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6권. 3장. Gaunts Lans (18/21)

3장. Gaunts Lans

1. 심판 

재판이 있었다.

최근 몇 년간은 큰 죄를 지은 사람이 없어 기껏 약식 재판으로 중재

하는 정도가 전부였기에, 오늘처럼 정식 재판이 열린 것은 매우 오랜 

만이었다. 재판이란 본래 구경거리이기 마련이라 많은 사람들이 호기 

심을 갖고 재판정으로 모여들었다.

재판 발의는 재청자가 필요 없는 검의 사제인 나우플리온이 직접 

맡았다. 나우플리온은 사제들이 모두 모이는 회의에 일부러 오이지스 

를 데려가 해당자들의 죄목을 말하게 하고 스스로 고발자의 역할을 떠 

맡았다. 워낙 사안이 중대한지라 재판정은 하루만에 즉시 준비되었다.

재판관으로서 판결을 내리는 것은 검의 사제인 페이스마의 직분이 

었다. 재판에서만은 그의 권위가 다른 사제들은 물론이고 심지어 섭 

정보다도 높았다. 고발당한 소년들은 모두 다섯 명이고 바로 오이지 

를 사주했던 에키온은 빠져 있었다.

별로 심문할 필요도 없었다. 그들은 고발당하여 끌려나온 즉시 자 

신들의 죄가 밝혀졌음을 깨닫고 부들부들 떨며 변명할 거리도 찾지 

못했다. 구원해 줄 것으로 믿었던 헥토르의 집안이 철저히 모르는 체 

함에 따라 밝혀진 죄를 피할 방법은 이제 없게 되었다.

다프넨은 구경꾼들 사이에서 재판을 지켜보고 있었다. 고발자의 자 

리에 선 나우플리온이 오이지스를 옆에 세우고 조목조목 그의 말을 

옮기며 소년들에게 죄를 자백하게 했다.

"이미 뒤쫓을 필요가 없어졌는데도 장서관까지 따라 들어간 까닭은 

무엇이냐?“

소년들은 매번 누가 대답해야 할지 몰라 허둥댔다. 거짓말을 준비 

하지 못한 터라 그들의 대답에는 체계가 없었다.

"그냥..... 장난을 치고 싶었던 것뿐이고......“ 

“따라간 게 아니라 그냥 들어가 보려고......” 

"오이지스가 장서관에서 스스로 나왔는데도 너희는 그를 끌고 안으 

로 들어갔지. 그건 다시 말해 장서관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오이지스 

의 마음을 조롱하고 싶었기 때문아닌가?“ 

"그냥 싸우며 굴다 보니 안으로 들어가게 되어서.....“ 

"실은 장서관에 한 번도 못 들어가 보았기 때문에 궁금해서.....“ 

 나우플리온은 사실을 다 알고 있었기 때문에 거짓말에는 대꾸할 필 

요가 없었다.

"장서관의 제로 씨는 한 번도 너희 같은 아이들의 출입을 막은 일이 

없다. 너희는 평소 장서관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지금껏 가지 않은 

것뿐이야. 그런데 굳이 오이지스가 들어가는 것을 보니 너희도 들어 

가 보고 싶어졌단 말이냐? 너희의 상충되는 말은 결국 오이지스를 괴 

롭히기 위해 일부러 장서관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시인하는 것밖에 되 

지 않는다. 다음. 오이지스를 구타한 것이 장서관 안이었다는데 너희 

다섯이 모두 가담했나?“

갑자기 갈레가 소리질렀다.

"아, 아니에요! 오이지스를 때린 건 피쿠스였어요! 그 애가 혼자서 

때렸어요!"

그러자 피쿠스도 얼굴이 파래지더니 지지 않고 외쳤다.

"어차피 들어가기 전부터 모두 때린 것은 똑같잖아! 난 장서관에서 

그냥 몇 대 더 때렸던 것뿐이야!"

"무슨 소리야! 그 애는 우리한테 맞은 다음에도 장서관까지 도망갈 

기운이 있었잖아! 하지만 너한테 맞은 다음에는 일어나지도 못했어!"

궁지에 몰린 피쿠스가 미워 죽겠다는 듯 갈레를 쏘아보며 다시 맞 

받아 쳤다.

"그렇게 말할 것 같으면 장서관 안에 들어가자고 먼저 제안한 건 갈

레 너였어."

갈레도 혼자 죄를 뒤집어쓰려 하지 않았다.

"그, 그래, 내가 들어가자고 했지만 1층에는 아무 것도 없었어! 사 

다리를 보고 위로 올라가자고 한 건 리코스였지. 내가 아니라고!"

리코스도 눈을 크게 뜨며 도리질하더니 소리쳤다.

“내가 언제 그랬어?”

“네가 그랬잖아! 올라가 보자고 말했잖아!"

"아냐! 사다리를 발견한 건 내가 아니란 말이야!"

"누가 발견했든 올라가자고 한 건 너야!"

"그래서 나 혼자 올라갔어? 결국 전부 올라갔으면서 왜 나한테만 

그래!"

나우플리온은 소년들의 언쟁을 일부러 막지 않고 내버려두었다. 페 

이스마 사제도 그들의 말을 들으며 대략의 상황을 눈치채는 듯했다.

결국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고발하여 마지막 죄상까지 모조리 밝혀버 

리는 꼴이 되었다.

"그래서? 그 책을 꺼낸 건 네가 아니야?"

"난 딱 한장만 태웠을 뿐이야!"

“난 나무로 된 탑이니까 불이 나기 쉬울 거라고 분명 말했어!"

"램프를 들고 불안정한 계단 위로 올라간 게 누군데 그래! 포티아 

너 아니었어? 네가 곡예를 보여준다고 멋대로 올라갔잖아!"

"그렇지만 네가 계단을 발로 찼잖아! 그래서 손이 미끄러진 거라고!

안 그랬으면 내가 왜 램프를 떨어뜨린단 말이야!"

그 즈음에서 나우플리온은 소년들의 말을 멈추게 하고는 한 명을 

찍어서 물었다.

"포티아, 네가 램프를 떨어뜨렸으니 불을 탠 당사자가 틀림없군. 하 

지만 불을 냈다 해도 얼른 마을로 돌아가 어른들을 불렀더라면 이 정 

도로 큰 일이 벌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가 이 일을 숨 

기자고 제안했을 거야. 그 녀석이 가장 죄질이 나쁘다고 할 수 있겠 

지. 그게 누구였지?“

포티아는 기다렸다는 듯 소리질렀다.

"갈레였죠! 갈레가 어차피 돌아가도 크게 혼날 것이 틀림없으니까 

도망가는 것이 상책이라고 말했어요!"

나우플리온은 냉소를 띠며 오이지스를 한 번 내려다보더니 다시 한

번 물었다.

"오이지스는 너희의 대화를 모두 기억하고 있어. 자, 말해봐라, 그

러면 너희 가운데 누가 가장 먼저 오이지스를 장서관에 내버려두고 

나가자고 말했나?“

이번에는 세 명이나 되는 아이들이 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피쿠스였어요!"

피쿠스는 항변했다.

“내가 그렇게 하는게 어떨까 하고 말하자마자 모두 찬했잖아! 녀 

석이 죽어야 증거가 없어진다고 말한 건 파이디 너였잖아!"

이제 충분했다. 주위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돌린 채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차고 있었다. 사실 나우플리온이 맨 처음 제출한 고발 내용에는 

이들이 고의로 오이지스를 내버려두고 달아났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또한 재판이 의결된 회의 당시 사제들의 여론 중에서도 아무 것도 모 

르는 아이들이 실수로 불을 내고 놀라 도망친 것일지도 모른다는 온 

화한 해석도 있었다. 오이지스가 심하게 다친 것도 모두 어울려 싸우 

다가 그렇게 된 것 아니냐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소년들은 서로에 

게 책임을 미루다가 중요한 부분을 모두 발설하고 말았다. 아직 아이 

들이라서 나우플리온의 간단한 유도심문에 너무도 쉽게 걸려들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나우플리온은 소년들을 진정시킨 뒤 질문했다.

