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Maze of the Windward
1. 희생, 또는 갚을 수 없는 빚
"큰 일이... 벌어지고 있구나."
산 위의 마을로 오르는 오솔길에서 발을 멈춘 데스포이나가 이윽고 긴 한숨을 토해냈다. 모르페우스가 우려 깊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우플리온 역시 멈춰선 채 하늘을 올려다보며 무언가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아니,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는 마음 속 예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어서 가자. 돌이킬 수 없게 되기 전에 가야 돼."
"......."
애써 손을 뒤덮은 얼음을 밀어내려 애썼다. 그러나 쉽게 되지 않았다. 분명히 방금 생겨난 얼음이었는데 순식간에 수백 년 묵은 얼음으로 변한 양, 손바닥이나 입김이 닿는 정도로는 물기조차 생기지 않았다.
머리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날카로운 고드름으로 만들어진 감옥 안에서 이미 괴물의 형체는 제대로 남아 있지 않았다. 흡사 검은 얼룩처럼 반쯤 녹아 내린 채 잔해로 변해 달라붙어 있었다.
자신이 한 일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이 몹시 두려웠다. 손에서 떨어지지 않는 검 역시 섬뜩한 존재였다. 이미 시야를 벗어나 버린 얼음이 어디까지 갈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이 갑작스러운 겨울은 섬 전체를 얼음으로 뒤덮어 버릴 지도 몰랐다.
결국 손에 달라붙어 버린 윈터러를 내려놓지 못한 채 다프넨은 몸을 돌렸다. 한 걸음 옮겨놓으려다 그만 미끄러져 넘어지고 말았다. 저도 모르게 검을 바닥에 짚었다. 검이 닿자 그토록 까딱도 않던 얼음이 쩡, 소리를 내며 깨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이솔렛... 당......."
다프넨은 갑자기 입을 벌린 채 말을 멈추었다. 자신의 목소리가 두
가지로 울려나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마음속에서 조그맣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에게로 가.]
당황해 있는 다프넨을 보며 이솔렛이 입을 열었다.
"네 몸 안에 낯선 존재가 들어와 있구나. 우호적인 혼이니?"
갑자기 이솔렛은 흠칫했다. 다프넨의 입을 빌려 다른 목소리가 해답해 왔기 때문이었다. 소년의 맑은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너는 참 아름답구나.]
"아......."
다프넨은 어쩔 줄 몰라하며 고개를 저은 뒤 단숨에 이솔렛 앞으로 달려왔다. 그 앞에 앉으면서 그녀의 왼쪽 어깨와 팔 절반을 삼켜버린 검은 얼룩을 보고는 다시 한 번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는 저 괴물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괴물로부터 입은 상처가 가져오는 결과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이솔렛... 이건... 안 돼요......."
이번에는 그 자신만의 목소리로 말할 수 있었다. 이솔렛은 침착한 눈으로 다프넨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오른쪽 어깨를 살짝 움직여 보였다.
"이 팔 때문에 그러니? 잘라버리면 되는데 뭘 걱정해."
"자, 자르다니요!"
그 말도 충격이었다. 팔을 자르다니? 그게 그리 쉽게 할 수 있는 말인가?
그보다도 팔 하나가 없는 그녀의 모습이... 감히 상상되지도 않았다. 이조차도 그의 이기적인 시각인가. 그러나 팔을 잃으면 그녀는 쌍검을 들 수조차 없게 된다.
"그러니까 넌 달 여왕의 아들이 아닌 거야. 난 처음부터 네가 달 여왕의 자손이 될 수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
이솔렛의 얼굴은 평온했다. 그러나 그녀는 진실을 모르고 있었다. 팔을 자르는 것도 안되지만... 팔을 자른다고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다프넨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을 보고 이솔렛은 오히려 자신이 그을 위로해야겠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성한 오른팔을 들어 그의 뺨을 가볍게 쓰다듬어 주었다.
"왜 그래. 스승이 제자를 보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물론 난 제대로 해내지도 못했지만 말이야. 네 탓이 아니야."
다프넨은 마구 고개를 저었다.
"도대체 왜, 왜 여길 온 거죠? 이 싸움은 내가 끝장내야 할 문제였어요. 당신을 끌어들이는 것은 바라지 않았는데......."
"내 문제를 내가 해결하기 위해서 온 거야. 모욕당한 것은 나니까. 그건 내 문제였어."
그 말을 하면서 이솔렛은 마음이 편해졌다. 그래, 자기 일은 자기가 책임지면 되는 것이다. 다프넨에게 다시 빚지지 않게 되어서 너무 잘됐어. 다시는 그런 마음의 빚 따위, 지지 않겠어.
그때 갑자기 다른 목소리가 불쑥 끼여들어 말했다.
[정말 당신은, 그가 반해 있는 것도 무리가 아니구나.]
"누구지, 넌? 다프넨의 몸 속에 있어?"
이솔렛은 강령술에 대해 무지하지 않았다. 다프넨이 그런 일을 할 줄 안다는 것은 몰랐지만 아버지로부터 들은 것도 있었고 실제로 본 일도 있었다.
"이건, 그러니까......."
완전히 혼란 속이었다. 머릿속에서는 이솔렛의 목숨이 위험한데도 할 수 있는 일 하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고 있었지만, 그와 동시에 팔을 자르겠다는 결정에 반대하려 했고, 이렇게까지 되어버린 원인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밝히고자 애쓰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이번에는 엔디미온의 존재조차 설명해야 되는 상황에 처해버렸다.
그런 저런 복잡한 문제를 모르는 이솔렛은 다시 한 번 되풀이해서 묻고 있었다.
"다프넨 네게 물은 것이 아니야. 방금 내게 뭐라고 말했지? 누가 누구에게 반해 있다는 거야?"
이건 또 새로운 문제였다. 그가 뭐라 해명을 시도해보기도 전에 엔디미온의 대답이 튀어나왔다.
[네 생각대로야. 그가 네게 반해 있다고.]
놀랍게도 이솔렛은 이렇게 대꾸했다.
"그건 네 생각일 뿐이겠지. 만일 네가 죽은 자의 혼이라면 어서 다프넨의 몸 밖으로 나가도록 해. 갑작스러운 강령은 익숙하지 않은 자에겐 피해만 가져올 뿐이니까."
[너도 그를 걱정하는구나. 그럼, 다프넨.]
자기 입이 한 질문에 자기 입으로 대답해야 하는 느낌은 참 어색했다.
"고마워, 엔디미온... 뭐라 말해야 될지 모르겠다. 아까 네 도움은 내게 있어 정말로 절실한 것이었어."
엔디미온은 잠시 침묵하더니 뭔가 알아낸 것처럼 입을 열었다.
[네가 뭘 걱정하는지 알겠어. 그걸 해결하기 위해선 어떤 한 사람의 선택이 중요할 것 같구나. 아가씨 말대로 난 그만 가는 편이 낫겠어. 저 갑작스러운 겨울에 대해 궁금해하실 우리 어른들도 있고.]
절박한 심정이 그를 사로잡았다. 다프넨은 다급히 외쳤다.
"너... 한 번만 더 날 도와줄 순 없니? 이솔렛을 도와줄 순 없는 거니? 그녀는......."
[내 힘 밖이구나. 나는 이공간의 존재, 그녀의 상처는 이계의 것. 난 단지 예지만 가질 뿐.]
몸에서 그림자 하나가 슥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전과는 달리 엔디미온의 모습이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무언가 허공을 움직여 간다는 것만은 어렴풋이 느껴졌다. 단지 착각일 뿐일지도 모르지만.
[하지만 아가씨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게 되었을 때, 다프넨은 결국 견디지 못하고 소리쳐 버렸다.
"이솔렛, 당신 알아요? 당신 죽을 지도 모른다는 것 알아요? 팔을 자른다고... 치료되는 상처가 아니란 말이에요! 나, 나는 이 상처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 있죠......."
"무슨 소리야?"
겨울 벌판이었다. 심지어 입김까지 나올 지경이었다. 검과 함께 얼어붙은 손은 풀려나지 않았고, 두 사람의 발치에도 서리가 하얗게 내려앉아 있었다.
