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5권. 3장. Blindly Verity (15/21)

3장. Blindly Verity

1. 마침내 따라잡히다 

   "그 애가 네게 특별한 감정이 있다는 걸 눈치챘기 때문이야."

   "무슨 소리예요? 로즈니스는 한 번도 저를 오빠, 그것도 잠시 스쳐지나가는 가짜 오빠 이상으로 대한 일이 없어요."

   "그랬겠지. 내가 말한 것도 그것과 비슷한 거야. 일단은 오빠이지만 잠깐 뿐이고 결국 진짜 오빠가 되지는 않을 존재, 어린 시절의 가까운 타인이랄까."

   "그게 무슨 의미죠?“

   서늘해진 마른 땅 위를 두 사람이 걷고 있었다. 9월이 다 되어 로젠버그 관문을 넘었기 때문에 산맥을 빠져나오자마자 갑자기 달라진 날씨를 느낄 수 있었다.

    "소녀들의 환상 같은 거야. 아예 가까운 가족이 됐을 때는 오히려 별로 관심을 안 보이지 아니면 자기 위치를 위협한다고 생각해서 질투하게 될 수도 있고. 하지만 그런 애매한 위치에 있는 사람은 경쟁자도 아니고 그냥 흥미 있는 존재거든. 관심도 끌어보고 싶고, 마음도 떠보고 싶고."

    "경험담같이 말하네요?“

    농담으로 한 말이었는데 이솔렛의 얼굴이 약간 굳어지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곧 그녀는 얼굴을 풀고 말했다. 

    "어쨌든 그래서 그녀가 숨기고 싶어할 화제가 뭔지 짐작한 거야. 그 아가씨가 습격 사실을 확신하고 찾아온 걸 보면 아버지와 강피르 자작의 이야기를 대강 다 엿들은 거고, 그 백작이라는 자의 성격상 자작에게 아무 제안도 안 했을 리가 없는데 그게 뭔지 끝끝내 말을 안 하더란 말이지. 그게 뭐겠니? 하나뿐이잖아"

   "뭔데요?“

   "혼사 문제지."

   보리스는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이 되었다. 아니, 정확히는 어째서 그렇게 쉽사리 추리할 수 있는지 의아해하는 표정이었다.

   "아마도 그 벨노어 백작이라는 사람은 윈터러를 갖고는 싶은데, 혼자서 갑자기 습격했을 경우 이후에 자기의 행동이 드러나 추궁당할 것을 염려한 것 같아. 어쨌든 거기는 들판 한가운데가 아니고 폰티나 공작의 성 안이었으니까 모든 일이 잘 숨겨진다는 보장은 없거든. 점잖은 귀족인 백작이 아무 원한도 없어 보이는 멀정한 소년을 습격했다, 그러면 사람들 사이에서 의문이 제기될 거고 그러다 보면 윈터러의 존재가 드러나게 되지 않겠어? 그는 경쟁자 따위는 갖고 싶지 않았던 거야. 그래서 엉뚱한 강피르 자작을 끌어들여서 그럴듯한 구실을 만들었어. 강피르 자작을 도와주기 위해서 평민 소년을 습격했다, 뭔가 말이 되고 또 시시한 일이니 크게 죄도 안 되는 것 같잖아? 물론 폰티나 공작은 화를 내겠지만 그것만 적당히 무마하면 일이 괜찮게 되는 거지. 그런데 강피르 자작 역시 바보는 아닐 것이고, 따라서 왜 백작이 갑자기 나서서 자기 일을 도와주려 하는지 의아해할 것이 뻔해. 그걸 위해서 백작은 당연히 자신의 요구 사항을, 하나 적당히 만들어 내어서라도 제시할 필요가 있었던 거야."

"그러니까.... 당신을 도와줄 테니 당신 아들과 우리 딸을 결혼시키것이 어떠냐, 이런 거란 말인가요?“

"그렇지. 네 얘기를 들어보면 백작이라는 자는 예전부터 자기 딸을 잘 팔아먹는 인간인 것 같으니 말이야."

   확실히 맨 처음부터 백작은 자신의 내기 실수로 로즈니스와 백치소년이 결혼하게 생겼다며 그걸 해결해 달라고 그를 끌어들였던 것이다. 이번에도 로즈니스의 혼사가 어쩌고 하면서 윈터러의 존재를 교묘히 숨기려 하는 것을 보면 정말로 보통 교활한 인간이 아니었다.

    "어떻게 이런 걸 다 알게 된 거죠? 어떻게 그렇게 확신해요?“

    “벨노어 백작이 하기 좋은 최적의 거짓말에서부터 거꾸로 추리해 봐. 그러면 상황이 간단하지."

    “하지만 강피르 자작은 왜 직접 습격하지 못하고 복잡하게 벨노어 백작의 요구를 받아들인 거죠?”

   "일단은 두 귀족이 연루되면 폰티나 공작에게도 좀 더 말발이 설 테고, 그것보다도.... 실은 그가 데려온 사람들은 이미 전날 밤에 1차 습격을 했다가 적지 않게 다쳤기 때문에 새로운습격 인원이 필요했겠지. 폰티나 공작의 성 안에 병사를 수십 명씩 데리고 들어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니 겠어?“

   "그 1차 습격자들을 다치게 한 것은 이솔렛 당신이고요?“

   이솔렛은 그냥 미소지을 따름이었다. 그들의 어깨 너머로 회색 산들이 천천히 지나가고 있었다.

   이런 얘기를 들을수록 이솔렛의 머릿속에 든 괴이쩍은 지식들이 얼마나 많은 건지 궁금해졌다. 어떻게 한 번 살아본 일도 없는 대륙의 일을 그렇게 손바닥 보듯 쉽게 이해할 수 있을까. 영주 아들로 태어나 귀족처럼 자란 자신보다도 훨씬 빠르게. 대륙에서 지내다 온 순례자들이 가끔씩 전해주는 것말고는 다른 정보라고는 없을 텐데.

   "어쨌든 대담한 도박이었어요. 만일 로즈니스가 우리 부탁을 받아들이지 않았더라면, 또는 받아들였다 하더라도 클로에 아가씨가 외면했더라면 어쩔 생각이었죠?“

    "로즈니스 아가씨 문제는 정말로 운에 맡겼다고 할 수 있겠지만.... 만찬장에서 보아하니 공작은 자신의 딸을 매우 아끼고 신뢰하더군. 공작에게는 전처 자식인 아들도 한 명 있다고 했지? 나이든 아들을 제쳐놓고 곁에 둘 정도의 영리함은 된다는 거야. 그 딸이 아버지를 어렵게 생각하는 편도 아닌 것 같았고, 그리고 내게 카드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었고."

    "아, 그 말을 들으니 생각나네요. 정말로 궁금한 건데, 도대체 당신의 아버지께서 폰티나 공작님한테 베푼 은혜라는 게 뭐예요?“

   이솔렛은 생긋 미소지으며 말했다.

   "그런 건 비밀이야, 아버지의 일이니까."

   9월 햇살 아래 몇 가닥 하얀 머리카락이 유난히 희게 빛을 냈다. 죽 동행이 있다가 둘이서만 여행하게 된 지 이틀밖에 되지 않은 까닭인지 두 사람은 너무나 할 이야기가 많았다. 실버스컬 결승이 끝난 바로 그 날 저녁, 시상식이 끝나자마자 파티조차 마다한 채 부랴부랴 폰티나 공작이 내준 마차를 타고 떠난 후로 꼬박 한 달이 흘렀다. 

   폰티나 공작의 이해할 수 없는 관대함은 아직까지도 미스테리였다. 폰티나 영지를 안전히 빠져나갈 수 있도록 마차를 빌려준 것까지는 약속한대로 였지만 영지 경계에 이르렀을 때 다른 마차가 기다리고 있는 걸 보고는 정말로 당황했다. 사람을 잘 믿지 않는 보리스가 마차를 가져온 자들의 정체를 의심하자 놀랍게도 그 안에서 나온 것은 한 번도 모습을 보인 일이 없었던 공작의 아들, 조르지오 다 폰티나였다.

