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5권. 1장 . Bloody History (13/21)

제목 : 룬의 아이들 5

지은이 : 전민희

펴낸이 : 서인석

출판사 : 제우미디어

출판년도 : 2002년

저자소개 : 전민희

  1975년 서울에서 태어나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역사와 문학. 신화 등을 비롯하여 최근 철학의 신조류까지 섭렵한 지식광이며, 판타지 동화에서 남미 환상문학에 이르는 다양한 판타지에 깊은 애정을 지니고 있다.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연구원을 거쳐 1999년 출간한 장편 판타지 소설 ‘세월의 돌’은 통신 연재사상 전설적인 400만회의 조회수와 더불어 전국 판타지 독자들의 입문필독서로 자리잡았다. 4대 통신망과 유명한 인터넷 커뮤니티들마다 작가의 팬클럽이 빠짐없이 결성되어 있으며, 현재 (주)이삭커뮤니케이션에서 <아룬드 온라인>이라는 이름의 3D 온라인 게임으로 제작중이다. 또한 ‘세월의 돌’은 총 5부작으로 예정된 <아룬드 연대기Arund

Chronicles>의 3부로서, 1부격인 ‘태양의 탑’이 이듬해 출간되었다.

    

  Contents

                                                        

  1장 . Bloody History

1. 피의 짐승 . 

2. 얼음 거미의 집 .

3. 계승자 . 

4. 각자의 전쟁터 . 

5. 다시 대륙으로 . 

  2장 . Risky Party

1. 이름들을 위하여 . 

2. 실버스컬 개막 . 

3. 뜻밖의 적, 뜻밖의 조우 . 

4. 폰티나 성의 위협한 밤 . 

5. 불가능한 것에 삶을 걸고 . 

6. 파티의 끝 . 

  3장 . Blindly Verity

1. 마침내 따라잡히다 . 

2. 원하는 것, 원할 수 없는 것, 원해선 안되는 것 . 

3. 시골 마을 공방전 . 

4. 긴 죄의 대가 . 

  1장 . Bloody History

  1. 피의 짐승 

  절벽, 구부러진 나무의 뿌리, 소리내어 흐르는 물, 새 소리없는 침묵의 산에 낯선 겨울이 한 구석 자리했다. 부러진 칼끝 같은 얼음 박편이 천만 개도 넘게 모인 결정이었다.

  바삭.

  설탕입힌 과자처럼 새하얀 서리 고치 안에 흑청빛 머리카락이 묽게 비쳐났다. 시체처럼 창백한 얼굴이었다. 그손에 하나의 검이 있었고, 이윽고 빛을 냈다.

  윈터러(Winterer) 안의 수많은 짐승들이 드디어 제 목소리를 내려 하고 있었다. 빛은 검을 쥔 소년의 눈꺼풀을 뒤엎었고, 곧 각각의 기억으로 변했다.

  사나운 짐승이 달려가고 있었다. 여섯 개 발굽이 걷어찬 검붉은 흙이 폭죽처럼 흩날리는 거친 땅, 핏빛 갈기 사이로 솟은 굽은 뿔은 닿아선 안될 높은 곳을 가리키는 듯했다.

  대지가 끊어오른다.

  하늘이 불탄다.

  너울거리는 지평선을 손가락인 양 가리키며 우뚝 선 뾰족한 낭떠러지, 그 끝에는 바로 그 검이 꽂혀 있었다. 이 역동하는 뜨거운 세계에서 유일하게 정지된 존재였다. 뭉쳐진, 집약된, 함몰된, 단 하나의 존재였다. 

  피 한 방울 묻지 않은 순백의 날 위로 하얀 장식술이 춤추었다.

  얼어붙은 바람......

“내 너를 가지리라!”

  낭떠러지로 달려 오르는 발소리에 이어 하나의 손이 덤벼들었다. 순식간에 검자루를 움켜쥐고는 긴 호를 그으며 뒤돌아 내질렀다. 하얀 칼날이 떨어지는 별처럼 광채를 뿌렸다.

  푸욱!

  산발한 머리칼같은 핏발이 치솟아 허공에 번졌다. 검은 땅이 피를 삼키고, 둘로 갈라진 짐승의 속내에선 덜 끊어진 생명이 내는 김이 무럭무럭 났다. 잠시 단말마의 버르적거림 같은 것이 이어졌다.

쿨럭, 쿨럭. 

그러나 곧 고요해졌다.

낭떠러지 위에 우뚝 선 자는 손에 쥔 검을 들어 허공을 가리켰다.

아니, 팔을 뻗어 지배하는 자의 모습이 되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으나 조각처럼 다듬어진 단단한 몸, 그리고 금빛 갈기 같은 머리털을 지닌 자였다. 들끓는 땅을 내려다보고 선 가장 강한 자였다.

검끝이 한 번 바르르 떨렸다. 이윽고 허공을 향해 힘껏 휘둘러졌다. 

순간, 주위로 눈보라 같은 것이 흩뿌려지는 듯하더니 흰 얼음이 대지를 뒤덮으며 뻗어나가는 것이 보였다. 곧 세계는 겨울로 변해 버렸다.

  다시 그 검을 쥔 것은 소녀였다. 탐스러운 금빛 머리칼과 짙은 흑색눈썹을 가진 열 여섯 가량의 소녀였다. 소녀는 양손으로 검을 단단히 쥔 채 한 치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듯 정면을 쏘아보았다. 꼭 다물린 입술에는 긴장과 오만이 함께 서린 듯했다.

  그녀의 맞은편에는 갈색 망토를 두른 삼십대 중반의 남자가 서 있었다. 그의 금발은 소녀의 것과 매우 비슷했다.

  남자는 손을 내밀었다. 아무 무기도 들려 있지 않은 빈손이었다.

  “네 것이 아니지 않니, 엘비라.”

  소녀는 대답하지도, 어떤 몸짓을 하지도 않았다. 다만 도사려 내민 검을 쥔 손에 한층 힘을 주었을 따름이었다.

  “지금, 네 손에 너 자신을 뼛속까지 파멸시킬 물건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니?”

  “난 단지 당신한테 갚아줄 빚을 알 뿐이야.”

  “내 마음을 아프게 하지 말아다오. 내가 한 모든 일은 오직 너 하나 를 위해서였으니까.”

  “내가 왜 그런 것까지 생각해야 되지? 난 요청한 일이 없어.”

  남자는 고개를 저으며 우울한 미소를 머금었다. 도저히 더 나은 방법을 찾을 수 없어, 결국 최악의 선택을 하려는 사람의 눈이었다.

  “이리 다오,” 

  대답 없이, 소녀는 두 걸음 뒤로 물러서며 검을 휘둘렀다. 검끝은 남자에게 닿지 않았으나 흰 날이 가른 공기가 얼어붙더니 흡사 금 간유리가 부서진 것처럼 날카롭게 조각나 날아갔다. 소녀의 눈동자에 서린 것은 일말의 동정심조차 없는 싸늘한 악의였다.

  남자는 그 자리에 못박힌 듯 서 있었다. 그러나 이윽고 그의 온 몸에 생겨난 수백 개의 상처에서 한꺼번에 피가 솟구치기 시작했다.

  피 흘리는 순례자의 눈... ...

  검은 또다시 한쪽 눈이 없는 사내의 손에 쥐어져 있었다. 그는 자신의 배에서 샘물처럼 흘러나오는 피를 내려다보며 긴 의자에 앉아 있었다.

  넓은 홀이었다. 몇 개인가, 헤아릴 수도 없는 원들이 서서히 좁아지며 둥근 천장의 정점까지 올라갔다. 호수의 파문처럼, 그들은 다시 넓어지며 또한 홀의 벽을 이루었다.

  차가운 회색의 돌에 새겨진 잎새와 덩굴들, 석화된 요정들의 파리한 뺨, 빛 잃은 날개, 암적색으로 한없이 가라앉아 가는 젖은 융단의 그림자 무늬들.

  이 홀의 모양을 처음으로 구상했고, 현실화하도록 지시한 당사자인 그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이걸 인간이 만들었던가... ...