"난 저 괴물을 알아요. 고향에서......."
"나도 알아."
잠시 후 놀라운 대답이 뒤따랐다.
"내 아버지를 죽인 놈과 같은 종류지."
"그렇다면, 그런데도 어떻게 이렇게 침착할 수가 있어요!"
이솔렛은 어깨의 검은 얼룩을 한 번 건너다본 뒤 무표정하게 말했다.
"침착하진 않아. 연약해지고 싶지 않기 때문에 최선을 대해 버릴 뿐인 거지."
"......."
둘은 서로의 눈을 마주보고 있었다. 연분홍빛, 연꽃 같은 눈동자 안에는 아득히 먼 흔들림이 담겨 있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생명도 있을까. 지기에 아깝지 않은 꽃도 있을까. 누구나 자신의 것이 더 소중한 법인데, 그럼에도 그를 마지막까지 초연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당신을 보내고 싶진 않아요......."
그것은 2년 전, 죽음을 택하려 하는 예프넨을 붙들고 해야 했을 이야기였는지도 몰랐다. 아니, 언제고 해야만 하는 이야기였을까....... 왜 이렇게 뒤늦기만 하는 것일까. 그들이 가려 하기 전에 날마다 마주 보며 목청 터져라 실컷 외칠 수도 있는 말이었는데.
떠나지 말라고... 혼자 두지 말라고.
남은 자의 짐은 너무도 무겁다고.
"아직 8월인데, 겨울이 되어버렸구나......."
얼어붙은 나뭇가지로 가려진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렇게 중얼거리는 이솔렛을 보며 더는 버틸 수가 없었다.
와락.
"......."
한쪽 손뿐이었지만 가능한 한 가까이, 꽉 끌어안았다. 왜 이렇게 되기 전엔 따뜻하게 해주지 못하고서 이제야 왼쪽뿐인 손으로 오른팔만 남게 된 사람을 어설프게 감싸려 몸부림치는 것일까.
이솔렛은 움직이지 않았다. 가만히 낮은 숨만 내쉬고 있었다. 차가운 얼음 위에 앉은 채 어색한 포옹을 받으며 파란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죽음의 확인과 동시에 찾아온 애정의 확인, 어느 쪽을 먼저 받아들여야 할 지 모르는 것처럼
잠시 후 그녀의 입에서 나지막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는 것을 어쩔 도리가 없었다.
긴 밤 뒤에는 짧은 낮,
짧은 밤 뒤에는 긴 낮.
하루의 길이는 하루같이 같고
세상은 그렇게 이루어져 있다.
나우플리온은 나뭇가지에 매달린 고드름을 만져 보았다. 쉽게 부러지지도 않는 얼음이었다. 데스포이나는 허리를 굽혀 바닥을 살피고 있었다.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한여름에 겨울이라니요."
"뒤틀린 의도는 뒤틀린 결과를 부르는 법이지. 한낮에 잠시 찾아온 밤처럼, 똑 같은 뒤틀림일 게다."
사각거리는 얼음을 밟으며 그들은 폐허의 마을로 들어섰다.
다행히도 눈과 얼음은 마을의 경계에서 멈춰 있었다. 그러나 마을 중앙으로 다가갈수록 얼음은 두꺼워졌고, 눈은 새파랗게 될 정도로 얼어 있었다. 공기 역시 겨울이나 다름없어 여름옷 차림이 세 사람은 추위를 느끼고 어깨를 움츠렸다.
"조용하군요."
팽팽한 긴장감도 아닌, 그냥 침묵이었다. 서리를 밟아 부수는 신발 소리만이 크게 울렸다. 저만치 공회당이 보였다. 아니, 다시 말해 공회당이었던 흔적이 보였다. 네 벽 가운데 하나는 완전히 무너졌고, 그 옆의 두 벽도 날아간 상태였다. 공회당 앞 마당은 거대한 눈더미로 가로막혀 있었다.
눈더미를 넘어가기 전에 그들이 먼저 발견한 것은 쓰러진 소년이었다. 다름 아닌 헥토르였다.
"이봐, 정신 차려!"
나우플리온이 당장 무릎을 꿇고 소년을 눈 속에서 끌어냈다. 옷이며 피부가 얼음에 달라붙어 있어서 당장 데스포이나의 마법이 필요했다. 온기가 주위에 퍼지자 따닥거리는 소리와 함께 얼음이 부서졌다. 그러나 녹은 것은 극히 일부였다.
손목을 끌어당겨 잡아보니 약하지만 아직 뛰고 있는 맥박이 느껴졌다. 상처는 가슴에 박힌 검 반 조각이었다. 심장을 비켜갔으나 출혈이 많아 쉽게 회복하기는 어려워 보였다.
이번에는 모르페우스의 차례였다. 나우플리온이 조심스레 검 조각을 뽑아내자 모르페우스의 한쪽 손에서 강한 치료의 빛이 쏟아져 나와 상처를 쪼였다. 외상은 어느 정도 아물었으나 의식이 돌아오지는 않았다.
헥토르를 모르페우스에게 맡기고 나우플리온은 눈 더미 쪽으로 다가갔다. 데스포이나가 몇 걸음 뒤에서 따라오는 동안 그는 먼저 눈 더미를 넘어섰고, 그 안의 광경을 보았다.
"......."
그는 침묵하고 있었다. 그러더니 한 발 물러섰다. 마치 아무 것도 보지 못한 양 잠시 바닥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데스포이나가 다가왔다. 두 사람을 발견한 그녀는 나우플리온의 얼굴을 먼저 쳐다보았다. 그리고 눈 더미를 헤치며 안으로 들어갔다.
다프넨과 이솔렛은 서로 껴안은 채 잠들어 있었다. 또는 정신을 잃고 있었다. 바닥으로부터 올라온 얼음이 둘의 무릎과 다리를 나무뿌리처럼 움켜잡고 있었다. 팔이며 손, 목과 머리에도 하얗게 서리가 내려 마치 눈 덮인 조각상 같았다.
데스포이나는 둘의 목에 손가락을 대어 보아 아직 살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손을 내밀어 어깨를 쓸어 내려다가 다프넨의 오른손에 쥐어져 있는 윈터러를 발견했다. 그 검은 소년의 손에 단단히 얼어붙어 있었다. 온기를 쪼인다 해도 쉽게 떨어지진 않을 듯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엇다. 검 자체의 표면에는 서리가 내렸던 흔적이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심지어 검 끝이 닿은 바닥에 조차 얼음이나 눈이 녹아 사라져 있었다. 사방에 쌓인 눈조차도 감히 당하지 못할 정도로 희고 싸늘하게 번쩍이는 검을 보며 그녀는 참기 힘든 오한을 느꼈다.
문득 멀리 향한 데스포이나의 눈이 다른 것을 발견했다. 서리로 쌓은 작은 성채 속에 검은 얼룩과 껍질 같은 것이 걸려 있었다.
그 너머에는 또 다른 것이 있었다. 무엇일까... 인간의 시체처럼 보이는데.
나우플리온이 다가와 다프넨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그의 입에서 약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러나 그는 곧 끔찍한 사실을 발견하고 말았다.
"......!"
데스포이나가 절망적인 예감으로 경직되어 있는 동안 나우플리온이 나직이, 그러나 침통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끝내... 예상하신 일이 벌어져 버렸군요......."
이솔렛의 어깨에 생겨난 검은 얼룩이 무엇인지 너무도 잘 알고 있는 두 사람이었다. 나우플리온은 특히 더 잘 알고 있었다. 그의 몸에 똑같은 상처가 있으며, 지금까지도 결코 사라지지 않고 있었으니까. 그가 지금까지 겉으로는 멀쩡한 양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은 단지 일리오스 사제가 반쪽짜리 선물로 만들어 준 유예에 불과했다.
준비된 응보인 양, 그 일리오스 사제의 딸에게 또다시 생겨난 상처를 내려다보았다. 그것을 돌이킬 수 있는 것은 한때 배신 당했던 자기 자신밖에 없었다.
