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6권. 1장. Withered Land (16/21)

제목 : 룬의 아이들 6

지은이 : 전민희

펴낸이 : 서인석

출판사 : 제우미디어

출판년도 : 2002년

저자소개 : 전민희

           1975년 서울에서 태어나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역사와 문학. 신             화 등을 비롯하여 최근 철학의 신조류까지 섭렵한 지식광이며, 판타지 동화에서             남미 환상문학에 이르는 다양한 판타지에 깊은 애정을 지니고 있다.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연구원을 거쳐 1999년 출간한 장편 판타지 소설             ‘세월의 돌’은 통신 연재사상 전설적인 400만회의 조회수와 더불어 전국 판타지             독자들의 입문필독서로 자리잡았다. 4대 통신망과 유명한 인터넷 커뮤니티들마             다 작가의 팬클럽이 빠짐없이 결성되어 있으며, 현재 (주)이삭커뮤니케이션에서             <아룬드 온라인>이라는 이름의 3D 온라인 게임으로 제작중이다. 또한 ‘세월의             돌’은 총 5부작으로 예정된 <아룬드 연대기Arund Chronicles>의 3부로서, 1부             격인 ‘태양의 탑’이 이듬해 출간되었다.

           (주)소프트맥스의 온라인 커뮤니티 서비스 <4Leaf>의 제작에 참여, 배경세계와             스토리, 캐릭터 설정을 담당하였으며, 곧 출시될 온라인 게임 <테일즈 위버>에             서도 동일한 설정을 사용하게 된다. 현재 100만 명에 육박하는 회원들이 이용하             고 있는 <4Leaf>의 아바타 캐릭터들이 직접 등장하여 지금까지 감춰졌던 이야             기들을 펼치게 될 연작 소설 시리즈가 바로 ‘룬의 아이들’이며, 그 가운데 ‘룬의             아이들-윈터러’는 첫 번째로 공개되는 매력적인 비밀이 될 것이다.

  Contents

                                                          

1장 . Withered Land

1. 후라칸 - 8

2. 세 순례자의 비밀 - 3

3. 마법 왕국의 그림자 - 56

4. 세 번째 눈에 보이는 것 - 85

5. 타 버린 것들 - 105

2장. Haunted Land

1. 진실을 찾아서 - 122

2. 첫 번째 진실 -148

3. 두 번째 진실 - 166

4. 주사위 - 194

5. Mental Forest - 225

3장. Gaunted Land

1. 심판 - 240

2. 막다른 벽을 돌파하다 - 264

3. Forevermore -290

1장. Withered Land

1. 후라칸 

아직도 눈은 내리고 있었다. 공회당으로 이어지는 길은 수많은 사 

람들의 발자국을 묻어 버린 채 갓 잡은 담비가죽처럼 여전히 반짝거 

렸다.

다프넨은 대륙에서 살던 시절 단 한 번 담비를 본 일이 있었다. 물

론 그것은 죽은 담비였다.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진네만 저택에 찾아 

온 어느 고관의 부인이 몹시 뽐내며 두르고 있던, 은회색 담비가죽 스

톨(stole)에 매달린 자그마한 머리였다.

그나마 머리가 있었으니 죽은 담비를 만났다고 할 수도 있겠지, 라

고 그는 생각했다. 그것의 이름이 담비라는 것이나 가격이 어마어마 

하다는 사실 등은 고관과 부인이 떠난 뒤 유모의 입을 통해 알았다.

'실제로 구할 수 있는 담비 가죽들 중에서 가장 값비싼 것이 그 부인

이 갖고 있던 은회색 담비라 했다. 실제로라고? 그렇게 묻자 유모는 

약간 투덜대듯이 말했다.

"저 먼 북쪽 땅에는 털가죽이 하얀 담비라는 것도 있다고들 해요.

그것도 다른 철에는 털이 황갈색이고 겨울에만 하얗게 되기 때문에 

반드시 겨울에 사냥해야 된다는 거예요. 귀부인들은 물론이고 여왕님 

이나 공주님들까지도 갖고 싶어하는 털가죽이라서 정말이지 황금보 

다도 비싸다지 뭐예요. 한 마리만 잡아도 사냥꾼 팔자 고치는 물건이 

라는데, 뭐,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상인들이 부인네들을 만나면 신 

기한 얘기랍시고 꺼내 놓는 그런 거죠. 물론 이 유모는 실제로 보지 

않은 건 믿지 않지만요. 그러니 역시 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담비는 

은회색 담비가 아니겠어요? 하지만 그 백담비 가죽은 아무도 밟지 않 

은 첫 눈 깔린 새벽 들판처럼 완벽하게 아름답다고 그러더랍니다."

이 말이 기억나고서야 왜 눈밭을 보다가 갑자기 담비 같은 엉뚱한 

것을 떠올렸는지 깨닫게 되었다. 다프넨은 피식 웃다말고 문득 생각 

했다. 실제로 보지 않은 건 믿지 않는다는 그 유모는, 에메라 호수의 

망령, 아니 괴물을 실제로 보았던 것일까.

이젠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유모다.

"지금이야."

어깨를 툭 치는 손길을 느끼며 다프넨은 앞으로 나아가 공회당의 

계단을 올랐다. 일전에 섬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던 때 올라섰던 곳 

을 지나쳐, 공회당을 둘러싼 네모진 회랑을 따라 걸어갔다. 수많은 섬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느린 걸음으로 뒤따라오는 가운데 발걸음은 모 

퉁이를 돌았고, 공회당의 동쪽 사면에 만들어진 문짝 없는 아치형 입 

구 앞에서 멈추었다.

그것은 다프넨이 처음 섬에 도착해서 공회당을 보았을 때 본 바 있 

는 ‘뚫린 입구' 바로 그것이었다. 그러나 곧 그 입구는 평소 사용되지 

않는 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입구는 마을 바깥벽의 것과 마 

찬가지로 마냥 뚫린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열쇠가 되는 주문이나 동 

작 없이는 지나갈 수 없는 곳이었다. 보통 때에는 누구나 맞은편 벽에 

있는 빗장 달린 평범한 문을 사용했기에 이 문의 존재는 거의 잊혀져 

있었다.

지금 그 입구 앞에는 데스포이나 사제가 서 있었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초승달 수정이 달린 지팡이 '듣는 자의 룬'을 한 번 휘두른 뒤 알 

수 없는 언어로 주문을 외웠다.

"보나 데아, 트니토스 테오스, 텔로 엑소우시아."

초승달 수정이 희미한 빛을 흩뿌리는 가운데 데스포이나가 입구를 

향해 지팡이를 내밀었다. 그러자 투명한 막 같은 것이 수정과 닿아 너 

울거리다가 녹아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데스포이나가 물러서자 입구 

를 통과해 들어간 다프넨은 그를 기다리고 있는 사제들 앞에서 멈춰 

섰다.

두 줄로 늘어선 사제들 중에는 나우플리온의 모습도 보였다. 다프 

넨이 오자 좌우로 물러난 사제들이 길쭉한 원을 그리며 둘러섰고, 모 

두 자신들의 신물에 손을 얹은 채 잠시 눈을 감았다.

이윽고 그들 가운데 반투명한 너울거림 같은 것이 서리더니 곧 높 

이 솟은 제단의 영상으로 변했다. 평평한 원형 상단 아래로 모래시계 

모양의 다리가 세워진 제단이었다. 희미하게 나타났던 제단이 점차 

구체적인 빛을 띠는 가운데 그 위쪽으로 길쭉한 선 같은 것이 죽죽 그 

어지고, 그것은 잠깐만에 덩굴손을 가진 나뭇가지로 변해 늘어졌다.