   조르지오는 보리스가 어렴풋이 상상하던 것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일단 겉모습이나 말씨부터가 클로에의 고상함이나 우아함과는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었다. 검은 곱슬머리를 됫목을 덮을 정도로만 기르고 재미 삼아 턱수염까지 기르고 있는 이 호리호리한 젊은이 

는 농담을 잘했고, 예의를 따지기 싫어했으며, 상당한 기분파였다. 어쨌든 공작이 마차와 함제 딸려보낸 하인들이 모두 그 앞에서 허둥지둥 고개를 숙이는 걸로 보아 거짓 신분은 아니 었다.

    그리고 조르지오는 로젠버그 관문까지 자기와 함께 가자고 말했다. 본래 그곳에 볼일이 있어 가는 것인데 그를 태워주겠다는 것이었다. 이 모든 것이 공작의 지시인가 물으려 했지만 조르지오는 그런 화제를 좋아하지 않았다. 자유분방하고 쾌활한 듯이 보였지만 여행하면 

서 보리스가 느낀 바로는 상당한 외골 고집이 숨어 있는 자였다. 내키는 대로 행동하는 듯 보이는 것도 어느 정도는 일부러 과장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전혀 귀족답지 않은 그는 함께 여행하기에 즐거운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조르지오와 그의 하인 몇과 함께 로젠버그 관문까지 갔고, 관문 앞에서 아쉬운 이별을 고했다. 그런 다음 몇 개월 전처럼 실버스컬 핑계를 대며 적당히 렘므 땅으로 들어서니 낯선 일행이 또다시 기다리고 있었다. 이 자들은 엘티보 서쪽 맞은편에 위치한 쌍둥이 

도시 그란티보까지 간다고 말하며 역시 동행을 요청했다. 이번에야말로 부득부득 버티며 캐물어 보니 이들 또한 폰티나 공작, 또는 조르지오가 수배해 놓은 상단이었다.

    그리고 그제야 이 모든 일의 까닭을 들을 수 있었다. 벨노어 백작이 보냈다고 생각되는 자들이 오래 전부터 그들을 추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조르지오도 떠난 마당에 수십 명이나 되는 상단 틈에 끼여들어 동행하는 것만큼 추적을 피하기에 좋은 방법은 없었다.

    그리하여 이들과 동행하여 그란티보까지 갔다. 그들과 헤어진 것이 바로 이틀 전이었다.

    "참, 그런데 이솔렛, 그 때 실버스컬 수상식 끝나고 나서 볼일이 있다고 잠깐 혼자 어디 갔다왔잖아요. 그 때 뭐했어요?“

    우승 상품으로 받은 순은 두개골은 보리스의 배낭 안에 다른 여행 도구들과 함께 들어 있었다. 이솔렛은 주머니에서 금화 하나를 꺼내  집게손가락 사이에 끼워 보이더니 생긋 웃었다.

    “그때 너한테 돈 걸었던 부잣집 소년 생각나? 너 그 애 안다고 했잖아, "

    "칼츠 집안 아들 말인가요“

    "응, 그래. 루시안 칼츠."

    "루시안 칼츠라, 아마 돈 좀 벌었겠죠? 어떻게 저 같은 애한테 돈을 걸 생각을 했나 모르겠어요. 그런 것도 운인가?“

   그렇게 말하며 보리스도 씩 웃었다. 직접 보진 못했지만 올해 실버스컬에서 최근 몇 년 내 최대의 이변이 벌어진 만큼 결승전이 끝났을 때 도박판은 그야말로 난장판이 되었다. 당연히 최고액을 따간 것은 이솔렛의 충고로 진짜 '도박‘ 을 한 루시안이었다. 올 실버스컬의 장내 우승자가 보리스라면 장외 우승자는 루시안인 셈이었다. 그 얘기로 온통 떠들썩하던 것을 보리스도 모르지 않았다.

    “응, 실은 말이지. 나도 너한테 돈을 좀 걸었거든. 이건 동업자를 위한 배당."

    이솔렛이 금화를 손가락으로 퉁기자 보리스가 가볍게 낚아챘다. 이윽고 한 개 더, 또 한 개가 더 날아왔다. 보리스가 눈을 둥그렇게 뜨더니 말했다.

    "얼마나 번 거예요?“

    "어디 보자.... 아직 한줌은 더 남았어."

    "헤에, 이솔렛한테 이런 면이 있는 줄은 몰랐어요."

    “네가 벌써부터 나를 다 안다고 생각한다면 곤란한데."

    그때 보리스가 문득 눈을 가늘게 뜨더니 불쑥 물었다.

    "이거 아무래도 루시안 칼츠에게 정보를 흘린 게 이솔렛 당신 아닌가 싶은데.... 맞죠?“

   "아아, 난 모르겠어. 내가 돈을 거는 걸 보고 따라 건 것이 아닐까?“

   이솔렛은 딴전 피우듯 말하며 금화 두 개를 더 날렸다. 보리스가 두 손을 내밀어 각각 잡아내고는 싱긋 미소했다. 대강 짐작이 갔다. 그때 이솔렛은 새로운 생각을 해낸 듯 다시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폰티나 성을 허둥지둥 떠나게 되어서 좀 아쉽지는 않아?“

   금화를 주머니에 넣던 보리스가 무슨 소린가 하는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아쉽다니요? 아쉬울 게 뭐가 있어요?“

    "실버스컬 우승자를 위한 성대한 연회가 준비되어 있었잖아. 주인공이 빠진 셈이 됐으니 별로 멋진 연회는 못되었겠지."

    "그렇지 않을 거예요. 소자작이 저 대신 주인공이 되었겠죠,"

   두 사람 모두 같은 모습을 떠올리고 있었다. 연회가 열리기 전에 떠나려고 폰티나 공작을 만나 급히 보내줄 것을 요청했고, 허락을 받아 마차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니 뜻밖의 인물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다름 아닌 루이잔이었다.

    흠칫 놀라는 두 사람 앞에서 루이잔은 엷은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좋은 승부 해줘서 고맙다. 난 이제 더 이상 실버스컬에 나오지 못하니 언제고 켈티카에 오거든 한 번 찾아와라, 너와 다시 한번 승부를 가리고, 그리고 오늘 연회의 네 몫을 대신 대접하고 싶다”

    "하지만 소자작이 나중에 널 초대해도 아노마라드 최고의 미녀라는 아가씨는 불러오지 못하잖아. 그 때 연회에 갔다면 반드시 그 아가씨와 한 곡 추었을 텐데. 안 그래?“

    이솔렛의 얼굴에 장난기 어린 미소가 떠올랐다. 보리스는 약간당황해서 코를 찡그렸다.

   “미인이라는 건..... 개인의 취향이라고요. 그쪽은 취향 밖이에요."

   "취향 이상의 미인이라는 것도 있는 거잖아? 그쯤은 되겠던데."

   이쯤 되자 보리스도 반격할 말을 찾아내어 짓궂게 웃었다.

   "그렇겠죠. 그런데 먼저 만난 아가씨 때문에 눈이 나빠져 버려서 다른 미인은 도무지 못 알아보겠어요."

   말을 꺼낼 때까지는 좋았는데 맺고 나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물론 그 말은 사실이었다. 한 사람에게 이미 눈멀었으니 다른 사람이 눈에 들어올 리 없잖은가. 그렇지만 이런 식으로 입밖에 낼 마음은 본래 아니었는데.

   그러면서도 그는 이솔렛의 표정을 보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보니까 이솔렛은 일부러 고개를 돌려 멀리 있는 들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걷잡을 수 없는 행복한 심정이 솟아올라 나오는 웃음을 주체하기가 힘들었다. 이런 행복을 전에도 느껴보았던가?

