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제4권. 2장 . Rage of the Winter (11/21)

2장 . Rage of the Winter

1. 함정이 예고되다.

오후였다.

늦은 아침까지 실컷 잤던 탓인지 돌아오는 길은 생각만큼 힘들지 않았다. 두 사람은 가벼운 걸음걸이로 산을 내려왔다. 그리고 산 어귀에 있는 이솔렛의 집으로 먼저 갔다.

 "밤새 돌아오지 않아서 사제님이 걱정했을 것 같아요."

 "응, 아마도......."

 이솔렛은 약간 말꼬리를 흐렸다. 자꾸만 뭔가 마음에 걸렸다. 좋은 꿈을 꾸었지만 그것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문을 열어주고, 이솔렛이 들어가는 것을 보고 나서 다프넨은 혼자 비탈을 내려왔다. 해의 위치를 확인해 보니 스콜리는 벌써 끝났을 시간이었다. 확실히 안 하던 행동을 한 것 같다는 기분이 들어 그는 조그맣게 입맛을 다셨다. 나우플리온의 얼굴을 떠올리니 약간 죄책감이 들었다. 

 화를 내면, 잘못했다고 해야지.

 그가 집으로 돌아가는 마지막 모퉁이를 도는 순간, 눈앞에 뜻밖의 인물이 나타났다. 마치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한 표정으로 새침하게 서 있는 것은 리리오페였다.

 "아... 어떻게?"

 자기 집 문 앞에서, 그것도 꽤 오래 기다렸던 듯한 자세로 서 있으니 누굴 찾아온 건지는 물어볼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바로 어제 스콜리에서 봤던 그녀인데 이상스럽게도 낯설어 보였다. 아니, 정확히는 그녀를 보는 자신의 눈이 전과 달라진 것 같았다.

 희게 햇살이 내리는 맑은 오후의 골목이었다.

 "어디 갔다 오니?"

 리리오페는 발끈하기 직전인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목소리는 침착했다. 다프넨은 자기가 스콜리에 가지 않았기 때문에 묻는 거라고 짐작하고서 간단히 대답했다.

 "그냥... 산책."

 "밤새도록?"

 어젯밤에 돌아오지 않은 걸 어떻게 아는 걸까? 아니, 설마 섬사람 모두가 알고 있는 건가?

 "......."

 무어라 대답해야 좋을지 몰랐다. 자신이 리리오페에게 변명을 해야 되는 입장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실대로 말하려니 이상스럽게도 걸리는 뭔가가 있었다.

 "왜 대답 못해?"

 "대답해야만 되는 건가?"

 "그렇지. 잘못한 게 있는 사람이 흔히 그렇게 대답하더라."

 리리오페는 더 눈길 주기 싫다는 듯 고개를 홱 돌리더니 다프넨이 방금 걸어왔던 골목 쪽으로 종종걸음쳐 달려가 버렸다.

 점점 기분이 이상해지고 있었다. 다프넨은 집으로 다가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나우플리온은 이런 낮에 집안에 할 일 없이 앉아 있을 만큼 한가한 사람이 아닌 것이다.

 의자에 앉아 익숙한 집 안을 둘러보았다. 그런데 자꾸만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집에 들어온 후로 더 심해진 것 같았다. 마치 집 안에 그를 불편하게 하는 기운이 감돌고 있는 듯했다.

 도저히 편히 쉴 수 없는 상태가 되자 그는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잠시 궁리하다가 공회당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데스포이나 사제를 만나 원터러에 대한 것이나 물어보자고 생각했다.

 공회당 앞마당에 유난히 사람이 많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야아, 이보라고, 다프넨이 왔잖아!"

 저런 말투로 그를 반길 또래 소년은 섬에 없었다. 오이지스라면 저런 식으로 말하지 않을 것이었다.

"호오, 드디어 왔네? 재미는 이제 실컷 봤나 보지?"

재미? 

앞마당에는 대여섯 명 가량의 소년들이 모여 쑥덕이고 있었다. 먼저 소리친 것은 피쿠스라는 이름을 가진 에키온 패거리 가운데 한 명이었고, 두 번째로 입을 연 것은 에키온 자신이었다. 헥토르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프넨은 그들 앞으로 다가가며 물었다.

"무슨 소리지?"

"뭐야, 우린 격려해 주려는 것뿐이라고, 그런 표정이라니 어디 무서워서 말이나 하겠어?"

에키온은 헐렁한 튜닉의 긴 소맷자락을 걷으면서 씨익 미소지었다. 얌전하게 난 이빨 가운데 송곳니 두 개만이 유난히 도드라진 것이 보였다. 

다프넨은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나 지껄일 거라면 가겠어."

"아, 가거나 말거나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말이지. 하여간 역시 놀라운데? 아마 대륙에서 온 녀석만이 그런 수작을 생각해 낼 수 있을거야. 우리 같은 섬 토박이들이야 어디 상상이나 해본 일이겠어?"

"맞아,맞아."

다프넨은 저도 모르게 허리로 손을 가져가다가 멈췄다. 저들이 그를 모욕하려 하는 것은 분명한데 무얼 가지고 그러는 것인지 확실히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또한 검도 없었다. 

리코스라는 소년이 불쑥 나서며 내뱉듯 말했다.

"너, 전무후무한 일을 벌이고 있다지?

다프넨은 낮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한 번 더 말하지만, 똑바로 설명해라."

리코스는 다른 소년들과는 달리 다프넨이 미워 죽겠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의 입에서 드디어 한 마디가 터졌다.

"소문이 쫙 퍼졌지. 직접 가르침을 받는 중인 스승과 수작이 붙었다고 말이야."

퍼억!

눈 깜짝할 사이에 리코스의 몸이 돌 바닥에 나뒹굴었다. 다프넨은 자신이 언제 주먹을 휘둘렀는지 느낄 겨를도 없었다. 모든 것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러나 그 다음 순간, 다프넨의 어깨를 누군가의 억센 손이 움켜잡아 당겼다. 몸이 돌려지는 것과 동시에 그의 얼굴로 난데없는 주먹이 날아들었다.

터억!

왼쪽 턱을 정면으로 얻어맞고 휘청, 꺾이려는 몸을 다잡는 순간 다시 한 번의 주먹이 이번에는 하복부를 치고 들어왔다. 반사적으로 몸을 빼며 그 손목을 움켜잡았다. 그러나 자세가 좋지 않아 절반은 놓쳐 버렸다. 

"......건방진 놈."

나지막한 목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헥토르였다.

다프넨은 몸을 빼어 한 걸음 물러서며 그를 노려보았다. 어느새 다른 소년들이 주위를 빙 둘러싸고 있었다.

주먹을 내린 헥토르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정말로 화가 난 듯한 얼굴이었다. 그는 그 눈으로 다프넨 뿐 아니라 주위의 다른 소년들까지 훑어보아 일시에 침묵하게 만들어 버렸다.

다프넨은 오른손 손바닥을 펴 내밀었다가 천천히 쥐어 보이며 나직이 말했다. 

"무슨 볼일인지 말하지 않는다면 방금 것, 돌려주겠다."

"네가 모른다고?"

헥토르의 입에서 곧장 노성이 터져 나왔다.

"감히 범접해선 안 될 사람의 이름을 더럽힌 주제에!"

갑자기 뒤통수 아래, 목덜미에서 머리에 이르기까지 서늘하고도 뜨거운 기운이 솟구쳐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드디어 모든 상황이 짐작이 갔다. 그러나 동시에 용납할 수 없는 전개였다. 다프넨은 간신히 숨을 억누르면서 말했다. 

"......말 함부로 하지 마라. 돌이킬 수 없게 되기 전에."

그러나 쉽게 끝날 일이 아니었다. 헥토르는 도저히 참을 수 없다는 듯 냅다 소리쳤다.

"네가 지금 어떤 사람을 네 지저분한 소문에 끌어들였는지 알고나 있나? '그녀'는 우리 섬사람 모두에게 신성한 공주와도 같은 존재야. 사제님들조차 함부로 대하지 않는 그녀의 모든 천분과 모든 이름과 모든 고귀함은, 너처럼 비천한 놈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아무도 그녀에게 손대어선 안 돼! 멋대로 지저분하게 놀고 싶거든 혼자서나 실컷 그렇게 하고, 그녀한테는 손끝 하나 대지 말란 말이다, 이 대륙에서 온 더러운 놈아!"