가지 끝, 맺힌 이음매마다 순식간에 잎새가 그려져 나갔다. 주위는 숲 

이 되었다. 서서히, 더욱더 실제적인 자연의 모습으로 변화되어 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공회당 밖에 내리고 있는 것과 꼭 같은 흰 눈이 그 

위로 내리기 시작했다.

모두가 더할 나위 없이 생생했다. 하나같이 반투명하다는 사실만을 

제하면.

눈송이들은 공회당 바닥에 닿으려는 순간 지워지곤 하여, 이 모든 

것이 먼 곳에 있는 어느 장소의 모습을 일시적으로 이곳에 옳겨온 것 

뿐이라는 사실을 새삼 상기시켰다. 다프넨과 사제들을 비롯하여 이 

광경을 지켜보는 사람 모두가 알고 있었다. 저것은 선착장이 있는 섬 

의 해안과 사람들이 사는 마을 사이에 펼쳐진, 금지된 '숲' 가운데 존 

재하는 옛 유적들 가운데 하나였다.

보통 섬사람들이 선착장을 떠나 숲 머리에 들어서면, 보이지 않는 

전이문을 통해 곧장 마을이 시작되는 숲의 끝까지 이동되어 

버렸다. 따라서 숲 안에 산재한 유적들을 실제로 볼 수 있는 것은 사 

제들과 일부 선택받은 사람들 뿐이었다. 오늘과 같은 일도 아주 특별 

한 경우였다.

"이리로 오너라."

다프넨은 여전히 반투명한 숲의 제단으로 다가갔다. 사제들이 길을 

열어 주었다. 더 가까워졌다. 제단 위에 놓인 것이 보였다. 무엇인지 

알 수 없는 표지들, 장식품들, 그리고 확연히 알아볼 수 있는 또 하나 

의 물건. 그가 손에 쥐고 있는 것과 같은 그것을 보았다.

눈발 속에서도 고스란히 남아 빛나는 은빛 광채 아래 약간은 섬뜩 

한 세공으로 뚫어 놓은 눈구멍, 치아의 흔적과 같은 것들이 자신이 지 

금 손에 쥔 것과 어쩌면 그렇게 닮아 있는지. 한 세대 앞서 섬으로 온

은해골, 실버스컬(Silver Skull)이 과거 그를 획득했던 주인 따위는 관

심 밖이라는 듯 오연한 눈길로 그를 쏘아보았다. 아니, 단지 퀭한 두 

눈구멍일 따름이다.

 “.......”

다프넨은 자신의 손에 들린 그것을 한 차례 높이 쳐들었다. 그러자 

데스포이나 사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달의 섬에 두 번째로 실버스컬을 가져온 작은 견습 순례자, 네 행 

동의 가치는 보물을 간직하는 숲의 제단과 함께 오래도록 남으리라.

또한 어느 날인가 사라지리라."

거창한 치하의 말이나 과장된 수식어 따위는 없었다. 그 담백한 어 

구가 폰티나 영지 의전관이 능란하게 쏟아놓던 미사여구를 

문득 생각나게 했다. 새삼 다시 가보았던 아노마라드는 어린 시절 했 

던 그의 짐작, 그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여전히 무신경한 부자와 같 

은 모습으로 그를 맞았을 따름이었다.

" 여왕이시여, 굽어보소서. 우리 대신 지니소서. 우리를 지키소서. "

다프넨이 다가가자 그의 몸도 점차 반투명해지더니 제단과 같은 빛 

깔로 바뀌었다. 구경꾼들이 술렁대는 가운데 그는 침착하게 다가가 

두 번째 실버스컬을 첫 번째 것 곁에 나란히 내려놓았다. 그 순간 다 

프넨의 몸은 이곳 아닌 먼 숲에 가 있었고, 진짜 눈이 그의 어깨 위에 

엷게 쌓였다. 귓가에선 숲의 소리가 났다.

" 여왕께서는 겸손한 봉헌물을 기꺼워하시어 그대에게 한 가지 이름 

을 하사하고자 하시니라. 그대는 이제부터 달여왕이 친히 눈여겨보신 

자로서 '예비하는 자, 후라칸‘ 이라 일러질지니 그대의 순례자 이름과 

함께 명예로운 자리에서 두 번 일컬어지리라."

작은 속삭임이 퍼져나갔다. 다프넨에게 '후라칸‘ 이라는 칭호의 어 

감이 낯선 것과 마찬가지로 섬사람들 역시 그 단어를 편하게 느끼지 

는 않는 듯했다. 누군가 나타나 오랫동안 까맣게 잊고 있던 의무를 다 

시 강요하기 시작한 것과 같았다.

처음 섬으로 올 때 다프넨은 에니오스(단센)로부터 순례자들의 3대 

의무라는 것을 들은 일이 있었다. 오래 전 이 의무들이 정해질 때는 

'구속자' 라고 불리는 지휘자들도 함께 선출되어 그들에게 특별한 칭 

호가 주어졌는데 그 중 세 번째 의무, '돌아올 고대 왕국을 위해 예비 

함‘ 과 맞물려 존재하는 것이 바로 '예비하는 자, 후라칸’ 이라는 이름 

이었다. 유래는 옛 왕국의 작위명들에 있었는데 '후라칸' 이라는 단어 

가 본래 갖는 의미는 ‘때를 기다리는 바람' 이었다 

비록 의무들이 사라지지는 않았으나 섬에 정착하던 초기와는 달리 

구속력이 상당히 약화된 지금은 그 칭호들을 마지막으로 가졌던 사람 

이 누구인지조차도 불분명해진 상태였다. 그러다가 오래 전 소년 시 

절의 일리오스 사제가 첫 번째 실버스컬을 가져왔을 때, 섬사람들은 

만장일치로 그에게 첫 번째 구속자의 칭호, '복원하는 자, 벨칸다르‘ 

를 선사했다. 일리오스의 행동이 고대 왕국의 영광을 조금이라도 복 

원한 것과 같다고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프넨은 일리오스와는 달리 아직 견습 순례자였고, 심지어

그들과 핏줄조차 달랐다. 그런 다프넨에게 그렇게 큰 칭호를 내려도 

좋은 것인지, 첫 실버스컬을 가져온 일리오스와 동일한 예우를 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두 번째 구속자의 칭호를 건너뛰고 하필 세 번째 것 

을 내린 까닭은 무엇인지, 그런 것들은 사제들만이 알 수 있을 터였 

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데스포이나 사제 혼자만이 알고 있을 따름이 

었다.

섬사람들은 대륙 사람들과는 달리 가문의 성 같은 것이 없었다. 따

라서 대륙에 나갈 경우 사용하는 가명을 제외하고 평생 한 개의 이름 

만을 지닌 채 죽게 되므로, 두 개 이상의 이름을 갖는 것은 큰 명예에

속했다. 살아 생전 모두의 칭송을 받을 만한 특별한 업적에 내려지는 

가장 큰 선물이 두 번째 이름이라 했다. 현재 여섯 사제들 가운데서도

두 개의 이름으로 불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돌아선 다프넨은 멀찍이 떨어져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 쪽으로 언뜻

눈길을 주었다. 무리 지어 선 그들의 모습이 마치 빙벽에 새겨진 군상

같다고 생각했다.

의식이 끝난 날 밤, 다프넨과 나우플리온은 오랜만에 조용히 마주 

앉을 수 있었다. 섬으로 돌아오자마자 성과를 보고하고 의식을 준비 

하는 등의 일들로 해서 사제인 나우플리온이나 의식의 당사자인 다프 

넨이나 대륙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며 회포를 풀 기회조차 갖지 

못했던 것이다.

다프넨과 이솔렛은 섬에 겨울이 시작될 무렵, 다른 아이들보다 훨 

씬 늦게 섬에 돌아왔다. 두 암살자들과 싸울 때 독에 당했던 등의 상 

처가 생각보다 쉽게 낫지 않아 한 달 가까이 마을에서 요양하지 않으 

면 안되었던 것이다. 섬사람들은 이미 다프넨이 실버스컬에서 올린 

성과에 대해 미리 돌아온 아이들에게 다 들어 알고 있었고, 따라서 모 

두들 그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참이었다.

