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룬의 아이들 윈터러 새벽을 택하라 7
지은이 : 전민희
출판사 : 제우미디어
출판년도 : 초판 발행한 날 2002년 9월 25일
초판 3쇄 인쇄한 날 2003년 3월 3일
저자소개 : 전민희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회(민예총) 연구원 역임
장편 판타지 소설 [세월의 돌] 인터넷에 연재 후 [태양의 탑]으로 출간
차례(목차) : 1장, I am the master of my fate, Iam the captain of my soul
1. 다시 만난 소녀
2. 황무지 여행
3. 천 년 전의 생존자
4. 인형전투
5. 늙은이의 우물
6. 강한 것은 반드시 악이 되는가?
7. 소원 없는 인간
2장 , One Meets His Bestiny Often in the Road He takes to avoid it
1. 최초의 평화
2. A Winter Meets a Spring
3. 친구
4. 다시 한 번 그 생명, 내게 맡겨줄 수 없겠어?
5. 그리고 운명은 깨어나고
3장, Nature seals her promise of spring in white
1. 마침내 돌아온 잔
2. 최후의 인사
3. 유년의 겨은 끝나고
4. 살아남은 자들
5. 가장 아름다운 찬트
룬의 아이들-윈터러 제작노트
1장, I am the master of my fate, Iam the captain of my soul
1. 다시 만난 소녀
렘므의 바다는 전과 다름없이 차가웠다. 실은 몇 개월 전에 보고 다시 보는 것이건만, 기억 속의 어떤날처럼 거친 바다는 처음 섬에 들어가던 날의 봄이 오늘로 이어진 듯한 착각을 자아냈다. 호송자들과 헤어지고 홀로 남은 그는 이제 섬사람 다프넨이 아니라 다시금 보리스 진네만이었다. 오늘과 같은 날을 예감하기라도 한 듯, 옛 이름은 잘 맞는 옷처럼 기다리고 있다가 다시 그의 것이 되었다. 또 한 번 살기 위해 돌아온 대륙, 전과 같은 녹청의 바다, 귀에 설기도 하고 익기도 한 렘므 사투리, 바다 없이 걸어서 돌아갈 수 있는 고향, 그 모든 것 중에서도 옛 이름을 순식간에 익숙하게 느끼는 가장 낯설었다. 꿈에서 깨어난 사람이 현실감각을 되찾는 순간 인상적이었던 꿈을 잠깐만에 다 놓쳐버리듯, 그가 투쟁했던 자들, 사랑했던 자들이 모두 다 꿈속의 그림자들에 불과한 존재로 변한 것만 같았다. 이제 다시는 손으로 움켜잡을 수 없는, 이제 다시는 되돌아가 살아갈 수 없는, 한때 당연히 존재한 현실이란 것을 누구도 확인해주지 않는 그 곳이었다. 어떤 대륙 사람도 모르는섬, 이렇듯 아무렇지도 않게 걷고 있는 건 그래서인지도 모른다. 엘베 섬 연안에 이르자 작은 배를 타고 돌아다니는 유물 사냥꾼들의 배를 쉽게 볼 수 있었다. 전에는 몰랐지만 지금은 그들이 건지려는 유물이 누구의 것이며 왜 거기에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저 심연 아래 가라앉은 가나폴리의 가장 큰 비행선에는 얼마나 많은 희귀한 보물들이 실려 있었던 걸까. 보리스는 나우플리온이 소개 편지를 써 주었던 사람들을 찾아가지 않았다. 나우플리온은 자기 곁을 떠나 혼자 살게 될 보리스를 염려해서 여러 장의 소개 편지를 써 주었는데 보리스는 한 장도 열어보지 않았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나우플리온이 친필로 쓴 편지는 그것을 받아볼 사람들보다 보리스 자신에게 더 큰 의미가 있었다. 내용이야 어찌됐든 나중에, 정말로 그를 간절히 보고 싶어질 때 뜯어볼 생각이었다. 보리스가 정말로 가야 할 곳은 달리 있었다. 트라바체스에서 보낸 추적자들에게 정보가 들어갈 것을 우려하여 일부러 엘베 섬에 상륙하지 않았고, 나우플리온과 여행했기 때문에 익숙한 님(Nym) 반도쪽으로도 가지 않았다. 보리스가 호송자들에게 부탁해서 상륙한 지점은 엘베 섬 아래로 동 티보 만을 끼고 불쑥 튀어나온 노아미드 반도 안쪽 해안이었다. 노아미드 반명목상으로는 렘므 왕국의 땅이지만 필멸의 땅(Mortal Land)이 서서히 넓어지면서 황무지화가 일어나 실질적으로는 어떤 나라도 관리하지 않는 지역이 되어 있었다. 기껏해야 나라와 나라 사이를 넘나드는 자들의 드문 통로로 이용될 뿐인 이곳이야말로 사람들의 눈을 피하기에는 제격이었다. 실제로 보리스가 대륙에 상륙하여 하루 동안만난 사람은 기껏 다섯 명에 불과했는데, 그나마 모두들 자기 갈 길 재촉하기에 바빠 길가는 이웃에게 최소한의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하루 반나절을 걸은 끝에 쇠락해 가는 변경 항구 노아미드 시착했다. 노아미드 시는 한때 융성했으나 필멸의 땅의 사막화 영향 때문에 유동 인구가 줄어든 후로, 규모에 비해 사람이 극히 적은 쓸쓸한 도시로 변모해 있었다. 보리스는 이곳에서 하루 동안 머무르며 그가 가고자 하는 목적지를 위해 몇 가지 정보를 얻었다. 그리고 여행비용을 마련하라며 나우플리온이 쥐어줬던 금 세공품을 몇 개 팔았다. 필멸의 땅은 너른 황무지라고 알려져 있지만 동쪽과 서쪽은 험준한 산맥이 가로막고 있으므로 접근할 수 있는 지점은 몇 군데로 제한되어 있었다. 물론 대부분의 대륙 사람들은 그곳 근처로 가는 꺼리지만, 예전 보리스가 만난 야니카 일행이 말했던 것처럼 땅 변두리를 맴돌며 위험한 사냥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아주 않았다. 겁없는 용병이거나 보물을 찾아 한 건 올리는 것이 목표인 이 자들이 주로 집결하는 장소가 남쪽에 하나, 북쪽에 하나 두 군데 있었다. 남쪽은 이미 필멸의 땅과 자국 국토 사이의 경계가 희미해져 버린 레코르다블의 변경 도시 마하자파드나였고, 나머지 하나는 노아미드에서 내륙으로 90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시골 마을 율드루이였다. 율드루이에 도착한 것은 대륙에 도착한지 꼭 닷새 만이었다. 해 그림자가 늙은 미행자처럼 길게 늘어져 흐늘거리는 가운데 3층 집 꼭대기에 달린 풍향계가 빙글빙글 돌았다. 그 자신이 바람을 몰고 온 듯, 마을 입구로 들어선 보리스는 이윽고 풍향계 달린 바로 그 집으로 다가가 문짝에 달린 쇠고리로 두 차례 문을 두들겼다. “손님은 5시까지야. 알아?” 문짝 머리에 달린 작은 쪽창이 열렸다가 닫히고, 매부리코 주인이 문을 열고 보리스를 들여보냈다. 회색 섞인 금발이 불에 한 차례 탄 것처럼 부숭부숭 들뜬 쉰 살 가량의 사내였다. 그는 보리스가 들어오고 나자 다시 문을 닫고 빗장을 단단히 질러 놓았다. 안에는 사람이 꽤 됐다. 테이블 일고여덟 개가 가득 찼고, 칸막이 부엌 앞으로 구획 겸 길쭉하게 만들어 놓은 바(bar) 앞에 대략 열 명 가량의 사내들이 서넛씩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문소리를 들은 그들은 이야기를 나누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밖이 어둑해지는 시각부터 방문자의 발길이 뚝 끊기는 이곳에 새로 나타난 자가 누구인가 살피는 양인었다.바다 냄새가 덜 가신 소년이 입구에 서서 안쪽을 살피는 것이 보였다. 어두운 빛깔 망토 자락, 청동빛 도는 긴 머리채, 소년답지 않게 단단해 보이는 턱, 그 모두에서 단지 착각만은 아닌 소금내가 어렴풋이 감돌았다. 본래 내륙의 땅에서 태어나 자란 보리스는 거친 섬에서 2년을 보내고 이제 스물 먹은 젊은이들만큼이나 큰 키, 단단하게 잡힌 몸, 그리고 바닷사람들의 날카로운 눈매를 지니게 됐다. 