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
Restaurant 52. 단체 주문
강지한이 상자에서 튀어나온 메시지를 몇 번이고 곱씹어 읽었다.
[설탕이가 물어온 선물상자에서 퀘스트를 얻었습니다. 퀘스트를 완료할 경우 ‘관찰의 눈’을 얻게 됩니다. 퀘스트는 매장에서 발생합니다.]
[관찰의 눈: 발동 시 다른 요리사의 조리 기술을 관찰합니다. 관찰한 기술은 영상으로 기억되어 몇 번이고 재생할 수 있으며, 홀로그램처럼 눈앞에 펼쳐집니다.]
설탕이가 하다하다가 이제는 퀘스트까지 물고 왔다.
퀘스트는 매장에서 발생한다고 했으니 아직 뭔지는 알 수 없었다.
한데 그 보상이라는 것의 용도가 조금 애매했다.
“다른 조리사의 기술을 영상으로 기억해서 홀로그램처럼 재생한다고? 그럼 그냥 텔레비전이나 동영상으로 보면서 따라하면 되는 일 아닌가?”
강지한은 사실 며칠 전부터 수제비의 반죽 뜨는 연습을 하고 있었다.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는데 혼자서 막 뜰 수는 없으니 시청각 자료를 통해 열심히 흉내를 내는 중이었다.
한데 그게 쉽지만은 않았다.
수제비의 고수라 불리는 사람들의 영상을 보면 반죽을 쉽고 빠르게 떼어내면서도 그 굵기가 얇고 넓게 펴진 면적이 거의 일정했다.
수제비가 어려운 이유는 반죽을 일정하게 떼는 것도 중요하지만 스피드 또한 못지않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팔팔 끓는 물에 반죽이 짧은 시간 안에 후다닥 들어가야 일정하게 익는 법이다.
한데 들어가는 텀이 길어버리면 어떤 건 덜 익고 어떤 건 퍼지는 경우가 생긴다.
해서 강지한은 일정한 반죽을 빠르게 떼는 연습을 해오고 있지만 그게 쉽지만은 않았다.
아쉬운 대로 오늘 완성한 반죽을 떼서 끓는 육수에 뜯어 넣어 수제비 한 그릇을 완성했다.
그러자 바로 평가가 떴다.
[강지한의 상당한 수준의 수제비]
요리 등급: LV4
-육수는 일품. 반죽이 아쉽다. 수제비가 조금 더 고루 익는다면 좋을 듯.
미야타케의 반죽법 중 불로 지지고 24시간 숙성시키는 과정이 빠진 상태였으니 반죽에 대한 평가는 어쩔 수 없었다.
그거야 내일이면 해결될 터.
이제는 반죽을 떼는 법만 손에 익히면 되는 일이다.
한데 그게 가장 큰 난관이었다.
그의 손기술이 아무리 좋아졌다고 해도 누가 가르쳐 주지 않은 것을 홀로 해결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강지한은 텔레비전을 켜서 ‘요식업계의 달인’ 프로그램 중, 수제비 달인이 나오는 화를 보며 다시 연습을 시작했다.
* * *
오전 9시.
아직 식당을 오픈하기도 전인데 전화가 울렸다.
“네, 지한 분식입니다.”
강지한이 전화를 받자 수화기 너머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장님, 안녕하세요. 저 거기 자주 가는 긴 머리 남잔데요.
그 설명을 듣자마자 누군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이름은 모르지만 일주일에 두세 번씩은 꼭 지한분식을 찾는 장발의 남자가 한 명 있었다.
머리카락을 허리까지 기른 그는 항상 기타 가방을 메고 있었다.
“아, 네. 누구신지 알겠어요.”
-아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아, 전화 드린 건 다름이 아니라 단체 주문 좀 하고 싶어서요. 내일 김밥 40줄 정도 사가려고 하는데 가능할까요?
“네, 하루 전에 전화 주셨으니 준비할 수 있습니다. 그냥 김밥으로 40줄이면 될까요?”
-네.
“쿠킹 호일로 개별 포장 해드릴까요? 아니면 김밥전용 일회용 도시락에다가 넣어드릴까요? 일회용 도시락은 두 줄씩 들어가는 것과 네 줄씩 들어가는 것 두 종류가 있어요.”
-개별 포장 해주세요. 그리고 제가 아침 10시쯤 찾아가야 할 것 같은데.
“그때까지 준비해 놓을게요.”
-알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남자가 전화를 끊었다.
강지한 단체 주문 건을 잊지 않기 위해 메모를 하고 있을 때였다.
[퀘스트가 주어집니다.]
[퀘스트-단체 주문으로 김밥을 먹은 모든 손님들에게 50 이상의 만족도를 받으세요.]
[퀘스트 보상-관찰의 눈]
“……살짝 위험하네.”
이건 백퍼센트 클리어할 수 있다고 장담하기 어려운 퀘스트였다.
요즘 지한 분식을 찾는 손님들 대부분은 50 이상의 만족도를 보이곤 했다.