   그러나 이런 감정을 되새길 때마다 저도 모르게 떠오르는 것은 나우플리온의 모습이었다. 그는 보리스에게 처음으로 신뢰가 무엇인지, 마음놓고 웃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 준 사람이었다. 예프넨이 없는 세상에서 유일한 의지처가 되어 주었고, 그러면서도 소년의 마음 속에 자리잡은 공백을 인정해 주었다. 렘므에서 둘이 여행할 때는 그에 대한 애정을 다른 무엇과 비길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한 일도 없었다. 그만큼 나우플리온에 대한 보리스의 애정은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지금, 나우플리온이 곁에 없는데도 이토록 행복한 자신과 마주할 때면 마음 속에서 쉽사리 용납할 수 없는 감정이 비집고 올라와 그를 괴롭히곤 했다. 심할때 그것은 자기 혐오에 가까웠다. 그러나 때때로 잊고 있었고, 두 사람에 대한 감정이 각각 다르다는 것을 생생하게 느낄 때도 있었다. 지금 같은 때가 바로 그랬다.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이런 기분은 이솔렛만이 그에게 줄 수 있는 것이었다.

   그 때 이솔렛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네가 클란치 알리스테어와 싸울 기회가 없었던 것이 잘된 일일까?”

   "저한테 지지 않았더라도 충분히 실망한 것처럼 보였는걸요."

   "글쎄. 그의 집안은 절망 같은 것에 익숙하지 못하지. 절망을 겪은 일이 별로 없거든. 그런 경우 보통은 나쁜 상황을 만나는 순간 쉽사리 무너지게 되는데, 그 애 같은 경우는 좀 달라. 말하자면 자기에게 닥친 절망을 절망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경우랄까. 자신 역시 절망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잘 모르고, 인정하지도 않는 거야. 그런 사람은 어디에서든 자기가 빠져나갈 길을 찾아내기 마련이지,"

   "적어도 검의 사제가 되기 위해 당신 아버지의 이름을 빌리진 못하게 되겠죠."

   그 말을 들은 이솔렛이 비꼬듯 한 마디 던졌다.

   "그가 뭘 또 생각해내서 절망을 딛고 일어날지 기대되는걸."

   "전 그가 우리의 일을 섬에다 뭐라고 말할지 약간 걱정스럽네요. 폰티나 공작 일만 해도 그렇고.... 음, 말이 나왔으니 얘긴데 폰티나 공작이 나중에 제게 어떤 걸 요구할까요?“

   보리스는 당연히 대가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듯 우연히 만난 사람이 전적인 호의를 갖고 그를 도와준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솔렛은 판단을 보류하는 눈치였다.

    "그것보다 말이야, 네가 소자작의 오른손을 자르지 않은 것은 어떤 심경 변화의 결과였는지 그것부터 묻고 싶은데 "

    보리스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걸 말하려면 옛날 이야기를 해야겠는데요."

    보리스는 실버스컬 결승에서 루이잔의 오른팔을 향해 검을 내리쳤지만. 마지막 순간 검을 옆면 쪽으로 꺾었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폰티나 공작의 도움을 처음엔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뜻밖으로 공작은 그 일에 대해 아무 것도 묻지 않았고, 약속한 것보다 더한 친절 

을 베풀어주었다. 그들은 그 까닭을 물을 기회를 갖지 못했다.

    "길게 하진 마."

    보리스가 옛날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곧 자신의 상처를 헤집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렇게 말했다. 보리스도 그냥 가벼운 한숨을 내쉰 뒤 짧게 말했다.

    "소자작에게도 어린 동생이 있더군요. 그뿐이에요."

    더 긴 이야기는 필요 없었다. 오전 내내 실버스컬 당시의 일을 쉬지 않고 얘기하던 둘은 잠시 말없이 걸어갔다. 잡목이 흩어진 땅이 서서히 낮아지면서 강이 나타났다. 강은 꽤 폭이 넓었고 건너편 기슭에는 갈대가 숲을 이루며 우거져 있었다. 

   보리스는 문득 떠오르는 추억을 생각하며 미소지었다. 이솔렛이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느끼고는 입을 열었다.

    "처음 보는 강이 아닌걸요. 예전에 이실더 님하고 여행할 때.... 여기에서 아주 우스운 사고를 당한 일이 있어요."

   엉뚱한 내기를 하다가 얼음물에 빠져서, 얕은 줄도 모르고 허우적거리며 죽는 줄로만 알았다가, 근처 마을 사람들에게 구원받았던 그때의 일이 낱낱이 떠올랐다. 이솔렛은 굳이 내용을 묻지 않고 이해한다는 듯한 미소만을 보였다.

   잠시 후 이솔렛은 강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깊을까?“

   이곳은 그 때 소동을 벌인 곳보다 하류인지라 건널 만한 곳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강 저쪽 편에 두 사람이 앉아서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강기슭에 바짝 다가선 보리스는 손나팔을 만들어 상대방에게 말을 걸었다.

   "실례합니다만, 이 강을 건널 만한 곳을 아십니까!"

   시골사람 차림인 그들 중 한 명은 여자였고, 다른 하나는 거친 옷 안쪽으로도 상당히 건장한 몸집을 지닌 듯한 사내였다. 처음에 그들은 지나치게 낚시에 골몰한 사람처럼 대꾸를 하지 않았는데, 한 번 더 부르자 여자 쪽이 고개를 들어 쳐다보았다. 그녀의 손에는 장대가 하나 들려 있었다.

   햇빛이 가려지는 널찍한 짚모자를 쓰고 있어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아까 떠올렸던 사건과 더불어 문득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왠지 모를 향수가 스며 올랐다. 그러고 보면 그 때 머물렀던 헤베브로 마을도 기껏해야 여기서 몇 시간 거리에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여자가 대꾸하는 소리가 들렸다.

    "강을 건너려면 저쪽에 바위 몇 개 있는 걸 딛고 뛰라고! 물론 능력이 된다면 말이야!"

   가만히 살펴보니 10미터쯤 올라간 상류에 뽀족한 바위 몇 개가 징검다리처럼 튀어나와 있는 것이 보였다. 그런데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저런 차림을 하고 있는 걸로 봐서 렘므 토박이들이어야 하는데 저건 전형적인 남부 말씨 아닌가?

   하긴, 예전에 어떤 사람도 그랬었다는 생각에 보리스와 이솔렛은 그쪽으로 갔고, 별로 어렵지 않게 강을 건넜다. 특히 이솔렛은 거의 한 발로 한 개의 바위만 디딜 정도로 가볍게 건너뛰어서 반대편 기슭에 내려섰다.

    그런 다음 고맙다는 말을 하려고 그 여자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낚시를 하던 두 사람이 일어나 있었다. 일어선 것뿐만 아니라 둘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몇 걸음 다가가니 여자가 씩 미소지었다. 물론 그녀는 헤베티카가 아니었다. 대략 스물 후반에서 서른 초반은 되었겠다 싶은 여자였다.

    "솜씨 좋은데. 특히 아가씨, 등 뒤에 그런 걸 매달고 다니는 거 보니 검사인가 보지? 몸이 대단히 가볍던데."

    "고마워요."

    이솔렛은 낯선 사람은 딱 적당한 예의로만 대하는 성격이었다. 그런데 다짜고짜 그 여자가 이솔렛 쪽으로 다가오더니 손을 내밀어 덥석 손목을 잡는 게 아닌가?

    "!"

    잠깐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이솔렛은 반사적으로 팔을 꺾어 상대의 손을 뿌리치려 했지만 놀랍게도 그 여자의 손은 마치 갈고리처럼 붙은 채 떨어지지 않았다. 다른 손을 쓰려 했는데 이번에는 그쪽 손도 붙잡혀 버렸다. 이솔렛의 표정이 달라졌다. 이솔렛도 여자 치고 약한 팔 힘을 가진 것이 아닌데, 이 여자의 악력은 건장한 사내들과도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얼마나 세게 잡았는지 두 손이 금방 빨갛게 물들었다. 이솔렛이 차갑게 바꿔 목소리로 대뜸 물었다.

   “무슨 짓이지?”