누구의 눈에도 트라바체스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을 터였지만, 스스로는 그것을 잘 깨닫지 못했기에 늘 망토에 달린 두건을 깊게 내려 얼굴을 감췄다. 구석 테이블을 택하는 대신 바 앞으로 다가간 보리스는 맨 끝에 앉아 낮은 목소리로 데운 포도주를 주문했다. 몇 십 년 전 이 일대에 근거지를 갖고 있었다는 어느 종교의 교회당을 개조하여 만든 이 여관은 율드루이에서 유일하게 사철 영업을 할 정도로 적지 않은 손님이 모여드는 곳이었다. 장사는 꽤 잘 됐다. 필멸의 땅으로 가서 한 몫 잡으려는 자들이 꾸준히 모여들어 매상을 올려주는 탓이다. 이곳 주인 자신도 한때 그의 손님들처럼 필멸의 땅 변경을 드나들며 돈벌이를 하다가 늙어 이곳에 정착한 자였다. 흔히 ‘황무지 사냥꾼'이라고 불리는 이 무리들은 십여 년 이상 이 여관을 본거지로 삼고 있었다. 필요한 물품들도 대부분 이곳에서 팔았다. 평소에는 제각기 대륙 각지에서 일하다가 용병 일이 드문 철이 되면 슬슬 모여들어 지난해의 안부를 주고받곤 하는 곳이라, 대부분의 손님들은 서로의 얼굴을 잘 알았다. 워낙 이런 식으로 모여든 인구의 대부분을 이루는 마을이니 렘므 사투리 쓰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새 얼굴은 해마다 몇 명씩 채워질 뿐인데, 이들 무리의 기억력 탓일지도 모르지만 신참내기의 수는 지난해에 돌아오게 된 자들의 수와 딱 일치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보리스 앉은 자들이 나직이 수군댔다. 그래, 올해엔 오브렌이 돌아오지 않지 않았나, 아냐, 그 자는 하이아칸에서 큰 건을 물었다는 거야, 내년까지는 오지 않을걸, 그러면 역시 율 대신인가, 그 자야말로 작년부터 소식이 없지 않나, 그 패거리는 유령이 잡아갔다던데, 기타 등등. 주인의 의동생이라는 애꾸눈의 사내가 보리스 앞에 포도주 잔을 탁, 소리나게 놓으며 물었다. “님 반도에서 왔나?" “아니오.” “냄새가 그쪽인데." 보리스는 포도주를 반 잔 가량 마셨다. 주위에 가득 찬 자들이 대부분 용병인 까닭에 그는 두건을 내리지 않았다. 돈만 주면 무슨 일이든 하는 이런 자들이 혹 보리스를 잡으려는 자들과 안면이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윽고 밖이 완전히 어두워졌다 필멸의 땅에 매우 가까운 이곳은 밤이 되면 혹 유령들의 눈길을 끌까 싶어 빛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문이며 창문을 단단히 닫아걸었고, 손님도 받지 않았다. 검은 그림자들이 달아나는 사냥꾼들의 뒤를 따라나와 마을에까지 큰 피해를 끼치는 경우가 적지 않기 때문이었다. 보리스도 그 얘기를 들어 알고 있어서 해 떨어지기 전에 도착하려고 걸음을 재촉했던 것이다. 그런데 반시간쯤 지났을까, 다시 한 번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바에 앉아 있던 손님들 중 몇 명이 기분 나쁜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열지 마쇼 주인장."?해 떨어지고 문 두드리는 건 거의 다 여행자를 가장한 유령야." “아니면 유령을 뒤에 달고 오는 녀석이거나." 다시 한 번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주인은 좀 망설이다가 무시하려는 듯 주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잠시 조용해졌을까. 잊어버린 체 떠들면서도 ‘황무지 사냥꾼'들은 자꾸만 문 쪽을 보았다. 이들 대부분은 실제로 필멸의 땅에 떠도는 유령들을 보고 그들에게 쫓겨 보았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의 막연한 공포감보다 구체적인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그런 두려움을 견뎌내고 있는 자신에게 대단한 자부심을 품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보리스는 그만의 특수한 경험으로 인해 ‘유령'이라는 존재를 별로 두려워하지 않게 된 경우였다. 그래서인지 유령이 올 것이 겁난다고 해서 밤에 잠자리를 찾아온 사람을 모르는 체 한다는 것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그렇다고는 해도 사람들의 눈에 띄어가며 굳이 나설 마음까지는 없었다. 그만 가버린 것이 아닐까하고 생각하는 순간, 다시 한 번 문 두드리는 소리가 크게 두 번 울려 퍼졌다. 사람들의 얼굴에 흠칫 놀란 기색과 더불어 짜증스런 감정이 솟아났다. 테이블을 치우던 애꾸눈 사내가 문을 향해 냅다 소리쳤다. “율드루이에서는 5시 넘으면 문을 열어주지 않는단 걸 모르나! 늦게 와서 시끄럽게 굴지말고 자기 운명은 자기가 찾아가란 말이야!” 겨우 밖에서 밤새우는 일 정도로 ‘운명' 따위 거창한 단어를 쓰는 것도 이곳이 아니면 보기 힘든 풍경이었다. 그런데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1층 홀의 천장인 줄로만 알았던 지붕 한쪽 구석에서 네모진 문짝이 덜컹 소리를 내며 열려버렸던 것이다. 동시에 몇 년은 쌓인 듯한 먼지와 낙엽 따위가 우수수 쏟아져내렸다. 모두의 눈이 천장에 가 박혀버렸다. 아래로 늘어져 덜렁거리는 문짝 밖으로 보이는 것은 분명 별이 뜬 하늘이었다. 가장 놀란 것은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다 말고 냅다 튀어나온 여관주인이었다. 그는 고개를 젖힌 채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다가 중얼거렸다. ‘내가 만든 문이지만 예전에 잊어버린 건데, 그러나 충격을 받기엔 아직 일렀다 입구에서 쿵, 하는 소리가 한번 들리고, 지붕을 타고 오는 가벼운 발소리가 그들의 머리 위를 지나쳐 문짝이 있는 곳까지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다들 비켜!" 천장 문 아래에 앉아 있던 자들이 모조리 황급히 일어나는 가운데 의자가 넘어지고 서로 밀치는 소동이 벌어졌다. 무기를 꺼내 드는 자도 여럿이었다. 보리스는 바 한쪽에 앉은 채로 그냥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가 느끼기에 지붕을 가로질러 오는 발소리는 굉장히 가벼웠다.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다람쥐나 작은 짐승이 지나가고 있는 걸로 생각했을 정도로. 발소리가 문짝 앞에서 멈췄다. 획, 무언가가 뛰어내렸다. “!”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허공을 가르는 은빛의 물체였다. 잔뜩 긴장하여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검을 찔러간 자들은 멈출 겨를도 없이 검을 자신들의 검끝을 낚아채는 강한 힘을 느끼며 손에 든 것을 놓치고 말았다. 두 자루의 소검, 한 자루의 곡도가 모조리 주인의 손을 떠나 마룻바닥에 꽂혀 흔들렸다. 한 명이 외쳤다. "여자 애잖아!" 보리스는 앉은 채로 모든 것을 다 보았다. 상대의 무기를 낚아채는 빠른 몸놀림은 분명 그의 기억 속에 있었다. 그러나 전보다 더 강하고 정교해졌다. 