나우플리온은 잠시 고개를 숙인 채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결정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는 갑자기 얼음 감옥으로 다가가더니 검을 뽑아 얼음을 후려쳤다. 처음엔 얼음 조각이 사방으로 튈 뿐이었으나 곧 그가 실력을 발휘하자 맨 앞을 가린 얼음이 모두 부서져 나갔다. 안에는 혼이 빠져나간 거죽 비슷한 것이 널브러져 있었다. 나우플리은은 이미 죽은 적의 가슴에 힘껏 검을 꽂았다. 언뜻 보아 맺힌 원한을 풀려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하는 행동이었다. 그러나 데스포이나가 어떤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를 바라보는 가운데 나우플리온은 괴물의 가슴 아래부분을 헤쳐 하나의 붉은 보석을 뽑아내었다. 메추리알보다 조금 더 큰, 작은 불꽃처럼 타오르는 보석이었다.
이솔렛은 아주 오래오래 잠들어 있었다.
이미 열흘째였다. 데스포이나 사제의 집에서 한 번 깨지도 않고, 무엇을 먹지도 않고 그렇게 죽 잠을 잤다. 그러는 동안 어깨의 얼룩은 서서히 지워지고 있었다.
면회는 금지였다. 데스포니나가 그렇게 정했다. 다프넨 역시 한 번도 그녀를 보러 오지 못했다. 그러나 열흘 때 밝았던 날이 저물었을 때, 한 명의 방문객이 찾아왔다.
나우플리온은 빙긋 웃으며 데스포이나를 바라보았다. 둘은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나 결국 먼저 입을 연 것은 데스포이나였다.
?굳이 만날 필요가 없을 터인데."
나우플리온은 다시 한 번, 이번엔 씁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깨어나면 영영 하지 못할 이야기가 있으니 이 기회에 해야지요."
잠시 후 데스포이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안쪽 방을 손짓으로 가리켰다.
침실 안은 조용했다. 환자를 위해 일부러 피워 놓은 벽난로 안에 걸어놓은 무쇠 단지만 가끔 달각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그는 침대 머리에 다가앉더니 잠시 이솔렛의 얼굴을 보았다. 창백해진 이마에 흩어진 머리카락들을 보았지만 굳이 넘겨주지는 않았다. 그렇게 소녀를 내려다보는 그는 지친 눈빛이었다.
"많이 힘들구나."
아무도 듣지 못할 말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냥 나직이 지껄였다.
"너는 이제 곧 낫겠지. 그래도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좀 더 늦었더라면 분명 돌이킬 수 없는 결과가 왔겠지."
"난 많은 생각을 했어."
조금 후 그는 자세를 약간 고쳤다. 말하는 것이 힘겨운 모양이었다.
"일리오스 사제님에 대해서 가끔 생각하곤 해. 그분은 왜 그렇게 매정하셨을까. 난 진심으로 그 분을 존경했지만 끝내 사랑할 수는 없었어. 그래서 널 보면 더 신기했지. 넌 어떻게 그런 사람을 가장 사랑하는 아버지로 대할 수 있었을까."
"나만의 생각일 뿐이겠지. 그 분도 네게는 다정하고 좋은 분이셨을 테니까. 하지만 난 오랫동안 그 분을 원망해 왔었어. 그리고...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해."
"넌 아마도... 아니었겠지. 네겐 그런 기색이 없었어. 나와 똑 같은 일을 당했지만 나처럼 받아들이지는 않았어. 역시 부녀간이기 때문에 다른 걸까. 하지만 난 생각이... 그렇게 가지만은 않았지."
그는 깊이 숨을 들이쉬었다가 다시 내쉬었다. 가슴이 답답한 모양이었다.
"역시 넌... 그 일에 별다른 의미를 두지는 않은 것 같다고 말이야. 금방 잊어버린 거겠지?"
"그래, 그래, 넌 열 살에 불과했으니까."
방이 더워서인지 나우플리온의 얼굴은 좀 달아올라 있었다.
"너희 부녀에 대한 애증이 내 삶을 이토록 망가뜨렸는데도... 난 아무 것도 끝내지 못했지. 때로 난 유쾌하기만 한 인간이고 싶었다. 또는 무엇에도 구애 받지 않은 자유로운 괴짜로 살고 싶었지. 하지만 아무 것도, 처음의 잘못된 매듭을 풀지 못하고, 매번 이렇듯 되돌아와 보면......."
잠든 소녀의 평온하고 나직한 숨소리는 끝없이 이어질 듯했다. 그 가운데 짧고 거친 숨소리가 몇 번 간혈적으로 되풀이되고 있었다.
"섬으로 돌아와 너를 다시 보는 순간, 많이 풀었다고 생각한 매듭이 아직도 그대로라는 걸 알았어. 오히려 더 심하게 얽혀들어 있었지. 하지만 이번에는... 이번에는 풀 수 있을 것만 같아. 그 길을 알 것 같아졌어."
"미안하지만 네게 '소통'을 좀 사용해야겠구나."
나우플리온은 두 손을 삼각형으로 모으더니 몇 개의 룬을 외우며 수인을 맺었다. 오래 전에 란즈미의 침실에서 말을 잃은 란즈미의 마음과 대화할 때 쓰던 것과 같은 방법이었다. 이는 섬사람들 중 일부가 지니고 태어나는 특별한 마법적 천분 가운데 하나였다. 이를테면 에니오스(단센)가 거친 파도를 가라앉히는 '기원'을 드릴 수 있는 것처럼.
근원으로 돌아가는 잠 속에서 꿈인 양 들려오리라. 어머니 달빛이 그 마음을 두드려, 마음 깊은 곳에 새기리라.
나우플리온의 손이 다시금 푸르스름하게 빛났다. 그는 손을 이솔렛의 이마에 올려놓았다.
잠시의 시간이 흐르고, 빛은 사라졌다. 그는 미소 지었다.
"내가 아끼는 소년이 결국 내게 답을 주는구나. 난 정말 진심으로 그 애를 사랑하지. 친아들인 양 느낄 때도 있어. 하지만 친구일 때 더 배울 점이 많은 아이지."
"어서 일어나 가거라. 그리고 내가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 줘. 그렇게라도 네 생명과 내 생명을 바꿀 수 있어서 다행이었어. 내가 너와 일리오스 사제에게 갚을 수 있는 마지막 빚이었겠지."
"자, 이제 모두 끝났다. 네게도, 그리고 내게도 행운이 필요한 것 같구나. 하지만 네 행운을 더 빌어주마."
"그러니 칭찬해 주렴."
그러나 그것은 슬픈 어감이었다 예전에 월넛 선생으로 불렸던 당시, 란즈미와의 소통을 끝낸 뒤 보리스를 쿡쿡 찌르며 장난스럽게 말하던 것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2. 미로를 들여다보며
그 해 여름에 벌어진 사건은 이후에도 다른 섬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폐허가 된 옛 마을은 역병과 괴물에 대한 기억 때문에 누구나 꺼리는 곳이었고, 따라서 그곳에 생겨난 거대한 겨울의 흔적에 대해서도 아무도 알아채지 못했다. 그러나 눈과 얼음은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데스포이나 사제는 윈터러를 가져오게 해서 조금 위험한 주문을 걸어 놓았다. 그 안에 든 힘이 무엇이든 일단 발현되지 못하도록 제어하기 위해 더 강하게 폭주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스포이나는 그 주문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다프넨은 자신이 지닌 검으로부터 보호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 주문 때문이든 다른 이유로든 검의 힘은 다시 잠든 듯 보였다.
질 선생의 사인은 어쩔 수 없이 은폐되었다. 세 사제들은 헥토르의 입을 통해 질 선생의 음모를 대강 짐작하였고, 에키온을 통해서는 거의 확실한 전모를 듣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 보호해야 할 존재는 둘이었다. 저 무서운 힘을 가진 검의 주인인 다프넨, 그리고 살인의 음모를 꾸몄던 고귀한 지위의 두 소년.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죽은 자의 진실을 희생해서라도 일을 축소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하긴 그건 죽은 자의 명예를 위해서 잘된 일이기도 했다. 그래서 질 선생은 산에 올라갔다가 절벽에서 떨어져 죽은 것으로 처리되었다. 엉망이 된 시체는 모르페우스 사제가 대강 조작해서 그럴듯하게 고쳤다. 가족도 없었고, 외곬 성격 탓에 친하게 교류하며 지낸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달리 의구심을 갖는 사람은 없었다.