"......!"

더 대화가 오갈 필요도 없었다. 둘은 거의 동시에 덤벼들어 서로를 쓰러뜨리고는 땅바닥에서 뒹굴었다. 난폭한 주먹질이 오가고 옷깃이 뜯겨 나갔다. 둘을 둘러쌌던 소년들이 부산하게 뒤로 물러섰다.

다프넨보다 두 살이 많은 헥토르는 몸집도 컸지만 완력도 더 셌기에 금세 다프넨을 깔아 누르고 다리에 올라탔다. 그러나 힘은 약해도 탄력적인 몸을 가지고 있는 다프넨은 단숨에 상체를 일으키며 헥토르의 어깨를 밀쳐 눌렀다. 그러나 다리가 깔린 까닭에 그도 마음대로 상대를 유린할 수는 없었다.

에키온이 안절부절못하며 주위를 맴돌고 있었다. 마음 같아선 형을 돕고 싶지만, 자존심 강한 형이 그걸 용납할 리가 없었다. 다른 소년들도 마찬가지였다.

"때려! 눌러 버려!"

"대륙에서 온 악마 녀석 따위, 박살을 내 버려!"

다프넨은 다시 한 번 힘에서 밀려 바닥에 내던져졌다. 그러나 이번에는 상대의 주먹을 한 대 맞아 주면서까지 왼쪽 다리를 틀어 헥토르의 다리를 바깥쪽으로 걸어 당겼다. 동시에 오른쪽 무릎을 세우며 상대를 힘껏 밀쳤다.

"큭!"

헥토르의 주먹은 과연 보통이 아니었지만 맞은 만큼의 성과는 있었다. 단숨에 전세는 뒤집어져 다프넨 쪽에서 헥토르를 타고 누르게 되었다. 다프넨은 상대방과 같은 실수는 되풀이하지 않고자 다리가 아닌 그의 배를 타고 누른 뒤 주먹을 두 대 먹였다. 헥토르의 입술이 찢어져 피가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건 한참 전부터 다프넨도 마찬가지였다.

"다시 한 번 그런 소리를 한다면......."

헥토르는 손을 내저으며 다프넨의 멱살을 잡으려 애쓰고 있었다. 그 때 다프넨의 손이 다가와 헥토르의 목을 움켜쥐더니 힘주어 눌렀다.

"컥......."

장난으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금방 눈앞이 아찔해졌다. 도저히 숨을 쉴 수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상대의 얼굴이 언뜻 보였다. 그리고 놀랐다.

돌처럼 싸늘히 굳어진 얼굴이었다. 이어 들려온 목소리도 좀 전에 열에 들떴던 어조와는 전혀 다른, 지독히 차가운 목소리였다.

"너하고 정식으로 결투하겠다."

자신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옴과 동시에 다프넨의 머릿속에는 예프넨의 모습이 선명히 떠올라왔다. 모든 것이 순식간에 번뜩이며 지나갔다. 작은 마을, 벌레가 담긴 수프를 먹이며 그를 모욕한 상대들, 그 모든 것을 다 받아주고서 마침내 일어나 했던 한 마디.

네게 정식으로 결투를 신청한다.

손이 풀렸다. 눈앞이 아득해진다고 생각하는 순간, 억센 손이 다가와 그의 뒷덜미를 잡아 올리는 것이 느껴졌다.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매우 조용한 어조였다.

"공회당 앞에서 싸움질이라니, 둘 다 예외라곤 글렀구나."

나우플리온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소년은 갑작스런 혼란을 느꼈다. 예프넨의 모습이 떠올랐었고, 그 위에 갑자기 나우플리온의 그림자가 겹쳐졌던 탓이었다. 다른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각각 다른 사람이라는 사실이 이상할 정도로 낯설었다.

나우플리온은 다프넨을 내려놓고 이어 헥토르에게 손을 내밀었다. 헥토르는 약간 망설이다가 그 손을 잡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자마자 목에서 밭은 기침이 터져 나왔다.

"난 소년들이 싸워선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싸움은 다른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에 가서 해라."

그렇게 말한 뒤 나우플리온은 다프넨의 어깨를 툭 쳤다.

"꼴이 이게 뭐냐. 약 꽤나 발라야겠구나. 생각난 김에 모르페 사제나 보러 가자. 그 양반이 널 보고 싶다고 그러더라."

평소와 같은 농담조였는데 어딘가 모르게 달랐다. 다프넨은 약간 망설이다가 돌아서서 나우플리온의 눈을 보았다. 그의 눈이 약간 슬픈 듯해 보이는 것이 착각일까 생각해 보았다.

"형, 식사해!"

헥토르는 손수 몸 곳곳에 약을 바른 뒤 따끔거리는 것을 참으려고 눈을 감고 있다가 동생이 부르는 소리를 듣고 돌아보았다.

"그래."

저녁 식사를 차린 것은 에키온이었다. 부모님은 섭정 각하를 만나 뵈러 가서 밤늦게 돌아올 예정이었다.

마을 안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잘 지어진 집이고 먹는 음식도 훌륭한 편이었지만 대륙의 귀족들과는 달리 시종은 한 명도 없었다. 섬사람의 누군가의 시중을 드는 것은 상대를 스승으로 모실 때 말고는 없었다.

힘세고, 모든 점에서 뛰어나며, 심지어 잘생기기까지 한 형 헥토르의 존재는 에키온에게 있어 자랑이자 즐거움이었다. 에키온은 가끔 떠오르는 교활한 꾀를 제외하면 어떤 것도 잘하는 것이 없었고 겉모양도 왜소하여 볼품이 없는 소년이었다. 형을 질투할 법도 한데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래 보았자 아무 도움도 되지 않으며 심지어 불편할 뿐이라는 것을 너무 일찍 알아버렸다.

그리하여 에키온은 형의 가장 열렬한 지지자가 되는 것으로 재빨리 자신의 인생을 정해버렸다. 그의 생각이 닿는 범위 안에서 그것은 지극히 현명한 결정이었다. 잘난 형만을 사랑했어야 마땅할 부모님은 자신보다 형을 더 좋아하는 듯한 못난 동생에게도 관대함을 베풀어주었다. 그것 그 나름의 생존 전략이었다.

"나우플리온 사제님이 말리지만 않았으면 형이 금방 녀석을 눌러서 곤죽으로 만들어 줬을 텐데. 사제님은 다프넨 자식이 질 것 같으니까 괜히 끼여들어서."

이럴 때면 반쯤 자기 도취에 빠지다시피 하는 에키온이 식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지껄이고 있었다. 헥토르는 별 대답 없이 스프를 떠 마셨다.

"다프넨 녀석은 약삭빠르기만 하지 실력은 형편없다라고, 기운도 없고, 다음에 만나면 꼭녀석을 다시 패 줘야지."

"쉽진 않을 거야."

그제야 헥토르가 입을 열었다. 에키온은 무슨 소린가 하는 표정으로 헥토르를 쳐다보았다.

"무슨 소리야. 형이 그 자식한테 질 리가 없잖아."

"진다는 얘기가 아냐. 아까 나우플리온 사제님이 한 말 들었지? 모르페우스 사제님을 보러 가자고, 그 분이 녀석을 보고 싶어한다고 말했지 않느냔 말이다. 은근히 사제들의 권위를 내세워 우릴 누르려고 하더군. 그런 식이니 다시 싸울 기회를 잡기가 힘들 거란 말이다."

"쳇, 비겁하게.... 그 자식이 먼저 결투하자고 말했었지? 까짓 거, 이번엔 검으로 눌러버리면 되지!"

헥토르는 대답이라기보다는 혼자 중얼거리듯 말했다.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겠지......."

에키온이 혼자 흥분해서 식식거리다가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탁자를 두드렸다.

"그런데 형, 형도 이솔렛 님을 좋아했던 거야? 리리오페를 좋아한 것이 아니었어?"