단숨에 세 자루의 무기를 무력화하고 자신을 향해 내밀어진 무기들을 모조리 피해버린 소녀는 이제 똑바로로 자신을 공격한 자들을 바라봤다. 그러나 그 눈빛에 분노는 없었다. 사람들은 어이없을 정도로 빠른 사람을 본 나머지 혹 유령과 비슷한 존재가 아닌가 의심한 모양이었다. 다들 여전히 무기를 거두는 가운데 주인이 얼빠진 목소리로 질문했다. “넌 도대체 뭐냐? 사람이냐, 유령이냐?” 소녀의 손에는 별다른 무기가 없었다. 처음부터 공격 의사가 없었다는 의미였다. 레코르다블 용병들이 흔히 쓰는 터번 아래로 길아 늘인 은빛 머리카락이 흔들리다 정지했다. 비록 대답은 없었지만 소녀가 손을 쓰지 않자 웅성거리던 사람들도 이윽고 무기를 내렸다. 사람들을 죽 둘러보던 소녀의 무감정한 보랏빛 눈동자가 보리스와 마주치는 순간, 보리스는 확신했다. 다른 사람일 리가 없었다. 트라바체스에서 그를 도와준 일이 있는 어린 용병 소녀 그 아이였다. 이곳에 용병이 많이 모인다고는 하지만,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런데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 소녀 쪽에서 보리스를 알아보았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그냥 고개를 돌려버린 소녀는 가까운 의자에 앉더니 바로 옆의 애꾸눈 사내에게 짧게 말했다. 아무 것도 설명하지 않는 소녀를 향해 애꾸눈 사내도 적당한 행동을 취했다. 즉, 물을 한 잔 떠다준 뒤 물었던 것이다. “식사?” 긴장했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짐작을 와장창 깨는 소녀의 행동에 틀림없이 꽤 당황했을 테지만, 그걸 주위에 알리고 싶은 자는 아무도 없었던 듯했다. 그래서 그들은 저마다 얼굴들을 마주본 뒤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제 자리를 찾아 앉았다. 내심 이 자그마한 소녀 하나 때문에 그렇게 요란한 행동을 취했던 것이 무안하여, 주위의 동일 업종 종사자들이 자신의 행동을 기억하지 않기만을 바라는 중이었다. 검을 빼앗겼던 자들도 슬금슬금 일어나 바닥에 박힌 자신들의 검을 찾아갔다. 그러나 애꾸눈은 한 가지 궁금한 점을 참을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는 그릇 몇 개를 가져다 소녀의 테이블에 놓으며 자못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저 문은 도대체 어떻게 연 거지? 문 여는 장치는 숨겨져 있었을 텐데. 저기 저런 문이 있는 줄은 어떻게 알았고?” “당신이 찾으라고 말했어." 애꾸눈은 잠시 후 좀 전에 ‘자기 운명은 자기가 찾아가라’고 말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소녀는 이미 고개를 돌린 채 수프를 젓고 있었다. 겨우 여관이 조용해졌다 싶을 즈음, 보리스는 사다리를 타고 기어올라가는 둥 소동을 벌여 천장의 뚫린 문을 닫고 내려오고 나서 불편한 표정이 되어 있는 여관주인에게 말을 붙였다. “황무지.... 가장 멀리 들어갔던 사람이 누굽니까?” 여기 사람들은, 자신들을 가리켜 ‘황무지 사냥꾼' 이라고 하듯 필멸의 땅도 그냥 황무지라고 불렀다. ‘필멸의 땅' 이라는 이름은 그곳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야 하는 입장에서 왠지 재수가 없게 느껴졌고, 렘므와 fp코르다블 등지에서 공식적으로 부르는 명칭인 ‘케이레스 사막(Kayless Desert)'은 기질 사나운 그들에겐 지나치게 점잖게 들렸것이다. “창무지에 가려고?” 어찌 보면 율드루이에 오는 이방인으로서 당연한 목적이었지만 여관 주인은 될 수 있으면 말리고 싶다는 것처럼 목소리를 높여 반문했다. 그러나 보리스는 간단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대답을 기다리며 입을 다물었다. 조금 있자니 주인이 마뜩찮은 표정으로 대꾸해 왔다. “두 말 할 것도 없이 라라자비 그 여자지. 그 여자는 황무지를 반이나 횡단했다는 소문도 있었으니까 금붙이는 하여간 무지하게 많이 가져오는 걸 내가 직접 봤거든. 그 돈으로 어디 하이아칸에 별장이나 짓고 살 일이지, 끝내 사냥꾼 짓거리에 미련을 못 버리는 여자였지." “어디 가면 만날 수 있습니까?” “뻔한 것 아니야? 혼은 지옥에, 몸은 흙으로 갔지. 그런 식으로 살면서 제 명에 죽길 바랄 수야 없잖아?." 옆에서 한 사내가 참견했다. “이봐, 주인장. 시체도 보지 않고 죽었다고 단정짓긴가. 이러다가 나도 여기 몇 년 안 오면 알아서 무덤에 넣어주겠군 그래." 그러자 주인도 머리를 들며 목소리를 높였다. “라자비는 항상 여기서 장비를 준비한 다음 황무지로 갔고, 사냥이 끝나면 여기로 돌아왔어 마지막으로 떠났을 때 내게 맡긴 물건들도 아직 저 구석에 멀쩡히 있지. 그런데 몇 년째 돌아오질 않잖아? 죽은 게 아니면 유령한테 시집이라도 갔단 소린가?” “혹시 정말로 그런 건지 누가 알겠어? 흐흐흐...” 잡스러운 논쟁으로 번지기 전에 보리스는 그들의 말을 잘라야 할 필요를 느꼈다. “좋습니다. 어쨌든 그런 사람이 있었다니 좀 안심이 되는군요. 장비를 살 테니 지도를 좀 보여주시겠습니까?" 보리스는 노아미드에서 대강 이야기를 들어서 이곳에 오면 대륙에서 가장 나은 필멸의 땅 지도를 볼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사냥꾼들이 제각기 새로 탐사한 영역을 추가해 넣기 때문에 지도는 해가 갈수록 좋아지고 있었다.“지도 보겠다고? 그럼 5티보 은화 한 개는 주셔야지." 보리스가주머니 안쪽에서 은화한 개를뽑아 테이블에 얹어놓자 애꾸눈 사내가 지도를 가지고 왔다. 펼쳐 놓고 보니 꽤 큰 지도였다. 다른 나라들은 대충 위치만 표시되어 있었고 필멸의 땅만 크게 그려진 가운데 그 변경의 지리적 특성들이 상세하게 표기된 것이 보였다. 그러나 물론 일정 거리 이상 안쪽으로 들어간 지역은 펜자국 하나 남지 백지였다. 보리스는 대략 훑어보고서 손가락으로 백지 가운데 한 지점을 짚었다. 그리고 짧게 말했다. “여기까지 갈 테니 필요한 물품들을 준비해 주십시오." 옆에서 부질없는 논쟁을 계속하고 있던 사내들이 흘끔 지도를 보다가 보리스의 손가락이 가리킨 지점을 보고 경악하는 표정이다. 잠시 후 주인은 웃음을 터뜨려 버렸다. “이봐, 늙고 병든 주인-이것은 이 주인의 말버릇이었다-붙들고 장난하자는 거야, 뭐야? 거기가 어딘 줄 알고 가니 마니 떠들어? 사람이 어디 할 짓이 없어서 죽을 자리 찾아 그쯤이나 가나? 죽으면 근방에도 얼마든지 좋은 건수가 많아." “그러면 최소한 무덤에 시체는 넣을 수 있다고." “율드루이에 빈 무덤이 없수로(얼마나)많은지 안다라? 알고 싶수면 채마밭 뒤에 묘지에 가보그다라!" “라라자비가 황무지를 횡단하겠다고 호언장담했을 때는 이미 그 땅을 열두 번도 더 드나든 뒤였어! 객기로 내버릴 목숨이라면 나같은 늙은이한테나 적선할 일이지!" 보리스는 그들이 각자 말을 마칠 때까지 기다렸다가 똑같은 어조로 다시 한 번 말했다. “여기까지 갈 테니 필요한 물품들을 준비해 주십시오." 주인이 웃음을 멈추고 보리스의 얼굴을 자세히 보려 했다. 그러나 내려진 두건 때문에 보이는 것은 코와 다물린 입 언저리뿐이었다. 주인이 다시 무어라 말하려 하는데 곁에서 애꾸눈 사내가 참견했다. “로크모드 형님, 그냥 내주시구려. 대신, 얼마 가지도 못하고 돌아와서 장비를 도로 팔려고 할 때는 절대 반값도 쳐주지 마시구려." 