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레벨업 하는 식당-29화 (29/330)

# 29

Restaurant 28. 움직이는 리어카 단골들

크리스마스가 지나가고 이틀이 더 흘렀다.

지한 분식엔 전과 다름없이 손님들이 몰렸다.

아직까지는 송유리의 악의적인 후기글이 큰 영향을 발휘하지는 못하는 모양이었다.

오늘로써 영업 20일째.

만족도 포인트가 마무리되는 날이었다.

그동안 강지한의 숙련도는 쑥쑥 올라서 전부 40을 넘기고 있었다.

강지한 본인의 능력 중에서 가장 많이 오른 건, 손으로 62였다.

쉼 없이 요리를 해야 하니 손의 숙련도가 가장 빠르게 오르는 건 당연했다.

손님들은 여전히 강지한의 음식을 먹으며 감탄했다.

분식집을 오픈한 초반에는 떡볶이와 라면, 김밥이 강세였다.

한데 지금은 모든 메뉴가 고르게 잘나가고 있었다.

특히 별로 팔리지 않았던 밥볶이의 맛이 입소문을 타고 퍼져 나가 지금은 손님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그럴 만도 한 것이 밥볶이는 애초에 레벨 5의 떡볶이 양념을 가지고 시작한 음식이었다.

레벨 1일 때부터 그 맛이 장난이 아니었다.

한데 그것을 레벨 5까지 올려 버렸으니 떡볶이보다 한층 더 맛있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로 인해 강지한은 한 가지 깨달음을 얻었다.

기존의 메뉴에서 업그레이드 시킨 메뉴를 슬롯에 등록하면 더더욱 맛있는 음식이 탄생한다는 것이다.

단, 밥볶이는 다른 메뉴들에 비해 레벨 업을 했을 때 맛이 전단계와 비교 안 될 만큼 좋아지는 건 아니었다.

아주 조금씩 부족한 맛을 잡아가는 느낌이었다.

메뉴 슬롯에 등록을 했을 때, 최초 음식의 완성도에 따라 레벨 업 할 시 맛의 업그레이드 폭이 달라지는 모양이었다.

아무튼 처음에 부진했던 밥볶이가 효자 노릇을 하니 강지한은 신이 났다.

자신이 내놓은 자식들 모두가 잘나가는데 어찌 흥이 안 날까.

오후 9시.

오늘도 무사히 하루 장사가 끝났다.

만족도 시스템이 적용되는 마지막 날 얻은 포인트는 총 3,527.

지금까지 누적 포인트는 35,219.

돈으로 환산하면 무려 3500만 원이 넘었다.

아울러 강지한의 수중에는 그동안 장사를 하며 번 돈과 포인트로 환전해서 번 돈이 1500만 원가량 있었다.

그러니 현재 그의 전 재산은 5000만 원이나 됐다.

레벨 업 시스템을 접하고 나서 한 달이 조금 넘는 시간 동안 벌어들인 액수다.

그 전에는 하루에 몇만 원 버는 것이 어려웠는데 지금은 1억의 반을 모았다.

내일부터는 포인트를 습득할 수 없지만 괜찮았다.

분식집은 이미 충분히 흑자인 만큼 별다른 일이 없는 한 돈은 계속 모일 터였다.

이제는 식당의 인지도와 강지한의 숙련도를 올리는 데만 집중할 때였다.

숙련도는 매일매일 조금씩 늘어나고 있었다.

한데 문제는 인지도였다.

그제와 어제 이틀 동안 인지도는 여전히 오르지를 않았다.

* * *

하늘 분식의 사장 강석호는 가게 문을 닫으며 콧노래를 불렀다.

장사가 만족스럽게 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조금씩 하늘 분식을 찾는 손님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그건 곧 자신의 작전이 먹혀들어 갔다는 반증이었다.

강석호가 가벼운 걸음으로 집 근처 술집에 들어섰다.