"그럼 마지막으로 묻자, 너희들이 맨 처음 오이지스를 때리기 시작 

한 이유는 무엇이었지? 누군가 그걸 시키기라도 한 것이었다면 너희 

의 죄는 가벼워질 것이야."

한 소년이 불쑥 뭔가 말하려 했는데 다른 소년이 다리를 탁 걷어차 

며 말하지 못하게 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자 다섯 소년들 모두 약속 

이나 한 듯 입을 다물게 되었다. 몇 번 되풀이해서 물었지만 끝내 그 

들은 자기들끼리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일 뿐, 아무도 시킨 사람은 

없었다고 말했다.

심문은 끝났다. 소년들은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지켜보고 

있던 어른들은 이미 이들이 무슨 판결을 받게 될 지 짐작하고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페이스마 사제가 일어섰다. 그는 관습법을 수호 

하는 궤의 사제답게 자신의 정의를 매우 고집 세게 지키는 사람이었 

다.

“다섯 사람에게 해당되는 죄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죄, 여러 명이 

힘을 합쳐 한 소년을 특별한 이유 없이 구타한 일. 이는 또래 아이들 

사이에 흔히 일어나는 일로서 특별히 재판정에서 다뤄질 정도의 죄가 

된다 할 것은 없다."

섬사람의 관점이 그러하기에 예전에 오이지스가 무수히 많은 괴롭 

힘을 당했는데도 아무도 나서서 제지하지 않은 것이리라. 더구나 체 

력과 힘이 약한 자를 경시하는 풍조 때문에 자신의 몸을 지키지 못한 

것은 스스로의 잘못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둘째 죄, 섬의 옛 기록을 보전해 온 장서관에 불을 지른 일. 비록 

고의가 아니라 하나 그 시작 의도가 불순하므로 이는 큰 죄이다. 수많 

은 책들과 마법에 대한 기록들이 타 없어져 섬에 크나큰 손실을 입혔 

으며 간접적으로 장서관을 지키는 제로의 실명에 대한 책임 역시 피 

할 수 없다할 것이다."

이제 상황을 모르는 것은 명백히 피고인 소년들뿐이었다. 그들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페이스마 사제와 그들 주위의 부모 형제들을 번 

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셋째 죄, 특별한 죄를 짓지 않은 자를 구타하여 운신 능력이 없게 

하여 놓고 그를 화재 속에 고의적으로 방치한 일, 이는 의심할 바 없 

이 살인을 획책한 것이다."

‘살인' 이라는 말이 떨어지는 순간 소년들은 얼어붙었다. 소년들의 

부모는 감히 입을 열지 못했으나 그들과 똑같이 얼굴이 납빛으로 변 

해 있었다. 페이스마 사제는 마지막으로 소년들을 직접 보며 말했다. 

“마지막 죄, 셋째 죄가 단순한 과실이 아니라 저들이 지은 죄를 은

폐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행한 일이라는 점. 이 모든 점을 고려하고 성 

의 옛 전통을 살피어 마지막으로 판결하노니 리코스, 피쿠스, 갈레,

포티아, 파이디, 다섯 사람에게는 익사형이 내려질 것이다.

달여왕이시여 저희의 결정을 굽어보소서."

가벼운 소란이 일어났다. 섬에서는 전통적으로 판결이 내려진 직후 

에 주위 사람들이 자비를 호소할 수 있었으므로 소년들의 부모며 형 

제들이 한꺼번에 뛰어나와 페이스마사제 앞에 엎드렸던 것이다. 익 

사형 판결을 받은 소년들은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한 덩어리가 

되어 떨고 있었다. 그들은 살아 생전 섬의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는 

사람을 처음으로 보았다. 더구나 그 대상은 바로 자신들이었던 것이다. 

그 즈음 다프넨은 사람들 틈에서 몸을 돌려 빠져나왔다. 어쩐지 마 

음이 개운치 못했다.

섬의 판결과 형 집행은 참으로 단순하고도 신속했다. 그것이 가나 

폴리로부터의 전통인지는 알 수 없으나 섬에는 감옥 같은 것이 없었 

고, 형은 판결을 받은날 오후에 바로 집행되도록 되어 있었다. 이것 

에 대해서만은 다프넨도 좀 잔인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부모들의 호소가 거절되자마자, 검의 사제 아래에서 검의 길을 걷 

는 젊은이들로 이루어진 ‘달여왕의 군대' 가 당장 소년들이 달아나지 

못하도록 포위한 뒤 손을 묶었고, 주위 사람들과 대화도 나누지 못하 

게 했다.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없는 것은 물론이었고, 부모나 형제와 

의 이별을 위해 주어지는 시간 같은 것도 없었다. 심지어 마지막 식사 

한 끼조차도 주지 않았다.

익사형이 집행되는 장소는 다프넨이 한 번도 가본 일이 없는 남쪽 

해안의 낭떠러지였다. 손을 묶인 소년들은 검의 길을 걷는 젊은이들 

에 의해 떠밀리듯 하여 정신 없이 그곳까지 갔고, 그 뒤로 구경꾼들이

줄줄이 따라붙었다.

다프넨 역시 구경꾼들에 섞여 그 길을 걷고 있었다. 여전히 마음은

편치 못했다. 왜 그런지 모르겠다 싶었다. 그들의 처벌을 누구보다도 

바랐던 자신이 아닌가. 그리하여 끝내 그렇게 되도록 만든 것도 자신 

이 아닌가.

낭떠러지에 도착하자 다프넨은 아예 가슴이 콱 막히는 듯한 기분이

되었다. 그곳은 바다 쪽으로 길게 내밀어진 일종의 곶이었고, 죄인들 

은 그 좁은 길을 한 명씩 걸어가 스스로 뛰어들지 않으면 안 되는 것 

이다. 아래로 1백여 미터에서 좀 모자랄까 싶은 높은 절벽과 날카로운

암초투성이의 거친 바다가 보였다. 섬 출신인 사람들은 모두 헤엄을 

잘 치기 때문에 떨어지는 순간 죽이는 것이 목적일지도 몰랐다.

바다는 소용돌이쳤다. 아니, 포효하며 맴돌았다. 희생물을 기다리 

는 맹수 같기도 했고, 크게 벌려 들쭉날쭉한 어금니를 드러낸 살아있 

는 입 같기도 했다. 그런 바다가 바라보이도록 다섯 명의 '죄인'은 일

렬로 세워졌다. 다프넨은 그들 곁에 조금 떨어져 선 나우플리온의 얼 

굴을 건너다보았다. 그의 표정도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그러나 그 

는 곧 ‘달여왕의 군대' 중 한 젊은이에게 명령했다.

"그들의 눈과 입을 가려라."

흰 천으로 눈이 가려지고, 이어 재갈이 물려지려 하자 소년들은 온

몸을 뒤틀며 몸부림쳤다. 그 중 한 명이 얼른 알아듣기 힘든 외침을 

쏟아냈지만 구경꾼들에게까지 정확한 내용이 들리지는 않았다. 이윽 

고 재갈은 모두 물려졌다. 말을 못하게 하는 것은 죽음에 이른 자가 

누군가에게 악에 받친 저주를 퍼붓게 되면 실제로 그 효과가 나타나 

게 된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첫 번째가 된 리코스는 걷지 않으려 했다. 바닥에 주저앉았고, 일으 

키려 하자 묶인 손을 비틀고 매달려 늘어지며 신음인지 울음인지 모 

를 소리를 토해냈다. 그러나 그의 반항은 오래 가지 못했다. 두 명의 

젊은이가 팔을 하나씩 움켜잡아 번쩍 들어올리고는 이렇게 말했던 것 

이다.