로크모드라는 이름의 주인은 양쪽 입꼬리를 내리며 눈을 내리깔더니 소매 밖으로 반쯤 드러나 테이블에 놓인 보리스의 손을 봤다. 손모양을 보며 조금 생각하는 눈치이더니 짧게 물었다. "왜 거길 가려 하나?” “볼일이 있습니다.” “큰 돈이 필요한 사정이라도 있나? 내가 빌려줄 만한 사람을 소개해 줄 수도 있어." “고마운 말씀이지만 돈이 필요해서가 아닙니다." “그럼 도대체 무슨 사정인가? 가나폴리 왕국을 연구하겠다고 마법사들이 종종 오긴 하지만, 검 꽤나 잡았을 법한 자네 손을 보니 그것도 아닌 것 같군 그래. 거기에 뭐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건가? 깊이들어간다고 많은 금붙이를 얻으리란 보장은 없어, 남쪽으로 갈수록 모래땅이고, 밤낮으로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유령들이 자네 몸을 차지하려 노릴 걸세. 그래서 자칫 그들에게 몸을 빼앗기게 된다면 우리 손으로 자네를 죽여주는 것말고는 다른 대책이 없어." 보리스는 두건 안에서 조금 고개를 들더니 대답했다. ‘만일 제가 그렇게 된다면, 제발 그래 주십시오." “,”
표정이 굳어진 로크모드는 더 대꾸 없이 바에서 몸을 돌려 부엌문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차례로 물건들을 꺼내와 바 위에 쌓기 시작했다. 자루에 든 비스킷과 곡식 가루, 줄로 엮어 놓은 말린 과일들, 죽 물주머니 여러 개, 주목 지팡이, 담요, 수건 몇 장, 작은 삽과 도끼, 돌덩어리 같은 암염 조각 등등. 그리고 새 지도를 한 장 갖고 나오더니 처음의 지도를 접어버리고 그 자리에 펼쳐 놓았다. 이 지도에는 대강의 지형 외에는 별다른 표시가 없었다. 로크모드는 잉크에 펜을 찍어서, 율드루이 마을로부터 필멸의 땅 안쪽으로 약 한 뼘 가량의 휘어지는 선을 그렸다. “여기엔 가나폴리 왕국의 옛 도로가 남아 있다. 헤매다가도 여기를 찾아내면 최소한 돌아올 길을 잃지는 않지." 이번엔 그 선에서 좀 떨어진 곳 두 군데에 동그라미를 그렸다. “여기, 그리고 여기에는 여행자들로부터 확인된 샘이 있다. 지금 계절에는 확실히 물이 있을 테니 가려는 길에서 벗어나더라도 반드시 들러서 가도록 해라. 그렇다고 해도 물은 많이 모자랄 거다." 보리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로크모드는 물주머니 한 개를 들어 보이며 말했다. “이 주머니에 하나 가득 채워서 가져가면 하루하고 반나절 정도 견딜 수 있지. 하루에 다섯 번 정도 마신다고 생각하고 양을 조절하는거야. 낮에 걷지 않고 저녁과 밤, 그리고 이른 아침에만 걸으면 그 정도로도 살 수 있어. 갈증이 날 때 작은 돌멩이를 하나 입에 물고 있으면 도움이 되지. 하지만 그보다 더 물을 아끼려고 하면 멀리 가기는 커녕 몸이 먼저 버티지 못한다는 걸 알아라." 그렇게 말한 로크모드는 고개를 갸우뚱하며 조금 생각하더니 말했다. “그런 식이라면, 마지막 샘에서 양껏 보충했다고 해도 갈 수 있는 곳은기껏해야," 그는 한 군데 손가락을 짚더니 펜으로 가위표를 그렸다. “여기가 한계겠군." 그곳은 보리스가 처음 가겠다고 가리킨 곳보다 훨씬 가까운 지점이었다. 그러나 보리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충고는 꼭 기억하겠습니다." 보리스는 돈을 깎거나 하지 않고 주인이 요구하는 그대로 치렀다. 특정 목적에 필요한 것을 한꺼번에 판다는 것 때문인지 다른 곳의 물가에 비해 1.5배 가량 비싼 편이었는데도 그랬다. 17티보의 가치를 갖는 시드 은화 다섯 개와 50티보 금화 한 개, 그리고 엘소노 동전 몇 개를 꺼내 올려놓는 순간, 등 뒤로 누군가가 다가오는 것을 느낀 보리스는 빠르게 몸을 긴장시켰다. 그러나 다가온 손은 테이블 위에 몇 개의 은화들과 금화, 그리고 동전들을 올려놓았을 뿐이었다. 그 액수는 보리스가 낸 것과 정확히 똑같았다. 목소리가 들렸다. “저것과 같은 것." 보리스는 돌아보았다. 뒤에 선 사람은 바로 조금 전의 용병 소녀였다. 로크모드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말했다. “너도 혹시 황무지 가운데로 갈 참이냐?” “아니." “그러면?” 소녀는 손가락을 들어 아노마라드 남부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그리고 말했다. “여기." 로크모드는 도대체 무슨 소리냐는 표정이 되었다. “거기라면 로젠버그 관문 쪽으로 가야 될 텐데? 이 젊은이는 황무지 가운데로 들어가려는 거야. 꼬마 아가씨한테는 이런 장비가 필요 없어. 아니, 들고 가는 것부터 무리지." “로젠버그?” 소녀의 눈동자가 조금 움직이더니 손가락으로 렘므와 아노마라드 사이의 관문, 로젠버그가 있는 곳을 짚었다. “여기?” 로크모드가 손을 내밀어 소녀의 손가락을 잡고는 지도 위를 가로질러 내려가게 했다. 일단 북쪽의 동 티보 만으로 나가서 배를 타고 서 티보 만 쪽으로 돌아서 렘므의 수도 엘티보에 내렸다가, 다시 서남쪽 로젠버그 관문으로 가고, 거기서부터 남쪽으로 죽 내려가는 경로가 그려졌다. “이런 식으로 가면 된단 말이다." 소녀의 대답은 짤막했다. “너무 멀어." 그러더니 로크모드의 손에서 손가락을 빼서 이곳에서 자기가 원하는 지점까지 이어지는 직선 경로를 그려 보였다. 율드루이에서 필멸의 땅을 가로질러, 아노마라드까지 이어지는. “이쪽이 빨라. 그러니 같은 장비를 줘." 이제 로크모드는 할 말을 잊었다. 주위 사람들도, 그리고 심지어 보리스조차도 말문이 막혀 소녀를 내려다봤다. 아직도 열 두세 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앳된 얼굴과 자그마한 몸집을 가진 소녀였다. 갈색 피부에도 불구하고 뺨은 발그레하고 하얀 속눈썹으로 둘러싸인 투명한눈동자는 인형처럼 예뻤다. 아니 실제로, 표정 없는 소녀의 얼굴은 귀족소녀들이 간직할 법한 정교한 인형을 닮아 있었다. 그런데 그런 소녀가 혼자서 필멸의 땅을 몇 십 일 동안 통과해 가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관 주인 로크모드는 조금 전 보리스에게 조언을 한 것과는 달리 아예 말을 할 엄두조차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보리스가 보기에도 소녀에게 그 길이 얼마나 위험한지, 그것이 얼마나 비현실적인 계획인지 일깨워 주는 것은 아무 소용없는 일처럼 생각되었다. 소녀는 불안해하거나 망설이지도 않았고, 짧은 지름길을 택하는 것이 너무 당연하다는 듯 무표정한 얼굴을 들어 주인을 올려다보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리고 결국 두 손 들어버린 주인이 물품들을 가져을 때까지 어떤 물음에도 대꾸하지 않았다. 주인은 금화와 은화들을 챙겨넣은 다음 ‘더 참견해봤자 소용없지'하는 표정으로 두 손바닥을 펼친 채 어깨를 으쓱했다.“요새 소년 소녀들한테 유행인가 보지?”
소녀의 이름은 나야트레이라고 했다. 확실히 들은 일이 있는 이름이었지만 발음이 낯선 탓에 금세 머릿속에서 지워져버렸던 것이다. 더구나 나야트레이를 만났던 당시의 보리스는 스쳐 가는 사람들을 주의 깊게 보고 기억할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그 때 그의 마음은 부서져버릴지도 모르는 불안정한 현실에 온통 매달려 있었다. 나야트레이에게는 성이 없었다. 달의 섬에서 보리스 자신이 그랬듯, 그리고 지금도 레코르다블과 루그란 사람들이 그렇듯 말이다.
