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
Restaurant 86. 배틀 셰프는 사랑을 타고
이틀이라는 시간이 바람처럼 지나갔다.
식당에서 행패를 놓았던 김영태 일당은 진상명이 전화를 넣은 당일로 경찰조사를 받게 됐다.
그들에게는 영업방해죄와 사주 범죄가 성립되는 데다 과거 여러 번의 경범죄 및 중범죄의 전적으로 무거운 처벌이 불가피하게 됐다.
아울러 민정욱 의원은 과거 수상한 흔적들에 대해 압박 세무조사가 들어가는 한편, 범죄를 사주한 혐의로 경찰에 소환됐다.
그 누구도 위기에 처한 민정욱에게 손을 내밀지 않았다.
평소 형님, 동생하며 지내던 정재계 사람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등을 돌리고 연락을 끊었다.
완전히 줄 끊어진 연이 되어버린 민정욱은 외로운 섬에 고립되고 말았다.
경찰은 민정욱과 김영태 일당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사주 범죄가 이번이 처음이 아님을 밝혀내고 더 있을지 모를 다른 범죄에 대해서도 수사망을 넓혔다.
창창할 것 같던 민정욱의 앞날엔 어두운 먹구름만 가득했다.
* * *
금요일 밤.
강지한은 예소린을 맞을 준비로 바빴다.
그녀는 카페를 정리하고 강아지들을 집에 데려다 놓은 뒤 다시 나오겠다고 했다.
강지한은 먼저 귀가해서 예소린과 함께 먹을 음식들을 만들어 나갔다.
우선 오늘을 위해 미리 사두었던 소고기 안심, 그중에서도 샤토브리앙이라 불리는 최고급 부위로 스테이크를 만들었다.
양식 요리 장인 제이미 램지의 지식과 그간 공부해 온 것을 토대로 스테이크를 맛있게 구웠다.겉은 바삭하게 익은 데 반해 속은 미디움 레어로 익어 육즙을 꽉 잡았다.
구울 때 허브와 마늘을 첨가해 향도 좋았다.
가니쉬는 버터에 볶은 채소에 소금, 후추로 시즈닝했고 소스는 레드와인 소스였다.
스테이크 하나로는 허전해서 일전에 만들어 먹었던 명란냉파스타를 추가로 만들었다.
“이 정도면 됐으려나.”
한데 그래도 뭔가가 좀 허전했다.
그게 무언지 곰곰이 생각하던 강지한이 손가락을 딱 튕겼다.
“샐러드.”
강지한은 냉장고에서 시저 샐러드를 만드는 데 필요한 재료들을 꺼냈다.
가장 먼저 그는 냄비에 물을 받아 달걀 세 알과 소금, 식초를 넣고 불을 당긴 가스레인지 위에 올렸다.
그건 그대로 놓아두고 냉장고에 있던 양상추를 꺼내 한 입 크기로 잘라서 얼음물에 담가두었다. 이렇게 하면 한층 더 아삭거리며 씹는 식감이 좋아진다.
“로메인 상추가 있었으면 더 좋았겠지만.”
로메인 상추는 양상차보다 잎이 두껍다. 해서 식감이 더욱 좋다.
다음으로는 방울토마토를 이등분해서 따로 두고 드레싱을 만들었다.
계란을 노른자만 걸러서 레몬즙을 뿌리고 홀그레인 머스터드를 섞어 핸드블렌더로 믹스했다. 중간중간 올리브 오일을 조금씩 섞어주며 모든 재료가 잘 섞이면 소금과 후추, 파르메산 치즈, 그리고 우스터소스를 넣어 한 번 더 섞는 것으로 끝.
‘크루통도 만들면 좋은데.’
크루통은 식빵을 먹기 좋은 사이즈로 자른 뒤 올리브 오일을 발라 바삭하게 구워준 걸 말한다.
하지만 식빵이 없는 관계로 패스.
대신 베이컨을 크리스피하게 구워 크루통의 식감을 대신하기로 했다.
그때쯤 잘 삶아진 계란을 꺼내 차가운 물에 식혔다. 바로 껍질을 까면 잘 까지지도 않거니와 흰자가 껍질과 함께 뜯기며 손실이 크고 보기에도 좋지 않기 때문이다.
계란이 식는 동안 아보카도를 꺼내 썰고 블루베리도 한 줌 정도 덜어주었다.