그 날 두 사람이 느낀 기쁨은 각별했다. '후라칸' 이라는 칭호를 받 

은 일에 대해서는 다프넨보다 그 이름의 가치를 잘 아는 나우플리온 

이 훨씬 더 기뻐했다. 다프넨은 나우플리온의 검으로 나우플리온 대 

신 그의 명예를 높였다는 것에 보람을 느끼고 있었다. 둘은 말하지 않 

아도 서로의 감정을 잘 알고 있었다.

밖에는 조용히 눈이 내렸다. 섬의 겨울은 늘 오늘처럼 갑작스레 퍼 

붓는 눈과 함께 시작된다.

" 해쓱해졌구나, 역시 대륙은 살 만한 곳이 못 되지?“

“ 대륙에 나가 있자니 내가 없으면 우리 사제님이 식사는 제 때 챙겨 

드실까, 청소는 누가 하며 세탁은 누가 할까, 참 걱정되더라고요. 밤 

낮으로 걱정하다보니 이렇게 살이 빠졌죠."

" 네가 늘 모든 걸 다 한 것처럼 떠벌리지 마. 네가 없을 때도 혼자서 

잘 해나갔었다고."

" 그런 분이 지금 걸치신 그 후줄근한 옷은 다 뭐예요? 겨울 오기 전 

에 침대 시트 같은 건 한 번 빨아서 햇빛에 말려야 되는데 눈이 오기 

시작하니까 이미 날 샜잖아요. 그리고 또 .....“ 

그건 두 사람만의 대화하는 방법일지도 몰랐다. 둘은 잠시 후 마주 

보며 빙그레 미소지었다.

“ 무사히 잘 왔구나."

" 무사히 잘 계셨네요."

두 사람 앞에는 겨울밤을 새우는 사람들의 애호품인 구운 개암이 

한 접시 놓여 있었다. 섬 안에서 가장 사치스러운 간식 중 하나인 말 

린 대구포도 조금 있었다. 그걸보던 다프넨은 문득 생각난 듯 일어나 

더니 대륙에서 돌아와 내던진 후 방치해두었던 배낭을 끌어당겼다.

배낭은 굉장히 불룩했다. 나우플리온이 농담조로 말했다.

“ 너도 대륙에 가서 이것저것 잡다한 거 사 갖고 왔냐? 대륙에서 살 

던 녀석이 섬 촌놈들하고 똑같은 짓을 하면 쓰나"

다프넨은 배낭을 열다말고 고개를 돌려 씩 웃었다.

" 대륙에서 살던 사람만이 그리워할 것을 구해 왔는데요. 뭐, 달갑지

않으시다면 그냥 저 혼자 먹겠습니다."

"그거 참, 사사건건 이기려고만 하는 제자 녀석 때문에 인생이 번거

롭도다. 얼른 뭔지 꺼내 놔 봐."

다프넨이 꺼낸 것은 커다란 참나무 통이었다. 나우플리온은 단박에 

그게 무엇인지 알아보았다. 테이블 위에 내려놓는데 통 안에서 무언 

가 쿨렁, 하고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다프넨이 멋쩍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자아, 헤베브로의 묵은 포도주보다 좋은 술이니 실컷 드시지요,"

나우플리온은 벨노어 성에서 브랜디 병을 주방에 숨겨 놓고 몰래 

마실 정도로 술을 즐기던 사람이었으나 섬에 온 후로는 한 방울도 입 

에 대지 못했다. 물론 그는 섬의 규범을 앞장서서 지켜야 할 사제였으 

니 제사용으로 비싸게 대륙에서 들여온 술을 몰래 훔쳐 마실 수야 없 

는 노릇이긴 했다. 물론 겉보기와는 달리 한 번 마음먹은 이상 놀랄 

만큼 자신의 의무에 철저한 나우플리온이 그런 일을 시도할 사람도 

아니었다.

나우플리온은 술통을 내려다보며 잠시 말을 잊은 듯한 얼굴이었다.

오랜만에 맡는 좋은 술 냄새는 흡족했지만. 그것을 가져온 소년의 마 

음은 술 없이도 그를 취하게 했다. 눈 내리는 밤에 오랜만에 돌아온 

제자, 좋은 술, 구운 개암, 그 이상 필요한 것이 있겠는가?

다프넨은 나무잔 두 개를 가져와 놓으며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 때는 한 방울도 안 주셨지만, 이제는 한 잔 정도 주시겠죠?“

벨노어 저택에서 떠나기 전날 밤, 한 모금 맛보겠다고 졸랐지만 기 

껏 물만 한 잔 얻어 마셨던 것이 기억났다. 그래, 그건 정말로 오래 전 

의 일이다. 그렇게 헤어진 나우플리온과 다시 만났고 이제는 이렇게 

떨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되었으니 세월이란 묘하달 밖에.

나우플리온이 손수 참나무 통의 마개를 땄다. 한 잔을 부은 뒤 그가 

앞의 질문에 대꾸했다.

"키만 크지 아직도 조그마한 꼬마 같은 네 녀석한테 이런 독한 술을 

줄 수는 없는 일이나......“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두 번째 잔에 술을 따르고 있었다.

“가져온 정성을 봐서 오늘은 특별히 한 잔 주도록 하겠다. "

잔을 들어 부딪쳤다. 아까운 술, 한방울도 흐르지 않도록 조심했다.

"실버스컬의 주인인 '위대한' 후라칸을 위해."

다프넨이 키득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런 '위대한‘ 분의 스승님인 우리 사제님을 위해."

물론 다프넨은 한 모금 마시는 즉시 큰 숨을 들이쉬어야 했고, 그런 

모습을 보며 나우플리온이 킬킬거리자 오기로 단숨에 마셔버리는 객 

기도 부렸다. 얼굴이 금방 빨개지면서 기분이 좋아졌다. 나우플리온 

이 다시 술을 따라주지 않자 다프넨은 투정하듯 중얼거렸다.

"가져온 정성으로 한 잔이었으니까, 무겁게 짊어지고 온 수고로 한 

잔 더, 그런 것을 고스란히 내어드리는 선량함에 또 한 잔 더, 그 술의

맛이 좋은 기분으로 다시 한 잔 더, 안될까요?“

"긴 질문에 간단히 답해주마. 안 돼."

나우플리온은 술을 마시고, 다프넨은 개암을 까먹었다. 술 한 잔 마 

시니 추위도 느껴지지 않아서 다프넨은 이것저것 지껄이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나온 것은 두 사람 모두 알고 있는 인물들인 로즈니스와 벨 

노어 백작의 이야기였다. 술을 마시면 이야기가 과장되기 마련이라,

그는 평소의 이야기 실력보다 훨씬 더 극적으로 당시의 상황을 설명 

해 주었다.

나우플리온은 로즈니스가 많이 달라졌더라는 대목에서 싱긋 웃으 

며 말했다.

"그 꼬마 아가씨도 세상맛을 좀 알게 됐나 보구나. 오랜만에 얘길 

들으니 이거 다시 보고 싶어지는걸."

"아쉬움을 두 배로 증폭시키기 위해 심지어 한결 예뻐지기도 했다 

소식을 덤으로 전해드리죠."

나우플리온도 즉시 받아쳤다.

“매우 효과적으로 증폭되는구나. 한 번 선택이 미래를 좌우한다고,

그 때 내가 왜 칙칙한 사내녀석을 붙들고 이것저것 가르쳤담. 반대로 

했으면 지금쯤 귀여운 여자애와 술을 마시고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다프넨이 혀를 내밀어 보이며 대꾸했다. 