그나마 루그란 사람들은 이름 뒤에 출신지나 가문의 별명 등을 붙이곤 하지만 레코르다블에는 그런 것도 없었다. 심지어 그곳엔 제대된 가문조차 몇 개 없었다. 덕택에 보리스 역시 성을 생략하고 이름으로만 자신을 소개해도 좋게 되었다. ‘보리스’는 실버스컬에 출전했을 때도 일부러 바꾸지 않았을 정도로 비교적 흔한 이름이었다. 그리고 둘은 가고자 하는 길이 같았다. 누구나 흔히 가는 그런 길이 아닌 것이다. 지금도 여관 안의 모든 사람들이 의심쩍은 눈초리로 바라보며, 저 많은 장비를 사들인 두 소년 소녀가 과연 정말로 갈 것인지 궁금해하는 그런 곳이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저들이 내일 오후가 되기 전에 돌아올 거라는 데 10티보를 걸기도 했다. 그러나 가고자 하는 길이 같다 해서, 둘이 동행자가 되란 법은 없었다. 또한 두 사람이 각자 계획한 경로는 지도상으로 보아도 미묘하게 어긋났다. 보리스는 로크모드가 말해준 대로 가나폴리의 옛 도로를 따라가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그가 가려는 곳은 가나폴리의 수도 아르카디아였다. 물론 지금은 누구도 아르카디아의 위치를 정확히 모르지만, 그런 큰 도로는 당연히 수도로 이어지기 마련인 것이다. 그런 반면, 나야트레이는 필멸의 땅 서쪽 일부를 가로질러 아노마라드 동부의 한 도시로 가려 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노마라드의 식민령인 트레비조 쪽이었다. 필멸의 땅을 통과하는 것도 문제지만 그쪽 길은 대륙의 등뼈에 해당하는 드라켄즈 산맥(Drakens Mts.)으로 막혀 있었다.그 산맥의 존재 때문에 아노마라드가 필멸의 땅에서 오는 사막화의 힘을 피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로크모드도 같은 점을 지적했다. 그러나 나야트레이는 한 마디로 그의 우려를 막아버렸다. “길을 알고 있어." 나야트레이의 그 발언은 보리스에게 자못 이채롭게 들렸다. 그러니까 어쩌면 나야트레이는 필멸의 땅에 이미 가보았거나, 또는 그곳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알고 있는 것일 지도 모른다. 주위 사람들이 의심쩍은 눈빛으로 한 무리인 양 몰아붙이는 통에 어쩌다 보니 두 사람은 같은 테이블에 앉게 되었다. 보리스가 제일 먼저 한 말은 이것이었다. “넌 무모해." 나야트레이는 눈을 내리깐 채 의외로 쉽게 대답했다. “너와 같은 길이지," 보리스는 미소도 없이 곧장 대꾸했다.“난 그곳에 가야만 할 이유가 있어. 하지만 넌 다른 길로 갈 수도 있지. 내가 네 입장이라면 너처럼 그런 길을 택하지 않아. 일부러 일을 할 사람은 거의 없어." 나야트레이는 잠시 가만히 있더니 말했다. “묘족의 방식은 오직 묘족만의 것." “묘족...?” 그러나 나야트레이는 더 대꾸하지 않았고, 보리스 역시 남의 일에 열렬히 개입하는 성격이 아닌지라 곧 말하는 것을 그만두었다. 묘족이라는 부족에 대해서는 한 번도 들어본 일이 없었다. 그러나 모른다 해도 그만이었다. 식사를 끝낸 뒤 두 사람은 인사도 없이 헤어져 각자의 방으로 갔다.
다음날 오후 늦게 여관을 떠난 보리스는 주인 로크모드로부터 들은 대로 어떤 특별한 장비를 사러 갔다. 필멸의 땅에 들어가려는 사람이 모두 사들이는 것은 아니지만, 보리스처럼 오랜 여행을 계획하는 사람에게는 더없이 필요한 것이었기에 가격이 꽤 비싼데도 불구하고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보리스는 50티보 금화를 여섯 개나 내고 그들이 ‘라마(llama)'라고 부르는 짐승을 샀다. 몸집은 작은 노새 정도고 북슬북슬한 흰 털이 온 몸을 덮고 있는 이 짐승은 타고 다닐 수도 있지만 주로 짐을 싣는 용도로 사육된다고 했다. 특히 황무지나 고원 등에서 물과 사료 없이도 오랫동안 버틸 수 있기 때문에 필멸의 땅과 같은 환경에서는 더없이 적합한 수송 수단이라 할 수 있었다. 워낙 유순한 탓인지 라마를 처음 보는 보리스도 큰 무리 없이 곧 끌고 나올 수 있었다. 라마를 파는 사람이 라마 등에 물주머니 여러 개
를 매다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가죽 주머니에 물을 채우려고 강가로 가던 보리스는 또 하나의 낯익은 얼굴과 마주쳤다. 그 녀석은 보리스가 오기를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길모퉁이에 점잖게 앉아 앞발로 얼굴을 닦고 있었다. 예나 다름없이 험상궂은 얼굴에 작은 호랑이처럼 억센 어깨와 앞발을 가진 녀석이었다. 보리스가 다가가자 녀석은 일어나 반쪽뿐인 꼬리를 쳐들고 슬금슬금 모퉁이를 돌아갔다. 걸음을 멈춘 채 놀라고 있는 사이, 녀석은 모퉁이 저쪽에서 고개를슥 내밀더니 보리스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왜 따라오지 않느냐고 묻는 것처럼. 그건 고양이였다. 로젠버그 관문에서 만났던 그 고양이와 너무도 흡사한 나머지 몇 년의 세월이 흘렀다는 사실이 도리어 실감나지 않을 정도였다. 그 때 혼자서 관문을 넘어가려 애쓰고 있던 그는 우연히 고양이를 따라갔고, 거기에서 어찌된 셈인지 나우플리온과 다시 만났던 것이다. 그런데 그 고양이가 또 따라오라고 하고 있지 않은가? 보리스는 혼자 빙그레 웃었다. 섬을 떠난 뒤로 처음 입가에 올린 웃음이었다. 그런 다음 그는 고양이 뒤를 가벼운 걸음으로 따라갔다. 그때처럼 아이다운 기분이 된 것은 아니지만, 옛 추억이 그에게 미소를 가져다주었다. 조금 더 걷다가 그는 멈춰 섰다. 무심코 그 때의 일을 ‘추억' 이라고 정의해버린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언제부터 그 시절의 일이 추억이 된 것일까. 추억이라는 말은 부드럽게 닳은 나무나 가죽처럼 바래져버린 색채를 갖고 있어서, 돌이켜보는 사람에게 따뜻한 기준을 가져다주곤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시절 삶과 죽음의 문제, 고통과 침묵의 문제였던 것들조차도 시간이 흐르면 단지 추억이 되어버린단 말인가? 그리고... 모든 것이 다 그런 것일까. 어느새 고양이는 벽을 타고 뛰어내려 어느 집 처마 밑으로 들어가더니 울타리 틈새로 빠져나가려 애쓰고 있었다. 그동안 고양이의 몸집도 좀 커진 것인지 쉽사리 구멍을 통과하지 못하고 한동안 낑낑대고 있는 모습이 자못 우습기까지 했다. ‘추억' 이라는 단어에 대해 결벽이랄 정도로 민감한 반응을 보였지만 그것은 머릿속의 거부감이었지 실제로 존재하는 감정은 아니었다. 보리스는 저도 모르게 다시 한 번 피식 웃고 말았다. 보리스는 서서히 느끼고 있었다. 힘겨웠던 과거가 그에게 미친 영향은 이제 타고난 본성이었던 것처럼 그의 행동과 생각 속에 깊이 스며들어버렸고, 전처럼 당시의 일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뺨이 달아오르거나 가슴이 서늘해지는 일은 거의 사라졌다. 단지 나쁜 추억으로 멈췄을 뿐, 더 이상의 영향을 끼치지는 못하는 것이다. 물론 과거의 경험은 지금의 그를 만들었다. 그러나 미래의 그를 바꾸는 것은 새로이 겪게 될 일들일 뿐이다. 현재의 그가 몇 년 전의 일 때문에 당시와 마찬가지로 생생한 고통을 느낀다면, 그건 마음이 그 시절에 멈추어 있듯,그의 성장 역시 그 시점에서 정지되어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다만 그런 것과 갚아야 할 마음의 빚, 다하지 못한 책임, 한 번 가졌던 애정에 대한 신실함은 달랐다. 누구든 세월을 먹으며 또 다른 자신으로 달라지지만 그렇다고 과거가 완전히 잊혀지는 일은 없는 것처럼. 적어도, 5, 60여 년에 불과한 인간의 삶 속에서는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보리스는 곧 다가올 여름에 열 여섯 살 생일을 앞두고 있었다. 