헥토르와 다프넨이 결투를 벌인 사실은 숨기지 않았지만 장소는 다른 곳으로 바뀌었고, 그들은 다시 화해했다고 알려졌다. 그런데 다프넨은 비교적 멀쩡한데 헥토르는 심하게 다친 터라 섬사람들은 이때부터 확실히 다프넨의 실력이 헥토르를 눌렀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헥토르는 이솔렛보다 더 늦게 회복되었다. 그의 가슴에 박힌 검은 사실 그 자신의 것이었다. 괴물의 발톱에 부딪치는 순간 검이 부러지면서 자신을 찌른 것이었다. 오히려 다행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솔렛과 같은 방식으로 입은 상처였다면 그냥 죽는 것 외에는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솔렛은 보름째 되는 날 깨어나 다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비밀을 아는 사람들 가운데 에키온과 오이지스에게는 사제들이 특별히 함구령을 내렸다. 하긴 에키온은 이번 일이 밝혀져 봤자 전혀 좋을 일이 없었다. 오이지스는 다프넨을 위로해서라고 하니 금방 수긍했다. 헥토르와 에키온의 부모와도 어느 정도 선에서 협상이 오갔다. 저들 자식들이 잘못한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라 달리 불만이 있을 수 없었다.
헥토르는 그 사건을 겪은 뒤로 이상할 정도로 과묵해져 버렸거니와 사람도 좀 바뀐 것 같았다. 전처럼 소년들을 이끌고 다니는 일도 없어졌고 에키온과 함께 있는 모습도 좀처럼 볼 수 없었다. 스콜리의 수업에는 죽 나왔지만 파하고 나면 곧장 자기 집으로 가버렸다.
단 한 번, 다프넨과 마주친 일이 있었다. 식당 입구에서였다. 다르넨이 걸음을 멈췄지만 헥토르는 어깨를 부딪치는 것도 느끼지 못한 듯 지나쳐 나가 버렸다.
몇 명인가의 사람들은 숨겨진 사건이 있다는 것을 짐작했다. 그러나 세 명의 사제들이 진실을 틀어쥐고 있는 데다 섭정의 동생 집안이 연루된 일이라 직접 나서 진상을 알아내려는 사람은 없었다.
여름이 끝났다. 가을은 8월말부터 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나날이 흐르고 있었다. 어느 날 밤 불을 끄고 잠자리에 누워 있는데 잠든 줄 알았던 나우플리온이 불쑥 입을 열었다.
"보리스, 내일부터 다시 검을 연마하자."
"네?"
되물을 말은 아니었을 지 모르나 약간은 놀랐다. 확실히 섬에 들어와 두 계절을 보내는 동안 나우플리온 앞에서 제대로 검을 잡은 것은 손에 꼽을 정도에 불과했다. 나우플리온이 워낙 바빴던 탓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아도 섬의 아이들로부터 질시 어린 눈초리를 받고 있던 터라 더한 미움을 살 일은 삼가는 편이 나았던 탓도 있었다. 검의 사제로부터 따로 교육을 받는 모습은 아이들의 악감정을 불러일으킬 것이 뻔했다. 그리하여 나우플리온이 다프넨을 첫 제자로 선언하긴 했지만 그 동안의 교육은 렘므에서 방랑하던 시절이 무색할 정도로 전무하다시피 했다.
"내년에는 열 다섯이 되는 거지?"
나우플리온은 이불에 푹 파묻힌 채 말했지만 졸린 목소리는 아니었다.
"우리에게 언제까지나 계속될 시간이 주어진 것은 아니겠지."
다프넨은 그 말을 어린 시절에 조금이라도 더 많은 배움을 얻어야 한다는 뜻으로 알아들었다. 즉, 다프넨 자신에게 남은 시간에 대한 것으로.
그러나 그것은 나우플리온에게 남은 시간을 말한 것이었다.
"다음!"
열 걸음 밖에서 힘껏 달려가 나무에 매달아 놓은 나무토막을 후려갈겼지만, 뱅그르르 돌아갔을 뿐이었다. 몇 번 더 되풀이했으나 허사였다. 손에 들린 것이 연습용 검도 아니 목검인 까닭에 끈조차도 베어지지 않았다.
"다시!"
뒤로 뛰어가 처음의 자리에 섰다가 다시 나무토막을 향해 달려갔다. 또 다시 쳤다. 냅다 얻어맞은 나무토막이 크게 원을 그리며 달려들어 하마터면 다프넨의 얼굴을 칠 뻔했다. 그는 요령 좋게 그것을 멀찍이 쳐냈다.
"다음!"
같은 일의 되풀이였다. 손에 들린 목검은 가볍기도 했지만, 오랫동안 진짜 검을 휘두른 소년에게는 도무지 무기처럼 느껴지지가 않았다. 그러나 나우플리온은 일부러 그에게 목검을 잡게 했다. 그리고 진검을 잡은 것처럼 똑 같은 마음으로 하라고 말했다.
목검에 살기을 불어넣은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집중하려고 애써봤지만 아무리 궁극적으로 긴장해 봐도 진검을 든 느낌과는 너무 달랐다. 한달 여를 그렇게 하다가 정신이 다 지쳐버렸다.
그런 기색을 알아보지 못할 나우플리온이 아니었다. 그는 다프넨에게 '네 목검이 날카로움을 잃었다' 라고 말했고 다프넨은 '목검은 본래 날카롭지 않다'고 대꾸해 버렸다.
"그래, 네 말대로 목검은 '진검보다' 날카롭지 않지. 그러나 둥근 바위와 비교하면 어떠냐? 하늘거리는 천과 마주 대한다면 어떨가?"
"하지만 바위나 천을 갖고 싸우게 되진 않잖아요."
"상대적인 날카로움이라는 점에서는 하등 다를 것 없다."
나우플리온은 자기 허리에 차고 있던 목검을 뽑아 들더니 바로 옆에 있는 바위를 빠르게 찔렀다. 다프넨이 놀라서 아, 하고 외치는 순간 목검은 바위 표면을 일부 부수고 들어가며 멈췄다. 깨진 돌조각이 바닥에 떨어졌다.
?마법은 기원이다. 검을 날카롭게 하는 건 네 마음의 힘이고."
다프넨이 입을 벌린 채 말문이 막혀 있는 동안 그는 목검을 팽개치더니 품에서 단도, 루네트를 꺼냈다. 폭이 넓은 칼날이 그의 손바닥에 놓였다.
"자연 속에서 쇠는 나무보다 날카롭지.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마음의 힘을 버리고 쇠의 날카로움에 의존하기 쉽다. 너의 경우는 그것이 휠씬 더 심각하지. 네가 가진 검은 쇠로 된 검도 아닌, 순간적으로 무시무시한 살기를 발휘하는 겨울검... 윈터러다. 네가 몇 번이고 그 검의 살기에 휩쓸리거나, 심지어 그것을 이용하고 있었음을 부인할 수 있느냐?"
"......."
"그렇게 되어버리면 넌 그 검의 노예다. 그 검이 원하는 피를 위해 움직이는 인형으로 전락하는 거지. 그리고 서서히 그 검이 내뿜는 살기에 너 자신을 팔아 넘기게 될 거다."
아직까지도 생생한, 그가 들었던 목소리가 있었다. '그러면 내 노예가 되겠다고 말해!'
그리하여 노예가 되는 것을 택하면 죽이고 싶은 자를 얼마든지 죽일 수 있겠지만... 결국 자신은 자신이 아니게 되어버릴 뿐이었다. 다프넨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네게 진검을 주지 않는 이유를 알겠나? 겨울이 가고 내년 봄이 되어도 넌, 윈터러의 살기를 떨쳐버리지 못하는 한 목검보다 날카로운 무기를 가질 수 없다. 내가 결코 허락하지 않을 테니까."
겨울이 깊어 갔다. 깊어지고, 깊어지고, 또 깊어지자 새해가 되었다. 겨울의 한가운데에 기둥처럼 세워진 1월이었다.