이미 한쪽 테이블에 그가 아는 동생 셋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게 보였다.

강석호가 합류하자 동생 중 한 명이 바로 술을 따라주며 딸랑거렸다.

“형님, 장사하느라 고생 많으십니다.”

“시킨 일은 잘들 하고 있냐?”

강석호의 물음에 가장 덩치 큰 동생 김태영의 목소리가 은밀해졌다.

“주변에 입 가벼운 인간들한테는 죄다 말하고 다녔습니다.”

“저도 만나는 사람마다 입 털고 다녔어요.”

“저도요.”

김태영에게 질세라 더벅머리 지동천과 짤뚱한 키에 살이 디룩디룩 찐 김중기도 얼른 끼어들었다.

“좀 믿는 눈치야?”

“자기가 자주 가는 분식집 음식 맛을 믿겠어요, 친구 말을 믿겠어요?”

“그리고 형님,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게…… 얘기해 보면 그 분식집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이 더 많아요. 그냥 잠깐 반짝하는 거라니까.”

동생들의 대답에 만족한 강석호가 품 안에서 봉투 세 개를 꺼내 나눠줬다.

봉투를 슬쩍 열어 안을 확인한 동생들의 얼굴에 똑같은 미소가 그려졌다.

동생들이 봉투를 챙기자 강석호가 술잔을 들며 말했다.

“그래서, 태영아. 너 거기서 음식 먹고 어떻게 됐다고?”

그러자 줄곧 은밀하게 떠들던 김태영의 목소리가 커졌다.

“말도 말아요! 지한 분식에서 김밥 한 줄 먹었다가 새벽에 장 뒤틀려 가지고 응급실 가고 난리도 아니었다니까요. 에이, 다시는 안 가야지. 카악 퉤!”

김태영은 주변에 다 들으라는 듯 목청을 높였다.

지동찬과 김중기도 한마디씩 하며 지한 분식을 흉봤다.

열심히 입을 놀리는 동생들의 모습에 강석호의 기분이 아주 좋아졌다.

그날 밤은 술이 참 달았다.

* * *

파워블로거 송유리와 김태영 패거리의 활약으로 지한 분식의 이미지가 구겨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다지 큰 타격이 없었다.

한데 갈수록 손님수가 조금씩 줄더니 지금은 2/3로 줄었다.

그것은 비단 소문 때문에 입은 타격이 아니었다.

안 좋은 소식이 도는 것과 동시에 하늘 분식에서 방문하는 모든 손님들에게 한 달 간 공기밥 무한 리필 서비스를 시작한 것이다.

음식을 팔아도 큰 마진이 남지 않는 분식집으로서는 파격적인 이벤트였다.

지한 분식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이 지속적으로 도는 와중이니, 맛이 좀 떨어져도 하늘 분식에서 양껏 먹는 게 낫다는 심리였다.

이제 하늘 분식은 차츰 예전의 재미를 다시 맛보고 있었다.

반대로 지한 분식은 웨이팅이 사라졌다.

분위기가 이렇다 보니 강지한은 연말을 다른 사람처럼 기쁘게 보낼 수가 없었다.

오늘은 2017년의 마지막 해인 12월 31일.

그리고 강지한이 식당 문을 연 이후 처음으로 쉬는 날이기도 했다.

그는 식당의 휴일을 매주 일요일로 정했다.

이제 다음 주부터는 이리나도 주 6일만 나오면 된다.

때문에 강지한 역시 오늘은 식당에 출근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오전부터 앞치마를 두르고서 옥탑방 주방에 서 있었다.

화르륵. 타타타타탁! 치이이익. 보글보글. 서걱! 서걱!

강지한은 주방에서 쉬지 않고 여러 가지 요리를 만들고 만들고 만들고 또 만들었다.

완성한 요리는 버릴 수 없으니 식사를 하지 않은 원룸 입주민들과 김숙자, 이향숙을 초대해 함께 먹었다.