"계속 이렇게 한다면 너는 절벽 끝까지 직접 걸어갈 기회조차 잃게 

될 거다."

낭떠러지까지 겨우 다섯 걸음 가량 남은 위치에서 리코스의 팔이 

놓여졌다. 눈이 가려진 소년은 다시금 입 속으로 윽윽대는 소리를 내 

며 급히 몸을 돌려 사람들 쪽으로 뛰어가려 했다. 그들에게 자유로운 

것은 발뿐이었다. 그러나 눈이 가려진 사람에게 낭떠러지의 끝은 너 

무도 좁았다. 리코스는 발을 돌리는 순간 허공을 디던 중심을 잃었고,

그대로 물 속으로 곤두박질쳤다.

파도 소리에 묻혀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는 아주 먼 곳에서 들려온 

듯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 소리를 가장 예민하게 들은 것은 남은 네 

소년들이었다. 네 명이 한꺼번에 몸부림치며 바닥에 쓰러지기 시작했 

다. 재갈 밖으로 침이 흘렀고, 눈가리개는 눈물로 흥건히 젖었다. 그 

러나 아무 소용없었다. 처음처럼 검의 길을 걷는 젊은이들이 소년들 

을 하나하나 일으켜 세웠고, 모조리 낭떠러지 끝으로 보냈다. 갈레는 

리코스처럼 되돌아 뛰다가 방향을 잘못 잡아 떨어졌고, 또 한 명은 끝 

내 젊은이들의 손으로 바다에 던져졌다. 한 번은 물 속에 떨어지는 소 

리 대신 무언가 딱딱한 것이 터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그렇게 마지막 

소년까지, 용서 없이 모두에게 형이 집행되었다. 

구경꾼들 중에는 울거나 하는 사람이 없었다. 판결 이후 죄인들을 

위해 선처를 호소했던 자들은 처형 장면을 보는 것이 금지되어 있어 

서 이곳에 오지 못했다. 역시 원한을 품는 일을 막으려 하기 때문이었 

다. 그렇다 해도 저렇듯 어린 소년들이 공포에 사로잡혀 죽어 가는 것 

을 보고도 눈물 한 방울 흘리는 사람이 없는 것을 보며 다프넨은 가슴 

이 서늘해지는 느낌이었다. 섬사람들은 다만 나직이 탄식할 뿐이었 

다. 달여왕의 보복은 실로 두려우며, 자신들은 그런 일을 저지르지 않 

고 살아야겠다고 다짐할 따름이었다. 

이 자리에는 오이지스도 오지 않았다. 다프넨은 오이지스가 마음이 

약해 이런 광경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일 거라고 추측해 보았다. 하지만 

사실은 모를 일이었다. 실은 오이지스도 저주를 받는 것이 두려워서,

또는 사람들의 눈총을 받게 될 것이 싫어서 오지 않았을 지도 모르는 

일 아니겠는가?

이상하게 맥이 탁 풀렸다. 이 사건의 주모자인 주제에 혼자 빠져나

간 에키온을 끌어내어 저들과 똑같은 형벌을 받게 할 마음도 나지 않 

았다. 아니, 이젠 그런 일이 옳은 것인가 하는 것조차도 혼란스러웠다.

메마른 땅이었다. 동시에 차가운 땅이었다.

그러나 다프넨은 집행을 마치고 구경꾼들 사이로 돌아와 그의 곁에

선 나우플리온의 눈가에서 마른 눈물의 흔적을 똑똑히 읽었다. 다프 

넨은 나우플리온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사람들에 섞여 함께 마을로 

돌아갔다.

5월이 밝고 얼마 되지 않아 축제의 날이 왔다.

즐겁게 떠들며 노는 일이 별로 없는 섬에서 아이들의 정화 의식이 

치러지는 5월 초의 축제만은 몇 안 되는 예외였다. 정화 의식은 축제 

의 마지막 날 행사였고, 그 전에는 주로 음식을 많이 장만하여 내놓고 

너나없이 먹고 마시는 일이 이틀 간 계속되었다.

사실상 섬에는 농작물이나 가축이 늘 부족했기 때문에 낭비가 될 

정도로 많은 음식을 만드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이 때만은 조금 

쯤 예외가 되어 사람들도 어느 정도 인심이 좋아졌다. 물론 그리 성대 

하다고 할 수는 없었고 기간도 대륙의 축제들에 비해 몹시 짧았지만,

대륙에서 살아본 일이 없는 이들에게는 이보다 더 좋은 때도 별로 없 

었다.

그러나 다프넨은 1년 만에 돌아온 축제를 즐길 마음이 나지 않았다.

작년도, 저 작년도 사실 그리 즐거운 축제 기간을 보냈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이번에는 아예 즐거워하는 사람들의 얼굴조차 보고 싶지 않 

다는 기분이었다.

다섯 명의 아이들이 사라진 지 열흘이나 채 되었을까. 그런데 그의 

주변에는 아무도 그들을 기억하거나 말하는 사람이 없었다. 어느 정 

도는 일부러 그러고 있을 가능성도 있었지만, 심지어 스콜리에서도 

그들이 사라진 자리가 전혀 느껴지지 않도록 잘도 배려해 놓았다. 책

상의 위치가 옳겨지는 등 교실의 배치가 일신되었고, 선생들은 그들 

이 쓰던 물건이나 심지어 그들의 이름이 거론된 낙서에 이르기까지 

모조리 없애버렸다.

이 즈음처럼 다프넨이 섬사람들을 낯선 자들로 느낀 때가 없었다.

그들은 거의 다 동정심이라고는 모르는 냉정한 인간들이며 대륙에 

나가서는 절대 받아들여지지 못할 끔찍한 이방인들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다보면 이번 축제의 정화 의식에서 정식 순례자가 될 자신조 

차 때때로 매우 낯설게 느껴지는 것이다. 순례자가 되다니, 누가, 그

자신이?

그런 생각에 사로잡혔던 까닭에 그는 축제 거리에서 우연히 이솔

렛과 마주치고도 말하는 것조차 잊은 양 그냥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

솔렛은 섬사람들이 쓰던 물건을 내놓고 서로 교환하는 작은 시장에 

나와 있었는데 그녀의 성품으로 그런 곳을 혼자 배회하고 있었다는 

것 자체가 사실 뜻밖이었다.

이솔렛은 다프넨을 발견하고 자신이 무슨 말이든 꺼내거나, 또는 

말을 걸어줄 거라 생각한 것처럼 멈추어 섰다. 그러나 다프넨이 입을

열지 않는 것을 보고는 눈을 내리깐 채 그냥 스쳐가고 말았다. 그 때

이후 축제 기간 내내 다시는 그녀와 마주치지 못했다.

정화 의식이 행해질 날이 밝았을 때, 다프넨은 침대 속에서 눈을 

뜨고 생각했다. 이솔렛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이대로 지내는 

것은 옳지 않았다. 대륙에서 함께 여행할 때 그는 분명 이솔렛을 좋 

아하고 있다는 것을 여러 번 간접적으로 표현했고, 그녀도 충분히 느 

끼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그녀 입장에서 보면 별다른 이유도 없이 

갑자기 태도를 바꾼 다프넨이 당혹스럽게 느껴질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자신이 말을 한다 해도 그녀가 이해해 줄까. 아니, 아마 그 

렇지 않을 것이다. 최근 그가 뼈저리게 느낀 섬사람의 근성을 그녀라 

해서 전혀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은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이솔렛의 

문제에 이르면 그 모든 혐오감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런 혐오감이 

좀더 유용하게 쓰여서, 그녀를 멀리하고픈 마음이 들게 해 준다면 얼 

마나 좋을까.

