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5권. 2장. Risky Part (14/21)

2장. Risky Part

1. 이름들을 위하여 

   “오늘, 트레비조 땅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다음 달 중으로 드라켄즈 산맥(Drakens Mts.)을 따라 올라가 로젠버그 관문까지 갈 수 있을 것 같다는군요."

   트라바체스의 수도 론의 통령 관저에서도 가장 깊숙한 곳에 있는 방이었다. 칸 통령은 팔걸이 의자에 앉은 채 반쯤 졸기라도 하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나 오랜 경험을 통해 졸기는커녕, 가장 기민하게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저런 모습이 된다는 것을 통령의 마법사인 종그날은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연락이 좀 늦었습니다. 각하의 1익답지 않게요."

    "그렇지. 그럴지도 모르지.“

    "렘므에서 소년의 흔적을 놓친 후로 벌써 상당한 시간이 흘렀습니다. 물론 그들이 노력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래, 그럴지도 몰라."

  종그랄의 말대로 실로 ‘류스노답지’ 않았다. 칸 통령이 류스노 덴에게 일을 맡겨 이토록 오래 걸린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전적들을 생각한다면 이미 소년의 목을 세 번은 가져오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그러나 어쨌든 2익과 3익을 부른 것을 보면 무언가 냄새를 맡긴했나 봅니다. 이번에는 성과가 있기를 바랍니다. 산스루리아에서 다시 렘므 북부까지, 그리고 이제는 다시 남쪽으로 내려오고 있는 모양이더군요."

   칸 통령의 ‘네 날개'는 론 밖으로 나갈 경우 대마법사 종그날과 언제든지 연락할 수 있도록 정신 감응 마법이 깃들인 물품들을 지니고 다녔다. 떠난 지 열흘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 카투나 산맥의 험로를 넘어 트레비조에 도착한 마리노프와 톤다로부터 1차 연락이 온것이 그 날 저녁이었다. 그러나 종그날은 보고가 끝났는데도 나가지 않고 잠시 칸 통령의 눈치를 살폈다.

   예상대로 곧 통령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모양이군. 윈터러의 힘에 대한 연구에 새로운 진척이라도 있나?”

   "별 진척이랄 것은 없지만, 이런 기록이 입수되었습니다."

   종그날은 칸 통령 앞에서 보고할 때 별 것 아닌 것처럼 말을 꺼내는 버릇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주인이 기대했다가 실망하는 걸 극히 싫어하는 성격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통령의 손으로 양피지 조각 비슷한 것이 넘겨졌다. 귀퉁이가 심하게 훼손된 그것은 어느 책에서 찢어낸 책장처럼 보였다.

   칸 통령은 한참 동안 그것을 되풀이해서 읽었다. 종그날은 완연한 봄이 된 5월의 창 밖을 내다보며 블라도 진네만의 어린 딸에 대한 일을 떠올리고 있었다.

   요즈음 그는 그 꼬마 때문에 별 용건도 없이 진네만 저택을 종종 드나들고 있었다. 놀랍게도 어린 예니 진네만은 평생 연애도 결혼도 해본 일이 없는 늙은 마법사의 마음을 첫눈에 사로잡아 버렸던 것이다.

 진네만 저택의 뒤뜰에서 갸우뚱거리며 걷다가 뛰다가 하는 노란 치마의 꼬마 아가씨는 우중충한 저택 머리에 내린 햇빛 같은 존재였다. 그것도 초봄의 어리고 노란 햇빛.

    예니는 사람을 잘 따랐다. 처음 보는 음침한 마법사 노인한테 까르륵 웃으며 달려와 안긴 것이 첫 시작이었다. 낯선 사람이 준 과자도 오물오물 맛있게 먹는 것을 보고 '유괴 당하기 딱 좋은 꼬마'라고 말하긴 했지만 실제로는 꼬마의 애정 깊음이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었다. 그게 애정 깊음이 아니라 단순히 낯을 가리지 않는 것뿐일지 모르지만 이미 그런 것은 중요한 사실이 아니었다.

    음울한 집 주인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천사 같은 예니를 보려고 진네만 저택을 종종 드나들고 있다는 것은 이미 론의 상류층 사이에 잘 알려진 이야기였다. 그 가운데 통령의 대마법사 종그날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도 이미 한참 전에 화제가 된 후였다.

   통령이 드디어 양피지 조각에서 고개를 들어 종그날을 불렀을 때, 그는 일말의 아쉬움까지 느끼며 창가에서 시선을 거뒀다.

   "이 이야기가 맞는다면 윈터바텀 킷(Winterbottom Kit)은 가나폴의 물건이라는 건가?“

   "조금 다릅니다. 필멸의 땅(Mortal land)의 물건은 맞겠지만 가나폴리의 물건이라는 것은 확신할 수 없는 문제겠지요. 그렇게 보기에는 현존하는 문헌 가운데 윈터바텀 킷이 등장하는 연대가 너무 늦습니다. 그 동안 다른 곳에 감춰져 있었다고 보기도 힘들고요. 짐작컨대 

윈터바텀 킷의 첫 주인이었던 자는 필멸의 땅에 직접 뛰어들어 모험을 겪은 끝에 이 무구를 손에 넣은 것 같습니다. "

   "놀랄 만한 일이로군. 그러면 가나폴리가 멸망한 후에도 그곳에서 무언가가 활동하고 있었다는 건가?“

   "그게 아니라면 가나폴리가 멸망한 후 그곳에서 오랫동안 발견되지 않고 있었다고 말하는 방법밖엔 없겠지요. 그러나 그렇게 보러면 가나폴리 사람들도 그 무구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증거가 있어야 할 텐데, 이 또한 그렇지가 못합니다. 가나폴리의 옛 문서가 많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그래도 위대한 무구들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 있는 페이지는 많습니다. 그러나 어느 행간에서도 윈터바텀 킷이라는 이름, 또는 그 비슷한 무구의 존재조차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혹시 가나폴리에는 그보다 훌륭한 무구가 많이 있어서 이 정도는 기록에 남지도 않은 것 아닌가?“

   "아니,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기록에 남은 무구들에 대해 살펴보았을 때 이 정도의 물건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손에 꼽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윈터바텀 킷은 가나폴리가 멸망한 후 긴 세월이 흐른 끝에 갑작스레 필멸의 땅에서 솟아나기라도 했단 말인가? 현재 대륙의 인간 가운데 필멸의 땅에서 살아갈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누구도 만들지 않았고, 누구도 가져온 일이 없는 무구가 어째서 그 땅에 놓여 있을 수 있단 말인가?“

   "그것이 바로 저의 의문입니다. 정말로 땅에서 솟아나거나, 하늘에서 떨어지기라도 한 게 아닌가 싶은 기분입니다."

   창 밖에서 5월의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비가 그칠 생각을 안 하네요."

   대륙에서는 섬의 이름을 쓸 수 없기에 상륙하고부터 '보리스 산‘ 이라는 이름을 쓰고 있는 소년은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곧 눈을 비비며 빗물을 떨어냈다. 늦은 봄비는 따뜻했지만 오래 맞고 있으니 체온이 서서히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멀지 않은 곳에 있을 텐데......“ 

   본명이 아니라는, 억지에 가까운 이유로 이솔렛이라는 이름을 그대로 쓰고 있는 소녀는 흘러내리는 앞머리를 계속 쓸어 올리며 걸음을 빨리 했다. 그러나 발목 언저리에서 거치적거리는 풀들이 자꾸만 거슬렸다. 누군가가 긴 여행에는 부츠를 신는 편이 좋다고 말해 주었지만 익숙하지 않은 터라 거절했던 것이다. 잡목이 적은 섬의 산지에서는 불편한 줄 몰랐던 짤막한 양가죽 신이 었다.

   "일단 숲부터 벗어나고 보지요. 이 일대에 워락 마을이 드문 편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 정도 크기의 숲 근처에는 하나씩 있는 편이거든요."