헥토르는 주먹질을 해서 아픈 오른손 대신 왼손으로 빵을 집어먹으며 무표정하게 대꾸했다.

"난 리리오페 쪽이 더 좋아."

"그런데 왜 그렇게 이솔렛 님을 열심히 찬양했어?"

"그게 좋은 방법이니까 그렇지."

에키온은 머리를 굴려 보았다. 그래도 이런 점에서는 종종 형보다 나았었는데, 지금은 마땅한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쉽게 표기하고 형에게 물었다.

"잘 모르겠어. 이솔렛 님한테 관심이 없으면 다프넨 녀석이 뭘 어쩌든 무슨 상관이야? 그냥 놀려대는 걸로도 충분하잖아."

헥토르는 입을 벌리다가 입술 찢어진 곳이 아파서 얼굴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갑자기 바보가 됐니? 이솔렛은 돌아가신 일리오스 사제님의 딸이야. 그 분의 재능이며 지식을 모두 물려받았어. 그런 그녀에게 사귀는 사람이 생긴다면 그 여자의 지위가 갖는 장점들이 다 누구한테 갈 것 같냐?"

"아......."

에키온이 놀라서 입을 벌리고 있는 동안 헥토르는 빵을 마저 삼킨 다음 바구니에 든 사과를 하나 집어들어 반으로 쪼갰다. 입을 크게 벌리지 않고 한 입 베어 문 그가 이어 말했다.

"사람들은 나우플리온 사제님의 제자가 다음 번 검의 사제가 될 거라고 말하지만 내 생각은 틀려. 나우플리온 사제님은 오랫동안 섬을 비운 문제도 있고, 또 주위에 자기편이라고 데시 사제님하고 모르페 사제님을 빼면 전혀 없다시피 하지. 데시 사제님은 다 늙어서 은퇴할 때가 됐고, 모르페 사제님은 괴짜라 섬의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 거기다가 소문대로 나우플리온 사제님의 몸이 아프다면 길게 갈 게임도 아닌 거라고. 섬사람들은 모두 일리오스 사제님을 그리워해. 그분이 가장 훌륭한 사제님이었다고 다들 말하지. 그리고 사람들의 그런 향수는 모두 이솔렛에게 집중되어 있어. 그래서 그녀가 지금처럼 성녀, 공주의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던 거야. 그러니 다음 검의 사제가 궁금하다면 이솔렛의 곁을 잘 살펴보면 되는 거야. 즉, 이솔렛을 차지하는 사내 말이지."

실로 놀라운 시각이었다. 에키온은 눈을 크게 뜨며 소리쳤다.

"그렇다면 형도 이솔렛 님을 놓쳐선 안 되잖아?"

헥토르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솔렛 같은 여자는 감당하기 힘들지. 너무 영리하고 잘난 여자를 말 듣게 길들이려면 피곤한 노릇이거든. 난 그런 번거로운 일은 하기 싫어. 리리오페야말로 지위로 보나 다른 조건들로 보나 나하고 딱 맞는 짝이야."

"그러면?"

"이솔렛은 평생 처녀로 있어 줘야겠지. 아니면... 그 후광을 벗겨버리거나."

잔인한 시각이었다. 에키온조차도 물컵을 든 채 말이 없었다.

고요한 밤이었다. 잠든 나우플리온의 숨소리말고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다프넨은 혼자 잠들지 못한 채 깨어 있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잇었으나 나우플리온의 숨소리를 들을 때마다 생각은 한 가지로 돌아갔다.  

자신이 그를 슬프게 한 것일까.

모르페우스 사제를 찾아갔을 때 나우플리온의 태도는 전과 같지 않고 어딘가 서먹해 보였다.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둘은 저녁을 먹었어야 정상이었지만, 나우플리온은 피곤하다며 식사도 거르고 그냥 잠자리에 들었다. 혼자 식사를 끝낸 뒤 잠시 귀를 기울여 본 다프넨은 나우플리온이 그 때까지 잠들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말을 걸지는 못했다.

잠을 자려 애써 보았지만 잘 되지 않았다. 나우플리온이 결국 잠들었다고 생각될 무렵, 그는 침대에서 빠져나와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오랫동안 힘들어하며 여러 가지 생각을 했다.

어젯밤 생각도 났다. 꿈을 꾼 것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아름다운 밤이었는데, 지금은 그런 기억이 오히려 그를 안절부절못하게 했다. 과연 잘한 일이었을까. 이 모든 불편한 심정의 원인은 뭘까.

눈앞에서 흰 옷자락이 흔들리는 것을 본 듯했던 것은 그쯤이었다.

사륵. 

반투명한 옷자락이었다. 곁으로 다가와 내려앉았다.

[왜 힘들어하니.]

다프넨은 그 자리에 못박혔다. 처음이 아니라고 해서 두 번째에 익숙해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오른쪽 귓가에서 얕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다프넨은 가까스로 중얼거렸다. 

"웃지 마......."

[네가 겁내는 걸 보니까 재미있다. 웃지 않을 수가 없는걸.]

이번에는 똑똑히 말했다.

"웃지 말라니까."

형체는 점차 뚜렷해졌다. 희고 치렁한 웃옷을 걸친 연한 금발의 소년이 그의 눈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앉아 있었다. 그는 손가락을 쳐들고 있었다. 투명한 손가락 너머로 그의 흰 뺨이, 그 뒤로는 어두컴컴한 곳에 놓인 탁자까지 다 보였다.

[안 웃을게. 그런데 내가 반갑지 않은 거야?]

몇 번이나 봤다고 이렇게 친근한 체 하는 거지? 요령부득의 상황에 처해 다프넨은 대답 없이 입술만 약간 움직이고 있었다.

[얼른 반갑다고 말하라고, 유령은 잘 토라져.]

이거야말로 반 협박이 아닌가?

"바... 반갑구나. 그렇지만 오기 전에 예고라도 좀 해줘. 등에 식은 땀이 흘렀다고."

[어떤 식으로? 네가 정하면 앞으로는 그대로 해 줄게.]

"그러니까...아니, 앞으로도 계속 나타나겠다는 소리야?"

엔디미온이 갑자기 팔짱을 끼며 고개를 홱 돌리더니 말했다.

[흥, 유령 토라져 버렸어.]

절반은 농담, 절반은 진담. 귀여운 친구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래도 상대는 유령인지라 다프넨은 긴장을 풀려고 노력하며 고개를 끄덕끄덕거렸다. 

"아, 아냐, 자주 와 줘. 넌 재미있는 친구야. 네게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어. 저번에 내게 보여준... 그 영상은 뭐였니?"

아무 얘기라도 꺼내 관심을 돌리려 한 건데, 말하고 보니 스스로 가장 묻고 싶었던 핵심을 찌른 셈이 되었다. 엔디미온은 토라진 체 하던 도중에도 상대방의 표정이 변하는 것만은 놓치지 않았다.

[너, 이 세상에 돌아와 보니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흘렀었지?]

확실히 그랬었다. 다프넨은 고개를 끄덕였다.

"닷새도 넘게 지났었다고 하더라고. 내가 실종된 후로."

[넌 그 동안 속에서 잠을 잤잖니? 그곳은 '알의 동굴'이라고 하는 곳인데 본래 금방 죽은 혼들을 오래오래 재우는 곳이야. 그렇게 하면 그들이 살아 생전 갖고 있던 강렬한 기억들이 서서히 응어리져 작은 알, 즉 구슬들로 변하게 돼. 그렇게 함으로서 혼들은 자신의 사념을 빛 바랜 형태로 간직하게 되고, 현실 세상에 개입할 의지를 잃게 되는 거지. 그들의 구슬은 잘 보관해야 돼. 초반에 자칫 깨뜨렸다가는 그 안에 든 기억이 무엇이냐에 따라 큰 재앙을 부를 수도 있어. 왜냐면.......]

엔디미온은 무표정한 상태로 눈을 크게 떠 보였다.

[혼의 세상에서는 기억이 곧 실재거든. 기억의 주인이 어떻게 스스로의 감정을 다스리냐에 따라 그 안의 악이, 고통이, 사고가, 다시 한 번 일어나 버릴 수도 있어.]

"그럼 내 발치에 있던 구슬들은......?"

