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
Restaurant 88. 강지한의 선택은?
한돈선의 눈동자가 주체 못할 만큼 심하게 떨려왔다.
세트 밖에서 이를 지켜보던 노영철 피디가 한돈선 담당 카메라에게 지시했다.
“바짝 당겨!”
모니터에 비친 한돈선의 얼굴이 클로즈업 됐다.
크게 떠져서 파르르 떨리는 그의 눈과 경직된 얼굴이 고스란히 담겼다.
무슨 연유인지는 모르겠으나 한돈선이 저런 표정을 보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분명 깊은 사연이 있다.’
노영철의 날카로운 감이 아니더라도 그 표정을 보는 사람들은 전부 같은 생각을 할 만했다.
노영철은 한돈선이 그 이유를 말해주기를 원했으나 지금은 심사를 하는 자리기에 사적인 사연을 내어놓긴 무리였다.
결국 그는 평정을 되찾았다.
그 사이 시식을 마친 레이먼 박과 최현식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상실운두병이라…… 낯선 듯 패밀리어(familiar:친숙)한 트레디셔널 코리안 푸드네요. 화려하지 않고 담백하면서 묵직한 맛과 풍미가 베리 임프레시브(very impressive:매우 인상적)해요.”
레이먼 박이 대단히 만족스러워했다.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최현식도 짧은 한마디로 평가를 마쳤다.
그러자 지원자들의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강지한은 심사위원들에게 인사를 건넨 뒤, 접시를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풍미선 씨. 음식 들고 앞으로 나오세요.”
레이먼 박이 다음 출연자를 호명할 때까지도 한돈선의 시선은 강지한을 향해 있었다.
이를 의식한 강지한이 한돈선을 마주 바라봤다.
그제야 한돈선은 풍미선에게 눈을 돌렸다.
‘왜 그러시지?’
멀리서 보기에도 심상찮은 눈빛이었다.
한데 그 속에 담긴 의미를 강지한은 알 수가 없었다.
* * *
심사위원들이 모든 지원자들의 음식을 시식했다.
그중 가장 호평을 받은 것은 강지한의 상실운두병, 도근한의 뇨키 알라 로마나, 강지영의 생면크림파스타였다.
“세 분의 지원자께서는 앞으로 나오세요.”
한돈선이 우승 후부 세 명을 불러 세웠다.
나란히 선 세 사람이 한 앵글에 잡히자 노영철이 속으로 감탄을 터뜨렸다.
‘크으, 좋다.’
강지한의 외모야 첫 화부터 화제가 되었으니 말할 것도 없는 데다 도근한 역시 경직되었던 초반에 비해 인상이 많이 풀리며 감추어져 있던 미모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강지영은 애초부터 여자 출연자들 중 가장 예뻤다.
스스로 주부라는 걸 밝히지 않았다면 모르고 넘어갔을 정도였다.
좀 푼수기가 있긴 했지만 동안에 관리 잘된 늘씬한 몸매에 탱탱한 피부가 스무 살 중반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과거 미스 춘향 진 출신이라는 대단한 이력이 있는 만큼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 때문에도 처음부터 다른 출연자들과는 달리 카메라 앞에서도 경직되지 않았던 강지영이다.
아무튼 비주얼로 제법 괜찮은 편에 속하는 세 명이 나란히 카메라에 잡히니 그림이 좋았다.
‘지영 씨가 주부만 아니면 로맨스 같은 시나리오도 만들어 볼 수 있었을 텐데.’
그 부분이 조금 아쉬운 노영철이었다. 그가 입맛을 다실 때, 드디어 베네핏 배틀의 1위가 정해졌다.
“이번 베네핏 배틀의 우승자는 강지한 씨입니다.”
이변이 없었다.
강지한은 베네핏 배틀을 3연속으로 우승했다.
배틀 셰프가 벤치마킹을 한 미국의 프로그램 탑 셰프에서도 이런 경우는 단 한 번밖에 없었다.
지난 해, 탑 셰프 아메리카 시즌 7의 요리 천재라 불리던 ‘로완 체셔(Rowan Cheshire)’ 이후 처음이었다.
물론 이미 이전 시즌으로 명성과 인지도를 하늘만큼 쌓아둔 만큼 기라성 같은 솜씨의 지원자들이 대결을 벌이는 탑 셰프와 배틀 셰프는 그레이드 자체가 달랐다.
때문에 같은 선상에 놓고 비교할 바는 안 되지만 그래도 대단하다고 할 수 있었다.
“도근한 씨,”
레이먼 박이 도근한을 불렀다.
배틀 셰프에 와서는 늘 도근한의 스승이기보다 심사위원이라는 엄중한 가면을 쓰는 그였다.
“네.”
