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9
Restaurant 58. 로버트 정의 사정
“오늘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강사장님. 설탕이도!”
왕!
로버트 정의 말에 설탕이가 신나서 대답했다.
“먼 곳까지 걸음 해주셔서 감사드려요.”
“이렇게 맛있는 음식 먹을 수 있으면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오겠어요.”
촬영 감독이 이쑤시개로 이를 쑤시며 말했다.
그에 모든 스탭들이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분식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이건 뭐, 음식들이 너무 훌륭해서 우리가 대접 받고 가는 기분이네요.”
“아닙니다. 제가 감사드리죠.”
“잡지는 다음 주 목요일에 배본되거든요. 강사장님 자택으로도 몇 부 보내드릴게요. 한 20부 정도면 되겠죠?”
“충분하고도 남겠어요.”
로버트 정이 강지한과 그런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촬영 감독이 예소린에게 조용히 물었다.
“정말 연예계 생활 하신 적 없어요?”
예소린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네, 없어요.”
“이상하다. 분명 어디서 봤는데…….”
예소린은 일반인이라고 하기에는 위화감이 있을 만큼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본인이 말을 하지 않으면 다들 기본적으로 연예계 쪽 일을 하는 사람으로 오해할 정도였다.
“잘 봐주셔서 감사해요.”
예소린이 방긋 웃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 바람에 촬영 감독은 더 이상 따지고 들 수가 없었다.
하지만 머릿속에서는 계속 같은 생각만 맴돌았다.
‘분명히 기억에 있는 얼굴인데…….’
촬영 감독이 답답해하는 사이 분위기가 정리되었다.
“이제 돌아들 갑시다.”
로버트 정이 서울 상경을 서둘렀다.
일요일인 만큼 교통 체증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안녕히 계세요!”
“설탕아~ 잘 있어!”
“사장님, 저 일요일에 또 올지도 몰라요.”
“팀장님, 여기 일요일에 영업 안 하잖아요.”
“아, 맞다. 그럼 토요일.”
“잘 먹었습니다!”
“외쳐, 갓설탕!”
왕!
시끌벅적한 사람들이 한마디씩을 뱉고서 식당을 나섰다.
그 순간까지도 촬영 감독은 예소린의 얼굴을 눈에 담으며 고개를 갸웃댔다.
일행들 중 가장 마지막으로 식당을 나서려던 로버트 정이 일순 멈칫하고는 강지한을 돌아보았다.
“저…… 사장님.”
“네?”
“이런 부탁 정말 죄송하지만 혹시 떡볶이 남은 재료 있으면 제가 사갈 수 있을까요?”
이런 부탁을 하는 손님들이 종종 있었다.
만들어진 떡볶이를 포장해 가는 손님들이 대부분이지만 가끔씩은 아직 만들어지기 전의 재료들을 싸달라곤 했다.
강지한에게 있어 어려운 일도 아니었기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드릴게요.”
“이렇게 맛있는 걸 그냥 먹으면 어쩐지 벌 받을 것 같은데요.”
“하하, 괜찮아요.”
강지한은 떡볶이 양념과 육수, 떡을 얼음이 담긴 봉지에 포장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떡볶이가 맛이 없었던 게 아니었나 보네.’
떡볶이를 먹던 로버트 정의 표정이 하도 심각한 데다 몇 개 집어먹지를 않아서 입에 안 맞는 줄 알았다.
강지한의 떡볶이가 아무리 대단한들 사람의 입맛은 만인만색이니 전부 맞출 수는 없는 법.
그런데 떡볶이를 싸가겠다고 하는 걸 보니 맛은 있었던 모양이다.
“여기 있어요. 집에 가서 되도록 빨리 만들어 드시는 게 좋을 거예요.”
강지한이 내민 봉투를 넘겨받은 로버트 정이 허리를 깊이 숙였다.
“감사합니다. 맛있게 먹을게요.”
“네.”
로버트 정의 분위기가 어딘지 모르게 어두웠다.
그가 강지한을 일별하고 식당을 나섰다.
“후, 소린 씨. 오늘 고마웠어요.”
강지한이 예소린에게 다가와 말했다.
한데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그녀는 약간 착잡한 얼굴로 창 너머 멀어지는 스탭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소린 씨?”
“아, 네?”
“무슨 생각해요?”
“그냥 멍 때렸어요.”
예소린이 싱긋 웃고는 말을 이었다.
“홀 정리하는 거 도와드릴게요.”