스콜리는 현재 방학 중이었다. 섬은 여름이 서늘한 대신 겨울이 지독하게 추었으므로 한 해 가운데 방학은 이때밖에 없었다. 11월부터 3월 초까지였고 그 사이 2월 중에 신입생이 될 아이들을 데려다가 간단한 평가 시험을 치렀다. 이렇게 모든 준비를 끝내두었다가 학기가 시작되면 곧장 수업에 들어가는 것이 상례였다.
2월에는 졸업식도 있었다. 작년에 15세가 된 아이들은 이때 스콜리를 졸업하면서 자신의 직분을 정했다. 그런 다음 늦봄의 정화 의식이 있을 때까지는 일종의 견습 역할을 하며 어른들로부터 일을 배웠다. 정화 의식을 거쳐 진짜 순례자로 거듭나게 되면 그 후로는 하나의 어른으로 취급 받았다.
그러나 날짜가 꼬이는 아이들도 있었다. 즉, 졸업 적정 년수를 다 채우지 못했는데 미리 15세가 되어버려서 15세의 정화 의식을 먼저 받고, 다음 해가 되어야 졸업하게 되는 경우가 생겼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늦게 입학한 아이들도 그랬지만 두 해 사이에 생일이 걸려 있는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예를 들면 1월 태생인 헥토르가 그랬다.
올해 2월에 헥토르는 졸업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이미 그의 나이는 16세가 되어 있었다.
다프넨은 겨울 내내 거의 이솔렛을 만나지 못했다. 물론 스콜리가 방학이라고 그들도 방학해야 한다는 법은 없었다. 그러나 큰 눈이 한 번 내리면서 기온이 떨어져 늘 수업을 받던 산 위의 빈터가 꽁꽁 얼어붙어 버리자 이솔렛이 방학을 제안했고, 그들은 헤어졌다.
산 위의 교실이 아니라 직접 집으로 찾아가려니 아무래도 좀 부담스러웠다. 산비탈에 있는 이솔렛의 집은 겨울이 되자 눈으로 완전히 뒤덮여 버렸다. 그녀는 그 안에서 거의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무엇을 하고 지내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식료품이며, 땔감 따위가 충분한지도 알 수 없었다.
다프넨이 문득 우려를 나타냈을 때 나우플리온은 흔쾌히 웃으며 대꾸했다.
"한 번 찾아가 보지 그래? 그녀도 반가워 할 텐데."
그래서 1월도 거의 끝나 갈 무렵, 다프넨은 나우플리온과 함께 만들어 둔 소시지를 가지고 이솔렛을 찾아갔다. 겨울 내내 하루도 쉬지 않았던 검술 수업은 나우플리온이 선심 쓰듯 하루 빼 주었다. 게다가 점잔까지 빼면서 이렇게 말했다.
"가서 내 안부도 전하고, 그 소시지를 만들 때 손재주 없는 제자 녀석은 아무 도움도 안 됐다고 반드시 얘기하거라."
소시지라니, 도무지 낭만적이지 않은 물품이긴 했지만 혹독한 겨울을 견디지 못해 초봄 무렵 죽어나가는 사람이 꽤 되는 섬에서는 겨우내 식량이야말로 가장 훌륭한 선물이었다.
코가 맵도록 춥긴 해도 날은 맑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솔렛의 집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눈이 쌓여 무릎이 푹푹 빠졌다. 달의 섬에는 유난히 눈이 많아서 각반 없이 겨울을 나는 것은 불가능했다.
문을 쾅쾅 두드리자 문틀에 쌓였던 눈이 우수수 떨어졌다. 한참 동안 밖에 나온 일이 없는 모양이었다.
"이솔렛, 저예요!"
한참 동안 대답이 없었다. 몇 발짝 물러나서 굴뚝을 올려다보았다. 분명히 연기는 나고 있었다.
"이솔렛, 안에 있어요?"
다시 문을 두드리자 갑자기 문이 덜컥 열렸다. 그런데 문 앞에는 아무도 서 있지 않았다.
누가 문을 열었지?
멈칫거리다가 우선 발의 눈을 털었다. 다리와 머리에 떨어진 것들도 털고 있는데 말소리가 들렸다.
"그런 건 문이 열리기 전에 다 터는 거야. 찬바람 들어오니까 어서 들어와. 문 닫게."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으려고 돌아서니 저절로 닫혀 있는 문이 보였다. 어이가 없어서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난롯가에 놓인 커다란 의자가 보였다. 등받이가 너무 커서 앉은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았다. 그 옆에 등받이가 없는 작은 의자가 하나 놓인 것이 보였다.
다가가 보니 이솔렛은 손에 책 비슷한 것을 들고 있었다. 어떻게 문을 열고 닫았는지 궁금했는데 그녀의 의자 아래쪽에 희한한 장치가 달린 것이 보였다. 나무로 된 막대가 튀어나와 있는데 발로 당기고 미는 것만으로 문을 여닫을 수 있는 모양이었다.
"겨울은 독서로 보내나 보죠?"
이솔렛은 책을 접고 일어나서니 큰 의자를 뒤로 물렸다. 그리고 난롯가에 두터운 짐승 가죽 깔개를 가져다 깔았다. 언뜻 다프넨을 돌아본 그녀가 말했다.
"뭘 가지고 왔구나."
"소시지죠. 나우플리온 사제님하고 겨울 오기 전에 만들어 둔 거예요."
나우플리온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이솔렛은 약간 멈칫하는 것 같더니 곧 평온해졌다. 다프넨은 난롯가의 깔개에 앉았고, 이솔렛은 소시지를 저장고로 가지고 갔다. 다프넨은 이솔렛이 보던 책을 흘끔 보았다. 책이라기보다는 종이를 묶어 만든 공책 같은 느낌이었다.
"잘 먹을게."
돌아와 깔개 위에 앉은 그녀가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다프넨은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그녀기 아무렇지도 않아 보이고, 그의 방문을 불편해 하지도 않는다는 사실이 기뻤다.
늦여름과 가을, 그리고 초겨울에 이르기까지 그들은 계속해서 신성 찬트 수업을 했지만 전과는 어딘가 달라져 있었다. 전처럼 친근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서로를 경원하게 된 것도 아니었다. 당시 일어났던 일에 대해서는 서로 말을 꺼내기를 주저했다. 그래서 한 번도 그 일에 대해서 다시 이야기한 일이 없었다. 그리고 수업도 별 진전이 없었다.
"건강해 보이네요."
섬사람들은 이솔렛이 데스포이나 사제의 집에서 잠들어 있었던 것이 상처 때문이 아니라 마법의 연구와 관계된 일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들이 보기에 이솔렛은 일리오스 사제처럼 다양한 마법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녀가 뭘 연구할 수 있는지에 대해 짐작할 만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다시 아플 이유가 없잖아."
다프넨은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말했다.
"참 다행이예요, 섬에 모르페우스 사제님 같은 분이 있어서."
다프넨은 이솔렛의 상처를 치료한 것이 모르페우스인 줄로만 알고 있었다. 마을로 옮겨져 눈을 떴을 때 곁에 있던 나우플리온에게 물으니 그렇게 대답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살아날 수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물론 말할 수 없기 기뻤다. 그러나 동시에 어쩔 수 없는 고통이 그를 괴롭게 했다. 지금까지도 도저히 쉽게 지워버릴 수가 없었다.
그게 고칠 수 있는 상처라는 것을 예전에도 알았더라면....... 아니, 물론 그것은 이 섬에만 있는 특별한 치유의 힘이었겠지. 대륙의 의사들 가운데는 치료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거라고 모르페우스 사제도 말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사람이 그의 어린 시절에도 있었더라면...
그랬더라면 그의 집안에 지금과 같은 비극도 없었을 텐데.
예니치카 고모를 구할 수 있었다면 아버지와 삼촌이 그렇게 반목하게 되진 않았을까.
그리고 예프넨도 죽지 않을 수 있었을까.......
"무얼 생각해?"