  믿지 못해 결국 죽이고, 품지 못해 끝내 부수고 마는 인간이, 어찌하여 장엄한 것을 아는 것일까.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영광을 덧없이 담으려 했던 크디큰 태피스트리가 그의 자리에서 바로 내려다보이는 홀 양쪽 벽에 걸려 있었다. 기사의 은빛, 왕관의 금빛, 자줏빛 망토로 덮인 순백의 갈등, 대지의 녹색은 한때 보았던 것이며 성녀의 손은 아직 젊디젊은 그 자신을 축복하고 있다. 너무도 생생한 기억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 누구도 기억해 주지 않으리라고 말하는 것처럼, 태피스트리는 반쯤 찢겨 늘어진 채 붉은 얼룩으로 더럽혀져 있었다.

  그러하니 태피스트리 안의 황금, 성녀의 머리카락은 이제 핏빛, 거대한 얼룩으로 뒤덮여 소리 없는 핏방울만을 대리석 바닥에 떨군다.

  찢긴 태피스트리 아래는 웅크린 남자가, 그가 그의 검을 마지막으로 쥐고 꿰뚫었던 자의 몸이 무생물로 화해 있었다. 죽은 자가 마지막순간까지 움켜잡았던 태피스트리, 그 안의 그림은 끝내 일그러지고 무너지고... 그의 피가 죄의 증거처럼 남아 흐른다. 

  뚝, 뚝.

  텅 빈 홀을 울리는 핏방울 소리와 함께 자신의 심장이 간헐적으로 떨다가 뛰곤 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는 혈육의 시체로부터 눈을 돌려 높은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본능적으로 늘 기다리곤 하던 시각이었다. 지금이었다.

  정면 꼭대기에 만들어진 장미창(rose window)과, 돔 주위에 빙 돌아가며 뚫린 열 세 개의 창이 서서히 빛나기 시작하고 있었다. 축복의 증표인 양 환하게 타오르고 있었다 

  빛이 내리고 있었다.

  가장 높은 창 열 네 개가 이제 막 밝는 새벽빛을 꽃잎처럼 흩뿌리는 이 순간, 피투성이 인간이 지은 홀이 가장 거룩하며 찬연한 자태를 드러내는 그 순간, 밤새 벌어진 살육으로 피의 강을 이룬 바닥과 석벽은 어떤 참작도, 면죄도, 사면도 있을 수 없을, 종말의 그 순간까지도 씻어질 수 없을, 오직 죄만을 드러내 보였다.

  모든 것이 너무나도 신성해 보인다.

  그 모두가 천년 전에 저질러진 죄악인 양, 괴로움 속에서 서서히 극상의 희열이 피어올랐다. 이제 남은 것은 긴 전투 끝에 상금처럼 주어질 끝없는 안식 뿐이며, 그것을 기대하고 있는 자신은 죄인의 천분에 맞는 또 하나의 죄를 더하고 있음이며... ... 

  색 바랜 죄악, 빛 아래 이리도 무력해지는 죽음이여, 눈앞에 번뜩이는 현실임과 동시에 누런 양피지에 쓴 선고장처럼 메마른 것들. 무엇을 바라 힘을 원하고 피를 흘렸는가, 무언가를 원한 것이라면 어찌하여 아무 것도 남기지 않고 왜 모두 부수어 버렸나.

  죄는 끝내 피로서만 갚아진다.

  절그럭, 그는 팔을 움직여 검을 당겼다. 한 조각 혈흔조차 묻지 않은, 얼음처럼 깨끗하고 차디찬 검을 향해 무미건조한 눈길을 보냈다.

  끝내 자신은 승리하지 못했다. 검은 다른 자의 손에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또다시 감당하기 어려우며 거부하기는 더욱 불가능한 힘을 내보여 그를 시험할 것이다. 그 역시 지리라. 진 자는 다시 검을 떨구고 핏발선 눈을 감지도 못한 채 지하로 들어갈 것이다. 파괴의 흔적, 또는 한때 존재했던 거대한 문명의 주춧돌만을 남긴 채.

  피 흘리는 태피스트리는 차라리 인간적이다. 후세의 인간들이여, 인간의 것이 아닌 힘은 오직 자연에게 맡겨 영원히, 그대로, 화석처럼, 멈춰 있도록 하라.

  즈르르륵.

  검은 이제 한 가지 목적을 위해 다시 곧게 세워졌다.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위대한 왕이었던 자, 그는 천천히 입 속으로 되뇌고 있었다.

  내손에 피 흘린 자들이여, 지하에서 울지 마라.

  나또한 그대들 뒤를 곧 따라갈 것이며 

  그때에는 내 남은 살점 한 조각까지 너희 손에 붙이리니 

  내가 흘릴 피로 광란 카니발을 벌인다 해도 주저 없이 따르리라.

  어떤 곳에서든 검은 늘 존재했다. 검은, 어느 순간 풀꽃 핀 동산에서 시골여인의 손을 잡은 젊은이의 허리에 있었다. 다른 순간 검은, 거대한 악의 세력과 벌일 첫 전투를 앞둔 야전 천막을 등지고 서서 캄캄한 허공에 휘날리는 수백 개의 깃발을 쏘아보는 흑발 여인의 손에 있었다.

  또한 황무지 가운데 미이라처럼 말라붙어 해진 시체와 함께 놓여있었다. 한 사내가 다가와 시체의 몸을 뒤진 다음 검을 잡았고, 북쪽을 향해 떠나갔다.

  또 다른 영상들이 스쳐갔다... ... 이제 그 검은, 원뿔형으로 높이 솟은 얼음 동굴 속에 들어와 있었다.

  파르스름하게 언 바닥에는 징검다리처럼 돌이 박혀 있었고 그 위로 긴 망토를 끌며 걸어가는 한 사람이 있었다. 얼음 바닥 저 아래에는 무엇이라 명확히 말하기 어려운 얼굴들이 흐릿하게 보였다. 호소하는 듯도, 절규하는 듯도 한 안타까운 표정들이 미동조차 없이 굳어져 있었다. 여자도 있었고 남자도, 어린아이도 있었다. 악하지도 선하지도 않은 혼들, 단지 패배했기 때문에 얼음 속에서 영어의 세월을 보내야 하는 종족의 정령들이었다.

  징검다리는 동굴 중앙에 솟은 흰 제단 비슷한 것까지 이어졌다. 가까이에서 보니 그것 역시 얼음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희게 언 공기가 천장 꼭대기로 올라가며 입김처럼 아른거렸다.

  제단 앞까지 간 그 사람은 미리 도착한 다른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들은 모두 늙은이였고, 한 명은 여자였다. 각자 다른 빛깔의 망토를 걸쳤으며 머리에는 관 비슷한 것을 쓰고 있었다.

  푸른 망토를 걸치고 북쪽에 선 자는 얼음처럼 흰 관을 쓰고 있었다. 관의 각 가지들은 산사나무 울타리처럼 마디마디 구부러지며 손을 뻗어 올렸으며 그 끝에는 얼어붙은 물방울 같은 것들이 맺혀 있었다.

  자줏빛 망토를 걸치고 서남쪽에 선 자는 이끼 낀 나뭇가지처럼 보이는 관을 쓰고 있었다. 세 번째로 동남쪽에 선 자는 오렌지빛 망토와 손이 베일 듯 날카로운, 얇은 금박으로 만든 관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제단에 검이 놓여 있었다. 

  “우리가 또 다른 크나큰 죄악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어찌 확신합니까?”

  “우리는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눈앞에 열린 재앙의 문을 보아 지나치는 것이 분명코 죄악이라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세계의 삶들을 지켜야만 합니다.”

  “더 연약하고, 더 평화로운 세계로 보내어질 지도 모릅니다. 그리하여 그 땅의 존재들에게 저항해 볼 겨를조차 주지 않고 순식간에 모든 것을 멸망시킬 지도 모릅니다. 아직도 그 안에 든 힘을 우리는 다 모릅니다. 종내, 그것이 한 개인의 소유로서만 기능하지 않고 스스로의 의지를 갖고 움직이게 될 지, 그 누가 알겠습니까.”