하지만 전부가 그런 건 아니다.
열에 한두 명 꼴로 50 이하의 만족도를 보이는 이들도 있었다.
게다가 포장 손님들은 매장에서 받을 수 있는 여러 가지 버프를 받지 못하기 때문에 만족도를 얻음에 있어서 불리했다.
그렇다고 강지한이 만족도를 높이기 위해 어떤 꼼수를 부리는 건 불가능했다.
오로지 맛으로만 승부해야 하는 상황.
‘김밥의 맛을 더 업그레이드시킬 수 있는 방법이라.’
강지한은 여태 레벨 업의 레시피대로만 김밥을 만들어왔다.
그러다 시스템이 변화된 이후에는 새로운 메뉴 개발에 몰두했다.
기존에 레벨 6을 찍은 메뉴들에 대해서는 큰 고민을 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하루 동안 방법을 찾아보자.’
강지한이 지금껏 레벨 업을 통해 얻게 된 여러 레시피들과 스스로 공부한 지식들을 총동원해 김밥의 맛을 업그레이드시킬 방법을 찾아나갔다.
* * *
점심 피크 타임이 지나가고 찾아온 브레이크 타임.
강지한은 종일 김밥에 관한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렇다 보니 오늘 점심에도 본인은 김밥을 싸 먹게 됐다.
고민에 빠진 얼굴로 김밥을 천천히 음미하는 강지한을 이리나가 뚫어져라 쳐다봤다.
“오빠, 오늘 무슨 안 좋은 일 있어요?”
“응? 아니.”
“근데 왜 이렇게 심각해요?”
용성우가 그 말에 동의했다.
“맞습니다, 사장님! 유독 다른 날보다 분위기가 무거워서 말도 못 걸었습니다!”
“그랬어? 미안해, 얘들아. 기분 괜찮아. 밥 먹자.”
그러자 최지민이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 강지한의 김밥 한 개를 날름 뺏어먹고 넉살을 떨었다.
“음~! 맛있다. 사장님 김밥은 진짜 최고라니까요. 근데 오늘 날 되게 좋지 않아요?”
“응. 좋더라.”
며칠 전부터 최지민에게 말을 놓기 시작한 이리나가 대답하며 창밖을 쳐다봤다.
하늘이 깨질 듯 맑고 파랬다.
“아~ 어디 놀러가고 싶다. 사장님 김밥은 이런 날 어디 놀러가서 먹으면 더 맛있을 텐데.”
“에이 오바다. 완연한 봄은 되야지.”
“왜요?”
“지금은 김밥 싸가지고 어디 가면 차갑게 식어서 본래 맛이 안 나. 꽃샘추위 기승이잖아.”
“아, 그건 그러네요. 춥지만 않으면 완벽한데.”
“날 좋은 날 야외에서 먹는 김밥은 최고지. 분위기 때문에 더 맛있는 것 같아.”
강지한은 직원들이 별 뜻 없이 내뱉는 말을 듣고 뭔가 번뜩이는 게 있었다.
‘이거 어쩌면……?’
그가 김밥을 먹다 말고 벌떡 일어나 외투를 챙겨 입었다.
“사장님, 어디 가세요?”
용성우가 다급히 밖으로 나가는 강지한에게 물었다.
“나 천냥매장 좀 갔다 올게.”
천냥매장은 모든 생활용품을 싼 값에 파는 브랜드 매장이었다.
* * *
다음 날.
새벽부터 일어난 강지한은 설탕이를 이향숙에게 부탁하고 집을 나왔다.
그 시간에는 애견 카페가 문을 열지 않았고, 이향숙은 올빼미 체질이었기에 아직 잘 시간이 아니었다.
강지한이 차를 몰아 식당에 도착했다.
앞치마를 메고 모자를 쓴 그가 주방에 들어서자마자 육수 밥을 안쳤다.
밥이 지어지는 동안 김밥에 들어갈 재료들을 자르고 볶았다.
오늘은 퀘스트를 클리어해야 하는 중요한 날이었다.
한데 그렇다고 해서 김밥 속 재료들이 특별해지지는 않았다.
늘 하던 그대로였다.
밥이 다 지어지고 속 재료도 준비되자 본격적으로 김밥을 말기 시작했다.
40줄의 김밥을 전부 만 강지한이 그것들을 세 줄씩 잡고 칼로 일정하게 썰어냈다.
썰린 김밥은 한 줄 한 줄 쿠킹 호일로 포장했다.
그렇게 고루 썰린 김밥 40줄이 모두 쿠킹 호일로 싸였다.
주문한 손님이 그것을 원했기 때문이다.
한데 강지한은 그것들을 김밥 전용 일회용 도시락에 다시 담았다.
김밥 전용 일회용 도시락은 두 줄씩 담기는 것과 네 줄씩 담기는 것이 있는데, 네 줄씩 담기는 것을 사용했다.
해서 총 10개의 김밥 도시락이 완성됐다.
그 작업을 다 끝내고 나니 용성우가 출근했다.