그러고서는 또다시 요리를 만드는 걸 반복했다.

그가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음식의 숙련도를 빨리 올려 레벨 6에 달성하는 것밖에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저녁 무렵까지 쉬지 않고 요리를 한 강지한이 레벨 업 현황을 열었다.

<레벨 업 현황>

[강지한]

얼굴  LV5 만족도+4 (NEXT 숙련도 52/100)

혀   LV5 미각+4  (NEXT 숙련도 54/100)

목소리 LV5     (NEXT 숙련도 62/100)

손   LV5     (NEXT 숙련도 80/100)

잠겨 있는 능력    (하나의 숙련도가 100이 되면 열립니다)

[음식]

떡볶이 LV5     (NEXT 숙련도 63/100)

오뎅  LV5     (NEXT 숙련도 52/100)

떡볶이 볶음밥 LV5  (NEXT 숙련도 49/100)

라면  LV5     (NEXT 숙련도 57/100)

김밥  LV5     (NEXT 숙련도 58/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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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탕이 LV4]

핥기, 손, 앉아: 행복+3

누적 포인트: 39,372

단골 포인트: 13(MAX 30)

“후우.”

마음 같아서는 재료를 더 사다가 연습을 하고 싶었는데, 더 이상은 먹을 수가 없어서 만드는 족족 버려질 것 같았다.

원룸 근처의 상가는 물론이고 멀리 떨어진 상가의 상인들과 시장 상인들의 배도 강지한이 공짜로 다 채워준 터였다.

게다가 내일 장사도 신경 써야 하니 체력 또한 비축해 둬야 했다.

강지한은 주방을 정리하고 설탕이와 함께 산책을 나갔다 돌아왔다.

씻고 자리에 눕는데 강지한의 품으로 쏙 들어온 설탕이의 4레벨 애정도가 가득 찼다.

설탕이의 머리 위에 떠 있는 하트는 전보다 테두리가 커지며 속이 텅 비었다.

그리고 숫자 4가 지워진 대신 5가 자리하고 있었다.

[설탕이의 레벨이 5가 되었습니다.]

[잠겨 있던 능력 중 하나가 개방됩니다.]

[‘엎드려’를 얻었습니다. 레벨 업 현황을 확인하세요.]

그동안 설탕이를 잘 돌봐주며 애정을 쏟은 덕에 레벨이 한 단계 더 올랐다.

“쑥쑥 잘 크는구나, 우리 설탕이.”

강지한이 설탕이를 품에 안고 스르르 잠이 들었다.

* * *

다음 날.

새해인 만큼 분식집을 찾는 손님이 별로 없을 것이라 예상했던 강지한이었다.

그런데 11시 오픈을 하자마자 여고생들이 우르르 몰려들어와 테이블을 가득 채웠다.

교복을 입지 않았어도 강지한은 그들이 여고생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가 리어카에서 장사를 하던 시절 항상 찾아주었던 단골들이었으니까.

그리고 여고생들의 중심엔 유정미가 있었다.

“오빠! 저 왔어요!”

“정미야, 여행 잘 갔다 왔어?”

“그럼요. 돌아오자마자 애들 끌고 왔는데~ 착한 일 했으니까 양 넉넉하게 줄 거죠?”

“숟가락 대신 주걱으로 퍼먹게 해줄게.”

“오빠가 짱이에요. 근데 저 부탁할 게 하나 있는데.”

“서비스도 줘?”

“나 그렇게까지 돼지는 아니에요.”

말을 하며 유정미가 카메라를 내밀었다.

“짜잔.”

“뭐야?”

“오빠! 제가 BJ 한다고 말했었죠?”

“그랬지.”

“오늘 지한 분식 스페셜로 방송 내보내도 돼요?”

“여기를?”