갓 열 두 살이 되어 절망과 공포로 달아나다가 뒤돌아보고, 또 넘어지기를 되풀이하던 그가 4년 동안 세상 속에서 살아남았고 이제 과거를 돌아볼 수도 있게 되었다. 고양이는 울타리 틈에서 해방되었다. 결국 튼튼한 어깨로 한쪽 널빤지를 부쉈던 것이다. 고양이는 뒤를 한 번 슬쩍 돌아보고 걸음을 재촉하여 앞으로 달려갔다. 보리스는 라마 고삐를 잡은 채 고양이를 따라갔다. 얼마 가지 않아 마구간처럼 생긴 긴 판자 건물이 나타났고, 한쪽에 쌓인 말먹이 마른풀 더미 뒤에 조랑말 같은 짐승의 등이 언뜻 보였다. 고양이는 마른풀더미로 뛰어들었다. 녀석이 다시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옆에서 말을 거는 소리가들렸다. “너도 샀군." 그제야 건초 더미 뒤에 서 있던 짐승이 자신이 산 것과 같은 라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다만 그 라마는 털이 갈색이었다. 좀 떨어진 상자 더미 꼭대기에 나야트레이가 앉아 있었다. 보리스는 뭐라고 답할까 궁리하다가 말했다. “다른 수가 없으니까." 그런데 나야트레이를 보자니 좀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상자 위에 편안히 앉아 있는 품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했던 것이다. 아니나다를까, 나야트레이는 상자 더미에서 뛰어내리며 말했다. “이제 왔으니 갈까." 그 말이 어쩐지 자신을 기다렸다는 것처럼 들려 보리스는 의아해졌다. 나야트레이는 자신의 라마고삐를잡더니 몇 걸음 걷다가 보리스를 돌아봤다. 고양이가 그랬던 것처럼. 둘은 한참 동안이나 말없이 빤히 마주보고 있었다. 보리스가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같이 가자는 거야?” “응." 되물을 말은 하나뿐이었다."“왜?” “성지에는 누구도 혼자 가지 못해." 그걸로 설명이 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나야트레이는 몸을 돌려 걷기 시작했다. 가나폴리 옛 도로로 이어지는 바로 그 방향이었다. ‘성지' 라는 것이 필멸의 땅을 가리키는 것 같긴 한데 왜 그렇게 부르는 것인지, 혼자서 가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정말로 그것 때문에 같이 하는 것인지, 마지막으로 이 동행에 반론을 제기하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그러나 거기에 계속 서 있을 수도 없었다. 어쨌든 나야트레이가 가고 있는 길은 보리스가 가려 했던 그 길이었던 것이다. 몇 걸음 걷다가 생각해 보니 고양이는 전과 마찬가지로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마을 입구에 이르러 보니 이제 방금 율드루이에 도착했거나, 필멸의 땅을 향해 막 떠나려 하는 용병들이 다수 모인 것이 보였다. 저들끼리 인사를 나누기도 하고 요란스레 재회를 반기며 어깨를 두드리거나 하는 모습은 작은 시장거리를 방불케 했다. 말은 물론 마차도 여러대였고, 라마는 그보다 훨씬 많았다. 그들 사이로 자그마한 라마 두 마리를 끌고 소년과 소녀가 지나갔다. 두건을 푹 눌러써 수도사처럼 보이는 소년과 레코르다블 용병 특유의 터번으로 환한 은발을 감춘 소녀는 사람들의 눈길을 끌지 않고 다른 용병들 무리에 섞여 황량한 지평선 쪽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용병들 틈에서 어떤 젊은이 하나가 한 용병을 발견하더니 매우 반가운 기색으로 끌어안고 양 뺨에 키스를 퍼부었다. 그는 언뜻 보기에도 이곳에 몰려드는 용병들과는 좀 다른 외양을 가졌는데 그와 비슷한 낯선 사내 하나가 바로 뒤에서 그가 볼일을 끝내길 기다리고 있었다. “요즘 경기 좋나? 그 때 그 시골 귀족은 잘 털어먹었어? 내 손엔 도무지 쓸만한 건수가 걸리지 않아서 말이야... 요번에는 웬 집나간 아들녀석을 찾아 달란 얼빠진 인간이 있어서 그런데, 뭣 좀 물어보자고. 혹시 이렇게 생긴 녀석 본 일 없어? 이건 5년 전의 얼굴인데 말이지," 젊은이가 품속에서 닳아빠진 초상화를 한 장 꺼내서 용병에게 보여준 직후, 보리스와 나야트레이가 그들 곁을 스쳐 지나갔다. 젊은이도 그들을 언뜻 보긴 했지만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설마 자신들이 갖고 있는 초상화 속의 작고 여려 보이는 소년이 저런 모습으로 자랐으리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던 것이다. 초상화를 살펴본 용병이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모르겠는데. 이런 곱살하고 약해빠진 녀석이 율드루이 같은 위험천만한 동네에 제 발로 기어 들어올 리가 있겠어? 집을 나갔다면 이런 자식은 필시 어느 도시의 노름판 같은 데 자빠져 있을 게 틀림없어. 그나저나 유리치, 너도 이딴 짓거리 하지말고 우리 패랑 금붙이나 긁어모으러 가보는 게 어때?”
2. 황무지 여행
사흘 뒤, 그들 주변에 남은 것은 누런 흙과 맞닿은 하늘빛 지평선뿐이었다. 이틀이 채 가기 전에 대부분의 용병들은 자기들의 관심거리를 찾아떠났고, 여전히 가나폴리의 옛 도로를 따라 걷고 있는 사람은 보리스와 나야트레이 둘뿐이었다. 물론 두 마리의 라마도 그들의 뒤를 따라왔다. 둘은 일행이랄 것도 없는 것이, 사흘 동안 함께 걸으면서도 하루에 세 마디 이상한 적이 없었다. 그세 마디란 ‘식사하자', ‘출발하자','야영하자' 였고 그것조차도 한쪽에서 말을 꺼내면 다른 쪽에서는 고개나 끄덕이는 정도였다. 그 한쪽이 꼭 보리스였던 것은 아니었다. 보리스 역시 그리 사교적인 성격은 아니라서 시시한 이야기를 굳이 꺼낼 필요는 느끼지 못했다. 그렇게 그들은 계속 남쪽으로 나아갔다. 필멸의 땅은 널리 알려진 ‘케이레스 사막’ 이라는 이름과는 달리 못 견디도록 더운 곳은 아니었다. 물론 그건 그들이 렘므 국경에 가까운 북쪽에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래도 그들은 가능한 한 태양을 피해 저녁과 밤, 그리고 아침나절에 걸었고, 식사는 하루 두 번만 했다. 물의 양을 정확하게 조절하는 것이 가장 큰일이었다. 보리스는 닷새 째 되는 날 샘이 있다는 방향으로 진로를 돌릴 생각이었다. 그러면 특별히 헤매지 않는 한 물 한 주머니의 여유를 두고 샘에 도착할 수 있었었다. 그런데 아무 것도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이 이상했다. 필멸의 땅에 떠도는 피에 굶주린 유령들에 대해서는 어린 시절부터 익히 들어온 터라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있었는데, 유령은커녕 신기루도 하나 보지 못했다. 하긴, 아직 몸의 상태가 좋았으므로 신기루를 보기엔 좀 일렀다. 얼마 후 보리스는 그들이 따라 걷고 있는 이 오래된 길로 관심을 돌렸다. 큰 마차 두 대가 나란히 지나갈 수 있을 정도로 널찍한 이 길은 단단한 돌과 모르타르로 꼼꼼하게 포장되었던 듯, 여전히 원형에 가까운 모습을 지니고 있었다. 바스러져 꺼진 곳도 얼마 되지 않았고, 좌우의 가장자리도 드문드문 금이 가 있을 따름이었다. 보리스는 이 도로를 포장한 솜씨가 그가 섬에서 본 환각, 아니 존재하는 이공간속의 포석들과 같다는 것을 느꼈다.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섬의 유령들은 본래 가나폴리 사람들이었고, 그들은 자신이 살아온 나라를 본따서 그들의 세상을 만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섬의 이공간에서 보았던 아름다운 푸른 돌들은 모조리 누런 먼지를 뒤집어 쓴 거친 돌로 변해 있었다. 그리하여 다시 떠오른 태양이 천년 묵은 돌들을 서서히 데울 즈음, 두 사람은 야영할 준비를 했다. 준비는 그리 간단하지 않았다. 주위에는 햇빛을 가릴 나무나 바위 같은 것이 전혀 없어서 모래땅을 파고 잠자리를 마련해야 했다. 