“도근한 씨의 뇨키도 상당한 수준이었습니다. 반죽을 조금만 더 보일(boil:끓이다)해서 조렸다면 좋았을 것 같았다는 생각이 드네요. 다음번에 더 분발하세요.”
뇨키 알라 로마나는 냄비에 밀가루와 우유를 붓고 끓여 걸쭉하게 조려 반죽을 만든다.
레이먼 박은 조리는 시간이 아주 약간 부족했다고 지적했다.
“감사합니다.”
강지한을 제외한 두 명의 참가자가 자리로 돌아갔다.
“이번에도 강지한 씨가 베네핏을 가져가게 되었는데요. 강지한 씨. 기분이 어떠십니까?”
최현식이 물었다.
강지한은 얼떨떨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런 유행어가 있더라고요. 이거 실화냐?”
그 말에 사람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좋습니다. 바로 3라운드의 베네핏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최현식이 뒤에 놓아둔 패널을 들어 올렸다.
거기엔 각 부위별로 명칭이 적힌 소 한 마리가 그러져 있었다.
“강지한 씨에게 주어진 베네핏은 이겁니다. 오늘 페일 배틀의 요리 주제는 소입니다. 강지한 씨는 본인이 원하는 소의 부위를 택해서 주재료로 요리하게 될 겁니다. 단, 다른 모든 분들 역시 강지한 씨가 택한 부위로 요리를 해야 합니다.”
그 말에 지원자들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강지한은 2라운드에서 재료우선권을 얻고서도 닭의 오돌뼈와 목을 골랐었다.
이번에는 고환이나 성기 같은 걸 고르는 게 아닌가 지원자들이 조마조마했다.
“강지한 씨 선택했습니까?”
“네.”
“그럼 선택한 부위를 말씀하지 마시고 심사위원들에게만 알려주시면 되겠습니다.”
패널을 든 최현식을 비롯, 세 명의 심사위원이 강지한에게 귀를 가져갔다.
그러자 강지한이 그들에게 낮은 음성으로 속삭였다.
강지한의 선택을 듣고 난 심사위원들의 얼굴에 의미심장한 표정이 자리했다.
이를 지켜보는 지원자들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강지한 씨, 정말 그 부위로 하실 건가요?”
“네.”
“2라운드 때부터 참 알 수 없는 선택만 골라서 하시는군요.”
최현식의 말에 강지한은 미소로 답했다.
“알겠습니다. 한 번 정한 부위는 바꿀 수 없습니다. 아울러 다른 지원자들도 강지한 씨와 같은 재료로 요리를 하게 될 겁니다.”
“네.”
레이먼 박이 웃음기 어린 음성을 흘렸다.
“정말 알 수 없는 사람이네요, 강지한 씨.”
강지한의 선택을 알지 못하는 지원자들의 목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저 인간, 고환이나 성기 같은 걸 고른 것 같았다.
한편 지원자들과 관리 무대 밖에서 모니터와 음향을 체크하고 있는 노영철 피디는 강지한이 무엇을 선택했는지 알 수 있었다.
‘늘 예상을 빗나가네. 아주 재밌어. 그리고 우리 셰프님들 멘트 작살나시고. 역시 방송을 좀 해본 분들다워. 괜히 스타 셰프가 아니지.’
최현식과 레이먼 박이 한마디씩 하고 나서 한돈선이 앞으로 나섰다.
“강지한 씨가 어떤 부위기를 선택했는지는 페일 배틀에서 직접 확인하실 수 있을 거예요. 강지한 씨, 자리로 돌아가세요.”
그때 노영철이 입을 열었다.
“잠깐 쉬었다 가겠습니다!”
페일 배틀을 위해 촬영장을 재정비하기 위해 휴식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 시간 동안 출연자들의 인터뷰를 땄다.
가장 먼저 인터뷰를 하기 위해 불려온 건 한돈선이었다.
천막을 둘러 독립된 공간에는 의자 하나와 카메라 하나, 그리고 조명만 덜렁 놓여 있었다.
한돈선이 의자에 앉아 노영철은 이런저런 질문을 던지다가 한참 전부터 그에게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그나저나 한 대가님, 베네핏 배틀에서 강지한 씨의 음식을 보고 많이 놀란 것 같던데요.”
“아……. 네, 그랬지요. 호호.”
한돈선이 여인처럼 입을 가리고 웃었다.
“어떤 연유에서 그랬던 건지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에 한돈선은 잠시 우수에 잠긴 표정이 되었다.
한참 동안 무언가를 추억하듯 말이 없던 그의 입이 느릿느릿 열렸다.
“제가 강지한 씨의 음식에서 느낀 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손맛이었어요.”