“네, 홍보 제대로 해드릴게요. 대신에 정말 주걱으로 퍼먹을 만큼 넉넉하게 주시겠다고 약속해요.”

“아니 그거야, 방송이랑 상관없이 그렇게 해주지.”

“그럼 허락하신 거죠? 카메라 켤게요!”

강지한의 입장에서야 나쁠 게 없으니 쉽게 수긍해 주었다.

그러자 유정미는 대번에 방송을 켜 지한 분식의 실황을 중계했다.

“안녕하세요~ 님들! 싸랑스러운 정미 와떠염~!”

* * *

유정미와 고등학생들이 다녀가고 난 이후, 저녁 장사는 큰 재미를 못보고 영업을 종료했다.

그러자 강지한의 눈앞에 메시지가 나타났다.

[오늘의 실적을 최종 평가해 인지도에 반영합니다.]

[손님들이 그럭저럭 들었습니다.]

[파워블로거의 글은 여전히 빠르게 퍼져 나가고 있습니다.]

[유정미의 방송이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유정미가 현재 개인방송을 켜, 파워블로거 맛탐의 지한 분식 평가글에 반박하고 있습니다.]

[지한 분식의 옹호론이 빠르게 퍼져 나갑니다.]

[맛탐과 유정미의 갑론을박 썰전이 일부 네티즌들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지한 분식에 대해 믿음이 흔들렸던 손님들 중 이를 우연히 접한 이들의 인식이 다시 우호적으로 돌아섭니다.]

[유정미의 인터넷 방송이 호재로 작용해 하락했던 인지도가 다시 상승합니다.]

[맛탐과 하늘 분식 사이에 모종의 뒷거래가 있었던 것이 아니냐는 얘기가 돌기 시작합니다.]

[인지도가 1 올랐습니다.]

[목표: 매장의 인지도를 80 이상 올려주세요. 79/100]

* * *

점심시간.

강석호가 홀을 가득 채운 손님들을 보며 뿌듯한 미소를 머금었다.

“분식집이 이래야지.”

강석호의 눈에 식사를 하는 손님들의 얼굴이 전부 돈으로 보였다.

‘그 여자 보통이 아니야.’

그는 천명옥을 떠올렸다.

그녀의 말대로 일을 진행했더니 거짓말처럼 모든 것이 수월하게 풀려 나갔다.

가만 생각해 보니 외모도 제법 괜찮았던 것 같았다.

‘사례를 하겠다고 핑계를 대서 다시 만난 다음에 술 한잔 곁들이면…….’

강석호의 머릿속에서 음탕한 상상의 나래가 마구 펼쳐져나갔다.

그때 식사를 마친 손님이 카운터로 다가왔다.

“계산이요.”

강석호가 풀어진 얼굴을 얼른 고쳤다.

“네! 맛있게 드셨어요? 12,000원입니다! 현금 받았습니다. 거스름 돈 여기 있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한 테이블이 비자마자 새로운 손님이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매일매일 오늘만 같으면 하면 좋겠다 생각하는 강석호였다.

* * *

유정미가 왔다간 다음 날은 리어카 단골이던 아줌마 부대가 우르르 몰려와 점심 테이블을 가득 채웠다.

“지한 총각! 오래간만이야~”

“너는 단골이라는 애가 이제야 여길 와? 나는 벌써 다섯 번이나 왔어!”

“동네에서 멀리 가니까 그렇지. 앞으로 자주 올게, 지한 총각.”

“근데 우리 강 사장 못 보던 새 더 잘생겨진 것 같아? 호호호!”

“조카뻘이야, 이 아줌마야. 정신 차려.”

“지한 총각! 우리 여기 머릿수대로 알아서 음식 내어줘. 파는 음식 전부 내와요.”

“아니 여기 음식이 얼마나 맛있는데 조미료 범벅이니, 누구는 먹고 속이 뒤틀려서 입원했다느니 하는 소문을 퍼뜨린대 그래?”