[네 구슬들은 불투명했지? 넌 아직 죽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거야. 또 그래서 그 구슬들이 도리어 네게 여러 가지 예지몽을 보여주기도 했지.... 어쨌든 망자의 세상 속에서 산 자가 머물기에 가장 안전한 곳이 그곳이기 때문에 널 거기에서 자게 했지만, 동굴 자체의 힘은 어쩌는 수가 없었어. 그래서 네 기억의 알들이 만들어졌어. 정확히는 동굴 곳곳에 동그랗게 맺힌 것을 내가 모아다 놓았어.]

"그러면... 나도 내 기억을 잃게 되는 거야?"

다프넨은 심한 당혹감과 혼란을 느끼며 그 말을 해싿. 그러나 엔디미온은 걱정 말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넌 살아 있기 때문에 알의 동굴에서 잔다고 해도 기억을 잃을 수는 없어. 하지만 네가 그 기억에 대해 갖고 잇는 감정은 약간 바뀌었을 지도 몰라. 아주 약간, 그리 큰 영향은 없을 거야. 그러니까 네가 그 때 보았던 영상은.......]

다프넨은 갑자기 날카로운 목소리로 낮게 외쳤다.

"난 그 기억을 바꾸고 싶지 않아! 조금도!"

니들그래스의 벌판과 그를 부르던 형의 모습.......

엔디미온은 가만히 다프넨의 눈을 보고 있더니 약간 슬픈 듯한 어조로 말했다.

[네가 가진 기억이 영원히 변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하니? 그것은 이미 변했어. 네가 알의 동굴에 들어가기도 전에, 이미 오래 전부터, 그리고 지금도 계속 변하고 있어.]

엔디미온의 빛깔 없는 눈동자 속에 든 작은 빛이 좌우로 살짝 움지였다.

[그때 본 네 기억...아마도 네 형제였지? 네 끈질긴 집착이 이미 죽은 그를 쉬지 못하게 붙들고 있는 것 같았어. 그가, 죽은 후에도 망자의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동생을 끊임없이 돌보려 애쓰고 있다고 생각해 봐. 그래, 다시 말할게. 그 기억을 가진 건 너지만, 그때 새삼 다시 본 옛 모습은 네게 뭔가 다른 감정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나? 그것이 지난 일이기 때문에, 돌이킨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안타깝고, 고통스럽고, 더욱 간절하면서도, 절망적이지 않았니?]

"......."

[그게 네 기억이긴 해도 넌 그 안에서 단지 구경꾼이었을 뿐이고 그 안에 속해 있을 수는 없었을 거야. 그리고 또한 네 스스로 거의 잊고 있던 기억이기도 했을 거야. 난 네게 기억을 보여주기 위해 구슬을 깨드렸지만 살아 있는 너의 기억이 사라진 것도, 네 삶 어딘가가 달아진 것도 아니야. 그러나 네가 거의 잊었던 그 기억, 그걸 다시 보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무언가가 변했지. 넌 살아 있어. 살아 있는 자는 언제나 변해. 죽은 자는 다시는 변할 수 없지만.]

다프넨은 대답할 수가 없었다. 수긍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의 말이 옳다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었다. 그가 예프넨에 대해 갖고 있는 감정이 몇 년 전, 그와 헤어졌던 당시의 그것과 같은가? 또는 그 이전에 함께 살던 때와 같은가?

인정하기 싫었다. 그러나 기억은 점차 바래가고 있었다.

그 자리를 새로운 기억들이 채우고 있었다. 이를테면 어제 본 별밤과 같은.......

[그 이야기는 그만두자. 그런 이야기를 하려고 힘들게 널 찾아온 것이 아니야. 네가 특별한 검의 힘을 빌려서야 공간을 넘어올 수 있었던 것처럼, 나 역시 이곳에 머무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야.]

그제야 설핏 정신이 들었다.

"넌 어떻게... 온 건데?"

[우울하게도... 이 일에 내가 가진 능력은 하나도 소용이 없었지. 내가 공간을 넘어와 여기 있을 수 있는 건 전적으로 네가 남기고 간 기억의 알들 때문이야.]

언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 구슬들, 기억의 알들에는 네가 남기고 간 이 세상의 고리들이

들어있거든. 방금 전 내가 나타났을 때 네가 하고 있던 생각이 뭐였니? 죽은 자의 세상에 남겨진 구슬들 가운데 하나가 그런 너와 반응을 일으키면서 문을 열어 주었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잘 기억이 안 나."

[어쨌든 그건 중요한 일이 아니지. 일단 말할게. 지금 멀지 않은 곳에 네게 아주 위험한 존재가 있어.]

너무 갑작스런 말이라 다프넨은 당황하는 것조차 깜빡 잊고서 되물었다.

"응, 뭐라고?"

[너를 집어삼키고도 남을 거대한 증오의 입을 가지고 있으니 조심해. 하지만 아무리 피하려 해도 그건 결국 너를 찾아낼 거야. 왜냐면 너는 검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렇더라도 조심해. 넌 아직 죽을 때가 안 됐지만, 산 자가 잃을 수 있는 것은 생명말고도 많지.]

잠시 잊었던 모양이었다. 엔디미온이 '죽을 때가 아니지만...'이라고 말하는 순가, 그가 이미 죽은 자라는 것이 다시금 떠올랐다. 이미 죽은 자가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것만큼 실감나는, 그리고 진실에 가까운 이야기가 또 있을까?

양 뺨에 소름이 오소소 돋는 느낌이 들었다.

"너... 그런 것을 미리 알고 느끼는 것도 유령의 특권이니? 그렇다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도와줄 수는 없는 거니?"

[일어날 일을 막는다고? 난 그것이 언제, 어떤 식으로 일어날지도 몰라. 다만 그런 사건이 너의 시간 주위를 떠돌고 있다는 것만을 느낄 뿐이야. 더구나 앞으로 또 너를 이렇듯 찾아올 수 있을지도 나도 장담 못해. 어떤 때, 내가 네가 남기고 간 기억의 알들을 들여다보고 있을 때, 그 순간 네가 그 기억과 연결되는 생각을 떠올린다면 다시 한 번 네게 모습을 드러낼 수 있을 지도 모르지. 그렇다 해도 나는 너를 만질 수조차 없어.]

그러면서 엔디미온은 마룻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반투명한 흰 옷자락이 날개처럼 끌려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잠시 시선을 거두고 있던 주위의 익숙한 사물들을 문득 느끼기 시작하면서, 그런 엔디미온의 모습이 더없이 낯설어 보였다.

"벌써, 가는 거야? 난......."

많은 이야기를 하지도, 많은 것을 묻지도 못했다고 말하려 했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그들 둘은 분명, 아직 친구는 아니었다. 그런 그에게 자신은 지나치게 우호적인 역할만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엔디미온은 다프넨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양 말했다.

[내가 다시 오지 않을까 봐 두렵니? 네가 네 힘으로 날 부를 수 있는 방법도 있어.]

"뭐지? 그게 뭔데?"

[가끔 처음 접한 상황에서 과거의 그림자를 느낄 때가 있지 않나? 한대 본 일이 있는 양, 들은 일이 있는 양, 그렇게 기억의 충돌을 느낄 때가 있지 않니?]

가끔 그런 것을 느낀 일은 있었지만, 그냥 착각일 거라고 생각하고 말았었다. 그보다 다프넨이 더 낯설게, 그리고 이상하게 느꼈던 것은 어느 순간 갑작스레 멋대로 찾아오는 예지였다. 과거가 현재에 겹쳐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이미 겪은 양 느끼게 되는 예지.

그러나 다프넨은 복잡한 설명을 생략한 채 말했다.

"있어."

[네 안에 잠들어 있는 기억의 알들 중에는 아주 오래된 시절의 것들도 있지. 네가 태어나기 전의 것들조차도. 그런 것이 갑자기 인지되는 것은 현실의 무엇이 과거의 기억을 강렬하게 건드리기 때문인 거야. 즉, 기억의 알들이 요동치는 거지. 만일, 네가 앞으로 겪게 될 현실이 과거의 어떤 기억을 아주 세게 내리치거나, 찌른다면, 그래서 그 구슬이 깨져버린다면, 그리고 그 구슬이 내게도 있는 것이라면.]