“그게 지금 말이 된다고 생각하세요?”

이어 벨노어 백작이 꾸민 일에 대해 이야기하자 나우플리온은 '그 

자는 딸보다도 더 발전이 없군'하고 중얼거렸다. 곧 폰티나 공작의 뜻 

모를 호의, 실버스컬의 결과에 대한 이야기가 이어졌다. 결과는 두 사 

람 모두 다 알고 있었지만 나우플리온은 술 한 잔 마신 다프넨이 평소 

보다 열띤 태도로 떠들어대는 모양을 바라보는 것이 즐거웠기에 다시 

한 번 듣는 것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다프넨은 끝을 이렇게 

맺었다.

"그리하여 저는 우리 스승님이 빌려주신 검이 이렇게나 훌륭하다는 

것을 증명했답니다."

그  정도로도 충분했다. ‘당신의 명예가 되고 싶었다'는 말을 하지 

않아도 다 느낄 수 있었다.

조금 후에 짤막하게 폰티나 공작의 배려로 아노마라드와 렘므 일부 

를 지나왔던 이야기를 했다. 그 다음이 바로 암살자들과 헤베티카의 

마을, 헤베브로의 이야기였다. 다프넨은 이야기를 짧게 줄이려 했지 

만 잘 되지 않았다. 그래도 자신이 사람을 죽인 일에 대한 고백은 하 

지 않을 수 없었다. 나우플리온은 이마에 살짝 주름을 잡았으나 무어 

라 달리 말하지는 않았다. 그런 문제는 다프넨 자신이 충분히 생각하 

여 결정할 수 있다고 그는 믿고 있었다.

"빌려주신 검으로 그런 일을 저지른 것은 사죄 드리겠습니다. 그런 

데 꼭 하나 여쭤보고 싶은 것이 있는데요."

“말해 봐."

"그 검, 표면에 피가 묻으니 이상한 글자가 나타나더군요."

나우플리온은 이미 술을 반 통 가량 비우고 있었다. 다프넨은 말을 

끊 이제 그만 마시라고 만류했다.

"그래, 나머지는 다른 날 마셔도 좋겠지. 아아, 하지만 검의 사제가

집에 술이나 숨겨두고 있다는 소문은 확실히 좋지 않아. 역시 다 마셔 

버려야겠어."

"편리한 논리네요."

나우플리온은 컵에 남은 술을 비우고서 말해 주었다.

"그 검은 내 스승께서 만들어주신 거야. 얘기한적 있던가? 아, 네 

가 나한테 물은 적이 있구나. 그 ‘티그리스’ 말이다. 내게 그걸 가르쳐 

주신 그 분."

"기억나요. 그런데 그 분은 검술뿐 아니라 검도 만드셨군요?“

"그냥 취미였어. 대장장이는 아니고, 그 때 대장간을 맡고 있던 분 

하고 친해서 가끔 화덕을 빌려 한두 자루 정도 만들곤 하셨지. 두 분 

은 서로에게 필요 불가결한 존재, 다시 말해 술친구였거든."

"술이라고요? 섬에는 술이 없지 않아요?“

"이른바 밀주라는 거지. 자기 곡식 갖고 밥 굶어가며 술을 빛 

을 사람이 섬에는 그리 흔치 않은데, 그 두 분은 그런 점에서 마음이 

잘 맞았거든. 내가 아까 필요 불가결한 사이였다고 했잖아. 그런 짓도 

친구가 있으면 용기가 나게 되기 마련이라서. 그것 참, 마음이 지나치 

게 잘 맞은 나머지 때때로 사람들 앞에서 술에 취한 채 어깨동무를 하 

고 돌아다니셨더란 말이야. 술이라고는 평생 한 방울도 안 먹어본 이 

곳 사람들 앞에서 말이지. 그 때 사람들이 눈살 찌푸리던 걸 생각하 

면.....“ 

나우플리온이 자신의 스승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다프넨이 나우플 

리온을 두고 농담 삼아 한탄조로 하는 이야기와 어쩐지 느낌이 비슷 

했다. 다프넨은 그냥 미소지었다. 나우플리온도 오랜만에 술을 마셔 

서인지 술기운이 돌아 말이 좀 많아진 듯했다.

“그래, 그런데 참 묘하게도..... 이런 얘기 좀 그렇지만 그 분의 검술 

은 그리 빼어난 편이 아니었거든. 그런데 오히려 야금술에는 비상한 

재능을 갖고 계셨더란 말이야. 그래서 그 분이 만든 몇 자루 안 되는 

검은 전부 대단히 훌륭한 것들이었어. 지금은 다 어디 갔는지 모르겠 

지만 말야. 사람들한테 무심코 선물로 줘버리곤 하셨거든 하긴, 그 

분이 평생 남에게 주지 않고 혼자 지킨 건 아무 것도 없었으니까. 아 

참, 그 글자에 대해서 물었지. 그건 말이야......“

이름이 오이노피온(나우플리온은 그 이름이 심지어 '포도주를 마시 

는 사람' 이라는 의미라고 말해서 다프넨을 놀라게 했다)이라고 했던 

그 스승은 정말로 검술보다는 검 제작에 더 일가견이 있었던 모양이 

었다. 그는 평생동안 대략 열 자루 가량의 검만을 만들었는데 그 검들 

에는 모두 특별한 문자가 새겨져 있어서 피가 묻어야만 보이도록 되 

어 있었다. 그 기술은 대장장이는 물론이고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그만의 비밀스러운 기술이었고, 그의 죽음과 동시에 사라져버렸다.

"그런 문자를 나타나게 하신 이유가 뭘까요?“

"경고지. 검에 피를 함부로 묻히지 말라는 경고."

다프넨은 섬뜩한 기분이 들어 얼굴을 찡그렸다. 그는 아직까지도 

자신이 한 살인이 정당한 것이었던가, 정말로 그 방법밖에 없었던가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그런 거다. 참, 내가 빌려준 그 검은 네가 한동안 쓰는 것도

좋을 것 같다. 아직은 윈터러를 쓸 때가 아니고, 내게는 '우레의 룬‘ 이 

있으니까 섬 밖으로 나가지 않는 한 그 검을 쓸 일은 없거든. 네가 그 

검으로 대륙에서 해낸 일들을 볼 때 너에게 꽤 어울리는 검 같기도 하 

고 말이야."

눈과 술, 그리고 이야기와 함께 밤이 깊어갔다.

명예로운 칭호가 주어졌다 해서 다프넨의 생활에 직접적인 변화가 

생기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대륙에서 들은 이야기가 그에게 준 변 

과는 컸다.

어느 날, 데스포이나 사제를 찾아간 다프넨은 이솔렛으로부터 신성 

찬트(Holy Chant) 배우는 것을 그만두고 싶다고 말했다. 졸업 문제 

때문이라면 이제 질레보 선생도 없으니 차라리 막대 호신술을 다시 

배우겠다고 이야기했다.

"교장 선생님과 잘 상의한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만.....“ 

말끝을 흐리며 데스포이나는 다프넨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나 이제 

나이에 비해 감정을 쉽게 숨길 줄 알게 된 다프넨의 얼굴에서는 어떤 

것도 찾아낼 수 없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하려는 이유가 궁금하구나. 대륙에 나가 있을 때 

두 사람이 잘 지내며 협력한 것으로 들었는데 다른 문제라도 있었던 

것이냐?“

"아닙니다. 다만 훌륭한 선생님에 비해 제가 너무 진전이 없고, 또 

저는 최근 목소리가 변하는 중이라 노래하는 것이 힘들기도 하고요.

그런 중요한 전통은 저보다 더 자질 있는 아이가 배우는 것이 섬 전체 

를 위해서도 좋을 것 같아요."