물론 그렇게 마련한 땅속 잠자리는 몹시 더웠다. 그러나 한나절 내내 진흙인형처럼 햇빛에 구워지는 것보다는 나았다. 도로가 있는 곳의 지반은 아직도 비교적 단단한 편이어서 작은 삽으로 팔 수 있는 땅을 찾으려면 대략 백여 미터 가량은 도로에서 벗어나야 했다. 마땅한 곳을 찾으면 각자 들어가 누울 곳을 파는데 방향을 잊지 않기 위해 꼭 도로가 놓여 있는 방향과 교차되게 굴을 팠다. 그렇게 판 굴 속에 가까스로 몸이 들어가면 수건으로 얼굴을 덮었다. 조금 있으면 모래가 서서히 흘러내리는데, 몸을 더 이상 뒤채기 힘들게 될 즈음에는 이미 잠들어 있었다. 라마가 큰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야트레이가 자기 짐 속에서 이상한 재질의 검은 천을 꺼내 크게 펼치더니 두 마리 라마의 몸에 덮어씌웠다. 이상하게도 라마들은 그 천 속에서 꼼짝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천은 뺏뺏했지만 이상한 광택이 있었고, 약냄새 비슷한 것도 났다. 저녁 무렵, 보리스는 문득 잠에서 깨어났다. 아직은 해가 있었기 때문에 보리스는 수건을 치우지 않고 잠시 그대로 있었다. 들려오는 소리는 없었다. 그러나 분명 그의 잠을 깨운 무언가가 있었다. 보리스는 가만히 귀를 기울이다가 모래 구덩이에 같이 넣어둔 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자신을 깨어나게 한 감각이 무엇인지 모르면서도, 그는 스스로의 직감을 믿었다. 주변에는 분명 무언가가 있었다 그의 가슴을 옥죄는 것은 모래의 압력이 아니었다. 본래 유령이 돌아다니는 땅이 아니던가. 그때, 귓가에 낯선 소리가 들려왔다. 새된 음색의 짧은 멜로디가 복되고 있었다... 작은 피리의 소리였다. 그러자 주변을 채웠던 압박감이 풀리면서 흡사 공기와 같은 것이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보리스는 조금 기다렸다가 수건을 치우고 몸을 일으켜 이미 일어나 앉아 있는 나야트레이를
보았다. 예상대로 피리는 그녀의 손에 들려 있었다. 피리라기보다는 작은 대롱에 가까운 가늘고 짤막한 물건이었다. “뭐지?” 나야트레이는 대꾸 없이 피리를 품속에 갈무리하고는 일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참 동안 주의 깊게 무언가에 감각을 집중하던 그녀가 보리스를 돌아보며 말했다. “가자." 평소보다 이른 출발이었다. 빠르게 짐을 챙긴 둘은 그 자리를 벗어나 도로가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그러는 동안 해가 떨어져 주위는 이미 어두웠다. 보리스는 다시 걸으면서 이번에는 확실히 물어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피리는 유령을 쫓는 건가?” “...” “그래, 그렇군." 갑자기 나야트레이가 보리스를 바라봤다. “그렇다니?” 보리스는 애매한 눈빛으로 나야트레이를 마주보다가 요령 좋은 대꾸를 찾아냈다. “그렇잖아?” “그래?” “그래.” “그렇군." 실로 기가 막힌 대화가 오고간 뒤 둘은 다시 한참을 묵묵히 걸어갔다. 부츠 바닥에 모래가 끌리는 소리에 무심코 귀를 기울이며 걷고 있는데 이번에는 놀랍게도 나야트레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조심해." "뭘?” “네 뒤." 보리스는 더 묻지도 않고 순식간에 검을 빼들더니 홱 뒤로 돌며 허공을 내질렀다. 정말 4년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었을 완벽한 동작이었다. 그리고 그 검끝은 무언가를 찔렀다. 소리는 없었다. “!” 접힌 공기를 꿰뚫은 듯한 기묘한 손느낌이 왔다. 그러나 뚫은 뒤로는 다시 아무 것도 없는 허공이었다. 마치 누가 팽팽하게 펴 들고 있는 시트에 검을 찔러 넣은 기분으로 보리스는 검을 뺐다. 이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나야트레이가 바로 등 뒤에 와 있었다. “..."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상대에게 등을 보호받으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건 옳은 판단이었다. 곧 때가 왔다. 보리스는 다시 한 번 공기의 압력을, 그리고 나야트레이는 그것과는 좀 다른 무언가를 느꼈다. 각자의 감각에 의지하여 둘은 앞을 방어했다. 보리스는 나우플리온이 준 검으로, 나야트레이는 손잡이까지 합쳐 채 40센티미터나 될까 싶은 예리한 단도로.그러나 이번엔 둘 다 아무 것도 찌르지 못했다. 라마들이 불안하게 발을 들썩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라마 등에는 물과 식량 등 생존 물품들이 대부분 실려 있었다. 혹 어둠 속으로 라마가 달아나기라도 한다면 그야말로 큰일이었다. 또한 이 정체 모를 적으로부터 공격당해 라마가 죽는다면 여행은 극도로 힘들어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당장 취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서로의 등이 닿아 있지 않은데도 긴장이 전해져왔다. 줄곧 길을 따라 걷기만 하면 되니 불을 켜지 않아서 주위는 캄캄했고, 보이는 것은 별로 없었다. 오직 달빛 뿐. 보리스는 그가 내버리고 온 달여왕의 땅을 떠올리게 하는 달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 불편한 달이 지평선 위에 걸려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는 그를 비웃는 것처럼. 그러나 보리스는 다시 한 번, 정면으로 밀려드는 압력을 감지해냈다. 좌우로 휘두른 검은 흡사 앞서의 시트를 찢기라도 한 듯 날카로운 파열음을 냈다. 찌익! 다시 사라졌다. 그러나 무언가 있다는 것을 안 이상, 덫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얼마간 아무 기척도 없어 긴장이 최고조에 이르렀을 즈음, 갑자기 나야트레이가 입을 열었다. "아노마라드에 가보았어?” 갑자기 왜 그런 것을 묻는지 짐작도 가지 않았지만 보리스는 짧게 답했다. “어떤 데지?” 왜 이런 순간 그런 걸 묻고 있는 거지? “풍요로운 데지." “그리고?” “그리고, 대륙의 다른 곳들처럼 다양한 사람들이 살고 있고." “오래 살았어?” “어느 정도 알만큼은." “그곳, 좋아했어?” 긴장을 풀려는 것인지 몰라도 정신을 집중할 수가 없어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보리스는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이 작은 소녀에게 약간 불쾌하게 답하고 말았다. “마음에 들지는 않았어, 지금 그런 것을 묻고 있는 너처럼." 그 순간, 나야트레이는 갑자기 앞으로 뛰어나가며 단도로 짧은 금을 그었다. 보리스의 귀에도 들렸다. 찌익, 하는 파공음이. 그리고 보리스의 왼쪽 뺨에도 낯선 바람이 느껴졌다. 검을 왼쪽으로 끊어 쳤을 때 나야트레이도 그쪽으로 뛰어드는 것이 보였다 서로의 모습을 알아보기도 힘든 어둠 속, 두 검이 같은 대상을 양쪽으로 흩어버리는 동시에 또 하나의 얇은 막을 찢어 놓았다. 서로를 보호할 틈이 없었다. 보리스는 그의 시야로 순식간에 다가왔다가 멀어지는 작은 단도날을 보았다. 싸악, 머리칼 한 줌이 베어지며 검은 밤 속에 흩어져 날았다. 둘의 동작이 멈췄을 때, 나야트레이의 목소리가들려왔다. 더 침착한 음성이었다. “저들을 끝내는 건 틀렸어. 일격에 죽이지 못하면 다음은 없어."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땀방울을 느끼며 보리스가 물었다. “유령과 대적해 본 일이 있어?” “아니, 하지만." 