엔디미온은 천천히 뒷걸음질치다가 문을 등진 채 잠시 멈추어 섰다.

[그 순간 나도 너를 찾아올 수 있을 거야.]

한 걸음.

제멋대로 찾아왔던 유령 소년은 문 뒤로 사라져 버렸다.

2. 함정에 빠지다

"각하, 제가 왔어요."

섬의 남쪽, 볕 바른 곳에 지어진 야트막한 집에는 드나드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한 달에 두 번씩 여섯 명의 사제들이 정기적으로 방문하게 되어 있었고, 가끔 특별한 일이 생기면 평소에도 이곳에서 모이는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 외에는 하루 한 명의 방문객도 없는 집이었다.

마을에서 약간 떨어진 곳이긴 했지만 마을 밖이라 할 만한 위치는 아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시간을 들여 멀찍이 이곳을 비켜갔다.

"들어오너라."

집 안에 들어가자마자 볼 수 있는 건 신발을 벗어놓는 곳뿐이었다. 그 너머에 다시 한 겹 둘러쳐진 문이 있었고 그 안쪽에서 대답이 들렸다. 리리오페는 신을 벗고 안으로 들어갔다.

세로로 길쭉한 방의 안쪽에는 이마 꼭대기에 새치가 희끗거리는 마흔 줄의 남자가 있었다. 의자가 아니라 방의 바닥에, 짐승 가죽으로  된 깔개를 깔고 앉아 있었다.

리리오페는 대뜸 상대방을 다른 이름으로 불렀다.

"아빠!"

남자의 주름진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는 천천히 팔을 벌려 보였다. 

"어서 이리 오렴."

리리오페는 다람쥐처럼 잰걸음으로 다가가더니 아버지의 품에 푹 안겼다. 깔개 위에 무릎을 꿇은 자세였고 남자도 몸을 일으키지 않은 채였다. 둘 다 그리 편할 듯 보이지는 않는 자세였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포옹을 마친 부녀는 다시 물러앉았다.

"아빠, 오늘은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왔어요."

"그래. 하지만 이렇게 자주 오면 안 되는 것 알고 있지?"

"아아, 빨리 스콜리를 졸업했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아빠가 보고 싶을 때마다 실컷 보러 오죠."

딸은 아버지에게 또 아버지는 딸에게 전폭적인 애정과 신뢰를 보이는 듯했지만 부녀는 전혀 닮은꼴이 아니었다. 딸이 가진 영롱한 눈동자며 예쁘장한 입매, 그림 속의 천사처럼 귀여운 고수머리 같은 것을 아버지의 모습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단지 창백한 잿빛의 길쭉한 얼굴과 처진 뺨,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검은 눈동자가 있을 따름이었다. 

"서두르지 말아라. 너는 귀한 아이니까."

귀한 아이. 그 말의 어감에 어울리지 않게 리리오페는 가볍게 눈짓하며 씩 웃어버렸다. 그러더니 곧 말했다.

"아빠, 내가 아빠 말대로 귀한 아이라면 진심으로, 정말정말 갖고 싶은 것은 결국 가질 수 있는 거겠죠?"

"조금만 갖고 싶어도 가질 수 있지. 무엇이 갖고 싶은데 그러느냐?"

"응, 글쎄요. 하지만 만일을 대비해서 물어봐요. 제가 어떤 사람을 아주 많이 원한다면, 그 사람은 제 것이 되나요?"

아버지는 잠시 침묵을 지키며 딸의 고수머리를 쓸어 넘겨주었다. 그러더니 생각에 잠긴 듯 양쪽 입끝을 번갈아 올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아빠가 듣기에... 그 말은 혼인에 대한 얘기 같구나. 그렇지?"

리리오페는 싫은 소리를 들었다는 듯 고개를 홰홰 내저었다.

"아직은 이르다고요! 그냥 물어보는 것뿐이에요. 나는 아빠, 아니 각하의 귀한 아이잖아요. 어디까지 마음가는 대로 해도 좋은지 궁금해서 물은 거라고요. 지금은 하면 안 되는 일이 너무 많지만, 스콜리를 졸업해서 열 다섯 살의 정화 의식을 받는 다음이라면 절 막을 사람은 아빠밖에 없잖아요?"

"물론 그렇기는 하다만, 너무 다른 사람의 의사를 무시하고 억지를 부려서는 안 된다. 그러면......."

"아빠처럼 존경받는 섭정이 못 되겠죠. 그렇죠?"

"......."

리리오페의 눈에는 이제 장난기가 없었다. 섭정 스카이볼라는 그런 딸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작은 소녀는 분명히 확고한 자신감을 가지고 '섭정'이라는 단어를 발음했다. 섬사람들에게는 의문이 대상이자 두려움의 대상, 그리고 존경의 대상이기도 한 최고 결정자 섭정 각하는 사라진 왕을 대신해서 섬의 미래를 결정하는 사람이었다. 그것도 섬사람들이 전혀 알 수 없는 방식으로.

누구나 아는 일이지만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되는 일, 섭정의 아이는 섭정이 된다....... 그러나 그 아이가 열 다섯 살이 될 때까지는 누구도 그 아이를 특별히 취급해서는 안 되도록 정해져 있었다.

그리고 리리오페는 섭정 스카이볼라이 하나뿐인 자식이었다.

아주 어렸을 때는 리리오페도 그런 저런 사정들을 잘 몰랐고, 그래서 자신의 위치에 대해서도 명확한 인식이 없었다. 그런 까닭에 섬에서 요구되다시피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평범하고 천진하게 자라났다. 그러나 대략 작년부터 그녀는 서서히 스스로의 입지를 깨닫고 그것을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책임감보다 자부심이 먼저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리리. 아빠한테 솔직히 말해라. 헥토르가 싫은 거냐?"

리리오페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그가 싫진 않아요."

"그러면?"

"하지만 말이죠, 헥토르 오빠와 저는 어려서부터 어울려 자랐고, 언제부턴가 서로 좋은 짝이 될 거란 식으로 누구나 다 말하고 있잖아요. 모든 사람들이 다들 입모아 떠드는 그런 얘기, 그런 거야말로 말할 나위 없이 시시한 결론이잖아요? 진부하다고요, 그런 혼인 따위."

"얘야......."

아버지가 자기 말을 이해할 리 없다고 생각한 소녀는 얼른 고개를 흔들며 이어 말했다.

"다른 가능성도 있을 수 있다고 스스로 생각해보고 싶어요. 그런 식으로 하니 기분도 좀 신선해지는 것 같고요. 그러고 나서 진부한 결론을 따를지 어쩔지 생각해 보겠어요."

섭정 스카이볼라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 '옛 심정의 원칙'을 따를 참이라면 아버지는 반대다."

리리오페는 약간 움찔하는 표정이더니 더 대꾸하지 않았다. '옛 섭정의 원칙'이란 가장 고귀한 위치에 있는 섭정이 가장 비천한 위치에 있는 섬사람과 결혼함으로서 섬 전체의 균형을 바로 한다는 오래된 관습이었다. 그러나 이미 사라진 지 오래된 이야기였다.

그날은 운 나쁜 아침으로 시작되었다.

늦게 일어난 다프넨은 나우플리온이 차려 놓은 아침을 먹다가 무심결에 팔로 오트밀 컵을 쳐 엎지르고 말았다. 바지 위로 흘러내리는 오트밀을 내려다보며 당황해 있는 동안 맞은편에 앉은 나우플리온이 잠이 부족한 눈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일어섰다. 수건을 가져다 줄 요량이었는데 어찌된 셈인지 그의 옷자락이 테이블에 걸렸고, 허술한 테이블이 삐걱거리면서 나머지 한 잔마저 엎어져 버렸다. 반 이상 남아 있던 오트밀이 다 쏟아졌다.

"허, 이것 참."

두 잔의 오트밀이 나란히 줄줄 흘러내리는 꼴을 보고 나우플리온이 혀를 차며 한 말이었다. 수건을 가져오긴 했지만 몇 번은 빨아서 다시 닦아야 할 듯했다.