"하지만 이솔렛이 너 아닌 다른 아이를 가르치려고 할까?“

이 부분에서 다프넨은 마음먹은 바가 있어 강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저는 이미 검의 사제님의 제자로서 한 가지 중요한 전통을 잇고 있

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또한 그 자질로서 대륙까지 다녀오기도 했고 

요. 아직 견습 순례자에 불과한 저에게 이번에 주어진 칭호는 무거운 

것이고, 그 때문에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것도 간단하지 않습니다. 사 

람들의 의혹이 실망으로 바뀌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해서라도 한 가지 

에 매진하여 거기에 맞는 성과를 보이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싶습 

니다. 막대 호신술은 새로 배운다고 해도 일단 검술과 비슷한 자질을 

요구하니까 저로서도 좀더 하기 쉽겠지요."

다프넨의 지적은 실질적으로도 옳은 것이었다. 나우플리온의 제자 

가 됨으로서 향후 사제직이 약속된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인 그가 신 

성 찬트의 유일한 계승자인 이솔렛의 학생이기도 하다는 것은 특혜도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니냐는 뒷말이 없지 않았던 것이다. 다프넨이 실 

버스컬을 가져와 후라칸의 칭호를 받은 뒤로 그런 이야기는 한층 자 

주 오르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변성기라는 것 역시 사실이기도 했다. 변성기의 소년이 노 

래를 쉬겠다는 것을 이상하게 여길 까닭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데스포이나는 오랜 연륜에서 우러나오는 직감으로 보리스의 마음 

을 곧 짐작했다. 그녀는 한숨을 내쉰 뒤 나지막이 말했다.

"일부러 피할 필요는 없단다, 다프넨. 이제 막 인생의 빛을 잡아야

할 소년이 자신이 가질 수 있는 것들을 애써 뿌리치는 것만큼 슬픈 일 

은 없으니 말이다."

이제 남은 삶에 더 이상의 미련은 없다는 것처럼, 미소지으며 두 손

을 훌훌 털어 버린 또 다른 소년의 모습이 다프넨의 모습과 어렴풋이 

겹쳐졌다. 그 소년은 데스포이나의 친아들들과는 달리 부러 험한 항 

해를 택했고, 이제 지쳐 돌아온 늙은 수부처럼 자신의 작은 오두막에 

눕고 싶어했다. 나이에 비해 너무 많은 바닷길을 달렸던 것일까.

그리고 그 소년만큼이나 고집 센 다프넨이 그녀 앞에서 역시 고개 

를 젓고 있었다.

"아뇨. 처음부터 저의 몫이 아니었습니다. 제겐 벅찼죠. 아직도 남 

은 것은 많고 해야 할 일도 많기에 아쉬워하지 않을 겁니다. "

두 사람은 신성 찬트를 포기하는 것에 대해 말하는 듯했지만 실제 

로 말하고자 한 것은 다른 것이었다. 데스포이나는 나우플리온이 찾 

아왔던 그 날처럼 다시 한 번 슬픈 눈이 되었다. 미간에서 이마로 뻗 

어나가는 주름살은 이제 고목의 그것처럼 펴지지 않고, 그녀에게 새 

로운 삶이 열릴 가능성은 없을 것이다. 다프넨의 이름을 지을 때 보았 

던 환상은 섬보다 넓고 바닷길조차 넘어가야 할 미래를 암시하는 듯 

했고, 그렇기에 서서히 그에 맞는 짝으로서 새 삶이 필요한 이솔렛을 

염두에 두기 시작했으니, 이제 섬 안에는 이솔렛에게 달리 남은 행복 

이 없다고 느낀 지 오래었기 때문이었다.

섬 밖의 땅을 개척해야만 할 운명이라면, 먼 땅에서 그들의 신성한 

소녀와 함께 행복해지기를, 섬 안에 남은 자들이 숙명의 삶을 사는 동 

안 진심의 자유를 찾게 되길, 그렇게 바랐는데.

"두 사람은 서로에게 행복을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네 

생각은 달랐느냐?“

   다프넨은 약간 이상한 눈빛으로 데스포이나를 바라보았다. 모든 비 

밀을 알고 있을 그녀가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느냐는 듯한 시선이 

었다. 그러나 데스포이나는 계속해서 말했다.

"그러지 말아라, 그것은 너 하나의 삶만을 깎아 내는 것이 아니란 

다. 차라리 네 마음이 변하게 된 까닭을 말해 주면 어떻겠니? 대륙에

서 이솔렛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은 것이냐?“

나온 대답은 딱딱했다.

"누구보다도 잘 아실 사제님이 아닌가요."

"그래, 나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지. 하지만 네가 나처럼 정확히

알고 있는지, 그것만은 모르겠구나."

“.......”

작은 집에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곧 나우플리온이 돌아올 집으로 

가 있어야 할 시각이었다. 데스포이나는 잠깐 일어나더니 아궁이의 

불씨를 등잔에 옮겨 붙이고 심지를 돋웠다. 밝은 빛이 잠시 확 일어나 

며 요 며칠 파리해진 다프넨의 뺨을 붉게 비췄다.

“다프넨, 그 이름은 내가 지었던 것이지 그렇구나. 그 때 나는 나우

플리온 사제를 생각하고 있었어. 그의 이름을 지은 것은 내 아버지였 

고 그래서 그 아이가 내 동생이 된 것처럼 나 역시 네 이름을 직접 짓 

겠다고 마음먹었던 것이지. 너도 알다시피 섬에는 가문의 성이 없고 

몇 대만 지나면 핏줄은 얼마든지 흐려질 수 있단다. 그런 까닭에 서로 

에게 이름을 준 관계는 종종 핏줄만큼이나 강한 그 무엇이 되곤 하지.

자신이 이름을 준 아이에게는 평생토록 책임을 느끼게 되고, 그 아이 

의 삶을 바르게 이끌 의무 역시 이름지은 자에게 있는 것이야. 나는 

나우플리온을 친동생처럼 여기듯, 너를 조카처럼 생각해 왔다. 다프 

넨, 네 이름의 의미를 아느냐?“

지금까지 데스포이나가 그에게 여러 번 특혜를 베풀었음을 느끼고 

있긴 했지만 그것에 이토록 구체적인 이유가 있을 줄은 생각하지 못 

했다. 다프넨은 약간 당혹스러워하며 답했다.

"월계수.... 라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뭘 뜻하는지는 모 

겠어요."

"이름을 지으려는 자는 그 아이의 미래를 위한 환각을 보게 된단다. 너를

위한 환각.... 거기에는 물론 월계수가 있었고, 그것은.... 옛 문헌에도 나

오는.... 나로서는 도저히 못 알아볼 수가 없는 나무였어. 바로 우리 순례

자가 떠나온 옛 왕국, 그곳의 입구를 지켰다던 불사의 월계수다."

'불사' 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나우플리온이 해 주었던 이야기가 퍼뜩 

떠올랐다. 본래 처음 지어졌던 그의 이름은 아타나토스, 즉 '불멸, 불 

사' 라는 뜻이라 하지 않았던가?

"옛 땅에서 승리자의 나무였던 월계수는 때때로 성의 입구, 또는 왕 

국의 입구에 심어지곤 했는데 일반적으로는 친교의 의미라고 받아들여 

졌지만 정확한 의미는 이렇다. ‘나는 승리자이고 너는 패배할 것이니 

네가 나를 승리자답게 예우한다면 나도 온화한 처분을 내릴 것이다.'"

다프넨은 문득 놀라며 그 말을 들었다. 나우플리온은 성 어귀의 월 

계수가 방문객을 환영한다는 의미라고 말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실 

제로는 내 땅에 들어온 이상 평화를 지키라고 위협하는 느낌이 더 강 

하지 않은가?

평화를 원치 않는다면 돌아갈 것은 패배뿐이라고.