  “그것은 이미 의지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그는 소원을 들어주는 존재입니다. 작은 것부터 시작하지만, 결국은 원하는 모든 소원을 끝없이 들어줍니다. 인간은 그런 존재를 감당할 힘이 없습니다. 이 검 자체가 악도 아니고 선도 아닐진대, 우리 인간의 연약한 마음이 그 것을 무해한 존재로 내버려두지 못합니다. 또는 그것만이 아닐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모르는 것은 나뿐 아니라 이 세계에서 살아가는 존재 모두입니다. 나는 그런 무섭고도 강력한 불가지의 존재를 이 세계에 두지 않겠습니다. ” 

  “심지어 이 안에는 이미 뿌리 깊이 타락해버린 몇 명의 악한 혼조차 섞여 들어가 있습니다. 차라리 나는 이 검이 한 세상을 완전히 멸망시키기를 바라겠습니다. 그리하여 그 세상의 누구도 그 검을 다른 곳으로 보내거나, 직접 들고 나오지 않게 되길 바라겠습니다.”

  그리하여 말을 멈춘 세 사람은 각자의 손을 앞으로 내밀어 검을 향해 펼쳤다. 그들의 손이 서서히 빛나기 시작하고 그 빛이 손과 손을 잇고, 소용돌이치고, 또한 용솟음치는 빛의 고리로 변했을 때, 갑자기 저 높은 곳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곳은... 그곳은 어디지요? 당신들은 누구죠?”

  세 사람의 늙은 현자는 흠칫 놀라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그것은 신이나 초자연적 존재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단순히 놀라고, 또한 두려워하며 입을 연 한 소년의 목소리에 불과했다.

“아이야, 너는 누구냐? 어디에 있느냐?”

  마치 같은 질문을 서로 교환한 것과도 같은 모양새였다. 소년의 목소리는 잠시 주춤거리다가 다시 말했다.

  "저는... 제가 알 수 없는 세계에 있어요. 그냥 세 분을 아까 전부터 보고 있었어요. 아니... 세 분 뿐 아니라 다른 것들도 많이 보고 있었어요... ...“

  보리스, 한동안 다프넨이라 불렸지만 본래는 보리스라는 이름을 가진 그는 말을 한 뒤에도 자신이 무슨 소리를 한 건지 쉽게 이해할 수 가 없었다. 꿈을 꾼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같은데, 그런데 왜 자신은 아직도 정체 모를 장소에서 그 '꿈'들을 보고 있으며, 심지어 그들과 대화조차 가능한 것인가?

  자신이야말로 묻고 싶은 이야기였다. 여기는 어딘가? 저 안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세 사람의 노인들과 같은 곳에 있지 않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들과 자신 사이에는 마치 휘몰아치는 구름 사이에 뚫어 놓은 듯한 원형의 입구가 존재할 뿐이었다.

  그 전에 본 것들은 정말로 꿈인가? 저 짐승을 찔러 죽인 자와 그가 만들어낸 겨울, 자신이 수십 년에 걸쳐 이룩한 모든 것을 스스로 파괴해 버린 채 새벽을 맞는 지배자, 어둠 속 깃발 너머 밀집한 악과 대결하려 '그 검‘을 택할 것인가 고민하는 흑발 왕녀의 눈동자... ... 

  그들은 모두 검, 윈터러(Winterer)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들은 모두 자신보다 강했다. 모두 굳은 의지, 또는 고귀한 이상을 지녔던 자들이었다.

  어떤 모습은 단지 시작이었으며, 어떤 것은 끝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것은 윈터러가 거쳐온 자들의 손, 끝내는 피로 물들고 만 손들의 역사였다.

  “ ‘밖'에 있는 자로구나.”

맹렬히 회전하던 광채가 서서히 허공으로 떠올랐다. 동시에 제단에 놓여 있던 검도 함께 떠올랐다. 고리의 중심은 안개의 회오리와 같은 것으로 변했고, 그 틈새로 언뜻 다른 세상인 듯한 영상의 잔해가 번뜩였다.

  세 사람의 늙은 현자는 손을 풀고 제단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저들끼리 몇 마디를 나누었다. 잠시 후 보리스에게 말을 거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와 우리를 잇고 있는 매개가 무엇이냐? 네가 이곳에서 익숙한 물건이 무엇이냐?”

  보리스는 사실대로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도 꿈을 꾸는 듯 머리가 어지러웠다.

  “당신들의 검, 저는 그것과 똑같은 것을 가지고 있어요. 두 검은 쌍둥이인가요?”

  흠칫, 고개를 든 푸른 망토의 노인의 얼굴이 섬뜩한 것이라도 본 양 굳어져 있었다.

  “무엇이라고? 네가 저 검을 알고 있다고?”

  보리스는 혼돈을 느꼈다. 그러나 마음 속의 상태와는 달리 입술은 단호히 답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흔히 자신의 조각난 꿈속에서 맥락조차 알지 못하면서도, 자신만만하게 행동할 수 있는 것과도 같았다.

  "윈터러, 그것의 이름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당신들의 검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노인들은 명백히 당혹해 있었다. 잠시 후 오렌지빛 망토의 노파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것은... 겨울의 검이라고 한다. 월동자라고도 불리며, 다른 이름으로는... 윈터러... 라고도 한다......” 

  이번에는 보리스 쪽에서 충격을 받았다. 같은 검이 두 개라니?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 건가? 그토록 특별하다고 느껴 온 물건, 또한 두렵고도 강렬했던 검은 두 개 ... 가 아니라 세 개, 네 개, 그보다 더 많을 수도 있는 것일까? 어느 세계에나 그와 같은 검이 존재한다는 걸까? 그가 본 영상들 속의 수많은 윈터러는?

  아니라면... 그는 검의 과거, 혹은 미래와 대화를 나누고 있는가?

  보리스는 눈을 돌려 자기 옆에 떨어져 있는 윈터러를 발견하고 그것을 주워 올렸다. 자루 대신 천을 감아 놓은 곳을 쥐고, 날을 아래로 한 채 앞으로 내밀었다. 그 순간, 흰 날에서 무지개 빛 같은 영롱한 광채가 실체를 뒤덮으며 번쩍거리는 것이 보였다.

  "좀더 정확히는... 제 검이 과거에 가졌던 모습과 비슷합니다. 지금 제 검은 단순한 은빛 날로 변해버렸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순간 갑자기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저들의 검이 그 의 윈터러와 같은 것이든, 다른 것이든, 과거였든, 미래였든, 적어도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다면 힘 또한 비슷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실제로 어느 세계에나 같은 검이 존재한다면... 저들에게 물어볼 수도 있잖은가! 그가 오랫동안 궁금해하던 것들을, 도대체 이 검은 무엇이며, 어떤 힘을 가지고 있으며, 어떻게 다루어야만 하는 것인가를......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방금 자신이 보던 광경이 무엇을 하려던 것이었는지 새삼 떠올렸다. 그들은 '그들 세계의 윈터러'를 다른 세계로 보내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자줏빛 망토의 노인이 입을 열었다. 

  “짐작컨대 너는 '겨울의 검'의 옛 주인이거나 또는 나중 주인인 모양이다. 내 맹세코 확언하건대 이와 같은 검이 하나 더 존재했다면 그물눈처럼 얽혀있되 서로와 연관 맺지 않고 살아가는 다양한 세계들, 그 어느 곳도 온전치 못했을 것이다. 나는 그 세계들을 다 모른다... 그러나 어딘가에 틀림없이, 수천, 수만, 수억의 가능성으로 존재함을 안다. 그 가운데 우리들의 세계는 저울축이 지나치게 기울 정도로 힘과 마력이 비대하게 발달된 세계다. 그것은 우리가 어떤 이유에선가 다른 세계로의 문을 열었을 때, 언제고 우리의 힘이 반대편 세계로 흘러나가 균형을 이루려 했다는 것으로 알 수 있다.”