다프넨은 입을 다물고 있었다. 속에서 무언가 이상한 것이 꿈틀거리며 올라오려 하고 있었다. 불길함, 이상한 예감. 

"너나 나나 정신이 없는 모양이다. 오늘 같은 날은 쓸데없는 분쟁이 생기지 않도록 조심해라."

나우플리온에게도 뭔가 느껴지는 것이 있는 것일까.

집을 나온 다프넨은 스콜리로 갔고, 오전 내내 별다른 일 없이 수업을 받았다. 점심 시간에도 별 일은 없엇다. 오이지스와 몇 마디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리리오페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수업이 끝나자 이솔렛과 늘 만나는 산 위로 올라갔다. 비탈 위의 풀밭에 이르렀을 때 그를 기다리는 사람이 자리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다프넨은 잠시 기다리고 있었다. 조금 후 생각나는 것이 있어 절벽 위의 마법 계단으로 가 보았다. 오랜만에 계단을 밟고 올라가 샘이 있는 꼭대기까지 갔다. 그러나 거기에도 이솔렛은 없었다.

"네 주인은 어디에 있니?"

물을 쪼아먹고 있는 흰 새 한 마리를 보고 다프넨은 별 기대 없이 물어 보았다. 하긴 사실을 말하자면 이솔렛은 새들의 주인도 아니었다. 

푸드덕. 

새는 날개를 펴고 아래로 날아갔다. 그리고 풀밭을 지나 보이지 않는 곳으로 사라졌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가 다프넨은 일어섰다. 천천히 풀밭으로 내려와 새가 날아간 방향을 바라보다가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어 이솔렛의 집이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바로 새가 날아간 그 쪽이었다. 

산기슭에 있는 이솔렛의 집이 가까워질 무렵, 그는 예상치 못한 사람들의 모습을 발견했다. 그 자들은 비킬 아래에서 걸어 올라오고 있었다. 마치 이솔렛을 찾아오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들은 헥토르와 에키온을 비롯한 일단의 소년들이었다.

다프넨과 그들은 이솔렛의 집 앞에서 딱 마주쳤다.

"마침 당사자가 잘 와 주었군."

헥토르가 소리 높여 입을 열었다. 뭔가 단단히 마음먹은 듯한 목소리였다. 다프네은 전날 일을 떠올리며 딱딱하게 대꾸했다.

"무슨 볼일이지."

"마침 이솔렛 님한테 물어 보려던 참이었어. 너도 같이 사실을 확인 gon 준다면 더할 나위 없겠고 말이야."

"뭔 알기를 원하는지 모르지만, 네게 해줄 답 따위는 없어."

"아, 그럴까? 그러면 역시......."

헥토르는 이솔렛의 집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갑자기 외쳤다.

"이솔렛 누님! 제 아버지께서 누님이 곧 시집을 가게 되는 거냐고 물으시던데요! 사실인가요?"

갑자기 석상이 되기라도 한 듯한 느낌이었다. 동시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사실이라면 축하할 일이겠죠! 누님은 부모님을 다 잃으셨으니 저희 아버지께서 대신 보호자 역할을 해주시겠다고 그러시네요!"

지금 그가, 무슨 행동을 해야 옳은 것일까.

회오리치는 뜨거운 덩어리가 가슴과 목을 꽉 메웠다. 언젠가 한 번 느껴본 감정이었다.

에키온을 비롯한 다른 소년들은 모조리 침묵하고 있었다. 오직 헥토르만이 냉소적인 표정으로 계속해서 외쳐댔다.

"솔직히 전 누님이 이런 식으로 혼처를 찾으실 줄은 몰랐습니다! 누님답게 좀더 점잖은 방식이 아닐까 생각했었죠! 게다가 저런 어린 녀석일 거라고는 더더욱 상상도 못했고요! 어째 꼴이 좀 우습지 않습니까?"

"너......."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헥토르의 멱살을 잡으려는 다프넨을 다른 소년 전부가 달려들어 가두어 버렸다. 몸부림쳐도 소용이 없었다. 대여섯 명이나 되는 소년들이 그물에 걸린 사냥감을 다루듯 그의 몸을 움켜쥐고 있었다. 세 개나 되는 손이 그의 입을 막아 버렸다.

헥토르는 그런 꼴을 흘끗 쳐다보고 미묘한 미소를 입가에 올렸다.

일부러 그의 분노를 돋구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더한 입에서 더한 목소리가, 더한 내용이 쏟아져 나왔다.

"뭐, 오랫동안 혼자 지내시긴 했지만 아직 혼기라고 하기엔 이른 나이잖습니까! 아무리 좋은 사내가 나타났다 해도 그렇게 몸을 함부로 다루시면 안되죠! 마을 사람들의 눈도 있는데 말입니다! 그러다가 혼인도 하기 전에 몸에 표시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러십니까?"

이솔렛이 아니라 다른 어떤 여자도 용납할 수 없을 폭언이었다. 미칠듯한 분노와 그를 얽어 맨 손들 속에서 싸우고 있는 다프넨의 머릿속에서는 계속해서 한 가지 말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용서하지 않아... 결코 용서하지 않아, 죽일 테다, 네놈을 죽여버릴 테다!

"하긴 섬에서 그런 경우가 처음도 아니죠. 하지만 돌아가신......."

거기까지 말한 순간이었다.

다프넨은 잡았던 소년들은 갑자기 엄청난 힘이 그들의 팔을 밀치고 잡아 꺾는 것을 느꼈다, 실제로 다프넨의 오른손을 잡았던 한 소년은 손목뼈가 부러져나갔다. 믿을 수 없는 기세로 움켜잡은 손들을 펼쳐 버린 다프넨은 헥토르의 턱을 향해 곧장 주먹을 내질렀다.

"!"

그 순간 헥토르가 빠르게 피하지 않았더라면 그의 턱은 산산조각으로 부서지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헥토르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듯 재빠르게 몸을 숙였고 다프넨의 주먹은 그의 이마를 스치는 데 그치고 말았다.

하지만 곧 헥토르는 흠칫 하며 놀랐다. 살짝 스친 것뿐인데 이마의 살갗이 세게 긁힌 것처럼 벗겨져 있었다.

조금 전, 다프넨은 헥토르의 입에서 결코 나와서는 안될 말을 막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만일 이솔렛이 어떤 모욕도 참고 견딜 수 있는 사람이라 해도, 그녀가 결코 견뎌낼 수 없는 것이 하나 있었다. 함께 지낸 그 날 밤에 충분할 정도로 느낀 바였다. 그녀가 어떤 상황에서도 간과하지 않을 한 마디, 그 말이 그녀의 귀에 들어가는 순가 누구도 그녀를 막을 수 없을 터였다.

죽은 일리오스 사제를 모욕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을 막은 것만으로 끝날 일은 이제 아니었다. 죽기 전에 반드시 되갚아야 할 말들, 한때 어리고 약해 돌려보내지 못했던 그 모든 원한들이 갑자기 모조리 폭발한 것처럼 그의 머릿속을 세차게 올리고 있었다.

아무 것도 후회하지 않아, 이 상황을 참는다면 진네만 가문 사람이 아니다!

아버지가 불타는 저택을 바라보며 했던 그 말처럼.......

잊혀진 줄로만 알았던 이름이 그에게 권리를 부여했다. 섬의 순례자가 되고자 몇 달간 애써왔던 그는 이 순간 다시금 투쟁의 나라 트라바체스의 사내로 돌아와 있었다. 이미 손을 놓은 채 멍청해져 버린 소년들, 이마의 상처로 당황해 있는 헥토르, 그리고 집 안에서 말이 없는 이솔렛, 그들 모두가 듣는 가운데 그는 목이 터져라 소리질렀다. 한때, 같은 트라바체스 사내인 예프넨이 그랬던 것처럼 그의 옛 이름을 당당히 외쳤다.

"나는 보리스 진네만이다! 너에게 정식으로 결투를 신청한다."

그곳에는 두 사람뿐이었다. 다른 사람은 그들이 허락하지 않았다.

헥토르는 에키온을 비롯한 다른 소년들도 모두 물러가게 했다. 이 순간을 기다렸던 것처럼 그는 검을 준비해 왔다. 다프넨의 것도. 