“사장님, 안녕하세요!”
“그래, 성우야.”
용성우가 주방으로 들어서며 테이블 한쪽에 가득 싸인 김밥 도시락을 보고 놀라 물었다.
“어? 김밥 단체 주문 들어왔어요?”
“응.”
“말씀을 하시지.”
“내가 조금 일찍 나와도 혼자 소화 못할 것 같은 일 들어오면 그때 얘기할게.”
“하여튼 너무 우직하시다니까. 헤헤.”
말은 그렇게 하지만 용성우는 든든한 고목나무 같은 강지한이 참 좋았다.
‘나도 사장님처럼 뚝심 있는 사람이 돼야지.’
그리 다짐하며 오늘도 파이팅 넘치게 밑재료 준비를 해나가는 용성우였다.
오전 10시.
딸랑-
김밥을 주문했던 장발의 남자 손님이 칼같이 매장으로 들어섰다.
“사장님~ 김밥 포장됐나요?”
장발의 남자, 하진우가 몸을 부르르 떨며 물었다.
아직 아침의 바깥바람은 제법 매서웠다.
“네. 여기 있습니다.”
강지한이 도시락을 열 개씩 나눠 담은 봉투 두 개를 내밀었다.
“어? 사장님. 저 호일로 낱개 포장 부탁 드렸는데.”
“도시락 열어보시면 전부 낱개 포장되어 있어요.”
“아……. 알겠어요. 카드로 계산할게요.”
“제가 계산 도와드리겠습니다!”
용성우가 주방에서 나와 하진우의 계산을 도왔다.
“안녕히 가세요!”
매장을 나서는 손님에게 씩씩하게 인사까지 한 용성우가 다시 주방으로 넘어와 재료 손질을 해나갔다.
강지한은 유리창 밖으로 멀어지는 하진우의 뒷모습을 보며 일이 잘 풀리길 바랐다.
* * *
하진우는 춘천에 있는 작은 등산모임의 회원이었다.
이 등산모임의 특이점은 회원들이 전부 예술가들이라는 것.
하진우는 모임에서 막내 라인에 속했다.
이 모임을 만든 사람이자 최고참인 예술가는 다름 아닌 구자승이었다.
그는 춘천 토박이인 중견 예술가로 조각을 하는 사람이었다.
약관의 나이부터 조각으로 두각을 드러낸 그는 빠르게 이름값을 높여나가 지금은 춘천 예술계에서 방귀 좀 뀌는 인물로 자리하고 있었다.
10시 반에 삼악산 입구에 모인 19명의 사람들은 12시 무렵이 되어서야 정상에 설 수 있었다.
구자승이 가쁜 숨을 고르고서 적당한 바위 위에 엉덩이를 깔았다.
그러자 다른 후배 예술가들도 덩달아 자리를 잡고 앉기 시작했다.
구자승은 이 모임에서 제일가는 선배로 성격까지 날카로워 감히 후배들은 곁으로 쉬이 다가가 앉을 생각도 못했다.
한데 지긋한 나이의 여인 한 명이 그런 구자승의 옆에 가까이 붙어 앉았다.
바로 춘천 요리계의 거목인 천명옥이었다.
그녀는 엄밀히 따지면 요리사였지만 구자승의 추천으로 등산모임에 들게 되었다. 게다가 요리라는 행위 안에도 나름의 예술은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이 구자승의 입장이었다.
이 모임에서는 구자승이 곧 법이었으니 누구도 반발하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그만큼 두 사람의 사이는 각별했다.
일전에 천명옥이 어쩔 수 없이 하늘 분식 사장 강석호를 도와줬던 것도 그와 친분이 있는 구자승의 부탁 때문이었다.
“후우. 열심히 올라왔더니 열이 올라 덥네요.”
구자승이 등산모를 벗으며 말했다.
그러자 모자 속에 감추어져 있던 백발이 드러났다.
이제 마흔 줄에 들어선 얼굴에 비해 머리카락은 노인의 것이나 다름없어 이질감이 들었다.
그런 구자승을 보며 천명옥이 미소 지었다.
“저는 더운 건 모르겠고 배가 고파서 등가죽에 달라붙겠어요.”
천명옥의 말에 구자승이 바로 소리쳤다.
“진우야, 김밥 돌려라.”
“네, 선배님!”
하진우는 지한 분식에서 사온 김밥을 사람들에게 죽 돌렸다.
“도시락 안에 네 줄씩 들어 있으니 두 분씩 같이 드시면 됩니다.”
“낱개로 포장해 오라니까.”
구자승이 못마땅한 듯 미간을 찌푸리자 하진우가 식겁해서 바로 부연설명을 붙였다.
“도시락 안에 낱개 포장되어 있습니다!”
“그래? 근데 왜 도시락에 또 담은 거야?”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구자승이 도시락의 뚜껑을 열었다.
“오호.”
그러고는 비로소 알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의 옆에 앉아 있던 천명옥은 재미있다는 미소를 머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