   하긴, 오랫동안 여행했던 그 나라였다. 가보지 않은 길이라 해도 처음 대륙에 발 딛는 사람보다는 여러 모로 나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나라가 아니라 해도 낯선 땅을 방랑한 경험이 많은 보리스는 돌발 상황에서 판단이 빨랐다. 다만 렘므에서 봄을 맞는 것만은 그도 처음이었다.

   "저기서 잠시 비를 피할까?“

   기울어진 바위가 얕은 동굴을 만들고 있는 곳이 있었다. 둘은 그곳으로 가서 겨우 비를 피할 정도로만 들어가 앉았다. 사실 더 깊이 들어갈수도 없었다. 흡사 남의 집 처마 밑에 앉은 기분이었다.

   "저기, 신발 좀 벗어도 돼요?“

   보리스의 난데없는 질문에 이솔렛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무심코 끄덕였다. 그러나 곧 이유를 알게 되었다. 쾌 오랫동안 걸었고 한참 전부터 비까지 맞은 터라 벗은 발에서 좋은 냄새가 날 리 없었다. 

    “당신도 벗어요. 발이 오래 젖어 있으면 안 좋아."

    “우리 서로를 위해 등을 돌리고 앉는 게 어때?”

    “그럴까요?”

   돌아앉아 신발을 벗은 다음 거꾸로 들어올리니 물이 주르륵 떨어졌다. 보리스는 부츠목을 수건 짜듯 비틀며 물을 빼고 있었다. 갑자기 이솔렛이 푸훗,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뭐가 재미있어요?“

    "아니, 재미없어서 웃었어."

    “재미없는데 왜 웃어요?”

    "그럼 넌 이 재미없는 상황이 안웃기니?“

   이솔렛은 젖은 신발을 내려놓고 발을 빗속으로 죽 뻗었다. 살갗보다 더 흰 맨발 위로 빗방울이 퉁겨 오르며 부서지는 게 보였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으니 빗소리는 때로 사각거리고, 재재거리고, 종종거리며 사방을 둘러쌌다. 풀잎들이 쉴 새 없이 흔들렸고, 빗대 사이로 바람이 불어왔다.

   젖은 옷 때문에 신경 쓰이지만 않았더라면 좀더 시원한 기분을 느꼈을 터였다. 게다가 얼굴이 마르기 시작하면서 여기저기 당기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리스는 편안한 기분이었다. 섬으로 가기 전 '이실더 산’과 함께 다니던 시절의 행복과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문득 돌아보니 이솔렛의 턱에 빗물 한 방울이 맺혀 떨어지려 하는 것이 보였다. 잎새에 맺힌 이슬처럼 맑은 물빛이었다. 그 안에는 자신 

의 눈동자가 있었고, 비에 젖은 숲이 있었고, 더 먼 한 조각 하늘이 비쳐...... 

   아, 떨어졌다.

   “7월까지는 두 달 정도 남았으니까 아직 시간은 충분하겠지?”

   혼자 중얼거린 이솔렛이 뒤쪽의 바위를 더듬어 본 다음 조심스레 등을 기대는 것이 보였다.

   함께 다녀 보니 그녀는 보기보다 상당히 신중한 성격이었다. 나이에 비해 지식의 수준이 헤아릴 수 없이 깊은데도, 필요한 때가 아니라면 괜스레 말을 꺼내는 법이 없었다. 대륙에 대해서 읽고 들은 것이 많았지만 직접 경험이 없다는 것을 스스로 잘 알고 있어서 곤란한 상황이 닥쳤을 때 먼저 의견을 내세우지도 않았다. 보리스가 상황을 설명하고 의견을 물으면 좀 생각한 끝에 입을 열었고, 그럴 때마다 본질을 정확히 꿰뚫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면서도 또한 섣불리 자신을 낮추지 않았다. 그녀 자신은 스스로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의 딸이었다. 예의를 지키는 것과 긍지를 버리는 것은 이야기가 달랐다.

   여행은, 당연한 일이지만 서로가 알지 못했던 모습들을 많이 보여주었다. 보리스는 자신이 그녀에게 조언하고 도울 수 있다는 것이 즐거웠다. 섬에서는 늘 스승이었던 이솔렛도 그것을 불쾌해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모르는 것을 접하면 즉시 배우려는 자세가 되었다.

함께 있어 보니 그녀가 어린 나이에 왜 그렇게 많은 지식들을 흡수할 수 있었는지 알 것 같은 느낌이었다.

   “너무 일찍 도착해도 문제예요. 가서 그들과 마주치면 뭐라고 말하죠?”

   “맞춰서 간다 해도 어차피 마주치겠지. 말하지 못할 문제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말했지만 절벽에서 마법의 흔적을 찾아냈던 이솔렛은 이미 에키온이 한 짓에 대해 모두 알고 있었다. 다만 나우플리온으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모든 일을 불문에 붙이기로 합의한 것이었다. 헥토르가 거기에 얼마나 연관되어 있는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만난다 

면 확실히 서먹하긴 할 것이다. 그 모든 일은 보리스를 실버스컬에 나가지 못하게 하려고 벌인 것임에 틀림없으니까.

   "간다 해도 잘 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여기까지 같이 와준 당신이나 이실더 님을 실망시켜서는 안될 텐데 말이죠."

   일단 섬을 나온 후에는 주위에 낯선 사람이 없다 해도 나우플리온이라는 이름 대신 대륙에서 쓰는 이름을 말해야 했다.

   "부담 가질 것 없어. 어차피 쉬운 일은 아니야. 최선을 다하지 못할까봐 걱정할 뿐, 그 밖의 문제는 논외의 것이지."

   이솔렛이 말하는 방식을 알고 있는 보리스는 그냥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곧 말했다.

    "이솔렛의 아버지는 정말로 대단한 사람이었나 봐요. 나 말이죠, 가끔은 그 분을 위해서 이기고 싶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한다면 당신이 기뻐하지 않겠어요?“

   “.......”

   이솔렛은 얼른 대답하지 않았다. 문득 지난 겨울밤에 찾아온 소년과 나눈 대화가 떠올랐다. 그녀는분명 거절했던 것이다. 거절한 채로, 그의 곁을 떠나지도 않고 있는 것이다. 자신도 자신의 마음을 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몇 번이고 생각해 봤지만 받아들이는 것도, 떠나 

는 것도 선택할 수가 없었다.

   조금 있자니 보리스가 다시 말했다.

   "부담 가질 거 없어요. 헥토르가 검의 사제가 되려고 그 분의 명성에 어떻게든 기대보려 애쓰는 것은 당신에게 정말로 불쾌한 일이겠죠. 나는 그런 짓을 막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족해요. 물론 열심히 해야겠지만......“ 

   말끝을 흐리는데 갑자기 이솔렛이 분명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보리스, 네가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내 부탁 한 가지만 들어주겠어?”

   둘은 얼굴을 마주보았다. 길쭉하게 튀어나온 암반 아래, 비를 피해 앉은 소년과 소녀가 서로를 보고 있었다. 입김이 하얗게 서렸다가 스러졌다.

   "제가 들어드릴 수 있는 것이길 바래요. 진심으로."

   이솔렛은 짧게 미소했다.

   "아버지가 실버스컬에 나갔을 때 사용했던 가명이 있어. 대회에서 그 이름을, 아니 성만이라도 사용해 줄 수 있겠어?“

   “아......”

   보리스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동시에 나우플리온의 일도 떠올랐던 것이다. 그가 대륙에 나와 굳이 ‘산’ 이라는 성을 사용한 것도 그의 뒤를 잇고 있음을 스스로 기억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산’ 이라는 성을 사용한다면 누가 보아도 렘므 사람이라고 생각할 터이니 그것도 약간은 문제였다. 국적이 불분명한 이름을 사용해야 같은 국적인 사람의 눈길을 끌어 의심받는 것을 방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 분은 무슨 이름을 사용하셨지요?“

   “카민 미스트리에."