  “그런 우리의 세계가 저 검 하나를 용납하지 못했을진대 다른 어떤 세계가 그 검을 품고서 지금껏 침묵하였으랴? 아이야, 너의 세계에서 그 검은 얼마나 오래 존재하였느냐? 얼마나 많은 재앙을 불러일으켰느냐?”

  보리스의 손에서 윈터러는 더욱 화려한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흡사 수백 조각의 색유리로 만든 스테인드 글라스(stained glass)처럼 빛났다.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넌 나를 놓치고 싶지 않을 거야... 영원히, 언제까지나......‘

  "모르겠습니다. 이 검은 아버지가 형에게, 그리고 형이 제게 물려주었고 과거에 검을 가지려던 사람들 사이에 많은 싸움이 벌어졌다고 알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지만 재앙이라 부를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아니, 저는 잘 모릅니다. 전 겨우 올해로4년째 이 검을 지녔을 따름이고......“

  “잠깐, 4년, 4년이라고? 아이야.... 네 나이가 몇이지?

  "올해 7월에 15세가 됩니다만......“

  말하고 나서야 저들의 시간이 여기와 같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문제에 생각이 미쳤다. 그러나 세 명의 현자는, 그런 것에 마음쓰기에는 이미 다른 문제로 너무 큰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믿을 수가 없다. 겨우 열 몇 살의 어린아이가 어찌 '겨울의 검'을 4년 동안이나 지니고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과연 저 아이의 검이 이 '겨울의 검'과 같은 물건일까요?”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은... 아니, 검의 힘이 아니라면 어떻게 저 아이와 우리가 이렇듯 대화하겠습니까? 이건 틀림없이 다른 시간대의 검이 경계와 맞물려......오오!”

  갑자기 푸른 망토의 현자가 무언가 깨달은 듯 탄성을 질렀다. 그는 이제 손까지 약하게 떨고 있었다.

  “지금 우리는 '겨울의 검'의 또 다른 힘을 보고 있군요! 저 아이의 존재는 필시 이 검 안에 깃들인 과거의 기억입니다! 검에서 솟아오른 옛 기억이 심지어 스스로를 실체로 느끼면서 우리에게 말을 걸다니! 이 검 안에 몇 명의 악인의 혼이 깃들여 있다고 했는데, 그것들말고 저러한 어린아이의 혼조차 깃들여 있었군요!” 

  그러나 그 말을 듣던 보리스는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다. 멀쩡히 살아 있는 자신이 검  안에 깃들인 기억의 일부라니? 자신이 검 속에 갇힌 혼이라고? 그렇다면 그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온갖 감정들과 추억들이, 바로 얼마 전까지 그가 살아가고 있던 세계가, 전부 까마득한 예전에 지나가 버린, 지금은 존재하지도 않는 허상이란 말인가?

 그럴 리가 없다!

  “말도 안 되는 소리는 집어치우시죠! 어째서 현재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을 멋대로 옛날에 죽은 그림자로 바꿔버리는 겁니까? 전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러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갖가지 일들을 겪고 있었고, 방금 전에는 당신들말고 수많은 사람들의 손에 쥐어진 서로 다른 윈터러들을 보고 있었죠! 그걸 보며 난 모든 것이 내 꿈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단 말입니다. 그럼 제 의견을 말해 볼까요? 전 오히려 당신 자신들이 윈터러의 과거이고 검 속에 든 혼들이라고 생각되는군요! 적어도 제가 보기엔 말이죠!"

  제단 위에 떠오른 직경 1미터 가량의 빛의 회오리를 향해, 함께 떠오른 검의 끝이 서서히 들어가고 있었다. 얼마나 오래 걸리게 될 지는 알 수 없어도 분명히 다른 세계를 향해 이동하고 있었다.

  “이런...믿을 수 없는 일이 ......”

  그러나 잠시 후 오렌지빛 망토의 현자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의 말이 맞습니다...... 저 아이, 그리고 우리가 똑같이 스스로를 현실 속에 살아 있는 존재로 간주하고 있다면, 어느 쪽이 옳은지 그 누가 판단하겠습니까? 어느 쪽이 허상이고 그림자인지, 또는 둘 다 아닌지 확신할 근거는 어디에도 없는 것 같습니다.”

  그 말을 듣는 보리스도 순간 섬뜩한 기분을 느꼈다. 정말로 저들 말대로라면 자신이 착각하고 있을 가능성도 결코 배제할 수 없지 않은가?

  그가 사랑하고 집착한 모든 존재들... 아버지와 고향, 형 예프넨, 나우플리온, 그리고 이솔렛...... 그들 모두가 까마득한 옛날에 죽었고, 이미 흔적도 기억도 남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오직 기이한 검 속에 남아 끝없이 되풀이되는, 자신의 조각난 기억 속에서만 살아가 

고 있을 지도 모르는...... 

  현실이란 어디지? 현재란 언제지? 진짜와 가짜, 실체와 그림자는 어떻게, 누가 구분하는 거지?

  2. 얼음 거미의 집 

  그 날 오후 공회당에서는 오랜만에 여섯 사제들을 비롯해서 열 일곱 명의 수도사들, 그리고 스콜리의 선생들까지 모두 소집된 회의가 열렸다. 다른 사람들의 출입은 금지되었지만 이미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섬 전체에 화제가 되고도 남을 모임이었다.

  사제들의 자리인 일곱 원을 중심으로 둥글게 의자가 늘어놓아졌다. 의자의 숫자는 여기에 들어올 수 있는 사람의 숫자와 꼭 같았다. 이윽고 사람들이 서서히 들어와 자리를 채웠다.

  그리고 이솔렛이 있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모두 도착하기도 전부터 들어와 의자 하나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지만 아무도 왜 왔느냐고 묻거나, 심지어 나가라거나 하는 말을 하지 못했다. 실제로 잠시 후 와야 할 사람이 모두 들어와 자리에 앉았지만 의자가 모자라는 사람은 없었다.

  "모두 와 주셨군요. 이제 그러면 공회당의 문을 닫겠습니다."

  문이 닫히고 이어 철컹, 하고 빗장이 내려놓아졌다. 데스포이나 사제를 돕는 수도사들이 사방에 열린 창문들을 모두 닫고는 자리로 돌아왔다. 주위가 어두워지는가 싶을 무렵 갑자기 일곱 원의 중앙에 불이 밝혀졌다. 데스포이나 사제가 그 자리에 지팡이를 짚고 서 있었고, 빛은 지팡이 머리에 장식된 커다란 초승달 모양 크리스털에서 솟아나고 있었다.

  "회의를 시작합니다. 오늘 우리의 말과 행동은 달여왕께서 눈 떼지 아니하고 굽어볼 것이며, 오늘 우리가 내릴 결론을 저울에 달아 취하고 버리시는 이 역시 그 분이십니다. 옳고 그름은 오직 그 분의 손에만 달려 있음이니 우리는 모두 참의 세상에선 장님이자 귀머거리요,

단지 암중에서도 사심 없는 발자국을 남기는 것만이 우리를 열린 문으로 이끌 것입니다. 찬양하라."

  "찬양하라,"

  "찬양하라."

  뒤따르는 되풀이는 나지막했지만 한 입으로 내는 목소리처럼 같은 어조를 지니고 있었다.

  "섭정께서는 오늘 이 자리에 안 계십니다. 대신 한 소녀가 그 분의 귀를 대신하고, 또한 입을 대신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모두 고개를 돌렸다. 데스포이나 바로 뒤쪽에 약간 높직 한 의자가 놓여 있었고, 그 위에 리리오페가 앉아 있었다. 아직 섭정의 정식 후계자로 선포될 나이가 아닌 까닭에 그냥 ‘한 소녀' 였다. 그

러나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조차 까딱해 보이지 않는 리리오페를 보는 사람들은 이미 자신의 위상을 충분히 자각한 '섭정의 딸'의 존재를 느끼고 있었다.