충분히 식은 계란은 껍질을 벗겨 먹기 좋게 썰어냈다.
이제 샐러드용 접시에 양상추를 깔고 그 위로 방울토마토, 블루베리, 아보카도, 삶은 계란, 베이컨을 보기 좋게 쌓은 뒤 드레싱을 뿌리는 것으로 완성.
“스테이크, 파스타, 샐러드. 그리고 맥주와 소주. 음료수.”
이 정도면 대충 구색은 갖췄다고 할 수 있었다.
한 상이 멋지게 차려졌을 때.
똑똑.
“지한 씨~ 문 열렸으면 들어갈게요.”
타이밍 좋게도 예소린이 도착했다.
“네, 들어오세요.”
예소린은 하얀 프릴 원피스에 하늘색 숄 카디건을 걸친 차림으로 강지한의 집을 방문했다.
그녀의 손엔 강지한에게 줄 집들이 선물이 들려 있었다.
“와~ 지한 씨, 집 넓네요?”
“그게 가장 큰 장점이죠.”
“아, 이거 선물이에요.”
예소린이 들고 있던 선물을 건네주었다.
포장지에 둘러싸인 그것은 직사각형 모양으로 제법 묵직했다.
“소린 씨, 이거 혹시?”
“풀어보세요.”
강지한이 포장지를 뜯었다.
그러자 때깔 좋은 원목 도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를 바라보는 강지한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와! 우리 집에 있는 도마랑은 비교도 안 될 만큼 좋은데요?”
“그래 봬도 제법 비싼 거예요. 이태리에서 공수해 온 명품 도마거든요.”
“어쩐지.”
강지한이 도마를 이리저리 돌려보더니 손으로 구석구석 만지고 쓰다듬었다.
아이처럼 좋아하는 그 모습을 보며 예소린이 키득댔다.
“정말 좋은가 봐요. 역시 요리사는 요리사네요.”
“아…… 하하.”
사실 몇 달 전의 강지한이었다면 명품 도마가 이렇게까지 반갑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이런 요리 도구들이 진심으로 좋았다.
비싸고 고급스러운 것을 볼 때면 가슴까지 두근거릴 정도였다.
“잘 쓸게요, 소린 씨.”
“제발 그래 주세요.”
강지한이 선물을 싱크대 위에 잘 놓아두었다.
예소린은 그제야 거실에 놓인 상 위의 음식들을 발견했다.
“와~ 이게 다 뭐예요?”
“소린 씨 집들이 오신다기에 없는 실력 좀 발휘해 봤어요.”
“없는 실력이라니요? 어마어마한 걸요! 진짜 맛있을 것 같아요. 어서 먹어요.”
예소린이 상 앞에 앉아 포크를 들었다.
그에 강지한이 나이프를 들어 스테이크를 먹기 좋게 썰어주었다.
“감사히 먹겠습니다.”
그녀의 손에 들린 포크가 스테이크 한 점을 무자비하게 찍었다.
푹!
겉을 강한 열로 빠르게 익혀 육즙을 꽉 잡은 뒤 레스팅 시간까지 충분히 가진 안심 스테이크 한 조각이 입안으로 들어갔다.
순간 부드러운 육질이 사르르 녹듯 하며 육즙을 양껏 토해냈다.
예소린은 그 감탄스러운 식감과 혀 위를 흐르는 육즙의 맛에 놀란 토끼 눈이 됐다.
“지한 씨, 엄청 맛있어요.”
“다른 것도 맛있을 거예요.”
그럴 수밖에.
스테이크와 샐러드의 요리 등급은 레벨 4, 명란냉파스타는 레벨 5였다.
어지간한 레스토랑에서 돈을 받고 팔 정도의 수준은 된다는 얘기.
예소린은 샐러드를 먹고서도 놀라고 명란파스타를 먹고는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정말 맛있는 것을 먹을 때만 나오는 그녀 특유의 리액션이었다.
“흐응~ 진짜 맛있다. 이거 어떻게 만든 거예요? 저 이런 냉파스타 처음 먹어봐요.”
“명란젓으로 만들었어요.”
“네? 정말요? 전혀 모르겠는데. 비린 맛도 없고.”
“애초에 명란젓을 익히지 않고 소스로 만들었거든요. 그리고 마늘과 페퍼론치노의 향이 비린 걸 잡아줘요.”