   확실히 국적 불명의 이름이었다. 이름은 아노마라드 북부 사람 같은데 성은 오를란느(Orlanne) 사람 같고, 억지로 끌어다 붙인다면 렘므 사람이라고 우길 수도 있는 이름이었다.

   “하지만 제가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한다면 오히려 그 이름에 누가 될지도 몰라요. 옛 일이지만 혹시라도 기억하는 사람이 있다면......” 

    "실버스컬이 최초로 시작된 루그란 성에 가면 실버스컬 우승자들의 이름이 중앙 홀의 동판에 새겨져 있다고 하지. 하지만 이번 개최지는 아노마라드야. 그리고 난 네가 모든 이름들을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을 믿어. 그게 내 아버지의 이름이었든, 네 스승의 이름이었든, 또는 너 자신의 이름이었든. 우승은 중요하지 않아."

    “하지만 우승은 중요해요. 아니, 적어도 결승까지는 가야 해요. 만일 운이 없다면. 그때까지 헥토르 녀석과 한 번도 만나지 못할 수도 있잖아요. 내가 만일 이솔렛 아버지의 이름을 빌린다면 그 녀석을 반드시 이겨야 되는 거죠. 그래야 빌린 값을 하게 되니까"

    비가 서서히 멎는 것이 느껴졌다. 똑, 똑, 빗방울 소리가 하나하나 선명하게 들렸다.

    "이름이란.... 내킨다고 멋대로 빌릴 수 있는 것은 아닌 거죠. 헥토르가 그 이름을 빌릴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 그보다 좋은 방법은 달리 없잖겠어요?“

    이솔렛은 맨발로 일어서서 비 그친 숲으로 나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보리스가 말했다.

   “보리스, 미스트리에라는 이름을 쓰도록 하죠."

   그리고 그 이름에 맞는 승리를 이루는 것은 나우플리온의 검이 될 것이었다.

   “......”

   그 말을 들은 듯 했으나 이솔렛은 무언가 기척을 느낀 듯 두 손을 등 뒤로 가져갔다. 검자루를 쥐었다. 그녀의 민감한 귀를 아는 보리스도 벌떡 일어났다.

   “너희들은 누구냐! 여기는 디캄 영주의 땅이다!"

   수풀 뒤에서 한 사람이 나타나더니 곧 십여 명의 병사가 그들을 보며 분분히 검을 뽑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보리스는 검을 뽑기 전에 잠시 기다렸다.

   "좋은 나무군요. 여기서 기다릴까요?“

   칸 통령의 4익, 유리히 프레단은 유쾌한 어조로 말하며 가지를 잡고 나무 위로 몸을 솟구쳐 올렸다. 순식간에 5미터 높이로 올라가서는 굵은 가지 위에 편안히 자리를 잡았다.

   “형님은 거기 계실 거요?” 

   류스노 덴은 나무를 올려다본 다음 손을 내저으며 그대로 나무 둥치에 몸을 기댔다. 그리 오래 기다릴 필요도 없었고, 매복할 필요는 더더욱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점잖게 기다릴 심산이었다.

   어찌된 셈인지 동행하던 야만족 사내는 사라지고 없었다. 유리히는 마침 그 일을 생각해 낸 듯 짧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이렇게 속이 시원할 수가 없네."

   정말로 긴 시간이었다. 산스루리아에서 렘므 꼭대기 님 반도까지, 지겹고도 고통스런 여행이었다. 그들이 드디어 이자크 듀카스텔과 헤어질 수 있었던 것은 렘므의 야만족인 캄자크 부락까지 가서 마지막 정보를 손에 넣은 후였다. 고생한 값은 하는 정보였다. 렘므의 북해 건너에 인간이 사는 섬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야만족들은 그 섬이 아주 멀며, 그 섬에서 온 사람이 아니면 물길을 몰라 도저히 접근할 수 없는 곳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한 가지뿐이었다. 포기라고는 모르는 이들은 보리스와 그의 보호자가 배를 사서 출발했으리라고 생각되는 엘베 섬과 화이트 크리스탈제도 전체에 첩자들을 사서 연락망을 이어 놓았다. 또한 해안 마을들을 돌며 낯선 소년이 바다 건너에서 배를 타고 돌아올 경우 즉각 알려달라고 요청한 뒤 상당액의 금화를 뿌려 놓았다.

    그런 후에는 지루한 기다림이었다. 낚싯줄을 드리워 놓고 몇 시간이고 기다리는 낚시꾼의 자세로 그렇게 꾸준히 기다리는 것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너무 돈을 많이 뿌렸는지 가끔 관계도 없는 정보를 가져와 귀찮게 구는 사람들만 빼면 문제없이 흘러간 나날이었다. 

    사실, 잘 기다린 것은 인내심 깊은 류스노뿐이었다. 유리히는 한 달도 가기 전에 짜증을 냈으며 어떻게든 다른 방법을 찾아내려고 좌충우돌했고, 결국 실패했다. 그리하여 드디어 학수고대하던 정보가 들어오자마자 류스노에게 말도 않고 당장 튀어나간 것도 그였다.

   한 척의 배에 어른 둘과 소년 셋이 타고 있다는 정보였다. 혼자서 어떻게 하기에는 많은 숫자였지만 유리히는 자신만만했다. 이자크가 영문도 모르고 도와주겠다고 자청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혼자갔던 그는 결국 엉뚱한 낭꽤를 당했다. 단숨에 두 어른을 제압하고 소 

년 하나를 잡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멋대로 따라온 이자크가 갑자기 죄 없는 사람들 같은데 놓아주자고 나섰던 것이다.

   생각하면 울화가 치미는 일이었지만, 유리히는 혼자 이자크를 이길 자신이 없었다. 유리히가 지닌 기술은 대부분 뜻밖의 기습에 집중되어 있었기에 정면 대결을 하면 언제나 불리했다. 그동안 이자크의 비위를 맞추는 체 해왔기 때문에 갑자기 태도를 바꾸었다가는 무슨 일이 벌어질 지 몰랐다. 일전에 이자크를 따라 캄자크 족 부락에 갔을때 이자크라는 이름보다 훨씬 유명한 다른 이름을 알게 되었거니와, 캄자크 족의 무서움에 대해서도 질릴 만큼 봤던 것이다. 그들이야말로 정말문 명화된 인간이 대적할수 없는 강적들이었다.

   그래서 유리히는 울며 겨자먹기로 그들을 붙잡고, 이자크와 다니는 동안 익숙해져 버린 억지 웃음을 지으며 보리스라는 소년에 대해 아느냐고 물어봤다. 그리고...... 

   아무 정보도 못 얻고 그냥 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다음 정보가 오기 전에 이자크를 먼저 떼어낼 방책을 짰다. 이제 원하는 정보를 다 얻은 만큼 이자크와 함께 다닐 필요는 전혀 없었던 것이다 산스루리아로 돌려보내든지, 캄자크 족 부락으로 가게 하든지, 그게 아니면 아예 혼자 여행을 떠나게 하든지........ 

    그러나 눈치 없는 이자크는 그들이 매우 친절한 신사들이라고 생각해버렸는지 무슨 말을 해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유리히가 안절부절못하다 못해 아예 폭발할 지경에 이르렀을 때,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하던 류스노가 대안을 세워 주었다. 너무 깔끔한 대책이라 듣는 순간 죽어가던 정신이 되살아나는 기분이었다. 다음 정보가 들어을 때까지 일단 기다린 그들은, 보고를 받자마자 즉시 대책 본부로 쓰던 여관을 떠나면서 이자크에게 ‘급한 일로 아주 잠깐 동안 자리를 비우게 됐는데 계속해서 정보가 들어을 것이 걱정된다, 그러니까 친절한 당신이 이곳에서 기다리며 자기들 대신 보고를 받아 달라, 잠깐이면 된다, 그러나 자기들이 돌아을 때까진 절대로 

자리를 비워선 안 된다'고 말해 주었다.