  "오늘 우리가 모인 것은 한 소년의 불행한 실종에 대한 대책을 세우고, 그 원인을 밝혀 옳은 대안을 내고자 함입니다. 현재의 상황은 이미 모든 분들이 아시고 계실 테니 굳이 재론하지 않겠습니다. 우선은 수색을 계속할 것인지, 한다면 어떤 방법이 있을지 이야기를 모아보도록 합시다."

  섬 안에서 사제들 다음가는 권위를 지니는 열 일곱 명의 수도사들 가운데는 섬의 산맥 곳곳에 움막을 짓고 천지간의 변화를 살피며 은둔하는 자들이 아홉이었다. 그들 가운데 대표격인 자가 입을 열었다.

  "일단 섬 전체를 샅샅이 수색한다는 것은 불가능함을 다시 말할 필요는 없겠지요. 지팡이의 사제께서는 마법으로 섬 전체를 구석구석 보실 수 있으실 텐데 어찌하여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까?“

  데스포이나는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물론 그렇게 했습니다. 그러나 무언가 알 수 없는 힘, 또는 물질이 그의 존재를 가로막고 있어서 그것을 꿰뚫고 볼 수가 없었습니다."

  "지팡이의 사제께서 알지 못하는 힘이 지금까지 이 섬 안에 있었습니까? 저는 금시초문입니다."

  그 때 옆에서 한 목소리가 끼여들었다.

  "왜 없겠습니까? 그 아이가 이 섬에 들어올 때 가져온 그 이상한 검은 무언가 색다른 힘을 가진 것 같던데요."

  데스포이나는 고개를 돌렸다. 수도사 중에서 난 소리였다. 억지 웃음 비슷한 것을 입가에 머금은 채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그 자를 보며 데스포이나는 침착하게 말했다.

  “펠로로스 수도사께서는 어디에서 그런 이야기를 들으셨지요?”

  펠로로스는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맏아들과 꼭 같은 빛깔의 붉은 머리카락을 길게 기른, 매우 키가 큰 사내였다. 하반신 마비로 서서히 시들어가고 있는 친형과는 대조적으로 비대한 몸집이었다. 그 의 이름이 가진 뜻은 '거인' 이었다.

  "그 애와 제 아들 녀석이 몇 번 싸웠지요. 그 애의 검이 아주 희한한 힘을 가지고 있어서 이길 수 없었다고 합디다. "

  몸을 앞으로 조금 숙인 채 앉아 있던 나우플리온이 고개를 번쩍 들며 그 자에게 시선을 보냈다. 헥토르와 다프넨 사이엔 있었던 일은 이미 작년 여름에 함구하기로 다 합의한 터였다. 그 자리에는 당연히 헥토르의 아버지인 펠로로스도 있었다. 게다가... 다프넨은 한 번도 윈터러를 사용한 일이 없었다. 이제 와서 다프넨에게 불리한 상황이 닥쳤다고 해서 보란 듯 약속을 어기고 여론을 모아 어떻게 해볼 생각인가?

  그렇게는 안 될 것이다.

  "본 사제로서는 풍문으로도 전해듣지 못한 이야기로군요. 펠로로스 수도사, 아이들끼리 싸우다가 홧김에 한 이야기들을 그대로 믿으십니까?'

  데스포이나의 목소리는 흡사 대리석 바닥처럼 차고 단단했는데, 몇몇 사람들은 그녀가 그런 목소리로 흔히 상대방을 비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예상대로 펠로로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허, 무슨! 제 아들이지만 헥토르는 제 잘못을 감추려 히튼 소리 따위를 하는 녀석이 아닙니다. 제가 언뜻 듣기로는 그 검에서 얼음 같은 기운이 쏟아져 주위 사방을 겨울로 만들어 버린다고 하던데... 게다가 그 검은 스스로 자기 모양을 바꾸기도 한다지요?“

  데스포이나는 입술만움직여 미소를 지어 보였다.

  "수도사님은 아드님한테서 별난 이야기를 많이 듣고 계시나 봅니다. 본 사제는 헥토르가 검에만 자질이 있는 줄 알았습니다만."

  주위 사람들이 어이없어하며 약간 웅성거렸다. 지금껏 일어난 일들이 모두 비밀에 붙여졌던 만큼, 그들로서는 펠로로스 수도사의 이야기가 아들이 꿈에서 봤을 법한 이야기들을 옳긴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었다.

  "흥, 믿지 않으신다 그 말씀입니까? 그러면 지금 일어난 일은 뭘로 설명하시렵니까? 그 다프넨 녀석이 검을 들고 나가 사라졌고, 지팡이 의 사제님이 쓰신 마법에도 잡히지 않고 있잖습니까? 그 녀석이 숲을 지키는 자들의 눈에도 띄지 않고 숲 경계를 넘어 선착장까지 가서, 배를 조종하는 법도 배우지 않은 주제에 섬 밖으로 달아나 버렸을까요? 아니면 저번처럼 저 절벽뿐인 북쪽 바다에 갔다가 물에 빠져버렸을까요?“

  마지막 말은 명백히 이솔렛을 끌어들여 비아냥댄 것이었다. 그러나 이솔렛은 무표정하게 앉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펠로로스의 커다란 목소리만이 계속해서 울렸다.

  "그러니 저야말로 묻겠습니다. 어째서 제 귀에까지 들어온 일을 섬의 모든 일을 보고 듣고 하셔야 할 지팡이의 사제께서 모르고 계십니까? 최근 나이가 드셔서 사제직에 소홀해지신 것 아닙니까? 아니면 사사로운 정에 눈이 멀어지셔서......

  "섣부른 말씀은 삼가세요!"

  그 말을 한 것은 한쪽에서 왼손을 번쩍 들어올린 소매의 사제 페트라였다. 그녀의 손목에 감긴 폭넓은 브레이서(bracer)에서 커다란 은장식 보석이 번쩍, 빛을 냈다.

  "사제를 모욕하는 죄가 큰 것을 모르실 분이 아닌데 어찌 그러십니까? 쓸모 없는 이야기로 이야기의 줄기를 흐리게 하지 마세요. 우리는 순례자의 아이를 잃어버렸습니다. 그 아이에게 어떠한 죄가 있다면 살아 돌아온 뒤에야 추궁할 일이에요."

  소매의 사제는 섬의 순례자들이 먹고, 자고, 일하고, 즐기는 생활 전반을 돌보았으며 출산이나 혼인, 장례 등의 생활 의례들을 관장하는 직분을 맡고 있었다. 따라서 다프넨과 별 친분이 없다 해도 그에게 닥친 불행에 민감할 수밖에 없었다.

  “하, 만일 돌아오지 않으면 어쩔 건데요? 그 녀석이 실종되었다는 것도 간단히 믿을 수만은 없습니다. 자신이 가진 검에서 이상한 힘을 발견하고는, 그걸 가지고 섬에 위해를 끼치려고 어딘가에 숨은 것일지도 모르잖습니까? 그 이상한 능력으로 자기가 있는 곳을 일부러 은 

폐했겠죠!"

  "근거 없는 일을 확신조로 말하지 마세요! 그 소년이 왜 그런 일을 하겠습니까? 그 애가 섬에 피해를 끼쳐서 무슨 득을 얻는다는 건가요? 갑자기 그런 의심을 늘어놓는 이유가 무엇이지요?“

  "그 녀석은 대륙에서 왔잖습니까! 그 녀석의 과거를 조금이라도 아는 것은 검의 사제님 뿐이고 우리가 아는 것은 없습니다. 그 녀석을 의심할 근거가 없다면, 믿을 수 있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어떻게 판단 을 내립니까?“

  그렇게 말하고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돌린 펠로로스의 눈에 자리에서 일어나는 나우플리온의 모습이 들어왔다.

  "간단합니다. 당신이 나를 믿느냐, 또는 아니냐."

  짧은 말이었지만 그 순간 검의 사제의 권위의 상징인 '우레의 룬‘이 그의 다리에 부딪쳐 덜컥, 소리를 냈다. 의도적인 행동이 아니었으나 이상스럽게도 그 소리는 공회당에 들어와 앉은 사람들 모두의 귀에 아주 생생하게 들려왔다.

