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
Restaurant 63. 막내 고중만
뽀삐의 하루에서 지내는 강아지들, 특히 골든리트리버 소금이에게는 오후 10시가 가장 힘든 시간이었다.
설탕이와 이별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저벅. 저벅.
창밖에서 들려오는 강지한의 발걸음 소리가 소금이의 귀에 잡혔다.
끼이잉.
벌써부터 시무룩해진 얼굴로 설탕이를 보며 낑낑대는 소금이.
가지 말라는 듯 설탕이에게 다가가 얼굴을 비벼댔다.
설탕이가 그런 소금이의 콧잔등을 핥아주고는 짖었다.
왕! 헥헥헥.
어차피 내일 다시 만날 테니 너무 힘들어하지 말라는 설탕이의 마음이 소금이에게 전해졌다.
그 모습을 본 예소린이 어이가 없어 쿡쿡댔다.
“소금아, 넌 두 살이나 먹은 누나가 세 달밖에 안 된 설탕이한테 위로를 받니?”
그때 카페의 문이 열리며 강지한이 들어섰다.
“설탕아~ 아빠 왔다.”
강지한의 음성에 설탕이가 꼬리를 팽팽 돌리며 마구 달려갔다.
저러다 꼬리로 나는 것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폴짝!
지척까지 다가와 힘껏 뛰어오른 설탕이를 강지한이 품에 안았다.
“하하하. 잘 놀았어?”
설탕이는 강지한의 뺨을 마구 핥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런 강지한을 바라보는 소금이의 눈에는 원망과 질투가 섞여 있었다.
설탕이의 혀가 닿는 강지한의 뺨이 그토록 부러울 수가 없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강지한은 예소린과 즐거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갈수록 설탕이 보러 오는 손님들이 많아져서 매상이 계속 올라요. 이러다 부자 되겠어요.”
“곧 도그앤라이프 4월호도 나오는데, 그때 되면 더 난리나겠네요.”
“아! 모레죠?”
“네, 매월 첫째 주 목요일에 발간된대요.”
“설탕이를 잡지 표지에서 볼 수 있다니. 벌써부터 기대되는 거 있죠? 얘는 자기가 얼마나 대단한 강아지인지 알까요?”
예소린이 설탕이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기분이 좋아진 설탕이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음……. 글쎄요.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고. 아, 소린 씨, 이번 주 주말에 뭐해요?”
“딱히 뭐 없어요. 왜요?”
“저랑 드라이브할래요? 구봉산 가서 맛있는 것도 먹고…….”
“네, 할래요.”
“아, 그럴래요?”
“네, 그럴래요.”
말을 하는 예소린이 생글생글 웃었다.
그게 어찌나 예쁜지 강지한의 심장이 마구 뛰었다.
“열한 시쯤 제가 데리러 갈게요.”
“네. 좋아요.”
“오케이. 그럼 마무리해 볼까요.”
요즘 강지한은 예소린의 카페 마무리를 도와주고 있었다.
예소린 혼자 하면 한 시간이 넘어가는 작업인데 강지한이 함께하자 30분 만에 끝이 났다.
강아지들은 예소린의 스타렉스에 모두 태웠다.
조수석과 의자를 모두 떼어낸 뒷좌석에 강아지들이 승차했다.
“그럼 가볼게요, 지한 씨.”
예소린이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며 말했다.
“네, 조심해서 들어가요.”
“내일 봐요.”
부우우웅-
커다란 차가 강지한의 시야에서 빠르게 멀어져갔다.
그러는 와중 소금이는 차창 너머 설탕이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 * *
다음 날.
“강 사장~ 나왔어요.”
윤석찬이 두 손 가득 식자재를 들고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식당에는 강지한밖에 없었다.
아직 직원들이 출근할 시간이 아니었다.
“오셨어요?”
“양파 한 망이랑 파 세 단, 전지살 3킬로…….”
윤석찬은 가져온 물품들을 줄줄 읊으며 가지런히 늘어놓았다.
“빠진 거 없죠?”
“네.”
“그럼 고생해요.”
“사장님, 잠시만요.”
“응? 왜요?”
강지한은 윤석찬이 늘어놓는 재료들을 파악의 눈으로 살피고 있었다.
그의 시야에 식품들의 정보가 떠올랐다.
[보통 양파]
품종 등급: B
신선도: 4/5
-신선함이 조금 빠진 상태이지만 나쁘지 않다.
[보통 양파]
품종 등급: B
신선도: 4/5
-신선함이 조금 빠진 상태이지만 나쁘지 않다.
.
.
.
대부분은 비슷한 신선도를 보이고 있었다.