“그렇구나. 지한 씨 정말 많이 아시네요. 저는 분식이나 한식만 잘하시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양식까지 일가견이 있으시네? 멋져요.”
“하하……. 한잔할까요?
예소린의 폭풍 칭찬에 민망해진 강지한이 술을 권했다.
예소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소주병을 집었다.
“소주 드시게요?”
“전 맥주보다 소주가 좋거든요. 아, 맥주 드시고 싶으세요?”
“아뇨. 소린 씨가 드실까 봐 준비한 거예요.”
“그럼 맥주병은 냉장고로 치워요. 소주 마셔요, 우리.”
“저야…… 좋죠.”
까드득.
예소린이 소주 뚜껑을 힘 있게 따며 빙긋 웃었다.
그 모습이 마치 소주 CF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아름다웠다.
* * *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니 소주 한 병이 금방 사라졌다.
둘 다 취하지는 않았지만 기분이 제법 들떴다.
이런저런 얘기들과 농담이 오고 가며 웃음꽃이 피어났다.
한껏 기분이 좋아진 예소린이 소주 한 병을 더 꺼내오며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아, 근데 오늘 배틀 셰프 하는 날 아니에요?”
“어? 맞아요. 깜빡하고 있었어요.”
“다시보기로 같이 봐요. 어때요?”
“조금 민망하긴 한데…… 그러죠. 뭐.”
맨정신이었다면 극구 반대했을 강지한이었다.
하지만 술의 힘을 빌려 민망함을 극복해 보기로 했다.
그가 리모콘으로 배틀 셰프 2화를 결제했다.
그러자 전화의 하이라이트 장면이 간략하게 흘러나온 뒤, 바로 강지한이 지역 예선에서 만들었던 음식이 공개됐다.
“나 이거 진짜 궁금했었는데!”
기대감 가득한 예소린의 눈에 들어온 건 바로 떡볶이였다.
한데 비주얼이 일반적인 떡볶이와는 달랐다.
예소린은 숨소리까지 죽여 가며 이어지는 상황을 시청했다.
결국 천명옥의 심사가 끝난 뒤에야 강지한이 만든 떡볶이의 비밀을 알 수 있었다.
“진짜 대단하다. 저런 생각을 다하시고. 어묵으로 면을 만든다? 저는 그런 발상은 전혀 못할 거예요.”
“사람이 궁하면 하게 되더라고요. 그때는 제가 가장 잘하는 게 분식이어서 너무 평범해 보일까 봐 머리 좀 굴렸던 게 저렇게 나왔어요.”
“그랬구나. 근데 지한 씨. 요즘도 매주 촬영 나가죠?”
“그럼요.”
“매 라운드마다 1등도 뽑고 그래요?”
“그렇죠.”
강지한의 대답에 예소린이 장난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럼 지한 씨도 1등 해본 적 있어요?”
“아……. 그건 스포라서 말씀해 드릴 수 없어요.”
“저한테만 살짝 얘기해 봐요. 어때요?”
예소린은 정말 대답을 들을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강지한의 난감해하는 반응이 재밌고 한편으로는 귀여워서 저도 모르게 장난을 쳤다.
“절대 안 돼요.”
강지한이 완강하게 거절했다.
예소린이 그런 강지한의 옆구리를 마구 간질였다.
“이래도 안 돼요? 이래도?”
“윽! 아하하하하! 으하하!”
강지한은 유독 간지럼에 약했다.
그가 몸을 마구 뒤틀며 자지러졌다.
예소린은 그런 강지한에게 계속 간지럼을 피웠다. 한데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설탕이가 재미있어 보였는지 둘 사이에 뛰어들어 강지한의 옆구리를 앞발로 마구 긁어댔다.
“크하하하! 서, 설탕아!”
헥헥헥헥!
“잘한다 설탕이~!”
예소린의 공격만으로도 벅찬데 생각지 못했던 설탕이까지 가세하자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결국 몸에 힘이 전부 빠져나간 강지한이 뒤로 벌렁 자빠졌다.
그 바람에 강지한에게 무게중심을 실고 간지럼을 태우던 예소린도 함께 고꾸라졌다.
“엇!”
“꺅!”
털썩.
공교롭게도 뒤로 드러누운 강지한의 위에 예소린이 올라탄 형태가 됐다.
설탕이가 한 건 했다.
“……?”