  "흠, 으흠, 거, 검의 사제님...... 다프넨이라는 소년을 당신이 데려왔다고 해서 억지로 감쌀 필요는 없어요. 사제님은 그 애를 선택한 사제님의 눈이 잘못되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려고 너무 애쓰시는 것 같군요. 사제님도 때로 사람을 잘못 볼 수 있는 거고, 저 역시 사제님까지 이 일에 끌고 들어갈 생각은 없......“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

  나우플리온은 차가운 눈동자로 상대방을 쏘아보며 말을 이었다.

  "전 다프넨을 잘 알고 있습니다. 펠로로스 수도사, 당신의 기준에 그 아이가 악한 자라면, 그 울타리에는 본인 역시 빠지지 않고 포함될 것입니다. 그 말을 한 번 반대로 돌려볼까요?“

  나우플리온은 그 정도에서 적절히 말을 그쳤다. 생략된 말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었다 .

  펠로로스가 뭐라 더 반박하기 전에 데스포이나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무익한 논쟁은 그만두십시다. 달여왕께서는 결론에서 벗어나 맴도는 토론을 참아주지 않으십니다. 좀더 논지를 좁히기 위해 제 의견을 먼저 말할까요."

  그녀는 짚고 있던 지팡이에서 손을 뗐다. 그러자 지팡이는 바닥에 그려진 원들의 중앙에 그대로 우뚝 서 있게 되었다.

  "지금까지 여러 산줄기를 돌아다니며 다프넨을 찾으려 한 것은 다프넨이 실종되었을 당시, 다프넨에게 신성 찬트(Holy Chant)를 가르치던 이솔렛이 순간적으로 감각의 동일시를 겪으면서, 발을 헛디뎌 까마득히 깊은 곳으로 떨어지는 듯한 감각을 맛보았기 때문입니다. 신성 찬트를 가르치는 과정에서 스승과 제자간에 감각의 공유가 일어나는 것은 과거에도 종종 있었던 일이니 우리에게 이보다 믿을만한 정보는 달리 없다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근방의 산 밑바닥 어디에서도 그의 흔적을 찾지 못했습니다. 마법으로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요? 저는 이 문제에 대한 열쇠로 그가 가지고 있던 검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서 있던 나우플리온이 고개를 홱 돌려 데스포이나를 보았다. 펠로로스 수도사는 ‘그러면 그렇지'하는 듯한 표정이었고, 다른 사람들도 놀란 듯 술렁였다. 나우플리온 옆에 앉아 있던 서클렛의 사제 모르페우스의 얼굴에도 당황한 빛이 떠올랐다.

  “검은 다프넨이 섬으로 오기 전부터 이미 그의 것이었습니다. 처음부터 나는 그 검의 내부에 강한 힘이 잠재되어 있다고 느꼈습니다. 힘의 성격은 알지 못했으나 그것이 밖으로 나을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다프넨은 그러한 검을 꽤 오랫동안 별다른 문제없이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의 검에 관해서는 제가 더 잘 압니다! 그것은 그 아이가 대륙에서 속해 있던 집안에서 대대로 물려진 가보일 뿐이니까요!"

  데스포이나는 대답 없이 약간 눈을 내리깔았다. 소리친 당사자인 나우플리온은 목이 타는 것을 느끼며 데스포이나를 향해 간절한 시선을 보냈다.

  윈터러와 스노우가드(Snowguard), 즉 윈터바텀 킷(WinterbottomKit)에 대한 이야기는 오랫동안 고립되어 있던 섬에는 잘 알려져 있지않았다. 대륙에서 몇 년간 지낸 나우플리온이 전해들을 수 있었던 이야기도 단편적인 것들에 불과했다. 그러나 직접 보게 된 윈터러는 결코 단순한 보검은 아니었다. 겉으로 드러난 특이한 성질들로 파악될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위협이 느껴지는 존재였다.

  검의 사제인 자신조차도 검 안에 깃들인 위험한 힘을 느낄 수 있었는데 마법과 예언을 다루는 지팡이의 사제가 어찌 그것을 몰랐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스포이나는 지금까지 그것을 문제삼지 않았으며, 심지어 잘 숨겨주기까지 했다.

  이제 더 이상은 안 된다는 것일까.

  "검의 사제께서 하신 말씀도 맞습니다. 어쨌든 그것은 대륙의 옛 물건으로서 우리 순례자들로서는 잘 알지 못하는 미지의 대상입니다. 단 하나, 제가 알 수 있었던 것은 그 검에게 우리 세계 위에 겹쳐진 이 공간으로 뚫고 들어갈 수 있는 힘이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것만 가지고 일단 이야기합시다. 그 아이는 이공간으로 들어갔을까요? 단순히 그러기만 했다면 저의 힘이 그를 발견하지 못했을 까닭이 없습니다. 심지어 이공간에 갇힌 그를 부를 수도 있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의 존재는 이공간 속에서도 감지되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은 무엇일까요. 바로 이세계입니다."

  이곳에 모인 사람들은 일단 이공간과 이세계의 차이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너머에 가본 사람도,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자세히 아는 사람도 없었다.

  잠시 후 스콜리의 제네시 선생이 입을 열었다.

  "이세계란 저... 옛 왕국에서 우물 너머의 세계와 같은... 그런 것입니까? 그것과 같은 통로가 다시 생겨났다는 말씀이십니까?“

  데스포이나가 답했다.

  "하나의 가능성입니다. 이 자리에서 분명히 밝히지요. 저는 검의 사제와는 달리 다프넨이 가진 그 검 속에 위험한 힘이 잠재되어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효과적으로 누르고 있는 것 역시 그 소년의 힘이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오랫동안 궁금해하며 저는 그 아이에게 특별한 능력이 있는가 살펴 왔습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없더군요. 그가 타고난 핏줄은 마법적인 전통과는 무관했으며 그가 가진 자질들도 보통의 아이보다 좀더 나은 정도에 불과합니다."

  나우플리온은 데스포이나의 목소리를 하나도 놓치지 않고 듣고 있었다. 문득 자신이 그녀를 얼마나 알았던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다프넨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미숙한 소년이 막대한 힘을 지닌 마법 무기를 지니게 되면 순식간에 그 마법에 먹혀 버리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나 다프넨은 그 검을 몇 년째 아무렇지도 않게 지녀 왔습니다. 이런 경우 우리의 전통 속에서 내려지는 판단은 한 가지입니다. '그에게 그 검을 주라, 그리고 자신의 재생과 파멸을 모두 책임지게 하라'."

  그때였다. 공회당의 문을 누군가 거세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데스포이나는 무시했다. 그녀의 주름진 얼굴이 미세하게 떨리고, 늘어진 눈꺼풀 안쪽의 눈동자가 힘겹게 빛나고 있었다.

  "그래서 저는 그 검을 그에게 맡겼습니다. 그가 검의 힘에 맞는 자로 새로이 태어날 것인가, 아니면 힘에 이끌려 스스로를 망칠 것인가, 그것을 지켜보려 하였습니다. 그리고 지금 저는 그가 후자를 택한 것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검은 저 자신을 탄생시킨 이세계로 돌아가 더 자유로이 힘을 방출하게 되길 원했고, 그 문이 열리자 다프넨은 유혹에 못 이겨 거기에 발을 내딛은 거지요."

  싸늘한 침묵이 감도는 가운데 문을 두드리던 소리가 멈췄다. 그리고 대여섯 명이 저마다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제님! 흰 새들이... 가져 왔... 들어가려... 창으로... 문을......"

  공회당 밖에서 수십 개의 날개들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를 모두가 들었다. 소리는 길게 끌리며 공회당을 우회했고, 이윽고 한 개의 창을 향해 거칠게 날아들어 왔다.

  덜컹! 탕!

  닫았던 창의 덧문이 걸쇠까지 떨어진 채 바닥에 나굴었다. 뚫린 창으로 스무 마리는 되어 보이는 흰 새들이 줄지어 날아드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펼친 날개는 창문보다 컸기에 새들은 모두 날개를 살짝 접으며 들어왔다가 천장 쪽으로 높이 날아오르며 양 날개를 쫙 폈다. 잠깐만에 그들의 머리 위에 흰 새들이 큰 원을 그리며 나는 장관이 펼쳐졌다.