노영철이 놀라서 크게 물었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말 그대로예요. 강지한 씨의 음식에서 돌아가신 아버지의 손맛이 났어요. 그 손맛은 곧 제 손맛이기도 하죠. 대대로 물려받은 기술과 레시피가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강지한 씨의 상실운두병이 한 대가님의 가문에 대대로 물려 내려오는 상실운두병의 맛과 같다는 것인가요?”
“완전히 같다고는 할 수 없지만 상당히 비슷해요. 마치 제 아버지께 사사한 제자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말이죠. 호호호.”
이야기가 이런 쪽으로 튈 것이라고는 짐작도 못했던 노영철이었다.
갈수록 배틀 셰프에 도움이 될 곁가지들이 무럭무럭 자라나고 있었다.
“많이 놀라셨겠네요.”
“놀란 정도겠어요? 혹 우리 아버지와 연이 있느냐 물어볼 뻔했습니다.”
“정말 연이 있는 걸지도 모르잖습니까?”
한돈선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우리 가문은 대대로 한 명의 후계자만을 키워냈습니다. 일인전승이라는 것이지요.”
“그럼 이 상황을 어찌 설명해야 할까요?”
“제 조부님께서는 한식의 기원과 원형을 중시하셨죠. 그 정신은 아버지께로 이어져 저한테까지 물려 내려왔어요. 그러니 만약 강지한 씨가 그 맛을 재현했다면 한식의 원형에 대해 스스로 그만큼 공부를 많이 했다는 얘기가 되겠죠.”
“학구파라는 것이군요.”
“아직 서른도 안 된 나이에 그만큼의 지식과 솜씨를 겸하고 있다면 학구파라는 말로는 모자라죠. 강지한 씨는 천재예요. 매 라운드마다 사람을 어찌나 놀래는지 경탄스러울 정도예요.”
한돈선의 말은 방송이기에 과장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진심으로 그리 느끼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한돈선의 인터뷰가 끝났다.
이어 다른 심사위원들의 인터뷰를 거친 후 지원자들의 개인 인터뷰가 시작됐다.
인터뷰는 가나다라 순으로 진행되기에 강지한은 초반부에 인터뷰를 하게 됐다.
“안녕하세요, 강지한 씨.”
노영철이 싱글벙글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그에게는 강지한이 복덩이나 다름없으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네, 안녕하세요.”
“연일 화제의 중심에 서 계신데, 기분이 어떠세요?”
“부담스럽긴 한데 나쁘지는 않네요.”
“이번 베네핏 배틀에서도 심사위원들이 전혀 예상 못한 재료를 선택하셨는데요.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그게…… 예상 못할만한 재료였나요?”
“강지한 씨께서 전 라운드에서 저지른 전적을 본다면 충분히요.”
그 말에 강지한이 멋쩍게 웃었다.
“그럴 수 있겠네요. 뭐……. 특별한 이유는 없어요. 그냥 제가 가장 잘 요리할 수 있을 것 같은 부위를 택한 것뿐입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페일 배틀에서도 좋은 활약 기대할게요.”
“감사합니다.”
* * *
모든 인터뷰가 끝났다.
그러는 동안 배틀 셰프 키친은 페일 배틀을 위한 무대로 재정비되었다.
녹화가 다시 들어갔다.
키친에 놓인 조리대는 15개.
지원자는 30명인데 조리대의 수가 반으로 줄어 있었다.
조리대 위에는 강지한이 택한 부위가 접시에 담겨 디쉬 커버로 감추어져 있다.
눈치 있는 지원자들은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바로 알아챘고, 낯빛이 어두워졌다.
“배틀 셰프 본선 3라운드. 페일 배틀을 시작하겠습니다.”
한돈선이 페일 배틀의 시작을 알렸다.
모든 지원자들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이번 페일 배틀은 2인 1조가 한 팀이 되어, 체인지 배틀로 진행되며 총 세 팀이 탈락하게 됩니다.”
2인 1조의 체인지 배틀이란 룰이 공개되자 지원자들은 단체로 혼란에 빠졌다.
혼자서 최선을 다해 음식을 만들어도 힘든데 누군가와 함께 손발을 맞춰야 한다니.
그것도 사전 합의 없이 즉석에서 팀을 짜는 형태니 더욱 막막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강지한이 선택한 재료가 무엇인지 알 수 없으니 답답한 노릇이었다.
한데 그 답답함을 한돈선이 비로소 해결해 주었다.
“지금 제 앞에 놓인 테이블에는 접시 하나가 놓여 있습니다. 접시 위에 있는 디 디쉬 커버를 치우면 강지한 씨가 선택한 부위가 나타날 겁니다. 그 부위는 15개의 테이블 위에 똑같이 놓여 있습니다. 그럼 강지한 씨가 어떤 부위를 선택했는지 확인해 볼까요?”
한돈선이 말미에 디쉬 커버를 들어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