아침을 먹으며 다프넨은 나우플리온의 부스스한 머리를 한참이나 

쳐다보고 있었다.

"왜 쳐다봐."

숟가락을 움직이면서도 눈은 떨어지지 않았다. 대륙에서 오래 살았 

던 나우플리온은 섬사람들과 달랐다. 그의 사람됨에 반해 이곳까지 

온 자신이 아니었던가. 

"몸은 좀 어떠세요?“

난데없는 질문을 받은 나우플리온은 한쪽 어깨를 올리며 대꾸했다.

"보다시피 멀정하다."

"아프신 데 없고요?“

"벌써부터 노화 현상을 기대하는 건 무리야."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 말투였기 때문에 다프넨은 좀 헷갈리 

기도 했다. 정말로 아픈 데가 전혀 없는 건 아닐까. 그 멘탈 포레스트,

마음의 숲에서 본 영상은 그의 환각에 불과한 것 아닐까.

그러나 곧이어 튀어나온 것은 어이없는 덕담이었다.

"오래오래 사세요."

나우플리온은 숟가락을 입에 문 채 어이가 없다는 듯 대꾸했다.

"오늘 새해 첫날 아니야."

"누가 그렇댔나요. 말도 못하나."

“말도 마. 요즘 어찌나 건강한지, 이런 몸으로 할 일 없이 놀자니 좀

이 쑤셔 죽겠어. 이거 얼른 축제가 끝나야지, 원."

식사가 끝나자 나우플리온은 다프넨을 가까이 오게 해서 머리도 좀 

쓰다듬고, 옷매무새도 바로잡아 주었다. 다프넨은 자기 주변은 잘 정 

리하는 편이었기 때문에 용의도 일반적으로 단정해서 사실상 별로 고 

쳐줄 것은 없었다. 정화 의식의 날이라고 해도 특별히 입을 새 옷이 

있는 것도 아니고(두 남자 모두 옷을 지을 줄 몰랐다), 있던 옷 가운데 

비교적 깨끗한 것을 잘 빨아서 입었을 뿐이었다. 준비가 끝나자 나우 

플리온은 다프넨의 어깨를 툭툭 쳐주며 말했다.

"그럼 이따가 공회당에서 보자."

다프넨이 공회당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이미 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어 소란스러웠다. 오늘 정화 의식에 참여하는 15세의 아이는 

모두 여섯 명이었다. 그러나 익사형을 받은 다섯 소년들 중 두 명도 

실은 오늘 이 자리에 와 있어야 했다. 그러나 그 자리에는 그들은 물 

론, 그들의 부모 형제도 보이지 않았다.

이제 의식이 끝나면 다프넨은 정식 순례자가 될 것이고, 다시는 예 

전처럼 대륙 사람, 트라바체스 사람이 될 수 없을 것이다. 섬사람들 

가운데 대륙에 나가 사는 사람은 특별한 임무를 받은 몇 명에 불과했 

다. 보통은 평생 섬 안에서만 살다가 섬에서 죽음을 맞았다.

공회당 뜰에는 평소 보지 못했던 커다란 돌 탁자가 놓여 있었다. 아 

마도 남자들 열 명은 달라붙어야 간신히 옮겨지지 않을까 싶은 묵직 

한 물건이었다. 약간 누르스름한 빛이 감도는 돌 탁자 중앙에는 커다 

란 그릇 모양으로 둥그렇게 패인 자리가 있어서 안에는 물이 담겨 있 

었다. 물에는 노랑과 자줏빛 꽃잎이 띄워져 향기로운 냄새가 났다.

주위의 나뭇가지에는 여러 개의 노란 리본들이 매어졌고 의식을 치 

를 아이들을 위해 꺾어 온 노란 수선화가 한 아름이나 물통에 꽃혀 준 

비되었다. 노란색은 옛 왕국의 빛깔이라고 했는데, 유령들이 보여 준 

가나폴리의 모습을 기억하는 다프넨은 노란색에서 그곳의 금빛 깃발 

을 떠올릴 수 있었다.

의식은 단순하면서도 인상적인 것이었다. 여섯 명의 아이들이 차례 

로 돌 탁자 앞에 가서 서면, 섭정이나 사제 가운데 한 사람이 기다리 

고 있다가 그의 머리에 꽃잎 섞인 물을 뿌려주고 간단한 질답을 했다.

질답이 끝나면 작년에 정화 의식을 치른 아이가 한 명씩 곁에서 기다 

리고 있다가 물통 속에 있던 수선화를 한 다발 안겨 주었다. 그러면 

주인공인 아이는 그 수선화를 주위의 사람들에게 다시 나누어주는 것 

이다.

다프넨은 그들 중 맨 마지막이었다. 이 날은 이례적으로 섭정이 직 

접 나와 의식을 주재했는데, 다리를 쓰지 못하는 섭정 때문에 탁자 앞 

에는 큰 방석이 깔린 높다란 의자가 놓여졌다. 다프넨이 섬에 온 이래 

로 섭정이 정화 의식을 주재하는 것을 본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사람 

들은 오늘 정화 의식을 받는 아이들 중에 리리오페가 있기 때문일 거 

라고 수군거렸다.

리리오페는 최근 스콜리를 자주 빠졌기 때문에 다프넨은 꽤 오랜만

에 그녀를 보았다. 하긴 일전에 그녀를 아예 무시하기로 마음먹은 혼 

로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눈 기억도 없었다.

이날 리리오페는 정화 의식을 받는 여섯 명 가운데 단연 눈에 띄는

모습이었다. 무릎을 조금 넘는 하얀 린넨 원피스 차림인 그녀는 손목 

에 긴 리본을 묶어 늘어뜨리고, 백합꽃을 엎어놓은 듯한 특이한 모양 

의 볼록한 고깔을 썼다. 정말로 백합꽃잎처럼 바깥쪽으로 말린 뽀족 

뽀족한 고깔 테두리 아래로 살짝 눈을 내리깐 자그마한 얼굴은 더없 

이 순결하고 사랑스러워 보였다. 곁에 서 있던 다프넨도 리리오페가 

저렇게 예뻤었나 하고 잠깐 고개를 갸웃거렸을 정도였다.

"스미크로스, 앞으로 나오너라."

첫 번째 소년이 돌 탁자 앞으로 걸어가는 것과 함께 의식이 시작되

었다. 빙 둘러선 사람들의 눈은 절반은 스미크로스라는 소년에게, 그 

리고 나머지 절반은 굉장히 오랜만에 보는 섭정의 얼굴로 향했다. 섭 

정은 최근 몇 년간 무서울 정도로 말라서 툭툭 튀어나온 뼈들은 흡사 

해골을 연상케 했다.

몇 가지 축복의 말이 떨어지고 스미크로스는 자신의 소명이 숲을 

돌보는 일임을 밝혔다. 소년이 고개를 숙이자 섭정이 두 손으로 물을 

떠내어 그의 머리에 부었다. 그러나 손이 워낙 앙상해서 물은 얼마 뿌 

려지지도 않았다.

“너는 순례자의 세 가지 임무를 기억하고, 일생에 걸쳐 추구하며,

너의 후손에게 가르치겠느냐?"

"그리 하겠습니다."

"너는 달여왕의 법에 순종하며, 네게 부과되는 의무를 충실히 함으 

로서 너의 권리들을 지키겠느냐?"

"예, 그리 하겠습니다."

"너는 달의 섬에 가해지는 모든 형태의 위협에 저항하고, 섬의 안전 

을 수호하는 데 신명을 바치겠느냐?"

"예, 그리 하겠습니다."

"되었다. 이제부터 너는 옛 왕국의 후예인 순례자로서 너의 축복 받 

은 생애를 살아나가거라."