   "검은 속도만 갖고 휘두르는 것이 아니지, 안 그래?“

   그렇게 말하며 여자는 고개를 뒤로 홱 젖혀 짚모자를 떨어뜨렸다. 그러자 여러 개의 핀으로 정교하게 꽃아 올린 머리모양과 얼굴이 드러났다. 시골 아낙네라니,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정성스레 다듬은 것이 틀림없는 꽤 예쁜 얼굴과 흰 피부, 그리고 비웃는 듯한 눈동자를 보자마자 이 여자가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당신들은 누구지?"

   보리스가 덤벼들려는 순간, 뒤에서 말없이 서 있던 사내가 갑자기 끼여들며 보리스의 어깨를 밀쳤다. 그의 손이 닿는 순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힘이 밀려들며 중심이 어긋났다. 보리스는 바닥에 넝어지고도 한동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믿을 수가 없었다. 이런 정도의 힘은 아직까지 경험한 일조차 없었다.

   "널 잡으러 온 지옥 사자란다, 꼬마야."

   귀에 거슬리는 묘한 억양이었다. 이어 여자는 자기 동료를 돌아보며 완전히 달라진 목소리로 외쳤다.

   "톤다! 계집애를 묶어버려!"

   톤다라는 자의 손목 안쪽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밧줄이 이솔렛의 발목을 휘감았다. 밧줄은 흡사 살아 있는 것처럼 단단히 감겼고, 이솔렛의 무릎이 꺾이자 여자가 잡고 있는 팔을 잡아당겨 일으켜 세웠다. 이솔렛은 팔을 빼내려 애썼지만 여자의 손은 여전히 까딱도 하지 않았다. 이솔렛이 소리쳤다.

    "물러서, 보리스!"

    “호, 보리스라.... 친절하게 확인까지 해 주는군. 뭐, 얼굴 보고 이미 짐작했지만 말야."

    이솔렛이 고개를 돌려 보리스를 쏘아보며 다시 한 번 소리질렀다“'

    "물러서라니까! 검을 뽑아!"

    보리스는 벌떡 일어나며 몇 걸음 물러서 검을 뽑았다. 이솔렛을 두고 달아날 생각 같은 것은 처음부터 없었다. 그러자 말이 없는 사내가 다시 한 번 손을 뻗었고, 이번에는 올가미가 날아왔다. 올가미에는 작은 쇠발톱과 같은 것들이 빙 둘러 박혀 있었다.

    "에잇!"

    날렵하게 휘두른 검이 올가미를 쳤지만 쇠발톱과 부딪쳐 퉁겨났다. 이어 올가미 외에 두 가닥의 밧줄이 동시에 교묘하게 날아들었다. 밧줄 끝에도 날카로운 쇠날이 달려 있었다.

     이상하게도 이 밧줄들은 이솔렛을 묶은 것과는 달리 밧줄 안에 특별한 재질이 들어 있는 듯 탄력이 강하고 손쓰는 사람의 의도대로 확실히 움직였다. 그러나 긴장하는 순간, 손목에 탄력이 붙었다. 진로를 짐작하기 힘든 밧줄과 올가미가 다가오기를 기다려 모조리 쳐내 버렸다. 그러자 여자가 놀리는 것 같은 목소리로 외쳤다.

     "그쪽도 괜찮은데? 이쪽 여자만 빠른 줄 알고 견제했더니. 그 정도 실력이면 예의 삼아 이름을 밝혀 줘도 되겠군. 난 마리노프 캄브! 적당히 대할 생각은 말아. 우리가 너희를 죽여도 될 것 같았으면 벌써 죽였을 테니까."

   그 이름의 어감이 익숙하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바로 알아차렸다.

바로 트라바체스 출신의 이름이었다. 그렇다면 블라도 삼촌이 보낸 자들인가?

    "너희는 누구냐! 삼촌이 보낸 거냐!"

    "좋은 추리력이지만 조금 더 멀리 생각해 봐."

   다시 현란한 움직임으로 밧줄들이 다가왔다. 신경을 최대한 집중해서 하나를 쳐내고, 하나를 뛰어넘고, 하나를 끊어냈다. 자르며 느낀 거지만 밧줄의 재질은 쇠가죽 채찍보다도 튼튼했다. 보리스의 무기는 검이므로 접근을 해야 적을 칠 수 있는데, 그게 간단하지 않았다. 억지로 두 걸음 정도 다가가는데 밧줄 머리가 홱 고개를 돌리는 것 같더니 재빨리 그의 등에 쿡 박혔다. 얇긴 해도 갑옷을 입고 있는데 그것조차 간단히 뚫어 버렸다.

    "아!"

    온 몸에 경련이 일었지만 당장 검부터 돌려 쳐내고 다시 물러났다. 등 뒤의 상처를 살필 겨를도 없었다. 다시 올가미를 피해 뛰어올랐다. 밧줄 하나가 아슬아슬하게 무릎을 스치고 지나갔다.

    곁눈으로 흘끗 이솔렛을 보았다. 마리노프라는 여자는 이제 발이 묶인 이솔렛을 질질 끌어당겨 물가로 데려가고 있었다. 그제야 보니 마리노프의 팔은 남자들 중에서도 보기 힘든 엄청난 근육질이었다. 힘으로는 도저히 이솔렛이 당할 수 없었다.

    이를 악물고 다시 덤벼들었다. 등이 욱신거렸으나 그 정도로는 굴복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이 아닌 밧줄들과 싸우는 걸로는 적에게  어떤 타격도 줄 수가 없었다. 이솔렛이 있는쪽으로 다가가려 했지만 이 살아 있는 것 같은 밧줄들이 또 다시 진로를 막아버렸다. 검술에 자신이 붙은 후로 이렇게 수습할 수 없는 적을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몇 개인가 밧줄 끝을 잘랐지만 곧장 새로운 밧줄들이 튀어나와 수는 점점 늘어났다 한 가닥이 아래쪽으로 파고들어 보리스의 발목을 감으며 살갗을 찢어냈다. 겨우 그걸 끊고 나니 풀밭 곳곳에 점점이 피가 뿌려져 있었다.

   장거리용 무기가 없다는 것이 이토록 치명적일 줄은 몰랐다. 실버스컬에서 싸우던 때처럼 자기 것이 아닌 실력을 자제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있는 실력을 다해 검을 움직여야 겨우 네 가닥 밧줄을 모두 차단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다음이 없었다.

    “자, 자, 들어가라고. 아아, 목욕하기엔 좀 추운 날씨라는 거야?”

   마리노프는 이솔렛의 묶인 발을 걷어차 강물에 들어가게 하더니 아예 자기가 먼저 들어가서 홱 끌어당긴 다음 더 깊은 쪽으로 자꾸 밀어 넣었다. 이솔렛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마리노프의 손에서 벗어나려고 사력을 다했다. 그러나 너무나 상황이 나빴다. 무엇보다도 빠른 이솔렛의 검이 있었더라면 저런 밧줄들을 잘라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단 하나 다행인 점이 있다면 이솔렛을 잡느라고 이 괴력을 가진 여자 역시 공격을 하지는 못하고 있다는 거였다. 사정은 모르지만 이들은 보리스와 이솔렛을 죽이지 말고 사로잡아 오라는 명령을 받은 듯했다.

   "죽이지 못하는 임무 따위, 정말 짜증스러운데!"

   그렇게 외치며 마리노프는 사정없이 이솔렛의 몸을 물 속으로 집어 넣었다. 몸싸움을 벌이다 보니 물이 이리저리 튀는 바람에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젖혔는데 그 순간 상황이 바뀌었다. 보리스는 잘 보지 못했지만 그 때 이솔렛은 손목을 잡힌 상태 그대로 두 다리를 오므려 팔 사이로 솟구치더니 무릎으로 상대의 가슴을 걷어찬 뒤 다리로 목을 휘감아버렸다. 보통 사람은 상상도 하지 못할 곡예였다.

    "으윽, 무슨 짓이야!"