그 말에 강지한과 이리나의 귀가 쫑긋했다.

파워블로거 맛탐은 지한 분식을 혹평했으나 저런 얘기까지는 하지 않았다.

누군가 또 다른 사람이 지한 분식을 음해하고 있었다.

“그런 소문이 돌고 있어요?”

강지한이 물었다.

“그렇다니까.”

“내가 보기에 분명히 누가 악의적으로 이상한 소문 퍼뜨린 거야.”

“누가?”

“강 사장 안 되면 이득 볼 인간이겠지 뭐. 저~ 쪽 상가 건물 분식집이라던가.”

“가본 적도 없는 분식집 끌어다가 괜히 악담하지 마, 이 여편네야.”

“말이 그렇다는 거지. 요즘 남 잘되는 꼴 못 보는 인간들이 좀 많냐고.”

“그렇긴 해. 아유, 배고파. 우리 음식 빨리 되죠?”

“네. 얼른 해드릴게요.”

음식을 만드는 강지한의 머릿속으로 아주머니들의 대화가 계속 맴돌았다.

‘내가 망하면 이득을 볼 사람…….’

그러고 보니 이상했다.

자신에게 원한도 없는 파워블로가 와서 괜히 트집을 잡아 혹평글을 올리는 것부터 근거 없는 괴소문까지.

이건 분명 누군가 힘을 쓰고 있는 것이었다.

이 근처엔 다른 분식집이 한 군데밖에 없었다.

하늘 분식이었다.

직접 들른 적은 없지만 일요일 날 요리 연습을 하며 음식을 돌리다 본 기억이 있었다.

당시에는 하늘 분식 역시 휴무라서 음식을 전해주지 못했었다.

요리를 하고 있는 강지한에게 이리나가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사장님, 하늘 분식에서 최근에 공기밥 무한 리필 서비스 시작한 거 알아요?”

“그래?”

“네. 시기적으로 참 이상하게 맞물리지 않아요?”

“…….”

생각하면 할수록 점점 더 하늘 분식에 대한 의심이 커져가고 있었다.

* * *

오후 3시.

점심 장사를 마치고 한산해지자 강지한은 이리나와 함께 끼니를 챙기기로 했다.

“리니야, 뭐 먹을래?”

강지한의 물음에 리나가 망설임 없이 말했다.

“우리 비빔밥 해먹을까요?”

“비빔밥?”

“네!”

강지한이 가만 생각해 보니 안 될 것도 없었다.

김밥에 들어가는 재료 몇 가지와 고추장, 참기름만 있으면 되는 일이었으니.

강지한은 양푼에다 밥을 가득 담고 프라이팬에 계란 세 알을 깠다.

치이이익!

좋은 소리를 내며 계란이 익어갔다.

그동안 김밥 재료들 중 볶아놓은 어묵, 당근, 햄, 데친 시금치를 적당한 크기로 넣었다.

거기에 외부 업체에서 반찬으로 받아쓰는 무채김치도 양푼에 한 줌 넣고, 반숙으로 알맞게 익은 계란까지 투하.

밥 양에 맞춰 고추장 두 숟갈을 크게 퍼 넣은 뒤, 참기름까지 뿌렸다.

마지막으로 깨를 뿌린 강지한이 그대로 갖고 나가려다가 멈칫했다.

갑자기 살아생전 엄마가 해줬던 비빔밥이 떠올랐다.

‘엄마가 해줬던 비빔밥은 조금 더 달큼해서 맛있었는데.’

강지한은 그 맛이 그리웠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그 맛을 따라하려 해봤지만 당최 뭐가 들어가는지 알 수가 없으니 재현하는 것이 요원했다.

하지만 지금은 또 모르는 일.

강지한이 기억 속의 맛을 정확히 떠올렸다.

그러자 그의 머릿속에서 느껴졌던 맛의 정보가 미각을 관장하는 뇌기관을 자극했다.