    그리고 이자크는 그동안 친절을 베풀어 준 두 신사를 위해 기꺼이 그 일을 맡겠다고 나서 주었다. 특유의 순진무구한 미소를 띤 채 말이다.

    "아직도 그 여관에 박혀 있으려나....“ 

    "상대를 떠나 보낼 수 없으면, 자신이 떠나야 되는 법이지."

    나무 아래에서 목소리를 알아들은 류스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러나 유리히한테까진 안 들렸다.

   확신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들이 이자크를 내버려두고 여관을 떠난 지 보름도 넘게 지났으니까. 그리고 겨우겨우 적당한 곳에서 새로운 일행을 따라잡은 참이었으니까.

   "여어!"

   나무 위의 유리히가 먼저 사냥감을 발견하고 가볍게 신호를 보냈다. 저만치에서 두 명의 소년과 한 명의 어른이 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두 번째로 엘베 섬에 도착한 낯신 배에 탔던 자들이었다.

   나무에 기댄 채 고개를 숙이고 있던 류스노가 천천히 등을 뗐다. 그리고 허리에 찬 검을 반쯤 뽑으며 예의 우울한 눈동자로 상대를 포착했다.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는데.....“ 

   극구 사양해 봤자 소용이 없었다. 다짜고짜 떠밀려 간 곳은 참으로 오랜만에 보는 고급스런 거실 그리고 거실 양쪽으로 난 두 개의 침실이었다. 고급스럽다고는 해도 그 취향이란 것은 보리스가 본 일 있는 아노마라드의 귀족 저택, 벨노어 성의 화려함과는 크게 거리가 있어 오히려 고향 트라바체스의 집 쪽에 가깝지 않을까 생각되었다. 이곳도 분명 대 영주의 성이었지만 안락함보다는 방어 목적에 좀더 충실한 구조였고, 내부도 섬세한 꾸밈 같은 것과는 관계가 없어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 편안해 보이는 안락의자와 차 테이블, 잘 달인 금제 램프와 은식기 같은 것이 존재하는 성이었다. 그리고 그 성에서 그들은 매우 귀한 손김이 되어 있었다. 이 모든 것이 병사들에게 이끌려 디캄 영주의 성으로 간 보리스가 나우플리온이 준 검을 보이며 '이실더 관‘ 이라는 이름을 말하자마자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갑작스런 대접에 이쪽도 정신이 없었지만, 저쪽은 아예 혼비백산해서 그들을 맞아들이고는 만찬을 준비시키랴, 제일 좋은 방을 청소하랴, 갈아입을 옷을 내오랴, 각종 소동을 벌였다. 나우플리온이 렘므에서 쓰던 가명인 '이실더' 라는 이름을 아는 것은 영주와 그의 가족뿐만이 아니었다. 일개 병사에서 하인에 이르기까지 왜 이들을 대접해야 하는지 너무도 잘 느끼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옷이 다 젖었기에 어쩔 수 없이 그들이 준 고급 옷으로 갈아입은 두 사람은 식사가 준비될 동안 잠시 쉬시라고 안내한 그 곳에서 약간 머쓱해 있었다.

    결국 안락의자로 가 앉은 이솔렛이 어깨를 움츠려 보였다.

    "뭔가 엄청난 은혜를 입긴 한 모양이구나."

    보리스는 문간에 선 채 방을 내려다보며 말이 없었다. 이솔렛이 그의 얼굴을 보고 잠시 눈을 내리깔더니 입을 열었다.

    "옛 일이 떠오르나보구나. 그와 함께 다니던 때를 생각하는 거지?“

    "아니... 혼자, 그 분 혼자 다니던 때를 생각하고 있었어요."

    나우플리온이 벨노어 백작의 성으로 흘러 들어와 보리스를 만날 때까지 홀로 떠돈 기간은 약 2년, 그동안 대륙 곳곳에서 수많은 일들을 겪었을 것이다. 어쩐지 쓸쓸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처음 만난 나우플리온은 낙천적인 괴짜였고, 한없이 어둡기만 했던 자신은 그의 밝음을 좋아했다. 그러나 결국 그의 기대를 꺾어버린 자신, 끝내 떠나버린 사람, 그 후의 만남, 그리고.... 

    홀로 떠돌았던 그는 과연 무엇 때문에 고향을 떠나야만 했던 것일까?

     처음으로 가진 의문은 아니었다. 나우플리온이 그에게도, 다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는 비밀이 있다는 것은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다. 굳이 알아내려 하지 않은 것은 존중하고자 하는 마음 탓이었다. 그런 것이 그의 성격이었다.

   "아무도 그 사람을 추방하지 않았어. 그를 섬에서 추방한 것은 자기 자신이었지."

   흡사 마음 속을 들여다 본 듯한 대답이었다. 보리스가 다시 무언가 물으려 하는 순간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고, 하녀가 들어와 식사가 준비되었으니 내려오시라고 알렸다.

   준비된 음식은 두 사람을 당황시키기에 충분했다. 식사할 사람이라고 해 봤자 그들 둘, 주인인 디캄 영주와 그의 아내, 그리고 젊은 아들의 다섯 사람뿐이었는데 몇 미터는 되어 보이는 기나긴 식탁에 각종 요리가 산처럼 쌓여 있었다. 음식들 중 상당수는 보리스조차도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그 긴 식탁 주위에는 의자가 없었다. 앉을 수 있는 곳은 곁에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식탁보 위에 작은 꽃바구니, 그리고 은촛대와 하얀 식기가 반들거리고 있는 둥근 식탁이었다.

    “마음껏 덜어다 드시면 됩니다. 이곳 식사법에는 익숙하지 못하실 것 같으니 제 아들녀석이 차례대로 시범을 보여드릴 겁니다. 자, 접시를 들고 이쪽으로 오시지요."

    디캄 영주의 아들은 스물 서넛 정도 되어 보이는 얌전해 보이는 젊은이였다. 다들 접시를 가지고 긴 식탁 쪽으로 가자 그가 두 사람 곁에서 친근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 왔다.

   "찬 접시에는 먼저 생선부터 드시지요. 이쪽에 절인 청어가 있고,

저쪽에는 겨자를 곁들인 연어가 있습니다. 뱀장어는 드셔보셨습니까? 생선이 싫으시면 저쪽에 훈제 햄이 있습니다."

   음식을 조금씩 덜어서 테이블로 가져오니 영주와 영주 부인도 비슷한 음식을 덜어온 것이 보였다. 그걸 먹고 나니 하인들이 접시를 치워갔고, 이번엔 따뜻한 접시에 따뜻한 육류 요리들을 담아오라고 젊은이가 말해 주었다.

   부드럽게 삶은 소 허벅지 살에 볶은 감자, 무와 사과를 갈아 만든 소스를 곁들인 요리는 렘므의 수도인 엘티보에서 유래된 것이라 했고, 야채와 치즈가 듬뿍 든 소시지 구이, 달짝지근한 완자를 곁들인 송아지 가슴살 등을 가져오자 하인들이 작은 접시에 신선한 샐러드를 

담아다 주었다. 작은 생선처럼 보이는 것이 잔뜩 담긴 절임을 들여다보고 있는 보리스에게 젊은이가 다가와 '앤초비' 라고 말해 주었다.