  같은 순간, 사람들은 저들 가운데 한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나 몇 걸음 앞으로 나오는 것을 알았다. 두 팔이 들어올려지자 길게 늘어진 흰 소매가 또 하나의 날개인 양 흔들렸다.

  네 깃, 내릴 곳으로 돌아오노라 

  절벽 끝에 솟은 강철의 나뭇가지 

  천 년을 기다린 굽어진 홰 끝에 

  이제, 날개 접고 앉아 굽어보노라

  그들이 이솔렛의 신성 찬트를 들은 것은 실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사실 그들은 찬트가 무엇인지 거의 잊어버리고 있었다. 스콜리에서 마법 주문과 주가를 가르치는 필로멜라 선생은 충격을 받은 나머지 두 손으로 입을 막은 채 부르르 떨었다. 신성 찬트는 모든 마법적인 노래 위에 군림하는 노래 중의 노래였다 이솔렛의 찬트가 봄에 한껏 물이 올라 초록으로 뒤덮인 나뭇가지와 같다면, 자신이 아이들에게 가르치던 것은 한겨울의 말라비틀어진 가지였다.

  찬트가 영창 되자마자 새들은 회오리 같은 곡선을 그으며 하강하여 이솔렛이 있는 쪽으로 모여들었다. 맨 앞에 루비 목걸이를 한 흰 새의 공주, 요즈렐이 있었다. 다른 새들은 느리게 날갯짓하며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이솔렛의 손끝에 요즈렐이 살짝 내려앉았다.

  “......“

  이솔렛은 입을 다물더니 요즈렐의 입에 물려 있는 깨진 유리 비슷한 투명하고 날카로운 조각을 받아들었다. 요즈렐은 한 번 더 퍼덕이더니 이솔렛의 왼쪽 어깨로 옮겨갔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을 둘러보는 것처럼 고개를 몇 번 움직였다. 빨간 눈동자는 그지없이 침착하게 몇 명의 얼굴을 주시했다.

  이솔렛의 손 안에서 그 조각은 파랗게 빛을 냈다. 그것은 실제로 깨어진 물건의 일부였으며 매우차가웠다. 얼음 같았으나 결코손에서 녹아 내리지는 않았다. 이솔렛은 요즈렐을 어깨에 앉힌 채로 데스포이나에게 걸어갔다. 그리고 투명한 조각을 그녀에게 건네 주었다.

  데스포이나의 얼굴이 변했다.

  "이것은......“ 

  같은 것을 단 한 번 본 일이 있었다. 바로 작년 여름, 폐허의 마을을 뒤덮었던 윈터러의 얼음들 속에서.

  허공을 돌던 새들이 갑작스런 기류를 탄 것처럼 입구를 향해 날아가는 것이 보였다. 잠시 후 데스포이나가 손을 들어올렸다. 거역할 수 없는 목소리가 명령을 내렸다.

  "문을 여시오! 사제들은 모두 저 새들을 따라갈 것이오! 따를 자는 따르시오!"

  쉬운 길이 아니었으나 여섯 사제가 모두 앞장선 까닭에 뒤따르는 자들은 그리 어렵지 않게 갈 수 있었다. 이어지지 않는 길은 데스포이 나의 주문으로 날아오른 돌들이 채웠으며, 가로막는 나뭇가지와 잡목들은 나우플리온이 잡은 '우레의 룬‘이 짧은 불길을 일으키며 흔적 없이 잘라냈다. 모르페우스의 '감지의 지팡이' 가 있으면 잠깐씩 사라 지곤 하는 새들의 뒤를 따르는 것도 간단했다. 사제들이 이렇듯 자신들의 능력을 주저 없이 보이는 것도 유례가 드문 일이었다.

  가파른 절벽으로 이어지는 협곡을 절반 정도 내려갔을 때, 앞 뒤 좌우의 석벽에 하얀 자국 같은 것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좀더 다가가 보니 그것은 눈 섞인 얼음이었는데, 지난 겨울에 아무리 눈이 많이 내렸다 해도 그 자국이 이런 계절까지 남아 있는 것은 불가능했다.

  바닥에 가까워질수록 눈 자국들은 한층 늘어났다. 사람들은 저마다 궁금해하며 아래를 내려다봤지만 그날따라 협곡에는 안개가 제법 끼어 있어 2, 3미터 아래는 알아볼 길이 없었다.

  "점점 이상한 기분이 들어요. 무언가 뜻밖의 것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단 말이에요."

  곁에서 속삭이는 여자 수도사의 목소리를 들으며 펠로로스는 새삼 목을 가다듬었다. 차근차근 자신이 할 말들을 골라 보았다. 그는 특별한 권한을 지닐 수 없는 섭정의 동생에 불과했지만, 신체적 약점 때문에 종종 무기력해지는 섭정 스카이볼라의 가장 가까운 상담역이라는 좋은 위치를 갖고 있었다. 리리오페와 헥토르의 혼약을 오랫동안 추진하고 헥토르가 차기 검의 사제에 가장 적당한 인물인 양 주위의 분위기를 조성해 온 것도 그였다.

  그런 가운데 뜻밖의 소년이 나타나 검의 사제의 첫 번째 제자가 되었으며, 섭정의 말에 따르면 리리오페의 관심도 끌고 있다고 했다. 그가 추구해 온 두 가지 목적이 모두 어그러지는 꼴이었다. 그런 마당이니 그게 모함이든 사실 규명이든, 다프넨을 추방하는 일에 앞장설 수 밖에 없었다. 다프넨에게 별다른 감정은 없었다. 사실 다프넨이 어떤 소년인지 잘 알지도 못했다. 그러나 아들들의 앞을 가로막는 존재를 없애는 일에만은 소홀할 수도, 너그러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윽고 사방은 온통 빙벽으로 변해 버렸다.

  더 놀라운 것은 처음에는 손을 대면 녹던 얼음이 이제는 칼로 찔러도 끄떡도 않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데스포이나는 모두의 걸음을 멈추게 했다. 그리고 이솔렛을 앞으로 불렀다.

  이솔렛은 데스포이나와 굳이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자신이 할 일을 잘 알고 있었다. 그녀는 요즈렐의 귀에 몇 마디 속삭인 다음 새를 날려보냈다. 새는 아래로 내려가 안개 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곧 멀지 않은 곳에서 특유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이솔렛은 입 속으로 무언가 몇 마디 외우는 것 같더니 단숨에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아니!"

  외마디 외침들은 곧 의아한 웅성거림으로 변했다. 멀지 않은 곳에서 바닥을 딛는 소리가 울린 까닭이었다. 잠시 후 데스포이나가 지팡이를 휘두르며 몇 개의 룬을 외우자 몇 미터 가량의 안개가 사방으로 갈라졌다.

  구름덩어리 같은 안개들이 골짜기 양쪽으로 밀려나는 가운데 보이는 것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이솔렛, 그리고......

  "저, 저건 무엇이란 말인가......“

  이솔렛이 발 딛고 있는 곳, 아래쪽 협곡을 막고 있는 것의 실체는 거대한 얼음 덩어리였다.

  모양새만으로는 누군가가 절벽 꼭대기에서 굴려 떨어뜨린 것처럼 보였지만 그러기에는 너무나 컸으며, 절벽 사이에 끼여 멈춘 것도 아니었다. 얼음 덩어리에서 수백 개는 될 법한 얼음 가지들이 뻗어 나와 절벽을 붙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살아 생전 이런 것을 보게 될 줄이야......“

  "실로 조화로다... 여왕께서 잉하심이 아닌가?“

  “달여왕이시여, 당신의 뜻입니까, 아니면 당신의 뜻을 거스름입니까”

  수도사들이 충격으로 몇 마디씩 내뱉는 가운데 데스포이나는 허공에 자신의 몸을 띄웠다. 그리고 이솔렛과 마찬가지로 얼음 위로 내려갔다.