"이렇듯 월계수는 영광의 나무이기 이전에 전쟁의 나무였다. 사람 

들의 투쟁욕을 불러일으키는 자부심 높은 자태의 적장처럼 끊임없는 

도전자들을 불러들이는 것이지. 그리하여 섬에서의 네 삶 역시 네 위 

치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싸움을 걸고 또 걸 수밖에 없는 운명이 

었던 것이야. 헥토르가, 에키온이, 질레보가 그랬으며 그밖에 너를 미 

워한 모든 사람들이 너의 승리를 인정할 마음이 없었던 자들이다. 더 

불어 헥토르의 이름은 ‘대적자', 에키온의 이름은 '큰뱀의 아들'이며 

마지막으로 질레보의 이름은 '질투' 에서 유래했느니라"

"그렇다면 앞으로도 마찬가지일 거란 말씀이신가요? 제가 섬에 사 

는한 싸움을 피할 수 없다는, 그런 말씀이신가요?“

데스포이나는 고개를 오른쪽으로 기울인 채 다프넨을 보다가 말했다.

“네 삶은 섬 안에만 있지 아니하잖느냐. 네 이름은 다프넨, 한 가지 

만은 아니잖느냐."

데스포이나는 '후라칸‘ 이라는 새 칭호를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다 

프넨이 직접 말한 일이 없건만 데스포이나는 다프넨의 옛 이름, '보리 

스‘ 를 알고 있었으며 그것의 의미 역시 알았다. 다프넨이 답하지 못하 

는 사이 데스포이나는 이어 굳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기 때문에, 너와 나우플리온의 삶은 겹쳐질 수 없는 별개의 선 

인 것이야. 한 번의 접점이 너희를 이끌리게 하여 이곳까지 오게 했으 

나 이제 그 선은 다시 겹칠 수 없는 곳으로 각각 뻗어가고 있으니, 네 

가 언젠가 나우플리온을 영원히 잃게 될 때 네 곁에 아무도 남지 않 

는, 그런 상태를 바라느냐?“

다프넨은 더 견디지 못해 울컥 외침을 뱉었다.

"어째서! 그렇게.... 말하실 수 있습니까....... 사제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시면서 제게 그들 사이에 끼여들라고 어떻게... 말할 수가 있죠? 저 

는 그러고 싶지 않아요, 그래선 안 돼요. 저 역시 과거의 기억을 지우 

지 못한 채 사는 사람으로서 남의 추억을 부술 수는 없으니까..... 마 

음을 가진 건 저뿐이 아니니까요. 이제는 주위 모든 사람이 제 적이 

된다 해도, 나우플리온 사제님만은 잃을 수 없어요. 영원히.... 언젠가 

는 잃게 되겠지만 그렇더라도..... 그 분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일은 저 

자신이 용납할 수 없습니다."

다프넨이 이 결정을 내리기까지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 목소리 

가운데 생생하게 배어났다. 데스포이나는 문득 손을 내밀어 다프넨이 

그 위에 손을 얹게 했다.

주름투성이 손이 자신의 손을 감싸쥐는 순간 다프넨은 알 수 없는 

따뜻함을 느끼고 안타까워졌다. 왜 자신은 저러한 따뜻함 속에 마음 

을 맡기고 편히 쉴 수 없을까.

“내 이야기를 잘 듣거라. 이미 들었겠지만 다시 한 번, 무엇이 다른 

지 생각하면서 들어보거라."

데스포이나는 천천히 입을 열어 말했다. 옛날의 일, 오누이 같았던 

나우플리온과 이솔렛을 영영 갈라놓은 그 날의 약혼 사건과 고집 센 

두 남자들의 대립, 그리고 일리오스의 죽음에 이르러 완전히 돌이킬 

수 없게 된 관계에 대해서. 그것은 이솔렛이 해 준 이야기와 크게 다 

르지 않았으나 당시 어렸던 이솔렛으로서는 알 수 없었을 복잡한 감 

정의 얽힘이 존재했다. 이를테면 나우플리온과 그를 가르친 늙은 선 

생, 오이노피온의 관계가 그랬다.

우연히 시작된 그들의 인연은 이후 스승과 제자를 넘어 할아버지와 

친손자, 아니 아버지와 아들 이상으로 애정 깊은 사이가 되었다 했다.

달리 말하자면 누구에게도 이해 받지 못하고 있던 두 사람이 처음으 

로 한 사람을, 즉 서로를 이해하였다. 티그리스 검술의 계승자이면서 

도 술과 허풍으로 세월을 보내던 오이노피온 노인, 누구에게도 애착 

을 느끼지 못하고 홀로 좌충우돌하던 고아 소년 나우플리온.

그랬기에 더욱 끊기 어려운 관계였다.

“마치 지금 네가 나우플리온을 저버릴 수 없는 것처럼, 그 때의 나

우플리온도 그랬지."

두 사람은 서로에게 깊이 의지하고 있었다 검을 연습하기보다는 

옛날 얘기, 세상 얘기, 술 얘기를 하며 보내는 나날이 더 많았고, 옛 

친구처럼 마음이 잘 통했다. 그러나 데스포이나는 나우플리온이 발전 

없이 시간을 허비하는 것을 답답하고 안타깝게 여겨 차라리 두 사람 

을 갈라놓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당시의 데스포이나 또한 지금 

처럼 인자하고 온화하기만 한 사람은 아니었다. 세월은 역시 모든 것 

을 바꿔 놓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찌 보면 내 잘못이란다. 일리오스 사제가 먼저 제안하 

긴 했지만 둘의 약혼을 구체적으로 추진한 것은 나였으니까. 이후 일 

리오스 사제가 돌아을 수 없는 사람이 되었을 때 나우플리온이 그의 

뒤를 이어 검의 사제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도 나였어. 그것 때 

문에 이솔렛은 오래 전 약혼을 깨면서까지 아버지의 제자가 되는 것 

을 거절한 터에 심지어 아버지의 자리를 빼앗은 셈이 된 나우플리온 

을 용서할 수 없게, 아니, 용서해선 안되게 된 거지. 그래, 한 가지 묻 

자꾸나. 이솔렛이 아직도 그 윗마을에서의 마지막 전투 때 나우플리 

온이 일리오스 사제를 잘못되게 했을 지도 모른다고 의심하더냐?“

다프넨은 그냥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데스포이나는 탄식하듯 천장 

을 올려다보았다.

"그랬구나. 그들의 가장 큰 오해가 풀렸으니 네가 너 자신을 불청객 

처럼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구나. 하지만 세상의 진실 가운데는 

가려져 보이지 않는 것이 더욱 많은 법. 네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겠다 

만 네 눈 밖에서도 엄연히 시간이 흘러갔음을 생각하거라."

여전히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찬트 배우는 것을 그만두기로 결정 

한 다프넨이 이솔렛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려고 늘 만나던 장소로 을 

라갔을 때 이솔렛은 자리에 없었다. 이솔렛을 따르는 흰 새들 역시 한 

마리도 찾을 수 없었다.

두 번 더 찾아갔지만, 왔다 갔다는 흔적조차 없는 고요한 바위들 사 

이에서 혼자 두 시간 가량 앉아 있다가 내려왔을 뿐이었다. 

2. 세 순례자의 비밀 

겨울이 서서히 걷혀 갔다.

봄이 오면 스콜리를 졸업한 열 다섯 살의 아이들을 위해 정화 의식

이 치러질 예정이었다. 다프넨은 늦게 입학했기 때문에 올해 초에 졸 

업하지 못하지만 나이가 찼기에 역시 정화의식의 대상자가 되었다.

이제 정화 의식을 거치면 그도 정식 순례자가 되는 것이다. 진짜 섬사

람이 될 것이고, 가끔씩 데스포이나 같은 사람이 넌지시 말하곤 하는 

대륙으로의 복귀 또한 불가능해지는 것이다.