   맞은편을 보니 맥주를 권하는 영주 부인에게 고개를 젓고 있는 이솔렛의 모습이 보였다. 척박한 땅을 가진 섬에서 술을 만들 곡류 따위를 키울 여유는 없었기 때문에 섬사람들은 거의 술을 마시지 않았고, 술에 익숙하지 않은 이솔렛은 가볍게 마시는 한두 잔으로도 충분히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식사가 끝나자 달콤한 후식이 연달아 나왔다. 동그랗게 말아 구운 사과파이와 과일, 치즈, 녹인 초콜릿으로 가득 채운 두툼한 팬케이크, 아몬드와 산딸기와 라즈베리 잼으로 속을 넣은 페스츄리 같은 것들은 몇 조각만 입에 넣어도 금방 우유라도 마시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단것들이었다.

   "시간이 없어 제대로 된 요리를 내지 못했습니다. 은인께서 아신다면 저희의 소홀함을 탓하실 지도 모르겠어요."

   영주 부인의 말을 듣고서야 물어 볼 정신이 들었다.

   "그럴리가요. 그 분께서는 제게 검을 빌려주시며 렘므를 여행할 때 도움 받으라고 하셨을 뿐이라, 이런 과분한 대접을 받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그 분과 어떤 관계이신지 말씀해 주시면 안 될까요?“

   "아아.... 죄송합니다만......“. 

   영주 부인이 말꼬리를 흐리자 몸집 좋은 호인인 디캄 영주가 얼굴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예, 정말 죄송합니다만 그것만은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은인께서 금지하신 일이라 저희로선 어쩔 도리가 없군요. 다만 이렇듯 은인을 아시는 분을 만나 천분의 일의 은혜라도 갚게 된 것이 감격스러울 뿐입니다. "

   옆에서 젊은 아들이 말을 이었다.

   "저도 실은 두 분을 뵙게 된 것이 꽤 놀랍습니다. 물론 저희는 언제라도 그 큰 은혜에 보답할 수 있게 되길 고대해 왔습니다만, 솔직히 그런 기회는 오지 않을 거라고 거의 체념하고 있었거든요. 은인의 성격으로 볼 때...... 아, 정말로 두 분은 은인에게 아주 귀중한 사람들인 모양입니다."

    '이실더 산‘ 이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이들이 너무나 감격해 하는 바람에, 보리스는 감히 ’산‘이라는 성을 사용하지 못하고 '보리스 미스트리에' 라고 자신의 이름을 밝혔다. 만일 '보리스 산’ 이라고 말했더라면 이곳에 며칠쯤 붙잡혀 빠져나가지 못하게 될 지도 몰랐을 노릇 

이었다. 이솔렛도 마찬가지로 ‘미스트리에'라는 성을 사용하고 있어서 이들은 둘을 당연히 남매로 여겼다.

   "오히려 저희는 두 분께서 어찌 은인과 이토록 친밀하신 것인지 궁금하고 또 부럽습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설명할 것은 전혀 없었다. 사실대로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보리스는 재빨리 말했다.

   "아, 죄송합니다. 저희 역시도 그 일만은.....“ 

   그런 다음 이들은 서로 비밀을 밝히지 못하게 된 것에 대해 사과하며 꾸벅꾸벅 절을 나누었다.

2. 실버스컬 개막 

   적갈색 머리칼을 헐렁하게 땋아 늘인 소녀가 풀밭에 앉아 있었다. 잘 땋아지지 않은 자신의 머리를 자꾸만 만지작거리며,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리리오페, 그녀에겐 익숙하지 않은 장소였다. 섬 안이라 해도 한 번도 와보지 못한 곳이었다.

   "여기가.... 늘 노래하곤 하던 그곳이고.....“. 

   바닥에 박힌 하얀바위가 빛을 내고 있었다. 여기도, 저기도, 빈자리뿐이었다. 함께 떠나버린 두 사람은 여기에 없었다. 

   소녀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들은 돌아을 것이었다. 그리고 죽 이곳에, 이 섬에서 살 것이다. 그녀의 아버지의 지배를 받으며, 그리고 곧 그녀의 지배를 받으며.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데도 이상하게 마음이 약간 무거웠다. 리리오페는 발딱 일어나 풀밭을 몇 걸음 거닐었다. 그리고 예전에 자주 그랬듯 가볍게 발끝을 퉁기며 춤을 추어 보았다. 약한 흥얼거림에 맞춰, 다리를 뻗고, 빙그르르 돌고, 원을 그리며 날리는 머리카락...... 

   이곳은 그녀의 장소가 아니었지만 관계없었다. 본래 섬 전체가 그녀의 장소였다. 두려워할 것은 없었다. 꺼릴 것도 없었다.

   그리고 따뜻한 마음이 되어 그를 생각해 보았다. 사랑하는가? 그런 질문에는 쉽게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단호히 단정짓기에는 너무 부드러운 감정이었다. 좀더 깊이 생각해 보면 그는 그리 다정한 사람이 아니며, 교활한 사람도 아니고, 야망 넘치는 사람도 아니었다. 다시 말해 그녀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그래서 마음에 들었다.

   섭정의 딸에게는 부족한 것이 없었다. 더한 사치를 원하는 것도 아니고 더한 편안함을 원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녀에게 뭔가 줄 수 있다는 것은 그리 매력적인 요소가 못 되었다. 오히려 그녀는 자신이 뭔가 줄 수 있는 상대가 좋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그는 행복한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의 힘으로 그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세상 누구보다도 불행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다. 진심으로 그가 마음놓고 쉴 수 있게 되기를 바랐다 이 섬에서, 그녀의 땅에서.

   어떻게?

소녀는 땅에서, 하늘에서 춤추네 

해날 빛 아래서 행복하게 춤추네 

세상모든 이야기에는 기쁜 결말 

이 땅 모든 사람에게도 좋은 봄날 

   그이는 행복한 소녀였다. 어떤 선물도 줄 수 있는 소녀였다. 그러니  복은 간단한 거였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고, 모든 것을 가진 사람이고, 불안한 미래도 슬픈 과거도 없는 사람인-그녀의 것이 되면 행복해질 것이다.

춤동무 부르네 밤종다리 우는 숲 

은달 빛 아래서 밤새도록 춤추네 

작약 꽃망울 고개 숙인 하얀 언덕 

옛 친구와 함께 부는 초록 휘파람 

   보리스와 이솔렛이 아노마라드 땅 폰티나 영지의 성 앞에 도착한 때는 점심 무렵이었다. 섬을 떠나고부터 약 석 달이 걸린 긴 여행이었다. 렌므를 여행하는 동안 그들은 몇 번이나 나우플리온의 검을 알아보는 사람들로부터 친절한 대접을 받았다. 보리스가 이렇게 여행하게 될 것을 나우플리온이 미리 알고 일부러 세심하게 준비해 놓은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로젠버그 관문보다 남쪽에 있는 로마리온 관문을 넘어 아노마라드로 들어온 후부터는 길이 잘 닦여 있어서 다른 의미로 쾌적한 여행이 되었다. 드디어 날씨는 한여름의 그것으로 바뀌 

어 있었다.

   아노마라드의 7월.

   보리스가 기억하고 있는 아노마라드는 도저히 자신과 가까워질 수 없을 것처럼 보이던, 지독히 아름다운 연록빛의 나라였다. 너무 아름다운 나머지 현실이 아니라 액자 너머의 그림처럼 보였던 마르그리트 꽃의 정원과 향긋한 나뭇잎들이 살랑대던 작은 숲, 은빛 내 위에 드리워진 무지개 다리가 있는 그곳에서 반 년의 세월을 보냈다. 그렇게 불안한 행복으로 시작해서 결국 잔인한 배신으로 끝나버렸던 열 두 살 의 겨울과 봄.

    그 땅에 다시 돌아온 것이다, 이제 열 다섯 살이 된 소년은.

    비록 당시 지내던 벨크루즈 지방보다는 북쪽이었으나 그곳에 돌아왔다는 사실만은 느끼지 않으려 해도 분명하게 다가왔다. 벨노어 성보다 훨씬 높고, 탑이 많은 화강암 성이 저만치 솟아 있었다. 그 주위로 높이 솟은 성벽이 상당한 넓이의 땅을 둘러쌌다. 도개교가 내려져 있었고, 그 위로 수많은 사람들이 말과 수레를 끌며 들어가고 있었다.