    중심을 잃은 마리노프가 물 속에 자빠졌고, 목에 올라탄 이솔렛도 같이 물에 빠지는 가운데 자세가 엉키며 드디어 손목이 풀렸다.

    "이, 이런!"

    마리노프는 물에 젖어 거추장스러워진 옷 때문에 빠른 행동을 취하지 못했다. 순간적으로 벌떡 일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눈앞에 물보라가 일었고, 섬광 같은 검날이 바로 찔러져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 마리노프는 당장 도로 물에 주저앉아 몸을 뒤채며 재빨리 손을 뻗어 아까 물가에 놓여 있던 장대를 집어 당겼다. 그러나 곧장 심장을 노렸던 이솔렛의 검이 어깻죽지를 푹 꿰뚫고 말았다.

    "아악!"

   마리노프는 갑옷같은 것을 전혀 입고 있지 않았다. 피가 분수처럼 솟구쳐 나와 강물을 적셨지만 이솔렛은 망설임 없이 두 번째로 여자의 드러난 팔을 후려쳤다.

    "이.... 이 빌어먹을 계집애가 감히!"

   마리노프의 장대가 물에서 나오는 순간 이솔렛도 보았다. 그것은 장대가 아니었다 본래 끝에는 거대한 도끼날이 달려 있었는데 물에 담가 놓아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이솔렛도 의심할 바가 없었다. 이들은 노상강도 따위가 아닌 진짜 살인자들이었다.

   그렇게 날아온 도끼날이 이솔렛의 두 번째 검을 막아냈다. 그러나 마리노프는 한 번 입은 상처 때문에 버거워하며 간신히 일어나 핏발선 눈으로 이솔렛을 쏘아봤다. 부상 자체보다 부상당했다는 사실이 그녀를 견딜 수 없이 화나게 만드는 모양이었다.

    “내 몸에.... 이런 상처를 내? 명령 따위.... 필요 없어! 단숨에 죽여버릴 테다!"

    그 말에 이솔렛의 두 자루 검이 응답해왔다. 본격적인 싸움이 벌어졌다. 전형적인 속도와 힘의 싸움이었으나 한쪽은 이미 부상당한 상태, 그러나 놀랍게도 마리노프는 그 무거운 도끼를 한 손으로 들고 휘둘러대며 이솔렛의 빠른 검을 여러 차례 막아냈다. 상대의 무기가 워낙 무거운 것인지라 한 번 부딪치면 검이 박살날지도 모르기 때문에 이솔렛도 섣불리 접근할 수는 없었다. 이렇듯 준비 없이 벌어진 싸움에서 마음을 깨끗이 하고 정신을 집중시컥야 하는 찬트는 불행히도 도움이 안 되었다.

    "톤다! 젠장, 너도 아직이야? 지금껏 애송이녀석 하나 요리 못하고, 그러고도 네가 세 번째 날개야?“

    “......”

   톤다는 말이 없는 사내였으나 마리노프가 악을 쓰자 속도가 빨라졌다. 보리스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이미 다친 곳이 여러 군데였다. 이솔렛이 마리노프에게 치명적인 부상을 입히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오래 끌다가는 결국 둘 다 사로잡힐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도 이솔렛은 무섭게 휘둘러지는 도끼를 뚫고 다시 한 번 옆구리에 상처를 입혔다.

    "뭐야! 왜 이렇게 귀찮게 됐지? 이거 얘기하고 다르잖아!"

   마리노프는 마법사 종그날을 통해 류스노와 유리히로부터 받았던 전갈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 얘기로는 그냥 '평범한 소년들'이며, 잡아 족치는 것 역시 식은 죽 먹기라고 했던 것이다. 그 평범한 소년들이 이들이라고? 농담이 지나치잖아!

   그러나 전세는 점차 마리노프와 톤다에게로 기울어갔다. 부상당한 마리노프와 찬트로 강화되지 않은 이솔렛의 실력은 호각이었지만, 보리스는 낯선 무기를 가진 적에게 익숙해지지 못하고 연속적으로 상처가 늘어갔다. 지금껏 배운 것이 검 든 상대에게 대적하는 방법뿐이었다는 사실이 이제야 실감이 났다. 본래 대륙 사람이었던 그가 인구가 적고 좁은 섬에서 살면서 그곳의 질서에 안주해버렸던 것이다. 섬에서는 검은 검끼리 싸우면 되었지만 대륙의 적들은 아무 것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을 어느새 잊고 있었다.

    철벅, 발치에 물이 닿았다. 밀리다 보니 이미 강기슭이었다. 보리스는 정신을 집중해서 눈을 혼란시키는 밧줄들에 대항하려 했다. 그러나 자꾸만 시야가 혼미해질 뿐이었다.

    그런데 잠시 후, 이 시야의 혼미가 단지 힘겨워서만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코 끝에 감각되는 새로운 냄새가 있었다 뭔가를 태우는 듯한 탁한 냄새였다. 그걸 눈치챈 것은 보리스 혼자만이 아니었다 

    "뭐야, 불이 났네?“

   마리노프가 새된 목소리로 소리질러 이솔렛의 주의를 흐트러뜨리려 하면서 재빨리 도끼를 휘둘러 팔을 찍으려 했다. 그러나 이솔렛은 놀라기는 커녕 오히려 더 날카로운 동작으로 상대의 손목을 노려 정확히 찔렀다.

   "아앗!"

    등 뒤의 갈대밭에서 불이 일어나 있었다. 갈대밭이 워낙 넓게 펼쳐진 터라 어디서부터, 왜 불이 났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불은 서서히 사납게 번지기 시작하여 이윽고등을 뜨겁게 데우기 시작했다. 온 몸이 젖은 이솔렛은 그나마 나았지만 보리스는 앞에는 밧줄, 뒤에는 불을 놓고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다.

   그때였다.

   "이쪽으로!"

   낯선 목소리가 들리더니 싸우고 있는 그들 앞으로 짚단처럼 묶은 불붙은 갈대 뭉치가 몇 개나 떨어졌다. 그 바람에 밧줄에 불이 붙었다. 특별한 재질 탓인지 금방 끊어지지는 않았지만 톤다라는 사내는 흠칫하며 밧줄을 거두어들이려 했다. 

    "보리스! 어서 오라니까!"

   그 목소리는 보리스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톤다가 밧줄을 거두는 새 틈이 난 보리스가 흘끗 보니 몇 명의 사내들과 여자들이 불붙은 갈대밭 안쪽에서 손짓하고 있었다. 저리로 오라고?

    그때 이솔렛이 먼저 상황을 알아챘다.

    "보리스, 저들을 따라가!"

    그러면서 자신이 먼저 갈대밭으로 뛰어들어 불길을 뚫고 들어갔다. 예상대로였다. 불은 그들이 싸우던 빈터를 둘러싼 갈대들에만 붙어 있었고, 그 안쪽은 이미 물로 적셔져서 불이 번지지 않는 상태였다. 이윽고 보리스도 따라 들어왔는데 옷이 말라 있어서 불똥을 털어 내 

어야 했다. 한 사람이 소리쳤다.

    “자, 지체 없이 달리자고!"

   상대의 얼굴을 확인할 틈도 없이 갈대를 뚫고 달렸다. 갈대가 얼마나 높이 자라 있는지 조금만 몸을 수그려도 머리까지 다 가려졌다. 등 뒤는 불길로 가려져 있어서 움직임이 금방눈에 띌 염려도 없었다. 다만 보리스는 여기저기 당한 부상들 때문에 움직임이 몹시 고통스러웠다.

    "여기야!"

   겨우 갈대를 뚫고 튀어나오니 열 명이 넘는 남자들이 땅을 개간하려는 것처럼 곡괭이와 쟁기, 삽 같은 것을 들고 서 있었다. 그제야 그들을 안내해 달려온 사람의 얼굴을 쳐다볼 여유가 생겼다. 긴 머리를 틀어 올리고 장대를 하나 든 그 여자가 싱긋 웃으며 보리스를 바라보았다. 남부 말씨를 쓰는 익숙한 얼굴의 뱃사공 아가씨, 헤베티카였다.