스미크로스는 머리에서 물을 뚝뚝 흘리며 곁의 소년이 넘겨주는 수 

선화 꽃을 받아들었다. 돌아서서 사람들 쪽으로 다가온 그는 자신의 

어머니에게 제일 먼저 꽃을 건넸다. 그런 식으로 자신과 친밀한 사람 

들에게 먼저 꽃을 주었고, 나머지 사람들에게도 몇 송이 가량이 돌아 

갔다.

두 번째와 세 번째도 비슷했다. 네 번째는 리리오페였고, 그녀는 앞 

으로 나아가 자신의 아버지와 좀 전과 비슷한 문답을 주고받았다. 그 

런데 마지막 말이 조금 달랐다.

"이제 너는 옛 왕국의 후예인 순례자로서, 그들을 다스리시는 언젠 

가 돌아오실 왕, 그 분의 직분을 대신하는 섭정의 후계자로서. 너의 

축복 받은 생애를 살아나가거라,"

그렇게 말한 섭정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사람들을 휘둘러보며 말했다.

"이제부터 리리오페는 전통적으로 계승자에게 주어지는 '소시폴리 

스‘ 칭호를 획득했음을 선포하노라. 이제부터 섬의 모든 순례자들온 

그녀를 '리리오페 소시폴리스‘ 라고 불러야 할 것이며, 그녀의 의견은 

달여왕의 법에 어긋나지 않는 한 나와 사제들 다음으로 존중될 것이 

니 라."

이것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폭탄선언이었다. 사제들 가운데 이

점에 대해 미리 귀띔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했다. 리리오페는 아

직 스콜리를 졸업하지 못했으니 사람들이 존댓말과 함께 불러야만 하 

는 칭호를 받기에는 일렀고, 내년에 스콜리를 졸업한다 해도 저렇듯 

중대한 특권을 지니게 되려면 최소한 스무 살은 넘어야 했다. 그러나 

섭정이 기습적으로 그 모든 권리를 선포해 버린 터라 아무도 쉽사리 

반론을 제기하지 못한 채 서로 얼굴만 마주볼 뿐이었다. 비록 모든 일

이 관례에 비해 크게 서두른 것이었지만, 언젠가는 결국 리리오페가 

갖게 될 특권인 까닭에 섭정의 권위에 대항하여 무어라 따지는 것이 

용이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때였다. 사람들을 헤치고 다프넨이 아까부터 찾고 있던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섭정 앞에 고개를 살짝 숙였다가 도로 꼿꼿이 들면

서 입을 연 것은 다름 아닌 이솔렛이었다.

"섭정 각하. 의식 가운데 무단히 발언함이 비록 예는 아니지만 중대 

한 오류가 있는 바 한 말씀 드리지 않을 수가 없군요. 옛 왕국의 언어 

로 '국가의 안녕'을 뜻하는 '소시폴리스‘ 칭호는 예로부터 국왕 폐하 

의 후계자에게만 인정되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의 섭정 각하께서도 당 

연히 그런 칭호는 갖지 않으셨지요. 아니, 실은 섭정의 후계자에게 칭 

호를 내리는 일 자체가 섭정 각하 이전의 치세에는 물론이고 이미 오 

랫동안 잊혀져 있던 바입니다. 그러니 섭정 각하께서 굳이 리리오페 

에게 칭호를 내리고자 한다면 섭정의 후계자에게 전례대로 내려지는 

'시오피', 즉 '침묵‘ 이라는 칭호가 적절하다고 생각됩니다."

이러한 점을 지적할 수 있는 사람은 섬 안에서도 제로나 이솔렛 정 

도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야 옛 왕국에서 왕의 후계자에게 무슨 

칭호를 내리고 섭정의 후계자에게 무슨 칭호를 내렸는지 알 턱이 없 

었다. 자신들의 이름을 짓는 옛 왕국의 언어조차 거의 모르는 그들인 

것이다.

그러나 다프넨은 주위 사람들과는 조금 다른 심정으로 그렇게 말하 

는 이솔렛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그녀를 다시 보는 순간 가슴이 아 

플 정도로 세차게 뛰었지만, 그녀가 말하는 것을 들으면서 불길한 짐 

작이 사실로 굳어지는 것을 느끼고 어찌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이솔렛은 지금 섭정에게 직접 맞서고 있었다. 오래 전 일리오스가 그 

랬듯, 섭정의 말에 토를 달고 자신의 지식으로 당당하게 반박하고 있 

었다. 분명 그녀는 아버지의 유언대로 그들과 투쟁하지 않겠노라고 

스스로의 입으로 말한 일이 있는데 저렇게 달라진 것은 어찌된 일일 

까. 그녀의 삶에 어떤 변화가 있었던 것인가.

그것이 혹, 자신이 그녀의 삶에서 빠져나가려 한 것 때문은 아닌 

가......

사람들 가운데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대부분은 작은 속삭임으로 

이솔렛의 말을 긍정했다. 그들은 섭정이 리리오페에게 전례 없는 특 

권을 주려 하는 것을 보고 흠칫 두려움을 느꼈기에 내심 이솔렛의 말 

이 받아들여지기를 바라며 사제들을 쳐다봤다.

이솔렛은 한 걸음 물러나더니 다시 말했다.

" '시오피' 라는 칭호는 왕의 대리자인 섭정, 그 섭정을 이어갈 후계

자가 자신의 입장을 자각하고, 권위를 내세우기보다 스스로 침묵하여 

미덕을 보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녀가 그런 것을 알 나이 

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만일 칭호를 받게 된다면 그 의미를 스스로 

에 대한 경계로 삼는 것이 옳겠지요."

이솔렛이 말을 맺고 물러나는 가운데 리리오페의 싸늘한 눈동자가 

그녀의 모습을 뒤쫓았다. 다프넨은 바로 그 시선을 보고 있었다.

이솔렛의 걸음과 움직임은 예나 다름없이 빠르고 흔들림 없이 정확 

했으나 다프넨의 눈에는 그것이 전투를 준비하는 자가 지닐 법한 절 

도 있는 동작으로 느껴졌다. 만일 그녀가 무언가를 확고히 결심했다 

면, 다프넨은 그걸 바꾸게 할 자신이 없었다. 그랬기에 그녀가 결심하 

지 않았기를 바랐다. 이솔렛이 비록 개인으로는 누구보다도 빼어난 

사람이지만, 일리오스는 빼어나지 않아서 결국 그렇게 되었단 말인 

가? 적어도 섬 안에서 자신의 지지세력도 없이 섭정의 힘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은 시작부터 패배가 예상된 일이나 다름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그런 싸움을 시작한다면 다프넨 자신도 결코 손놓 

고 구경만 하고 있을 수는 없을 것이기에....

섭정이 쉽사리 대답을 않고 있는 가운데 먼저 입을 연 것은 리리오 

페였다. 그녀는 작년부터 서서히 획득해 온 자부심 강한 말투로 이솔 

렛을 향해 말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충분히 알겠네요. 물론 이 리리오페는 '시오피‘

칭호로도 충분해요. 아니, 그런 칭호가 없다 해도 상관없지만 각하께 

서 친히 내려주시는 것이니 거절할 마음은 전혀 없거든요. 하긴 저로 

서는 '소시폴리스‘가 맞는지 '시오피'가 맞는지 비교할 지식조차도 

없네요. 하지만 그런 건 조금 별난 사람들이라면 모를까,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은 누구나 모르는 일 아닌가요? 그러니 제가 모른다고 잘 

못이라 할 건 아니죠. 어쨌거나 그 칭호가 '소시폴리스‘ 였든 '시오피’ 

였든 내가 본질적으로 갖는 권위는 변치 않아요. 그렇지 않나요?“

이솔렛은 미소도 없이 바로 대꾸했다.