이윽고 엄마의 비빔밥에 들어간 재료들이 하나둘 그려졌다.

갓 지은 밥. 고추장. 참기름. 냉장고에 남아 있던 각종 반찬들. 야채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그 달큼한 맛은…….

‘물엿?’

물엿이었다.

엄마는 비빔밥을 할 때 아주 소량의 물엿을 넣었던 모양이다.

강지한이 반신반의하며 약간의 물엿을 첨가해서 테이블로 가져갔다.

어묵이 담긴 어묵국도 한 그릇씩 퍼서 가져왔다.

그 사이 이리나는 스마트폰으로 비빔밥을 찍고 있었다.

“와아! 너무 맛있겠다.”

“그걸 뭐하러 찍어. 재료 있는 거 대충 털어 넣은 건데.”

“풍성하니 맛있어 보이잖아요.”

사실 이리나가 사진을 찍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강지한은 몰랐지만 그녀는 나름대로 열심히 자신의 SNS에 지한 분식을 홍보하는 중이었다.

이렇게 강지한이 만들어주는 음식이나 주방에서 열심히 일하는 강지한의 모습들을 찍어서 적당한 멘트와 함께 꾸준히 업로드하고 있었다.

그걸 보고 지한 분식에 찾아오는 지인들도 간혹 있었다.

요즘 이리나는 아예 지한 분식 전용 SNS를 하나 만들까 생각하는 중이었다.

이리나가 사진을 업로드하는 사이 강지한이 비빔밥을 슥슥 비볐다.

고슬고슬 지어진 밥알은 뭉개지지 않고 쉽게 풀어졌다가 고추장 양념을 입고 다시 오밀조밀 합쳐졌다.

사이사이 어우러져 조화롭게 섞이는 각종 고명들이 보기만 해도 침샘을 자극했다.

숟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고소한 참기름 향이 올라와 후각을 자극했다.

꼴깍.

이리나가 저도 모르게 군침을 삼켰을 때, 드디어 밥이 보기 좋게 비벼졌다.

“먹자.”

“잘 먹겠습니다!”

두 사람의 숟가락이 바쁘게 움직였다.

한술 크게 떠서 동시에 밥을 입에 넣은 강지한과 이리나는 눈을 크게 뜨고 서로를 바라봤다.

“우와……. 대박.”

이리나의 입에서 맛의 향연이 벌어졌다.

비빔밥은 어지간하면 다 맛있다.

그리고 그 맛이 다 비슷비슷하다.

이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다른 비빔밥에서는 느낄 수 없는 묘한 달큼함이 느껴졌다.

그 달큼함이 기존 비빔밥의 여러 가지 맛들을 더욱 결속력 있고 조화로워지도록 만들어주고 있었다.

“이거 뭐예요? 뭐 넣었어요?”

“응? 물엿을 조금…….”

“아! 물엿이구나. 근데…… 오빠는 직접 만들어 놓고 왜 놀라요?”

“너무 맛있어서.”

“뭐야, 쿡쿡.”

이리나는 강지한이 장난치는 줄만 알았다.

그게 아니었다.

강지한은 진심으로 놀라고 있었다.

‘똑같아.’

엄마가 해주었던 비빔밥의 맛이 혀 전체로 전해졌다.

기억 속에서 재탄생시킨 엄마의 비빔밥이 재료의 비밀을 정확히 파악하게 만들어 주었다.

두 사람은 이후로 주고받는 말도 없이 먹는 데만 집중했다.

물엿 약간으로 더 맛있어진 비빔밥과 어묵국은 금방 동이 났다.

“진짜 맛있었다.”

“나도.”

“오빠, 이 비빔밥도 메뉴에 넣어요!”

안 그래도 강지한 역시 그 생각을 하던 차였다.