다프넨은 차분한 마음으로 그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륙이든 섬이

든 번뇌 없는 곳은 없었고, 이곳에서 맞닥뜨리는 고민이 크다면 대륙 

에 내버려두고 온 고통 또한 큰 것이기에 두려움은 없었다.

그러나 순례자가 된 후 어떤 식으로 살아갈 것인가는 아직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정말로 나우플리온의 뒤를 이어 검의 사제가 

될 것인가? 마음 깊은 곳에서 그것을 부정하는 목소리가 종종 들리곤

했다. 그건 본래 이솔렛의 자리였으며, 그런 자리에 앉는다는 것 자체 

가 앞으로 수많은 고뇌를 가져다 주리란 사실을 자꾸만 느끼고 있었다.

나우플리온의 일이 많아 다프넨 혼자 밤늦게까지 집에 있게 되는 

날에는 생각이 더 많아졌다. 가끔은 그런 생각을 눌러버리려 의식적 

으로 다른 일에 몰두했다. 그 날도 그런 까닭으로 책을 잡았을 것이 

다. 오래 전 장서관의 제로 아저씨에게 받아 온 책이었다. 

<가나폴리 이주의 역사> 

책 표지를 보는 순간, 처음 섬에 도착했을 때의 일들이 환하게 떠올 

랐다. 이솔렛과의 불편한 관계를 견디기 힘들었을 때 잡았던 책이었 

다. 읽다가 뒷부분이 찢겨나간 걸 보고 장서관에 가서 새 것으로 바꿔 

오기까지 했는데, 그래 놓고도 무심코 다 읽은 책이라 여겼는지 그 후 

몇 권의 책을 더 빌려 읽으면서도 이 책에는 손대지 않고 있었다.

제로 아저씨의 장서관에서 아저씨와 오이지스와 함께 차를 마시며 

이야기꽃을 피우곤 했던 것도 이미 오래 전의 일이 되어 있었다. 책을 

마지막으로 빌려 읽은 지 1년은 훌쩍 지났다. 대륙에서 돌아온 뒤로 

몇 달이 흘렀건만 그의 마음을 온통 지배해버린 고뇌 때문에 전처럼 

편안한 휴식을 즐기는 것이 어려웠던 것이다. 그러나 최근 책을 보지 

않았던 탓인지 선반 한구석에 박혀 있던 이 책을 보는 순간 끄집어내 

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앞을 대강 훑다가 뒷부분을 펼쳤다 조금 읽다가 그는 묘한 것을 깨 

달았다. 전에 읽었던 앞부분과 지금 새로 보는 뒷페이지들 사이에 몇 

십 년 이상의 간격이 있는 듯 보였던 것이다. 마치 이미 완성된 책이 

수년간 존재하다가 후세 사람이 몇 십 페이지를 덧붙이고, 그것을 다 

시 누군가가 지금의 언어로 옮긴 듯한 느낌이었다.

대략 보건대 이미 긴 여행을 끝내고 정착한 가나폴리 사람이 자신 

들이 도착한 땅에 대해 주관을 섞어 기술한 내용으로 보였다. 문체나 

말하는 방식부터가 앞의 페이지들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 재앙의 날을 피한 우리가 오늘 이 척박한 땅에 정착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은 독수리의 날에 내린 신탁을 충실히 따르지 아니한 우리

자신의 과오에 있도다. 만년설 덮인 절벽으로 메워진 이곳 네 개의 섬

은 분명코 신탁이 가리킨 너른 대지가 아닐진대, 선대의 그라디우스 

(진군자) 선단은 이 땅에 이르러 더 나아가기를 그치고 말았나니, 그 

리하여 후손인 우리에게는 단지 5백 명만을 먹일 수 있는 좁은 섬이

마지막 피난처로 남고 말았음이라. 실제로 수많은 자손이 재양을 피  

해 대륙을 퍼났으되 끝내 한 척의 배만이 풍파를 무사히 피하여 이 섬 

의 뭍에 이르렀음도 다름 아닌 신탁의 말이 성취되려 함일러라.

느리게 읽어나가던 다프넨은 한 부분에 이르러 저도 모르게 흠칫 

놀라며 읽는 것을 멈추고 말았다.

.... 그리하여 선대의 과오를 잊지 아니하고자 우리는 네 섬의 이름 

을 각각 '영광의 기억', '신탁의 침묵', 대지의 상실', '귀환의 기원'

으로 이름하였다.

왜 놀랐던가. 다시 한 번 천천히 곱씹어 보고서야 그 까닭을 알 수 

있었다. 네 가지 이름을 끝만 잘라 놓으니 바로 현재 그들이 살고 있 

는 네 섬의 이름이 되지 않는가!

“........”

손끝에 가느다란 떨림이 일다가 멎었다.  이 책의 내용대로라면 순 

례자들의 옛 왕국은 다름 아닌 저 필멸의 땅에 있었다던 가나폴리이 

며, 섬사람들은 가나폴리의 후예라는 뜻이 아닌가?

이 사실을 몰랐던 것이 다프넨 자신뿐인가?

그럴 리가 없다. 옛 왕국..... 누구의 입에서든 한 번은 들어본 이름이 

지만 그것이 가나폴리라고 말한 사람은 없었으며 심지어 나우플리온 

조차도 옛 왕국이 어디에 있었는지 모른다고 하지 않았던가.

옛 왕국, 옛 왕국...... 

그러자 갑자기 또 한 가지 생각이 났다. 나우플리온은 저 섭정 각하 

나 ‘나무탑의 현자’ 제로라면 옛 왕국의 위치에 대해서 알지도 모른 

다고 말한 일이 있었다. 다프넨이라는 이름을 받았던 날, 산비탈에 앉 

아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분명 그렇게 말했다.

다프넨은 벌떡 일어났다. 처음 그 책을 다 읽던 날과 마찬가지로,

그는 책을 옆구리에 낀 채 다시 한 번 장서관으로 달려가게 되었다.

제로는 막 저녁 식사를 마치고 데운 염소젖을 담은 손때 탄 나무잔 

을 한 손에 든 채 다프넨을 맞았다. 나무탑의 현자라는 별칭에 어울리 

는 모습이었다.

다프넨이 옆구리에 낀 책을 흘끗 보자마자 제로는 웃었다.

"이제야 읽었나 보구나."

다프넨은 다시 한 번 흠칫 놀랐다. 마치 그 책을 마저 읽은 뒤 다프 ,

넨이 다시 한 번 이곳으로 달려올 것을 알았다는 듯한 말투였기 때문 

이었다. 물론 그 사이에는 몇 번의 계절이 가로놓이고 말았지만.

다프넨은 가까스로 이렇게 입을 뗐다.

"알고..... 계셨던가요?“

"그 책이라면 예전에 읽었는걸. 여기의 책들 중에 내가 읽지 않은 

책은 몇 권 없어."

다시 한 번, 이번에는 새로운 심증이 다가왔다. 제로가 다프넨에게 

하필 이 책을 준 것은 처음부터 계획된 일이었나?

"왜 이 책을 제게 주신 건가요? 일부러 그러셨나요?“

제로는 대답 없이 갑자기 소리내어 웃었다. 머쓱한 것을 감추려는 

듯 됫머리를 긁적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미안하구나. 내 생각보다 네 판단이 빨랐던 모양이야. 그래, 솔직 

히 인정하마. 섬사람들이 일부는 숨기고, 일부는 알지 못하는 사실 그 

대로가 그 책에 적혀 있단다. 그리고 비록 적은 가능성이긴 해도, 네 

가 그걸 읽고 이렇듯 내게 달려오길 기대했지."

