 스테이크는 본 적이 없는데…….’

레이먼 박은 강지한에게 물었다.

“블랙 앤 블루. 맞죠?”

“네. 맞습니다.”

블랙 앤 블루(Black & Bleu).

겉을 바싹 태우고 속은 익히지 않아 육즙을 그대로 살리는 조리법이다.

스테이크는 구워진 정도에 따라 블루(Bleu), 레어(Rare), 미디움 레어(Medium-Rare), 미디움(Medium), 미디움 웰(Medium-Well), 웰 던(Well Done)의 여섯 가지 단계로 나뉜다.

즉 블랙 앤 블루란, 검게 태운 겉면(Black)과 거의 익지 않은 속(Bleu)을 뜻하는 것이다.

한국에 있는 대부분의 스테이크 전문점은 익힘 정도를 레어부터 표기해 놓는다.

한국 사람들이 블루 스테이크를 그다지 선호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그 이전에 전혀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다.

그러니 이제 스물세 살인 신일중 역시 스테이크의 굽기 단계에 블루가 있다는 걸 알 리 없었다.

그런 상세한 부분에 대해서도 알려주는 호텔조리학과를 나왔다면 얘기가 다르겠지만, 그는 대학에 진학하지 않았다.

아무튼 블루도 모르는 상황이니 블랙 앤 블루라는 굽기법이 있다는 건 금시초문이었다.

블랙 앤 블루는 미국의 몇몇 유명 스테이크 식당에서 시그니처처럼 자랑하는 굽기법이었다.

뉴욕 번화가에 10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하는 한 스테이크 식당도 바로 이 블랙 앤 블루 기법을 활용해 스테이크를 구워낸다.

비주얼은 겉이 바싹 탄 것처럼 충격적이지만 맛은 가히 일품이다.

강지한은 제이미 램지의 지식 안에서 바로 이것을 캐치하고 재현한 것이다.

스테이크가 조금 더 탔거나 속이 너무 익어버렸으면 시도하지 못했을 조리법이었다.

한데 프라이팬의 온도가 상당히 높아진 상황에서 고기를 올려 겉만 바짝 타고 속은 익지 않은 덕에 블랙 앤 블루로 조리할 수가 있었다.

“블랙 앤 블루라. 그런 조리법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

한돈선의 말이었다.

최현식이 그에 동의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두 사람 역시 각자의 분야에서는 대가라 할 수 있었고 그 외적인 분야에서도 적정선 이상의 지식은 가지고 있었으나 블랙 앤 블루는 생소했다.

다른 심사위원 두 명이 그제야 포크를 들고 강지한이 구운 스테이크를 맛보았다.

강지한은 두 사람의 입에서도 필시 호평이 나올 것이라 믿었다.

자신할 수 있는 이유는 그의 눈에 선명히 떠오른 요리의 등급 덕분이었다.

[강지한의 대단한 안심 스테이크]

요리 등급: LV5

-신일중의 실수로 겉이 탄 스테이크를 블랙 앤 블루의 기법을 이용, 기사회생시켰다. 겉은 바삭하고 속엔 육즙이 꽉 차 있다. 완벽한 블랙 앤 블루라고는 할 수 없으나 일정 수준 이상의 스테이크임은 확실하다.

예상대로 스테이크를 씹는 심사위원들의 표정이 좋았다.

비주얼과 달리 스테이크에서 크게 탄맛은 느껴지지 않았다.

대신 환상적인 육즙의 퍼레이드가 입안 가득 벌어졌다.

“이건…… 그야말로 육즙의 축제라고 할 수 있겠네요. 호호.”

조금 전까지 혹평을 했던 한돈선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뱉었다.

최현식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으나 흐뭇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 만큼 강지한의 스테이크가 좋았던 것.

사실 강지한 본인도 이렇게까지 스테이크가 잘 구워지리라고는 생각 못했다.

과하게 타버린 부위를 잘라내고 다른 요리로 방향을 틀까 싶었지만 그러기엔 남은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그렇다고 스테이크를 빼고 내놓기엔 카르파치오가 너무 초라했다.

질 좋은 고기만 있으면 누구든 5분이면 만들 수 있는 요리였기에 심사에서 단일 메뉴로 승부하기는 힘들었다.

그때 제이미 램지의 지식과 줄곧 해온 요리 연습 속에서 답을 찾아냈다.

그동안 양식을 꾸준히 공부해 온 그였다.

스테이크를 굽는 것도 열심히 연습해 왔다.

블랙 앤 블루 역시 몇 번 시도해 본 적이 있었다.

하나 만족스럽게 구워지는 경우가 반, 실패하는 경우가 반이었다.