 성벽 주위에 깊은 해자가 파인 것이 보였다.

    "전쟁이 많은 땅인 모양이구나."

    말이 없던 이솔렛이 폰티나 성을 올려다 본 다음 한 말이었다. 사실 그 성에는 '기사의 기쁨' 이라는 시적인 이름이 붙여져 있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잊어버린 채 그냥 폰티나 성이라고 불렀다.

    "폰티나 공작은 아노마라드 최고의 권력자 가운데 한 사람일 겁니다. 아노마라드에 새 왕정이 세워질 때 남부 영토를 국왕과 함께 평정한 사람이라고 알고 있어요. 현 왕비의 친오빠이기도 하고요."

   벨노어 성에서 로즈니스의 가정교사로부터 몇 마디 들었던 말이 새삼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이 신기했다. 동시에 '월넛 선생' 이 한 말도 생각이 났다. 폰티나 공작에게 아름다운 딸이 있다고 하니 로즈니스가 샘이 나서 어쩔 줄 몰라했고...... 

   로즈니스, 그러고 보니 참으로 오랜만에 떠올려 본 이름이었다. 아예 잊어버린 줄 알았는데, 그녀가 준 선물만은 아직도 지니고 있다는데도 생각이 미쳤다. 네 잎 클로버가 수놓아진 작은 주머니.

   실은 그걸 로즈니스가 줬다는 것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아마도 저 가짜 결투를 위해 떠나던 날 아침의 일이었을 것이다. 그때의 그는 란지에가 안내해 준 비밀 전시실에 들어갔다 나와서 완전히 혼란에 빠진 상태였고, 따라서 로즈니스가 하던 말은 거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 그가 지닌 네 잎 클로버 주머니에는 섬에 처음 들어갈 때 머플러를 한 숲지기들 중 한 사람이 주었던 은제 메달이 들어 있었다. 그걸 가지고 있어야 섬 주변에 걸려 있는 몇 개의 마법으로부터 안전할 수 있었다. 넓은 숲을 순식간에 통과하거나 마을 주변 벽에 만들어진 문을 볼 수 있는 것도 이 메달의 힘이었다 따라서 몸에서 떼어놓아선 안되었고, 그래서 이 주머니 안에 넣어 늘 지니고 있었다.

   도개교를 통과해 들어가자 놀랄 만한 장관이 펼쳐졌다. 도개교에서 본성에 이르는 넓은 빈터에 형형색색의 천막들이 빼곡이 들어차 있었다. 대략 봐도 몇 백 개는 되어 보였고, 천막과 천막 사이로 수많은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돌아다니는 것 또한 보였다. 이 천막들에 가려져 정작 본 경기가 이루어질 장소는 어딘지 알아볼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보리스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여기서 누군가와 마주치리라고 생각한 건 괜한 기우였네요."

    이솔렛이 손차양을 만들어 주위를 둘러보며 답했다.

    "숨고 싶으면 예선에서 지면 돼."

    보리스가 묘하게 미소지으며 대꾸했다.

    "진심 아니죠?“

    그때 이솔렛은 뭔가 발견한듯 손가락질하며 보리스를 돌아보았다.

     "저기로 가자. 출전을 접수하는 곳 같으니까. 그리고 진심은 아닌데, 진실이긴 해."

   다음 날, 그리고 오후가 되자 보리스는 이곳에 모인 사람들 사이에 떠도는 소문들을 대부분 접할 수 있었다. 화제가 되는 것은 단연 우승 후보들, 그들의 훌륭한 집안과 화려한 천막이며 마차 같은 것들, 그 다음으로는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모여 성황을 이루고 있는가 하는 것, 다크호스라고 여겨지는 자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폰티나 공작 영애가 지녔다는 대단한 미모였다.

   클로에다 폰티나라고 하는 그 소녀는 보리스와 동갑내기라고 했는데 보리스가 벨노어 성에서 지내던 몇 년 전보다 한층 더한 명성을 날리고 있는 듯했다.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말에 따르면 그 소녀가 발코니에 나타나면 태양보다 밝은 별이 뜨는 느낌이라고 했고, 드레스자락에서 꽃잎이 떨어져 흩날리는 듯한 환각이 보일 지경이라고도 했다. 소녀가 몸을 돌려 안으로 들어가면 그녀를 쳐다보던 남자들은 다들 멍해져서 한동안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심지어 연습조차 할 마음이 나지 않는다는 그런 얘기였다.

   놀랍게도 그런 이야기를 듣고 와서 보리스에게 전해 준 사람은 다름 아닌 이솔렛이었다. 그녀는 이 이야기가 몹시 재미있다는 듯 시종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난 못 믿겠어요. 이런 곳에 모인 사람들은 쉽사리 소문에 휩쓸리기 마련이라고요."

   "못 믿겠으면 직접 가서 봐, 매일 저녁 똑같은 시각에 발코니로 나온다고 하니까. 아, 나도 궁금한걸. 같이 가서 볼래?'

   "이솔렛, 당신은 참...... 

   하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결국 못하고 말았다. 이솔렛 같은 사람을 매일같이 보며 지낸 자신의 눈에 다른 미인이 쉽사리 들어을 리가 없잖은가.

   그러나 이솔렛은 사내아이보다 더 짧은 머리에 옷도 여행하기 좋은 각반 친 바지 차림이었고, 등에는 두 자루나 되는 검까지 메고 있는 터라 언뜻 보아선 아름다운 소녀라기보다 잘생긴 소년처럼 보일 따름이었다. 그녀는 그런 모습으로 경쾌하게 천막사이를 돌아다니며 여러 가지 이야기들을 듣고 왔다. 실버스컬의 규칙이 작년과 변한 데가 없다는 것, 오랜만의 대목을 놓칠세라 각지에서 원정 온 대장장이들 중에 누가 솜씨가 좋은가, 지금까지 예선 출전을 신청한 사람이 총 몇 명이며, 그 가운데 귀족은 얼마나 되는가 하는 것들. 그리고 강력하게 거론되는 우승후보들도.

   날이 저물고 있었다. 내일은 드디어 무지막지하기로 소문난 예선전이 치러지는 날이라서 출전자들은 대부분 일찍 천막으로 들어갔다.

귀족 소년들을 수행하고 온 종자들만이 소문이나 재미거리를 찾아 밤늦게 어슬렁댔다. 몇 군데에서는 은밀하게 도박판이 벌어져 있었다.

그러나 흔한 주사위놀이를 하는 하인들 말고, 한쪽 구역에서는 본격적으로 우승 후보를 놓고 벌이는 비싼 도박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보리스를 일찍 잠자리에 들도록 한 뒤 이솔렛이 간 곳이 바로 여기였다. 사나운 사내들과 술꾼, 사기꾼들이 판치는 곳이었지만 자기 몸 하나 지키는 것쯤이야 겨정하지 않는 그녀는 몰려선 사람들 사이로 대담하게 고개를 들이밀었다.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아버지가 생전에 말해주던 모습과 크게 다를 것도 없었다. 대륙 사람들에 비하면 섬사람들의 일상은 마치 성직자들과 같다고 했었다. 질펀한 술 냄새와 무절제한 요리 냄새, 아까운 줄 모르고 태우는 램프 기름과 지쳐 쓰러질 때까지도 물러서지 않으려는 듯 질러대는 고함소리. 무시무시한 소음, 예의라고는 없는 거친 움직임들.

    그러나 섬사람들이 고립된 자들답게 기회만 있으면 내보이는 저 잔인한 적개심과 비교하면 어떨까.

    "여기 5백 고블룬! 오를란느 아가씨한테!"