“……!”
조금 전까지 강지한을 마구 간질이던 설탕이는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는 듯 멀리 떨어져서 둘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순진무구한 눈을 하고서 고개는 약간 모로 꺾은 상태였다.
한편, 포개진 상태로 시선을 주고받은 두 남녀의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허공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별생각 없이 이를 지켜보던 설탕이가 뜬금없이 근처에 있던 장난감 공을 가지고 놀았다.
그러다 공이 문 열린 안방으로 튕겨 나갔다. 설탕이는 그 공을 쫓아 안방으로 들어가 모습을 감췄다.
그렇게 지켜보는 눈이 완전히 사라진 순간,
쪽.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은 자연스레 입을 맞췄다.
하지만 후끈하게 덮쳐 오는 열기는 그 정도로 씻겨 나가지 않았다.
강지한과 예소린이 한 번 더 입을 맞댔다. 하지만 이번에는 다시 떨어지지 않았다.
그대로 예소린의 입안으로 강지한의 혀가 흘러 들어갔다.
“으음…….”
예소린이 몸을 파르르 떨며 강지한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강지한의 손도 그녀의 허리를 천천히 어루만졌다.
몇 년 만에 느껴보는 여인의 체취와 손끝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에 강지한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온몸이 물 먹은 솜이 된 것처럼 몽실몽실거렸고, 영혼이 붕 떠버리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한마디로 정신이 없었다.
“하아아.”
가까스로 떨어진 두 사람.
예소린이 저도 모르게 내뱉은 뜨거운 한숨이 강지한의 뺨을 간질였다.
“지한 씨.”
“네.”
“저 지한 씨 좋아해요. 가볍게 하는 말 아니고, 진심으로 좋아해요. 지한 씨는요?”
“저는…… 사실…….”
강지한이 대답을 망설였고 먼저 고백을 해버린 예소린의 가슴이 쿵쾅거리며 뛰었다.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 몇 초가 몇 년처럼 길게 느껴졌다.
“처음 봤을 때부터 호감이 있었어요.”
되돌아온 강지한의 얘기에 예소린의 입이 아름다운 호를 그렸다.
“우리 만나볼래요?”
“어째…… 남녀가 바뀐 것 같네요.”
“대답은요?‘
“만나요, 우리.”
고개를 끄덕이는 강지한의 가슴이 터질 것처럼 뛰었다.
저렇게 예쁜 사람이, 지금 자신의 위에 안겨서 맑은 눈으로 만나보자고 하다니.
너무 현실감이 없어서 차라리 꿈같았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두 사람이 다시 입을 포개려 했다.
그런데 그때,
띠리리리리링~
예소린의 스마트폰이 울렸다.
그녀가 놀라서 액정을 확인했다.
그런데 전화를 건 사람은 다름 아닌 그녀의 아빠 예경천이었다.
“아빠예요.”
“네? 사장님이요?”
“보통 한 번 자면 잘 깨지 않는데…… 어쩌죠?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예경천이 딸에게 얼마나 각별한지는 강지한도 알고 있던 터였다.
새벽에 눈 떠봤는데 딸이 집에 없으니 불호령이 떨어질 건 불 보듯 뻔했다.
예소린이 걱정된 강지한은 아쉬운 마음을 억지로 접었다.
“얼른 들어가세요.”
“네. 죄송해요. 그래도…… 우리 만나기로 한 건 유효한 거예요. 그렇죠?”
“소린 씨야말로 내일 눈 떠서 술김에 그런 거라고 하면 안 돼요.”
예소린이 샐쭉 웃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계속 벨이 울리는 중이었다.
“그만 가볼게요. 나오지 말아요!”
예소린이 숄 카디건을 입고 핸드백을 챙겨 강지한의 집을 나섰다.
그런데 그녀가 얼마 걸어가지 않았을 때 누군가가 다급히 뒤를 쫓아왔다.
돌아보니 강지한이었다.
“지한 씨? 저 혼자 잘 갈 수 있…….”
그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강지한의 입이 그녀의 입을 막아버렸다.
강지한을 받아들이는 예소린의 몸에서 힘이 빠지고 머릿속이 몽롱해졌다.
집들이를 하며 함께 보게 된 배틀 셰프가 두 사람을 이어주는 매개체가 되었다.
* * *
다음 날.
눈을 뜬 강지한은 이게 정말인가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