퍼뜩 생각에서 깨어난 다프넨은 억지로 표정을 펴며 고개를 저었다. 이미 수백 번도 더 해본 생각인 것이다. 그걸 굳이 이솔렛에게 말할 필요는 없었다. 그런 이야기를 안다면 그녀의 마음도 편치만은 않을 테니까.
그는 얼른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실은 밖으로 나오지도 않고 혼자서만 지내는 것 같아서 좀 걱정했어요."
"난 본래 혼자인걸.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매년 겨울이 똑같았어."
"무슨 책 봐요?"
"아버지의 일지야. 장서관에 가 있던 것들을 겨울나기에 쓰려고 몇 권 가져왔지."
이솔렛은 책을 건넸다. 다프넨은 중간쯤을 펼쳐서 들여다보았다.
그리 체계적인 기록은 아니었다. 날짜가 휘갈겨 쓰인 아래에 연구 과정에 대한 것도, 갑자기 떠오른 단상에 대한 것도, 마을의 일이나 딸에 대한 걱정도 모두 한꺼번에 쓰여 있었다.
몇 장 더 넘기다가 그는 손을 멈췄다. 중간 이후는 백지였다.
이솔렛이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마지막 일지거든."
약간 머뭇거리다가 다시 책장을 되넘기기 시작했다. 일리오스 사제는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맨 마지막 날의 일지는 장식문자가 아닌가 싶을 정도의 아름다운 글자들로 되어 있었다. 일부러 천천히 정성 들여 쓴 듯했다.
......태양의 이름을 가져 달여왕의 백성이 될 수 없었던 나는
내 뒤에 남겨질 '고귀한 고독'을 이렇듯 걱정하고 있다.
나는 그 아이가 살아가는 법을 제 이름에서 얻기를 바란다.
그것만이 나의 마지막 희망이자 가르침이다.
이제 내가 간 뒤의 시산들을 옛 마법사들의 손에 맡기고
금은의 나라여, 그대가 간 길로 가련다.
영원이 없는 세상에는 단지 되풀이되는 낮과 밤이 있을 뿐이다.
낮이 긴 날의 밤은 짧고, 밤이 긴 날의 낮은 짧다.
오랜 행복을 누린 자에겐 짧은 불행이,
긴 불행을 견딘 자에겐 짧은 행복만이,
낮과 밤이 공평해지기 위해 365개의 하루가 필요하듯
인간 세상의 공평함은 억만 년 뒤에나 있으리.
"이건......."
마지막에 쓰여진 몇 마디 문장은 분명 들은 기억이 있었다. 이솔렛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의 일지를 보고 내가 만든 찬티카(짧은 찬트)였어, 그건."
고개를 끄덕이며 그는 다시 물었다.
"태양의 이름이란 뭐지요?"
"아버지의 이름이 가진 뜻이지. 일리오스는 태양이라는 뜻이야. 어찌 보면 달의 섬에서는 흉흉한 이름인 거지."
"묘하군요......."
다프넨은 책을 덮은 채 상상해 보았다. 섬 안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자 독보적인 천재였고 어린 딸을 지극히 사랑한 사람, 그는 결코 죽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그가 촛불 앞에 앉아 자신의 죽음을 선택하며 마지막 글귀를 남기고 있었다. 가능한 한 침착하게, 고운 글씨로.
"당신은 이때 어디에 있었죠?"
말하고 나서 실수했다 싶었다. 그러나 이솔렛은 별다른 표정 없이 답했다.
"데스포이나 사제의 집에. 갇혀 있었지. 그 날 이후로 다시는 그 집에 가지 않았는데. 여름의 일로 본의 아니게 그녀의 집에서 머물렀다가 깨어나 보니 문 한쪽에 7년 전에 내가 쳐서 망가뜨려 놓은 자국이 보이더라."
"......."
둘은 잠시 말이 없었다. 난롯불만이 타닥거리며 타고 있었다.
"내게 묻고 싶은 것 없어요?"
한참만에 다프넨이 그렇게 말하자 이솔렛이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웃는 그녀의 눈동자가 맑아 보였다.
"왜,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아, 아뇨... 하지만 그 때 당신은 이상한 걸 많이 봤으니까요."
"음......."
이솔렛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말했다.
"그랬지. 네 검이 위험한 물건인 것이냐고, 그것의 힘은 과연 무엇이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내가 궁금할 정도면 이미 사제님들이 다 알아서 처리하시지 않았을까?"
"그분들이라 해도 모르는 것은 있고, 이솔렛 당신이 훨씬 잘 알 수도 있지 않나요."
"하지만 그분들은 나보다 더 섬의 안전에 대해 민감하시지."
다프넨이 입을 다물었다가 갑자기 말했다.
"그 검은 우리 집안의 보물이었어요. 내가 대륙에서 살 때 속해 있던 집안 말이에요. 형에게 물려졌고, 형이 다시 내게 준 것이지요."
"진네만 집안 말이니?"
"아, 어떻게 알았어요?"
"네가 예전에 이 집 앞에서 외쳤잖아. '나는 보리스 진네만이다!'라고 말이야."
"아... 내가 그랬었군요."
다프넨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이솔렛이 미소짓더니 말했다.
"그건 꽤 멋있는 외침이었지."
"......."
말문이 막혀서 뭐라 답해야 할 지 몰랐다. 이솔렛은 난롯불을 보며 말을 이었다.
"난 그때 일이 아주 잘 기억나. 오랫동안 생각했거든. 왜 그때 내가 당장 밖으로 나가지 않았을까, 그런 모욕을 들으면서 어찌 침묵했을까 하고 말이야. 답은 너를 따라 폐허의 마을로 갔을 때 얻었어. 말하자면 그때 난 네가 내 대신 그 문제를 해결할 사람이라고 느꼈던 거야. 나 자신이 아니라 네가."
당시 헥토르는 몰랐을지 몰라도 다프넨은 알고 있었다. 그때 헥토르가 입을 열어 일리오스 사제를 모욕했더라면, 그가 당장 그 자리에서 일리오스 사제가 가르친 이솔렛의 쌍검과 대결하지 않으면 안 되었을 것이다. 뒤에 무슨 일이 벌어지든 그 한 마디에 대한 대가로 상대를 죽이고도 남을 사람, 그것이 그가 아는 이솔렛이었다.
다음 순간 그는 스스로 놀랐다. 왜 다행이라고 생각될까. 이솔렛의 손에 피를 묻히는 것을 바라지 않아서?
"내 문제이기도 했어요. 내 잘못이기도 했고......."
"알아. 공동의 실수였지. 굳이 따지자면 함께 바다로 가자고 말했던 내 잘못이 크고 말이야. 그런데도 난 네가 그들에게 내 대신 항변할 거라고 생각했어. 왜였을 것 같니?"
"모르겠어요......."
이솔렛은 고개를 돌려 다프넨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난롯불 때문에 뺨이 발그레했으나 표정은 침착했다.
"그때 난 네가 내 약혼자라도 되는 것처럼 느꼈던 거지."
"......."
집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지붕과 처마를 감싸고 내려 그들과 세상을 격리시키고 있었다.
"괜찮아. 더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이젠 본래의 나로 돌아왔으니까. 아버지께서 내게 간접적으로 하신 유언이 있었지. '네 이름의 뜻대로 살라'고 말이야."
고귀한 고독.
왜 일리오스 사제는 하나뿐인 딸에게 그런 것을 주문했을까. 그녀가 이렇듯 사람들과 교류하지 않고 마을과 격리되어 혼자 사는 모습이 그가 바란 결과란 말인가.
"당신은... 지금의 삶이 마음에 들어요?"
"좋다기보다는 이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있어."
"왜요? 당신처럼 재능 있고 아름다운 사람도 흔치 않은데 왜 외따로 이렇게......."
이솔렛이 단호하게 끊어 말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아버지처럼 되어선 안 되니까."
다프넨은 무슨 뜻인지 깨달아 보려 애썼다. 그러나 그의 경험으로는 무리였다.
이솔렛이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다.
"섬은 아주 작고 또 닫혀 있는 사회지. 바깥 대륙에는 왕이 있고 귀족이 있는데 여기엔 겨우 섭정과 사제가 있을 뿐이야. 그리고 그들조차 다른 사람들보다 특별히 부귀를 누리고 있진 않고. 크게 가난한 사람도, 크게 부자인 사람도 없어. 약간의 존경과 결정권, 그런 정도가 그들에게 주어진 전부니까."