"역시 맞는 말씀이군요. 섭정의 권위란 칭호나 출생에서 나오는 것 

이 아니라 주위 사람의 진실한 지지로 획득되는 것이니까요. 그런 지 

지가 있기만 하다면 그 권위에 변화가 있을 리 없지요."

리리오페는 영리하게도 이솔렛을 '별난 사람‘으로 몰아세워 주위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 쓸모 없는 칭호 논란으로 자신의 

격을 깎는 대신 본래부터 지닌 특권을 내세우려 했다. 그러자 이솔렛 

이 곧장 '사람들이 인정하지 않으면 네게 특권이 있을 줄 아느냐‘ 라 

고 반박해 버리고 말았다. 조금만 신중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눈치챌 

수 있는 공박이었다.

그 즈음 섭정이 입을 열었다.

"모두의 말은 잘 알겠노라. 칭호의 문제는 일단 사제들과 좀더 논의

한 뒤에 결정할 것이니 더 이상 논하지 말 것이며, 태어나면서부터 리 

리오페가 지닌 권위에 대해서는 이곳에 모인 자 가운데 모르는 이 없 

으니 마찬가지로 더 이상 논할 바 없다고 하겠다."

원론적인 이야기를 되풀이해 논쟁을 막아버린 섭정은 수선화 꽃다 

발을 든 채 엉거주춤하고 있던 소녀에게 꽃을 건네주라고 눈짓했다.

수선화 한 아름을 받아든 리리오페는 이제야 자신이 원하던 순간이 

왔다는 것처럼 눈을 빛냈다. 그녀는 사람들을 향해 걸어갔고, 한 순간 

다프넨은 그녀가 자신을 향해 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에 사로잡 

혔다. 아니, 그것은 착각이 아니었다. 그녀는 대열 바깥쪽으로 조금 

떨어져 선 다프넨의 눈앞에 와서 멈추더니 첫 번째 수선화를 선뜻 내 

밀었다.

“받아 줘."

몇 년 전부터 정화 의식을 보아 왔지만 의식에 참여한 당사자가 내 

민 꽃을 거절한 사람은 한 번도 본 일이 없었다. 물론 그들은 대부분 

자기 가족에게 꽃을 건넸다.

다프넨은 무언가 기분이 이상했지만 중요한 의식을 마무리하고 있 

는 그녀의 입장을 생각해서 일단 꽃을 받아들었다. 그러자 리리오페 

가 사람들 쪽으로 몸을 홱 돌리더니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보셨죠? 정화 의식의 첫 번째 꽃이 무슨 의미인지 다들 아실 거라 

고 생각해요. 보시다시피 그는 받아들였어요. 그러므로 그는...... 이 

순간부터 그가 내 약혼자임을 선언하겠어요."

2. 막다른 벽을 돌파하다 

누구보다도 놀란 것은 다프넨 자신이었다. 처음에는 농담을 들었는

가 했다. 그러나 웃지 않는 리리오페와 주위 사람들의 반응, 그리고 

무엇보다도 침묵하는 섭정을 보며 이것이 장난도 아니고 쉽게 철회될 

성질의 문제도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생각이 떠올라 잠시 무어라 대답해야 좋을지 

갈피를 잡지 못할 지경이었다. 잠시 후 그는 본능적으로 시선을 돌려 

한 사람의 그림자를 찾았다. 이솔렛의 무표정한 눈동자를 발견했을 

때 묘하게 마음이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의 눈은 아무 것도 말

하지 않았지만, 그는 그 눈동자로부터 필요한 모든 것을 얻었다.

이윽고 다프넨은 대담하게 섭정을 향해 입을 열었다.

"섭정 각하, 제가 방금 들은 이야기를 어찌 해석해야 합니까? 제가

본디 대륙에서 온 까닭에 정화 의식의 첫 꽃이 무슨 의미인지 모른다 

는 말씀을 먼저 드립니다. 그리고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저는 방금 전 

의 선언에 전혀 동의하고 있지 않습니다."

상대가 섭정이었고 말도 안 되는 일을 한 당사자도 섭정의 딸이었 

기에 최대한 자신을 낮추어 한 말이었다. 술렁대던 사람들도 모두 섭 

정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섭정이 입을 열어 한 말은 더더욱 뜻밖이었다.

"정화 의식의 꽃이 갖는 의미는 관습적인 것에 불과하다. 그것이 어 

찌 되었든, 섭정의 후계자는 자신이 원하는 상대를 언제고 내키는 대 

로 고를 수 있다. 너희 둘은 한 살 차이이니 나이가 적당하고, 은빛 매 

와 청동 표범으로 지파가 다르니 또한 적당하다. 너는 받아들이는 것 

이 좋을 것이다"

기가 막히는 소리였다. 한 대 얻어맞은 듯했던 충격이 가라앉으면 

서 서서히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게 리리오페였든, 다른 누구였든 

다프넨 자신과 관련된 문제를 저들끼리 제멋대로 처리할 수는 없었 

다. 어린 시절부터 홀로 버터 온 자신이었고, 스스로를 얽매는 것은 

소중한 사람들에 대한 기억뿐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그런 자신을 저렇 

듯 몰염치한 방식으로 다뤄도 좋다고 생각한단 말인가? 그가 알지 못 

하는 엉뚱한 관습은 다 무엇이며, 겨우 열 다섯에 약혼 운운은 무슨 

되지 않은 소리란 말인가!

"싫습니다. 제 삶에 멋대로 끼여들지 마시지요. 그런 것 허락한 기 

억 없습니다."

이 순간 섬사람과 자신은 무리가 다른 두 맹수만큼이나 거리가 먼 

존재라는 것을 실감했다.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죽었다 깨어나도 이 

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섬사람들은 오히려 다프넨이 한 말에 놀라는 

것이 아닌가? 섭정의 말보다 그의 말에 더욱 당황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바로 옆의 사람이 그더러 들으라는 듯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섭정의 권위에 누가 대적할 수 있단 거지? 그의 권위가 미치는 땅 

에 살면서 어떻게 그의 말을 거절할 수가 있지?“

곧 섭정도 깡마른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순례자로서 너의 삶은 오직 나의 권위 아래 있다. 말도 되지 않는

소리는 그만 지껄이고 좀더 순종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좋을 것이야.

너의 보호자가 네게 지금껏 그렇게 가르치던가?“

다프넨은 기가 막힌 나머지 대뜸 소리지르고 말았다.

“순종이라고요? 그럼, 그 상대자가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그건 

전혀 중요하지 않단 말입니까!"

누구도 그의 무례를 지적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제 다프넨이 저들 

과 완전히 다른 사람인 양 느끼고 있었다. 대륙 사람이니까, 대륙에서 

온 인간이라서 그렇다..... 라는 소리가 잔물결처럼 퍼지고, 섭정의 분 

노가 어떤 결과로 나타날지 두려워하며 다들 그를 곁눈질했다. 비록 

처음 리리오페의 발언을 듣고 놀라긴 했지만, 그들은 섭정이 명령한 

이상 결국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섭정은 어이없을 정도로 짧게 대답했다.

“당연히 그렇다."

그 때 데스포이나가 황망히 나섰다.

"각하, 지팡이의 사제인 저로서도 그런 관례는 아직껏 들은 일이 없 

습니다. 젊은 남녀간의 문제는 그들 두 사람이 알아서 해결할 일이라 

고 생각되며 거기까지 각하의 권위가 필요하지는 않습니다. 리리오페 

와 다프넨은 아직 둘 다 어립니다. 좀 더 시간을 두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겠습니까?“

비록 데스포이나라 하더라도 섭정에게 대놓고 말도 안 되는 짓거리 

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지금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만은 분명했다. 그녀의 표정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모두가 놀랄 정도로 섭정의 입장은 확고했다.