   "오랜만이야. 많이 컸네?“

   헤베티카를 따라 마을에 도착하니 이미 저녁 무렵이었다. 전과 마찬가지로 마을 한가운데에 모닥불이 타올랐고, 불을 둘러싸고 사내들 몇이 술을 마시며 떠들어대고 있는 것도 낯익은 풍경이었다.

   일단은 부상을 먼저 치료하러 갔다. 말린 약초를 잔뜩 걸어놓은 집에 들어가니 약을 달이던 할머니가 상처를 씻기고 찧은 약초를 둥글게 뭉쳐서 붙여 주었다. 보리스는 잘 몰랐지만 등에 입은 상처가 생각보다 심각했는지 들여다보던 이솔렛의 안색이 조금 변했다. 급박한 상황이었을 때는 잘 몰랐지만, 등에 입은 상처는 팔을 조금만 움직여도 매우 쓰라렸다. 겨우겨우 웃옷을 다시 입을 수 있었다.

   다시 밖으로 나오니 기다리고 있던 헤베티카가 모닥불 앞으로 가자며 손짓했다. 거기에는 또 한 가지 친근한 물건이 기다리고 있었다. 

   “자, 먹어. 너와 그 짓궂은 아저씨가 같이 지켜준 그 옥수수밭에서 거둔 옥수수야."

   불에 구운 옥수수를 먹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한참 고생하던 보리스와 이솔렛이 잠시 후 서로의 얼굴을 보니 똑같이 입가가 새카맣게 변해 있었다. 둘은 거의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사내들은 술을 권했다. 대륙에 온 이래 내내 술은 건드리지도 않던 이솔렛이 놀랍게도 한 잔 달라고 해서 받아 마신 다음 약간 발그레해진 얼굴로 보리스에게 미소를 보냈다. 그 미소를 보는 사람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은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좋은 곳이구나."

   옥수수 때문에 살짝 덴 손가락 끝에 침을 바르면서 보리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리 오래 머물렀던 마을은 아니었다. 망신스러운 얼음 강물 사건으로 시작해서, 우스꽝스러운 옥수수 재배지 쟁탈전으로 끝났던 체류 동안 달리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나우플리온이 엄청나게 마셔댔던 묵은 포도주의 냄새뿐이었다. 포도가 나지 않는 이곳 추운 땅에서 포도주라는 것이 꽤 귀한 물품이었다는 깨달은 것은 마을을 떠나고도 한참 지난 후의 일이었다.

    "그래, 멋대가리 없는 아저씨 대신 예쁜 아가씨랑 같이 다니게 된건 축하할 만한 일이긴 한데 말야, 도대체 아저씨는 어디다 갖다 버린 거야?“

    별로 변한 것이 없어 보이는 헤베티카의 남부 말씨에서 나우플리온에 대한 친근감을 눈치챈 보리스는 옛 일을 생각하는 사람의 눈빛으로 웃음 지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나우플리온에게 했듯 불쑥 농담으로 말했다.

   “너무 잔소리가 많아서 내다 버렸어요. 혹시 소식은 못 들었고요?”

   "소식은 너나 알면 좀 전해 주지 그래. 그 사람 소식 알고 싶어하는 사람이 나 하나뿐은 아니니까 말이야."

   "누가 또요?“

   "그때 내가 말하지 않았어?“

   헤베티카는 사람들의 시선이 의식되는 듯 잠깐 주위를 둘러보더니 보리스와 이솔렛을 일으켜서 자기 집으로 가자고 끌었다. 그녀의 뒤를 따라서 돌과 흙을 싸 발라 지은 납작한 집에 들어가자 한 남자가 이불 속에서 돌아누워 코를 골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헤베티카는 다짜고짜 다가가더니 남자의 등을 발로 걷어찼다.

    "그만 일어나라고요! 도대체 몇 시간을 자는 거야?“

   남편인가, 쾌나 난폭한 부부구나, 하고 생각하며 멀뚱히 쳐다보고 있는 가운데 남자가 부스스 일어나 앉았다. 그러나 보리스는 그가 일어나 앉는 모습을 보자마자 깨달았다. 남편인지 뭔지 알 수 없어도 이 자는 대단한 싸움꾼임에 틀림없었다.

   잠에서 덜 깬 멍한 표정을 하고 있는데도 일어나는 움직임이 달랐고, 앉은 자세가 달랐다. 더구나 요즈음의 날씨에 어울리지 않게 소매없는 웃옷 옆으로 드러난 어깨와 팔은 결코 가볍게 단련된 것이 아니었다. 그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절로 졸음이 쏟아지게 하는 좋은 마을이야."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그럼 우리가 야만족들처럼 천막이나 치고 살아야겠어요?“

    "휴, 그것 참. 나도 벌써 지붕 있는 집에 익숙해져버린 건가."

   헤베티카는 두 사람을 돌아보며 앉으라고 손짓했다. 앉자마자 가장 먼저 말문을 연 것은 뜻밖에도 이솔렛이었다.

   “당신은, 님 반도의 야만족이군요?”

   "야만족? 나는 캄자크야. 너희들이 야만인이라고 부르는 우리들은 스스로를 원종족이라고 부르지. 캄자크는 그 중에서 가장 위대한 부족이고 나는 그들의 아들이다. "

   헤베티카가 두 손을 좌우로 들어올리며 어깨를 으쓱하더니 말했다.

    "어쨌든 같은 얘기라고요."

   그러나 이솔렛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캄자크 족이었군요. 정확히 모르고 있어서 미안해요. 난 이솔렛이에요. 그냥 떠도는 사람이죠."

    보리스는 이솔렛이 이렇듯 먼저 자신을 소개하며 상대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을 본 일이 없었다. 그러나 어쨌거나 자신도 소개해야 할 것 같아 입을 열었다.

    “보리스 산입니다."

    그새 부담스러워진 미스트리에라는 이름은 묻어놓고 다시 ‘산’ 이라는 성을 쓰게 된 보리스였다.

    “난 이자크.... 그런데 헤베, 내 성이 뭐였더라?”

    "듀카스텔이었죠. 하지만 있으나 없으나 그게 그거 아닌가요? 직접 만들어 붙인 성이 뭐 대수라고."

    보리스가 픽 웃고 말았다. 나우플리온이 헤베티카의 성을 멋대로 만들어 붙이던 생각이 떠올라서였다.

     "아니, 이젠 중요해. 산스루에 돌아가면 다들 날 그 이름으로 알고 있거든. 내가 내 이름조차 못 알아들어서는 곤란하지."

   "아아, 다시 돌아가긴 할 생각인가 보네요?“

   "글쎄, 그건 잘 모르겠네,"

   "거기 아름다운 부인이 기다리고 있다고 안 했어요?“

   "아름다운 부인도 있고, 아름다운 집과 제단과 그릇들도 있지. 밤낮으로 그것들을 보고 절해야 해. 정말 지겨운 거라고. 그걸 다시 해도 좋을지 요즘 생각중이야."

   헤베티카는 이자크의 말이 허풍으로 느껴지는 듯 별로 믿는 눈치가 아니었다. 어쨌거나 그녀는 두 사람을 돌아보며 말했다.

    "보리스, 예전에 들은 기억이 날지 모르겠지만 내 오빠예요. 아아, 물론 난 야만족이 아니라고요. 우린 배가 다르니까. 단지 아버지만 같지요."

   그제야 보리스도 생각이 났다. 나우플리온이 이곳에 왔을 때 헤베티카에게 ‘당신 이복오빠가..'라고 말을 꺼낸 일이 분명 있었다. 그때 헤베티카는 발끈하며 오빠의 행방을 물었고 나우플리온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 사람이 아마도 이 자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이 이자크라는 자는 이솔렛을 잠시 쳐다보더니 말했다.