이솔렛은 일리오스 사제의 일지를 천천히 손으로 쓸어 내렸다.
"작은 사회에서는 평등이 실현되기도 쉽지만, 한 번 깨어지면 걷잡을 수 없게 되어버리지. 그래서 섬은 빼어난 사람을 원하지 않아. 내 아버지가 여러 가지 면에서 천재적인 재능을 보이며 사람들을 압도했을 때 섬사람들은 환호했지만, 동시에 두려워하고 있었어. 저 자 한 명이 우리 여럿보다 낫다면? 그가 내놓는 주장이 틀렸다는 것을 반박할 사람이 없다면? 옛 왕국의 권위에 의존해서 근근히 이어나가고 있는 질서와 신앙을 그가 조목조목 따져 뒤엎어 버린다면?"
서서히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그가 상상하지 못한 새로운 정치적 문제였다.
"그런 자들 가운데서도 가장 큰 위협을 느낀 것은 바로 네가 한 번도 만나본 일이 없을 섬의 지도자, 섭정 각하지."
들창이 덜컹거렸다. 창을 때리는 바람의 소리가 났다. 이솔렛의 목소리가 겨울밤에 끓인 초콜릿처럼 진해져 있었다.
"내 아버지에게 죽음을 강요한 것이 바로 그 자였어. 검의 사제가 마을의 안전을 위해 목숨을 내던지는 것은 당연하지 않느냐고 말했지. 그것도 내가 듣는 앞에서."
이솔렛은 섭정을 전혀 높여 말하지 않고 있었다. 다프넨은 깍지낀 채 무릎에 올려진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벌어지는 지배와 피지배의 문제는 여기에도 있었다. 그가 해답을 얻지 못했듯, 이곳에도 해답은 없었다.
"섭정 각하가 어떤 사람인지 저는 모릅니다. 어째서 섬의 지도자인데도 직접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으시는 건가요? 본래 섬의 섭정은 다 그런가요?"
"아니, 그만이 그래. 그도 처음 섭정이 되었을 때는 그렇지 않았지. 하지만 그는 이제 하반신을 쓸 수 없는 불구자야. 속된말로 앉은뱅이라고 하지."
"어떻게 그런 일이?"
"본래 섭정들은 지금은 폐허가 된 옛 마을에서 살았어. 그곳은 여기보다 지대가 높고, 주변의 산세도 험하지. 그는 독수리를 사냥하려 하다가 그만 발 밑을 보지 못해 얼음 크레바스에 빠졌어. 불행 중 다행으로 크레바스가 작아서 까마득한 바닥으로 떨어지게 되진 않았지. 그러나 그는 하체가 크레바스의 틈새에 끼인 채 사흘이나 고립되어 있었어. 사람들이 그를 찾아냈을 때는 도저히 손쓸 수가 없게 된 후였지."
"불쌍한 사람이군요."
"그래. 불쌍했지. 서클렛의 사제님이 애썼지만 다리를 자르지 않는데 그쳤을 뿐, 기능을 되돌리진 못했어. 그가 그렇게 되고 나서 채 1년이 되기 전에 그의 아내는 섬 밖으로 달아나 버렸지. 아마 하반신을 쓸 수 없는 남편은 필요 없다고 생각했거나, 뒷수발을 들며 남은 평생을 보낼 순 없다고 마음먹었나 봐. 아내가 사라지고 나자 그 사람은 독해졌어. 집 안에 꼼짝 않고 틀어박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신을 무시하거나 위협하는 모든 문제를 미연에 없애버리려 궁리했지. 그는 곧 수발을 들어 줄 만한 여자를 골라 재혼했지만, 그가 마음 속 깊이 진심으로 아끼는 것은 오직 딸 하나뿐이었어. 마치 우리 아버지처럼 말이야. 물론 아버지는 다시 결혼하지 않았지만."
말하다 말고 이솔렛은 문득 생각난 것처럼 물었다.
"참, 너는 모르던가? 이후 섭정의 자리를 물려받게 될 그 애 말이야, 너도 잘 아는 사이일텐데?"
"그게 누구죠?"
어리둥절해하는 다프넨에게 깜짝 놀랄 만한 이야기가 들려왔다.
"리리오페 아니니."
그야말로 금시초문인 소리였다. 그러나 그녀가 말하는데 사실이 아닐 리는 없었다.
"저... 전혀 모르고 있었어요."
"글쎄,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나."
이솔렛은 혼자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섭정이 될 아이는 스콜리를 졸업할 때까지 부모와 떨어져서 살게 되어 있어. 어렸을 때는 보통 아이들처럼 자라야만 하거든.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특권 계층인 양 생각하게 되어버리지."
다프넨은 잠시 후 말했다.
"그럼 당신은 리리오페가 싫겠군요. 두 아버지들이 서로 원수나 다름없으니."
"아니, 난 그들이 측은해. 육체적 능력을 잃고 나자 쓸모없는 망상에 사로잡혀서 아무도 노리지 않는 자신의 권한을 빼앗길까 두려워하는 사람, 그리고 그 때문에 어떤 일도 서슴지 않게 되어버린 섭정 각하는 특히 더."
그렇게 말하는 이솔렛의 목소리는 농담이나 비꼬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이제 내가 왜 이러는지 알겠니?"
다프넨은 입을 다물고 생각에 잠겼다가 드디어 무엇인가를 깨달았다. 그는 고개를 들어 이솔렛을 보았다.
"그렇군요.... 당신이야말로 다음 대검의 사제가 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사람이었군요. 당신이 이렇듯 은둔하고 있지만 않는다면 틀림없이."
"그래. 난 검의 사제가 되어서는 안 되지. 아버지들의 일을 리리오페와 함께 되풀이하고 싶지는 않아. 그 애는 자기 아버지를 많이 닮았거든. 그리고 나는 내 아버지와 거의 똑같고. 사람들이 나를 은둔하는 공주니 뭐니 하며 떠받드는 것도 다 계획적인 일이야. 내가 이 상황에서 벗어나 무언가 다른 일을 하는 것은 아무도 원치 않아."
아버지의 죽음을 방관한 사람들에게 실망하여 마음을 닫아버린 소녀가 아니었다. 함께 죽지 못한 것이 괴로워 자포자기 상태로 살아가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오직 이것뿐,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이 바로 이 상태인 것이다.
눈을 품고 휘몰아치는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문득 여름에 보았던 겨울 풍경이 떠올랐다. 다친 팔을 늘어뜨린 채 먼 곳을 보던 이솔렛과 그녀를 감싸안았던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말로 확인하지 않았으나 같은 심정일 거라고 순간적으로 믿고 있었던 그때.......
"그렇다고 해서 당신은 누군가를 사랑하지도 않을 셈인가요? 돌아가신 아버지 외엔 그 누구도 필요 없나요?"
상체를 곧게 세운 채 옆얼굴만을 보이는 그녀에게 시선을 보냈다. 대답을 기다리며 열렬히 바라보았다. 모든 상황이 그녀를 혼자이도록 몰아간다 해도 그런 삶은 너무 불공평하지 않은가. 일리오스 사제가 쓴 일지의 마지막 글귀처럼, 인간들 사이의 공평함은 억만년 뒤에나 계산될 수 있는 것인가?
그리고 짧은 대답이 울렸다.
"난 이미 누군가를 사랑했어."
"......."
세 번째로 그는 말문이 막히는 것을 느꼈다. 싸늘한 기운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이제는 그를 사랑하지 않지. 그를 사랑하는 동안 내 감정은 뒤틀리다 못해 피투성이가 되었고, 나중에는 고문에 가까워질 정도로 변했어. 그래서 난 그것을 땅 밑에 깊숙이 묻었지. 그건 옳은 선택이었어. 이제 내 감정은 묻힌 채 썩다못해 녹아버렸고, 그런 마음으로 누군가를 다시 사랑한다는 것은 옳지 못하겠지."