그러다 강지한의 눈에 하자가 있는 것들이 하나둘 들어왔다.
[보통 양파]
품종 등급: B
신선도: 3/5
-신선함이 많이 빠진 상태. 양파의 가장 안쪽이 살짝 물렀다.
[보통 파]
품종 등급: B
신선도: 3/5
-누렇게 뜬 잎과 반점이 약간 있는 것으로 보아 병충해의 피해를 받았다.
[보통 무]
품종 등급: B
신선도: 3/5
-흠집이 조금 있고 뿌리의 잔털이 많으며 무의 녹색보다 하얀색이 더 많아 맛이 덜하다. 두들기면 퐁퐁 소리가 날 텐데, 이건 바람이 든 것이다.
강지한이 상태가 안 좋다고 나온 것들 중 양파 하나를 집었다.
“사장님, 잘 보세요.”
강지한은 그것을 칼로 탁 잘랐다.
그러고는 양파의 안쪽을 보여주었다.
윤석찬은 짐짓 모르겠다는 제스쳐를 취해 보이며 물었다.
“갑자기 양파는 왜 잘라서 보여줘?”
“안에 이 부분 살짝 무른 거 안 보이세요?”
윤석찬이 눈을 가늘게 뜨고서 열심히 들여다보는 척을 했다.
“어? 그러네? 아니 왜 이런 게 섞여서는. 미안해. 이것도 다 사람이 하는 일이라 실수가 간혹 있어.”
“실수요? 그럼 이것도 좀 보시겠어요?”
이번에는 파를 들어 반점을 손으로 콕 짚었다.
“여기 반점 보이시죠? 이거 병충해 피해 입어서 이렇게 된 거잖아요.”
“에이, 그거는 내가 실수로 못 뺀 거네. 그렇게 작은 반점 하나는 가끔 놓치기도 해.”
“제가 못보고 넘어갈 것 같아서 넣으신 건 아니고요?”
“아니, 강 사장.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강지한이 마지막으로 무를 들어 손가락으로 두들겼다.
그러자 퐁퐁 소리가 났다.
“바람 들었네요, 이 무.”
“…….”
여기까지 상황이 진행되자 윤석찬도 할 말이 궁해졌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는데 갑자기 어떻게 된 거야?’
윤석찬이 강지한의 눈치를 살살 살폈다.
그의 얼굴에는 확신이 있었다.
‘알면서도 모른 척한 거야? 날 떠보려고?’
그렇게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지금 강지한이 짚어낸 부분들은 초짜들은 대부분 그냥 넘어가는 것들이었다.
강지한 역시 처음 장사를 해보는 입장이고 어수룩한 면이 있는 게 딱 초짜인지라 B품을 하나둘 섞으며 반응을 떠봤다.
그런데 별말이 없어서 안심하고 있었다.
혹여 뭐라고 하면 대충 둘러대고 다음부터는 제대로 된 물건만 가져다주면 될 일이었다.
한 번은 그냥 넘어가 주니까.
그런데 돌아가는 분위기가 그냥 넘어갈 것 같지 않았다.
하지만 이대로 손을 놓을 수는 없는 일.
되든 안 되든 윤석찬이 자세를 숙이고 사과부터 했다.
“강 사장, 미안해요. 요새 내가 일이 많아서 정신이 좀 없었어. 앞으로는 절대 이런 실수 없을 거야. 응?”
“윤 사장님.”
“그래, 강 사장.”
“실수라는 건 어쩌다 한 번 하는 거죠?”
“그렇지, 그렇지. 어쩌다 한 번 하는 거지. 그러니 이제 두 번 다시는 내가…….”
“그런데 사장님께서는 왜 5일이나 계속 같은 실수를 하셨어요?”
“…….”
강지한은 윤석찬이 언제부터 하자 있는 것들을 섞어서 주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완전히 당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곰이라 생각했는데, 꼬리를 아홉 개나 숨기고 있는 여우였다.
걸려도 된통 걸리고 말았다.
“지금까지 감사했어요. 내일부터는 물건 안 가져오셔도 됩니다.”
“가, 강 사장!”
“그만 가보세요.”
“아니, 우리가 그래도 함께한 시간이 있는데 냉정하게 내칠 수 있는 거예요?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요?”
“윤 사장님이야말로 저한테 어떻게 이런 짓을 할 수가 있어요?”
“…….”
말을 섞으면 섞을수록 점점 말리는 건 윤석찬이었다.
“더 할 말 없으니 가보세요.”
강지한이 냉정하게 등을 돌렸다.
그러고는 주방을 정리했다.
윤석찬이 아직 홀에 서 있었지만 완전히 모르는 사람 취급을 하고 있었다.