    "아가씨는 싸우는 사람이군. 또는 싸우는 사람의 딸이군. 렘므 놈들중에서 이런 사람을 보기는 힘든데."

    "전 렘므 사람은 아니에요. 그냥 떠돌아다닐 뿐이죠. 그러나 그 말이 옳고, 또한 같은 말을 되돌려 드릴 수 있겠네요. 당신은 싸우는 사람이거나, 또는 싸우는 사람의 아들이로군요."

    "그래 그래. 하지만 하나는 틀려. 내 아버진 대장장이야."

   헤베티카가 무슨 소리냐는 듯 입을 열었다.

   "오빠, 아버지는 캄자크의 족장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어째서 대장장이라는 거죠?“

   "족장이지만 대장장이야. 그 두 가지가 모두 아버지야."

   이자크라는 사내의 말투는 단순하지만 담백했고, 상대방의 반응을 계산한 흔적이 전혀 없어 보리스의 마음에 들었다.

   "오빠, 이실더 산이라는사람이 여길 거쳐갔다고 말한 일이 있죠? 그때 같이 있던 소년이 바로 여기 이 사람이에요. 뭐, 지금은 소년이라기보다는 젊은이가 됐군요. 소식 물어볼 거라도 있으면 물어봐요."

   이자크는 입을 벌려 웃으며 말했다.

   "오, 자네들이 이실더를 알아? 그는 좋은 친구였지. 난 그와 같이 볼민가 강의 붉은 물고기를 전부 잡았어. 물론 물고기는 내년에 또 왔지만 말이야. 우린 붉은 물고기가 알을 낳을 때까지 기다렸거든. 그래야 내년에 또 잡을 수 있으니까, 그는 나보다 더 작살질을 잘 했지. 나는 그보다 주먹질을 더 잘 했고 말이야. 우린 좋은 친구가 될 뻔했는데 그는 너무 바빠서 다른 곳으로 가고 말았어. 그가 보고 싶군. 그는 어디에 있나? 죽지는 않았나?“ 

    보리스는 눈을 둥그렇게 떴다가 이솔렛을 보며 잠시 머뭇거렸다. 나우플리온이 어디에 있는지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자 이솔렛이 보리스 대신 입을 열었다.

    “그 분은 지금 혼자서 여러 곳을 떠돌고 계십니다. 저희는 곧 그 분께 돌아갈 것이며 그 때에는 그 분도 조금쯤 웃을 수 있겠지요."

2. 원하는 것, 원할 수 없는 것, 원해선 안 되는 것 

   "그 사람, 평생을 전투로 산사람이었어, 그러면서도 저토록 고뇌한 점 없는 얼굴이라는 것이 놀라웠어."

   밤 공기 속으로 퍼져나가는 입김은 담배 연기 같기도 했다. 잠들기전 잠시 나온 산책이었다. 마을 아래로 내려가는 비탈길이 어렴풋이 보이는 곳에서 보리스와 이솔렛은 나란히 턱을 괴고 앉아 있었다. 보리스는 등의 상처가 점점 더 쑤시기 시작한다고 생각했지만 이솔렛에게 말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당신이 그에게 먼저 자신을 소개했군요? 일종의.... 동족을 알아본다는, 그런 것인가요?“

    "글쎄, 그보다도 그가 조금 부럽구나. 30년도 넘게 산 그 사람보다 20년도 못 산 내가 더 번뇌가 많은 것 같으니. 같은 전사의 길을 걷는 사람으로서 부끄럽다고 할까."

   "번뇌라, 당신의 번뇌는 도대체 뭐죠?“

   이솔렛은 대답 없이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 몇 개만이 박힌 흐린 하늘이었다.

   보리스는 이솔렛의 옆얼굴을 보며 이번만은 대답을 듣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미 오래 전부터 조금씩 생각해오던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그 어느 쪽에게도 물을 수 없었던 것이었다.

   "이솔렛, 당신은 나우.... 이실더 님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거죠?“

   이솔렛은 조금 더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대답했다.

   “말하고 싶지 않은 일이야."

   “나의 몰이해가 당신에게는 중요하지 않나요?”

   말하고 나서 갑자기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 것이 그녀에게 중요한지 안 중요한지, 누가 알 수 있단 말인가? 그녀가 자신에게 이해 받고 싶어할까?

   다행히 밤이라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너의 몰이해......” 

   그렇게 뇌까린 후 다시 오랫동안 침묵이 흘렀다. 이솔렛이 입을 열었을 때, 보리스는 자신의 뺨을 감싸쥔 채 땅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의 몰이해, 너의 오해를 말해 봐"

   "예전에 이실더 님은 당신이 그 분을 싫어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내게 말해준 일이 있었죠. 그 이야기 속에는 약간 이해가 가지 않는 점들이 있었어요. 그리고 당신도 똑같은 사건에 대해 말한 일이 있죠..... 그때 당신이 한 말을 기억하고 있어요. ‘그런 어이없는 소리 

가 믿어지느냐‘ 라고 했죠."

   보리스는 숙였던 고개를 들며 손을 뺨에서 뗐다. 밤 공기가 뺨에 시원하게 와 닿았다.

    "그리고 그 사건이 있기 전까진 두 사람의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고도 말했죠. 일단은 이해할 수 있어요. 그런 일, 쉽게 잊혀지는 것은 아닐 테니까, 그렇지만 끝내 이해할 수 없는 건.....“

   보리스는 이솔렛에게 고개를 돌렸다.

   “바로 당신의 혼란스러운 태도예요. 오늘 일도 그랬고, 그 전에도 죽.... 난 아무래도 당신이 그를 미워한다고는 못 믿겠어요. 그러나 용서했다고도 생각되지 않죠. 당신과 그 분 사이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요? 내가 짐작할 수 없는 특별한 비밀이 두 사람 사이에 있는 것만 같아요."

   이솔렛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 보리스는 짤막한 한숨을 내쉬며 말을 맺었다.

   "그리고 당신한테 이런 질문을 할 자격이 내게 있기나 한 건지, 그 것도 모르겠군요."

   밤이 깊어지자 별들이 비로소 깨끗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하늘은 점차 개이고 있었다.

   “자격 같은 말은 그만둬. 그런 문제 때문에 말하지 않은 것이 아니야."

   늘 듣던 단정한 목소리와는 어딘가 달랐다. 어딘가 모르게 살짝 젖은 듯한 음성이었다.

   "일부러 숨기려 애쓴 것도 아니었어. 그 화제가 싫었던 것뿐이지. 아니, 실은 그런 화제를 입에 올리는 나 자신을 상상하기 싫었어. 왜냐하면.... 그건 너무 어리석은 이야기니까. 다시는 고칠 수 없는 망가진 집처럼, 그냥 내버려 둔 거야. 비바람에 깎이고 쓸려 언젠가는 먼 

지로 변해버리길 바라면서. 하지만 그렇게 되기엔 내가 살아온 생애가 너무 짧았지 ."

    보리스는 말없이 기다렸다. 끼여들지 않는 편이 좋다는 것을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것, 정말 인정하기 싫지만, 네가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 이미 다 알고 있었지만,"

    갑자기 이솔렛의 목소리가 차갑고 분명해졌다. 일부러 그렇게 말하려 애쓰는 것 같았다.

    "그게 너라서, 더 이야기하기 싫었어."

    갑자기 자신이 이솔렛에게 무슨 고통을 주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보리스는 이솔렛의 팔을 잡으며 머리를 저었다.

    “하고 싶지 않은 말이라면 듣지 않겠어요. 듣지 않아도 상관없어요."

    "아냐. 우스운 거지. 이젠 그게 너이기에 꼭 해야겠어."

    이솔렛이 고개를 돌려 보리스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어둠속이었지만 눈동자가 선명하게 빛나는 것이 느껴졌다. 

     "이실더 님, 아니 나우플리온 님과 나는, 오래 전에, 내가 열 살이었을 때,"

     짧은 침묵이 한없이 길게 느껴지고, 드디어 대답이 울렸다. 