불타는 장작 아래 이제 다 타서 재가 되어 가는 장작이 보였다. 그것은 서서히 부서져 가루로 변하고 있었다.
다프넨은 바닥을 내려다보고, 다시 어색하게 몇 곳을 두리번거리다가 갑자기 일어섰다. 그리고 많이 늦었으니 그만 가야겠다고 말했다.
이솔렛은 약간 걱정스러운 것처럼 말했다.
"눈을 헤치고 가기엔 위험한 날씨 같은데."
다프넨은 고개를 젓더니 붉어진 뺨을 한 손으로 비비며 씩 웃었다.
"저번 같은 실수를 해서 안되잖아요."
문을 여니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다프넨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돌아서서 재빨리 손을 흔들고는 문을 닫았다. 발소리가 멀어져갔다.
혼자 남은 이솔렛은 그가 앉았던 깔개 위의 자리를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불티가 날려와 아버지의 일지에 떨어지자 손으로 쳐서 껐다. 그리고 일어나 깔개를 치우고 큰 의자를 도로 가지고 왔다.
아버지가 살아 생전에 애용하던 의자에 몸을 묻고 앉았다. 그러나 이번엔 손에 책이 들려 있지 않았다.
3. 대륙에서 불어오는 바람
3월이 되자 스콜리는 개학했다.
학생들이 많이 바뀌어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헥토르의 부재였다. 헥토르를 따라다니던 아이들은 중심을 잃고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에키온 혼자의 카리스마로는 도저히 그들을 다시 규합할 수가 없었다.
헥토르는 예상대로 검의 길을 자원했다. 3월 초에 검의 사제 아래에 있는 전사들과 함께 침묵섬으로 떠난 그는 다음 달이나 되어야 돌아올 예정이었다. 그런 식이니 에키온은 한층 더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삶의 목적을 형의 존재에 두었는데 그 형은 자신의 인생에서 발을 빼어 나가 버렸다. 그에게도 변화가 오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변화의 수용을 거부했다.
새학기가 시작된 스콜리에서 가장 화제가 되고 있는 것이 있었다.
다프넨은 언젠가 그에 대한 얘기를 월넛 선생이었던 당시의 나우플리온으로부터 들었던 것을 기억해 냈다. 바로 실버스컬(Silver Skull)이었다.
"올해라고, 올해는 반드시 나갈 수 있다니까."
"검의 사제님이 허가를 해 주셔야 되잖아. 아직은 모른다고."
"무슨 소리야! 5년에 한 번 참가라는 건 옛날부터 죽 전통이었다고!"
"이번엔 몇 명이나 가게 될까? 나도 갈 수 있을까?"
쉬는 시간마다 몰려 앉아 떠들어대는 통에 별 관심이 없던 다프넨 조차도 대강의 상황을 알게 될 정도였다.
대륙에서 벌어지는 실버스컬은 매년 있는 행사지만 섬에서는 5년에 한 번씩만 참가하도록 되어 있었다. 실버스컬은 대륙에서도 아이들을 지나치게 검술이나 격투 따위 무예 수련에 집착하도록 몰아간다는 비판이 있을 정도로 대단한 인기를 끌고 있는 대회였다. 섬은 대륙보다 작으니만큼 함부로 직업의 균형이 무너지면 큰 일이 벌어졌다. 그러니 참여에 어느 정도 제약을 둘 필요가 있었다.
실버스컬에 참가할 수 있는 나이는 15세부터 20세까지고, 섬에서는 5년에 한 번 원정대를 보내니까 어쨌든 모든 아이들에게 일생에 한 번은 기회가 왔다.
물론 나이가 된다고 다 나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어느 정도의 실력이 요구되기에 섬에서 미리 시험을 치른다고 했다. 그 이유는 첫째로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대륙을 여행한다는 것이 만만찮게 위험하기 때문이고, 둘째는 가서 망신스러운 성적을 낼 녀석을 굳이 보낼 필요가 없으니 그랬다.
20세에 참가할 기회가 오는 아이들이 제일 운이 좋았고, 15세가 갓 되자마자 실버스컬 참가년이 돌아오는 아이들이 가장 운이 나빴다.
그리고 다프넨이 바로 그런 경우가 될 듯했다. 올해 실버스컬은 7월말, 아노마라드 중부의 폰티나 지방에서 열리게 되어 있었다. 바로 다프넨이 15세가 된 직후인 셈이었다.
폰티나라는 이름을 어디서 들어본 것 같기도 한데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오히려 운이 좋은 건지도 몰라."
섬에서 검술과는 제일 거리가 멀다 해도 과언이 아닌 오이지스조차 요즈음은 아이들의 분위기에 물들어 연일 그 이야기였다. 다프넨을 바라보는 오이지스는 희망적인 눈빛이었다. 최근 그는 다프넨이 실버스컬에 나가게 될 것은 자명한 일이고, 심지어 우승도 할 수 있다고 제멋대로 믿어버린 터라 다프넨도 대화 중에 여간 곤란을 겪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5년에 한 번이잖아. 그런데 개최 날짜는 조금씩 바뀌거든? 그러니까 5년 뒤의 실버스컬은 네가 스무 살을 넘기기 전일지도 모른다고! 그러면 전무후무한 2회 참가자가 되는 거지. 후후후. 두 번 다 우승해 버리면 정말로 멋지겠다. 넌 지금도 최고니까 스무 살 때는 더 대단하겠지?"
스무 살이라, 도무지 실감나지 않는 나이였다. 그의 시간은 언제나 매우 느리게 흘러갔다. 도대체 언제 스무 살이 될 수 있는 걸까?
"자꾸 우승, 우승, 그리지 마, 오이지스. 내 실력은 대륙에 나가면 보잘것없어. 훨씬 강한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아냐. 본래 섬 아이들의 평균적인 실력이 대륙 애들보다 낫대. 게다가 겨울 내내 검의 사제님이랑 연습했잖아. 분명히 엄청 강해졌겠지. 그거 실버스컬 준비하느라 그런 거 아냐?"
어라, 그랬던 건가?
생각해 본 일이 없는 문제라 다프넨은 잠시 혼란을 일으켰다. 나우플리온이 갑자기 그에게 검을 연마하자고 한 게 설마 실버스컬에 나가라고 그런 거였나? 물론 실버스컬 얘기를 처음 해준 것도 나우플리온이었고 이번에 참가를 결정하는 것도 나우플리온... 이었구나. 그래도 겨울 내내 한 번도 그런 얘기 한 적 없잖아. 분위기도 절대 그런 식은 아니었고.......
쉽게 결정이 나지 않아 다프넨은 말을 돌렸다.
"그럼 섬에서 우승했던 사람이 많았니?"
뜻밖으로 오이지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한 명밖에 없었어. 준우승까지 한 사람은 두엇 더 있었다고 해."
"누가 우승했는데?"
"한 명밖에 없잖아. 그 분 외에 누가 또 우승했겠어?"
혹시나 싶긴 했지만 되물어 봤다.
"나우플리온... 사제님?"
"틀렸어. 그 분은 실버스컬에 나가지도 않으셨다고. 이유는 잘 모르지만 하여튼 그랬대."
그 순간 그의 머릿속에서도 한 사람이 떠올랐다.
"일리오스 사제님인가?"
"일리오스......? 아, 그래! 맞아. 이솔렛 누나의 아버지인 그 분이야. 그 분이 우리 섬의 유일한 우승자야."
하긴, 나우플리온에게서 들은 그대로라면 그 말고 누가 달리 우승을 하겠는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갑자기 그의 마음 속에서 전에 없던 감정이 솟아올랐다. 우승은 좋을까, 할 만한 것일까.
누구를 위해서?
오이지스가 계속 말하고 있었다.
"어른들도 다들 말하길 이번 실버스컬에 나가서 우승할 사람이 있다면 너하고 헥토르, 그리고 이솔렛 누나래. 그렇지만 이솔렛 누나는 그런 데 나가지 않을 거 같아. 아버지에 이어서 누나도 해낸다면 멋지긴 하겠지만... 아참, 그러면 너하고 싸워야 되는구나."
이솔렛과 그의 수업도 다시 시작되어 있었다.
다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