평범한 비빔밥이라면 다른 메뉴들이 워낙 막강해서 내놓기엔 밸런스가 맞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비빔밥은 맛이 뛰어난 건 아니더라도 다른 비빔밥에서 맛보기 힘든 독특함이 있었다.

조금만 레시피를 손보면 손님들에게 내놓을 만했다.

“그래. 한 며칠만 연구해서 메뉴에 올려보자.”

“분명히 잘 팔릴 거예요.”

씩씩하게 말을 한 이리나가 빈 그릇을 들고 주방으로 갔다.

그러고는 강지한이 말릴 새도 없이 설거지를 했다.

“주방일은 하지 말라니까.”

“설거지 거리 얼마나 된다고요. 짜잔~ 다 끝났어요.”

“손님 올 때까지 조금 쉬어.”

“네~ 근데 오빠.”

“응?”

“이 식당 진짜 저주받았던 거 맞아요?”

“그건 왜?”

“전 여기서 일할 때마다 오히려 정반대의 에너지를 받아서…… 굳이 표현하자면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라고 해야 하나?”

“축복?”

“네, 제가 다른 곳에서도 서빙 알바 했었잖아요. 거기도 나름 맛집이라 손님이 많이 들었는데 일하고 나면 늘 다리 후들거렸었어요. 그런데 여기서는 그렇게 손님을 많이 받아도 항상 개운하고 피로가 쌓이지 않는 거 있죠?”

“그거 다행이네.”

“그리고 홀에 있으면 몸이 가벼워지는 기분이 들어요. 막 날아다닌다니까요.”

그건 강지한이 레벨 업 시킨 바닥의 버프 효과 덕분이었다.

강지한은 이리나의 말에 모른 척 그저 미소 지었다.

그때였다.

식당 문이 열리며 험상궂은 인상의 장정 열 명이 우르르 몰려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이리나가 밝은 기운을 마구 뿜어내며 인사를 건넸다.

하나같이 어딘가 칙칙한 분위기를 풍기는 장정들은 말없이 빈자리를 찾아 앉았다.

그런데 그들 중 강지한이 아는 얼굴이 한 명 있었다.

“여~ 강지한이.”

주방과 가장 가까운 테이블에 앉은 그가 씩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중만 아저씨? 식사하러 오셨어요?”

그는 리어카 장사를 하던 고중만이었다.

피차 좋은 감정이 없는 사이였기에 강지한의 음성이 영 퉁명스러웠다.

“왜? 이 집은 손님 가려서 받나?”

“……아뇨.”

두 사람 사이의 안 좋은 기류를 눈치챈 이리나가 불쑥 끼어들었다.

“메뉴 고르시고 저한테 말씀하시면 돼요.”

“다들 주문하지.”

고중만의 말에 사람들은 메뉴를 살피고서 먹고 싶은 것을 이리나에게 주문했다.

강지한은 주문표를 넘겨받아 바로 요리를 시작했다.

그런 그의 귀로 고중만의 음성이 흘러 들어왔다.

“이봐, 지한이. 난 자네가 매장 얻어 갔다고 해서 아주 불티나게 잘되는 줄 알았지. 근데 이게 뭐야? 오픈빨 반짝하는 것 같더니 연일 안 좋은 소문만 무지하게 들리던데.”

강지한은 아무런 대꾸도 없이 꿋꿋하게 음식 만드는 데만 집중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고중만은 계속 떠들어댔다.

“그래서 소문의 진상을 확인하려고 동네 친구랑 후배들 좀 데려왔으니까 최고로 맛있게 해서 내와봐.”

고중만이 비리게 웃으며 말했다.

그의 안하무인 격 행동에 이리나는 울컥했지만 가뜩이나 분위기가 안 좋은 요즘 손님과 싸울 순 없으니 애써 참았다.

‘시비 걸러 온 거야 뭐야. 혹시…… 이 사람들이 나쁜 소문 퍼뜨리고 다니는 거 아닐까?’