“후우우.”
윤석찬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미안했어, 강 사장. 가볼게.”
강지한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는 것을 느낀 윤석찬이 힘없이 매장을 나섰다.
그때 마침 고중만이 조금 이른 시간에 출근을 하다 윤석찬과 마주쳤다.
“어? 중만이?”
“여~ 윤 사장님. 간만이네요.”
“어디 가는 길이야, 이렇게 일찍?”
“저기요.”
고중만이 지한 분식을 가리켰다.
“지한 분식?”
“네.”
“아직 문도 안 열었는데. 그리고 저기 가지 마.”
“왜요?”
윤석찬은 고중만이 지한 분식에 식사하러 가는 것이라 생각했다.
오픈 시간도 모르는 걸 보니 이번이 처음으로 발걸음을 한 것이라는 판단이 섰다.
“뭐, 여기저기서 떠드는 소문 듣고 가는 모양인데, 내가 저기랑 식자재 거래하거든. 근데 별로야. 맛은 모르겠는데 식자재를 그렇게 좋은 걸 안 써.”
“그래요?”
“일부러 하자 있는 걸 싼값에 달라 그러고 한다니까?”
“이야, 정말 나쁜 놈이네!”
“어허, 그러다 듣겠어. 이러지 말고 오래간만에 만난 것도 인연인데 편의점에서 커피나 한 잔 마시자고. 내가 사줄…….”
“윤석찬 사장님, 정말 나쁜 놈이네!”
“……뭐? 너 지금 뭐라 그랬어?”
“내가 당신 밑에서 일할 때 어떻게 잘렸는지 기억나죠? 당신이 하도 식자재에 장난질 치길래 하자 있는 거 전부 멀쩡한 걸로 몰래 바꿔서 납품했더니 그냥 잘라 버렸지요? 그때부터 더러운 거 알아봤었어! 카악! 퉤!”
“뭐하는 거야 지금?”
윤석찬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그래요. 먹고살라고 그랬겠지. 나도 그랬어. 거기 잘리고 먹고살겠다고 리어카 끌면서 분식 장사 하다 보니까 자꾸 양심보다 계산이 앞서더라고. 그래서 조금은 당신 마음이 이해가 갔거든. 근데 그게 결국에는 내 살 갉아먹는 짓이더라고. 뭐……. 반성을 했다고 해도 이미 내가 걸어온 발자국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난 누구 맘에 안 든다고 없는 자리에서 흉은 안 봤어!”
“아니, 지한 분식 얘기하다가 왜 옛날 얘기가 나와?”
“내가 지금 저기서 일하고 있으니까.”
“……어?”
윤석찬은 뒤통수를 크게 얻어맞은 것 같았다.
“나 당신한테 잘리고 여기저기 식품 업체에 이력서 들이밀었는데 안 받아주더라고. 왜 나를 안 받아주는지 대체 이유를 모르겠는데, 누군가 그러더라. 왜 전에 다니던 직장에서 일을 개판 쳐가지고 소문이 그렇게 났냐고.”
“…….”
“당신이 내 뒷얘기 하고 다닌 거 몰라서 넘어간 줄 알아? 그래도 일 년 넘게 내 배 불려준 은인이니까 알아도 참은 거야! 그래, 그건 내 일이니까 넘어갑시다. 그런데!”
고중만이 지한 분식의 간판을 가리켰다.
“이제 내 배 불려주는 곳이 저기거든! 나 받아준 강지한이가 내 은인이거든! ……그러니까 한 번 더 내 은인 험담하고 다니다 걸리면 어디 한 군데 부러집니다.”
고중만이 윤석찬을 무섭게 노려봤다.
순간 어마어마한 위압감이 윤석찬의 어깨를 콱 내리눌렀다.
고중만은 소싯적 주먹깨나 쓰던 인간이었다.
괜히 그를 아는 동생들이 고중만의 한마디에 찍 소리도 못하고 납작 엎드리는 게 아니었다.
“알겠습니까?”
고중만의 무거운 음성이 윤석찬의 고개를 절로 끄덕이게 만들었다.
“아, 알겠네…….”
“그만 가쇼. 다시는 이 근처에 얼씬도 마시고.”
윤석찬이 뭔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급히 탑차를 몰고 떠났다.
“카악~ 퉤이!”
멀어지는 탑차의 뒤에다가 걸쭉하게 침을 뱉은 고중만이 손을 탁탁 털며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 그를 강지한이 포근한 미소로 반겨주었다.
“중만 아저씨, 일찍 나오셨네요.”
고중만도 헤벌쭉 웃으며 답했다.
“막내가 부지런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