나야트레이는 두 번 뒷걸음질쳐 재빨리 보리스와 다시 등을 맞댔다. “두 번째 베면 죽은 굴(Ghoul)도 되살아난다는 건 알지." “굴이라고? 그게 뭐지?” 그러나 더 이상 말을 주고받을 틈이 없었다. 둘은 각자 다시 쇳소리를 내며 검을 내리그었고, 서로의 동작을 살필 겨를도 없이 자신의 몸을 방어하는 데 열중했다. 이제는 라마의 발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밤은 싸늘했지만 그들은 진땀을 흘리며 보이지 않는 상대의 무언지 모를 몸을 베고 찢었다. 그러나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싶을 정도로 같은 일만 연속될 뿐이었다. 한 방울의 피도, 상처 입은 기색도, 볼 수 없었다. 견디다 못한 보리스가 다시 등 뒤로 다가온 나야트레이를 향해 소리쳤다. “아까 그 피리를 쓸 수는 없는 건가?” 냉담한 대답이 들려왔다. “말했다시피, 두 번 베기 시작한 굴은 쫓을 수도, 죽일 수도 없어" 기가 막혔다. 굴이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은 그렇다 치고, 그럼 두 사람은 지금 무얼 하고 있는 거란 말인가. “우리가 지금 아무 쓸모 없는 짓을 하고 있다는 거야? 그걸 알면서도 계속하는 이유가 뭔데?” “그냥 죽을 수는 없지." 도저히 그 의도를 의심할 수 없을 정도로 스스럼없는 대답이어서 무어라 반박할 수조차 없었다. 나야트레이는 농담을 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면 그냥 죽을 순 없으니 지쳐 쓰러질 때까지 의미 없는 일이라도 계속하다가 죽잔 말인가. 굴이란 것이 유령의 일종인지 무언지 몰라도 두 번째 베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죽일 수 없는 존재가 된다니, 그런 어이없는 이야기는 평생 들어본 적도 없었다. 검으로 베어지는 존재라면 당연히 죽일 수도 있어야 했다. 물론 그런 존재라면 반대로 그들을 죽일 수도 있다. 손톱 긴 손가락들이 어깨를 확 잡아채는 것이 느껴졌다. 순식간에 왼팔이 찌르르해지며 팔꿈치까지 마비되어버렸다. 왼팔이 잡아주던 균형이 사라지자 오른손이 흔들리며 움직임이 부정확해졌다. 바로 그 순간, 그 손은 다시 한 번 오른손 손목을 잡아챘다. 무언가 채 느끼기도 전에 검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는 빈손이 되었다. 있을 수 없는 실수를 하고 만 보리스는 저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손을 돌려 윈터러를 뽑고 말았다. 흰 칼날이 빠르게 허공을 찔러갈 즈음에야 자신이 저지른 일을 깨달았지만 이미 돌이키기엔 늦어 있었다. “!” 알아들을 수 없는 외침이 울리고, 거무튀튀한 액체가 사방으로 튀었다. 이어 비슷한 외침이 몇 군데에서 울렸는데, 짐승의 울부짖은 것이 아니라 보리스가 모르는 언어로 무어라 외치는 듯 들렸다. 보리스는 무언가에 꽂힌 윈터러를 잡아 뽑으려 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걸쭉하고 검은 액체가 검날을 타고 그의 손이 있는 쪽까지 흘러내렸다. 소매 끝이 액체에 닿자 파르스름한 불빛을 내며 삭아 버렸다. 보리스는 간신히 검끝을 아래로 낮추었다. 등 뒤에서 나야트레이의 건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죽었어." 잠시 후 어둠 속인데도 검은 윤곽이 스르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뚜렷이 볼 수 있었다. 흘러내리던 액체가 그 윤곽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사라져 버렸다. 보리스는 윈터러를 내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마와 뒷목에 땀이 흥건하게 배어나 있었다. 그러나 이상할 정도로 침착한 나야트레
이 앞에서 당황한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나야트레이도 단도를 닦아 넣었다. 둘은 서로 돌아보지 않은 채 그 자리에 천천히 주저앉았다. 등을 기대도 좋으련만, 둘 다 그렇게 하려
하지 않았다. “아까는 죽일 수 없을 거 라고 했잖아." “아니, 너는 굴에게 단 한 번의 일격을 가했어." “우리는 죽 그들과 싸우고 있었어. 이미 몇 번은 찔렀을 거야." “너의 새로운 검. 그걸로 단 한 번 찔러 죽였어. 그건 뭐였지?” 나야트레이가 몸을 돌려 보리스가 손에 쥐고 있는 윈터러를 보려했다. 그러나 보리스는 자신도 모를 본능으로 재빨리 검을 검집에 꽂았다. 다른 사람에게 보여 주어 좋은 일이 일어난 적 없는 검이었다. 그래서 나야트레이가 볼 수 있었던 것은 윈터러의 손잡이에 친친 감긴 흰 붕대 조각뿐이었다. 잠시 후 보리스가 말했다. “라마들이 사라져 버렸어." “아침이면 돌아올 거야." 밤이 얼마나 깊은 걸까 난데없는 전투를 벌이는 바람에 시간 감각이 흐려져 버렸다. 그대로 주저앉은 채 라마들이 돌아오길 기다리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나야트레이가 윈터러에 대해 더 묻지 않는 것처럼, 보리스 역시 나야트레이가 무엇을 더 알고 있는지 묻지 않았다. 그러나 침묵만으로 지새기에는 밤이 너무 길었다. 수천 개의 별자리들이 갓 닦아 놓은 유리 목걸이처럼 휘황하게 번쩍거렸다. 흠 없는 검은 하늘엔 푸르스름한 기마저 감돌았다. 모닥불조차도, 먼 곳의 불빛 하나도 없는 텅 빈 땅이 눈 닿는 곳 전부를 메우고 동행이라고는 낯설고 말없는 소녀뿐. 지도에서 보았던 필멸의 땅은 대륙 크기의 4분의 1에 달했는데 그토록 넓은 땅이 누구의 소유도 아니며 인간의 질서 중 어느 것도 통하지 않는다니, 이것처럼 기이한 일이 또 있을까. 이웃나라의 왕들, 또는 트라바체스의 통령처럼 한 나라를 지배하는 자들은 자신이 세운 질서를 백성 전부가 받아들이기를 원하고, 나라에도 강요할 수 있었으면 하고 밤낮으로 바랄 테지만, 그들이 만일 대륙의 모든 땅을 자기 영토로 한다 해도 이 필멸의 땅만은 인간의 역사를 비웃으며 이대로 존재할 것이다. 마법 왕국은 이제 존재하지 않지만, 그들이 살았던 땅조차도 마치 인격체처럼 ‘보아라, 세상에는 불가능한 것이 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어쩌면 그래서, 여러 나라의 왕들은 대륙의 통일을 그다지 꿈꾸지 않는 지도 모르고... “귀를 기울여 봐." 갑자기 나야트레이의 목소리가 보리스를 상념에서 깨웠다. 그제야 느낀 것이지만 나야트레이의 목소리는 샘에 떨어지는 이슬 소리처럼 차랑하고 맑았다. 주위가 적막했기에 굉장히 선명하게 들렸다. 그러나 나야트레이가 귀 기울이라는 소리는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보리스는 곧 한 가지를 떠올리고는 말했다. “라마가 돌아온 건가?” “아니 ." 보리스는 문득 이솔렛을 생각했다. 그녀의 약간 허스키한 목소리는 신성 찬트(Chant)를 부르게 되면 세상의 어떤 소리와도 비할 수 없는 천상의 음(푤)으로 변했었다. 그에 비해 나야트레이의 목소리는 비교적 아이다운 맛이 있었다. “아무 소리도 안 들려." “발소리." 극도로 예민하게 귀를 세웠지만 역시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갑자기 나야트레이가 말했다. “너를 미워하는 사람이 있어?” 조금 전 아노마라드에 가본 일이 있냐고 물은 것처럼 난데없는 질문이었다. 이 아이와 다니려면 이런 식의 대화에 익숙해져야 되는 것인가 싶었다. “많아." “그 중 누구의 증오심이 가장 강하지?” 보리스는 미간을 찌푸렸지만 싸우고 싶지 않았으므로 대강 대답하려고 머리를 굴렸다. 그런데 마땅한 사람이 쉽게 떠오르지 않았다. 고향에서 보내어져 그를 쫓는 자들도 보리스에게 개인적 원한은 없을테고, 섣불리 벨노어 백작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