물론 전자의 경우도 블랙 앤 블루를 완벽 재현한 것은 아니었다. 어느 정도 흉내를 냈다고 하는 게 맞았다.

때문에 오늘 발휘한 기지는 실상 도박을 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운이 따라주었다.

그 어느 때보다 만족스럽게 구워진 것이다.

“크림 스피나치와 매쉬 포테이토가 아주 잘 어울리네요. 스프는 스테이크와 함께 내놓은 것인가요?”

최현식이 물었다.

“네. 스테이크와 함께 드시면 밸런스가 괜찮을 겁니다.”

“안심 스테이크와 스프가 한 세트고 비프 카르파치오는 단독으로 내놓은 것이군요.”

“맞습니다.”

스테이크를 맛본 심사위원들은 토마토야채스프와 비프 카르파치오도 시식했다.

두 요리 모두 요리 등급이 레벨 5였다.

“음. 좋군요.”

“맛있네요.”

모든 음식의 시식을 마치고 난 뒤, 레이먼 박이 다른 두 명의 심사위원에게 물었다.

“어떤가요? 아직도 강지한 씨와 신일중 씨의 음식이 탈락 후보에 남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세요?”

한돈선이 난감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제가 배틀 셰프를 촬영하면서 심사를 번복하게 될 줄은 몰랐네요. 두 분은 탈락 후보가 아니라 우승 후보에 이름을 올려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최현식 셰프님의 의견은 어떠신지요?”

“같은 생각입니다.”

두 심사위원과 의견의 합일을 본 레이먼 박이 눈앞에 선 두 명의 지원자에게 박수를 쳐주었다.

“지옥에서 천국으로 올라가신 걸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가, 감사합니다……!”

강지한과 신일중이 꾸벅 고개를 숙인 뒤 서로를 바라보았다.

신일중은 배틀 셰프를 진행하며 그동안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표정으로 강지한에게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긴장해서 음식을 망친 자신 때문에 다 떨어질 판이었다.

물론 강지한은 탈락면제권이 있었으니 이러나저러나 상관이 없었을 터.

틀림없이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강지한은 포기하지 않았고 판세를 뒤집었다.

그의 두 눈에 담긴 강지한의 모습에서 후광이 비추는 것만 같았다.

심사위원들이 다른 지원자들의 음식을 맛보고 독설을 날리고 있는데도 그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신일중의 모든 정신은 오로지 강지한에게만 집중되어 있었다.

탈락 후보자들에게 벼락같은 시간이 지나갔다.

그리고 강지한, 신일중을 제외한 네 팀의 탈락 후보 중 세 팀, 여섯 명이 앞치마를 벗어야 했다.

이제는 우승자를 가려야 할 때.

강지한과 신일중은 단상 앞에 남았고 겨우 탈락을 면한 두 지원자가 자리로 돌아갔다.

“그럼 우승 후보 팀을 호명하겠습니다. 강지영 씨, 이만우 씨.”

한돈선이 장내를 둘러보며 말했다.

“예스!”

“그렇지!”

강지영과 이만우가 음식을 들고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 도근한 씨, 염동화 씨.”

“음!”

거대한 덩치에 황소 같은 눈을 가진 염동화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반면 강지한의 위기에 모든 신경을 집중하고 있다가 진이 빠져버린 도근한은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뭐합니까, 근한 씨! 나갑시다!”

“아, 네.”

염동화가 도근한을 채근하며 함께 걸어 나갔다.

한돈선이 단상 아래의 여섯 사람을 훑어보며 말했다.

“우승 후보는 여기 계시는 세 팀입니다. 한 팀의 음식은 이미 맛보았으니 다른 두 팀의 음식을 먹어보도록 하겠어요.”

심사위원들은 단상에서 내려와 다른 팀의 음식을 시식했다.

강지영과 이만우의 요리는 찹스테이크와 시즈뉴뤄우였다.

시즈뉴뤄우는 얇게 썬 소안심을 피망, 채두와 함께 볶아내는 중식 요리로 매콤짭짤하다.

두 가지 요리 모두 심사위원들에게 호평을 받았다.

그리고 드디어 도근한과 염동화의 차례가 왔다.

도근한은 강지한처럼 안심 스테이크를 선보였다.

염동화는 소고기안심 짜장면을 만들었다.

우선 소고기안심 짜장면부터 맛본 심사위원들의 일괄된 평은 짜장면 고유의 특징을 잡아냈음에도 너무 자극적이지 않았고, 안심의 맛과 육질이 상하지 않도록 잘 살려낸 것이 대단하다고 했다.

이제 남은 건 도근한의 안심 스테이크뿐.

레이먼 박이 우승 후보로 나선 애제자를 뿌듯하게 바라보며 스테이크로 시선을 돌렸다.