이리나의 머릿속의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완성 된 음식들이 하나둘 나왔다.

이리나가 열심히 서빙을 했고, 음식을 받은 이들은 별말 없이 식사를 시작했다.

고중만은 가장 나중에 음식을 받았다.

그가 주문한 건 떡볶이와 어묵 두 개였다.

테이블에 놓인 음식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 알 수 없는 감정이 교차했다.

고중만이 젓가락을 들고 떡볶이를 하나 집어 먹었다.

이어, 어묵도 씹어 먹고 국물도 마셨다.

사람은 많은데 그 사이에서 오가는 대화는 없었다.

다들 묵묵히 식사를 했고, 20분도 지나지 않아 모든 사람이 그릇을 깨끗하게 비웠다.

고중만도 자신이 주문한 음식을 전부 먹은 뒤, 의미심장한 얼굴로 강지한을 쳐다봤다.

“잘 먹었다, 지한아.”

이리나는 불안했다.

아무래도 저 사람들이 식당을 나가서 이상한 말을 퍼뜨리고 다닐 것 같았다.

강지한 역시 조금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고중만이 천천히 일어서서 같이 온 사람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솔직히 말해봐. 맛이 어땠어?”

그러자 여기저기서 대답이 터져 나왔다.

“맛있는데?”

“소문 듣고 별 기대 안 했는데 엄청 맛있구만.”

“고맙다, 중만아. 네 떡볶이만 먹다가 여기 떡볶이 먹으니까 싸구려 됐던 혀에 금칠하는 기분이다.”

친구의 농담에 식당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고중만도 기분 나빠하지 않고 픽 웃었다.

“넌 새끼야, 앞으로 공짜 떡볶이 꿈도 꾸지 마.”

“줘도 안 먹어, 인마. 여기 와서 돈 내고 먹을 거야.”

다시 한 번 웃음이 식당 안을 가득 채웠다.

고중만이 친구에게 뒀던 시선을 강지한에게 돌렸다.

“들었지? 네 음식 맛있단다. 참고로 내가 데려온 사람들 하나같이 입이 가벼워서 동네방네 얘기하고 다닐 거야. 지한 분식 음식 잘한다고.”

강지한은 이런 말을 하는 고중만의 저의가 무언지 알 수 없었다.

그가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고중만은 카운터로 다가갔다.

“여기 계산.”

“아, 네!”

이리나가 카운터에 다가가 고중만에게 음식값을 받았다.

그러는 사이 고중만의 지인들은 우르르 식당 밖으로 나가버렸다.

현금으로 가격을 지불한 고중만이 식당의 문 앞에서 잠시 멈춰섰다.

“이봐, 지한이. 아니, 강 사장이라고 해야지, 이제.”

강지한이 주방에서 그런 고중만을 가만히 응시했다.

“자네 나랑 그렇게 싸우고 떠난 다음에 나도 생각 많이 했어. 그래……. 어린 나이에 부모님까지 여읜 자네한테 내가 참 몹쓸 짓 많이 했더라고. 사람이 참 그래. 먹여야 할 입이 있는데 생계에 위협을 받으면 치졸해지는 거야. 그래도 내가 그랬으면 안 되는 거였는데……. 이미 사과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건 보름도 더 됐는데 도통 발이 안 떨어져서 이제야 왔어.”

“중만 아저씨.”

“소문은 신경 쓰지 말고 소신대로 해. 그거 자네 특기잖아.”

말을 하다 말고 고중만이 홀을 슥 둘러봤다.

“여기, 참 잘될 거야. 갈게, 강 사장. 자네 음식 참 잘해. 맛있게 잘 먹었어.”

그리 말하는 고중만의 입가에 처음으로 진심이 담긴 미소가 어렸다.

그 미소를 남겨두고서 고중만은 식당을 나갔다.

강지한의 가슴에 처음으로 고중만이 어른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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