"어째서인가요? 아니, 왜 그런 사실을 알고 계시면서 섬사람들에게 

는 숨기시고, 그리고 제게는 알려주시지요? 다른 사람들이 알아선 안 

될 이유는 뭐고 제가 알아야 될 이유는 무엇인가요?“ 

제로는 이제 웃음을 거두었다. 그의 말이 짧게 울렸다.

"알아선 안될 이유는 매우 간단해. 다름 아닌, 섭정 각하가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다프넨의 인지 속에서 섭정은 외딴 저택에 홀로 앉아 섬 

의 일을 조종하려 하는 음험한 인물이었다. 신체가 부자유스럽고 특 

별한 능력이 없는데도 여전히 권위를 갖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옛 왕 

국으로부터 내려온 전통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권위를 가져 

다준 옛 왕국의 실체를 숨기려 한다? 그것은 옛 왕국의 모습이 현재 

섬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과는 뭔가 다르기 때문 아니겠는가, 그리고 

그것이 알려질 경우 자신의 권위를 위협하게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 

일 것이다.

"옛 왕국의 정체가 정말로 가나폴리라면..... 가나폴리의 일을 다룬 

책은 대륙에서도 얼마간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 가나폴리 

에 대한 정보가 어느 정도는 남겨져 있다는 이야기고..... 그것이 알려 

지게 될 때 섭정 각하의 신변에 안 좋은 일이 생기나요?“

제로는 주위를 둘러본 뒤 2층으로 올라가는 사다리를 손가락질했 

다. 두 사람은 차례로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전처럼 수많은 책들이 위 

태하게 쌓아 올려진 둥근 방에 이르렀다. 방 중앙에 등잔이 하나 놓여 

있을 뿐이라 몇 미터 위로는 까마득한 암흑이었다.

두 사람은 등잔을 사이에 두고 마주앉았다. 어둠 속에서 상대방의 

불그레한 얼굴이 어른거렸다.

“네 말대로야. 그렇다면 너는 대륙에서 가나폴리에 대한 책을 읽은 

일이 있니?“

너무도 오래된 기억이었다 벨노어 백작의 서재에서 란지에가 제일 

먼저 권해 주었던 책 <마법 왕국의 역사>, 거기에서 읽었던 내용이 전 

부는 아니라 해도 일부 확실히 기억났다. 그 책에 따르면 가나폴리는 

어린 아이들까지도 모두 마법을 쓸 줄 알았던 마법 지상주의의 나라 

였으며 그곳의 지배자인 왕도 역시 마법사이고 나라의 모든 질서가 

오직 마법의 권위에 의지하여 이루어지는...... 

그 순간, 다프넨은 그 이야기가 그가 알고 있던 섬의 옛 왕국에 대 

한 이야기와 크게 어긋난다는 것을 깨달았다. 가장 중대한 요소가 빠 

지고 없었다.

달여왕은, 달여왕은 어디 있는가?

“제가 읽은 책에는..... 가나폴리는 마법사들의 왕국으로서..... 그곳에

서 가장 숭배된 가치는 마법이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섬에 

서 마법은 거의 사라지고.......“ 

제로는 어두운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들은 본래 달여왕을 섬기지 않았어."

"그럼 달여왕 신앙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타난.....“ 

"모르겠니? 아니, 이미 짐작하겠지?“

그렇게 말하는 제로의 모습은 그가 평소 알던 모습 이상의 어떤 차 

가운 위엄을 획득한 듯 보였다. 다시 말해 이 문제야말로 그가 오랫동 

안 신명을 바쳐 추구해 온 가치임에 틀림없었다.

"역대 섭정들의 창작물입니까?“

섬의 순례자들이 듣는다면 큰 충격과 분노에 휩싸일 만한 말이었 

다. 그러나 이 정도로 중대한 문제가 지금껏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 

았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가나폴리와 관련된 기록들은 

대륙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지금 다프넨이 읽은 책이 그렇듯 섬에도 

남아 있을 것이 아닌가. 그런 것을 한 권만 보았더라도, 하지만 지금 

의 섬사람들은 누구도 책을 읽으려 하지 않기 때문에..... 아!

"누구도 책을 읽지 않으니 그런 조작도 가능했던 것이고, 그러면 혹 

시..... 그렇듯 사람들이 책을 멀리하게 된 것도 섭정들이 일부러, 서서 

히 조장한 결과입니까?“

오래 전, 섬사람들이 마법이며 문학, 음률 등을 멀리하고 오직 검만 

을 추구하게 된 것이 '명백한 퇴보‘ 라고 말하던 제로의 모습이 떠올 

랐다. 지금을 제외하고 그의 표정이 가장 진지하고 단호했던 때가 바 

로 그때었다.

"모든 것을 확신하기엔 아직 일러. 다프넨, 내가 이제부터 해 주는 

이야기를 듣고 비밀을 지켜 줄거라 믿는다. 본래 옛 왕국, 그러니까 

가나폴리에도 달여왕의 존재가 없었던 것은 아니야."

다프넨이 비밀을 지키겠다고 서약하지도 않았는데 제로는 개의치 

않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다프넨은 새로운 눈이 하나 더 뜨이는 듯한 

기분으로 그 이야기를 들었다.

본래 가나폴리에서 달여왕은 신앙이 아니라 일종의 원시적 철학으 

로서 왕국에 존재한 여러 철학조류들 가운데 한 가지에 불과했다. 현 

재 달여왕 신앙의 내용이 신격에 대한 것은 적고 오히려 윤리학이나 

정의론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가나폴 

리는 마법은 물론 학문도 크게 발달한 나라로서 이런 식으로 철학적 

입장을 달리하는 지파들이 서로 논쟁을 벌이기도 하고 자신들만의 전 

당을 세워 제자들을 모으기도 하는 일이 흔했다고 했다.

그런 가운데 재앙의 날이 닥쳤고, 재앙을 수습하기 위해 가장 위대 

한 마법사들 중 대부분이 그 땅에 남았으나 후손의 보존과 마법, 학문 

의 전승을 위해 새로운 곳에 식민지를 개척할 1만여 명의 사람들을 선 

발하게 되었다. 그들은 왕위 계승자의 지휘 아래 하늘을 나는 배를 타 

고 바다 건너의 땅으로 갈 예정이었다. 그들이 가고자 한 땅은 달의 

섬보다 훨씬 먼 곳에 있는 미지의 대륙으로서, 한때 그 존재가 신탁에 

의해 예언된 일이 있었다.

다프넨은 하늘을 나는 배라는 말에 <마법 왕국의 역사>에서 읽었던 

것을 생각하고 온 몸에 오한이 이는 것을 느꼈다. 그런 배가 실제로 

존재했었단 말인가?

"...그렇지만 그 배들 가운데 이 섬에 도착한 것은 오직 한 척뿐이었

어. 거기에는 불과 백여 명의 사람들이 타고 있었을 뿐이지. 다른 배 

들은 대부분 지금의 렘므 땅, 북쪽 해안의 화이트 크리스탈 제도 

까지는 왔지만 그곳에서 알 수 없는 문제가 발생하여 왕위 계승자 

가 탔던 가장 큰 배가 떨어져 침몰하고 말았다고 해. 그 배에는 다른 

배들을 위한 연료하늘을 날 수 있는 - 연료가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 

지만 - 가 대부분 실려 있었고, 따라서 그 배가 침몰하자 다른 배들도 

더 이상 날아가는 것이 불가능해지고 말았지. 조금 남은 연료가 다 떨 

어지자 남은 배들은 이제 진짜로 항해를 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그렇 

게 뿔뿔이 흩어진 거야."

"그런데 어째서 한 척만....? 그들은 모두 마법사들이었는데 어째 

서 안전한 항해를 하지 못한 거죠?“

"그것이 가장 큰 의문 가운데 하나인데, 그들은 북쪽으로 항해해 갈 

수록 점차 마법적인 능력을 잃어간 듯해. 이 섬 주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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