     "약혼했었고, 파혼했어."

     “......”

   이런 기분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갑자기 목구멍 속에서 뭔가 솟아오르는 듯하더니 다시 서서히 가라앉았다. 이 말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 더 생각해 봐야 할까? 그랬다면, 지금은?

    “보리스. 나를 봐."

정신을 차려보니 저도 모르게 시선을 떨구었던 모양이었다. 이솔렛은 조금의 변화도 없는 진지한 표정 그대로 그를 보고 있었다.

    “네가 나를 존중한다면, 이미 시작한 이 이야기를 끝까지 진지하게 들어 줘. 아무 것도 모르든지 모조리 다 알든지 둘 중의 하나야. 이미 너는 알기 시작했으니까 여기서 고개 돌리지 마. 제발."

    그 목소리가 흔들리지 않고 조용했음에도 보리스는 그 너머의 감정을 조금 엿본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보리스는 다시 이솔렛을 바라보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약혼은 단 하루뿐이었어. 그러니까 이렇게 시작된거지.... "

   이솔렛이 열 살, 나우플리온이 스물세 살일 때의 일이라 했다. 당시 두사람은 오누이처럼 친한 사이였고, 이 일을 처음 생각해 낸 것은 이솔렛의 아버지인 일리오스 사제였다.

   보리스가 알고 있다시피 나우플리온은 고아였고 데스포이나 사제의 부모가 거두어 길렀다. 어려서 많이 고생한 까닭에 오랫동안 말 안듣는 망나니였던 그는 이솔렛이 전에 말한 일이 있는 늙은 선생으로부터 티그리스를 배우기 시작하면서부터 마음을 잡았고, 덕택에 선량하고 솔직한 성품을 지닐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스승이 잘 가르친 것은 심성뿐이었고, 늙은 선생 자신이 별 실력이 없는 터라 검술에 진전이 많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눈 좋은 일리오스 사제는 처음부터 소년 나우플리온의 실력을 꿰뚫어보고 있었지만 그가 멋대로 티그리스에 뛰어들어 버린 터라 오랫동안 모르는 체 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일리오스는 나우플리온의 재능을 탐낼 수 밖에 없었는데, 그가 미리 거둔 제자 두 명이 티엘라의 벽에 부딪쳐 더 발전이 없게된 후에는 도저히 돌파구를 찾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일리오스는 어린 시절 악랄한 스승 아래에서 오랫동안 고생만 하고 덕은 전혀 보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자신만은 소질 있는 제자를 거둬 정성스럽게 가르치겠다는 의지도 매우 강했다.

   이미 티그리스를 배우기 시작한 사람을 빼내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다만 티그리스를 가르치는 스승이 형편 없었고, 또 너무 늙은 데다 정신마저 오락가락하기 시작한 터라 그 아래 있는 것이 장래성이 없다는 것만은 누가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일리오스는 이 문제를 데스포이나와 상의했고, 늘 나우플리온의 장래를 걱정하고 있던 데스포이나는 어느 모로 보나 그 늙은 선생보다는 일리오스가 훨씬 낫다고 생각해서 그의 계획에 찬성했다.

   일단은 약혼이었다. 정식 혼례는 이솔렛이 열 다섯쯤 된 후에 치르자고 했다. 나이 차가 지나치게 컸기에 부담스러운 약혼이었지만 놓치기에는 자리가 너무 좋았고, 더구나 나우플리온이 달리 혼처를 얻기엔 여의치 않은 입장이었기에 데스포이나는 매우 열심이었던 모양 

이었다. 그리고 섬에서는 이런 식으로 나이 차이가 큰 결혼도 비교적 빈번히 행해지는 편이었다. 다만 이 정도로 차이가 큰 결혼은 전례가 드물었고, 또 결혼 당사자가 검의 사제의 어린 딸이었기에 이 소식은 꽤 섬을 떠들썩하게 했다.

   문제는 당사자들의 마음이었는데, 이솔렛은 너무 어린데다 나우플리온을 오빠처럼 따랐기에 약혼이 뭔지도 모르고 수긍해버렸고, 나우플리온은 처음엔 매우 당황했으나 데스포이나가 오랫동안 설득한 끝에 결국에는 동의하게 되었다. 그때 그가 무슨 마음으로 이런 약혼에 동의했는지는 잘 알 수 없지만 결정적으로 나우플리온 역시 이솔렛을 싫어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그것이 사랑이었는지, 아니면 이후에라도 사랑인 일이 있었는지 이솔렛은 아직도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약혼식이 행해졌고, 문제는 다음날 아침에 벌어졌다.

   일리오스 사제는 나우플리온이 이솔렛과 약혼을 하게 되면 당연히 자신의 문하로 들어오리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우플리온은 순진하게도 이 일과 그 일은 완전히 별개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어쩌다 보니 약혼이 끝날 때까지 이 문제는 서로의 입으로 확인되지 못하다가 공교롭게도 다음날 아침에 터져 나오게 되었다. 나우플리온이 완강하게 고개를 저으며 자신의 선생을 버릴 수 없다고 말했던 것이다.

   데스포이나가 붙들고 사정을 해도, 심지어 그 티그리스 선생조차 그 쪽이 더 나으니 가라고 말했는데도 통하지 않았다. 일리오스 사제와 이솔렛을 위해 뭐든 할 수 있지만 늙고 병든 스승을 버리는 일만은 할 수 없다고, 그리고 스승이 죽은 후에도 그가 가르친 티그리스를 버릴 수는 없다고 말하는 데서야 타협의 여지가 있을 수 없었다.

   진퇴양난에 빠진 일리오스가 높은 자존심을 꺾고 몇 번이나 설득하려 애썼지만 소용이 없자, 결국 감정이 폭발하고 말았다. 그는 전날 있었던 약혼식을 모조리 없었던 것으로 하겠다고 선언해 버린 뒤, 나우플리온에게 자신은 물론 이솔렛 앞에도 다시는 나타나지 말라고 잘라 말하고서 딸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 버렸다. 일리오스의 분노와 실망이 얼마나 심했는지 그는 며칠만에 산기슭에 새 집을 지어 거처조차도 옮겨버렸고, 데스포이나도 그 해가 가기 전까지는 일리오스를 찾아갈 엄두를 못 냈을 정도였다. 그 산기슭의 집이 지금 이솔렛이 살고 있는 집이었다.

    "아버진 그 일이 대단한 모욕이고, 큰 수모를 당했다고 느끼셨던 것 같아, 그리고 공개적으로 약혼을 했다가 하루만에 파혼을 했으니 내 장래에도 오점을 남기게 뒀다고 생각해서 몹시 상심하셨지. 난 아버지가 측은한 나머지 그 분의 말씀을 어기고 나우플리온을 만나볼 생각 따위는 하지도 않았고, 그래서 그가 그때 어떤 상태였는지는 모르겠어."

    지금 이솔렛은 나우플리온을 존칭 없이 이름만으로 불렀고, 그것이 너무나 자연스러워서 보리스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지금까지 늘 '사제님' 이라고 높여 부른 것은 일부러 거리를 두기 위해 그런 것이고 지금이야말로 본래의 감정에 가까운 것이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그 후로 우린 언제 친하게 지냈었냐는 듯 지독히 불편한 관계가 되어버렸어. 그리고 그 해 여름, 너도 아는 그 사건 . 그 일로 난 아버지를 잃었고, 그로부터 그와 나 사이엔 도저히 허물 수 없는 벽이 세워졌어. 그대로 지금까지야."

     이솔렛은 입을 오므렸다가 자신이 무슨 얼굴을 하고 있을까 궁금해하는 사람처럼 시선을 불안하게 움직였다. 그러나 그녀는 곧 평정을 되찾고 나지막이 말했다.

    “자, 그게 내 이야기야. 내 관점으로 본, 내가 할 수 있는 이야기의 전부야. 그 때 내가그를 믿지 않는다고 한 말은 다분히 감정적인 것이었지만, 너 역시 느꼈다고 말했듯 당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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