여름 치고 차가운 바람이 부는 산 위의 빈터였다. 둘에겐 신호가 필요 없었다. 입회인도, 구경꾼도 필요 없었다.

최초의 격돌, 날카로운 소음이 산중턱에 울려 퍼졌다.

챙! 챙! 

"후......."

둘의 위치가 반대가 되어 있었다. 두 검이 상대의 안과 밖을 연달아 두 번 내리친 뒤 똑 같은 동작으로 자세를 돌린 탓이었다. 이는 초반 연무의 자세였으나 이어서 계속되지는 않았다. 두 검 모두 다음 순간에는 상대의 급소를 노리고 있었다. 

츠캉!

이미 소년 대결이라고 보기엔 무서운 살기가 감도는 상황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의심할 바 없이 서로를 죽이려 하고 있었다. 짓밟힌 풀들이 아릿한 냄새와 함께 쓰러져갔다.

헥토르의 검은 심장을 겨냥했으며, 다프넨의 검은 목을 노렸다. 한쪽이 방어하지 않으니 둘 다 다치는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옷이 긁혀 나가고 가느다란 상처 끝에 피가 흩날렸다. 계속적으로 두 검이 읽히고, 밀어내고, 다시 마주치며 힘 대결로 들어갔다. 불리한 것을 아는 다프넨은 재빨리 검을 미끄러뜨리며 한 박자 물러났다가 손목을 찌르려 했다.

그러나 빗나갔다. 헥토르의 검이 기세를 잡아 다프넨의 왼쪽 어깨를 베어버렸다. 투둑, 핏방울이 풀잎을 적셨다.

그러나 그 정도 상처로는 아픈 것조차 느끼지 못했다. 다프넨이 팔을 꺾으며 뒤로 휘두른 검이 헥토르의 턱을 그으며 뺨까지 이르는 상처를 냈다. 둘은 급히 뒤로 물러났고, 망설임 없이 다시 달려들려 했다.

검이 부딪치고.......

"그만두지 못해!"

둘 다 그 목소리를 들었다. 그러나 아무도 멈추지 않았다. 헥토르가 펄쩍 뛰어 달려들며 검을 두 번 내리쳤고, 그 검을 두 번 다 ark은 다프넨은 바로 아래를 휩쓸 듯 공격해 들어갔다. 당장 결판이 날지도 모를 중대한 순간이었다.

켄 레 아사 나이드!

갑자기 팔이 나무토막처럼 딱딱하게 굳어졌다. 버티려 했지만 견디지 못하고 다프넨은 검을 떨어뜨렸다. 앞을 보니 헥토르의 상태도 마찬가지였다. 이어 다리가 후들거리더니 둘 모두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이런 겁도 없는 놈들을 봤나!"

달려와 주문을 외친 것은 메달의 사제 테스모풀로스였다. 그 뒤에는 에키온 패거리인 몇 명의 소년들과 더불어 리리오페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파랗게 질려 어찌할 바를 모르는 얼굴이었다.

대강 짐작이 갔다. 스콜리가 끝난 후 헥토르 일행의 움직임을 알게 된 리리오페가 테스모 사제를 불러오는 데 걸린 시간이 방금까지였을 것이다.

"리코스! 가서 두 녀석의 검을 이리로 가져와라!"

리코스는 머뭇거리다가 달려가 바닥에 떨어진 두 자루의 검을 잡았다. 다프넨은 헥토르의 얼굴을 보았다. 그는 리코스를 올려다보며 화가 난 기색이 역력했다.

다프넨은 화가 나지 않았다. 어느 정도 머리가 맑아지고 있었다. 절반 정도, 평소의 자신으로 돌아온 그는 조금 전 자신의 분노를 좀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이날의 일을 반드시 결론짓고야 말겠다는 결심도 확고히 섰다. 순간적인 울분으로 시작한 일이 아니었다. 냉정하게 바라볼수록 더욱 간과할 수 없는 일이고, 갚아야 할 빚이었다.

타고난 핏줄의 본성이 서서히 눈뜨고 있었다. 트라바체스 사람은 대가 없이 화해하지 않는다. 명백한 적은 오래 걸리더라도 반드시 친다. 지금의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다음과 그 다음을 노린다.

그리고 결코 잊지 않는다.

그가 묻어두려 했던 진네만의 이름은 내킨다고 멋대로 내던져 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소년 시절의 그는 어느 이름이나 취할 수 있고 어느 땅에서나 비슷한 모습으로 자라지만, 성장하면 결국 트라바체스의 진네만이 되는 것이다.

"후후, 그랬단 말이지?"

씩씩대며 한바탕 말을 마친 에키온은 스콜리의 막대호신술 선생을 올려다보며 크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에키온은 왜 자신이 이날 밤 여기까지 와서 보고 들은 이야기를 다 늘어놓고 있는지 몰랐지만 질 선생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따. 그는 에키온이 걸려들 수 있는 모든 길목에서 기다린 셈이었다.

낮에 벌어졌던 일은 이미 빠짐없이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인내심 깊게 전부 다 들어 주었다. 에키온이 교묘하게 왜곡하는 부분도 다 눈치채면서.

다만 질 선생도 헥토르가 어떤 말로 이솔렛을 모욕했는지는 몰랐다. 그에 대해서는 모든 소년이 다 함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프넨조차도 차마 입에 담지 못했다.

"그게 정식 결투란 것을 사제들은 모르더란 말이냐?"

"일부러 말 안 했죠. 아마도 홧김에 칼을 휘두른 정도로만 알고 있을 거예요. 왜냐면, 그걸 말해버리면, 다시는 못하게 할 것이 아니겠어요?"

어눌한 말투 속에 든 핵심을 눈치채지 못할 질이 아니었다. 그는 짐짓 사제들을 탓하는 듯한 어조로 말했다.

"그래, 네 말대로야. 정식 결투란 것은 그런 식으로 멈추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지. 결투란 언제고 끝이 나야 해. 그게 소년들끼리의 것이라 해도 말이다."

"그렇죠! 리리오페 그것이 주제넘게 끼여들지만 않았으면 우리 형이 그 자식을 죽여버렸을 건데!"

에키온이 헥토르에 대해 갖고 있는 신념은 반쯤은 일불 만들어진 면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아직 어린 그는 자신이 만들어낸 신념과 진짜 신념을 구별해 낼 능력이 없었다.

"아마도 그랬겠지. 헥토르의 실력은 섬 안의 소년들 중 제일이니 말이다."

질 선생은 적당히 에키온을 부추기며 잠시 뜸을 들였다. 아니나다를까, 에키온은 약간 말성이는 얼굴을 하더니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선생님, 선생님은 스콜리의 막대호신술 선생님이시고, 막대호신술 실력은 섬에서 제일이잖아요."

"그렇지."

"그러면 무예에 대해서도 검의 사제님 다음가는 권위자시죠?"

"아마도......."

"검술을 비롯해서, 무예를 수호하는 입장에 있으시죠?"

"그럴지도."

"그렇다면 정식 결투가 이런 식으로 억울하게 멈춰졌는데 그냥 두고 보실 거예요?"

"흐음."

"선생님께서 주선하신다면 아무도 뭐라 못할 텐데... 아, 물론 검의 사제님은 빼고요."

"......."

에키온은 눈치를 살짝 본 다음 말했다.

"하지만 검의 사제님은 전적으로 다프넨 그 자식 편이니까 공정한 입장이 아니죠. 그 분의 의견은 무시해도 될 거예요.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그 분이 모르실 때 하면 된다는 거죠."

"흐으음......."

질 선생은 의도대로 일이 착착 되어 가는 것을 보면서도 억지로 중립적인 체 하며 잠자코 기다렸다. 그러나 철없는 에키온이 결국 그의 불편한 곳을 건드리고 말았다. 게다가 자신이 방금 전 한 말에 완전히 모순되는 내용이기까지 했다.

"선생님도 다프넨 녀석이 보기 싫으시죠? 그 자식이 죽어 없어졌으면 좋겠죠? 그 자식이랑 검의 사제님이 한패거리가 되어서 잘난 체 하고 다니는 게 옳다고 생각 안 하시죠?"