“아녜요. 저 혼자 해도 돼요.”
“대신에 영화 보여줘요.”
“아뇨. 제가 혼자…… 네?”
갑자기 훅 들어온 예소린의 말에 강지한이 눈을 꿈뻑댔다.
“저번에 치맥하고 헤어지던 날 영화 보자면서요.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다가 할머니 되겠어요.”
“아…….”
분명 강지한이 먼저 그런 말을 하기는 했다.
그런데 이후 예소린에게 구체적인 일정을 단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다.
이에 기다리다 못한 예소린이 핑계 김에 먼저 입을 연 것이다.
“오늘 바빠요?”
“아뇨. 딱히.”
“그럼 영화 봐도 되겠네요?”
“네. 돼요. 영화 봐요.”
“아 근데 설탕이는 어쩌죠?”
“설탕이는 환장하면서 맡아줄 사람이 있어요.”
강지한이 설탕이를 슥 쳐다봤다.
그러자 설탕이는 누구를 말하는지 알 것 같다는 듯 왕! 짖고 꼬리를 흔들었다.
* * *
“설탕아아아아아아~!”
집 앞에 추리닝 차림으로 나온 이향숙이 설탕이를 보자마자 품에 안고 얼굴을 비벼댔다.
“보고 싶었어, 설탕아! 어제 내 꿈에 네가 다녀갔단다? 우쭈쭈~”
이향숙이 설탕이를 마치 제 새끼 대하듯 물고 빨았다.
그러고는 아무런 말도 없이 집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저기, 향숙아!”
놀란 강지한이 얼른 이향숙을 불렀다.
그러자 이향숙이 멈춰 서서는 헤헤 웃었다.
설탕이한테 너무 정신이 팔려 사람이 있다는 것도 깜빡했다.
“미안해. 설탕이만 보면 정신이 나가버려. 어? 애견 카페 언니도 같이 왔네요?”
“어머, 지한 씨가 말했던 향숙 씨가 이 예쁜 아가씨였구나. 잘 지냈어요?”
“오빠 내 얘기한 적 있어?”
“어? 응.”
“의외네.”
이향숙이 고개를 모로 꺾었다.
두 여인의 만남은 이번이 세 번째였다.
첫 만남은 강지한이 리어카를 끌던 시절 멀리서 그를 바라보다 만났었다.
두 번째 만남은 이향숙이 애견 카페를 찾아가며 성사됐다.
그리고 지금이 세 번째였다.
이향숙이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자기 품에 안긴 설탕이를 흘끔 내려다보고서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데이트하는구나.”
“어, 어? 아니…… 데이트가 아니고 그냥 영화 보려고.”
“그게 데이트야, 오빠.”
강지한은 언감생심 예소린과 데이트를 하는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그가 바라보기에는 너무나 아름다운 여자였기에.
한데 이어지는 예소린의 반응은 강지한의 심장일 마구 뛰게 만들었다.
“맞아요. 데이트해요, 우리.”
“흐음.”
이향숙이 눈을 가늘게 뜨고 예소린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합격!”
“와아~”
합격이라는 말에 예소린은 좋아하며 박수를 쳤고, 강지한은 머리 위에 물음표를 만들었다.
“너 뭐가 합격이라는…….”
“데이트 잘하고 늦게 와 오빠~ 설탕아 언니랑 즐겁게 놀자.”
“설탕이 남자라니까.”
이향숙이 설탕이를 어르며 현관으로 들어갔다.
강지한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반대로 예소린은 기분이 좋았다.
일전에 치맥을 먹을 때 강지한은 이향숙에 대해 말한 적이 있었다.
그때 예소린은 이향숙이 강지한을 이성이 아닌 친오빠 같은 감정으로 대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런 이향숙이 합격이라 말해주는 게 나쁘지 않았다.
* * *
교통체증을 뚫고 집으로 돌아온 로버트 정을 그의 아버지 정찬우가 반겼다.
“두식이 왔냐.”
“……아버지. 로버트예요.”
“로보트 같은 소리 하네. 확 변신시켜 버릴까 보다.”
“로보트가 아니라 로버트라니까요.”
“그거나그거나. 아니 왜 좋은 이름 놔두고 로버트래?”
“……좋은 이름이 아니니까 가명 쓴다는 생각은 안 해보셨어요? 개명이라도 하게 해주시던가요.”
“두식이가 어때서.”
“두식이가 촌스럽죠.”
“에이. 사내자식이 비리비리해 갖고.”