    "어허, 저 큰일날 짓을 하는구먼? 고블룬 금화 두 개면 1백 엘소라는 걸 알아야지? 어디 걸 데가 없어 빼빼 마른 아가씨한테 거나 글쎄!"

    “남의 일에 참견 마쇼! 그 아가씨는 확실한 우승 후보야! 늙은 나귀새끼 판 돈을 사기꾼 같은 술장사 여편네가 다 처먹어서 그렇지 더 있으면 더 걸었을걸?”

   "승률이 낮은 데 걸어야 한몫 보는 법이지, 암!"

   “난 역시 자작 아드님한테 걸겠소! 윗대부터 확실한 핏줄에다 걸어야 피 같은 돈을 안 날리지. 여기 1백 엘소, 옛다!"

   "어허, 거 조금씩만 겁시다! 백 엘소 금화가 왔다갔다하니 무서워서 어디 끼겠나......“ 

   "돈 없는 놈은 잔소리말고 꺼져!"

   "뭐야? 돈푼 좀 없다고 트레비조 삵괭이를 무시해? 한 번 되게 데어볼 테냐?“

   “하이아칸 왕족한테 1백 고블룬!"

   "식민령 놈들이야 죄다 반편이 아닌가? 오죽 못났으면 남의 나라에 기대어 그 꼴을 하고 있나 그래.....“. 

   "어허, 여기 티아(Tia) 사람도 있네! 조용히들 하라고!"

   "저쪽으로 나와, 이 풋내 나는 애송아! 내가 오늘 삵괭이 발톱 맛을 단단히 보여주마!"

   "여기 자작 아드님한테 8백 고블룬.....“ 

   재미있는 구경거리였다. 판돈이 자꾸 쌓이자 흑판에 석필로 그려놓은 숫자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갔다. 자작 아들 이라는 사람이 최고의 승률, 즉 최저 배당을 기록하고 있었는데, 이 사람에 대해서는 누구나 잘 알고 있는지 아무도 본명을 말하지 않아서 이름을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지지도만은 가히 압도적이었다 

   그 다음으로 많이 불리는 이름은 '오를란느 아가씨' 였는데 이 아가씨의 이름은 간신히 샤를로트라는 것을 알수 있었다. 이 아가씨에 대해서는 모르는 사람이 많아서 누구냐는 질문이 종종 오갔고, 귀 기울여 보니 아노마라드 북부에 위치한 공국 오를란느의 공녀인 모양이었다.

   그 다음으로 ‘하이아칸 왕족', '아라종 키다리', 나르비크 뱃꾼' 같은 이름들이 수시로 불렸다. 여기의 배당 방식은 1등에게 총액의 절반을 몰아주고 준결승 진출자들에게 건 사람들에게 조금씩 분배가 되는 방식이기 때문인지 그 외에도 낯선 이름들이 종종 불리곤 했다. 준결승 진출자의 숫자는 본선에 몇 명이 진출하느냐에 달려 있어서 지금 상태로는 몇 명이 될 지 알 수 없었다.

   돈을 건 사람들은 1백 고블룬당 한 개씩, 인두로 지진 낙인이 찍힌 나무 조각을 가져갔다. 나중에 이것으로 판돈을 받게 되는 모양이었다. 모든 풍경은 섬에서 태어나 처음 대륙에 나와 본 이솔렛에게 생소하고도 흥미진진했다. 처음에 그녀는 자신도 몇 푼 정도 걸어볼까 했으나 곧 생각을 바꿔다. 일단 그녀의 평소 목소리는 그리 큰 편이 아니었고, 돈을 걸려면 적어도 도박판을 관리하는 사람의 주목은 끌어야 하는데 자신의 모습이 필요 이상의 이목을 끌게 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여기는 대부분 나이든 사내들뿐이었고, 자신이 입을 연다면 누구나 그 목소리를 듣고 소녀라는 것을 알아차릴 터였다.

   그런데 곁에서 뜻밖으로 생기있는 소년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에 온 대부분의 소년들은 내일의 예선전을 위해 잠자리에 들었을 터인데?

   "아, 음, 여기까지 왔으니 우리 아버지의 재산을 좀 불려 갖고 가야겠는데 말이야, 네가보기엔 어디에 거는 게 좋을 것 같으냐, 바나나?“

   "그거야 당연히 강피르 자작댁 아드님한테 거는 것이 제일 안전합죠. 그렇지만 도련님이 이런 일을 안 하셔도 주인님의 재산은 나날이 얌전히 불어나고 있다굽쇼. 도련닝까지 이런 판에 끼여드실 거 없어요. 그리고 제발 그 괴상한 과일 이름으로 부르지 마시란 말씀입니다 

요. 저는 그 길쭉하고 미끈거리는 과일이 싫어요."

   "이봐, 아무리 그래도 아버진 훌륭한 상인이야. 동전 한 개라도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게 낫지. 그러니까 내가 돈을 벌어 가면 틀림없이 기뻐하신다고. 그리고 바나나가 얼마나 맛있는 과일인지 네가 먹어보고도 모른단 말이야? 저기 하이아칸 남쪽 섬에서만 나는 비싸디 비싼 과일인데! 하인 치고 바나나 먹처본 사람은 아마 너밖에 없을거다. "

   “그래도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그렇게 부르시지 마시라굽쇼!"

   "걱정 마, 우린 다른 사람들 뒤에 있어. 도박판을 보느라 전부 우리한테 등을 돌리고 있잖아,"

   "크으.... 도련님 제발......“ 

   이솔렛은 고개를 조금만 돌려 하인과 대화를 나누는 소년을 훑어보았다. 그녀보다 더 길게 기른 금발이 사방으로 멋대로 치뻗은 모양새가 나름대로 귀여워 보이기도 하는 보리스 또래의 소년이 열심히 사람들 틈새로 고개를 내밀려고 애쓰고 있었다. 푸른 단이 곳곳에 대어진 고급스런 흰 옷차림에 허리에는 얇은 검까지 매어져 있어 분명 실버스컬에 참가하러 온 듯한 모습이었는데 어째서 밤늦게까지 여기에 있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에이 참, 자작 아드님이란 사람은 너무 배당이 낮잖아! 저런 데 걸어봤자 이겨도 본전밖에 안 된다고. 위험 부담이 있어야 이익도 있는 건데, 우음...... 저 아래 하위 승률들 중에서 하나 찍어볼까...... 저기 왕족이라는 애는 실력이 괜찮으려나? 야, 바나나! 한눈팔지 말고 

좀 잘 봐! 이거 빨리 끝내고 일찍 자야 내일 대망의 예선전을 최상의 컨디션으로 '구경'한단 말이야."

    "지금 그냥 가서 조용히 주무시면 되는데요."

    "치이, 너 아까 한 말 때문에 토라졌구나? 에이, 난 좋은 뜻에서 한 말이라고. 응? 내가 너를 좋아하는 거 다 알잖아. 그러면.... 맞다! 너도 한 명 찍어봐, 내가 돈은 대줄 테니까 말이야. 응, 재밌겠지? 어때?“

   자기보다 덩치도 훨씬 크고 나이도 많아 보이는 하인을 어르고 다그치고 달래고 하는 솜씨가 보통은 넘어 보였다. 귀족 도련님이라면 하인의 기분쯤이야 어찌 되든 강압적으로 누르려고만 할 텐데 이 소년은 상인의 아들이라서 그런지 기본적으로 협상을 하려는 자세를 갖고 있었다. 물론 그게 권위를 세우는 데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겠지만 워낙 자신이 장난스런 성격일 때는 이런 방식이 최선일지도 모른다.

   아니나다를까, 나이든 하인은 도박을 해서 돈을 딸지도 모른다는 것에 걸려들어 도련님과 함께 열심히 승률판을 들여다보게 되었다.

둘이 누구한테 걸 것인가를 놓고 계속 가볍게 티격태격하는 것을 보고 있던 이솔렛이 슬쩍 말을 붙였다.