너무 정곡을 찌르는 바람에 질 선생은 하마터면 화가 치밀어 이 소년을 밖으로 내쫓을 뻔했다. 그러나 가까스로 울화를 눌러 참으면서 대꾸했다.

"난 결투를 수호할 임무가 있지만 너희들 사이의 문제에 대해 왈가왈부 결정할 입장에 있지는 않다. 난 누구처럼 내 영역이 아닌 곳에 주제넘게 끼여들지 않으니까. 그런 것은 메달의 사제나 궤의 사제에게 가서 묻든지 해라."

에키온은 첫 번째 말만 딱 알아듣고 얼굴이 환해졌다. 그는 얼굴이 밝아지면 미간을 보기 싫게 일그러뜨리는 버릇이 있었다. 지금도 바로 그랬다.

"역시 그래요! 그러니까 선생님께서 다른 사제님들 모르게 장소를 정해 주세요. 그리고 입회도 해 주시고요. 다프넨을 감싸는 건 검의 사제님 밖에 없으니깐 그 애가 죽는다고 해 봤자 그리 귀찮은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예요. 게다가 결투는 걔가 먼저 하자고 그랬다고요!"

이것이 섬의 소년들과 대륙의 소년들을 비교했을 때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었다. 에키온은 그들 손으로 다프넨을 죽인다는 것에 대해 아주 실제적으로 생각하고 받아들이고 있었다. 단순히 싫은 마음에 홧김에 '죽여버리겠다'고 외치는 것과는 이야기가 달랐다. 섬의 아이들은 비록 어리다 해도 불쾌한 자는 죽여 없앤다는 생각을 아주 손쉽게 했으며, 실천하려 덤벼들기도 했다. 사제들의 율법이 막고 있으니 그리 쉽게 실천할 수 없긴 했지만, 마음만은 대륙의 전쟁터에게 죽고 죽이는 어른들과 다를 바 없었다.

이는 옳고 그름을 과격하게 판별하고, 사납게 처벌하는 달여왕 신앙의 부작용이기도 했다.

"네 말을 잘 알겠다."

질 선생은 드디어 자신의 계획을 입밖에 낼 수 있는 때가 왔음을 알았다. 그러나 자꾸만 떠오르는 미소는 애써 참았다.

다프넨이 벌인 일을 이미 전해들은 나우플리온은 말없이 한참 동안 소년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

"다친 데는 괜찮으냐?"

끄덕, 고개만 움직여 한 대답이었다.

"또 할 테냐?"

그것은 '이 녀석, 또 그럴 테냐!"하고 다그치는 아버지의 말투와는 달랐다. 다프넨은 잠시 머뭇거리고 있었다. 트라바채스 사람의 본성이 그에게 거짓말을 권하고 있었다.

"네."

이번에는 그런 목소리에 굴하지 않았다. 나우플리온에 대한 신뢰는 이제 갓 눈뜨기 시작한 본성을 누를 정도로 아직은 강했다.

"이길 자신이 있어?"

"모르겠어요."

그건 확실히 모를 일이었다. 그의 손에 윈터러가 있다면 좀더 쉽겠지만 그것은 아직도 데스포이나 사재의 손에 있었다. 그리고 있다 해도 사용하는 것은 여전히 좀 꺼려졌다. 상대보다 유리하니까 불공평한 결투가 된다거나 하는 문제 탓이 아니라, 나우플리온이 그것의 사용을 금했던 것 때문이었다.

"우울하군."

나우플리온은 그 작던 소년이 섬에 들어온 뒤로도 계속해서 달라지고 있음을 눈치채고 있었다. 소년이란 본래 변하기 마련인 것이라 별달리 마음쓰지 않으려 했었다. 본래 섬에 들어올 때 그가 우려한 것은 소년의 삶이 자신화 너무 밀착되어 버리는 문제였다. 그렇게 된 후 자신의 결정이 소년의 인생을 함부로 좌우해 버릴까봐 그것이 두려웠다.

그러나 사정은 달라져 있었다. 섬에서 소년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 사람은 이미 여럿으로 늘어났고 그 가운데는 자신보다 오히려 상하지 않을까 생각되는 인물까지 있었다. 그 인물의 존재가 그에게 주는 이중적인 씁쓸함은 최근 그를 매우 힘들게 했다. 극복하려 했지만 아직도 완전히 극복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소년은 다시금 달라지고 있었다. 아버지라 해도 한 소년의 삶을 완전히 주재할 수는 없는 법이라 생각해 왔다. 그러나 이 소년은 본래 그와는 아주 먼 별개의 존재, 태생이 다르고, 민족이 다르고, 살아왔던 시대와 생애가 달랐다. 또래의 친구였다면 다른 것을 다름 그 자체로 받아들였을 텐데, 이 소년은 계속해서 그에게 새로운 모습을 보인다.......

"우린 본래 친구였지?"

갑작스런 이야기를 꺼냈다. 다프넨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그를 보았다.

"지금은 아닌가요?"

"아니. 지금도 친구지. 우리가 본래 친구에게 시작했다는 것을 다시 기억해 내려고 그래."

잠시 사이를 두고 한숨을 내쉰 나우플리온이 말했다.

"친구가 친구의 삶에 개입하여 물줄기 자체를 바꿔놓으려 한다는 건 안 될 말이겠지. 그래, 지금의 난 네 결정을 알고 있는 것으로 만족해야겠구나. 하지만 이곳이 섬이라는 사실만은 잊지 말아라. 이곳의 아이들은 어른들과 마찬가지로 위험하거든. 우리를 다스리는 밤하늘의 여왕께서 그것을 원하셨으니 어쩔 수 없는 결과겠지."

다프넨은 눈을 내리깔고 조용히 대답했다.

"알고 있어요."

"더 위험한 건, 내가 네 위험을 간과하진 않을 거란 사실이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겠구나. 하지만 너와 나의 운명이 같은 닻에 묶여있다는 것은 언제고 잊지 마라."

다음날 스콜리의 점심 시간에 다프넨은 에키온으로부터 한 장의 쪽지를 건네 받았다. 일부러 건물 밖까지 돌아 나와 펼쳐 보니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었다.

너도 물론 결투를 계속하길 원하겠지?

서로 상처가 나은 뒤 다시 결판을 짓자.

닷새 뒤, 스콜리가 끝나고 우리가 싸웠던 곳으로 혼자 와라.

새로운 장소로 안내할 테니까.

판정은, 둘 중 하나의 숨이 끊어질 때까지다.

3. 그 정체

"예, 돌려주십시오."

공회당 안의 일곱 원 위에 앉아 있던 데스포이나 사제는 앉은 채로 다프넨을 올려다보다가 천천히 일어섰다. 그리고 잠시 다프넨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돌려주는 것은 어렵지 않단다. 하지만 갑자기 그게 필요하게 된 이유를 말해주지 않으련?"

"별 이유는 없습니다."

다프넨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짧게 말했다. 그러나 데스포이나의 얼굴이 설명을 요구하는 것을 알고 덧붙여 말했다.

"저는 그 물건을 검으로 느끼지도 않습니다. 다만 오랫동안 가지고 있으면서 옛 가족의 분신인 양 생각하던 터라 얼마간 없으니 생각 외로 불안하더군요. 별다른 이유가 없다면 다시 제가 가지고 있고 싶습니다."

데스포이나는 다프넨의 눈을 똑바로 쏘아보며, 그러나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위험한 일에 사용하려는 것은 아니지?"

이런 때 필요한 것이 그가 타고난 핏줄의 힘이었다. 약간의 유혹을 물리쳐 버린 다프넨은 가볍게 미소까지 지으며 말했다.

"위험한 일이 있을 까닭이 없지요. 사제님은 그게 아직 검처럼 보이시나요?"

윈터러의 모습은 여전히 손잡이도 없는 얇은 날 하나, 그대로였다. 데스포이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그러자."

윈터러는 다시 다프넨의 손으로 돌아왔다. 다프넨은 고개를 한 번 깊이 숙여 보인 다음 공회당을 나왔다.

탁, 테이블 위에 천 꾸러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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