"후계자로 인정받은 리리오페의 권위는 나와 사제들 다음이다. 예 

로부터 '옛 섭정의 원칙'이라는 것이 있어 가장 고귀한 자가 공동체 

의 균형을 위해 비천한 지위의 배우자를 택할 때에는 그 선택을 자유 

로이 할 수 있었다. 다프넨은 본디 우리의 핏줄이 아니라 대륙에서 온 

자이니 당연히 이방인으로서 어느 순례자보다도 낮은 지위에 있다 할 

것이다. 따라서 이 결합은 옳으며 그에게 그것을 거부할 권리는 없다."

이제 사제들은 진땀을 흘리고 있었다. 발끈한 나우플리온이 몇 번 

이고 발언하려 하는 것을 데스포이나와 모르페우스가 온 힘을 다해 

겨우겨우 막고 있었다. 나우플리온의 성격상 지금의 다프넨보다 심하 

게 말하면 말했지 결코 회유적으로 말할 리 없었고, 그렇게 된다면 한 

소년의 일로 끝날 것이 섬 전체의 일로 번지게 되는 것이다. 다프넨이 

라면 무슨 말을 해도 일단은 철모르는 행동이라고 감쌀 수 있고 무엇 

보다도 리리오페가 막아 줄 테니 최악의 결과는 오지 않을 테지만, 사 

제인 나우플리온이 섭정과 대립하는 것을 섬사람들에게 간단히 보일 

수는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옛 왕국의 전통이 희미해져 사회적 유대

를 보존하는 것이 어려운데, 자칫하다가는 섬의 통치 기반을 흔드는 

일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작은 사회인 섬에서 통치의 근간이 되는 

권위가 사라지면 오는 것은 대혼란과 자멸뿐이었다. 그런 까닭에 일 

리오스와 섭정의 대립이나 그 결말도 섬사람들에게는 철저히 숨겨졌 

던 것이다.

다프넨은 사람들의 말속에서만 존재하는 듯했던 섭정의 권위가 어 

떤 것인지 몸소 느끼는 중이었다. 온 몸이 서서히 싸늘해졌다. 그는 

다시 이솔렛을 보려 했다. 그러나 그녀는 사람들 틈으로 사라져 보이 

지 않았다.

그리하여 다프넨은 리리오페를 정면으로 보았다. 나지막이, 그러나 

감정을 숨기지 못한 말투로 그가 말했다.

"이게 다 무슨 짓이지?“

그러나 놀랍게도 리리오페는 망설이지도 않고 잘라 말했다.

"보다시피 그대로야. 난 너를 가질 것이고 너는 거절할수 없어."

“난 널 거절해. 가진다고? 난 오직 나 자신의 소유야. 이따위 우스 

운 연극은 이제 그만 집어치워."

"이건 연극 나부랭이가 아니야. 그만 현실을 받아들여. 네가 뭐라 

한들 그건 고작 투정에 불과할뿐이야."

리리오페는 놀랄 만큼 자신만만했다. 작고 귀여운 얼굴에 대륙의 

귀족들이 흔히 보일 법한 폭력적 오만이 서렸다. 그녀는 다짜고짜 이 

어서 말했다.

“나와 있으면 네가 행복해진다는 것을 왜 모르지? 거절할 걸 거절 

하라고 말해 주고 싶어. 다른 사람은 갖고 싶어도 갖지 못하는 것이 

야. 날 좀 그만 웃겨.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야? 여전히 너와 어울 

려 놀던 또래 소녀로 보여? 다시 말하지만 네겐 거부권이 없어. 전혀 

없어. 네가 이 섬에 있는 한, 네가 순례자로 살아가는 한."

그러나 다프넨은 진짜 귀족을 보고 그들의 불쾌함을 몸소 체험해 

보았던 사람이었다. 그녀가 강제로 자신을 억누르려 하면 할수록 혐 

오감만 더해졌다. 용서하지 않는 차가운 자아가 서서히 되돌아오고 

있었다.

“네 뜻대로 된다 해도 행복해지는 일 따위는 없어. 본래 행복해질 

수 없는 인간인 나는 물론이고, 그 순간부터는 너도 마찬가지야. 아 

니, 걱정할 것은 없어. 넌 네가 원하는 것을 뭐든 가질 수 있겠지만,

살아 있는 인간만은 아니지. 네가 날 가질 수 있는 단 한 가지 방법을 

가르쳐 줄까."

다프넨은 무표정한 눈으로 손가락을 들어 탁 꺽으며 말했다.

“날 죽인 다음, 내 시체를 가지라고."

그 순간 리리오페는 다프넨의 뺨을 때렸다.

별 위력 없이 그냥 툭, 소리가 날 정도에 불과했기에 다프넨은 고개 

도 꺾이지 않았다. 오히려 얼굴이 붉어진 것은 리리오페였다. 자신을 

주체하지 못해 말도 잘 나오지 않았다.

"그런 말을.... 잘도 하는구나. 나와는 행복해질 수 없다면서..... 난 다

알고 있어...... 깨끗한 척 하지마. 그런 식으로 말해도, 애정 따위 모르는

것처럼 말해도..... 넌 결국, 결국...... 그 여자를 원하고 있으면서, 난 다

알아! 네가 행복해질 수 없는 건 그 여자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지?“

사람들 사이에서 한꺼번에 비명이 솟았다. 다프넨은 그렇게 말하는 

리리오페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더니 똑같이 손을 들어 그녀의 뺨을 

힘껏 후려갈겼던 것이다. 그것은 조금 전과는 위력부터 다른 손찌검 

이었다.

"아악!"

고개가 꺾이다 못해 몸을 가누지 못한 리리오페는 숫제 바닥에 넘 

어지고 말았다. 입술을 깨물고 있었던 것 때문에 살갗이 찢겨 핏방울 

까지 흘러내렸다. 사람들이 당황하여 비명을 올린 것은 물론이고, 섭 

정조차 놀란 나머지 자신을 잊고 벌떡 일어나려다 의자에서 떨어질 

뻔했다. 섭정 앞에서 섭정의 딸을 때리다니, 지금껏 이렇게 대담한 일 

을 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물론 가장 놀란 것은 리리오페 자신이었다. 평생 살아오며 손찌검 

은 커녕 남의 손으로 멍자국 하나 생겨 본 일이 없는 그녀였기에 뺨을 

맞았다는 충격은 더욱 컸다. 그러나 땅바닥에서 고개를 들어 다프넨 

을 쏘아보려 했을 때, 그녀는 놀라 하려던 말을 삼키고 말았다. 그리 

고 자신이 아직껏 한 번도 만난 일이 없는 상대를 본 것은 아닌가 스 

스로를 의심했다.

“....... 네가 뭘 안다고 착각하지 마. 멋대로 생각하고 떠들어대는 건 

네 아버지 앞에서나 하면 족하지. 넌 내가 어떤 사람인지도 몰라. 물 

론 알았다면 이따위 시시한 일을 꾸미지도 않았겠지."

차가운 말투는 물론이고, 눈빛조차도 평소 보던 것과는 전혀 달랐 

다. 누군가처럼 얼마간 연습하여 꾸며 낸 태도가 아니라 생래적으로 

갖고 있던 잔인함이 일순 드러난 듯한 모습이었다. 다프넨은 뒤로 한 

발 물러섰다. 그러더니 의식을 위해 긴 머리를 잡아맸던 끈을 풀어 바 

닥에 내던졌다.

청동빛 머리채가 천천히 너울져 가라앉았다.

“모든 것은 간단해."

다프넨은 리리오페로부터 눈을 떼어 주위의 모든 사람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섭정을 바라보았다. 그를 향해 잘라 말했다.

"정화 의식을 아직 받지 않았으니, 저는 순례자가 아닙니다. 순례자 

도 아닌 자에게 무슨 순종 따위가 있겠습니까. 지나친 기대죠."