  직경 9미터는 되어 보이는 얼음의 구체였는데 표면은 몹시 울퉁불퉁했다. 수많은 얼음 조각들이 급작스레 하나의 결정을 향해 모여들어 달라붙은 것 같았다. 굳이 비유하자면 거대한 거미집, 얼음 거미의 집이라고 할까.

  또는 대지의 가장 깊은 곳에서 거인의 손으로 뽑아낸 거대한 덩이식물 같기도 했다. 사방으로 수백, 수천의 미세하거나 굵은 뿌리들이 뻗어나가 절벽을 움켜쥐고 있었다. 그것은 모두 얼음, 희다 못해 푸르게 빛나는, 날 돋은 얼음이었다.

  흰 새의 공주는 다시 날아오르더니 절벽으로 이어진 얼음 가지 하나에 날개를 접고 앉았다. 새의 발이 닿자 비죽비죽 돋은 서리가 몇 조각 부서지더니 얼음 위로 떨어져 잘그랑대는 소리를 냈다.

  눈이 아플 정도로 희었다. 모두. 다.

  데스포이나는 이솔렛 곁으로 다가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알 수 있는 거로구나. 그렇지?“

  이솔렛은 고개를 들고 데스포이나를 올려다보더니 말했다.

  "저들을 물러가게 해주세요."

  무표정한 얼굴에 몇 가닥 흘러내린 머리칼도 흰빛이었다.

  3. 계승자

  “겨울의 검은 우리 세계에서 최소한 2백 년간 존재해 왔다. 그 이전에는 이곳에서 잠들어 있었는지, 또는 다른 세계에서 존재하고 있었는지 그런 것은 모른다. 그러나 검은 그 9백 년 동안 세 명의 남녀에게 힘을 주고, 전능하게 만들어, 끝내 스스로를 쓰러뜨리도록 만들었다.

힘이란, 그 자체로 악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산 자 가운데는 아직껏 그 힘을 담을 정도로 큰 그릇을 지닌 자가 없었다.”

  “어쩌면 인간이 가눌 수 있는 힘이 아닐 지도 모른다. 힘은 필연적으로 존재를 이끈다. 그것은 선악의 문제도 아니요, 고귀함과 천함의 문제도 아니요, 먼저 됨과 나중 됨의 문제도 아니다. 그리고 힘은 먹이를 필요로 한다..... 힘을 가진 자들은 처음에는 힘을 인정받기 위해 대항하는 것들을 부수고 세상을 원하는 모양대로 깎는다. 그러나 깎아낼수록 흉한 것밖에 보이지 않고, 흉한 것을 가리기 위해 더욱 더 깎아낸다...... 그리하여 마침내 자신을 가로막는 것들은 물론, 아끼던 것들까지 모조리 부수고 나면, 남는 것은......” 

  “스스로를 파괴하는 일뿐이다.”

  파괴된 자들...... 

  세 명의 현자들은 두려운 눈으로 아직도 허공에 떠 있는 검을 올려다보았다. 의식이 끝나기까지는 여전히 얼마간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만 그들은 이 낯선 소년, 그들의 과거인지 미래인지 모를 소년과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아이야, 네 말 대로구나. 우리는 서로 누가 진짜이고 가짜인지 구별할 수가 없다. 또는 둘 다 진짜일는지도 모른다. 천만 가운데 하나의 우연으로 너의 세계와 우리의 세계가 이상한 접점을 가지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또는, 우리와 너의 세계가 다를진대 어느 쪽이 과거이거나, 또는 현재이거나 미래이거나 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느나? 무용함을 떠나 둘 사이에 진짜와 가짜 따위는 처음부터 없는 것일지도 모르는 것을.” 

  “오직 상대에 비교하여 자신이 진짜일 뿐, 그 이상의 진실은 누구도 알지 못하니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지 않으냐7또는 본래부터 그런 정도의 약한 진실밖에 없을 지도 모르지 강한 진실을 규명해 줄 유일한 신은 우리 세계엔 존재하지 않는단다. 그는 우리 세계를 만들어 놓고 저 먼 곳으로 숨어버린 채 다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얼떨결에 아이를 낳아 놓고 겁에 질려 내버린 채 달아난 어린 부모와 다르지 않을 지도 모른다. ” 

  보리스는 그들의 말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었다. 간밤의 꿈을 모두 기억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러나 이어서 그들이 하는 경고만은 분명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제 우리의 의식이 끝나면 너와 우리는 두 번 다시 마주칠 일이 없을 것이다. 천만 가운데 하나의 우연이 다시 일어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단다. 얘야, 하지만 네게도 우리와 같은 굴레, 즉 그 검의 운명이 주어져 있다면, 결국 소용없게 될지도 모르지만 너에게 충고하고 싶구나, 진심으로 네게 말한다. 최선은 그 검을 버리는 것이나, 버리지 못한다면 매번 자신을 돌아보아 네가 차츰 갖게 되는 힘이 진실로 네 것인가 반성하거라.” 

  “네가 4년 간 무사히 검을 지닐 수 있었다고 하기에 우리도 일말의 희망을 갖고 네게 말하고 있는 것이란다. 검의 목소리를 따르지 말아라. 겨울의 검은 본래 무생물로서 목소리를 갖고 있지 않지만, 오랫동안 그에게 사로잡혀 자신을 파멸시킨 자들의 정신을 삼켰기에 그 안에는 부서진 영혼들이 수없이 들어 있을 것이다. 그런 목소리에 절대 귀를 기울여서는 안 된다. 그것은 검 자신의 목소리가 아니다. 검 자 

신은 단지 네가 한없이 많은 힘을 쥐도록 모든 선물을 내려주는, 지나치게 자비로운 왕과도 같단다. 이 말의 무서움을 네가 진실로 깨달을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목소리들은 단지 악으로 손짓할 뿐이지만, 검 자신은 네가 악과 선을 가리지 않고 모조리 부수고, 너 자신까지 폐허로 만들어버릴 힘을 아무 조건 없이 내어주느니라. 우리 살아 있는 자들은 검의 힘 앞에선 횃불을 들고 잘 마른 짚단 앞에 선 어린아이와 다를 바가 없다. 대부분은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짚단에 불을 붙여, 온 세상을 태워버렸던 것이다.”

  또 하나의 윈터러는 이제 빛의 고리를 거의 다 통과했다. 남은 것은 자루 끝의 폼멜에 붙은 동그란 쇠고리뿐이었다. 마지막으로 푸른 옷의 현자가 두 손을 들어올리며 외쳤다. 그러나 외침의 끝은 이미 흐려져 약하게 들렸다.

  “검은 네가 원하는 방향으로 무한히 자라난다! 이것만은 절대로 잊지말......”.

  검이 완전히 통과하여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보리스의 눈앞에 펼쳐졌던 안개의 회오리가 소용돌이치며 눈앞의 장면을 닫아버렸다. 이제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는 다시 텅 빈 곳에 홀로 남겨졌다. 바로 곁에 놓인, 저 정체를 알 수 없는 겨울의 검만을 함께 한 채.

  또 무엇을 보게 되는 것일까 두려워하고 있을 때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수도사들과 스콜리 선생들은 대부분 의식의 현장을 직접 목격하지 못했다. 단지 멀리 떨어진 곳에 모여 앉은 채, 데스포이나의 힘으로 증폭되어 이솔렛의 입술을 통해 흘러나오는 가히 마술적인 찬트를 어렴풋이 들었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거의 잊고 있었던 고대의 힘, 신성 찬트의 위력을 느끼기에는 그 정도로도 충분했다.

  실제로 잊고 있었다. 일리오스 사제가 죽고 이솔렛이 오랫동안 홀로 지내며 침묵함에 따라 그녀가 물려받은 아버지의 능력들을 직접 목격한 사람은 드물어졌고 전해지는 이야기들은 서서히 흐려졌다. 또 한 곧 열 여덟이 되는 이솔렛은 아직 성인보다는 소녀에 가까운 나이였고 따라서 그녀의 능력에 대한 인식 역시 나이에 구애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순간 멀리서 들려오는 찬트를 듣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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