    “도련님, 정말로 모험을 해 볼 마음이 있어요?”

   이솔렛이 목소리에 찬트의 마력을 살짝 담았기 때문에 소년은 금방 알아듣고 고개를 돌렸다. 이런 시끄러운 곳에서 다른 사람들은 귀도 못 기울일 낮은 목소리지만 목표가 되는 사람만은 확실히 알아듣게 되어 있었다. 하인 역시 눈치채지 못하고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에만 정신을 팔고 있었다.

   “네? 어, 당신 여자였군요? 좀 전에 볼 때는......” 

   “네. 그건 중요하지 않고요. 정말로 위험 부담을 안고 크게 따 볼 마음이 있으면 내가 좋은 사람 하나 소개해 주죠."

   귀여운 도련님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했다. 나름대로 심각한 고민을 하는 것 같더니 이윽고 이솔렛의 얼굴을 쳐다봤다. 이솔렛이 싱긋 미소짓자 소년의 눈이 동그래졌다.

   "와아, 누나는 대단한 미인이군요? 그런데 아까 그 얘긴 누나한테 걸라는 말인가요?“

   이솔렛의 등 뒤에 있는 검을 놓치지 않고 본 모양이었다. 이솔렛은 고개를 저었다. 

   "아뇨. 다른 사람이에요. 부담스러우면 그만두세요. 하지만 난 그가 반드시 우승을 할거라고 믿어요."

   "우승이라고요?“

   “네, 우승."

   아직도 하인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였다. 소년은 서서히 이 아름다운 누나의 목소리를 듣는 사람이 자신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그런데 자신의 귀에는 너무나 선명하게 잘 들어왔고, 심지어 고개를 끄덕이고 싶게 만드는 힘까지 지니고 있지 않은가?

   다음 순간 소년은 정말로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고 있었다.

   "알았어요. 아버진 늘 내게 기회는 위기와 함께 온다고 말했죠. 당신 목소리가 아주 특이한 것 같은데 그게 바로 위기이자 기회라는 거겠죠? 걸죠. 어떤 이름인가요?“

    "보리스, 미스트리에. 이 이름에 걸고 싶은 만큼 걸어요. 그리고 당신이 걸 때 여기 내 돈도 좀 대신 걸어 줘요."

    이솔렛은 1백 엘소 금화 하나를 소년의 손에 놓았다. 소년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이름은 루시안 칼츠예요. 누나는?”

    "이솔렛이에요. 그럼 내일 예선 경기 잘 봐요."

    이솔렛이 돌아서는데 등 뒤에서 루시안이라는 소년이 기세 좋게 외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 5만 엘소! 내 목소리 똑똑히 들어요! 보리스 미스트리에라는 이름에 5만 엘소 걸겠어! 거기에 다시 1백 엘소 추가!"

    그 옆에서는 하인이 놀라자빠지다 못해 반쯤 턱이 빠진 표정으로 도련님의 팔을 붙들려고 기를 쓰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입밖에 나와 버린 말이었다.

     그리하여 승률판에는 아무도 들어본 적 없는 낯선 이름이 하나 추가되게 되었다.

예선전이 개막되었다.

    실버스컬은 사흘에 걸쳐 벌어지게 되어 있었다. 첫날 예선에서는 출전자 전원을 네 무리로 나눈 다음 두 번에 걸쳐 대규모 단체전투를 치렀다. 제한 시간 안에 실수로 자기편을 공격하거나, 바닥에 쓰러지거나, 무기를 떨어뜨리거나, 상대에게 무기를 빼앗기거나 하면 예선에서 탈락이었다.

   각 무리에게는 색깔이 다른 머리띠가 주어졌는데, 생명이 위험할 경우 이것을 풀어 내던지면 기권한다는 의미가 되어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기권한 상대를 치는 것도 탈락의 요인이 되었다. 예전에는 보다 정교하게 예선이 치러졌다고 했는데, 최근 들어 점점 많은 참가자가 몰려들다 보니 부득이하게 이런 식으로 본선 참가자를 결정할 수 밖에 없었다. 한 무리에 대략 7,80여 명이나 들어갈 정도였다.

   보리스는 맨 마지막 팀에 소속되어 2차전에 들어가게 되었다. 소속팀을 표시하기 위해 황색 머리띠가 하나씩 주어졌다. 주위를 둘러보니 가죽 갑옷 등으로 경장을 한 아이들도 있었고, 투구까지 쓰고 제대로 된 무장을 갖춘 소년들도 보였다. 보리스 자신에게는 나우플리온이 준 검 한 자루와 가죽 건틀릿(gauntlet), 섬에서 실버스컬에 나가는 아이들을 위해 지급한 간단한 브리간딘(brigandine) 갑옷이 전부였다. 브리간딘 갑옷은 어린 시절에 진네만 저택이 삼촌에게 공격받았을 때 입었던 갑옷을 연상하게 했지만 질은 훨씬 떨어졌다.

   일렬로 선 채 저만치 마찬가지로 횡대열을 이루고 선 소년들을 바라보고 있으니 서서히 긴장감이 몸을 데우는 것이 느껴졌다. 신호기를 든 사내가 중앙 단상 앞에 있었다. 구경이 목적일 경우 본선부터 보러 오는 사람들이 많았으므로 사방의 군중은 엄청나다 말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모두의 눈이 집중되고 있다는 사실이 주는 중압감은 작지 않았다.

   조금 전 1차 전투가 끝났을 때 예선 통과자를 발표하면서 '희생된 자가 없어 다행' 이라는 의미의 말을 하는 것도 들었다. 이것은 실제로 죽거나, 죽일 수도 있는 경기였다 목검을 들고 하는 연습과는 달랐다. 가벼운 상처 정도 입는다고 해서 끝나는 경기도 아니었다.

   고개를 들자 목책 너머에 무리 지은 군중이 보였다. 폰티나 공작을 비롯한 귀족들을 위해 마련된 높은 자리가 왼편에 있었고, 나머지는 온통 각양각색의 옷을 입은 전 대륙의 인간들이었다.

   이솔렛은 저들 중 어디쯤 있을까.

    "........하게되니, 모두는 자신과 가문의 영광을 위해 분투하라!"

   녹색 깃발이 올려지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시작이었다.

   처음 부딪쳤을 때, 검보다 열기가 먼저 와 닿는 것에 놀랐다. 보이는 얼굴, 보이지 않는 얼굴, 모두가 한목적을 가지고 부딪쳐 뒤얽혔다.

    첫 충돌에서 단숨에 기권자가 속출하기 시작했다. 기권한 자들은 무기를 버리고 기어서 목책 밖으로 나갔다. 버려진 무기들은 살아남은 자들의 전리품이었다. 떨어진 머리띠들이 흙바닥에서 어지러이 밟혔다. 그럴수록 남은 자들의 기세는 더욱 끓어올랐다.

    군중들이 열광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각각 자기가 응원하는 출전자의 이름, 또는 자기 고향의 이름을 외치며 머플러나 모자 따위를 흔들어댔다. 

  "아노마라드 최고의 소년 검객에게 우승을!"

  “하이아칸의 영광은 죽지 않았다!"

  "5년 연속 우승이 눈앞에 있다! 누가 강피르를 당할 소냐!"

  “잔포드 영지 출신들! 시드머! 갈자르! 도렌델프! 힘내요!"

  "실버스컬은 루그란이 본토다! 이번에는 우리가 가져간다!"

   언뜻 자기 곁에서 눈부시게 빠른 검이 지나간다 싶었다. 보리스는 고개를 돌려 황색 머리띠를 확인한 다음 그 뒤를 치는 적의 공격을 끊었다. 빠른 검의 정체는 끝이 살짝 휘어진 묵직한 세이버(saber)였다.

그리고 그걸 든 사람은 까만 단발을 한 예쁜 소녀였다!

  순식간에 다시 쉽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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