다프넨은 왼손을 높이 들어올리더니 아직껏 쥐고 있던 수선화 꽃을 

흡사 조롱하듯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홱 돌아서 사 

람들을 헤치고 떠나 버렸다.

잠도 아니고 꿈도 아닌 상태가 몇 시간이나 계속되었다.

목이 졸리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벌떡 일어났을 때 주위는 이미 어 

두워져 있었다. 어떻게 시간이 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입안이 쓰 

고 목이 탔다. 일어나 물을 찾아 마시고 나니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 

났는지 서서히 기억이 났다.

다프넨은 침대로 돌아가는 대신 창가로 의자를 끌어당기고 창 덧문 

을 열었다. 밤은 평소처럼 익숙한 작은 소음들과 함께 돌아오는 중이 

었다. 바람이 와 닿자 얼굴에 열이 무척 올랐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 

다.

오늘 낮, 공회당에서 흘로 돌아온 그는 무언가 가누기 힘든 심정 때

문에 혼란스러워하다가 도피하듯 잠을 청했고, 그 후로 몇 시간 동안 

땀과 눈물로 범벅된 꿈, 또는 백일몽에 시달렸다. 여러 개의 선택지가 

보였지만 한 가지도 선택할 수 없었고, 그렇다고 선택하지 않은 채로 

그냥 머무를 수도 없는 가운데 속수무책으로 상황은 악화되고만 있었 

다. 모든 것이 나빠졌다. 그는 달려나갈수도, 돌아설 수도, 그 자리에 

가만히 있을 수도 없었다.

이솔렛.

그 이름을 천천히 발음했다. 그의 무의식이 맨 처음 불러낸 이름이 

었다. 그의 고통 가운데 가장 큰 것을 그녀가 쥐고 있었다. 그녀를 떠 

날 수도 없었고, 함께 할 수도 없어서 그냥 지금 그대로 유지하기만 

하겠다고 마음먹었는데, 그것조차 너무도 힘들었는데, 이젠 그나마도 

불가능해지고 말았다.

리리오페가 이솔렛을 '그 여자'라고 지칭했을 때 왜 그렇게 화가 

치밀었던 것일까.'그 여자를 가질 수 없기 때문이라는 말을 듣는 순 

간에는 거의 이성을 잃다시피 했다. 대륙에서 돌아온 뒤 다프넨이 이 

솔렛을 보지 않기로 결심한 것은 자기 몸을 찔러 상처를 내는 것과 다 

름없는 행동이었다. 거의 미칠 듯한 심정을 가까스로 눌러가며 그녀 

의 이름을 말하지 않고,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않고, 그녀를 보 

는 것을 삼갔다. 그렇게 함으로서 언젠가는 자신의 마음에도 평화가 

오리라 애써 믿었다.

그런 자신의 노력을 단 한 마디로, 심지어 ‘가진다' 라는 단어로 그 

의 감정을 단순한 욕구로 단정지어 리리오페 자신의 소유욕과 똑같은 

것인 양 일축하는 순간 그는 거의 죽이고 싶다는 기분으로 상대를 쳤 

다...... 그 말이 자신의 가장 아픈 곳을 찌르고 흙탕물에 내던졌기에 

지금까지도 감정의 찌꺼기가 완전히 가시지 않았다.

다프넨이 이솔렛을 떠나고자 한 것은 그녀 대신 다른 누군가를 택 

하거나 하는 것과는 아무 관계도 없었다. 그는 본래 어떤 사람이든 쉽 

게 사랑하지 않았지만, 반대로 한 번 마음을 준 상대에 대한 집착은 

놀랄 만큼 강했다. 어린 시절을 함께 한 예프넨의 존재가 아직까지도 

그의 삶을 지배하듯, 이솔렛의 그림자는 이성을 느낄 줄 아는 

소년이 된 지금의 그를 휘어잡고 있었다. 비록 가까이 할 수 없다 해 

도 마음 속 깊이 하나뿐인 연인으로 느껴 온 이솔렛의 모습을 이제 와 

서 부술 수는 없었다. 

다만 함께 하지 않더라도, 그녀의 소식을 들을 수 있는 이곳에 있고 

싶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그는 섬의 최고 권위자인 섭정을 향해 순 

례자가 되는 것을 거절하겠다는 뜻의 말을 남기고 돌아오고 말았다.

정식 순례자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즉시 섬을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 방법은 확실히 맞았다. 리리오페가 직접 고집을 꺽지 않는 한 그

가 이 뜻밖의 굴레로부터 벗어나는 확실한 방법은 오직 그것뿐이었 

다. 섭정의 권위가 미치지 않는 곳, 다시 대륙의 사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것도 정화 의식을 아직 치르지 않았기에 가능했던 방법이 

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는 또 하나의 커다란 부담이 존재하고 있었다.

나우플리온을 두고 그가 섬을 떠나도 좋은 것인가?

처음 섬에 들어오던 때를 생각하니 불안정하게 파도를 헤치고 나아

가던 작은 돛배에서 파도를 잠재우던 항해자, 상처투성이 소년인 

그가 신뢰한 단 한 사람이었던 나우플리온의 모습이 눈앞에 선하게 

떠올랐다. 그 한 사람을 믿고 고향과 대륙을 모두 버린 채 낯선 땅에 

들어와 살기를 자청하던 자신의 목소리도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못 견디도록 가슴이 답답했다. 이제 다프넨이 섬을 나간다면 다시 

나우플리온을 만날 방법은 전혀 없었다. 오럿동안 비워두었던 사제직 

에 복귀한 나우플리온이 전처럼 대륙으로 나을 가능성은 전무하다시 

피 했고, 한 번 섬을 나간 자신은 다시는 순례자의 영역에 발을 들이 

지 못하게 될 것이다.

더구나 나우플리온의 유예된 생명은 이제 최대 시한인 10년을 거의

다 채우고 있었다. 다프넨은 고개를 젓고, 끝내 떨어뜨렸다. 지금 나 

우플리온과 헤어진다는 건 영영 다시 볼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임종 

의 순간조차 지킬 수 없게 된다는 걸 의미했다. 한때 이 세상에 살아 

있는 사람들 중 가장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그인데, 남은 생애를 모두 

그에게 걸겠다고 결심했고 언제까지나 같이 있고 싶다고 생각하여 이 

곳까지 따라왔던, 그를 영원히 떠난다고?

수많은 사람들의 질시며 반대에도 아랑곳 않고 하나 뿐인 제자로 

삼았던 일, 그 후로도 잘못이며 실수를 저지를 때마다 가장 먼저 나서 

서 감싸고 막아주었던 모습이 하나 둘씩 떠오르며 그를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나우플리온의 얼굴에서 나이의 흔적을 발견하고 흠칫 놀랐 

던 일도 기억났다. 그의 주름살은 거의 다 다프넨이 만든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리고 다프넨이 검의 사제가 되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 

섬사람들을 가나폴리의 영광으로 이끌어 주길 바랐던 제로, 기적적으 

로 몸은 회복되었으나 이제 다프넨이 없으면 살지 못할 것처럼 행동 

하고 있는 오이지스, 그 동안 갖가지 일에 연루된 다프넨을 변호하느 

라 몹시 힘들었을 데스포이나 등 그 모든 사람들의 존재가 저마다의 

이유로 다프넨의 발을 붙들었다.

덜컥, 문이 열렸다가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을 사람은 한 명밖 

에 없었다. 

나우플리온은 얼른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문을 등지고 선 채 한참 

동안 다프넨을 내려다보았다. 주위가 어두워서 표정은 알아볼 수 없 

었다. 다프넨도 창가에 앉은 채 그를 올려다보았다. 자신의 표정도 보 

이지 않았으리란 생각을 했다.

잠시 후, 그의 숨소리가 약간 거칠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 정말 쓸모 없지요."

혼잣말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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