접시에 담긴 안심 스테이크의 가니쉬는 단출했다.

겉보기에는 특별할 것 없는 것 같은 갈린 와사비 한 덩이가 끝이었다.

스테이크에 곁들일 소스도 없었다.

도근한이 특제 양념으로 시즈닝을 하고 구워낸 안심 스테이크와 와사비가 전부였다.

“어디.”

레이먼 박이 스테이크를 살폈다.

그때 강지한의 시선도 도근한의 스테이크로 향했다.

[도근한의 대단한 안심 스테이크]

요리 등급: LV5

-미디움 레어의 정석이라 할 만큼 잘 구워진 스테이크. 특제 시즈닝으로 간을 완벽하게 했다. 흠잡을 데가 없으나 이것이 완성형은 아니다.

요리 등급은 강지한의 스테이크와 같았다.

하지만 비주얼은 완전히 달랐다.

강지한의 스테이크가 화려함의 극치라면 도근한의 스테이크는 제대로 심플했다.

그는 오로지 스테이크 하나만으로 승부를 걸었다.

그만큼 스테이크에 자신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건 일반 와사비가 아닌 것 같은데.”

레이먼 박이 물었다.

“유자청을 섞었습니다.”

“고기에 얹어서 곁들이면 되는 건가요?”

“제가 해드리겠습니다.”

대답을 한 도근한이 와사비를 스테이크 위에 슥슥 펴 발랐다.

그때였다.

강지한의 눈에 비치던 도근한의 스테이크 정보가 바뀌었다.

[도근한의 환상적인 안심 스테이크]

요리 등급: LV6

-미디움 레어의 정석이라 할 만큼 잘 구워진 스테이크. 특제 시즈닝으로 간을 완벽하게 했다. 유자청을 섞은 와사비가 곁들여지며 도근한이 추구하는 맛의 완성형이 되었다.

‘레벨이 올랐어?’

강지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심사위원들이 동시에 도근한의 스테이크를 맛보았다.

“으음~! 딜리셔스.”

레이먼 박이 뭔가에 홀려 버린 듯한 얼굴로 감탄을 뱉었다.

“이건 정말 맛있군요. 스테이크가 뭔지 제대로 보여주네요, 도근한 씨.”

한돈선이 도근한의 스테이크를 극찬했다.

“오늘 먹어본 음식 중에 가장 좋았습니다.”

다른 심사위원들보다 칭찬에 인색한 최현식도 한마디를 내놓았다.

“두 분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도근한과 염동화가 동시에 소리쳤다.

이제 모든 시식이 끝났다.

심사위원들은 3라운드의 우승자를 가려내기 위해 단상 위로 올라가 잠시 회의를 나눴다.

그러는 동안 도근한의 가슴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심사위원들의 반응에서 어쩌면 오늘은 기대해 봐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예감이 좋았다.

이윽고 회의를 마친 심사위원들이 우승 후보 세 팀 앞에 나란히 섰다.

“그럼 발표하겠습니다. 우승팀은.”

레이먼 박이 대표로 입을 열었다.

그의 시선이 우에서 좌로 천천히 움직이다가 도근한에게 멈췄다.

“도근한 씨, 염동화 씨. 축하드립니다. 3라운드에서 우승하셨습니다. 두 분께는 다음 라운드 탈락면제권이 주어집니다.”

“우와아아!”

염동화가 기함을 터뜨리며 도근한을 와락 끌어안았다.

도근한은 지금 이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꿈이라도 꾸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말로 다 헤아릴 수 없는 감동과 희열이 파도처럼 몰려와 그의 가슴에 몰아쳤다.

강지한을 따라잡기 위해 노력했던 3주간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그 모든 것들은 눈물이 되어 터져 나왔다.

울고 있는 그에게 레이먼 박이 축하와 격려의 말을 건넸다.

“정말 맛있는 스테이크였습니다. 고생했어요. 아, 염동화 씨의 짜장면도 맛있었어요.”

녹화는 그렇게 끝이 났다.

도근한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흘러내리는 눈물을 연신 닦아냈다. 지원자들은 그런 그에게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내주었다.

강지한 역시 마찬가지였다.

도근한과 그는 비록 좋은 사이라고 할 수 없는 관계였으나 모든 것을 떠나 요리 하나만으로 승부를 한 지금만큼은 서로의 열정이 감동으로 전해졌다.

눈물을 훔치는 도근한과 박수를 치는 강지한의 시선이 마주쳤다.

순간 둘 사이에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도근한은 눈물이 쏙 들어갔고 강지한은 박수를 치다 말고 헛기침을 흘리며 세트장을 떠났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