정찬우는 곱상하게 생긴 로버트 정과 달리 덩치가 크고 우락부락했다. 생긴 것도 꼭 산적 같았다.
“어머니는 어때요?”
들고 온 떡볶이 재료를 싱크대에 놓으며 로버트 정이 물었다.
정찬우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때 안방 문이 열리며 병색이 완연한 깡마른 오십 대 여인이 걸어 나왔다.
로버트 정의 엄마 신지윤이었다.
신지윤은 힘든 미소로 로버트 정을 반겼다.
“저 왔어요, 엄마.”
아들의 인사에 그녀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아니, 말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반 년 전, 신지윤의 친엄마가 지병과 싸우다 돌아가셨을 때 그녀는 깊은 슬픔에 말을 잃었다.
병원에서의 진단은 실어증이었다.
실어증이란 게 일반적으로는 뇌의 병적인 변화로 인해 발생하는 언어장애를 뜻한다.
하지만 드물게 강한 충격으로 인해 무의식의 강압으로 실어증에 걸리는 경우도 있었다.
신지윤이 그런 상황이다.
해서 신지윤은 단계적인 치료 수순을 밟아가고 있었지만 도저히 진척이 보이질 않았다.
때문에 로버트 정은 다른 방법으로 엄마를 돕기 시작했다.
신지윤의 인생에서 가장 큰 낙 중 하나는 맛집을 찾아다니는 것이었다.
하지만 혼자 가는 법은 없었다.
언제나 가족과 함께였다.
맛있는 식당에 가족들과 찾아가서 한 끼 밥을 먹는 것이 참 행복하고 좋았다.
지금은 그게 불가능했다.
마음의 병이 깊어진 신지윤이 외출 자체를 거부하고 있었다.
병원을 갈 때가 아니면 밖에 나가는 일이 없었다.
그 때문에 로버트 정은 어디서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마다 그걸 집에 싸오곤 했다.
의학으로는 해결이 안 되니, 가장 큰 즐거움을 자꾸 상기시켜 기분을 전환시키려 노력했다.
가족, 그리고 맛있는 음식.
그것이 키워드였다.
강지한의 떡볶이를 완성한 로버트 정이 테이블에 세팅을 하고 신지윤을 상으로 끌어와 앉혔다.
그러자 정찬우도 눈치껏 상에 합류했다.
“먹어봐요, 엄마.”
강지한이 직접 만들었을 때의 맛은 나지 않았지만 비슷하긴 했다.
그 정도만 해도 다른 떡볶이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굉장한 맛이었다.
신지윤은 부질없는 짓이라는 생각으로 떡볶이를 바라봤다.
그녀의 엄마가 세상을 떠난 뒤엔 무엇을 먹어도 모래를 씹는 것 마냥 무미건조했다.
이번이라도 크게 다르진 않을 터.
그러나 아들의 노력이 있으니 하는 수 없이 떡볶이 하나를 집어 먹었다.
그런데.
“…….”
떡볶이를 씹어 삼킨 신지윤의 포크가 파르르 떨렸다.
맛있었다.
완전히 잠들어 버린 것 같았던 그녀의 미각이 떡볶이 양념을 만나며 조금씩 기지개를 켜는 기분이었다.
신지윤이 이번엔 어묵 하나를 찍어 먹었다.
얇은 어묵의 식감을 온전히 느끼며 천천히 씹었다.
어묵에 적당히 입혀진 떡볶이 양념이 혀를 가득 감싼 뒤, 조각난 어묵과 한데 어우러져 또 다른 맛의 축제가 벌어졌다.
짠맛, 단만, 매운맛이 입안을 쉼 없이 즐겁게 해주면서도 경박하지 않은 묵직함이 양념 안에 담겨 있었다.
꿀꺽.
어묵까지 목으로 넘긴 신지윤을 부자가 긴장하며 지켜봤다.
오늘은 평소의 그녀와 뭔가가 달랐다.
신지윤도 그것을 느끼고 있었다.
가족들을 천천히 훑어보던 신지윤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아. 아아…….”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의미 없는 음성만 흘러나올 뿐, 제대로 된 단어는 목까지 차올랐다가 도로 먹히고 말았다.
신지윤이 고개를 저으며 포크를 내려놓았다.
정찬우가 침통함에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러나 로버트 정은 그 반대로 희망을 보았다.
지금 상에 놓인 이 떡볶이의 맛은 제대로 된 맛이 아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